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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눈내리는 마을
read 5655 vote 0 2010.10.06 (12:27:17)


김동렬을 통해서 본건,

그 사람의 인격적 완성이 아니다.
이건, 개신교 성도들이, 목사들의 추행들 후에도,
그를 따르는것을 봐도 알수 있다.
진위는 진실의 하부구조였던 거다.

그걸 모르니까, 맨날 진보들은, 얻어터지는거고,
아니면, 강단에서 옥수수 강냉이처럼 말라가는거구.

1) 기술적 진보여야한다.
아이파드 끼고, 조낸 달릴수 있어야한다.
청바지 굳게 입고, 인도 엔지니어, 빠삭하게 디버깅에 능한 프로그래머하고
끝장을 낼수 있어야한다.

2) 미학적 진보여야한다.
자기 선에 대해서는 양보가 없어야한다. 딴건 다 양보해도, 부모, 지연, 학연, 돈.
다 양보해도, 자기 디자인은, 곧죽어도 고집.
그 고집은, 극한을 보고 온 후에 결정된다.
김동렬이, 경주 남산에서 보았듯이,
잡스가, 인도의 타지마할에서 보았듯이,
DK가, 물리학자의 까탈스런 구미에서 보았듯이,

아니라면...그런사람들을 이해하는 사회를 만들어보아야한다.
그 시장을 만들면, 사람은 자동으로 온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0.10.08 (13:14:00)


그러나 역시 최종적으로는 인격적 완성이라고 보오.
그래야 판단을 옳게 하므로....
기술적 진보, 미학적 진보는 인격의 완성에서만 진정으로 그 가치가 발현된다고 보오.
단지 인격의 완성을 종교는 획일화 시키기거나 편의대로 해석하여 이용하려 하기에(혹은 알고도 그 집단이 축구하는 바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거나...) 협소하게 접근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지오.()
[레벨:17]눈내리는 마을

2010.10.09 (09:13:58)

논쟁할 생각은 없지만...

인격적으로 훌륭하다는 척도로 인해서 우리가 얼마나 어려워졌었는지요.
급기야는 그 잣대로 수많은 약자들이 억압당했는지요.

좀 혼란스럽더라도, 아니 혼란을 인정한 자유가 존중되어야하죠.
인격적으로 훌륭해야 손해 덜보도록 '유인'하고,
'자유'로 인해 얻어지는 잉여는 사회적으로 '공증'해줘서 이익으로 돌리구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0.10.09 (14:56:04)

저 역시  날 좋은 토요일 오후에 논쟁할 생각은 없지요.^^
단지 서로의 생각은 내보일 수 있는 거 아닐까 합니다.

"자기 선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어야 한다. 그것을 용납하는 사회, 그런 사람들을 이해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그 사회의 이해의 척도는 결국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사람이 그것을 만드는 것이죠. 진보의 방향, 역사의 방향, 문명의 방향, 문화의 방향을 통해서 미학적 판단을 통해서 말이지요.
과학의 시대를 거쳐 이제 미학의 시대를 열어야 하는데, 과학의 시대는 너무나 많은 것을 파괴하였지만, 인간은 그만큼 진보하였습니다.
그러나 진보한 만큼 인간의 소외도 심화되었습니다.

미학적 절대 기준으로 따진다면 자기선에 절대로 양보가 없어야 최고의 질적인 가치가 나올 것이고 창의적인 형태가 될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인간 개개인이 반드시 그것을 용납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회가 불공정한 구조 이니까요.
그래서 천재가 제대로 기지개를 못펴고 평범한 사람도 더불어 같이 망하는 구조가 되어버린 것이구요.
그래서 "자기 선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어야 한다. 그것을 용납하는 사회, 그런 사람들을 이해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용납되는 사회를 만들려면 개인의 인격이 중요하게 됩니다. 그것은 강한 개인과 연결이 되며, 집단지성과도 연결이 됩니다.
그리고 개인이 타인의 성공이 자신에게도 유익하다는 것을 이해 할 수 있어야 하며, 실제로 서로 호환이 되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개인들 역시 개인의 성공이 사회의 집단의 성공으로 연계할 수 있는 힘을 갖추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이 인격의 완성인 것이지요.

인격의 완성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참고 인내하며 착한 사람, 베푸는 사람도 포함되지만, 그것은 순전히 개인적 차원이고,
개인적 차원의 인격이 집단과 연계될 때 인격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인격은 집단지성과 연계하여 그 틀이 갖추어졌을 때, 그리고 그것이 서로 호환될 때, 소통될 때 인격의 완성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인격이 성격의 선행하는 것이라고 보기에, 인격은 소통을 전제로 하기에 그것은 반드시 외부와 연결이 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기에 개개인들이 그렇게 외부와 연계될 때 그것이 모두 개개인들의 가치와도 연관이 되어야 하고, 거기에서 의미가 발생할 수 있는 구조여야만이 ( "자기 선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어야 한다. 그것을 용납하는 사회, 그런 사람들을 이해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이런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고 그들의 행위나 뻗어감에 대해서 태클 걸지 않고 놓아둘 수 있고 그저 지켜보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러한 틀이 생기면 개인 스스로는 인정하기 어렵거나 용납이 되지 않을지라도 ,혹은 화가 날지라도...
판단은 인격적으로 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이겨내고 합당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틀을 갖추는 것이, 개인의 인격과 공동체의 인격이 서로 호환하는 것이라고 보며,
그것이 한 개인의 인격의 완성이기도 하다고 생각해봅니다.
성격은 별로 안 좋아도 인격적으로 좋은 판단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성격은 개인적 차원이라면, 인격은 반드시 외부와의 소통을 전제로 하므로...인격적 차원에서는 미학적 판단을 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성격도 좋으면 더 좋겠지요. 성격이 좋으면 개인이 스스로를 덜 볶을  테니까요.
성격은 개성과 가깝고, 인격은 인성과 가깝기에...개성의 다름을 인정해줄 수 있는 것이 인성이 아닐까 합니다.
( "자기 선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어야 한다. 그것을 용납하는 사회, 그런 사람들을 이해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이 말의 의미를 풀어본다면,  개성을 인성으로 포용하고, 받아들이고, 존중해주고, 인정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레벨:15]lpet

2010.10.09 (15:37:29)

개인의 인격은 사회적 수준에서 결정되오.
아무리 공맹자 석가부처가 많아도 사회수준이 낮으면 아무 소용없소.

아프리카 동남아의 오지에도 분명 대인격자가 있을테지만
사회가 그를 알아보지못하고 사용하지 못하면 없는거나 마찬가지오.
김동렬 노무현같은 사람도 인터넷 통신이라는 신무기가 없었다면 어디선가 말라죽었을지도 모를일..

개인의 가치판단이 집단의 의사결정수준을 넘어설수는 없는거죠.
이상사회의 비전이 사람을 올바르게 이끄오. 언제나 방향성이 우선이오.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0.10.11 (17:05:10)


눈 내리는 마을님과 르페님의 생각에 기본적으로 동의합니다.
사회와 개인이 맞지 않을 때 나타나는 갈등은 상상을 초월하기도 하니까요.
단지 제 생각을 그냥 풀어놓아 봅니다. 얘기가 길어지지만 결국 같은 얘기들인 것이겠지요.

마음의 존재론 - 정신≫의식≫의도≫생각≫감정
마음의 인식론 - 존엄≫자유≫사랑≫성취≫행복

인격            -      성격
인성            -      개성
이성            -      감성
-----                    ------
인격,인성,이성이 정신=존엄(외부소통)이라면, 성격,개성,감성은 의식=자유(내부통제,결정)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외부소통과 내부통제와 결정이 자기를 스스로 규정하는 정체성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구요.
그 시대를 넘어 한계를 초극하고 꽃을 피우려면 이상주의가 있어야 하겠지요. 그것이 비전이니까요.
그리고 역사에서 그런 사람들의 도전은 늘 있어왔고, 단지 그 사회와 시대의 조류가 맞지 않아서 외로워서 죽었을지언정...개인 스스로 높은 인격을 가진 사람들은 있어왔고 늘 존재해왔다 생각되오.
그러나 이제 시대가 모두가 동참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고 인터넷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고 있으나 좀 더 나은 방향이어야 하기에...
집단지성을 형성하여 사회적 인격을 높여야 하는 이유가 발생했다고 보오.
개개인들이 사회의 인격과 소통하여 개인의 인격을 같이 높여야 하기 때문이라고 보오.
예전에는 의사전달 수단이 발전하지 못해서 한정되어 있었다면, 이제는 그 한정됨은 어느정도 무시하고 바로 전달할 수 있게 되어서...
판단도 바로 할 수 있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보오.
많은 것들에 대하여 바른 가치 판단을 할 수 있는 지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이런 변화에 맞추어가는 사회의 양식이 있어야 하고, 인격이 있어야 흔들림없이 바로 설 수 있다고 보오.
시대가 변함에 따라서 양식도 변화하지만, 아직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기에 혼란스러운 것이라고 보며,
우리 사회의 나약하고 혼란스러운 풍경은 시대의 변화에 인격이 같이 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어서 날로 다양해져 가는 것을 받아내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봅니다.

개인의 가치판단이 집단의 의사 결정 수준을 넘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진보가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한사회의 양식이 고착화되면 반드시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안맞는 현상이 생기고 누군가는 그것을 넘어서고자 합니다. 거기에서부터 전복의 기미는 보이는 것이구요. 그것이 다시 전체로 퍼져서 마침내 전복하는 것이구요. 그 결과로 다시 새로운 양식이 출현하는 것이구요.
사회의 혼란은 전복의 기미가 보일 때 더 심해진다고 생각합니다. 전복 하려는 의지와 전복을 방해하여 막아서려는 의지의 충돌...
결과적으로는 진보하게 되어 있기에 전복의 기미를 보인 것이 마침내 전복 시킵니다.
집단지성을 건설하는 것은 전체 인류의 수준을 끌어 올리는 것이기에...낮은 수준에서 판단했던 방식들을 버리고 좀 더 높은 차원의 수준에서 판단을 시작하는 것과 같다고 보기에...이미 기본적으로 수준높은 판단의 양식들을 베이스로 깔아놓고 시작하는 것과 같다고 봅니다. 결국 인간의 수준을 지금보다는 높여보자.지금의 방식으로는 안되니 높여 놓고 시작하자. 가 아닐까 합니다. 하나가 바뀌면 전부 다 바뀌는 것이 미학이니... 인간의 수준 자체가 높아지면 결국 다 바뀌게 되어 있는 것이겠지요.

인간의 인격은 그 사회의 양식이 결정하기도 하지만, 인간의 인격은 점프하기도 하므로 이러한 점프가 진보를 불러온다고 생각되오.
물론 점프가 일어나는 것도 그 사회의 모순을 보고 대응의 방향에서 일어나는 것이기에 결국 개인의 인격은 사회의 인격과 소통의 수준을 가늠해보고 판단하게 된다고 생각되오.

때로는 그 집단 자체에서 시작하여 바깥으로 진행되는 경우도 있으나, 때로는 그 집단 그 사회에서는 일어나지 않은 변화가 바깥에서 일어나기도 하고...이러한 진행을 통하여 현재의 인류가 그 이전의 인류에 비하여 지적인 수준이 높아진 것이라고 생각되오.즉 아이큐가 높아진 것이라고 보면..그 높아진 아이큐를 베이스로 깔고 시작한다는 것이지요.  인간의 아이큐는 높아졌으나 지구촌 사회의 인격은 아직 낮다고 보이기에 이제는 지구촌 사회의 인격을 전체적으로 높여야 밸런스가 맞아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도 되구요.

[레벨:15]lpet

2010.10.11 (18:46:27)

어떤 개인의 가치판단이 옳다면 집단지성에 수용되어 확장되고 심화되기 때문에, <넘어선다> 라는 표현은 불필요한 수사입니다.

사회의 양식이 고착화되었다면 이미 집단지성의 기능이 마비되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때도 수많은 '뛰어난 개인들'이 있을수있음을 알아야합니다. 가령, 지금 우리나라에도 김용옥, 진중권, 강준만 등 지식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을 과연 세력을 갖춘 지식인 즉 집단지성이라고 부를수있을까요?

가치판단과 의사결정의 관계를 명확히 아시려면 집단지성의 의미를 더욱 확장하셔야 할겁니다. 집단지성의 이해와 지지가 없으면 전복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개인도 확률적으로 살아남을 수 없죠. 가령, 역사상 노비나 노예가 스스로의 자각으로 해방(일시적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완전히)된 경우는 단 한건도 없습니다.

프랑스 혁명이 계몽주의 세력없이 몇몇 시민군이나 열혈 혁명가의 용기만으로 가능했다고 보십니까?

지금 집단지성의 의미를 경직된 우두머리 집단의 다수결 쯤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집단지성이 만들어지고 나면 어떤 천재나 똘아이의 돌출도 모두 완충해냅니다. 우리나라에서 이처럼 온갖 분야에서 마녀사냥이 펼쳐지고 있는 이유는, 그 집단지성세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집단지성이라고 해도 그 사회의 모든 지식인집단 전체를 말하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가령, 어느 때는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유럽지식사회 전체를 대표하기도 합니다. 한때는 파리의 몽마르뜨가 유럽의 집단지성이었고 지금은 뉴욕이라고 봐야겠죠.

집단지성이 형성되면 개개인의 어떤한 점프도 받아냅니다. 못받아내서 개인이 악을 써야 한다면, 이미 집단지성이 마비된겁니다. 겉보기에는 아인쉬타인, 달리, 에디슨.. 같은 똘아이들이 자기가 잘나서 까부는것처럼 보이지만, 들여다보면 그 사회의 집단지성이 똘아이들을 보호하며 자양분으로 써먹고 있는겁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0.10.11 (19:34:49)


르페님의 글의 요지는 알아듣겠지만... 글 자체는  저의 생각과는 상반된 방향에서 말씀하시고 계시네요.
저는 르페님의 말을 알아듣는데..르페님은 계속하여 제 글을 조금 오해하고 계신듯합니다.
르페님의 말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저는 왜, 그러한가라는 동기에서  원인쪽에서 얘기하고 있지만,
르페님은 원인과 결과 모두 이미 해답을 전제하여 놓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저는 집단지성이 지금 시대에 왜 간절하게 필요하게 되어가고 있는가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인간 개인에서 왜 집단지성이라는 방향으로 가야하고, 이미 우리는 잘 모르고 있었지만 그런 형태로 나름대로 흘러오고 있었다는 것에 대하여,왜 이제는 각성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이지요. 부분이 전체에 연동되어 있다는 것을 왜 깨달아야 하는 것인가? 이지요.
그런데 자꾸 집단지성의 건설이라는 결과에만 초점을 맞추어 놓고 과정을 모두 거기에 맞추고 있다고 봅니다.
왜 사회에서 메마른 부분들만 얘기하고, 생기가 있는 쪽은 얘기하지 않지요.?
생기 있는 곳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하여 없는 것은 아니지요.

'지금 집단지성의 의미를 경직된 우두머리 집단의 다수결 쯤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
도대체 어디서 이런 느낌을 받는 다는 것인지 조금 알 수가 없습니다.
개인의 인격을 얘기하면 경직된 것인지요?
집단지성이 형성되어도 개인은 그것을 학습을 통하여야 하고, 학습은 관계를 통하여 확장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개인의 인격이 받쳐주지 않으면 외부소통의 질은 타인들의 수준에서 보았을 때 떨어지게 됩니다.
개인의 인격은 자신의 바깥환경과의 교감 능력이자 척도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부분을 간과할 수는 없다고 보았기에 그 부분에 대하여 얘기한 것일 뿐입니다.


결국 르페님 말씀은 집단지성이라는 그 사회의 인격이 똘아이들을 보호하여 사회의 자양분으로 써 먹는다 하셨는데...
집단지성은 결국 써먹을 수 있는 인간의 모든 자양분을 낭비함 없이 모두 흡수하여 써 먹는다는 얘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에서 튀는 사람, 혹은 조금은 부족한 사람들 모두를 포용하게 된다는 것이겠지요.
여기에 저는 한가지를 더 보태면 집단지성의 인격은 결국 보편성을 갖고 누구나 써 먹을 수 있는 방향으로 흐를 것이라고 보지만,
집단지성이 결국 취하게 되는 사회의 인격은 가장 높은 인격의 수준에 맞추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혼자서는 어려운 것이 수많은 사람들의 인격을 모아 놓은 것과 같기에 그 용량이 무한정으로 커지는 것과 같아서 많은 것을 포용하고 수용할 수 있는 것이 되겠지요. 집단지성은 결국 인격의 양을 늘렸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늘어난 양이 개인에게는 인격의 질적인 도약으로 나타난다고 봅니다. 그런 개인의 질적인 도약이 강한 개인이 되는 것이고, 사회의 안전망을 회득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이 자신과 맞지 않은 사람을 포용하기는 힘들지만, 집단지성의 인격이 형성되면 높은 인격의 구조의 틀을 갖추게 되는 것이기에
결국 그것은 점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하여 개인의 인격과 사회의 인격이 서로 소통하면서 개인의 인격 역시 점프하게 합니다.
더이상 마녀사냥 하는 식의 스트레스를 감수하지 않아도 문제가 풀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레벨:15]lpet

2010.10.11 (21:58:38)

집단지성이 출현하여 기능하던 시대는 인류역사상 미미합니다.

제자백가시대, 고대그리스, 14세기 이태리 르네상스, 18세기 계몽주의 프랑스, 11세기 중국, 19세기 조선, 그리고 지금 인터넷시대 정도로 손꼽힐 정도죠.

다른 시대와 장소에 천재나 인물이 없어서 출현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시대적 지형적 상황이 대량의 천재와 영웅을 발호시킨겁니다. 신기술이나 뉴미디어의 출현도 중요한 발판이 되고요.

제가 개인의 노력이나 역할을 무용하다고 주장하는게 아닙니다. 우선순위가 있다는 거죠. 석가 개인의 깨달음으로 불교가 나왔다고 보시지는 않겠죠? 노자가 무위의 자연으로 돌아갈수있었던 것도 이미 중원에 널리 퍼져있던 당시 지성의 풍토가 있었습니다.

물론 때가 무르익는다고 해서 모든 대중이 지성인이 되는 것은 아니고 그럴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이태리반도나 현대의 스칸디나비아반도가 그렇듯이, 집단지성이 발호하면 대중의 행복지수도 크게 올라갑니다.

개인에게 있어서 지성(집단지성)도 하나의 환경에 불과합니다. 집단지성이 없어도 어차피 대중들은 무언가에 의지해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천박한 실용주의건 폭력적인 파시즘이건 말이죠. 대중이 무엇을 선택하느냐는 최종적으로는 대중에게 달렸겠지만, 그 선택의 가장 큰 원인은 생산성, 즉 효율성입니다. 무엇이 더 효율적이고 이로운가 하는 것.

바깥뇌라고 불리는 이 집단지성시스템이 중단되면 개인이 소통할 대상이 사라지고, 독방에 갇힌 지식인은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고사합니다. 좀 오만하게 말하자면 여기있는 우리를 제외하고, 한국에 진정한 지식인이 있나요? 사람다운 사람이 있나요?

있을수있다.. 내지 있었었다.. 혹은 있을지도 모른다.. 모두 같은 말입니다. 즉, 있어도 모두 기능정지됩니다. 저는 김동길, 김용옥, 박찬종, 진중권 같은 천재들이 어떤 고립과정을 거쳐서 망가진 천재, 소위 또라이가 되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개인이란 이처럼 허약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그들의 능력이 모자란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격은 한번 세워놓으면 죽을때까지 꼿꼿하게 서있는 콘크리트 빌딩이 아닙니다. 부단히 세계와 교류하고 왕래하며 스스로를 갈지 않는다면, 고립된 개인은 무조건 타락합니다. 그런데 갈아야할 부싯돌이 깨졌다면?  칼은 스스로의 힘으로 녹을 막을 수 없습니다.

[레벨:15]lpet

2010.10.11 (22:21:45)

'사회의 인격은 그 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높은 인격의 수준에 맞춘다..'  인정합니다.
이 부분은 지금 논의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이지만 한말씀 드리자면,

인격의 완성도 면에서는 <완전성>이라는 개념이 필요합니다.
신과 인간의 해묵은 줄다리기라고 볼 수 있죠.
어쩌면 인간이 신에 도전해온 역사라 불러도 무방하겠고요.

완전성에 도달한 대인격자, 저는 이 분들을 간단히 '사람'이라고 부릅니다만.
대인격은 모두 한결같습니다. 물론 시대와 장소에 따른 부분적 오류가 있을수는 있지만,
본질에서 어긋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즉, 인격의 완전성은 시대를 초월합니다.

소크라테스나 소로우나 노자, 석가에게 어떤 차이가 있겠습니까. 있어도 실낱의 차이.
스스로 진정한 '사람'이 되었다면 소로우 노자 석가가 느낀 것을 똑같이 느낄수있겠죠. 신 앞의 단독자로서..

제 주장의 요지는 이런 분들이 가뭄의 콩나듯, 하지만 꾸준히 출현한다는 말씀입니다.
종이와 문자가 없어서 기록되지 않은 소로우와 노자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곡해의 소지는 있겠지만 저는 이 분들을 선천적인 영적 천재라고 봅니다.
아주 어릴때부터 환경의 영향을 벗어난 자각이 일어났다는 점도 그렇고..

제 개인적으로는 동렬님같은 영적 천재(그 이상이지만)에게 많은 영감을 받습니다.
사실 영감이라고 하는 것은 최근의 일이고, 오랜 기간 충격을 받아왔습죠.

아마 영적인 문제에 관한한 아란도님과 저는 서로 같은 곳을 보고 있을 겁니다.
집단지성의 문제와는 조금 별개의 문제라서 언급드렸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0.10.12 (15:14:32)


인류에서 선각자라 불리는 사람들은 모두 그 시대에서 축척해온 토대를 가지고 자신 스스로 극한까지 밀어부쳐 자신이 스스로 무엇을 보았다는 것일 것입니다. 그 자신이 본 것을 다시 토대 삼아서 새로운 발상을 가지고 얘기했죠. 거기서 그 사람의 길이 열린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니 토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지만,또한 그 자신이 무엇인가를 보았다는 것도 중요해집니다. 즉 자신의 의식으로 자신의 정신의 폭을 넓히고 도약했다는 것이 중요해지는 것이지요.  김동길, 김용옥,박찬종,진중권...다른 사람들인듯 하나 결국 고립에서는 같은 것이라는 것을 얘기하신듯하여... 덧붙이자면...그들이 고립되었다면 그것은 사회적인 토대와 자신의 바깥과 연결고리를 이어가는 것에서 그들 스스로의 정신의 문제이겠지요.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는 순전히 그들 자신의 몫이었으니까요. 결국 판단은 자신이 하는 것이고, 판단에서 처신이 나오는 것이고, 외부에서는 처신으로 그 사람을 결정하기도 하니까요. 자신들이 가는 길을 자신들 스스로 그렇게 만든 측면도 없지않아 있지요. 그것은 정신으로 소통하는 것에서 방향키를 그들 스스로 그렇게 잡아간 것과 같고, 어찌보면 이들은 모두 시대의 시류에 편승하여서 빛을 본 사람들이고, 다시 그 시대의 시류가 지나가자 고립된 것과 같다고 봅니다. 그것을 모두 이런 것들과 연계시키는 곤란할 듯하기도 하구요.

또한 석가,노자,예수,공자,소로우 등등의 사람들은 어찌되었든 그동안 인류에게 많은 영향을 전체적으로 끼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추구했던 정신은 인류의 흐름과도 맞는 측면도 많지만, 많은 이들이 그 정신들에 영향을 받고 그것으로 연명하는 것과도 같기에 왜곡된 측면들도 있지만,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왜곡되는 부분들이 아니라 장대하게 흘러가는 흐름에 동참하는 정신세계이겠지요.

그리고 보통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다고 종교적으로 얘기하지만...
저는 영혼이란 사람의 정신세계를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위대한 한 사람이 죽었다면, 그 사람이 죽어도 죽지 않은 이유는 그 사람의 정신세계를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계속 살아 있는 것과 같습니다. 죽은자의 정신이 물체로 떠도는 것이 아니라, 산자의 정신에 계속하여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정신세계를  계속하여 영향을 받고, 그것을 공유하는 사람들에게는 계속  살아 있는 것이지요. 잊혀지거나 망각된 정신도 어떤 사람이 다시 영향을 받아 살려내면 또 그 정신은 살아납니다. 정신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 있는 것인데 단지 잊혀지고, 잊어버리고,망각하기에 없다고 생각하지만, 다시 살려내면 살아나는 것이 정신이라고 봅니다. 정신은 소통이고 공유하는 것이기에 그것이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정신은 그것을 받아 들이는 사람의 의식을 통하여만 가능한 것이고, 정신은 반드시 존재,즉 인간을 거쳐야 그 본질이 나타나는 것이라는 것이겠지요. 반면에 그냥 평범하게 살다간 사람들은 지인들이나 가족들에게는 기억될지언정 금방 잊혀지게 됩니다. 타인들에게 정신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이 없기 때문이겠지요.

그리고 우리가 영감을 받는다고 하는 것도 그 사람의 정신세계에서 내가 그 사람의 정신을 공유하게 됨으로 인해서 나의 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나를 규정하는 것에 그 사람의 정신이 영향을 미침으로 인해서 의식의 변화를 통하여 내가 바뀌는 것이고, 내가 바뀌면 나역시 그 사람의 정신세계를 이해하고 같은 것을 공유하게 됨으로 그 정신은 계속 살아서 커가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말 역시 따로 떼어서 얘기할 이유는 없을듯하고, 이 역시 사람의 인격에 영향을 미치게 하는 것이라서 집단지성에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정신이란 언제나 존재의 상부구조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집단지성 역시 상부구조에 속한다고 보기에 정신이 먼저 살아야 함은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집단지성 자체가 인격이듯이, 개인의 정신세계도 인격과 같다고 봅니다.. 외부 소통능력 그자체라고 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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