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은 진보다. 제 글에 진부하고 고지식한 먹물진보를 비판하는 대목이 많고, 또 구조론에 보수의 입맛에 맞는 내용이 상당히 있어도 구조론은 진보다. 구조론은 태생이 진보고 본질에서 진보다. 왜냐하면 구조는 부분을 결합하여 전체를 구성하는 형태로 진화하기 때문이다. 진보는 구조 그 자체의 속성인 것이다. 하나의 구조는 어떤 조직의 성장과 발달을 결정하는 1 단위다. 그러므로 구조론=진보론이며 이를 생물에 적용하면 진화론이 되고, 경제에 적용하면 자본의 발달이론이 되고, 사회에 적용하면 공동체의 진보론이 된다. 자본의 발달은 산업의 생산력 증대에 의존하고, 공동체의 발달은 주로 미디어의 발달에 따른 인간의 소통능력 증대에 의존한다. 둘은 서로 대척점에 있는 듯이 보이지만 실은 주거니 받거니 하며 문명을 이끌어가는 양대 축이 된다. 구조론은 모든 진보하고 발달하고 성장하는 것의 성장원리를 해명한다. 개인이 모여 가족을 만들고, 가족이 모여 공동체를 만들고, 공동체가 모여 국가를 만들며 이렇게 하나의 조직이 발전하고 성장해 가는 그 자체가 진보인 것이며, 바로 그것이 구조다. 구조=진보를 결정하는 1단위다. 구조가 기업과 시장의 성장원리를 해명하면 좌파가 화를 내고, 구조가 사회와 공동체의 성장원리를 해명하면 수구가 화를 내지만 기업이나 공동체나 인류문명의 진보를 이끌어가는 양대 축이다. 이는 뱀의 머리와 꼬리가 서로 저 잘났다고 우기는 것과 같아서, 실은 그 중에 하나도 버릴 수 없다. 생명은 세포가 1단위다. 세포가 구조다. 그런데 세포 하나가 살아있으면서 그 세포들의 집합인 생명체도 살아있다. 그 세포의 집합인 생명체도 보다 상위의 단계인 군집에 있어서는 하나의 세포이며 구조인 것이다. 부분도 구조가 살아있고 그 부분들의 집합인 전체도 구조가 살아있는 것이다. 개미도 살아있고 개미들의 집합체인 개미군집도 살아있다. 산호나 버섯처럼 그 전체와 부분의 경계가 애매한 것도 있다. 구조는 그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해명한다. 그 관계를 지탱하는 것은 진보이다. 진보함으로써 개체가 살아있는 것이다. 팔을 하나 잘라도 살지만 목을 자르면 죽는다. 반면 플라나리아는 어디를 잘라도 산다. 또 버섯과 같은 것은 일정한 세력이 모여 있으면 산다. 이들 사이에 일정한 질서가 있다. 어디는 잘라도 되고 어디는 자르면 안 된다는 규칙이 정해져 있다. 그러한 규칙들이 공동체의 성장을 뒷받침하는 중핵이 된다. 우파들이 강조하는 기업의 생산성이나, 좌파들이 강조하는 공동체의 소통능력은 그 우선순위를 다투는 것이다. 서로 ‘너는 잘려나가도 살지만 나는 잘려나가면 죽는다’고 외치고 있다. 구조는 바로 그 선후관계를 해명한다. ### 물론 이러한 구조론의 입장은 기존의 진보, 보수 담론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전제로 한다. 말하자면 진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제대로 된 정의가 필요하다는 거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진보는 인간과 환경의 부단한 대결에서 공동체의 성장을 통한 인간의 우위를 추구하는 것이다. 보수는? 진보를 반대하는 것이다. 한국 보수가 보수의 전통적인 가치인 민족주의를 반대하고 김구선생을 테러리스트로 몰아붙이는데서 보듯이 보수는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 보수가 주장하는 모든 것들은 그들에게 익숙한 것일 뿐이다. 보수가 전쟁을 좋아하는 이유는 625때 전쟁을 해봤기 때문이다. 명박이 삽질을 좋하는 이유는 역시 왕년에 삽질을 해봤기 때문이다. 그들은 해본 것을 좋아하고 해보지 않은 것을 두려워 한다. 그러므로 보수는 상대적이다. 나라마다 보수가 다르다. 중국보수와 한국보수는 분명 지향점이 다르다. 예컨대 중국보수는 완강하게 종교를 반대하고, 한국보수는 악랄하게 종교를 악용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그들에게 익숙하기 때문이다. 단지 그 하나의 이유 뿐이다. 반면 진보는 절대적이다. 결론적으로 진보는 스스로 자기 규정을 할 수 있는 절대적 가치집단이고 보수는 진보에 의해 규정되는 상대적 가치집단인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진보와 보수의 경쟁에 의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잘못된 진보와 바른 진보의 경쟁에 의해 작동하며, 보수는 진보의 실패에 기생할 뿐이다. 문제는 진보가 항상 실패한다는 데 있다. 진보는 반드시 실패하며 그것은 진보의 본질이다. 왜냐하면 진보는 의사결정능력의 진보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바른 판단을 할수록 오히려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판단능력은 감퇴된다. 의사결정이 바를수록 의사결정을 잘 할 수 있는 능력은 약화된다. 그러므로 진보는 반드시 시행착오을 거치게 되어 있다. 이는 인간이 건강을 꾀할수록 운동을 해야하는 것과 같다. 운동을 한다는 것은 근육의 세포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예방주사를 맞아야 건강해지듯이 어느 정도 파괴해야만 의사결정능력이 향상될 수 있다. 진보는 끊임없는 자체 물갈이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진보는 필연적으로 자유주의로 가게 되어 있다. 자유주의는 시행착오를 인정하는 것이다. 좌파의 무오류주의와 다르다. 우리는 옳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결정이 합리적으로 되는 것을 원한다. 말하자면 YES와 NO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일을 저질러놓고, 그 저질러진 사건의 기승전결 전개에서 기(起)를 일으켜 놓고, 차차로 세를 모아가며 ~승전결로 이어지는 다음 단계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각자의 롤을 찾아가게 하는 것이다. 롤플레잉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리더가 최종적으로 옳은 결정을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설사 결정이 우왕좌왕 했더라도 그 과정에서 각자에게 올바른 롤이 주어졌느냐가 중요하다. 예컨대 미국산 쇠고기가 인간에게 무해하다 할지라도, 명박이 독재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한국인 각자에게 롤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혀 인정되지 않는 것이다. 설사 천안함이 북한의 어뢰공격에 의한 격침이 맞아도 그러한 정보 판단과정에서 국민이 소외되고, 정부가 정보를 감추고 국민 각자에게 합당한 롤을 부여하지 않았으므로 전혀 승인되지 않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누가 옳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 집단의 의사결정과정에서 충분한 롤을 가졌느냐가 중요하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의 모든 결정이 옳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나는 당신께서 사건의 기성전결 전개에서 의롭게도 기(起)에 섰다고 주장한다. 눈치보다가 마지못해 뒤따르는 손학규와 다르다. 기에 서는 것이 진짜다. 손학규는 막판에 분당출마의 결단을 내려 옳은 결정을 했지만, 기에 서지 않고 눈치봤기 때문에 그 옳은 결정은 승인되지 않는다. 하등동물은 플라나리아와 같아서 어디를 잘라도 살지만 고등동물은 그렇지 않아서 목을 잘리면 죽고 팔을 잘리면 산다. 식물은 뿌리를 잘리면 죽지만 가지를 잘리면 가치치기가 되어 더욱 잘 산다. 이명박의 결단이 결과적으로 옳더라도 그것은 잘려나가도 되는 팔이며, 여고생의 촛불이 틀렸을지라도 그것은 잘려나가면 안 되는 목이다. 경중의 판단이 있는 것이며 촛불이 우선이고 명박은 필요없다. 구조의 관점에서는 최종적으로 옳기만 하면 되는게 아니다. 옳은 결정은 오히려 인간의 의사결정능력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천성산에 도룡뇽이 죽었느냐 살았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의로운 한 사람이 그것을 반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정아가 나쁘냐 정운찬이 나쁘냐는 본질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조중동문의 신정아에 대한 마녀사냥이 악랄할수록, 거기에 비례하여 신정아의 대항능력이 커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구조의 작동원리이기 때문이다. 조중동문이 신정아를 맹비난하지만 신정아의 발언권을 올려놓은 것은 조중동문 바로 그들이다. 그들이 신정아를 만들어낸 것이다. 설사 이명박이 신공항을 없었던 일로 해서 국민의 혈세를 절약하고, 결과적으로 국익을 증대시켰더라도 그 과정에서 지방의 중앙에 대한 대항능력을 키웠다는 문제는 별개로 남는다. 국익을 위해 잘못된 공약을 취소했더라도 그것을 빌미로 한 지방의 중앙에 대한 대항능력 증대는 고스란히 남아있으며 그것은 살아있는 부채다. 그게 그냥 없었던 일로 되지는 않는다. 절대로. 명박은 지금 하야함으로써 그 부채를 갚아야 한다. 진보가 실패하기 때문에 보수가 있다. 집단의 의사결정능력 증대, 문제해결능력 증대, 타자와의 공존능력 증대가 진보의 본질이다. 이러한 부분을 살려가기 위해서는 옳은 결정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국민 각자에게 합당한 롤을 주는 결정이 필요한 것이며, 이는 필연적으로 신속한 의사결정을 요구하고, 이는 자유주의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말하자면 좌파가 주장하는 시스템 위주의 의사결정구조로 가면 국민 각자에게 충분한 롤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설사 좌파가 바른 의사결정을 했더라도 그 반대급부로 의사결정과정에서 소외된 세력의 대항능력 증대가 남아있고, 이들이 미친듯이 삽질을 해서 이명박이라는 괴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좌파는 잘해도 잘못이고 잘못해도 잘못이다. 이는 명박이 잘해도 잘못이고 잘못해도 잘못인 것과 같다. 잘하면 상대방의 대항능력을 키워 그 부채가 증대하고 잘못하면 나라를 망쳐 그 후과가 증대된다. 좌파와 수구는 이래도 저래도 다 잘못이다. 좌파들의 주장대로 강령 따위를 복잡하게 정해놓고 거기에 따라서 지도부가 결정하는 식으로 의사결정을 하면 민중은 의사결정과정에서 소외되고 그 소외는 구조원리에 따라 민중의 대항능력을 증대시켜 결과적으로 이명박의 집권을 돕는다. 그러므로 옳고, 윤리적이고, 도덕적이고, 바른 결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오히려 잘려나가도 되는 팔이며, 일정한 정도의 시행착오를 수반하는, 국민이 충분히 롤을 얻는, 일단 저질러놓고 차차로 세를 모아가고 흐름을 끌어내며 방향성을 제시하는 자유주의 의사결정 방식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목인 것이다. ◎ 좌파 - 이게 진보다 하고 지들 꼴리는데로 정해놨다. 매우 윤리적이며 오류가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소수의 지도부가 밀실에서 판단한다. 모든 정답을 미리 정해놨기 때문에 그 정해놓은 정답의 차이에 따라 민노당, 진보신당, 녹색당 등으로 나누어져 절대로 화합하지 못한다. ◎ 자유주의 - 일단 저질러놓고 차차로 세를 규합하고, 방향성을 제시하여, 에너지가 가는 흐름을 만들어낸다.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은 필수적이다. 정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시행착오 끝에 얻어지는 개인의 의사결정능력 증대, 의사소통능력 증대가 정답이다. 옳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옳고 그름을 떠나 민중의 집단지능을 끌어올린다. 국민의 역량과 수준을 높인다. ◎ 보수 - 무조건 진보를 반대하며 자신이 경험해본, 익숙한 것을 주장한다. 진정한 진보는 자유주의다. 왜냐하면 진정한 진보는 옳은 것을 하는 것이 아니며, 정답을 찍어주는 것도 아니고, 사건의 기승전결 전개 과정에서 각자에게 충분한 롤을 부여함으로써 공동체의 문제해결능력의 증대, 집단의 의사결정능력의 증대, 소통을 통한 타자와의 공존능력 증대를 끌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통능력을 증대하여 인류의 아이큐를 끌어올리는게 진보다. 우리가 조금 더 훌륭해졌느냐가 중요하다. GDP 어쩌구 이건 전혀 안 쳐주는 것이다. 대화할 가치도 없다. 좌파들이 노상 주장하는 행복타령도 뻘소리다. 그거 찌질한 거다. 우리는 좀 더 멋있어져야 한다. 그게 중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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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하다 시원해
소회.
구조론 아카데미 하단에 “구조론 아카데미가 가는길”에 쓰여진 6줄 선언문(?)의 개념들을 음미하며 이 글을 읽었소; “구조론은 … 철학, …세상 해석의 방법론, ..미학이며, ..소통하는 깨달음, ..새로운 세계관이며, ..총괄이론이다” 를 염두에 두며…좀더 나은 이해경로가 나오지 않겠나 생각하며…
구조론은 아무튼 ‘큰 이론’이자 세상의 “상부구조” 같은 느낌! 근데 아직 구조의 향기만 맡다가 실전엔 언제나 써먹을 수 있을지…
진보 보수 정의나 메모리에 추가 해야겠소:
“진보는 인간과 환경의 부단한 대결에서 공동체의 성장을 통한 인간의
우위를 추구하는 것이다. 보수는? 진보를 반대하는 것이다”. (보수는 ‘인간’자리에
“시장권력”을 놓겠지요^?)
***
공동체가 커야 나도 큰다. 근데 거기서 나(너,그,)에게도 롤플레잉이 주어져야 한다. 강령으로 닫아두면 민중의 대항력만 키운다. 롤 플레잉을 안 준 최근의 대표주자로는 가다피, MB-라크 같은 사람들이다. 이거 제대로된 지방자치가 왜 필요한지 알 것 같네…
의사결정방식, 문제해결 방식, 공존방식을 같이 논의 소통하여 결정하자는게 롤플레잉 주는 것이었네;백성은 가만히 않아서 꼴만 보고 다 알게 되는 이치. 아니 내 아들, 마누라가 나를 지금껏 그리 보고 있었네. 빵점 아빠 이유가 있었네…^^
시장권력은 요즘 생겨난 거고 조선시대엔 양반권력이었죠.
시대를 초월해서 보편적인 시선으로 보면 시장=보수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북한사회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조선시대 우리사회의 작동원리대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러시아의 소비에트는 원래 몽골 부족집단의 통치방식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입니다.
잘 연구해 보면 소련이야말로 최후의 몽골제국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실제로 짜르시대 로마노프 왕조에 킵차크한의 후예인 타타르가
권력지분을 가지고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일본의 자민당 세습의원은 막부시대 봉건영주 시스템을 이식한 것과 같고.
그러므로 일체의 기득권은 보수이며,
그 이유는 새로운 것이 나타났을 때 기득권이 그것을 반대하기 때문이오.
새로운 것을 반대하면 보수이지 다른 거 없소.
구조론은 진보다....
구조론은 알면 알수록 진보가 아니고서는 설명이 안되는 것.
선언이 너무 늦은 것 같은 생각이 드는 이유는?....^^
세상의 진보는 오직 에너지로 말미암고
그 진보의 에너지는 다만 커다란 낙차에 의해 얻어지며
그 낙차는 구조의 모순에 의해 필연적으로 성립하는 것이고
그 에너지의 낙차를 일으키는 모순은 신과 구의 모순이며
모든 새것으로 모든 낡은 것을 밀어내는 것이 진보이고
그 새것은 현장에서의 창의와 혁신에 의해 가능할 뿐이오.
좌파가 주장하는 평등이나 행복은 이러한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오.
본질은 구조의 모순이며 불평등이나 불행은 모순을 나타내는 표지일 뿐.
민심이 흉흉하다든가 삼풍붕괴와 같은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든가
카이스트 학생이 연이어 자살한다든가 하는 사건들은 그러한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오.
그리고 그러한 모순은 오히려 사회의 진보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오.
퇴보하고 정체된 사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소.
그러므로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고 사회에 갈등과 모순이 첨예하다면
부분의 진보를 전면화 해야한다는 역사의 요구가 되는 것이오.
그러므로 불평등하다 -> 평등하게 하자 이게 진보가 아니오.
에너지가 투입되었다 -> 모순이 드러났다 -> 시스템을 갈아야 한다 이것이 진보이오.
사회의 진보는 부분에서 먼저 달성된 진보를 국가 전체에 전면화 하는 방식으로 가능하며
부분에서 먼저 진보가 달성되었을 때 가장 첨예하게 모순과 갈등이 일어나오.
그러므로 모순과 갈등이야말로 진보의 동력인 것이오.
단순히 나눠가진다가 아니라 부분의 성공을 전면화 하는 것이 중요하오.
단순히 나눠가진다가 아니라 부분의 성공을 전면화 하는 것이 중요하오.'''
전복 시키는 것...여기에서도 미학이 드러나네요.
모순과 갈등을 두려워 하는 이유는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하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모순과 갈등이 진보의 동력이기는 하지만, 진보 역시 모순과 갈등을 동력으로 삼아서 마침내는 미학적 전복을 이뤄내려는 것이기에..결국 모순과 갈등은 전반적으로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에너지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모순과 갈등은 한 차원 더 도약하기 위한 동력원이기에 지향점은 질적 향상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모순과 갈등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흠..이러면 ㅋㅋ 빨갱이라고 밑줄 그을 세력들이 눈에 아른거리네요.
멋지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