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이란
심 층 구 조

질은 결합하고 입자는 독립하고 힘은 교섭하고 운동은 변화하고 양은 침투한다. 우리에게 필요한건 미학이다


가치판단의 패러다임


사람들은 행복하기를 원한다. 왜 행복하고 싶어할까?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정당한가?
사람들은 사랑하고 싶어한다. 왜 사랑하고 싶어할까?
인간이 사랑을 추구하는 것은 떳떳한가?
사람들은 가치를 추구한다. 왜 가치를 추구할까?
인간이 추구하는 것들은 정말로 가치있는가?
사람들은 즐겨 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한다. 왜 의미를 부여하려 할까?
인간들의 의미부여는 과연 타당한가?
사람들은 행복과 사랑과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면서 또 더 근원적인 것을 찾는다.
구원이다. 왜 구원을 바라는가?
과연 인간에게서 진정한 구원은 있는가?

사람들이 얻으려 하는 것들, 행복과 사랑과 가치와 의미와 구원, 이 모든 것들은 과연 정당한 것인가? 이것들을 정당화 시켜주는 그 어떤 위대한 힘은 존재하는가?
만약 어떤 행동이나 성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그것이 옳은 것이라고 판단될 때 우리가 그 옳은 일을 하는 것은 적어도 의미 있다고 할수 있다.
인간의 그 의미있는 행동은 과연 절대적인 근거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단지 인간들의 그렇게 느낄 뿐인 것인가?
그 어떤 행동이 절대로 올바른 실천이라고 치고 만약 그것이 옳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고 거역해버린다면 나쁜 일이 되겠지만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

인간의 행동은 1차적으로 신체감관에 지배된다. 그러나 옳다 그르다의 이성적 판단은 그 감관의 욕구를 뛰어넘는 것이다. 인간이란 그것이 옳다면 자기를 희생할수도 있고 감내하여 고통을 극복할수도 있다.
인간의 기본적인 행동은 우선으로 신체감각과 감정이 생산하는 욕구에 지배되지만 인생에서 더 많은 부분이 이성적 판단에 기초하여 그 욕구를 극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필요한 것은 그 이성적 판단의 절대적인 근거이다.
판단은 옳게 해놓고 실천에서는 거역할수 있다. 그것이 나쁜지 알면서 나쁜 행동도 해버릴수 있겠다. 이를 부정할수 있는 절대적인 근거가 있어야 한다. 이성으로 판단하는 것과 그 판단을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
과거에는 주로 종교적인 교리에 기대어 정당화하곤 했다. 나쁜 짓을 하면 지옥에 가기 때문에 나쁜 짓은 하면 안되는 것이고 정녕 지옥에 가고 싶다면 별수 없다는 설득방식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겨우 나쁜 짓을 하면 교도소에 수감될수 있다는 경고를 보낼수 있을 뿐이다.
과연 나쁜 짓을 하고도 교도소에 안갈 자신이 있거나 아니면 교도소에 겁나지 않는 인간들까지도 설득할수 있는 선의 절대적인 근거는 있는가?

생활에서 사람들은 행동하고 실천하며 획득한다. 그리고 그 행위들에 근거를 대고 설명하고 싶어하고 정당화하고 싶어한다. 철학은 이런 모든 질문들에 대한 명쾌한 답변을 요구받는다. 그러나 질문들에 하나하나 답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많은 것들이 모호하고 불투명하다. 선과 악 사이에 어중간한 것들이 많다. 선이 악으로 변하기도 하고 한때 악이었던 것이 시간이 지마면 선이 되기도 한다. 여기에서 선으로 인정되는 것이 다른 곳에서 악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인간의 행복추구는 진실로 정당하다. 그러나 마약에 취한 자의 환각속속에서 행복은 가짜다. 거짓 위로된 행복, 남으로부터 약탈한 행복은 가짜다. 철학은 선과 악 사이에 분명한 경계를 그을수 있어야 한다.
더 많은 가짜들이 있다. 가짜들을 하나하나 따져서 분별해 준다는 것은 어지간히 피곤한 일이다. 철학은 단순명쾌할 것을 요구받는다. 많은 가치들을 하나로 통일하여 일괄타결하는 근원적인 패러다임이 있어야 한다.
사랑은 정당하지만 진짜 사랑은 귀하다. 어떤 사랑이 진정한 사랑인지 알지 못하는 때가 많다. 진정한 사랑이기 위해서는 서로 알아야 하고 또 실천되어야 한다. 서로 모르면서 일방적으로 기대되는 사랑은 위조된 것이다. 진짜가 아니다.
가치있는 것은 인간에 의해 추구되어야 마땅하지만 더 많은 것들이 가짜이다. 그리고 또 변화한다. 가짜가 진짜가 되고 진짜가 가짜가 된다. 모르면서 추구되던 얼치기 사랑이 서로 부대껴 가면서 진짜 사랑으로 변하여지기도 한다.

의미 혹은 가치는 다만 인간들에 의해 그렇게 느껴질 뿐인 것이 아니다. 인간존재보다도 더 높은 곳에 그 이상의 절대적인 근거가 있다. 필요한 것은 패러다임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절대적 근거와 인간들이 느끼는 바 소박한 감정을 하나로 이어주어 하나의 연속적인 스펙트럼으로 통일해 내는 것이 패러다임이다.
많은 질문들에 일일이 답하지 않고 무수한 가짜들과 진짜들을 하나하나 따져서 판단하지 않고 그 전체를 단번에 통찰해내는 거대한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무수한 변화가능성까지 하나의 커다란 그물로 엮어내는 가치인식과 판단에 있어서의 절대공식이 필요하다.

구원, 의미, 가치, 사랑, 행복

행복이 정당화 되는 것은 그 행복이 참사랑의 결과일 때에 한해서이다. 사랑은 인간에 의해 행동으로 실천되고 그 결과로 인간은 행복해진다. 그러나 혹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 마약에 의해서, 약탈에 의해서, 속임수에 의해서, 거짓된 사랑의 결과물인 행복은 전혀 정당화되지 않는다.
사랑과 행복은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고 하나의 연속적인 스펙트럼으로 연결되어 있고 사랑이 행복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행복에 앞서서 행복을 통일하고 정당화한다. 사랑이 원인이고 행복은 그 결과이다.
행복하려 한다해서 행복해지지 않는다. 마약은, 속임수는, 약탈은 일시적으로 자신을 안락하게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다. 진정한 것은 사랑의 실천에 의한 행복이다. 사랑하면 행복해진다.
행복의 근거는 사랑이다. 행복이 사랑의 결과이므로 사랑한 자 행복을 누림에 있어서 얼마든지 떳떳하다. 그렇다면 그 사랑의 근거는 무엇인가?

사랑을 정당화 하는 것은 가치다. 참 사랑은 그것이 가치있는 것일 때 한해서 정당하다. 가치는 교환가치이며 사랑은 그 가치의 시간적 실천이다. 먼저 주고 준 만큼 받아서 전달하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든 물질에 대한 사랑이든 추상적 가치에 대한 사랑이든 모든 사랑은 시간에서 이루어지고 그 사랑을 담보하는 가치는 공간에서 교환된다.
가치없는 것에 대한 사랑은 기만이며 실패이다. 가치는 교환가치이므로 진정한 사랑은 교환된 것이어야 한다. 주지않고 받기만 하는 가치는 가짜이다. 그것은 약탈이거나 속임수다. 인간은 투자한 만큼 가치를 얻어낼 뿐이다.
사랑은 가치에 의해 정당화되고 가치는 공간 상에서 서로 교환하는 것이다. 우리는 공간에서 서로 줄 것을 주고 받을 것을 받으며 그 주고받음을 시간적으로 진행하는 과정이 사랑이다.
희생적인 사랑도 있다. 주기만 하고 받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본다면 일방적인 희생은 없다. 인간은 태어날 때 이미 충분히 받아왔으므로 돌려주는 것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기생명과 그 생명의 생존환경을 부모로부터, 신으로부터, 존재로부터, 자연으로부터, 받아서 태어난다. 그러므로 그 어떤 희생도 진정한 의미에서 본다면 희생이 아닌 것이다.
때로 먼저 받고 나중 주기를 약속할수도 있다. 가치를 저축하듯이 나중 받기를 기대하고 사랑을 투자할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랑이든 가치를 전제로 하는 것이며 가치는 주고받음에 의해서만 성립한다.
무가치한 것에 대한 사랑은 구리를 금으로 잘못 알고 아끼는 것처럼 어리석음에 다름 아니다. 교환될수 없는 것, 일방적인 것은 단지 어리석음일 뿐이지 진정한 사랑은 아니다.
사랑의 근거는 가치다. 가치가 원인이고 사랑은 결과다. 사랑이 가치의 소산이므로 가치를 얻은 자, 사랑함에 있어서 얼마든지 떳떳하다. 그렇다면 그 가치의 근거는 무엇인가?

가치에 앞서 가치를 정당화 하는 것은 의미다. 가치가 가치있는 것은 먼저 의미있기 때문이다. 의미가 가치를 낳는다. 무의미한 것은 무가치한 것이다.
가치가 공간에서 교환되는 한시적인 것이라면 의미는 시간에서 배달되는 영원한 것이다. 가치가 제한된 영역 안에서 주고받는 제로섬 게임이면 의미는 그 영의 바깥에서 내부로 투입되는 포지티브 게임이다.
의미 없으면 가치없는 것이다. 금이 가치있는 것은 사람들이 금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 [필요로 하기]가 곧 의미다. 아무리 금이 많아도 사람이 필요로 하지 않으면 의미없고 의미없으면 가치없다. 그리고 그 의미는 그 금의 바깥에서 금에게로 투입된다.
가치는 소모되지만 의미는 배달된다. 가치는 시,공간적으로 제한된 범위 안에서 일어나는 제로섬 게임이므로 다 써버리면 없어진다. 의미는 제한된 영역범위 바깥의 플러스 알파 공간에서 안으로 투입된 것이므로 필요하면 얼마든지 더 끌어들일수 있다.
의미는 나누어 가져서 자꾸만 커지는 것이고 가치는 소비하여 사라지는 것이다. 의미가 수요와 공급의 결합으로 시장을 형성하는 것이라면 가치는 시장 안에서 상품대 상품으로 교환되는 것이다.
가치는 현재시점, 특정공간에서 한정되므로 그 시,공간을 떠나면 끝이지만 의미는 시,공간에서 연속되므로 어떤 것이 지금 당장에 쓸모없더라도 백년 후에 천년 후에 누군가에게 필요해진다면 곧 의미있는 것이다.
가치의 근거는 의미다. 의미있다면 가치있다. 그 가치를 인간이 추구하고 욕망하는데 거리낄 일이 없다. 그렇다면 그 의미의 근거는?

의미를 의미있게 하는 것이 구원이다. 최종적으로 모든 것의 궁극적인 근거가 된다. 인간의 모든 추구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곧 구원이다.
구원을 구원하는 것은 시스템의 작동이다. 시스템의 작동은 구원의 동력원과 의미의 동력발생과 가치의 동력제어와 사랑의 동력전달과 행복의 동력효과가 연속된 이 패러다임의 자동차를 달리게 하는 것이다.
구원의 자동차가 씽씽 달린다면, 기능한다면, 작동한다면, 모든 것이 다 정당화 되고 이중 하나가 결여되어 시스템의 자동차가 동작을 멈추어 버린다면 아무것도 정당화 되지 않는다.
구원, 의미, 가치, 사랑, 행복의 패러다임이란 먼저 실린더에서 원료가 폭발하여 피스톤을 밀어내면 엔진이 작동되고 클러치로 연결되고 바퀴를 회전시켜 주행하는 자동차의 원리가 제대로 돌아가는 순서와 방향의 얼개이다.
자동차의 원료, 엔진, 기어, 바퀴, 주행이 순서대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 자동차는 이미 고장난 자동차이다. 구원된다는 것은 본래 이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그 자동차를 잘못 운행하여 간혹 비참에 빠지기도 하지만 본래 그 자동차 자체에는 아무 하자가 없다. 이 연속된 패러다임의 자동차를 제대로 운행하는 것은 오로지 인간의 책임이다.
그것이 의미있다는 것은 인간이 그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즉 공급에 대해 수요이다. 수요는 공급의 개연성을 전제로 한다. 마약 전혀 공급의 가능성이 없는 수요라면 거기서 의미는 퇴색된다.
구원은 의미의 수요에 대해서 공급가능성으로서의 구원이다. 이를테면 죽음에 대해 영생을 바란다면 거기에 공급가능성은 없다. 고로 의미없다. 가능한 것을 욕망하는 것이 의미이고 그 가능성을 담보하는 것이 구원이다.
인간은 구원된다. 구원된다는 것은 인간이 원하는 수요들 곧 참다운 의미와 가치와 사랑과 행복의 욕망에 대해 공급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잘못된 의미, 왜곡된 가치, 비뚤어진 사랑, 거짓 행복이 아닌 참된 의미, 참된 가치, 참된 사랑, 참된 행복을 추구한다면 존재는 거기에 충분히 응답한다.
의미의 근거는 구원이다. 구원되므로 의미 있다. 인간의 의미추구는 매우 정당하고 유효하다. 그렇다면 그 구원의 근거는?

자동차가 잘 달려간다면 구원이다. 즉 시스템이 작동한 것이다. 주행은 바퀴가 구원하고, 바퀴는 기어가 구원하고, 기어는 엔진이 구원하고, 엔진은 원료가 구원한다면 원료는 누가 주는가?
지동설을 배우기 전에 인도인들은 편평한 지구가 거대한 코끼리의 등위에 올려져 있다고 믿고 있었다. 알려진 이야기에 이런 것이 있다.
백인들이 '그렇다면 그 코끼리는 누가 떠받치고 있느냐'하고 물으면 인도인들은 '코끼리는 거대한 거북의 등 위에 올려져 있다'고 대답하곤 했다. 백인이 그렇다면 또 '그 거북은 누가 떠받치고 있느냐'하고 물으면 또 무슨 동물이름을 댈 것이고 이렇게 반복된다는 이야기다..
행복은 사랑이 떠받치고, 사랑은 가치가 떠받치고, 가치는 의미가 떠받치고, 의미는 구원이 떠받친다면 구원은 누가 떠받치느가? 여기까지는 코끼리와 거북이의 순환논리지만 자동차를 최종적으로 떠받치는 것은 자동차 바깥에 있다. 그것은 운전자이다.
주행, 바퀴, 기어, 엔진, 원료의 시스템이 자동차를 지지하지만 그 모든 것은 그 자동차의 주인인 사람이 만들며 사람은 이 시스템에서 배제된다. 사람은 적어도 자동차의 일부가 아니다.
구원의 근거는 없다. 있지만 이 차원에서는 없다. 다른 차원으로 옮아간다. 구원의 범주는 구원, 의미, 가치, 사랑, 행복의 시스템으로 완성된다.
자동차주행의 최종근거는 원료에서의 동력원이고 그 동력원은 운전자가 주며 운전자는 자동차의 일부가 아니므로 시스템은 원료에서 끝이고 이것만으로도 자동차는 충분히 기능한다.
행복, 사랑, 가치, 의미, 구원의 시스템이 이 패러다임을 지지하지만 그 모든 것의 주인은 이 패러다임의 바깥에 있다. 패러다임은 인식론의 패러다임이며 우리는 존재론에서 그 답을 구할수 있다. 그것을 섭리라고 불러도 좋다.
인간이 하는 모든 짓들의 이유는 하나의 연속적 스펙트럼으로 통일되지만 이 모든 것을 다 합쳐서 '왜?' 하고 다시 물을 때 그 답은 인식론의 자동차를 떠나 존재론의 운전사에게로 옮겨간다.

집적도 3에서 존재론과 인식론

존재론 인식론

물리┃질 입자 힘 운동 량 진리┃보편성,일반성,정채성,절대성,사실성
수리┃공간 입체 면 선 점 깨달음┃이념 자아 중용 역설 법칙
┏━━━━━━━━━━━━━━━━━━━━━━━━━━━━━━━━━━━━━━━━━┓
┃섭리┃근접도,완성도,균형도, 속도, 정확도 구원┃구원 의미 가치 사랑 행복 ┃
┗━━━━━━━━━━━━━━━━━━━━━━━━━━━━━━━━━━━━━━━━━┛
논리┃배중률,동일률,모순률,인과율,한정률 이론┃일반 분류 의속 변화 개별(이론)
언어┃배경 실체 연관 이행 귀결 철학┃세계관 역사관 가치관 도덕관 인생관
━━╋━━━━━━━━━━━━━━━━━ ━━╋━━━━━━━━━━━━━━━━━
┃보편자 개별자 구조 작용 현상 ┃응용 종합 분석 수용 지각

여기서 존재론에서 섭리와 인식론에서 구원개념이 미학에 해당한다. 위 집적도 3의 구성요소들에서 미학을 어떻게 도출하느냐 하는 문제는 곧 집적도 공식을 어떻게 분석하고 활용하는가의 문제이다.
집적도 공식을 읽는 방법을 알게 되면 미학을 쉽게 이해할수 있게 된다. 또한 다른 모든 문제에 대해서도 이 분석방식을 응용할수 있다.
인식론에서 모든 가치판단들이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통일되고 최종적으로 구원의 문제로 귀일한다면 그 구원의 근거는 존재론의 섭리에서 찾아진다.

┏━━━━━━━━━━━━━━━━━━━━━━━━━━━━━━━━━━━━━━━━━┓
┃섭리┃근접도,완성도,균형도, 속도, 정확도 구원┃구원 의미 가치 사랑 행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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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을 바깥에서 구원하는 것은 섭리이다. 섭리란 자연이 상호 간섭하는 원리이다.
구원은 인간에게서 구원이며 인식론의 범주에 해 당한다. 인식론은 인간이 인간의 잣대로 인간의 입장에서 판단하는 것이다. 섭리는 자연법칙이며 자연의 잣대로 자연의 입장에서 판단하는 것이다.
구원이 최종적으로 구원되는 것은 그것이 자연의 섭리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섭리란 간단히 말하면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다는 뜻이다.

자연은 스스로 변화한다. 변화하는 것은 변화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며 그 되어 있음이 곧 이치이다. 이치에는 물리와 수리, 섭리, 논리, 정리가 있다. 거기서 구원과 같은 차원이 되는 것은 섭리이다.
자연에서 서로 다른 둘이 상호간섭하는 원리가 섭리이면 이것을 인간에 도입해서 인간들이 자연과 세계와 역사와 사회와 타인과 간섭하는 방식이 곧 구원이다.
인간의 구원이, 의미가, 가치가, 사랑이, 행복이 정당화 되는 것은 자연의 법칙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자연법칙이란 그렇게 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이란 존재가 본래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그런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즉 인간존재는 그 자체로서 매우 자연스럽게 구원과 의미와 가치와 사랑과 행복을 받아들이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 지어진 대로 사는 것이 인간적이며 만약 그렇지 아니하면 자기부정의 모순에 빠지게 된다.
자동차가 자동차인 것은 자동차의 기능대로 작동하기 때무이다. 자동차가 기능하여 도로 위를 달리지 않고 그저 버려져 있다면 그건 더 이상 자동차가 아니다. 고물덩이일 뿐이다.
인간이 사랑하지 않고, 행복하지 않고 인간의 그 자연스런 본래를 배반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 인간인 것은 인간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고 그 의미를 배반했을 때 인간일 수 없다.
그러므로 만약 인간이 행복을 부인하고, 사랑을 부인하고, 가치를 부인하고, 의미를 부정하고 구원을 배반한다면 그 의미부정은 곧 자기부정이며 자기배반이다.
인간의 판단은 의미를 따라가는 것이며 자기부인이란 그 의미를 부정하므로 판단을 자기판단으로 인정할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순수하게 구원과 의미와 가치와 사랑과 행복을 배반했다면 그 자기부인은 적어도 이성으로 판단된 것일수 없다. 이성으로 판단된 것이 아닌 미쳤거나 사고난 경우다.

애초에 질문은 [왜?]이었다. 모든 답변은 이 [왜?]를 긍정하다는 전제하여 성립되는 것이다. [왜?]는 이성적 질문이며 인간의 이성적 판단을 수용한다는 전제하에서 질문으로서의 의의를 획득한다.
질문이 주어지고 그에 대한 답변이 주어진다. 이것은 하나의 시스템이다. 질문(왜?)은 근거(논거)에 대한 질문이며 근거는 귀결(진술)에 대해 근거이고 근거와 진술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을 긍정한다는 전제로 질문이 성립한다.
섭리는 그 시스템이 인간에 있지 아니하고 자연에 있음을 나타낸다. 그 의의는 존재의 자연성에 기초하므로 해서 인간에 의해 임의적으로 왜곡될 소지를 제거하는 것이다.
섭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시스템이며 구원도 하나의 시스템이고 논거와 진술도 하나의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서로 닮은 꼴이며 그 이유는 자기복제된 것이기 때문이다.
최초에 자기복제의 모태가 되는 것이 섭리이고 거기에서 논리(논거와 진술)와 구원이 자기복제 되었으므로 3자는 본래 동일한 것이고 고로 3단논법을 충족시킨다. 그러므로 옳다.
질문자는 최초에 그 논리의 시스템을 긍정하므로 해서 질문의 유효성을 담보받는다. 그러므로 이미 시스템을 인정했고 따라서 최종적 자기부인은 시스템부인으로 연결되어 질문의 유효성을 상실시키는 것이다.

순수한 자기부인은 시스템의 부인이며, 이성의 부인이며 그 [왜?]의 부인이므로 질문의 의의와 충돌하여 질문을 무의미하게 하고 즉시 유효성을 잃어 폐기된다.
모든 부인은 시스템을 긍정하는 한도 안에서 그 상부구조를 긍정하고 하부구조를 부정한다거나 하부구조를 긍정하고 상부구조를 부정하는 것이어야 한다.

진술 : 사과는 빨갛다.

이 진술의 진위판단을 유효하게 하려면 [사과]나 [빨갛다]의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참이어야 한다. 그것이 [사과]도 아니고 [빨갛다]도 아니면 틀린 진술로 판명되는 것이 아니라 진술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진술 : 돌이는 철이를 이긴다.

진술에서 주어와 술어와 목적어가 다 부정되면 [철이는 돌이에게 진다]가 된다. 그러면 다시 본래의 [돌이는 철이를 이긴다] 가 되어 동어반복이 되므로 무의미해진다. 이 경우 진술의 의의가 없는 것이다.
모든 부인은 시스템을 긍정하는 전제하에서 성립한다. 질문은 질문 그 자체의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서 근거를 묻는 (왜?)의 추궁에서 시스템의 논리를 긍정하게 된다.

확률놀이의 허실

외계생명체는 과연 있는가? 생명체는 과연 자연진화의 소산인가?
이런 문제에 답하려 할 때에는 으례히 확률적 접근을 시도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치명적인 것은 더 높은 단계에 확률을 무색하게 해버리는 거대한 힘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확률에 대해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된다. 확률은 제한된 조건 안에서 성립하는 것이지만 외부에서 침투하는 플러스 알파가 밑바닥에서부터 간섭하여 그 조건을 흔들어버리는 일이 얼마든지 있다. 그 흔들어버리는 힘의 정체를 파악해야 한다.
주사위를 던지면 1에서 6까지 다양한 수가 나오게 마련이다. 그러나 여기에 외부간여의 플러스 알파가 개입한다면 확률은 깨어지고 특정한 수만 반복하게 나오게 된다.
요는 그 외부간여가 어떠한 종류의 간섭이든 간에 무조건 특정한 방향으로만 작용한다는 것이다. 외부간여의 방식이 다양한 만큼 확률적으로 다양한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간섭이든 결과는 한 방향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키질을 하면 티끌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모두 일정한 방향으로만 움직인다. 그 방향은 중앙에서 가장자리로의 이동방향이다.
빠르게 돌아가는 팽이에 채찍질을 하면 그 채찍이 위를 치든 아래를 치든 세게 치든 약하게 치든 힘은 모두 일정한 방향으로만 작용한다. 그러나 멈추어 쓰러지려 하는 팽이는 위를 치면 쓰러지고, 아래를 치면 자빠지고, 세게치면 튕겨가고 약하게 치면 효과가 없다. 정확한 위치에 적당한 힘으로 쳐야만 한다.
세게 돌아가는 팽이처럼 특정한 상태에서는 외부간섭이 어떠한 간섭이든 같은 효과를 내게되는 경우가 있다. 일단 대세상승기에 오르면 어떠한 재료가 나와도 주가는 올라가고 반대로 대세하강기가 되면 어떠한 재료가 나와도 주가는 내려간다.
세상은 확률에 지배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이 섭리라는 것이 개입하여 확률을 무색하게 만들어 놓는다. 섭리를 알아야 변화의 정확한 방향을 예측할수 있다.

틈새의 법칙

지구상에는 수천만종의 생명체가 있지만 그 대부분은 섭씨 0℃에서 35℃ 사이의 좁은 틈새에 몰려있다. 온도는 수억도, 수십억도의 고온에서 절대온도까지 넓은 대역을 가지고 있지만 거기서 생명체가 주로 활동하는 영역은 그 수억 분의 1에 못미치는 아주 작은 틈새이다.
계절의 변화, 밤낮의 기온차 때문에 생명체가 살 수 있는 영역은 평균기온 10℃에서 30℃의 작은 틈 뿐이다. 이 광할한 우주에 그런 조건을 만족시키는 지역이 존재할 확률은 매우 적다.
생명체가 이 좁은 틈새에 몰려있는 것은 모든 생명체가 물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이 열역학적 반응법칙 상 가장 적절히 생명반응을 포용해 주는 온도대역은 매우 좁은 하나의 틈이다.

우주선이 지구로 귀한하려면 그저 지구로 풍덩 뛰어든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너무 빠르게 뛰어들면 불타버리고 너무 느리게 뛰어들면 관성에 의해 지구밖으로 튕겨나가버린다.
우주선이 지구로 무사귀한할수 있는 각도는 아주 좁은 하나의 틈이다. 우주선은 기수를 그 좁은 틈에 정확히 맞추어 그 작은 틈바구니 새로 기어들어야만 지구로 무사히 안착할수 있다.
세상 모든 곳에 이러한 틈들이 있다. 그리고 그 틈은 매우 좁다. 변화하는 모든 것은 이 틈새의 법칙에 지배되므로 확률은 실상 우리가 알고 있는 통념보다 훨씬 더 낮다.

인체를 지배하는 것은 효소이다. 신경전달 물질이나 내분비물질에서 호르몬에 이르기 까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단백질로 이루어진 고분자이다. 중요한 점은 오로지 이것 하나이면 다른 것은 더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단백질이 그 인체의 신비를 대강 결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단백질 이외에는 고분자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가능하지도 않다는 점이다.
인체는 거대한 공장이며 그 공장은 여러 가지 처리해야할 원자재와 처리기관과 그 기관들에 명령을 전달하는 정보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정보전달의 역할은 고분자라는 한가지 집단이 도맡고 있으며 그 고분자는 모두 단백질의 여러 가지 형태의 결합상이다.
단백질만이 인체의 여러기관에 정보를 전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다른 대개의 물질은 고분자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근래 생명공학은 거의 고분자화학으로 되어가고 있다. 단백질의 비밀을 푸는 것만이 인체의 비밀을 풀어낼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

원자들은 원소기호 1번 부터 106번 까지 다양한 형태가 있지만 실상 여기서 다양한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몇가지 원소로 한정되어 있다.
원소기호는 질량을 나타내며 화학반응은 그 질량의 차이로부터 유도되는 바 질량이 큰 원자들은 타 원자와의 화학적 성질 차이가 적어서 화학반응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화학반응은 수소와 산소 등 원소주기가 겹치는 몇몇 원소에 한정된다. 이 중에서 고분자를 만드는 것은 거의 탄소동위원소들 뿐이다.
106가지 원소들 중 극소수의 몇가지 원소가 지구지각의 90프로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그 중 탄소화합물만이 모든 생명체의 근간이 된다. 또한 아주 작은 하나의틈새이다.
생명현상들이 다양한 확률의 영역을 점거하지 못하고 틈새에 몰려있는 것은 변화를 내포해야 하기 때문이다. 변화하려면 반드시 특정한 관문을 통과해야 하고 그 관문은 하나 뿐이기 때문이다.

최적화 이론(섭리에 의한 자연도태와 최적화 선택)

UFO에 대한 인간의 상상은 대개 접시원반 모양으로 그려내어진다. 그러나 이것은 섭리를 알지 못하는 인간의 상상일 뿐이다. 섭리를 안다면 접시모양의 비행체로는 비행이 불가능하다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모든 비행하는 것, 모든 변화하는 것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다섯 개의 관문, 다섯 개의 좁은 틈이 있다. 틈은 섭리의 틈이며 기능적 최적화로 나타나고 이 틈새에 최적접근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외부간섭에 의해 도태된다.
비행체는 반드시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기능을 가져야 한다. 변화를 내포해야 하기 때문이다. 변화하지 않는다면 기능들은 필요하지 않으나 비행접시는 비행해야 하고 비행한다는 것은 변화한다는 것이므로 사전에 변화가능성이 기능적으로 담보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물리성질은 공간, 입체, 면, 선, 점의 수리성질로 변환되고 근접도, 완성도, 균형도, 속도, 정확도의 섭리로 이행한다. 이 모든 것이 비행접시 안에 들어있어야 한다.
비행한다는 것은 중력을 극복하여 공기중을 통과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간섭하는 것은 공기와 중력이다. 이 간섭들을 이길수 있는 기능이 비행접시 안에 들어있어야 한다.

차원 --- 5 4 3 2 1
물리 --- 질 입자 힘 운동 량
수리 --- 공간 입체 면 선 점
섭리 --- 근접도 완성도 균형도 속도 정확도

2차원의 섭리는 운동이다.
비행접시가 움직이려면 그것은 물리에서 운동이며 운동은 수리에서 선이고, 섭리에서 속도이다. 비행접시가 빠르게 날아가려면 그 속도가 최적화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비행접시의 동체모양이 선의 형태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선의 형태는 공기의 간섭을 막아준다.
화살이든 자동차든 기차든 비행기든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선의 형태를 가지며 속도가 빠를수록 더욱 선의 형태에 가깝다. 이는 섭리이며 이 섭리를 부인하고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없다.

3차원의 섭리는 힘이다.
비행접시가 운동하려면 힘이 있어야 하고 물리에서 힘은 수리에서 면이며 섭리에서 균형도이다. 비행접시가 날아가기 위해서 힘을 내려면 그 추진력의 힘은 반드시 면의 형태로 나타난다.
모든 힘은 인력과 척력의 균형에서 성립한다. 원심력과 구심력 작용과 반작용의 균형이다. 그 균형은 반드시 변의 형태로 성립한다. 고로 힘을 나타낼수 있는 모든 것은 그 내부에 면의 형태를 내포한다.
사람이 걸어가기 위해서는 발로 땅을 디뎌야 한다. 그래서 발바닥은 평면이다. 자동차가 굴러가기 위해서는 바퀴가 지면과 접촉해야 한다. 타이어면도 역시 면이다.
헬기의 프로펠러나 스크류의 회전날개면도 면이며 제트엔진의 흡기, 배기 부분도 면의 형태로 되어 있다. 자동차 엔진의 피스톤도 폭발력을 담보하기 위해 면의 형태를 가지며 물고기의 지느러미도 역시 면이다.
힘을 발휘하는 것 중에서 면의 형태를 내포하지 않는 것은 없다. 위 그림에서 보듯이 물리가 힘이면 수리는 면이기 때문이다. 그 면이 섭리에서 힘의 균형과 그 균형의 파괴를 통한 운동을 이끌어낼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움직이는 것은 운동이며 그 운동은 힘의 균형에서 성립하고 그 균형은 면에서 성립하기 때문에 움직일수 있는 것 치고 면의 형태를 내포하지 않는 것은 없다. 면의 형태는 지구중력의 간섭을 막아준다. 이는 절대적 법칙이다.

4차원의 섭리는 입자다.
비행접시가 힘을 가지려면 그 힘을 담아두는 구조적 형태를 가져야 하며 그 형태는 물리에서 입자이고 수리에서 입체이며 섭리에서 완성도이다.
입자는 자동차, 비행기라면 연료통이고 사람이라면 근육들이며 야구공이라면 질량을 담보하는 체적이다.
힘은 미는 힘이며 미는 힘은 밀려서 밖으로 나가버리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힘을 발휘하려면 이것을 붙잡아두는 내부장치가 반드시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입체의 형태를 가져야 한다.
속도가 운동과정에서 공기와의 간섭, 균형도가 힘의 작용순간에서 중력의 간섭이라면 완성도는 자기내부에서 기능의 간섭이다. 힘을 발휘하는 순간 완성도가 떨어지면 스스로 붕괴해버린다. 지나치게 출력이 높은 엔진을 낡은 수레에 달아놓으면 부서져버리는 것이다.
섭리는 완성도다.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것은 그 힘을 내부에 담지 아니하는 즉 외부의 힘에 의해 운동하게 되는 것이다. 자동차든 비행기든 내부의 힘에 의해 운동하려면 반드시 입체적 내부공간이 있어야 한다.

5차원의 섭리는 질이다.
비행접시가 입자를 가지려면 외부로부터 독립해야 한다. 그 독립된 성질이 질적 형태이며 물리에서 질이고 수리에서 공간이고 섭리에서 근접도이다.
돌이 바위의 일부로 달라부터 있을 때 우리는 그저 암석이라 부르지 돌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독립해 있어야 비로소 돌의 기능을 가진다. 그래야만 사람이 손으로 집을수 있고 던질수 있고 가지고 놀수 있기 때문이다.
근접도는 외부에서 그 대상에 접근할수 있는 정도를 말한다. 독립해 있지 않다면 집울수 없고 던질수 없고 만질수 없다. 즉 근접도가 떨어진다.
입자에서 간섭이 자기내부에서의 기능적 간섭이라면 근접도의 섭리는 자기바깥에서의 간섭이다. 그 비행접시를 타는 사람의 간섭이다. 비행접시는 반드시 외계인이 올라탈수 있는 형태를 가져야 한다. 근접도가 떨어지면 탈 수 없다.
자동차든 비행기든 비행접시든 사람이 거기에 올라타고 조작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접근할수 있는 형태를 가져야 한다. 즉 특정공간을 차지하고 독립해 있어야 하는 것이다.

1차원의 섭리는 량이다.
비행접시가 있다면 나타나보인다. 그 나타나는 성질이 물리에서 량이고 수리에서 점이며 섭리에서 정확도이다.
운동한다 것은 침투한다는 것이며 침투한다는 것은 나타난다는 것이다. 나타나는 것은 량이 있기 때문이다. 질량, 크기의 량, 힘의 량, 속도의 량, 색깔의 량들이 구체적으로 계측된다.
량이 계측되지 않으면 그것은 없는 것이다. 비행접시가 지나가면 반드시 공기와 간섭이 일어나며 그 간섭은 소리의 량으로 인간에게 계측된다. 아무 흔적을 남기지 않고 완전히 숨을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 뿐이다. 반드시 흔적이 남는다.
1차원에서의 간섭은 자기가 타방에 대하여 행하는 간섭이다. 즉 외부에서 이쪽으로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이쪽에서 외부에 작용하여 반드시 흔적을 남기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이 있다면 반드시 흔적이 남는다. 정확도가 높을수록 흔적은 뚜렷하다. 그 흔적이 추론의 단서가 된다.

모든 존재하며 변화하는 것은 반드시 간섭하며 그 간섭의 방해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최적화의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그 간섭은 량의 간섭, 운동의 간섭, 힘의 간섭, 입자의 간섭, 질의 간섭들이다.
최적화되어야 한다. 최적화 된 것만이 적자선택되며 최적화의 관문을 돌파하지 못하는 것은 그 비효율성으로 해서 자여도태된다. 적자선택과 자연도태는 진화의 법칙이 아니라 모든 우주존재내에서 변화하는 것에 반드시 적용되는 일반법칙이다.
그 최적화하기는 좁은 틈새를 통과하는 것이다. 지상에 무수한 것들이 있지만 변화하는 것은 변화의 관문을 통과해야 하고 그 관문은 섭리의 관문이며 섭리는 간섭하고 그 간섭은 최적화한 단 하나만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조리 자연도태시킨다.

최적화 찾기

운동하는 것은 선의 형태를 가지고 속도를 담보하며 빠를수록 더욱 선형이다. 여기서 너무 긴 선이면 힘이 약해지고 선이 아니면 속도가 느려진다. 거기서 가장 적절한 형태가 최적화이며 그 최적화한 형태는 비례관계로 나타나고 그 비례에 알맞는 형태는 단 하나뿐이다.
황금비례에 맞는 황금형태는 오직 하나다. 프로펠러라면 그 날개면의 각도는 그 속도와 추진력과 비례를 통해서 설정된다. 물속에서 스크류는 넓은 면이고 비행기에서는 좁은 면이다. 여기에서 각자에 맞는 최적형태가 찾아진다.
같은 속도로 효과의 양을 최적화하기, 같은 힘으로 속도를 최적화하기, 같은 기능(입자)으로 추진력의 마력을 최적화하기, 같은 공간(질)으로 기능을 최적화하기, 같은 대상으로 공간을 최적화하기의 다섯가지 과제가 주어진다.
각각의 단계에 맞는 최적화된 형태는 단 하나뿐이다. 가장 알맞는 비례가 존재한다. 거기서 더할수 없고 뺄수없다. 비행기라면 이상적인 동체모양, 자동차라면 이상적인 마력, 자전거라면 이상적인 크기가 존재한다.
최적화된 경우는 단 하나뿐이고 그 단 하나만 외부간섭에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는다. 그것이 섭리다. 적자만 선택되고 나머지는 도태된다.

공간의 최적화....질 공간 근접도 ...최적화 않으면 손댈수 없다.
기능의 최적화....입자 입체 완성도 ...최적화 않으면 부서진다.
균형의 최적화....힘 면 균형도 ...최적화 않으면 힘이 없다.
속도의 최적화....운동 선 속도 ...최적화 않으면 느려진다.
효과의 최적화....량 점 정확도 ...최적화 않으면 효과 없다.

그 어떤 것이든 최고의 소재, 최고의, 기능, 최고의 성능, 최고의 효능, 최고의 미감을 내는 황금형태가 있다. 자연은 서로 간섭하고 마찰하고 개입하여 그 하나만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조리 도태시킨다.

플러스 알파 찾기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반드시 그것을 존재하게 하는 더 넓은 범위, 더 높은 차원의 영역이 있게 마련이고 그 높은 영역은 변화에 있어서 개입하여 간섭한다. 그 간섭의 효과는 일정한 방향으로만 나타나고 이 지향성이 확률을 무의미하게 만들며 모든 사태를 전반적으로 결정한다.
플러스 알파의 간여이다. 전장바깥의 요소, 전장을 만들어내는 전제조건이다. 이 조건들이 하나의 관문이 되어서 이 관문을 통과해야만 변화가 유발된다.
관문은 함수관계의 함이다. 모든 변화는 작용과 수용의 상대방을 가지며 일방이 타방을 공격하려면 반드시 그 함을 통과해야 한다.
여기서 변화의 힘은 그 함의 유동성에서 나오며 여기서 사태의 전반이 결정되고 따라서 확률의 유효성은 그 플러스 알파의 간여크기에 지배되며 그 크기보다 작다. 고로 그 관문을 통과하는 즉 최적화되는 단 하나의 요소에 의해 지배된다.
플러스 알파는 하부구조에 대해 상부구조의 간섭이다. 양을 간섭하는 것은 운동이며 운동을 간섭하는 것은 힘이며 힘을 간섭하는 것은 입자이며 입자를 간섭하는 것은 질이며 질을 간섭하는 것은 이 패러다임의 연속성이다.

작용 간섭의 플러스 알파
량 -- 타이어의 지면 마찰력 지면의 미끄러운 정도
운동 -- 자동차의 속도 공기저항
힘 -- 자동차의 출력 자동차의 하중
입자 -- 자동차의 크기 자동차구성품의 견고한 정도
질 -- 운전기사의 능력 도로체계, 목적지

위에서 자동차의 기능과 성능을 전반적으로 결정하는 작용의 미학적 근접도, 완성도, 균형도, 속도, 정확도가 간섭의 플러스 알파보다 우위에 있을 때 비로소 자동차는 달릴수 있다.
플러스 알파는 간섭하며 간섭은 항상 바깥에서 주어진다. 자동차 외부조건이 자동차에 개입해 침투해 들어오며 내포가 외연보다 더 클 때 자동차는 달릴수 있다.

미학

모든 변화는 일정한 방향, 일정한 순서로 일어나며 그 변화의 단계에서 외부간섭에 영향을 받고 그 간섭에서 하나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도태된다. 고로 확률은 우리의 통념보다 낮으며 우리는 그 하나를 포착하므로서 변화를 전반적으로 장악하고 주도할수 있게 된다.
어떤 특정한 것이 다른 무수히 많은 것들 속에 섞여 있다면 우리는 키질의 방법으로 그 하나를 골라낼 수 있다. 원심분리기에 넣고 돌려 버리는 것이다.
원심분리기의 회전은 외부간섭이다. 외부간섭은 무수하게 많고 다양하지만 결국 하나의 일정한 효과만을 이끌어 낸다. 원심분리기 안에서 개체들은 이리저리 좌충우돌하지만 결국 한쪽 방향으로만 밀려난다.
외부에서 간섭하면 재정렬된다. 이것이 섭리이고 인간에게서는 구원이며 미학에서는 미다. 아름다움은 그 미추를 구분하는 원심분리기다. 회전하여 걸러낸다.

미학은 섭리에 기초하고 섭리는 존재론에 속한다. 먼저 물리가 이끌어오고, 수리가 성립시키며, 섭리가 간섭하고, 논리가 해체하며, 정리가 한정한다. 섭리의 간섭이 미학을 낳는다.
존재론은 과학에 앞서 과학의 근거가 되는 이치이다. 이치가 전개하여 과학을 낳는다. 과학영역에서 물리는 전개하여 물리학이 되고, 수리는 수학이 되고, 섭리는 미학이 되고, 논리는 논리학이 되고, 정리는 언어학이 된다.
미학이야 말로 존재론의 제 분야들에서 인간들과 가장 친밀하면서도 전인미답의 미개척지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학이다.
학문분야는 상관관계를 따라 서로 연관되어 있다. 고구마 줄기에서 고구마가 딸려나오듯 전체는 하나의 줄거리로, 연속적 스펙트럼으로 이어져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분에서 전반을 포착해내지 못하는 것은 결정적으로 미학에서 막혀버리기 때문이다.
이론과 과학의 연결고리인 미학을 알므로서 부분을 보고 전체를 파악할수 있다. 학문분야들이 개별적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패러다임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섭리란 서로 다른 둘이 별개이면서도 잇닿아 있어 서로 간섭하고 침투하며 작용하는 원리이다. 우리는 미학하지 못하므로서 서로 이어져 있는 하나로 있는 것을 단절시켜 별개로 인식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분별지의 오류에 대해 통합지, 부분에서 전체를 통찰해내는 원리는 양자를 연결하는 연결고리인 미학의 섭리로 해서 가능하다. 미학에 의해 우주는 단 하나의 커다란 체계로 재정렬된다.
미학은 존재에서 자연이 상호간섭하는 원리를 인간에 도입하여 인간이 세계와 접촉하는 원리를 풀어낸다. 곧 인간의 구원, 의미, 가치, 사랑, 행복의 근거를 인간의 변화무상한 욕망이 아닌 존재의 변함없는 본래적 성질에서 찾아낼수 있는 것이다.

최초 섭리가 있다. 섭리는 자연의 상호간섭이다. 인간에 도입되어 인간의 상호간섭은 구원이다. 곧 구원, 의미, 가치, 사랑, 행복은 자연의 섭리를 인간이 받아들여 인간들끼리 상호간섭하기인 것이다.
섭리를 문학 예술의 창작에 대입하면 형이하학으로서의 미학이 된다. 음악이든 미술이든 건축이든 디자인이든 문학이든 스포츠든 문예, 오락 일반에 있어 그 본질은 인간의 자연에 대한 세계에 대한 적극적인 간섭하기이다.
우리는 음악으로 자연의 소리에 간섭하고 그림으로 자연의 색채에 간섭한다. 건축으로 공간적 질서에 간섭하기도 하며, 스포츠로서 인간들끼리의 부대낌에 간섭하기도 하고, 문학으로서 사고와 행동에 간섭하며, 레저로, 오락으로 또 더많은 것들에 간섭한다. 그 모든 것에 미학이 필요하다.

섭리는 근접도, 완성도, 균형도, 속도, 정확도이다.

존재론 물리┃질 입자 힘 운동 량
(자기복제의 공간요소) 수리┃공간 입체 면 선 점
┏━━━━━━━━━━━━━━━━━━━━━━━━┓
┃ 섭리┃근접도 완성도 균형도 속도 정확도 ┃
┗━━━━━━━━━━━━━━━━━━━━━━━━┛
논리┃배중률 동일률 모순률 인과율 한정률
언어┃배경 실체 연관 이행 귀결
━━━╋━━━━━━━━━━━━━━━━━
┃보편자 개별자 구조 작용 현상
(자기복제의 시간적진행)

간섭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둘이 하나로 이어져 있되 그 이어진 정도가 가변적인 상태를 말한다. 둘 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하나와 둘 사이의 중간이다.

최초 물리는 변화를 당하는 쪽과 유발하는 쪽의 서로 다른 둘이 별개의 둘을 유지하면서 서로 이끌리는 정도를 나타낸다. 여기서는 핵심은 어디까지나 둘이라는 점이고 그 둘을 통일하는 관계가 하나이다.
수리는 그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의 내부로 침투하여 하나가 된 상황이다. 즉 여기서의 핵심은 둘이 아닌 하나의 실체라는 점이다.
섭리는 그 전체의 하나 안에서 부분의 둘이 공존하는 방식이다. 부분의 둘은 둘이어서 서로 반발하지만 그 둘을 통일하는 하나에 의해 구속된다. 여기서 핵심은 미는 힘과 구속하는 힘의 균형이 팽팽해서 하나라고 볼수도 없고 둘로 볼수도 없는 절묘한 균형상태라는 점이다.
논리는 하나에서 둘로의 이행과정이다. 변화가 일어나서 하나가 해체되고 둘로 나아간다. 여기서의 핵은 하나나 둘이 아니라 시간상의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이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둘이 되지만 지금은 진행과정이다.
정리는 완전히 구분된 둘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그 둘이 하나로부터 해체되어 나온둘이므로 반드시 둘이 공유하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는 둘이라는 점이다. 즉 둘이되 닮은 꼴의 둘이다. 그리고 그 닮음은 하나이다.

변화는 자기복제이며 자기복제는 하나에서 둘로의 이행이다. 최초 물리에서 공간변수와 시간변수의 서로 다른 둘이 만나서 하나의 관계를 만들고, 수리에서 둘이 완전히 통합하여 하나의 실체를 만들며, 섭리는 그 하나의 실체 내부에서 둘이 공존하고, 논리는 다시 둘로 해체되며 정리는 완전히 둘로 구분된다. 이것이 자기복제에서 하나가 둘로 나뉘어지는 과정이다.

섭리(낫다) : 근접도 완성도 균형도 속도 정확도
미학(좋다) : 멋(매력) 아름다움 어울림(앙상블) 고움 예쁨

섭리와 미학의 차이는 그 판단기준을 대상의 자연존재에 두는가 인간의 기호에 두는가의 차이이다. 섭리는 그 자연성을 좇아 그것이 더 낫다는 객관적인 판단이며 미학은 인간의 기호를 좇아 그것이 더 좋다는 주관적인 판단이다.
인간의 주관이라고 해서 근거없는 것일수는 없다. 주관은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것을 개인이 간여하여 수용하는 정도의 차이를 둔 것일 뿐이며 그 근거에서는 주관도 역시 객관적 사실로부터 유도된 것이다.
자연은 객관으로 존재하며 인간도 그 자체로 객고나으로 존재한다. 주관은 양자의 대응방식에서 빚어지는 스펙트럼일 뿐이다. 그 스펙트럼은 확률적 오차한계 안에서만 기능한다.

[낫다]는 그 대상 자체의 고유한 내부기능에서 객관적인 가치판단이며 [좋다]는 플러스 알파로서의 인간의 기호가 개입한 주관적인 가치판단이다.
[이 사람이 더 낫다]고 하면 타인들과 비교해서 더 우월한 사람이다. [이 사람이 더 좋다]고 하면 나 자신의 기호에 대입해서 내 취향에 맞는 사람이다.
인간의 자기판단은 좋다이지만 그 근거는 자연의 낫다로부터 취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미학적 가치판단에서 아름답다, 곱다, 예쁘다 하는 분별들이 지극히 주관적이며 임의적어서 증명될수 없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에서 뚜렷한 개관적 근거가 있음을 말한다.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미다. 미는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분명한 근거가 있다. 먼저 근거가 되는 진이 있고 그 진을 인간이 실천하는 것이 선이고 그 선한 실천을 평가하여 거기서 미를 획득하는 것이다.
자연의 본래는 객관이지만 인간의 인식은 진에서 선으로 진행하는 단계에서 한번 굴절되고 선에서 미로 진행하는 단계에서 또한번 굴절되어 색갈이 다양한 스펙트럼의 주관을 낳는다. 그러나 환원론의 방법으로 엄정한 평가를 유도할수 있다.

<진> 섭리(낫다) : 근접도 완성도 균형도 속도 정확도
<선> 구원(하다) : 구원 의미 가치 사랑 행복
<미> 미학(좋다) : 멋 아름다움 어울림 고움 예쁨

진은 존재론 개념이며 선은 인식론 개념이며 미는 시간변수로 실천개념이다. 우리는 진이 선에 앞서며 선이 미에 앞서는 개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직관력에 기초하여 막연히 그렇게 느낄 뿐 구체적으로 왜 진이 선에 앞서는 것인지 증명해내지 못한다.
직접도 읽기는 이러한 개념의 혼돈을 명쾌하게 해결한다. 자연존재의 진이 근거가 되고 인간인식의 선이 동기가 되며 미는 그 시간적 실천의 성과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어떠한 아름다움이라도 그것이 선이 아닐때는 진정한 아름다움이 아니며 선일 때는 별로 아름다운 거 같아보이지 않아도 그 내부를 들여다 보면 무척 아름답다는 것을 직관력으로 꿰뚫어 알게 되는 것이다.
좋은 것은 아름다운 것이며 아름다움은 실천에서 나오고 그 실천은 나쁜 것을 나은 것으로 바꿔놓는 선이다. 선은 행하는 것이며 그 행함은 인간이 적극 자연존재에 개입하여 자연의 상호간섭하는 원리를 좇아 근접도와 완성도와 균형도와 속도와 정확도를 높여두는 것이다.

1. 근접도 : 근접도는 서로 다른 둘이 서로 상대를 끌어들이는 정도를 나타낸다.
물리에서는 질이고, 수리에서는 공간(비례식)이며, 논리에서는 배중률이 성립하고, 언어에서는 배경의 범주에 해당한다. 인식에서는 구원이 되며 미학에서는 멋(매력)이 된다.
멋있는 것이 근접도가 높은 것이다. 멋있으려면 먼저 서로 다른 둘이 있어야 하고 그 둘은 서로 성질이 다른 별개의 것이어야 한다. 비슷한 것이라면 그저 축적될 뿐 반발하거나 끌어당기지 않는다.
멋이 주요하게 평가되는 시장은 패션이다. 그리고 패션에서 멋은 대개 꼭 필요하지 않은 것, 서로 소재가 다른 것, 이질 적인 것을 적절히 끌어들여 두는 것이다.
멋을 부린다는 것은 굳이 쓰지 않아도 되는 모자를 쓴다든가 궂이 필요하지 않은 장식을 단다던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꼭 필요한 것이라면 반발력이 없고 반발력이 없을 경우에는 매력도 없다.
멋있다는 것은 굳이 필요하지 않으므로서 서로 반발하는 것을 특별한 방법으로 그 반발력을 순치시켜서 끌여들여 내는데 성공시켜 내는 경우를 말한다. 그러므로 멋잇기 위해서는 일단 반발되는 정도가 강해야 한다.
멋진 여자, 혹은 남자라면 그 반발력 때문에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이를 가리킨다. 타인으로 하여금 쉽게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도리어 그 접근에의 열망을높이는 데서 멋의 탄성을 불러 일으킨다.
음악가가 음악을 잘하는 것은 멋이 아니다. 음악가가 미술에도 조예가 있다면 멋이다. 시인이 시만 잘 쓰면 멋이 아니다. 시인이 노래도 잘부르면 멋이다. 멋은 서로 다른 이질적인 것을 끌여들인다.
인간은 누구나 타인에게 개입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개입할수 없다. 아주 작은 틈이 있고 그 하나의 작은 틈새로만 개입이 허용된다. 그 하나를 찾는 것이 멋의 미다. 잘못 개입하면 매우 어색해진다.

2. 완성도 : 완성도는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 내부로 침투하여 둘이 하나가 되었을 때 그 포용되는 정도를 말한다.
물리에서는 입자이고, 수리에서는 입체(방정식)이며 논리에서는 동일률이 성립하고, 언어에서는 실체의 범주에 해당한다. 인식에서는 의미가 되고 미학에서는 아름다움(조화)이 된다.
완성도 높은 좋은 그림이란 그 그림 중 일부를 제거했을 때 그 빠진 부분이 매우 아쉬운 경우이다. 조금도 거기에 더해져서 안되고 일부가 빠져나가도 아니된다. 부분적 손실이 있을 때 전반적으로 무너지므로 손실을 허용하지 않는 정도가 높을수록 완성도가 높다.
이발소 그림은 그 그림 중 일부를 잘라내어도 미학적으로 별 차이가 없다. 대개 완성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그림 중 굳이 필요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좌우대칭이 심해서 그림의 절반을 잘라내어도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완성도 높은 건축물이라면 불국사의 석가탑이다. 석굴암의 불상에서도 그런 완벽한 조화미의 극치를 발견할 수가 있다. 거기에 우리는 무엇을 더 추가하거나 배제할수 없다.
음악이나 문학이나 그 모든 것에서 우리는 완성도 높은 아름다움을 발견할수 있다. 거기에서 단 하나도 제거되어서 안되고 추가되어서 안되는 꼭 알맞는 형태가 있다.
조금이라도 더 추가하면 사족이 되고 둘로 쪼개진다. 조금이라도 훼손하면 무너질 것만 같다. 그 미학적 황금형태가 존재하며 그 황금형태는 단 하나 뿐이다. 단 하나의 방법으로만이 그 이상적 형태에 도달할수 있다.

3. 균형도 : 균형도는 둘을 통일하는 하나 안에서 둘만의 50 : 50의 균형이다.
물리에서는 힘이며 수리에서는 면(등식)의 원리에 지배되고 논리에서는 모순률, 언어에서는 연관범주가 된다. 인식에서는 가치가 되고 미학에서는 어울림(앙상블)이 된다.
균형도가 근접도와 다른 점은 근접도의 멋이 서로 이질적인 별개의 둘인데 비해 균형도는 이미 한팀에 소속된 하나 안에서의 둘이라는 것이다.
부부라면 이미 한팀이다. 그러므로 부부간의 공존하는 포즈는 멋진 것이 아니라 잘 어울리는 것이다. 그러나 서로 모르는 두 남녀가 만나 한 쌍이 되려한다면 이는 아직 분명히 한팀이 된 것이 아니므로 그저 멋진 커플이다.
멋은 아직 미처 이루어지지 않은 것의 그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음을 말하고, 아름다움은 이루어진 상황에서 이루어진 정도를 말하고, 어울림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 외부로 나타내보임을 말한다.
패션이라면 드레스에 꽃이나 보석의 장식이라던가 머리핀 모자 등을 부착할까 말까 하는 단계에서 멋이고, 부착한 단계에서 아름다움이고, 부착한 이후에도 그 아름다움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어울림이다.
상의와 하의, 좌와 우, 위와 아래처럼 반드시 있어야 하는 부분의 공존이 어울림이고 꼭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한때 유행으로 사라져버리는 것들이 멋이다.
균형은 50 : 50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 둘이어야 한다. 균형은 언제나 남자와 여자, 여당과 야당, 해와 달, 음과 양, 산과 바다의 2분법을 쫓아간다.

4. 속도 : 속도는 하나에서 둘로 해체되는 변화의 시간적 진행과정에서 외부간섭을 포용하는 유연한 정도이다.
물리에서는 운동이고 수리에서는 선(수식)의 원리에 지배되며 논리에서는 인과율에 지배되고 언어에서는 이행범주에 해당한다. 인식에서는 사랑이고 미학에서는 고움이다.
경직된 것, 배타적인 것, 움직이지 않는 것은 곱지 못한 것이다. 움직이되 부드럽고 유연하며 생동감이 있어 발랄한 것이 고운 것이다. 변화를 포용하지 못하는 것, 거추장 스러운 것, 움직이려면 방해가 되는 것들이 징그러운 것들이다. 곱다는 것은 징그러운 것에 대해 고움이다.
흐르는 강물은 유연하다. 거기에 인간이 뛰어들어도 별 탈이 없다. 곱다. 그러나 날카로운 금속성의 기계들은 그 움직임에 인간이 개입할수 없다. 징그럽다.
멋이 끌어오고, 아름다움이 통일한다면, 어울림이 그 공존을 지속시키고 고움은 그러면서 시간상에서 유연하게 변화에 대응하게 한다.
대개 나쁜것들의 공통점은 그냥 두면 좋은데 움직이려 하면 방해가 되는 성질이다. 그것은 딱딱하고 차갑고 징그러워서 인간들의 접촉을 허용하지 않느다. 즉 포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고운 것들은 인간들의 촉수를 허용한다. 벌하지 않고 심판하지 않고 용서하고 받아들이며 돕는다. 그런 사람이 고운 사람이다.

5. 정확도 : 정확도는 변화가 일어나 해체되어 이미 둘이되었을 때 그 명백히 구분되는 정도이다.
물리에서는 양이고 수리에서는 점(단수)이며 논리에서는 한정률에 지배되고 언어에서는 귀결범주에 해당한다. 인식에서는 행복이고 미학에서는 예쁨이다.
예쁘다는 것은 뚜렷하게 구분된다는 것이다. 불투명하지 않고 흐릿하지 않고 분명히 지각된다.
정확도의 조건은 분명히 구분되는 둘이어야 하면서도 그 둘은 본래 같은 성격의 공통분모를 공유하는 둘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즉 둘이지만 본래 하나에서 갈라져 나온 둘이 예쁘다.
빨강과 파랑은 같은 색깔의 범주이면서 전혀 다른 색깔이다. 이렇게 같은 범주 안에서 서로 분명히 구분되어 다른 것이 예쁜 것이다.
예쁜 얼굴이라면 이목구비가 뚜렷해야 한다. 뚜렷하다는 것은 분명히 구분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뚜렷함이 얼굴선을 깨뜨리는 것이어선 안된다. 얼굴선을 깨뜨린다면 공존의 범주가 깨어지는 것이다.
이질적인 것이 전혀 없이 같은 범주끼리만 모여있어 공존에 무리가 없되 그러면서도 그 안에서 매우 차별화 되는 것이 예쁜 것이다. 범위의 바깥으로 돌출되고 튀어나가서는 뚜렷해도 예쁜 것이 아니다.

미학의 이해는 미학의 가치 곧 근접도, 완성도, 균형도, 속도, 정확도에 수준 차이가 있어서 근접도가 가장 우선되는 가치이고 같은 근접도 안에서 완성도를 나중 판단하며 그 다음으로 균형도를 판단하고 더 뒤에야 속도를 그리고 정확도를 가장 나중 판단한다는 것이다.
아름다움들 중에 예쁨이 가장 낮은 수준의 아름다움이다. 고움이 예쁨보다 높은 가치이고 어울림은 고움보다 더 우선되는 가치이며, 아름다움이 어울림보다, 멋있음이 아름다움보다 더 숭고한 가치이다.
거꾸로 어린 아기일수록 예쁨에 먼저 눈이가고 어릴수록 고운 것을 찾는다는 점이 주요하다. 멋있음이나 아름다움은 상당히 추상적인 가치여서 아기들은 판단해내지 못한다.
미학의 필요성은 우선 눈에 띄는 예쁨이나 고운보다 깊숙히 감추어진 아름다움이나 멋있음을 찾아내고 더 우선하기 위한 것이다. 문학이나 음악이나 미술이 건축에 다 그러한 측면이 있다.
우선 보기에 좋아 예쁜 것이 사용하기에 불편하여 곱지 않고, 단순히 고운 것이 놓아두면 주변과 어울리지 않아 주위를 망치며, 쉽게 어울려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역할을 못해주어 아름답지 않고, 상당히 아름답기는 하지만 나랑은 상관없는 것이어서 나로 하여금 다가가고 싶지 않게 하니 멋없다.
먼저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근접도이며 멋이다. 또 스스로 기능해야 한다. 완성도이며 아름다움이다. 주위와도 어울려야 하고 방해되지 않고 차별화되어야 한다.
무엇을 먼저 고려하고 무엇을 먼저 따지고 어느것을 우선하는가의 문제이다. 예쁜 사람보다는 고운 사람, 고운 사람보다는 어울리는 사람, 어울리는 사람보다는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사람보다는 다가갈수 있는 사람이 우선되어야 한다.

집적도 공식의 분석은 이런 판단을 매우 용이하게 해준다. 어떤 것이 근접도이고 어떤 것이 완성도인지 공식으로 풀어보면 쉽게 알수 있다.

+--------+ +---------+ +--------+ +--------+ +---------+
| 근접도 | | 완성도 | | 균형도 | | 속도 | | 정확도 |
| | | | | | | | | |
|질 | |입자 | |힘 | |운동 | |량 |
|공간 | |입체 | |면 | |선 | |점 |
|배중률 | |동일률 | |모순률 | |인과율 | |한정률 |
|배경 | |실체 | |연관 | |이행 | |귀결 |
|구원 | |의미 | |가치 | |사랑 | |행복 |
|멋 | |아름다움 | |어울림 | |고움 | |예쁨 |
+--------+ +---------+ +--------+ +--------+ +---------+

그림을 보아서 구원개념은 배경범주에 대응하고 의미개념은 실체범주에 대응하고 가치개념은 연관관계에 대응하고 사랑개념은 이행범주에 대응하고 행복개념은 귀결범주에 대응한다는 것을 알수 있다. 같은 차원끼리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멋은 공간적인 것이고 아름다움은 입체적인 것이며 어울림은 평면적인 것이고 고움은 선적인 것이고 예쁨은 점적인 것임이 드러난다.

이 모든 것의 근본이 되는 것은 섭리이다. 섭리는 자연이 상호간섭하는 원리이다. 자기복제로 하여 하나가 둘로 쪼개질 때 그 하나와 둘 사이에서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아날로그 변환을 포착하는 것이다.
섭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변화가 있을 때 변화는 특정한 방향을 지향하여 진행하며 그 모든 것이 그렇게 되게 되어 있음을 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될 수 뿐이 없게 되어 있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다. 인간의 선택도 자연의 섭리를 본받을 수 밖에 없다.
사랑이나 행복이나 가치나 의미를 인간이 추구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이성적 판단으로 옳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일이 안되게끔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연법칙이다.

무엇이 옳은가? 그 옳음을 왜 인간이 추종해야 하는가? 그 문제에 대한 최종답변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부정의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자가당착이다.
인간은 그 옳음들을 받아들이거나 아무 판단을 하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무엇이 옳은가? 그 옳음을 인간이 받아들여야 하는가?의 질문자체가 유효하다면 그 유효성을 충족시키는 조건에서는 그에 대한 답변 또한 유효하다.
섭리가 말하는 바 최종단계에서 근원적인 답변의 부정은 질문 자체의 부정으로 연결되어 질문을 무의미하게 하는 즉 인간이 그 문제에 대해 질문할 권리가 있다는 점을 긍정한다면 그 답변 또한 유효하게 되는 것이다.
질문과 답이 하나의 기능적 카세트여서 질문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답도 긍정해야만 한다. 인간이 만약 최종적으로 모든 것을 근원에서 거부하려든다면 질문자체도 부정되어야 한다.

섭리의 이해

세상은 디지털 방식으로 존재한다. 디지털은 유한이다. 하나의 질문에 하나의 답변만이 존재한다. 하나의 판단과 하나의 대책이 있을 뿐이다.
세상은 디지털로 되어 있지만 변화에서는 순간적으로 아날로그변환을 거친다. 변화한다는 것은 자기복제 한다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가 둘이 된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 하나와 둘 사이가 있다, 하나도 둘도 아닌 것, 곧 아날로그다.
섭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이 아날로그변환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아날로그의 세계에서는 무한개념이 적용된다. 하나의 질문에 여러개의 답변이 있다. 여러개의 판단과 여러개의 대책 중에서 선택되어야 한다.
근접도, 완성도, 균형도, 속도, 정확도들은 그 여러개 중 하나를 선택하는 선별법이다. 길은 여럿이지만 가장 빠른 길은 하나이며 모든 변화는 이 빠른길로 가려하는 성질이 있다.
그 빠른 길은 하나의 틈새이다. 그리고 모든 변화는 그 틈새에서 최적화되며 최적화되지 못하면 외부간섭에 의해 자연도태된다.

인간은 선을 추구한다. 곧 최적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가장 멋진 것, 가장 아름다운 것, 가장 어울리는 것, 가장 고운 것, 가장 예쁜 것을 추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선들은 인간의 욕망보다 더 우위에 있는 이성의 힘이다.
인간정신이 욕망에 의지하면서도 인간이 이성의 영역을 잃지 않는 것은 이러한 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선이야 말로 인간정신의 본바탕이다.
인간은 욕망의 존재, 무의식의 존재가 아니라 선의 존재, 의식의 존재이다. 선은 자기정신의 초극을 지향하며 가장 고귀하고 가장 존엄한 지경으로 인간을 상향시킨다. 인간의 존재목적은 행복이나 쾌락이 아니라 그 선의 실현이다.
선은 섭리에 의해 자연의 법칙으로 존재하며 인간보다 높고 인간보다 앞선다. 인간의 구원, 의미, 가치, 사랑, 행복이 그 섭리를 받아들이게 하고 그 효과가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
인간은 구원된다. 인간에 의해 세상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인간에 의해 세상이 멋있어지고 아름다워지고 어울리게 되고 고와지고 예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념은 최후에 모든 것을 긍정하게 한다. 또한 낙관해도 좋다.
인간은 결코 정신의 고결함을 포기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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