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이란
read 3888 vote 0 2002.09.06 (12:30:47)

배덕(背德)에 대하여.

개고기를 권하는 사회.

미풍양속은 권장하고 나쁜 풍속은 버리는 것이다. 특별히 외국인에 대한 태도에서 아집과 소아병을 보게 된다. 한국인들은 더 커야 한다.
옛날에 고기는 겨울음식이었다. 가을이면 돼지잡고 봄이면 닭잡는다. 겨울엔 보통 온동네 청년들이 작당하여 사냥을 간다. 꿩 노루 잡고 오소리 너구리 푸짐히 동네잔치다. 그땐 짐승이 흔했다.
여름엔 고기를 먹지 못한다. 돼지고기 잘못먹다가는 식중독이다. 여름엔 돼지잡기를 금기로 여겼다. 그래서 개를 잡는다. 보신이란 특별히 개가 영양에서 유익하기 때문이 아니라 개고기는 여름에 먹어도 탈이 잘 안나기 때문이다.

경허당스님이 즐겨 개를 먹은 적은 없다. 잘못 알려진 이야기다. 악성 피부병에 걸려 그 치료의 속방으로 개고기와 소주를 약으로 먹은 것이다.
미친 여자가 절에 찾아와 밥을 구한 일이 있다. 밥을 주어도 가지 아니하므로 경허는 미친 여자와 며칠을 동거하였다. 여인은 제정신을 찾아 돌아갔고 피부병을 경허에게 남겼다.

남이 싫어하는 일을 굳이 하는 것은 악덕이 된다. 많은 사람이 개를 먹는 짓을 싫어한다. 그런 짓을 굳이 하는 것은 심성이 악하기 때문이다.
특히 어린이들은 개를 사랑한다. 어린이들이 보는데서 몽둥이로 때려잡는 행위는 어린이의 정서에 상처를 주게 된다.
보통은 가족여행을 떠날 때 개를 죽인다.(서구에서) 여행에 개를 데려가기 어려우니까. 이런 일로 어린이와 부모는 적대적인 관계가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어린이 보는데서 개를 때려죽이면서 '정을 뗀다'는 명분을 세운다. 심성이 사나와진다.

남이 원하지 않는 짓을 굳이 하지 말라. 그것은 적어도 미덕이 아니다. 인간성을 훼손하며 반사회적인 이기심이다. 식용개구리도 아닌 논개구리를 먹는 짓도 고약한 짓이며 뱀을 먹는다든가 곰발바닥을 찾는다던가 하는 짓도 고약한 일이다.
어른들은 잘 모른다. 요즘 어린이들이 뭘 배우는지. TV프로그램이나 어린이용 에니메이션이나 기타 매체에서 가장 인기를 끄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거기엔 보통 지구를 지키는 환경수비대들이 등장하며 코끼리 상아밀매조직 야생동물 밀매조직과 싸운다. 이거 옛날하고 다르다. 우리 때만 해도 파란해골 13호 팔라팔라사령관이 고작이었다. 어린이의 정서는 만화영화를 토대로 해서 전 세계가 같은 것이다.
세계의 어린이들이 모두 환경문제를 가장 주요한 주제로 생각하게 된다. 악당은 상아를 밀수하는 아시아인, 곰발바닥을 자르는 한국인으로 묘사된다. 전세계 모든 나라 어린이들의 가슴에 한국인은 환경을 해치는 사악한 나라로 인식될수 있다.

페미니즘이나 동성애인권운동이나 환경의 주제들이 차세대 세계의 주요관심사가 된다. 그러한 측면에서 뒤진 한국은 세계문화의 변방에서 고립된다.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국제사회에도 고문관이 존재하며 이지메가 존재한다. 이라크나 북한은 국제고문관이다. 똥이 더러워서 피하는 북한은 나라마다 뜯기는 고문관이요 만만해서 줘패는 이라크는 동네북 고문관이다.
전세계 어린이들이 동일한 내용의 환경주제 만화영화를 보고 자란다. 2000년대는 세계보편정서가 생겨난다. 문화도 마찬가지다. 거기서 한국이 국제이지메를 안당하려면 적어도 국제고문관 노릇은 피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아직도 그 아집과 소아병으로 정신못차리고 있다. 충실한 국제고문관이다. 아시아의 경제위기를 잘되었다는 듯이 방관하는 미국의 태도에서 느껴지는 것이 있어야 한다.
국제사회도 국민학교 4학년 교실과 하나 다를 것 없다. 반장인 미국과 그 패거리들, 후세인 엄석대와 김정일 따. 이런게 존재한다. 즉 하나의 사회인 것이다. 모자라고 유치하기 짝이없는.

패거리도 미덕은 아니다. 그러나 삐쳐서 혼자노는 아이도 도덕은 아니다. 적어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 개고기를 권하는 사회이어선 안된다. 즐겨 노루피를 마시러 가자며 이웃을 선동하는 아낙네를 본다. 후진 나라의 모습이다. 우리 이런 식으로 살지 말자.
정신의 성숙이 구강기에서 멈춰버린듯한 태도, 먹는 것을 밝히는 태, 꼭 뭘 먹어야 한다는 인간들, 나는 그런 인간들과는 친구 안한다.

김대중의 인선

내각을 짜라하면 한승주 한완상 이인제 식으로 참신하고 이뻐야 대빵인줄 아는 동포들이 있는데 착각이다. 정치를 그런식으로 하면 망한다.
참신한 것은 학자나 언론인인데 매양 깐깐한 학자나 쥐같은 언론쟁이를 장관으로 모시니 망한다. 언론인이나 학자들은 되도록 정치를 안하는게 옳다.
정치는 정치인이 해야 한다. 언론이나 학문은 공기이며 행정과는 성격이 다르다. 참신한 인물은 삼사의 일이나 하는 것이다. 그들은 연구하고 지적할 뿐 나서서 해결사가 못된다.

매양 이수성이 같은 학자를 불러다 나라를 말아먹은 것이 김영삼이다. 학자는 학문을 하라. 그런 관료를 기대하지 말라. 말잘듣고 부지런하며 유능한 것이 관료로서는 최고이다.
참신한 사람은 국회의원이나 하라. 좋은 정부엔 오로지 한명의 탁월한 재상과 부지런한 여러명의 일꾼이 필요할 뿐이다.
참신하고 잘나빠진 인간들이 내각에 득시글하면 모다 일은 안하고 논쟁만 밤새도록 한다. 논쟁하되 일안하는 것이 참신한 인간들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인사가 망사다. 내각에 인걸은 하나만 있어도 족하다. 부처의 수장들이 모다 영웅이면 내란이다. 두 마리의 호랑이가 한 굴에 살순 없다.


























[원광법사의 세속오계 중 살생유택계]

[육재(六齋)날과 봄 여름에는 죽이지 말것이니 때를 가림이요, 부리는 짐승을 죽이지 말지니 이는 말, 소, 닭, 개를 말함이요, 갸날픈 것을 죽이지 말것이니 고기가 한꼬치도 안되는 것이라. 이것이 세속의 선계(善戒)이니라.]

봄, 여름에 안죽이는 것은 좋은 모피를 얻기 위해서 또 식중독을 예방하기 위해서다. 부리는 짐승을 안죽이는 것은 애완동물이기 때문이다. 문화적 감각은 신라때도 있었다. 화랑들도 개는 먹지 않았다. 마땅히 본받아야 하리라.

[흡연권과 혐연권]

옛날엔 흡연권이 우세했다. 내가 담배를 피고자 해서 피우는데 타인이 왈가왈부 할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혐연권이 우세하다. 아홉명이 애연가라도 단 한명의 어린이를 위해 참아야 한다.
문화는 이런식으로 성숙해간다. 우리는 점점 더 참아야 하는 것이다. 문화는 타인을 의식하고 배려하기다. 그런 면에서 한국문화는 후진하다.

선진문화와 후진문화의 질적 차이는 소수에 대한 배려다. 다수가 가는대로 가야한다고 주장되면 후지다. 전형적인 것이 신고식이다. 신참례 혹은 면신례라고 하여 예로부터 이어왔다.
나는 이 신고식 풍속이 고대사회의 성인식 풍속에서 이어왔다고 생각한다. 옛날에는 화랑도 이전부터 남성들만의 또 여성들만의 공동체가 있어왔다. 극렬한 고통을 수반하는 성인식 혹은 특별한 의식을 통과하므로서 동아리 혹은 패거리에 가담한다.

의식은 미개한 부족사회에 일반화되어 있다. 공동체 중심의 문화, 다수의 억압에 대한 순종이다. 소수의견은 묵살되고 집단과 체제에 대한 희생과 복종이 요구된다. 인간성, 개성은 억압되며 공동체의 이익이 개인의 권리에 우선한다. 반문화이며 야만이다.
한국에서 야만이 뿌리깊은 데는 일제의 억압과 군사문화에 원인이 있다. 군대에서 특히 그렇다. 고참은 하느님보다 위다. 사회가 발달하고 문화가 발전할수록 인간의 관심분야가 다양해진다. 혹은 음악을, 혹은 미술을, 혹은 소설을 혹은 영화를 감상한다. 그에 비례하여 공동체적 긴장은 약해진다.
문화빈곤의 옛날에는 공동체문화가 전부였다. 모두가 같이 하는 일에 동참하거나 아니면 부족에서 축출된다. 이제는 자유와 개성이다.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한다. 그 과정에서 다수는 더욱 소수를 배려하고 더욱 참아가는 방향으로 발전한다.

동성애인권운동이 중요한 이유는 소수배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소수다. 장애자, 유색인종, 유태인, 전라도사람, 전과자 하는 식으로 표지를 단 소수를 배려하는 정도가 문화적 성숙이 된다.
문명은 집단을 위해 소수(동성애자 장애자 전과자)를 희생시키는 데서 배려하는 쪽으로 진보한다. 소수를 희생시키는 이유는 문화빈곤에 있기 때문이다. 군대가 그렇다. 군대서 여유시간에 할 일없다. 집단화된다.
신입생에게 음주를 강요하는 행위, 음치에게 노래를 강요하는 행위, 혼자서는 준법하다가 다수가 모이면 주위에 피해를 주고도 태연한 행위 다 부끄러운 반문화의 모습들이다.

[깨달음]

[진리란 아는데 있지 아니하고 모르는데 있지 아니하며 앎과 모름을 떠나서 있지 아니하다.] 경전에 나오는 말이다.

위에서 진리를 깨달음, 침묵 혹은 다른 말로 대체해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우리의 가야할 바가 신비주의(神秘主義)와 주지주의(主知主義) 사이에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신비주의는 노력없이 깨달음을 그저먹으려 하는 자들이며 주지주의는 백과전서파의 지식에 그 답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다. 말한다면 구름, 이구님처럼 많이 알수록 보약이라고 믿는다면 주지주의이며 /정과동파/들처럼 황당한 소리를 하면 신비주의다. 둘 다 삿된 것이다. 그것은 정견도 정사유도 아니다.
석가는 가르침이 될만한 바른 길을 제시했다. 8정도다. 정어, 정업, 정명은 바른 도덕률(신사의 도)이며 정정진 정념 정정은 바른 수행(스님의 도)이며 정견 정사유(지성의 도)는 바른 지혜이다.
섣불리 침묵, 관 하고 폼을 잡는 행위는 정견, 정사유가 아닌 삿된 부정견, 부정사유이다. 나는 중이 아니므로 정정진, 정념, 정정엔 관심없다.
세속의 현대사회에서도 채택될수 있는 규칙은 정어(바른 태도) 정업(참여와 실천) 정명(역사의식) 정견(합리주의) 정사유(근원적 진리에의 추구) 들이다.
강조되어야 할 것은 정견과 정사유, 삿된 것, 기이한 것은 배격되어야 한다. 무당이 고행을 통해 경험하는 엑스터시의 신체적 체험들을 깨달음과 결부시키는 것은 석가가 반대한 바라문교의 나쁜 습속이다.

[깨달음이란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다.] 지식은 어떤 사실을 아는 것이며 깨달음은 그 사실에 대한 접근경로를 아는 것이다.








































레이저님께

어느나라든 먹을게 없으면 개를 먹는다. 프랑스나 영국이나 마찬가지, 그들이 요새 개를 안먹는 것은 문화가 발달해서다. 그들은 누군가 이의를 제기하고 다수가 합의한거다.
한국도 마찬가지, 한국인이 개를 먹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 중 누구누구가 개를 먹는 것이다. 한국인은 문화적 후진성으로 하여 그 합의하기에 실패한 것이다.
아주 옛날에는 미국인도 영국인도 개고기 뿐 아니라 사람고기도 먹었다. 프랑스의 어느 동굴에서는 식용의 목적으로 잘려진 것으로 보이는 해골무지가(조개무지같은) 발견되었다.
이제 우리도 개 곰발바닥 뱀 노루피 따위 [먹지말자] 하고 제기하면 [그러자] 하고 합의할만큼의 문화가 되었지 않은가?
개는 모피가 좋아서 유럽에서도 옛날엔 개가죽을 많이 썼다. 또 먹었다. 프랑스의 어떤 왕이 [적어도 일요일엔 닭고기를 먹을수 있도록 하라]하고 지시해서 그들은 일요일에 닭고기를 먹는다.
막부시절 일본의 어떤 왕이 애견가여서 [개를 못먹게 하라]하고 명령해서 일본인들은 개를 안먹는다. 법이 강요한 것이다. 300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인도 즐겨 개를 먹었다.
인간의 선한 본성은 전세계가 같다. 그걸 합의하는 것이다. 어느나라는 빨리 합의하고 어느 나라는 늦게 합의한다. 문화수준 차이다. 우리는 늘 합의하기에 실패한다. 그러나 몇 년전 버스 금연에 합의할 때 애연가들은 콧방귀를 뀌었지만 이젠 아무도 버스 안에서 흡연하지 않는다.
[한국인이 개를 먹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 중 누구누구가 개를 먹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지 않기로 합의할수 있다.]

[정과동]

정과동에선 적절한 생존방식을 찾지 못하였다. 자료실만 잔뜩있고 게시판이 없어서 글올릴 곳도 없는데 [이동네 백성의 생존방식은 어떠한가?] 하였더니 밤늦도록 채팅을 하는 것이었다. 난 밤잠은 꼭 자야한다. 잠꾸러기다. 그래서 정과동엔 별로 못가고 있다.

이빈님은 골청소를 한다는데 하나의 아이템이 되겠지만 좀 그렇다. 정과동에서 느낀 첫인상은 좀 수준이 낮다는 것이었다. 1류와 2류, 3류가 구분되지 않고 뒤섞여 있다.
어떤 특이한 과학도 물리학에 근거를 대고 논리학과 수학 미학 언어학의 관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학문이 되지 않는다. 고로 정과동은 그들이 얻은 독특한 아이템을 논리학 수학 미학 언어학 물리학과 결부시키려는 노력에 게으르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통은 게으르다. 기발할수록 상품이 된다. 황당한 소리를 태연히 할수록 주목을 끈다. 그것은 상업주의 근성이다. 주목을 끌려면 그럴듯한 이바구도 비틀어서 괴상하게 말해야 한다는 시장의 속성을 그들은 잘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체질이다.

예를 들면 어느분의 보름달이 떠오른다는 침묵론도 물리학 논리학 미학 수학 언어학의 관문을 통과한 다음에 침묵일수 있다. 침묵은 언어를 가진자가 언어를 절제하는 것이지 언어가 없는 자가 입을 닥치는 것이 아니다.
석가의 주장을 한,두마디로 집약할수도 있지만 거기에 8만4천의 법문이 있다. 스티븐 호킹, 아인시타인의 견해도 한마디로 압축할수 있다.
진실한 것은 한마디로 압축할수 있지만 수학과 논리학 미학의 엄밀한 과정을 통하여서만이 검증된다. 이에 비해 라즈니시의 헛소리는 간결하지만 장황하다. 언제나 같은 말을 동어반복하고 있다. 그것을 옥하옥이라고 한다.

요는 골청소론이나 보름달론이나 그어떤 논이든 간에 검증하려면 아인시타인이나 스티븐호킹과 싸워야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비껴가려면 라즈니시 같은 약장사 뿐이 안된다.
특히 존재론의 영역에서는 첨단 물리학, 수학과 겨뤄야 하며 인식론의 영역에 있어서는 논리학, 언어학과 싸워야 한다. 보름달론은 벌써 인식론의 영역이다. 논리, 언어학의 측면에서 적어도 비트겐쉬타인을 깨고 말을 꺼내야 한다.

침묵이다. 그러나 비트겐쉬타인을 깨놓으면 그가 알아서 잡인을 물려준다는 의미에서 침묵이다.
침묵이다. 100만명이 있다면 그 100만명 중 가장 똑똑한 단 한명만 깨면 된다. 그것이 언어를 절약하는 방법이다. 되도록 어려운 표현을 쓰는 것은 그런 뜻이다. 쉬운 언어는 장황할 뿐 늘 동어반복이 된다.

[가장 똑똑한 단 한명만 상대하겠다는 것이 진짜. 만약 그대가 어떤 특이한 아이템을 얻었다면 그것을 다수의 우중들에게 검증받으려 하지 말라. 의미없다.]






빈☞ 기니 초능력이니 정신감응이니 하는 게 정신과학의 전부인양 착각하고 뱁새눈을 뜨는 행위. 그것만 그만두면 된다.
빠☜ 내가 묻고 싶은 것이 그것. 그게 전부가 아니면 그밖에 무엇이 있는가? 가르켜 주면 고맙지.
내가 삼돌이한테 [니 돈 10원빠이 없지?] 하고 물으면 [아이다 200원 있다] 캐야지 [십원이 전부인양 착각하고 뱁새눈을 뜨지말라] 하면 원하는 답변이 아니지.

빈☞ 1류, 2류를 나누는 건 정과동이 해야할 일이 아니다. 컴퓨터 통신의 일개 동호회에다 대고 도대체 무엇을 바라는가?
빠☜ 동호회에 바라는거 많다. 몇몇 동호회를 보았는데 정기적 답사하는 동호회도 있고(우리얼) 콘도에서 무슨 행사하는 동호회(삼동)도 있고 역적모의 하는 동호회(현*동)도 있더라. 동호회마다 뭔가 수작씩이나 하고있는 것이었다. 근데 정과동은 뭘 하는지 아직 파악이 안된다. 자료만 모아놓고 있는갑더라구 참.

빈☞1류는 뭐고 2류는 또 뭔가? (으...참자...)
빠☜1류는 사회에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며, 2류는 스스로 완성하는 것이고, 3류는 장사하는 것이다. 이것은 문학이나 과학이나 예술이나 공통된다.
책을 쓰더래도 사회에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면 1류고, 작품의 완성도에만 매달리면 2류이며, 그저 상업적 목적으로 출판하면 3류.
과학도 새로운 발견을 주장하면 1류고, 그냥 연구하기 위한 연구는 2류이며, 장삿속으로 해보는 소리는 3류다.
기니 단전호흡이니 뭐니 이상한 소리하는 사람들은 대개 도장이나 열어서 월회비 받고 단체복 팔아 장사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구.

빈☞또한번 중언하게 되지만...정과동은 거의 모든 정보와 자료를
포용한다. 왜냐하면 정과동의 목적은 그러한 것들의 진실성을 밝히는데 있는 것이 아니며...또한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하다.
빠☜그냥 정보와 자료를 모아놓고 할 일 끝이구만. 난 또 뭐 정기적으로 세미나도 열고 천체관측으로 혜성발견도 하고 그러는데인줄 알았지. 뭐 저번에 일식이 뜨고 혜성이 출몰하고 해도 정과동은 그냥 암생각도 엄는갑더라구.

빈☞뭐 우짜잔 소린가? 피시통신의 일개 동호회에 도대체 무엇을 바라는건가?
빠☜나는 과학이 정신과학과 일반과학으로 분리된다고 생각 안한다. 그러나 이왕 정신과학이라고 간판을 붙여놓았으니 뭔가 기획을 하고 활발한 비판과 토론이 있어야 한다. 동호회들에 늘 실망하곤 한다. 할수 있는 것은 많은데 하고 있는 것은 적더라.
* * * * *
경험한 바 우리나라엔 뭔가 한가닥하는 이상한 고수들이 많더라. 정과동에서 그런 사람들을 발견할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은 내 소박한 기대이며 아직 발견하지 못하였다함은 현재의 사실이며 더 지켜보아야겠다는 것은 차후의 대응이다.
그러한 지적이 꼭 화를 낼 일은 아니지 않을까? 다만 지켜볼 뿐.






[제 목] 린님께.

린☜ 이것은 우리의 가야할 바가 신비주의와 주지주의 사이에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 그것은 왜 사이에 있는 것입니까? 그 둘을 포함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하나로는 닿지 않으며, 그렇다고 그것들을 제외한 다른 무엇에 있지 않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빠☞그 어떠한 것이든 별개의 둘을 포용하려면 먼저 사이를 얻어야 한다. 갑과 을을 포함하려면 갑과을 사이를 먼저 얻어야만 한다. 나무와 바위 사이에 있는 것은 나무와 바위를 포함하는 산이다. 여기서 산은 나무나 바위보다 크다. 큰 것이 작은 것을 포용할수 있을 뿐 작은 것은 큰걸 포용할수 없다. 가장 큰 것은 사이다.

린☜ --> 기이한 것은 바꿔말하면 낯선것, 정체가 파악되지 않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정체가 파악되지 않은것에 호기심과 두려움을 동시에 갖습니다. 대단히 강렬한 강도지요 이것이 나쁘다, 좋다, 받아들여야 한다, 배격해야 한다는 말은 말이 안됩니다.
빠☞ 기이함은 그 자체로 상품가치가 있다. 고로 기이하지 않은 것도 장사를 하기 위해서는 기이하게 만들어야 한다. 미개인에게 자석을 하나 들고가서 마술을 보여준다. 그러나 결코 자석의 원리를 가르켜 주어서는 안된다. 토인들이 원리를 이해하는 순간 더 이상 그대를 존경하지 않을 것이며 그대가 신의 아들임을 믿지도 않는다. 보여줄 뿐 가르쳐주지 말라. 이것이 신비주의의 계율.

린☜ 제 알기로 깨달음에 가는 길은 여러 길이라 들었습니다. 가보지도 못한 거시기에 대해 떠든다는 것 자체가 캥기는 일입니다만, 파파리기님이나 저나 이런 무리한(?) 주제로 경히 씨부리는 일은 서로에게나 읽는 다른이들에게나 아무런 득도 안되지요..
빠☞ 산으로 오르는 길은 여럿이지만 결국 정상에서 모두 만납니다. 길은 단 하나입니다. 모든 길은 정상으로 통하니까요. 위로 가는 것이 길이며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나 옆으로 가는 것은 결코 길이 아닙니다.

☞☞☞ 빠락의 주절이.
응수타진이랍시고 가볍게 [이렇게 쓰면 상대는 어떻게 나올까?]생각하며 쓰는거지만 장난은 아니어서 적어도 감추어진 치열함이 있습니다. 물론 상대에 따라서 장난으로 그칠수도 있고 아무것도 아닐수도 있지요. 진짜를 말하렵니다.

[작은 그릇에 큰 것을 담을수는 없지만 큰 그릇에 작은 그릇을 담을수는 있습니다] 이것은 의심할수 없는 절대진리입니다.

현대과학이 그 한계를 노정함에 따라 대안으로 동양사상이나 정신과학 같은 류가 주목을 받습니다. 여기서 어느쪽이 큰 그릇일까요? 분명한 것은 그것이 진리이려면 기존의 모든 것을 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일반과학과 대립하여 그 반대편에서 그것을 꺽고 제압하여 이기려 한다면 결코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든 비행접시든 기든 뭐든 간에 기존의 명백히 인정된 논리학 미학 수학 물리학을 다 포용하지 않으면 결코 대안이 될 수 없습니다.
* * *
컴퓨터 하드웨어가 1 발달하면(예를 들어 8비트에서 16비트로) 그 소프트웨어는 2만큼 발달하고 그 이용자환경은 4만큼 발달합니다. 여기서 기하급수식이 등장합니다.
즉 하드웨어는 1,2,4,8,16으로 산술배증하는데 비해 이용자환경은 1, 10, 100, 1000으로 기하급증한다는 것입니다.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는데 원인요소(시간적으로 앞섬)가 1 발달하면 결과현상(시간적으로 나중등장)은 그 열배, 백배 발달한다는 것입니다.

산이 두배로 높아지면 계곡은 열배 많아지고 나무는 백배로 많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의 법칙입니다. (금오산은 980여미터, 한라산은 1950미터 계곡은 열배, 나무는 백배임)
여기서 산이 되는 것이 하나뿐인 진리, 봉우리가 되는 것이 존재론과 인식론이며 계곡이 되는 것은 물리학 수학 미학 논리학 언어학이며 나무가 되는 것은 일반과학이나 정과동의 여러 분야.

이것이 왜 문제인가 하면 말했듯이 하드가 1 발달할 때 소프트는 2 이용자환경은 4 발달하는 식에 맞추어보면 어떤 게임 프로그램 개발자가 기존의 게임보다 두배나 혹은 세배로 나은 프로그램을 만들면 반드시 망하기 때문입니다.
하드가 8비트에서 16비트로 배 증가하면 소프트웨어는 텍스트 환경에서 그래픽 환경으로 바뀌게 되고 여기서 어중간한 발전(예를 들면 이야기 5.3과 6.1)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도스환경을 채택하면서 아무리 성능을 개량하더라도 전혀 안팔립니다. 그래픽환경인 인터넷 수준을 따라잡아야 합니다.

하드가 1 더 발달하면 운영체제는 10 프로그램은 100 발달해야 합니다. 그 중간은 다 망합니다. 이야기와 인터넷의 차이입니다.
하드가 업그레이드 되면 운영체제는 윈도로 바뀌고 8비트짜리 도스게임은 다 버려야 합니다. 비유한다면 정과동의 여러분야는 컴퓨터가 8비트에서 32비트로 바뀌는 동안에 개발한 100가지 8비트 게임 종류입니다. 전부 버려야 합니다. 단 하나도 쓸모없이 모조리 쓰레기통으로 직행입니다.
아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화내지는 마십시오. 32비트 게임도 8비트 게임과 원리는 같으니까요. 그러나 일단 원리만 남기고 상품은 모조리 폐기처분 되는 것은 피할수 없는 숙명입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고 산 정상은 하나 뿐이며 길은 무한대로 많지만 진리에서 단 하나로 합해지고 변화는 그 하나의 출발점인 근원에서 출발되어야만 성공합니다.
시너지효과인데 반드시 근원이 되는 하나가 있고 그것은 기초가 되고 본질적이며 자원이고 단 하나뿐입니다. 거기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 둘이나 서넛이 되고 더 하부로 내려가서 백가지 천가지 만가지 상품이 나오는 것입니다.
학문에도 그러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근원에서 1의 변화가 하부구조에서 만의 변화로 나타납니다. 근원이 변하면 충분히 개발된 하부구조는 모조리 폐기됩니다.
먼저 근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단 하나가 될 때까지 계속 통합해야 합니다. 만약 통합하기에 실패한다면 반드시 양자를 지배하는 더 큰 것이 있으므로 그 제 3의 것을 찾아내어야 합니다. 그 제 3의 것이 없는 경우는 절대로 없습니다.
물론 다양성은 존중되어야 하나 근원의 하나를 인정하는 전제로부터 출발해야 하며 근원이 매사에 우선함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인간이 살고있지만 인류는 단 하나이며 성별은 둘이고 인종은 서넛이고 문화권은 십여개이며 국가는 1백여국이고 지역은 수천여이며 이런식으로 10배증하여 50억이 공존하는 것이지 외계인과 삼돌이가 그냥 공존하는 경우는 절대로 없습니다.

불경에는 8만 4천의 법문이 있지만 그것은 단 하나로부터 전개된 것입니다. 그 8만 4천이 각각의 서브디렉토리와 루트디렉토리를 가지고 상위집합에 속해있는 것이지 무질서하게 뒤섞여 비축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과동에 여러 분야가 존재하려면 먼저 디렉토리부터 규명해야 합니다. 그 전체를 통일하는 하나를 분명히 해야합니다. 그 하나는 무엇입니까?

***

촉견폐일(蜀犬吠日)

기이한 것은 없다. 이상하고 낯설은 것은 없다. 정체가 파악되지 않는 것은 없다. 단지 기묘한 것이 있을 뿐이다. 단장된 것이 있을 뿐이다. 설명하기 곤란한 것이 있을 뿐이다.

경거망동(輕擧妄動)이란 말이 있다. 거동(擧動)이 경망(輕妄)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거동이 경망한 것은 무엇인가?

[사자는 소리에 놀라지 않고 새는 거미줄에 걸리지 않으며 연꽃은 진흙에 물들지 않는다.] 소리에 놀라고 거미줄에 걸리며 진흙탕에 오염되는 것이 경망한 것이며 그들이 말하는 바 기이하고 이상하고 낯설다는 것이다.

촉견폐일(蜀犬吠日)이다. 서촉은 산중분지라 구름과 안개가 많은 까닭으로 1년 내내 해보기가 드물다. 어쩌다가 해가 보이면 촉나라 개들이 수상히 여겨 짖어댄다. 견식이 좁은 사람이 탁월한 사람을 보면 의아스러워 비난한다. 월나라 개는 눈(雪)보고 짖고 오나라 소는 달보고 헐떡거린다.

[이상한 것에 미혹되지 말라]는 선현들의 가르침은 후학들이 마땅히 쫓아야할 미덕(美德)이 된다. 형제여~! 무엇이 이상한가? 무엇이 낯설은가? 무엇이 수상한가?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오직 하나 뿐이다. 그것은 존재다. 그대는 존재를 이해하는가? 나는 아직 존재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대는 안드로메다 별자리 외계인의 나라에 왔다. [콩도 이상하군, 벼도 수상하군, 개도 황당하군]하고 놀라지 말라. 이상한 것은 그 외계인의 나라이지 그나라의 콩이나 벼나 개가 아니다.
그대가 만약 그 낯선나라의 콩이나 벼나 개를 이상히 여긴다면 아직 거기가 낯선나라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인간이 진정으로 놀라야 할 것은 오직 하나 뿐, 그것은 존재 자체의 신비이다. 오 존재란 얼마나 신비하고 아름다운 것인가?




[누가 차범근을 시비하는가?]

다이너스티컵에 일본이 전력을 감추느라 한국에 져주고 한국이 대승하여 각국의 경계대상 1호가 될까 우려했는데 다행히 차범근감독은 선수를 보호하고 충분히 연막하는데 성공하였다.

한국이 일본에 졌다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는데 참으로 속없다 할 것이다. 큰 게임을 앞두고 작은 게임에 전력투구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한국은 거듭 져야만 한다.

항상 무서운 것은 승자의 오만함이다. 한번 이기면 한번 진다. 지금은 은인자중 와신상담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할 때이다. 승부는 6월로 다가왔는데 지금이 헛발질로 체력을 낭비할 때인가? 차범근감독의 현명한 팀운영에 박수를 보낸다.

[누가 김대중을 시비하는가]

작은 것을 가지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내가 아직 김대중을 비판하는데 나서지 못하는 것은 양심수 사면복권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사면복권에서 그의 야심을 읽어야 한다.

다른 것은 모두 소소한 일이다. 본게임에 강해야 진짜다. 오카다감독처럼 다이너스티컵 따위에 강해서는 안된다. 차범근처럼 월드컵에 강해야 진짜다.

사면복권이 주목되어야 하는 것은 그의 이정권에 대한 정국주도의 범위를 가늠할수 있기 때문이다. 영삼처럼 어물어물 한다면 야심이 적은거고 우리는 포기해야 한다.

사면복권에서 우리의 예측을 깨는데 성공한다면 그는 진정 야심가이다. 그때가서야 우리 김대중을 향해 본격적으로 포문을 열지 말지를 가름할수 있다. 그것이 본질이기 때문이다.

[누가 조순을 시비하는가]

지금 정국이 혼미해진 것은 야당에 주장(主將)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조순이 야심가라면 김종필 인준반대를 절대로 안한다. 김대중이 여소야대때 노태우에 협력한 것은 야심가이기 때문이다.

지금 한나라당은 김문수가 총재다. 초선 따위가 저리 날뛰도록 방관한 것은 조순이 암 생각없는 자이기 때문이다. 조순은 무능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한나라당은 얻었지만 조순은 얻은거 없다.

100명의 조합원을 가진 노조위원장이라도 파업까지 할 때와 하려다 말 때를 구분할줄 안다. 야심만만한 몇몇 초선의원은 당내주도권을 얻었고 조순은 물먹었다.

이제 김대중은 그들 초선 몇몇과 직접 빅딜하지 조순과 협상 안한다. 내가 김대중이라도 김문수나 몇몇 초선들에게 한뭉테기 앵기는 방법으로 해결하지 조순과 회담해서 뭐하나?

이번 싸움에 가장 큰 패배자는 한나라당 지도부이다. 김대중은 꽃놀이패다. 김종필도 잃은거 없다. 자민련과의 연대는 지역감정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국민회의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김종필을 팽하는 것은 충청도를 팽하는 것이다. 유일한 해법은 고문관 김종필이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다. 이나라에 조순과 김종필 두명의 고문관이 있다. 좌향좌 하면 저혼자 우향우 하는 늠.

나라가 어려운 때 자기몸값을올리려고 날뛰는 자들(김문수와 그 일당) 굳이 고문관 노릇을 하겠다는 자들(김종필 김윤환) 좋은 서울시장 놔두고 어문데 가서 부끄러운 줄 모르는 조순.

[인간아 인간아 왜 그렇게 사니?]
[자기분수를 알고 진중히 행동하라고 선현께서 그렇게 일렀거늘 고오얀 쾌씨만~!@#]











[고성군 하이면의 공룡은 터벅터벅 걸어서 어디로 갔을까?]

어제는 고성으로 공룡발자국을 보러갔다. 그들은 비스듬한 사면을 따라 한 방향으로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물 마시러 간것일까? 얕은 물을 건너 건너편 언덕으로 간것일까?

중생대 백악기 공룡의 자취는 경남울주군 경북 칠곡, 대구 수성천 등 경남지역 거의 전부와 경북 남부 일부지역에서 관찰된다. 경기, 강원, 충청, 호남지역엔 없다.

우리나라 지각은 휴전선 이북과 그 남쪽 두 개의 판이 충돌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 정설이고 경상도 판 까지 세조각이 충돌했다는 것이 새로운 주장이다.
판이 충돌하는 지점엔 다이아몬드광상이 발견되는데 휴전선 일대에서 광상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보도가 재작년엔가 있었다. 또하나의 충돌지점으로 주장되는 문경, 충주 일대에도 다이아몬드광상이 발견될수 있다.
충주 단양 문경 보은 일대는 샅샅이 훑어보았지만 지질구조가 대단히 복잡하여 없는 광물이 없다. 다이아몬드 광상이 있을수도 있다. 도굴맨 최후의 목표가 된다.

창녕에서 진영으로 길게 이어진 주남저수지는 세 개의 저수지가 하나로 이어진 긴 수로이다. 그 물길을 이용하여 낙동강물을 마산으로 바로 빼서 마진창의 공업용수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예전에 있었다. 부산사람의 반대에 부닥쳤지만.
주남저수지는 인공둑이지만 인공둑을 그렇게 길게 만든다는 것이 이해가 안된다. 원래 있던 저습지에 둑을 쌓아올린 것일 게다. 밀양, 김해평야와 주남저수지는 지질구조상 연관되어 있다.
낙동강이 1300리 물길을 휘감아 돌다가 돌연 협곡이 되는 삼랑진의 좁은 길목으로 빠지는데 보다 더 얕은 창원 마산을 두고 굳이 높은 천태산을 깍아나가는 이유가 설명되어야 한다.
낙동강물이 남지 낙동강돌출부에서 함안 가야읍 지나 중리쪽으로 마산만을 넘어가는 것이 지질구조상 옳은데 왜 높은 천태산 기슭에 협곡을 만들었을까?
마산만은 자연적인 만이 아니라 중생대엔 강이 빠져나가는 하구였는데 지각변동으로 막혀버리고 낙동강이 동으로 크게 휘어나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된다.
진해 시루봉에서 마산 무학산, 고성 하이면까지 동일한 퇴적암 지질구조를 가지고 있다. 중생대 백악기시절 이 일대는 거대한 내륙호수, 저습지였다.
원래 평평한 바다밑이었다가 솟아올라 평탄한 고원형태를 만들고 비가 빠져나갈데를 잃어 저습지를 이루었다가 재차 지각변동이 일어나 문경 충주지역에서 호남,경기 지각판과 충돌하여 한반도 남부지역을 형성한다.
그 즈음 주남저수지를 통하여 마산만으로 빠지던 낙동강이 진해 시루봉에서 마산 무학산, 고성으로 이어지는 낙남정맥의 융기에 의해 삼랑진 원동으로 휘어져나가게 되고 이어 주남저수지는 원래 강바닥이었다가 내륙호가 되어버린 것으로 볼수있다.
밀양평야와 김해평야는 낙남정맥의 돌연한 융기에 의해 이루어진 평야지대이다. 이점 호남평야 나주평야와는 전혀 다르다. 산으로 막힌 내륙분지인 것이다.
또하나의 내륙분지인 경주지역도 형산강구조대의 융기에 의해 이루어졌다. [일부는 나의 가설이고 일부는 학계의 발표된 주장이다]



금강과 한강은 하류로 갈수록 넓어지는 보통의 강인데 낙동강은 특이하다. 하구에 협곡이 있다니? 의문 의문 의문






















윤진하님이 해남 우항리 공룡화석을 소개해 주셨는데 남해안을 따라 고성과 연결되는 지층일수도 있겠다.
해남 진도는 여러번 갈까갈까 했는데 길이 없어 못갔다. 신안에서 해태하다가 표착한 것이 한번이다. 벌교 보성에서 막다른 길로 가고 싶지 않아 돌아나오곤 했다.
언젠가 해남을 가야 하지. 토말의 유정을 노래해야지.
※ ※ ※
어렸을 때는 커다란 지구에 점점이 대륙과 섬들이 떠 있어 수십억년의 세월동안 바다가 되고도 하고 육지가 되기도 한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바다는 늘 바다이기만 하고 육지는 늘 육지이기만 하다. 즉 바다가 육지되고 육지가 바다되는 일은 매우 적었던 것이다. 이 점 중요하다. 석유나 석회석은 거의 바다에서만 만들어지는 것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대륙의 지각은 몇조각의 거대한 판으로 되어 있는데 판이 있는 부분의 지각은 매우 두껍고 판이 없는 바다부분의 지각은 매우 얇다. 바다 밑은 해저바닥을 조금만 파고들어가도 바로 맨틀이다.
맨틀은 액체이므로 대륙은 물 위에 떠 있는 얼음같다. 수면을 중심으로 위로 솟아난 만큼 아래로도 두꺼워야만 균형이 맞다. 위로만 높다면 그만큼 밑으로 가라앉아버리는 것이다.
고로 대륙은 원래부터 대륙이었다. 본래 하나의 거대한 대륙이었다가 몇 개로 쪼개져서 흩어졌다 모였다가를 반복하는 것이다. 중부 아프리카나 시베리아 지역은 바다가 된 적이 한번도 없이 늘 육지였고 대륙붕으로 이어진 일부 해안지역만 바다가 육지되고 육지가 바다되는 것이었다.
한반도는 바다와 육지의 경계면에 있어서 바다가 육지되고 육지되기를 거듭한 고로 지질구조가 복잡하고 광물도 다양하다. 대륙붕은 바다밑이지만 대륙에 딸려있는 지형이다. 고만큼만 육지와 바다가 교대하는 것이었다.
한반도는 대륙붕으로 연결된 서남해안과 하나로 낮은 육지였는데 태평양바다판과의 경계면에서 밀려 동해안쪽은 융기하고 서해바다는 가라앉아 현재의 형태가 되었다.

바다가 함부로 육지되지 않는다는 것 .... 지리에 대한 많은 고정관념들은 수정되어야 한다. 지구 석유의 6할은 아랍과 아제르바이잔의 좁은 지역에 몰려있다. 석탄과 석회석도 해안선에 가까운 일부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우리는 확률에 의해 우연히 그리되었다고 믿는다. 모든 일들이 수십억년의 세월동안 천천히 조금씩 일어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전적으로 오류이다.
지질학적 변화들은 일부 좁은 지역에 아주 잠깐 동안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바다는 육지 잘안되고 육지는 바다 잘안된다. 해저지형의 99프로는 편평한 심해이며 대륙붕은 극히 적다.
석탄과 석유 석회석은 그 좁은 대륙붕에서 일시에 만들어졌다. 드넓은 지역에서 50억년이라는 터무니 없이 큰 숫자의 확률에 의해 조금씩 조금씩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알 수 없는 외부의 힘에 끌린듯 좁은 특정지역에 돌연 대규모로 생성되었다.
※ ※ ※
우연은 없다. 고정관념을 깨자. 100년 전만 해도 아무도 생각못햇던 일들이 지금 태연히 일어나므로 100년 후에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생각을 버리자.
일어날 일은 예정되어 있다. 확률과 우연에 기대하지 말자. 어릴적에(30년 전) 상상하기로 지금쯤 로봇이 하늘을 날고 핵융합으로 에너지는 무진장이고 석유는 고갈되고 그럴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핵융합은 택도없는 소리고 로봇시대는 열리지 않는다. 즉 예측은 빗나가는 것이다. 조지오웰의 1984년은 1948년에 발표된 것이다. 그렇게 30년 후의 미래를 예측해 보자.
석유, 석탄, 전기, 철강, 시멘트 같은 기본은 태배기로 준다. 그러나 조금 고급으로 들어가서 촉매가 되는 백금, 성질이 다양한 수은, 전도가 좋은 금, 등 고급광물은 병아리 눈물만큼밖에 안준다. 만약 성질이 다양한 우수한 신물질이 개발되면 반드시 공해가 따라다닌다. 방사능과 중금속의 독성이다.
대자연 앞에서 인간은 겸허해져야 한다. 우주는 확률과 우연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잘 설계된 프로그램대로 예정조화를 따라간다. 지구촌의 질서를 근본에서 흔드는 그런 엉뚱한 발견, 발명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생물복제, 개고기 먹기, 임신중절, 대리모출산, 택지개발 그 모든 판단의 영역에서 인간은 겸허해지지 않으면 안된다. 세상은 우연과 확률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알지 못하는 거대한 섭리의 힘에 지배된다.
어릴 때 나는 30년 후의 미래를 예상하였다. 지금 그 예측의 일부는 맞고 일부는 빗나갔다. 그 점을 종합하여 내린 나의 결론은 이런 것이다.

거꾸로 1. [대륙은 물위에 뜬 얼음이다. 수면 위로 높은 만큼 수면 아래로도 깊다. 즉 가볍고 푸석푸석한 것이다. 바다밑은 수면 위로 없으므로 수면 아래로도 얇다. 즉 단단하고 무거운 것이다.]

거꾸로 2. [목성이 무거울까? 지구가 무거울까? 수성은 매우 작은 별이지만 무겁다. 목성과 토성은 매우 큰 별이지만 스치로폴이다. 화성과 목성 사이의 소행성대를 지나서 있는 별은 모두 거품이다 토성의 고리는 거품찌끼다. 중력이 약하므로 부유물질(고리)이 있다.]

즉 모든 것이 우리의 상식과 예측의 정반대인 것이다. 세계는 결코 우연과 확률에 지배되지 않으며 모든 것은 필연이다. 정신과학에 대한 나의 입장은 그렇다. 우연히 어디서 뭔가 나올걸 기대하지 말라. 정도를 따르라.






배꾸나 도꾸나.

[개를 먹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하는 문제는 [낙태를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태아 성감별을 해도되나 하면 안되나] [생물복제를 해도되나 말아야 하나]들과 연계하여 생각하여야 한다.
개고기를 태연히 먹는 자는 태아성감별을 뻔뻔히 하는 자이기 쉽고 임신중절을 화장실가기처럼 생각할수 있다.
역사를 알고 생물을 알고 물리를 안다면, 대자연의 섭리를 체험하였다면 우선 내릴수 있는 결론은 자연 앞에서 인간은 겸허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판단하고 결정해서는 안된다.

자연 앞에서 인간이 함부로 도박을 해서는 안된다. 사법 심판 상 심증이 있으나 물중이 없는 경우는 피고의 이익으로 하지만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불분명한 문제는 자연의 이익으로 해야한다.
자연은 인간이 잠시 빌려쓰고 후손에게 물려줄 것이므로 우리가 모든 것을 결정할 권리는 없다. 절대적으로 확실하지 않은 이상 결정은 되도록 유보되어야 한다.
아직 인간은 세계를 다 알지 못하고 있다. 섣불리 결론을 내릴 때 아닌 것이다. 지리나 생물 물리에 대한 고정관념은 급속히 깨어져 가고 있다. 당연한 진리라고 생각되었던 것이 [과연 그러한가?] 하고 새롭게 질문되고 있다. 알면 알수록 인간이 결코 범접하지 못하는 어떤 거대한 힘의 존재를 느끼게 된다.

자연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원리는 [섭리]다. 섭리란 불균형을 통한 균형이다. 유동적이며 유연하지만 결코 끊어지지 아니하고 장기적으로 생태계의 균형을 잡아나간다. 생물권은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으로 경쟁하며 서로 침범하는 듯 하지만 주의깊게 관찰하면 그 어떠한 생물도 자제의 선을 넘어 무리하는 법이 없다.

[인간이 유독 생물권의 무법자일수는 없다. ]

강한 호랑이는 새끼를 적게 낳고 약한 쥐는 많이 낳으며 강한 사자는 늙고 병든 짐승을 우선 공격하고 약한 북극쥐는 무리의 수가 많으면 집단 자살한다. 씨앗을 잘 퍼뜨리는 잡초는 척박한 지역에 잘자라고 씨앗을 멀리 안퍼뜨리는 화본과식물은 좋은 토양에 밀생한다. 일장이 있으면 반드시 일단이 있다. 나아감이 있으면 반드시 물러섬이 있다.
개를 먹든 말든은 중요하지 않다. 인간은 자연 앞에서 터무니 없이 오만하다는 것이 중요하다. 예사로운 환경파괴가 후대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아는가? 모른다. 모른다면 일단 엄격하게 대처하는 것이 보약이리라.

신을 믿는가? 신이 그대를 지켜보고 있음을 느끼지 못하는가? 모든 것이 우연과 확률이라고 보는가? 그리 오만할수 있을까? 그렇다면 질문은 왜하는가? 더 생각해야만 하리라.

자연앞에서 인간의 태도는 최대한 자연스러워야 한다. 굶주릴 때에 개를 먹는다면 자연스럽다. 배부른데 돼지 닭 소 놔두고 굳이 개를 먹는다면 부자연스럽다.
낙태나 대리모 유전자복제 다 마찬가지다. 지나치게 금제되어서 자연스럽지 못하고 권장되어서도 역시 자연스럽지 못하다. 스스로 알아서 되도록 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 된다.
















[신과 나눈 이야기]

어떤 사람이 자동기술의 방법으로 신과 대화했다며 책을 냈다. 종이 위에 신에게 던질 질문을 쓰면 펜이 저절로 움직여 신의 응답이 기록되는 것이다.

아이디어가 히트다. 어쨌든 돈을 벌었다. 점잖은 짓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신과 대화하고 있다. 그것이 신과의 대화가 되는가? 적어도 신의 입장에서 인간사를 생각함을 그는 보여주고 있다.

신에게 불만이 있거든, 혹은 세상에 궁금함이 있거든 스스로 신이라고 생각하고 신의 관점에서 보라. 그러면 상황이 납득된다. 내가 신이어도 역시 그러할 밖에 없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 ※ ※
과정이 어떠하든 결론은 ○ X다. 이거 아니면 저거인거다. 이렇게 상황을 압축해 놓고 최종결론으로 직행하자. 나의 최종결론은 무엇인가?
정답은 이미 나와 있다. 나는 서른해의 인생을 살았다. 그리고 체험하였다. 그것이 증거가 된다. 나는 증인으로서 말한다. 내가 목격한 것은 정녕 무엇인가?
[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 보다 더 깊숙히 인간의 생에 개입하고 있다.] 내가 증명하려고 혹은 확인하려고 했던 것은 하나, 신이 우리가 막연히 여기는 것 보다 인간의 생에 더 깊숙히 개입하고 있다는 바로 그것이다.

개고기를 먹어야 하는가? 낙태를 해야 하는가? 어느 정당에 투표해야 하는가? 하는 모든 문제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가르는 절대적인 기준은 신의 영역을 인간이 제한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신은 인간사에 직접 개입하여 영향을 미친다. 인간의 선택은 신을 믿고 신의 영향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그것이 33년을 체험한 바 최종결론이다.
제갈량의 완벽한 작전은 그 완벽성으로 하여 신이 개입할 여지를 완벽하게 봉쇄한다. 그것이 잘못된 것이다. 인간사는 얼마간 드라마틱해야 한다. 그 기승전결은 신의 개입으로 하여서만이 완성된다. 신은 늘 우연을 가장하는 고의의 방법으로 개입한다.

인간이 어떠한 일을 도모하든지 간에 신이 이 사실에 개입하여 이 사건에 영향을 미칠 경우를 상정하고 생각하며 판단해야 한다.
※ ※ ※
신과 나눈 이야기는 신과의 공동작이 아니라 [닐 도날드 월쉬]가 임의로 쓴 가짜이다. 그러나 그 책이 널리 잃히고 인간사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면 얼마간의 신의 의지로 봐야 한다.

불교에서 대승경전은 거의 가짜다. 석가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누군가가 자신의 견해를 석가를 사칭하여 기록한 것이다. 이것이 대승비불설이다. 그러나 인연(因緣)이라는 열린관점에서 본다면 인연에 의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다.

석가의 사상도 마호멧의 사상도 예수의 사상도 모두 신의 의지이다. 그러나 사상들은 서로 충돌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서로 다른 견해에서 겹치는 부분만 정확한 신의 의지로 받아들여야 한다.

화가가 그림을 그렸는데 빨간색 노란색 혹은 잘된 부분 못된 부분은 화가의 의지가 아니다. 화가가 그렇게 그리려 한 것이 아니라 캔버스와 안료와 붓이 그런 효과를 내어버린 것이다. 정확하게 화가의 의지는 그 그림의 주제에 한정된다.

불교나 혹은 여타종교를 두고 어디까지가 신의 의지인가를 판단해 보자. 우리 눈에 보이는 계율이나 우상들은 화가의 그림속에 나오는 나무와 꽃과 바위이다.
그 그림들은 화가 자신도 만족하지 아니한다. 보아야 할 것은 주제이다. 화가는 무엇을 그리려 한 것인가? 추사선생이 소나무를 그린 뜻은 소나무에 있지 않은 것이다. 화가의 그림은 아직 끝나지 아니하였다. 우리는 진행 중인 그림을 보고 함부로 비평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부단히 신과 대화한다. 나의 생각은 그대로 신의 생각이다. 그러려면 더욱 나는 불완전해야 한다. 신은 거듭 수정하여 자신의 그림을 완성하여 가고 있기 때문이다.
도날드 월쉬의 [신과 나눈 이야기]는 신의 입을 빌려 [사실은 마랴, 지옥같은거 없어, 너들이 무지 속에 사는게 지옥이야 낄낄 속았지롱] 했다지만 나는 채택하지 않는다. 정확하게 그 두꺼운 시리즈에서 신의 의지는 단 하나 뿐이다.

[나는 너희가 원하는 것을 원한다]

선택권을 신에게 맞기고 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한다. 그것을 인연이라고 말한다. 인연따라 간다. 그것이 신의 의지이다. 거듭 실패해 왔다. 실패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지 않는 것을 하려했기 때문이다. 실패하지 않는 방법을 안다. 선택권을 신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우리가 판단하고 행위함으로서 신의 영역을 제한하게 되는 것이 신이 가장 싫어하는 바이다.

독재 혹은 독점은 신의 개입을 제한한다. 세계가 하나의 절대공화국으로 통합되어 인류가 더없이 행복하다면 신은 할 일이 없다. 그러므로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아니한다.
인간이 유토피아를 이루어 드없이 행복하다면 신은 실직자가 된다.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애초에 기대하지 말라. 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자기직장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문제를 해결해 가므로서 신을 신뢰하게 되고 동시에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므로서 신에게 일거리를 제공한다. 자본주의, 민주주의의 혼란과 드라마틱함은 신의 기호에 맞다.





























신의 의지는 무엇인가?

신의 의지를 찾는 것은 원광석에서 금을 찾는 것과 같다. 광석은 금이 아니라 돌이다. 그렇다고 버릴 수 없다. 얼마간의 금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불교도 기독교도 100프로 신의 의지는 아니다. 얼마간 신의 의지를 함유하고 있을 뿐이다. 확실한 신의 의지는 역사다. 거기엔 정련된 금들이 모여 있다. 또 확실한 것은 문명이다. 그것은 보관된 금괴다. 또 확실한 것은 문화다. 그것은 이용되고 있는 금이다.

우리는 적어도 역사와 문명과 문화라는 신의 확실한 의지를 볼수 있다. 거기에 자연과 인간을 더하여 이 다섯가지만 확실한 신의 작품이다. [자연] [인간] [역사] [문명] [문화]

우리는 때때로 자연의 아름다움에 그 섭리에 찬탄한다. 그대로 신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이 된다. 교회에 가서 백번 찬송하여 예배드리는 것보다 신의 대지에 접촉하여 그 아름다움을 음미하는 것이 더 훌륭한 예배가 된다.

우리는 때때로 인간 자신의 영장(靈長)됨에 찬탄한다. 인간이 그대로 신이다. 한 명의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지만 전체의 인류는 자연과 대등하다. 창조의 반쪽은 인간의 창조이다. 자연은 완전하지만 인간은 불완전하다. 스스로 자신을 완성시키므로서 신의 창조작업에 가담하는 것이 미덕이 된다.

역사는 자연과 인간이 대화한 기록이다. 거기에 일방향의 지향성이 있고 인간은 그 길로 가며 그것이 곧 도(道)이고 신의 의지이다. 인간은 역사의 방식으로 부단히 신과 대화한다. 도(道)는 어디에 있는가? 그저 역사를 보라.

문명은 언제나 불완전하고 현재진행형이다. 만약 어느 종족이 자신의 문명을 완전한 것으로 착각했을 때 그 문명은 무너진다. 문명은 불완전하므로 오히려 완전한 것이다. 문명의 불완전성, 유동성을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깨침이다.

문화는 자연으로의 다가감이다. 문화의 방식으로 자연과 문명 사이의 갭을 메움으로서 문명은 안전해진다. 이것이 신이 인간에게 맞긴 역할이다. 신은 자연을 창조하고 책임지며 그 반쪽을 인간에게 맞겼다. 그러나 방임하지 아니하고 자연스러움의 방법으로 부단히 대화하며 관리한다.

신을 깨닫는 것이 도의 궁극적 종착역이다.





●◎◇◆□■


모든 것은 확실하다.
정답은 이미 나와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진리의 성질은 [보편성, 일반성, 정체성, 절대성, 사실성]이다.
신의 의지는 [자연, 인간, 역사, 문명, 문화]로만 나타난다.

이것이 모든 논의의 궁극적 근거로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 어떤 종류의 주장이든 견해이든 입장이든 이 진리와 존재의 체로 걸러 찾아내지 못할 일 없다.

고귀한 것은 무엇이고 삿된 것, 이단적인 것, 잡스러운 것은 무엇인가? 예시한 열가지 요소로 엮어질수 없는 것이 모두 삿된 것이며 위 열가지 요소로 풀어지는 것은 옳은 것이다.

어떤 이가 어디 고귀한 장소에서 거룩한 은혜를 입어 신의 음성을 직통으로 들었다치자 왜 하필이면 그사람인가? 왜 하필이면 그때인가? 왜 하필이면 그 장소인가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이것은 진리의 성질 보편성에 위배된다.

보편성은 [어디에나 두루 막힘없이 통하는 성질]이다. 신의 말하는 방식은 진리의 방식이므로 여기서 가능한 것은 저기도 가능해야만 한다. 신의 음성은 모두가 듣거나 모두가 듣지 못하거나 둘 중에 하나, 어디서나 듣거나 어디서도 못듣거나 둘 중에 하나, 언제나 듣거나 언제도 듣지 못하거나이다. 예외는 없다.

신은 항상 다음다음에 대비하므로 하나의 문제해결이 다음의 문제해결에 장애가 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신이 특수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했다면 반드시 사람이 그리로 몰리고 거기에 장이 서고 교회가 서고 관례가 되고 예법이 생기고 하는 불필요한 치다꺼리가 뒤따르는 것이다.

누구나 보는 것, 어디에나 있는 것, 언제나 만나는 것은 자연, 인간, 역사, 문명, 문화 뿐이다. 신은 반드시 이 다섯가지 방법으로만 의지를 나타낸다. 뒷탈이 없기 때문이다.
신은 두 번 일은 하지 않으므로 방편은 쓰지 않는다. 방편은 꼭 두 번일 된다. [뭐뭐한 뭐뭐를 전달하기 위하여 임시로 그러한 방법을 잠시 사용한 것이다] 하는 구차한 설명을 해야 한다.

옛 성현들이 갔던 길은 옳은 것이며 우리도 마땅히 뒤쫓아야 한다. 그것이 옳다. 그것은 정도(正道)이며 중도(中道)이다. 그것은 진리의 성질 보편성, 일반성, 정체성, 절대성, 사실성에 맞는 일이며 자연, 인간, 역사, 문명, 문화로 증명되는 일이다.
분분한 의론이 필요없다. 공산주의에 대해 말한다면 [경계지어서 뒷탈이 나게한다]는 한마디로 진리의 성질 일반성에 어긋나는 점이 지적되는 것이다. 일반성은 하나이므로 경계가 필요없는 성질이다. 자본가와 노동자 하여 경계짓는 것이 이미 진리의 성질 아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가?

문제는 우리들끼리의 약속이다. 내부에서 의사소통이다. 먼저 우리 안에서 언어를 일치시켜야 하는 것이다. 공룡이 내리는 판단은 옳지만 그 명령이 머리에서 꼬리까지 전달되기 전에 다른 공룡이 꼬리를 잘라 먹어버리면 허사다.
우리들의 문제는 바로 이점이다. 상대성, 불확실성 하여 진리에 헛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소화할 우리들의 언어에 문제가 있어서 머리에서 내린 판단이 꼬리에 전달되지 않는다.
상대성 불확실성 양자이론이 존재 자체의 불분명성을 의미한다고 판단하면 엄청난 착각이다. 존재는 간단명료하다. 또한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정밀도이다. 우리는 지나치게 엄밀한 데이터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즉 미터법을 만들지도 않고 낡고 희어진 자로 정확한 계측을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정밀한 것은 되려 부정확한 것일 수 있다. 먼지 때문이다. 꼭맞는 요철을 만들어 들어맞지 아니한 것은 먼지가 들어갈 정도를 계측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잘못이지 자연의 오류는 결코 아니다. 자연에는 아무 하자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찌 해야 하는가?

우리가 하는 모든 판단이나 행동이 다음과 다음다음을 위한 관례와 선례가 된다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박정희의 방법이나 전두환의 방법은 두고두고 써먹어질수 없는 1회용이다. 민주주의는 영구재활용품이다.
박정희의 성공사례는 후진 각국에 권장하기 어려운 것이며 김대중의 성공사례는 아시아 전체를 변화시키기에 충분하다. 그것은 열매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씨를 뿌리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치를 논한다. 옳든 그르든 우리는 서로 의사를 소통하는 언어를 얻게 된다. 유익하다.

진리는 하나 뿐이고 간단명료하며 별처럼 높은데 있다.

진리는 [자기복제이론, 구조론, 전개이론, 일반이론, 집적이론]으로 규명된다. 학문은 진리와 현실을 매개하는 중간과정이다. 현실에 필요한 것은 언어이다.

우리에게는 언어가 없다. 그 언어를 잘못 임의로 만들어 쓰거나(공산주의) 틀리게 비유로 말하므로(신비주의) 또 중복되게 양만 늘려가므로(주지주의) 우리들의 투쟁이 바람 잘날 없다.
현실이 언어를 요청하고 학문으로 하여 언어에 근거를 부여하고 최종적으로는 진리가 학문을 담보한다.
여기서 진리 -> 학문 -> 현실로 갈수록 언어는 기하급증한다.
진리를 설명하는데 1의 언어가 소용된다면 학문(법칙)에는 100의 언어가 소용되며 현실에서는 10,000의 언어가 소용된다.

체험하는 바 근원으로 갈수록 언어는 절약된다. 그러므로 혹은 침묵이니 불립문자이니 언어도단이니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에게 남는 것은 많은 언어들 뿐이다. 후손에게 물려줄 것 또한 언어밖에 없다.

정도(正道)란 무엇인가?

현실 -> 학문 -> 진리로 집약해 가는 것이 정도이자 중도이다.
신비주의, 혹은 정신과학의 방법은 현실에서 맴도는 것이고 학문으로의 나아감이 없다. 서구중심의 근대 철학사상(분석철학 현상학 마르크스주의)들은 학문에서 맴돌고 진리로 나아감이 없다. 종교들은 진리와 현실 사이에서 학문을 통과하지 않으려 한다.

모든 학문은 궁극에서 신을 만난다. 이 문제를 회피하려 해서는 안된다. 지적 용기로서만이 정면돌파할수 있다. 학문을 두려워해서도 안되며 진리를 겁내어서도 안된다. 그것은 더디게 가는 길이지만 바른 길이다.

종교들은 학문을 외면하고 진리를 바로 현실에 접목하려 하므로서 설득력을 잃는다. 학자들은 진리와 현실을 두려워하며 논의하기 위한 논의로 만족하려 한다. 상업적 글쓰기의 라즈니시부류는 현실에서 맴돌고 학문하는 자세를 겁낸다.


































손봐야할 정치판 초짜들.

정치는 초짜가 하면 안된다.
이회창이나 조순이는 초짜다.
초짜의 좋은 점은 뒤 꿀릴 일이 없으니 한나라당 초선들처럼
길길이 날뛰어도 말릴 사람 없다는 거다.
고로 음흉한 정치가가 손볼일이 있을 때 1회용으로 빌려쓰는 칼 이 이들 초짜인 것이다.

고로 김영삼 9단이 초짜인 이회창 새칼을 한번 뽑아들다가
제 칼에 제가 손베이고
음흉한 김대중 9단이 조순 새칼을 쓰윽 빼들다가 하로강아지에 발뒤꿈치 물리고

문제는 이들 1회용으로 채택된 초짜들이 고용주의 내심을 읽고 제 살길을 찾은데 있다. 김영삼이 회창을 총리로 선택한 것은 그의 깨끗한 이미지를 차용하려는 딴마음을 품은 것이다. 김대중이 조순을 서울시장으로 간택한 것도 정치재개를 위한 발판으로 이용하려 한 것이다. 거기서 실패다.

거듭 말하거니와 정치는 초짜가 하면 안된다. 노련한 정치 9단이 결단을 내리는 것은 구름이 오매불망 기다리는 거인이라서가 아니라 자기 계파의 가신들을 믿고 커다란 야심을 품은데 있다.
이회창이나 조순은 자기 계보가 없으므로 설령 거인의 야심을 가진다 하더라도 만약 결단을 내렸다가는 비판의 구실을 주게되어 당장에 축출된다. 민주주의에 계보는 필수적이다. 물론 특정인물을 중심으로한 파벌의 형식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정치성향)를 중심으로 한 그룹의 형식이어야 미덕이다.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고 어느 정도의 믿는 구석이 있어야 결단을 내리고 힘을 쓴다. 만약 이한동이나 조순에게 약간의 휘하가 있었다면 그들도 야심을 품고 거인의 결단을 내렸을 것이다.
물론 용기가 있다면 차후를 믿고 힘이 없어도 과감한 희생의 결단을 내릴수 있지만 거인은 기다리면 오는 것이 아니고 민주주의를 발달시키면 저절로 온다.
재야출신이라든가 운동출신이라든가 하는 정치배경(예를 들면 김근태)이 든든한 사람이 거인이 될 기회를 얻는 것이다. 즉 우리가 문화의 힘으로(노조 전교조 경실련 등 각종 운동단체) 정치를 밀어주고 정치인을 키워줘야 하는 것이다.
김대중도 역시 지역이라는 하나의 문화가 키워낸 거인이다.




나는 정신과학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이야기를 한다. 그것은 기존의 학계 풍토에 대해(헤겔좌파니 현상학이니 하는 치들) 또 가벼이 즐기는 호사가들의 태도에 대해(홍야님 같은) 또 일부 약장사들에 대해(류시화 같은) 비교하여 진정한 것과 삿된 것의 차이를 가름하는 것이었다.
진정한 것은 진리(선비정신, 지성적 교양)와 학문(과학일반)과 현실(문화)를 통일시키며 또한 연계시키며 포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세계를 보아허면 진리(지성)의 태도는 일부 종교영역을 제외하고 거의 사라졌다. 19세기만 하더라도 학문 하는 자는 자신만만하였다. 그들은 오만하고 스스로 드높았다. 그러나 지금 소위 학자라는 치들은 단순한 기능직 전문가에 지나지 않는다.
다윈이 생존경쟁이니 하여 영장인간을 동물의 군집에 대었고 프로이드가 초자아 운운하며 인간정신을 이성우위에서 무의식(본능)의 우위로 역전시켰다. 마르크스가 패거리 역적모의로 완전히 추락시켰다. 기어이 학문은 혁명의 도구내지 이용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문화혁명에서 학자는 특히 하방대상이다.
학문이 고상한 것에서 시시한 것으로 추락한 것이 20세기다. 더욱 상대성이론, 불확정성의 원리 이후 학문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심해졌다.
지금의 서구중심 학문풍토를 보자. 일부 자연과학 계열을 제외하고는 거의 말장난이 다되었다. 무슨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현상학이니 분석철학이니 다 일리들은 있지만 연구하기 위한 연구, 논의하기 위한 논의로 타락하였다. (그것들이 말장난이란 비판서는 서점에서 쉽게 만난다)
이제 학자가 진리를 구가하고 인간 이성의 고귀함을 말하는 시대(적어도 루소, 밀, 데카르트, 칸트 이후 19세기 까지는 그랬다)는 지나간 것이다. 마르크스가 학문을 공리공론에서 구체적인 현실참여로 방향전환 시킨 것은 올바른 태도였지만 결국 또하나의 타성을 낳았을 뿐이다. 이것은 충분히 비판되어야 한다.

[그렇다 그것은 비판되어야 할 타성이다]

학문은 진리에 다가가 있는 성스러운 것이었는데 그 성스러움으로 하여 인간다움에서 멀어졌고 마르크스의 반성이 그 역의 타성을 낳아 학문이 지나치게 세속적인 가치가 된 것이 지금이다.

나는 그것을 본래의 성스러움으로 돌려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제 다시 진리를 말하고 이성을 구가하며 인간의 존엄을 주장하자. 우리 꼭 그래야 한다.
물론 학문 혹은 진리가 현실에서 멀어져서는 안된다. 학자는 현실에 참여하는 정신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옳다. 그러나 그것을 세속화하는 타락의 핑계라면 곤란하다.
이제 나는 서로 친해지지 않게 된 진리의 영역과 학문의 영역, 또 현실의 영역을 수직계열화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별개의 분야가 아니라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으뜸은 진리 혹은 철학(종교)이며 학문(과학일반)이 그 다음이고 현실은 그 아래이다. 학문이 현실을 위한 수단(마르크스주의)이 되어서도 안되고 이용가치(돈)로 환산되어서(자본주의)도 안된다.

뉴튼 갈릴레이 때 과학자는 곧 철학자이었다. 지금은 기술자이다. 그렇다면 반성해야 한다. 상대성 불확정성이 학자들의 타락에 대한 핑계로 될 수없다. 그건 별개다. 진리는 여전히 절대성을 구가하며 별처럼 빛난다.
※ ※ ※
과학엔 두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엄격하고 치열하며 난해한 아폴론적 측면이고 또하나는 공상적이고 낭만적이며 디오니소스적 측면이다.
보통 어린이는 [커서 무엇이 될래?] 하면 [과학자 될래] 하고 대답한다. 이들은 흥미와 모험심으로 무장하고 과학의 디오니소스적인 측면에 매료되었다가 아폴론적 측면에 실망하고 포기한다.
기성 과학자들 중에도 어릴 때의 동심을 잃지 않고 디오니소스적 환상을 유지하는 일단의 그룹이 있어 정신과학회인지 뭔지를 만들었다.
디오니소스적 환상 없이 과학에 대한 흥미는 유발되지 않는다. 동의한다. 그러나 거기에 답은 없다. 환상과 낭만은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고 주의를 끌며 널리 퍼뜨려 전하는 것이 역할이다.
철학이나 과학을 취미로 하는 자들은 대개 치열함이 없다. 그들은 진리를 알아내려는 열정보다는 남들이 들어 신기해하는 이야기거리를 챙겨오기 바쁘다. 물론 그것도 역할이고 가치있다.

과학을 배우고 싶어하며 과학가의 꿈을 가진 어린이에겐 로고스적 아폴론적 측면보다 파토스적 디오니소스적 측면이 강조되어야 한다. 통신에서도 마찬가지다. 과학이 직업이 아니고 취미이므로 아폴론적일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타성이 되어 과학이 그렇게 경도되어도 좋다는 뜻으로 확대해석되면 위험천만이다.
정신과학의 그들에겐 환상과 체험과 신비가 제격이다. 그들은 블랙홀이 이상한 구멍이라고 생각한다. 어릴 때 듣던 도깨비 이야기과 같다. 천체의 한 구석자리에 또하나의 도깨비굴을 만들고 도깨비방망이를 찾으러 천체망원경을 들여다 본다.
그것도 좋다. 그런 사람들이 제일 많은 곳이 일본이고 소행성을 제일 많이 발견하는 나라가 일본이다. 아마추어과학은 일본이 세계최고다. 그것이 과학의 저변을 넓히고 어린이들을 과학으로 인도하며 또하나의 문화가 되어 우리의 생활을 풍요롭게 한다.

그러나 그것이 또 타성을 낳고 사회풍조가 되어 치열함을 마비시키고 이성에 감성을 우선시키며 이론과학에 대해 생활과학의 우위를 뜻하는 것으로 확대된다면 곤란하다.
아니올시다. 선은 분명히 그어져야 한다. 거리의 약장수들 마술사들은 과학가가 아니며 미아리 점쟁이는 철학관이라고 써놓았지만 철학자가 아니다.
아폴론이 디오니소스보다 우위이며 로고스가 파토스보다 우위이다. 니체의 말은 그저 아폴론적 측면이 또하나의 타성이 되고 독점과 독단의 경향으로 흐를수 있는데 대한 반성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며 마르크스의 현실강조 또한 그 정도로만 해석되어야 한다.
과학은 그 성과를 현실에 빌려줄 뿐 현실과 별개다. 과학은 고고하게 존재하며 그 도입과 저변확대를 위해 하위디렉토리로 디오니소스적 측면을 한꼽사리 끼워줄 뿐 본질에서 아폴론이다.
아폴론은 태양이다. 과학은 달이 아니라 해다.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해의 뒤에는 달이 따라다닌다. 디오니소스도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는다. 균형이되 아폴론 우위의 균형이다.
그대 악동들이여~! 과학가의 유년은 대개 악동이다. 즐겨 새집을 털고 개구리를 잡다가 곤충기를 쓴 파브르나 동네 시계 물레방아 풍차 다 고장낸 에디슨이나 악동이다. 그 취미를 극복하는 이가 진짜 과학자가 되고 극복하지 못하는 이가 사이비가 된다.

반성하는 자세여야 한다. 흥미와 모험심을 접고 진리 앞에서 겸허해야 한다. 공짜는 없다. 스스로 살을 베고 뼈를 깍아야 한다. 가장 소중한 것을 먼저 버려야 한다. 그럴수 있는가?
밤은 언제나 낮의 뒤를 따라다니며 하루의 반을 차지하지만 낮과 동등한 대접을 받아서 안되며 절 뒤에 있는 산신각도 절의 일부이지만 부처님 앞에 모셔질 수 없으며 사이비종교도 종교의 자유를 인정받지만 나는 권장하지 않으리.

찬양되어야 하는 것은 이성이다. 꿈과 환상의 장식은 이성을 돋보이게 하는 보조의 역할이며 이성으로 인도하는 미끼일 뿐.
List of Articles
No.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구조론이란 무엇인가? image 김동렬 2009-01-02 9617
19 7장 - 사상의 형식 김동렬 2002-09-09 2894
18 8장 - 사상과 이데올로기 김동렬 2002-09-09 2966
17 11장 - 철학하기의 출발 김동렬 2002-09-09 2837
16 12장 - 우리에게 필요한건 미학이다 김동렬 2002-09-09 3140
15 - 후기 - 김동렬 2002-09-09 2732
14 정신과학, 틈새시장을 노린다 김동렬 2002-09-09 3182
13 철학에세이 - <서강한담> 김동렬 2002-09-09 5519
12 서강한담 2 - 진정한 믿음 김동렬 2002-09-06 3869
11 바우 철학이야기 2-인연 김동렬 2002-09-06 2689
10 하늘호수로 떠난 여행 김동렬 2002-09-06 4330
9 로마인 이야기 이해하기 김동렬 2002-09-06 3866
» 개고기 권하는 사회 김동렬 2002-09-06 3888
7 주류와 비주류의 변증론 김동렬 2002-09-06 3170
6 스타의 값어치 김동렬 2002-09-06 2714
5 열사논단 김동렬 2002-09-06 3564
4 열사논단 2 김동렬 2002-09-06 3430
3 성철이야기 김동렬 2002-09-06 3491
2 변증법 김동렬 2002-09-06 3436
1 신과학 이론 김동렬 2002-09-06 42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