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이란
read 3169 vote 0 2002.09.06 (12:30:38)

주류와 비주류의 변증론.

정신과학을 말한다면 일반과학을 주류라 하고 정신과학을 비주류라 할수있다. 정치에 여당과 야당이 있듯이 세상 어디가나 이런 주류와 비주류의 구분이 있다.
이것은 일종의 변증법이지만 헤겔의 변증법과는 다르다.

일반과학이 정(正)이면 정신과학은 반(反)이라 할수 있다. 헤겔식으로 합(合)에 의해 통일되어 그것이 또 정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변증법적으로 가지만 변증법대로는 안간다.
설명해야 하는 것은 변화이다. 변화가 있는데는 반드시 정통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클래식적인 것과 팝적인 것, 주도권을 장악한 쪽과 변죽을 올리는 쪽이 있다.
양자는 상호교감 혹은 마찰하면서 변화를 이끌어낸다. 둘 중 어느 한쪽만 있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둘 다 필요로 하지만 둘에 똑같은 대접을 해줄수는 없다. 헤아림이 필요하다.

여기에 대한 몇가지 고전적 견해들을 제시하면 이렇다.
1. 정통론 ...주자학적 정사론(正邪論), 정통을 숭상하고 이단을 배격하는. 광신도, 골수분자, 극단론자, 완강하며 고루한 자들, 주류, 창조, 혁명, 독단적 일원주의,
2. 상대론 ...도교적 혼돈론(混沌論), 역설의 논리로 이단을 옹호하는 아웃사이더, 마이너리티, 논리있는 반골, 유연한. 은둔자, 재야, 작은 목소리. 초월적인, 신비적인. 아류의, 상대론적 이원주의.
3. 회의론 ...알수없다는 체념, 회의의 무리. 습관적으로 반대편에 서서 비아냥, 풍자, 야유를 업으로 하는. 신념없이 비판을 위한 비판. 상업적인, 처세적인, 교활한. 양비론.
4. 수렴론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 혹은 정통과 이단이 서로 닮아서 마침내 하나로 통일된다는 중도파들. 중용론. 어중간한, 회색분자, 소박한. 안이한. 무책임한.
5. 실용론 ...잡스런 견해들이 무질서 하게 섞여있어도 그저 좋은게 좋다는 실용주의자들. 무원칙한, 치열하지 못한, 생각을 안하고 사는. 편의적인. 게으런, 다원주의,

이들 중 어느 쪽도 옳지 않다. 정통론은 흔히 비판받는다. 상대론 재야에서 과대평가된다. 회의론은 부지런히 꼽사리낀다. 수렴론은 양비론만큼 위험하다. 실용론은 논리가 아니다. 이런 문제들은 변증법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헤겔의 변증법은 잘못된 견해이다. 정이 유교(儒敎)이면 반은 도교(道敎)다. 유교와 도교가 합이 된 적이 없다. 수렴되지도 않는다. 일반과학과 정신과학도 마찬가지다.

법칙을 설명하자면 구조론과 전개이론을 언급해야 하므로 간단히 결론만 말하면 양자는 결코 50 대 50으로 대등하지 않으며 양자 사이에 역전은 일어나지 않고 통합되지도 않으며 일방 한쪽이 독점하지도 않는다.
양자는 불균형에 의한 균형(섭리)을 이루어 그 내적 불안에 의해 끊임없이 요동하며 무상한 변화를 생산해내고 세상의 진보를 이끌어 간다. 평행선을 달리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나란히 가지는 않는다.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주류, 정통이 앞서간다.

팽이가 가속하여 회전하는 것은 원심력과 구심력이 균형을 이루기 때문이 아니라 원심력이 약간 더 크기 때문이다. 그만큼 지면과의 마찰에너지로 소비된다. 원심력이 커지면 구심력도 같이 커지지만 결코 구심력이 원심력을 앞서는 일은 없다.
정통적이며 아폴론적인 것이 이단적이며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겨룰 때 언제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전자(前者)이며 문제를 제기하는 쪽은 후자(後者)이다. 변화에는 양자가 다 필요하지만 이들 간에 완벽한 균형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시간 때문이다.

생물의 진화에는 결정적인 두가지 힘이 작용한다. 하나는 돌연한 비약의 진화를 낳는 힘이며 또하나는 격리설 등으로 보여지는 매너리즘이다. 진화는 때때로 돌연 비약하여 진화했으며 그 비약과 다음 비약의 중간은 매너리즘이 채워온 것이다.
생존의 제 1조건은 적응이다. 적응하기 위해서 신체의 일부를 발달시켜야 한다. 기린 처럼 목이 길어지기도 하고 해우처럼 엄니가 길어지기도 하고 코끼리 처럼 덩치가 커지기도 한다.
이러한 적응은 환경의 변화에 적응실패하게 한다. 적응을 많이 한 핀치새일수록 환경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적응할수록 여타의 종들보다 유리하지만 그럴수록 환경변화에는 불리하다. 이 상호모순된 두가지 원리에 동시대응하기 위해 두가지 논리가 작용하는 것이다.
조개를 잡아먹고 사는 해우는 엄니가 길수록 유리하다. 더 많은 조개를 잡을수 있으니까. 그러나 어느날 조개가 바닥나면 전멸이다. 조개 외에는 못 먹으니까. 적응할수록 종족과의 경쟁에서 이기지만 환경과의 경쟁에서 진다.

위에서 돌연한 비약은 정통론, 아폴론적 측면이며 매너리즘은 이단론, 디오니소스적 측면이다. 산업혁명, 신기술의 도입, 대정복, 등 역사의 대전환은 정통적인 것이 만들어왔으며 그 사이사이는 매너리즘이 채워왔다.
정신과학도 일반과학의 한계노정에 따른 매너리즘발달현상이다. 팔이 길어지듯이 잡다한 것이 양이 많아지는 것이다. 비유하면 서태지가 랩을 들고나온 것은 정통적 변혁이다. 서태지 아류들에 의해 음악이 더 분주해지고 길어진 것은 매너리즘현상이다.
역사진보의 두가지 원리는 창조와 적응이다. 전자는 정통론이며 후자는 상대론이다. 전자는 위대한 영웅에 의해 돌연히 비약적으로 일어나며 후자는 아이디어맨들에 의해 얻어지는 모방과 아류의 잡된 수익이다.
※ ※ ※
혹자는 인간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내겐 대중적이어야 한다고 들린다. 상업적, 통속적이어야 한다고도 들린다.
오늘날 아카데미즘이 죽고 지성이 죽고 창조가 죽고 혁명이 죽고 아폴론이 죽고 모방과 아류, 매너리즘, 잡된것들이 판을 친다.
올해는 1998년이고 세기말이다. 그리고 2000년이다. 지금 지구에 필요한 것은 또한번의 질적인 변화, 위대한 도약이다.

홍상수감독이 영화 [강원도의 힘]을 만들었다. 어느 평자는 그따위 돼지가 우물에 빠진 소리를 쇄말주의(蔘末主義)라고 했다. 의연한 기풍은 사라지고 풍각쟁이들만 들끓는 쇄말(좋은 말로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시대 지구촌문화의 전반적인 말세현상이다. 극복되어야 한다.
신기하다니 새롭다니 멋있다니 하면서 잡된 부스러기를 자꾸만 줏어모은다면 어찌 우울하지 않겠는가?
아폴론의 길로, 태양의 길로, 정통의 길로 가야 한다. 그러면서도
내 얘기들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일정한 법칙을 두고 풀어내는 것이다. 법칙은 이미 말한바 있다. 매번 일일이 말할수 없어 의사전달이 어렵다.
정신과학을 말한다면 일반과학을 주류라 하고 정신과학을 비주류라 할수있다. 정치에 여당과 야당이 있듯이 세상 어디가나 이런 주류와 비주류의 구분이 있다.
이것은 일종의 변증법이지만 헤겔의 변증법과는 다르다.

일반과학이 정(正)이면 정신과학은 반(反)이라 할수 있다. 헤겔식으로 합(合)에 의해 통일되어 그것이 또 정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변증법적으로 가지만 변증법대로는 안간다.
설명해야 하는 것은 변화이다. 변화가 있는데는 반드시 정통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클래식적인 것과 팝적인 것, 주도권을 장악한 쪽과 변죽을 올리는 쪽이 있다.
양자는 상호교감 혹은 마찰하면서 변화를 이끌어낸다. 둘 중 어느 한쪽만 있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둘 다 필요로 하지만 둘에 똑같은 대접을 해줄수는 없다. 헤아림이 필요하다.

여기에 대한 몇가지 고전적 견해들을 제시하면 이렇다.
1. 정통론 ...주자학적 정사론(正邪論), 정통을 숭상하고 이단을 배격하는. 광신도, 골수분자, 극단론자, 완강하며 고루한 자들, 주류, 창조, 혁명, 독단적 일원주의,
2. 상대론 ...도교적 혼돈론(混沌論), 역설의 논리로 이단을 옹호하는 아웃사이더, 마이너리티, 논리있는 반골, 유연한. 은둔자, 재야, 작은 목소리. 초월적인, 신비적인. 아류의, 상대론적 이원주의.
3. 회의론 ...알수없다는 체념, 회의의 무리. 습관적으로 반대편에 서서 비아냥, 풍자, 야유를 업으로 하는. 신념없이 비판을 위한 비판. 상업적인, 처세적인, 교활한. 양비론.
4. 수렴론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 혹은 정통과 이단이 서로 닮아서 마침내 하나로 통일된다는 중도파들. 중용론. 어중간한, 회색분자, 소박한. 안이한. 무책임한.
5. 실용론 ...잡스런 견해들이 무질서 하게 섞여있어도 그저 좋은게 좋다는 실용주의자들. 무원칙한, 치열하지 못한, 생각을 안하고 사는. 편의적인. 게으런, 다원주의,

이들 중 어느 쪽도 옳지 않다. 정통론은 흔히 비판받는다. 상대론 재야에서 과대평가된다. 회의론은 부지런히 꼽사리낀다. 수렴론은 양비론만큼 위험하다. 실용론은 논리가 아니다. 이런 문제들은 변증법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헤겔의 변증법은 잘못된 견해이다. 정이 유교(儒敎)이면 반은 도교(道敎)다. 유교와 도교가 합이 된 적이 없다. 수렴되지도 않는다. 일반과학과 정신과학도 마찬가지다.

법칙을 설명하자면 구조론과 전개이론을 언급해야 하므로 간단히 결론만 말하면 양자는 결코 50 대 50으로 대등하지 않으며 양자 사이에 역전은 일어나지 않고 통합되지도 않으며 일방 한쪽이 독점하지도 않는다.
양자는 불균형에 의한 균형(섭리)을 이루어 그 내적 불안에 의해 끊임없이 요동하며 무상한 변화를 생산해내고 세상의 진보를 이끌어 간다. 평행선을 달리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나란히 가지는 않는다.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주류, 정통이 앞서간다.

팽이가 가속하여 회전하는 것은 원심력과 구심력이 균형을 이루기 때문이 아니라 원심력이 약간 더 크기 때문이다. 그만큼 지면과의 마찰에너지로 소비된다. 원심력이 커지면 구심력도 같이 커지지만 결코 구심력이 원심력을 앞서는 일은 없다.
정통적이며 아폴론적인 것이 이단적이며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겨룰 때 언제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전자(前者)이며 문제를 제기하는 쪽은 후자(後者)이다. 변화에는 양자가 다 필요하지만 이들 간에 완벽한 균형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시간 때문이다.

생물의 진화에는 결정적인 두가지 힘이 작용한다. 하나는 돌연한 비약의 진화를 낳는 힘이며 또하나는 격리설 등으로 보여지는 매너리즘이다. 진화는 때때로 돌연 비약하여 진화했으며 그 비약과 다음 비약의 중간은 매너리즘이 채워온 것이다.
생존의 제 1조건은 적응이다. 적응하기 위해서 신체의 일부를 발달시켜야 한다. 기린 처럼 목이 길어지기도 하고 해우처럼 엄니가 길어지기도 하고 코끼리 처럼 덩치가 커지기도 한다.
이러한 적응은 환경의 변화에 적응실패하게 한다. 적응을 많이 한 핀치새일수록 환경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적응할수록 여타의 종들보다 유리하지만 그럴수록 환경변화에는 불리하다. 이 상호모순된 두가지 원리에 동시대응하기 위해 두가지 논리가 작용하는 것이다.
조개를 잡아먹고 사는 해우는 엄니가 길수록 유리하다. 더 많은 조개를 잡을수 있으니까. 그러나 어느날 조개가 바닥나면 전멸이다. 조개 외에는 못 먹으니까. 적응할수록 종족과의 경쟁에서 이기지만 환경과의 경쟁에서 진다.

위에서 돌연한 비약은 정통론, 아폴론적 측면이며 매너리즘은 이단론, 디오니소스적 측면이다. 산업혁명, 신기술의 도입, 대정복, 등 역사의 대전환은 정통적인 것이 만들어왔으며 그 사이사이는 매너리즘이 채워왔다.
정신과학도 일반과학의 한계노정에 따른 매너리즘발달현상이다. 팔이 길어지듯이 잡다한 것이 양이 많아지는 것이다. 비유하면 서태지가 랩을 들고나온 것은 정통적 변혁이다. 서태지 아류들에 의해 음악이 더 분주해지고 길어진 것은 매너리즘현상이다.
역사진보의 두가지 원리는 창조와 적응이다. 전자는 정통론이며 후자는 상대론이다. 전자는 위대한 영웅에 의해 돌연히 비약적으로 일어나며 후자는 아이디어맨들에 의해 얻어지는 모방과 아류의 잡된 수익이다.
※ ※ ※
이빈님은 인간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내겐 대중적이어야 한다고 들린다. 상업적, 통속적이어야 한다고도 들린다.
오늘날 아카데미즘이 죽고 지성이 죽고 창조가 죽고 혁명이 죽고 아폴론이 죽고 모방과 아류, 매너리즘, 잡된것들이 판을 친다.
올해는 1998년이고 세기말이다. 그리고 2000년이다. 지금 지구에 필요한 것은 또한번의 질적인 변화, 위대한 도약이다.

홍상수감독이 영화 [강원도의 힘]을 만들었다. 어느 평자는 그따위 돼지가 우물에 빠진 소리를 쇄말주의(蔘末主義)라고 했다. 의연한 기풍은 사라지고 풍각쟁이들만 들끓는 쇄말(좋은 말로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시대 지구촌문화의 전반적인 말세현상이다. 극복되어야 한다.
신기하다니 새롭다니 멋있다니 하면서 잡된 부스러기를 자꾸만 줏어모은다면 어찌 우울하지 않겠는가?
아폴론의 길로, 태양의 길로, 정통의 길로 가야 한다. 그러면서도 달을, 주변을, 마이너리티를 잊지 않아야 한다. 달을, 주변을, 마이너리티를 잊지 않아야 한다.





























홍야님이 어찌 개를 구제할까?
개가 어찌 홍야님을 구제할까? 어느 쪽도 답은 아니다.

여자가 아줌마가 되면
궁뎅이가 펑퍼짐해지기 전에
정신이 먼저 펑퍼짐해져서 ...
얘기 똥오줌도 뭐 더러우랴 잘치우는거 까지는 좋은데
제 입속에걸 얘기 입에 속 넣어주고
얘기먹던 거 입에서 빼내어 지 먹고...
미추(美醜)에 대한 감각이 마비되는 것이다.

홍야님이 끄직꼬 다니는 차는 낡았지만
정신은 여전히 소년다운데
그 정신도 그런식으로 낡아가는 것이다.
어찌 슬프지 아니하리오.

인간은 늙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조금씩 삭아서 죽는다.
모름지기 자기의 심미감각 윤리의식을 보호하기 위하여
애쓸 일이다.

이구님은 태어날때부터 세상 다살은 90노야다.
정육 부정육은 없다.
곰삭은 정신과 팔팔한 정신이 있을 뿐.

젊은날의 팔팔한 패기는 사라지고
어느날부터 더러운 것이 더럽게 보이지 아니하고
부도덕한 것에 분노가 일어나지 않고
봄아침 만연한 살구꽃 반갑지 아니하거던
지나가는 똥강아지가 먹음직한 장국으로 보이거든
그때 인간이 딱죽을 때이니
더는 숨쉬지 말라.

[65세의 청년 이상재는 이렇게 말하시었다]
[마음이 청년이어야 청년이라고]







미국에서 범죄가 증가한 것은 마피아가 약화되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마피아는 그래도 마약은 취급하지 않는다.

한국의 정치구도(여야당과 재야의 3각체제)는 근본 잘못된 것이며 기형적인 것이다. 이제 정리되어야 한다. 우리가 원할 것은 진보, 보수 양당정치 내지 그에 가까운 정립된 정치구도다. 지금의 혼돈스런 정치판으로는 안된다.

마피아는 실체가 분명한 적이다. 마피아와의 싸움은 상대가 있는 게임이다. 경찰이 마피아를 다루는 것은 차라리 쉽다.
마피아가 쇠퇴한 후 새로 생겨난 군소 갱조직은 얼굴없는 적과의 싸움이다. 경찰이 조직적으로 대처할수 없다.

우리가 옳은 정치구도를 원하는 것은 적과 동지가 분명하고 선과 악이 명백하며 누가 잘못하면 그 과실과 책임을 명명백백 규명할수 있는 그런 상태를 원하는 것이다. 지금의 혼돈상황에선 선악을 판별할수 없고 책임소재도 희미하다.

어떤 정치공간이 존재하면 누군가 반드시 그곳을 차지한다. 그가 세력을 얻으면 조정은 토벌하든지 벼슬을 줘 회유하든지 할수 있다. 허나 세력없는 조무라기 산도적이 출몰하면 어쩔 도리없다.

왜 박노해 백태웅을 사면해야 하는가?

정치적 행위에서 처벌가능한 것은 테러범죄 뿐이다. 내가 아는 한 박노해와 백태웅은 테러범이 아니다.

혹자는 그들이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정부전복을 꾀했다한다. 그런데 꾀한다는게 뭐지? 정치란 다수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그들이 꾀했다는 것은 다수의 지지를 받으려했다는 것이다. 다수의 지지를 받으면 그들이 옳은 것이고 소수의 지지를 받는한 불능범이며 불능범은 처벌할수 없게 되어있다.

양심수의 사면은 우리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정식 데뷔한다는 선언의 의미가 있다. 사면이 안된다는 것은 국제사회가 여전히 한국의 국제고문관 내지 악당국가로 보게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인들은 여전히 국제사회에서 따돌림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미국이 신정부와 범인인도조약을 체결키로 한 것은 그 [따]를 떼주려는 의도이다.
그들은 한국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고 있다. 우리가 그들의 잘못을 꾸짖는다고 해서 그 색안경이 벗겨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적극 그들을 납득시켜야지 그들 스스로 납득하지 않는다.

박노해 백태웅을 사면하면 어떤 이익이 있는가?

우선 선진각국과 범인인도조약이 체결되어 범죄인의 해외 재산도피를 막고 각국의 비자면제 내지 절차 간소화혜택을 얻는다.
박노해 백태웅 등을 석방하면 음지에서 암약하는 그들 세력들이 양지로 나오게 된다. 그들에게도 우리는 책임물을수 있게 되고 비판할수 있게 된다. 그들이 음지에 있는 한 우리는 그들을 비판할수도 책임물을수도 없다. 실체도 없고 역할도 없기 때문이다.

여야와 재야로 된 정치구도를 바꿔야 한다. 정치는 의회에서 하는 것이다. 한총련, 사노맹, 전교조, 민총, 전국연합 등 재야는 정치에서 손떼야 한다.
그러나 민주화 안된 현상황에서 [정치공간이 존재하는 한 정치세력이 나타나는] 움직일수 없는 자연법칙에 의해 재야는 정치에서 손을 뗄수 없게 되어있다.
민주화 없이는 재야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비판할수도 책임물을수도 없는 것은 정권을 잡은적 없는 구야당에게 IMF책임을 물을수 없는 것과 같다.
비판과 책임은 양지에 있고 권력을 나눠가질 때 가능하다. 룰이 공정하지 않은 이상 재야를 비판한다는 것은 공허하기 짝이 없다.

우리는 무엇을 꿈꾸어야 하는가?

1. 한나라당은 독재권력에 기초한 정치판 건달무리이며 지역감정 외에 명백한 정치기반이 없으므로 이제 사라져야 한다.
2.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가진자의 이익을 토대로 하는 정치세력으로서의 존재가치가 있다.
3. 노동자, 소외된 자를 대변하는 정치세력은 없으며 표가 존재하는 이상 그 표를 대변할 정치세력이 나와야 정치가 안정된다.
4. 재야는 독재상황에서 생겨난 비정상이므로 순수사회단체로 변신하고 정치부분은 원내진입하여 3항의 빈공간을 메워야 한다.
5. 이를 위한 정계개편과 내각제, 비례대표제, 자치단체의 중대선거구제가 도입되어야 한다.

박노해 백태웅의 사면은 그들 음지의 무리들이 비판과 견제 감시가 가능한 양지로 노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만큼 이나라는 안전해진다. 그것이 국가이익이다.
사회불안은 어떤 노출되지 않은 정치공간이 존재할때 그 빈자리를 차지하려는 경쟁이 음지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음지에서는 극단적인 강경파가 무조건 이기게 되어있다. 국가손실이다.
고로 정치공간이 존재하는 한 그곳을 재빨리 양지로 끌어내워 공개경쟁을 벌여 메워버려야 한다. 예를 들어 환경문제 동성애자인권문제같은 이상한 것이 나타났을 때 쉬쉬하고 억누르기 보다는 그들 세력을 키워주어 이슈를 재빨리 소화해버리는 것이 사회불안을 막는 것이다.
IMF로 실업자가 증가하면 실업자단체가 생기고 그들이 데모를 하면 사회는 불안해진다. 그들 실업자단체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 두목도 조직도 불분명할 때 사회가 위험하다. 오히려 키워주어야 그들이 하나로 통합되고 통합되어야 협상과 대화, 견제, 감시가 가능해진다. 예를 들자면 그렇다.

한총련, 민주노총, 전교조 등은 잘못하여 왔다. 그러나 그들을 비판하려는 나의 논리는 반칙이 허용된 프로레슬링 시합에서 반칙을 비난하는 것 만큼이나 허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을 키운 것은 독재이며 독재가 기승을 부리는 한 그들의 몸집은 자연히 커지게 되어있으며 몸집이 큰 아이는 사고를 치게되어 있기 때문이다. 독재가 사라지고 공정한 룰이 확보되어야 우리는 비로소 말발을 세워 그들을 감시 비판 견제할수 있다.

정치란 것은 어떤 정치공간이 존재할 때 그들의 대표자를 만들어주어 공개된 장소로 끌어내어 대화하고 논쟁하고 경쟁하는 거다. 정치공간이란 전라도든 재벌이든 노동자든 여성이든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상황이 존재하는 것이다.
어떤 종류의 것이든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상황이 존재할 때 재빨리 사회가 그 이슈를 소화하여 그들의 단체를 만들어주고 대표자를 뽑아주며 원내로 끌어들여 공개된 장소에서 검증 비판 감시 견제 경쟁하는 것이 민주주의이며 사회발달이다.

양심수, 보안법의 존재여부는 선진국과 후진국을 가르는 국제기준이다. 중진국이란 말은 원래 사전에 없다.









레인보트님을 위한 정치이야기

레인보트님이나 홍야님처럼 아무 정치적 입장없이 하는 말들은 혹 옳기도 하고 혹 틀리기도 하지만 어느쪽이든 가치없다.
가치있다면 오로지 선거에서 단 한표, 혹은 그에 동조된 서너표의 가치 뿐이다. 여긴 토론을 하는 공간이다. 토론가치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논의가치가 없다.
논의가치란 올바른 인식으로 하여 생기는 가치이며 그것은 정치를 떠나 인식 그 자체의 고유한 가치다. 우리는 적어도 인식하고자 하며 인식하기 위하여 논의한다.
※ ※ ※
산 정상을 향하여 오르는데 마지막 한걸음을 남겨두고 있다. 이미 올라올 만큼 올라왔는데 굳이 마지막 한걸음을 보태어 정상을 오른들 뭐가 달라지는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대충 살아서는 인식이 아니다. 인식은 굳이 마지막 한걸음을 보태어 정상을 밟아야만 하는 것이다. 정상을 밟기 전에는 전혀 오르지 않은 것과 같다. 왜?
산을 오르다보면 그 봉우리가 정상인줄 알았는데 오르고 보면 정상은 저 멀리 있는 경우를 본다. 그때 아무 깨달아지는 것이 없던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산에 오르려는 목적을 가지고 온것이지 놀러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00프로가 아니면 0이다. 인식에선 그렇다.
※ ※ ※
이번 사면의 의미는 김대중이 IMF 상황에서 경제문제에 주력하고 정치문제를 우선순위의 뒤로 미루는 결정을 했다는데 있다.
김대중의 꼼꼼이 챙기는 성격상 자신이 직접 챙기지 못하는 문제는 타인에게 분담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에서 한숨을 돌려 직접 챙길수 있을 때까지 뒤로 미룬거다.
경제가 1번이 되고 정치가 2번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하였다. 또 자신이 챙기지 못하는 문제는 뒤로 미뤄도 된다고 판단했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했다.
※ ※ ※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 경제에 치여 정치가 뒤로 미뤄지는 편법과 방편이다. 이때 선비의 태도는 어떠하여야 하는가?
김대중은 상식인이다. 그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안다. 인권문제가 흥정이나 타협의 대상이 아니고 상황을 따지고 분위기를 살필 문제가 아님을 그는 안다. 알거 아는 사람이 알면서.
왜 이것이 급하다고 바늘 허리에 매어쓴 일이 되는지 따져야 한다. 그것이 알거 아는 사람이 할 일이다.
※ ※ ※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알아야 한다. 편법을 쓰는것도 좋지만 편법을 썼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정치에는 융통성이 있으므로 상황을 만들어갈수 있지만 적어도 식자된 도리는 형편을 알지 못하는 다수에게 알리는 일이다.
통신게시판도 하나의 언론역할이다 조선시대로 말하면 사간원이다.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의 일은 예법을 벗어난 경우가 없는지 시시콜콜 따지는 것이다.
왜 그것이 필요한가?
잘나가는 세종대왕이라도 경우에서 벗어나면 기록하고 비판하고 논쟁해두어야 나중을 위한 참고자료가 된다. 비판이 없으면 급한 일을 위한 방편으로 경우를 벗어났을 때 나중 원위치가 된다.
나중 김대중이 경제를 잘 해결하고 이제 정치를 손보고자 할 때 지금의 미뤄둠을 잊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이거다. 경제위기라 해서 급하게 핸들을 오른쪽으로 꺽어놓고 그걸 까먹어버리면 그리하여 계속 그길로 가버리면 어쩌냐는 거다.
※ ※ ※
적어도 인권문제만큼은 양보가 안되는 것이다. 양심수 문제 보안법문제는 국가의 정체성과 직접 연결된다. 후손에게 할말이 없다. 통신게시판은 삼사(三司)의 역할이다. 조선시대의 사간원 홍문관 관리들도 양보할 문제와 양보하지 않을 문제를 알았다.
김대중의 판단은 현명하고 슬기로운 결정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솔로몬이 매양 그런식으로 재판하면 솔로몬의 아들도 그 흉내를 내고 그런 나라는 망한다.
원칙은 지켜지지 않을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땅에 할말 다하는 선비가 있어 그 원칙없음을 지적했다는 기록은 후손을 위해서도 남겨둬야 한다.
※ ※ ※
수레바퀴나 동업처럼 뚜렷한 정치적 입장이 있는 말은 설사 틀린 판단이라 할지라도 후대에 옳은 판단을 위한 자료의 가치가 있다. 그러나 레인보트님의 판단은 아무리 슬기로와도 남는거 없다. 나라를 솔로몬 식으로 구멍가게 운영하면 망한다.
김대중의 사면은 산 정상을 한발 남겨두고 [다올라왔다 바쁜데 고마 내려가자] 한 것이다. 전혀 오르지 않은 것과 같다.
※ ※ ※
왜 산을 오르는가? 왜 굳이 정상을 밟아야만 하는가? 왜 꼭 거기에 깃발을 꽂아야 하는가? 왜 기록을 남겨두어야 하고 표식을 달아야만 하는가?
그것은 오직 정상에서만 얻을수 있는 가치 - 척도와 기준 원칙 방향, 모든 판단의 재료이다. 이번의 실패로 하여 우리는 두고두고 쓸데없는 논란과 쓸데없는 갈등과 의심과 불안을 얻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 단 한걸음을 내딛지 않았기 때문에.
독재와 민주를 가름하는 전환점이 될 사면의 영광을 우리는 잃어버렸다. 후대의 교과서에 김대중의 조상은 그냥 우물쭈물 민주화를 하였고 그 우물쭈물로 하여 두고두고 골탕을 먹었다고 기록하게 된다.
내부 희생없이 맥아더의 강압에 의해 타의로 민주주의를 한 일본이 헤메는걸 우리는 보지 못하는가?
국시를 바꾸어야 한다. 김대중은 그걸 하지 않겠다는거다. 여전히 국시는 반공이고 통일은 되면 좋고 안되면 그만이고 그런 시대를 우리는 앓고 있다. 자신이 환자임을 모르면서.


































국시를 바꾸어야 한다.
김대중의 양심수 사면제외는 국시를 바꾸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달라진거 아니다.
우리나라의 국시는 반공이다. 이는 우리나라가 독재국가임을 의미한다.
민주국가의 국시는 반공일수도 없고 통일일수도 없다.
왜냐하면 민주주의 그 자체가 곧 국시이기 때문이다.
어떤 국시를 두는 것은 목적을 두는 것이고 그 목적을 국가위에 두고 국가를 민 위에 두는 것이며 그것이 곧 독재다.
독재란 1인의 독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1당의 독재도 독재요, 일계급, 일이데올로기의 독재도 독재이며 일종교의 독재도 독재이다.
민주국가는 민이 주인이므로 민의 주인됨 그 자체가 곧 국가의 목적이지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국가가 존재할수 없다.
양심수문제는 인권문제이고 인권문제는 인간을 어떻게 대접하느냐의 문제이고 그것은 국가가 국민을 어떻게 대접하는가의 문제이다. 곧 국가의 정체성문제이다.
국가가 국민에게 속하는가 국민이 국가에 속하는가의 문제이다.

[김대중은 정상의 코앞에서 마지막 한걸음을 내딛지 않으므로서 /해방전후사의 총결산/이라는 시대의 지상과제를 회피하였다.]

질곡과 억압으로 점철되었던 [해방전후사 - 매국, 식민지, 분단, 독재, 야합의 시대]에 과감한 종지부를 찍지 못하고 후일의 과제로 남겨두게 되었다.

[역사는 기차와 같아서 방향을 바꿀때는 몸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대가리를 떼어 뒤-에 다는 것이다.]

간단하게 머리(國是)를 잘라 뒤에붙이면 되는데 몸을 돌리느라고 용을 쓰는 어리석음이여. 굽은 것을 펴는게 정치, 바로잡아야 한다.








♤ [비 맞은 중의 구시렁거림을 웃다]

♤ 자왈(子曰) 앞길에서 들은 좋은 말을 마음에 간직하고 수양으로 삼음은 군자의 덕이요 뒷길에서 구시렁거림은 소인배의 흉이니라.

♤ 라 퐁텐의 우화 - 늑대가 강물을 마시고 있는 새끼양에게 시비를 건다. 새끼양은 조리있게 대답하여 늑대의 말문을 막는다. 늑대는 아무 말없이 그냥 새끼양을 잡아먹어 버린다.

♤ 의(義)와 불의(不義)의 싸움 - 투사가 독재와 다투는 것은 새끼양의 [조리있는 대답]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늑대의 흉포한 이빨을 드러내는 수단이다.

♤ 소시민의 우(愚) - 그들은 투사에게 항의한다. [그대 새끼양이여 왜 조리있게 대답하여 늑대를 물리치지 않느냐]하고 - 아무러나 늑대는 새끼양을 잡아먹는다.

♤ 지각없는 소시민적 태도는 극복되어야 한다. 라 퐁텐의 우화에서 교훈을 얻어야 할지니. 늑대의 이빨을 보이는데 목적이 있지 늑대와 논쟁하려는게 아니어서.
※ ※ ※

♤ 조용기목사는 김영삼시절 청와대 문턱이 닳도록 출입하더니 [대한민국에서 장관이라도 한자리 할라면 기독교도 아니면 안돼]를 얻어내더라.

♤ 조용기가 요즘 예배마다 [새 대통령에게 기름부어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이 민족을 바로 이끌게 기도하옵나이...하나님 아버지 밤낮 싸울 궁리만 하는 국회의원들 다 쫓아내버려 주시옵소서. 국회에 불이나 타버리던지 국회를 없애버려 주시옵소서..아멘.

♤ 법장님의 맹랑한 언어를 듣고 조용기가 생각키우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 구시렁구시렁 불만도 많다. 또한 번뇌 아니겠는가? 여보게 저승 갈때는 그 짐 다 내려놓고 가시게나.











♤¸¸¸삼천포에는 비가 오더냐?






















법장님께...!

본 도둑께서 마 [돌(乭)중(中)법(法)장(張)]의
한 꼭지를 던진 것은
이 보살께서 웬 천둥벌거숭이 놀음에 흥겨우신가 하여
심리테스트 페이소스 약간이었던 바

그것을 스스로 [돌중 법장에게]라고 해석하는 것은
도둑이 제발 저린 격이라고
(그 내용이 대개 법장님과 무관한데도)

논인 즉슨 제 멋에 흥겨운 화상이라
본 도둑이 장단을 맞춰줄 놀음이 못되는 바
그럼 비켜줄테니 계속 놀아보슈 하고 빠졌더니
점점 가관이 되어가는데

아하 똥마려운 중생에게 휴지를 제공함도 자비행이려니 하고
한꼭지를 거들어 주자면
생긴 것은 도골인데 오직 치도곤으로
물볼기 500대를 맞는 방법으로만이 도가 트일 골상이라는
법어가 내렸으니 용인민속촌 동헌에 가서 궁뎅이 까놓고
형틀위에 사흘만 엎드리고 있으면 곧바로 부처가 되겠소이다. 그려.

※ ※ ※

언어가 분주하랴.

96년 411총선을 며칠 앞두고 인민군들이 돌연 판문점에서
철책을 넘어와 진지공사를 하였다.
김영삼대통령이 선거용으로 미국측에 강력히 요구하여 워치콘 쓰리를 워치콘 투로 격상시켰다.

인민군이 100여명 들어왔는데 국내 신문들은 250명으로
과장보도하였다. 그 결과 신한국당은 총선에 이겼다.

이런 경우 척보면 안다.
이것이 정치술수라는 것을. 그런 진지공사는 옛날에도 많았다.
문제는 이것이 안기부와 북한의 비밀커넥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오늘 국내 일간신문들은 안기부와 북한의 커넥션이
오익제사건의 모든 과정을 조정하였다는 보도를 내고 있다.
그렇다면 411총선때의 진지공사도 양측의 돈이 오고가는 사전합 의하에 있었을수 있다. 보도에 의하면 북한 공작원이 북경에 상 주하면서 안기부 요원과 접촉하였다 한다.
새정부는 안기부와 북한의 선을 완전히 끊을수도 없고
그냥 둘수도 없고 고민 중이란다.

문제는 첫째 이것이 엄청난 사건이라는 것이다.
지금의 한나라당은 그 결과로 생긴 것이니 한나라당은 북한이 만들어준 당이 아닌가? 한나라당은 김정일당으로 당명을 바까야 하리.

둘째 상식인은 이런 것을 다안다는 것이다.
나 정도의 식견이 있으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안다.
어느 것이 진짜이고 어느 것이 가짜인지 안다.
이**님과 홍**님 같은 분은 모른다.

고로 식견이 모자라는 사람은 식견이 있는 사람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해야 한다. 뻔히 아는 것에도 속는 사람은 있고 그 속는 사람들의 한표가 나라를 지속적으로 절단내어 왔다.

PD수첩은 언론의 비리를 고발하는 프로를 제작해놓고 방영 못하고 있다. 왜?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아니하는 사람이 있다.

생각을 덜하는 사람은 생각을 더하는 사람에게 판단을 빌리는 태도가 옳다.























































법장을 위한 만해론.

함석헌 선생은 기독교도였지만 우리가 아는 그런 기독교도는 아니다. 퀘이커교인데 교단도 없고 교회도 없다. 퀘이커는 국제기구형태로 되어있어서 주로 지식인들이 자기 서재를 교회로 생각하고 성경을 바탕으로 스스로 기도하는 것을 수칙으로 한다.

만해의 불교유신론은 퀘이커기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봐야한다. 퀘이커는 일부 사회주의 영향을 받았다. 만해도 그렇다.

만해는 일종의 불교공동체를 생각했다. 당시는 식민지 상황이고 그런 쪽으로 일종의 붐이 있었다. 기독교나 천도교에서도 키부츠같은 사회주의 농촌공동체를 만들어 공동생활을 하는 유행이 크게 번져 각지에서 실험되곤 하였다.

만해의 그런 사상을 지금의 조계종에다 대입시켜 생각한다면 무리이다. 당시의 주장을 이해하려면 당시로 돌아가야 한다. 만해가 종단의 개혁을 도모했다고 본다면 오판이다. 불교의 새로운 부흥을 꿈꾸었을 뿐이다.

식민지시절 조선불교를 일본불교에 종속시키려고 적극 공략하던 총독부의 음모에 대항하여 민족불교의 부흥을 주도한 흐름은 크게 경허 만공 한암의 선바람과 만해의 유신론으로 나누어져 논쟁해 왔다. 경허당의 바람은 승가내부에서의 바람이었으며 만해의 바람은 당시에 유행하던 세속의 사회주의 바람이었다.

만해의 시절은 브나르도운동이 절정을 이루고 마르크스 레닌을 말하지 않으면 사람 축에도 들지 못하며 좌파의 소설을 써야 문학대접을 받던 그야말로 소련의 혁명 영향으로 낭만적 사회주의가 크게 떨치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이땅의 지식분자는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오직 사회주의 혁명을 생각하고 있었다. 1920년에서 30년 사이 한때 이나라의 지식인 치고 사회주의자 행세를 안한 사람 있는가?

그것은 일종의 붐이었으며 한때의 낭만적인 소동이었다. 만해가 그런 시류의 영향을 받았대서 그의 위대성이 조금이라도 침해된다고 생각하면 치기다.

만해는 민족의 위대한 스승, 그를 깍아내리려고 노력하는 것은 철부지의 부질없는 망상, 역사의 인물을 이해하려면 역사속으로 들어가 그 시대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알아야 한다.

만해(卍海)..만(卍)의 바다. 그는 불교라는 아이템을 가지고 역사와 세계의 바다를 향하여 끝없는 항해를 꿈꾸었던 사람이다.

만해의 견해는 조계종의 정통교리와 다른 이단적인 사상이 아니라 당시 배웠다는 이 치고 한두번 언급하지 않는 자 없던 사회주의 바람에 대해 불교식 모색을 하여본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하나의 모색에 지나지 아니한다. 그것을 시비거리라 여기는 자는 역사와 시류를 모르는 촌동이 아니겠는가?






고딩 때 만해의 유신을 일본의 메이지유신에 비견하여 크게 낙담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었다. 만해의 사상은 일본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타고르와 퀘이커, 그리고 사회주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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