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이란
read 2710 vote 0 2002.09.06 (12:30:29)

[스타의 값어치]

미국이 끝없이 연예인스타를 만들어내고 또 우상화하는 것은 그것이 미국자본주의 활력에 보탬이 되기 때문이다. 국가에 실질적 이익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것은 뭐 영화를 수출하고 하는 무역거래를 떠나 시장자체를 활성화시키는데 보탬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삼보가 체인지업으로 재미보는 것은 박찬호 덕분인데 왜 대우나 삼성컴퓨터는 박찬호를 쓰지 않았을까? 돈이 문제가 아니다. 이미 체인지업을 모방한 타사상품이 등장했다. 주목하자.

어떤 중견기업이 신상품 출시를 눈앞에 두고 있는데 이게 좀 까다로운 기술이라서 소비자가 납득하는데 시간이 1년 걸린다 치자 재벌기업이 이걸 모방하여 아류제품으로 덤핑을 쳐서 말아먹는데 또 1년이 걸린다 치자 이 기업은 소비자접근이 까다로운 신상품으로 1년안에 승부를 보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부도난다.

최고의 상품이기는 하나 최대한 빠른 시간안에 소비자를 이해시키지 않으면 회사가 부도날 위기일 때 광고주는 몇십억을 주더라도 서태지 아니면 박찬호라야만 회사가 산다. 그런데 서태지도 박찬호도 없다면?

스타는 그 자체로 국가재산이다. 그 어떤 것보다도 우월한 주목효과를 가진다. 마치 항만이나 도로가 필요하듯이 자본주의의 활력에는 스타가 필요하다. 고로 정책적으로 스타를 키워야 나라가 산다. 영화도 스포츠도 음악도 자본주의의 성장에 비례하여 성장해야 균형성장이다.

영양가 높다고 고기만 먹어서는 살수없다. 영양없는 채소도 먹어야 하듯 소비지향적인 것도 알고보면 비타민처럼 보약이다. 박찬호 덕분에 체인지업이 팔린 것이 아니라 체인지업이 히트예감이 들기에 박찬호로 승부를 걸어본 것이다.

국민적 영웅이 한두명이어서는 부족하다. 대여섯은 되어야 중소기업에도 광고를 통한 승부의 찬스가 돌아간다. 영웅을 시기하는 것은 옹졸한 태도이다. 서태지는 와야하고 박찬호는 떠야 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균형이냐 불균형이냐지 소비냐 지출이냐 이익이냐 손실이냐가 아니다. 문화가 소비가 아닌 사회간접자본이라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국가는 정책적으로 영화도 방송도 스포츠도 예술도 지원해야 한다.








진리의 정수를 돈오돈수 단박에 깨칠 수도 있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깨달음에도 급수가 있다.

가장 낮은 것은 개념적 깨달음이다. 거기엔 말만 구태여 따른다.
한 단계 높은 것은 역설적 깨달음이다. 거기 사랑이 있다.
드높은 것은 미학적 깨달음이다. 거기 아름다움이 있다.
진정한 것은 이성적 자각이다. 거기 진실이 있다.
지극한 것은 믿음이다. 빛이다.

깨달았다는 혹은, 깨달음에 대해 한꼭지 거드는 뭇 현자들과
성현들의 태도에서 그 보여지는 인격에서 깨달음의 급수를 알수있다. 물론 불교라는 좁은 영역을 떠나 - 생각하면 예수도 깨달은 자고 노자도 공자도 깨달은 자다 하는 관점에서 하는 말이다.

라즈니쉬 같이 말만 많은 자는 개념적으로 깨달은 자다.
개념적으로 깨달은 자는 [뭐는 이렇다]하고 단도직입 말해버린다.
그 역과 그 역의 역 측면을 모르는 것이다.

만약 역설을 깨달았다면 어떤 것이 이러하다면 반드시 그에 대응되는 측면이 공존하므로 그 반대 측면도 존중되어야 함을 알아 언어를 아끼게 되는 것이다.

노자나 장자 도가류의 풍속은 역설의 깨달음에 해당한다.
역설을 깨친자에겐 사랑이 있고 유머와 재치 부드러움과 여유가 있다. 어떤 측면이 있으면 반드시 그 반대도 허용되므로
서두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공자나 맹자 유가류의 풍속에는 미학이 있다. 난삽하지 않고
절제할 줄 알며 균형됨과 정확함과 신속함과 조화됨, 멋드러짐을 추구하는 미덕이 있다. 이것은 역설에 대한 역설이다.

어떤 것을 볼줄 알면(개념의 파악) 눈이 트인 것이고 그것을 뒤집어볼줄 알면 역설을 아는 것이고 그 뒤집은 것을 다시 뒤집으면 미학이 보인다. 도가에 없는 것이 미적 감각이다. 인생을 즐기는 도가의 부드러움은 역설의 깨달음이며 중용의 미를 추구하는 선비의 꼿꼿함은 미학을 깨달은 것이다.

석가나 반야심경의 깊은 경지는 이성적 자각이다. 이는 미학보다 한 단계 높은 것이다. 여기서 깨달음의 급수를 매겨버리면 불교의 깊은 경지가 이성적 자각으로서 깊은 것이고 유교의 경지가 미학이 되고 도교의 경지가 역설이 되어 순서대로 깊고 얕은 차이가 있다.

이 점이 중요한 것은 깨달음을 일반화하여 사회일반에서 인격적 소이들에 대면 뭐 [말많으면 뺄갱이다.]해서 김용옥이 같이, 마광수 같이 말만 많은 자들은 가장 낮은 차원의 개념적 깨달음을 얻은 바 되겠고

제법 웃을 줄 알고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이들은 역설을 아는 이들이며 그래도 챙길 줄 알고 차릴 줄 알며 미추를 구분함은 역설의 역설까지 깨달은 이라 할수 있다.

뭐냐하면 뭐 철웅선사 처럼 수도를 몇십년이나 한대서 특별히 깨달은 것이 아니라 인간에겐 누구나 직관력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 자각하면 그것이 곧 깨달은 거라는 거다.

물론 그러한 자각이 곧 진정한 깨침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인격은 인간본성의 직관력에 의해 형성되며 시골의 농부가 백년 수도한 선사보다 더 나을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은 직관에 기초하여 누구나 깨닫는다. 스스로 그것을 자각하지 못할 뿐이다. 진정한 자각을 위해서는 이론적 모색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특별한 경우이고 철학은 일상생활에서 인격적 완성의 형태로 그 직관의 자각을 드러낸다.

사람들의 이런 저런 얘기를 들어보면 [아 이양반은 뭔가 개념을 포착하고 있구나 즉 자기류의 세상을 보는 안목을 득하였구나]하고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그도 일종의 깨친 자다.

이것이 개념적 포착으로서 가장 낮은 급수의 깨달음인데 이러한 자는 비록 틀린 주장을 해도 거기에 일관성이 있다. 말하되 책을 읽고 앵무새처럼 읊조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주관, 자기철학, 자기관점을 가지고 자기생각을 말하는 거다.

(이를테면 오반님이 뭔가 아는 척해도 아직 거기 세상을 보는 아무 관점도 발견할수 없다. 좌파가 되든 우파가 되든 일단 하나의 관점을 득해야만 일관성있는 자기생각을 말할수 있다.)

개념적포착에서 깨달음이 멈춘 자는 편벽되기 쉽다. 반대의견을 용납 못한다. 때문에 이들에겐 여유와 부드러움 사랑이 없다. 그들은 곧잘 극단적인 경향으로 흐르며 터무니없이 강경하다.

라즈니쉬 같이 뭐 제법 유머와 해학과 기지가 있는 자도 본능의 부분에 이르면 터무니 없이 강경한 것을 보게 된다. 즉 입에 발린 언어에는 도가의 기풍이 넘치고 청담과 부드러움이 있는데 돈이나 성 혹은 먹는 것, 등 본능과 밀접한 부분에서는 뭐 편식을 한다던가 이상한 벽(편벽된 습관)을 하나식 가지고 있다. 개념적 깨침에 얽매인 거다.

편벽됨, 집착에서 벗어나 인생을 즐길줄 안다면, 소유한 모든 것을 놓을 줄 안다면, 심지어 사랑과 가족과 행복과 인격까지 놓아버릴 줄 안다면 네 의식과 정서와 취향과 눈물까지 놓아버릴 줄 안다면 그는 역설을 아는 자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므로서 모든 것을 사랑할수 있다. 우리는 주변에서 이런 사람을 충분히 발견할수 있다. 가난하게 혹 낮게 살아도 그들에겐 사랑이 있다.

그러나 이런 역설적 깨달음의 약점은 천박한데로 흐르기 쉽다는 것이다. 놓아버리는 것과 잃어버리는 것은 다르다. 놓아버려도 잃지 말아야 한다. 챙길 것은 챙겨야 한다. 말하는 지성(知性)은 역설의 역설까지 파악한데서 온다. 지성과 비지성의 차이는 미추(美醜)의 구분이다. 천박한 것과 고상한 것을 구분할줄 알아야 한다.

개념적 깨달음엔 자기주관이 있고 역설의 깨달음엔 여유가 넘치며 미학적 깨달음엔 아름다움이 있다. 여기까지가 보통 사람들이 이를수 있는 깨달음의 경지다.

주관을 얻은 자는 지키므로서 행복할수 있고 역설을 얻은 자는 놓아버리므로서 사랑할수 있고 미학을 얻은 자는 챙기므로서 아름다울 수 있다.

형제여 인생에 대한 태도에서 그대는
지키려는가 놓으려는가 챙기려는가?
행복하려는가? 사랑하려는가? 아름다우려는가?

진정한 깨달음은 이성적 자각이며 더 높은 경지는 믿음이다. 만약 최후에 온전히 믿을수 있다면 인격의 완성이다. 거기엔 충분한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쉽게 행복할수도 사랑할수도 아름다울수도 있다. 그렇다면 곧 깨달은 것이다.

행복한 삶 보다는 사랑이 위고 사랑보다는 아름다움이 위임을 납득해야 한다. 아름다우려 하면 저절로 사랑을 얻고 사랑하려 하면 저절로 행복해지지만 행복하려다가 사랑을 잃고 사랑에 집착하다가 추해진다는 말이다.




































성철스님의 법어를 함부로 해석해대면서
고얀소리 하는거 바라.

스님들이 하는 법어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스님에게 아무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고
우주존재가 본래 공(空)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의 심오한 경지는
간단히 한,두마디로 정리할수 있는 것이다.
성철스님의 [산은 산 물은 물] 하는 법어는 그런 메시지를 가진다.

그대 법장같은 어리석은 중생들이
우주의 공함을 보지 못하고
특별한 것을 찾으러 다니므로 오히려 어지러워짐을
일깨우는 것이다.

그렇다. [산은 산 물은 물]
아무 의미가 없다.

아무 의미를 담지 않으므로
모든 것을 담을수 있는 빈그릇의 자세.
그것이 우주자체의 본래면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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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
법장님같이 깨우침이 없는 인간은
이것은 붉고 저것은 푸르다고 말한다.
하나는 푸르고 하나는 붉으므로 그것들은 서로 다르다고 말한다.
이것은 가장 낮은 급수의 인식이다.
차라리 인식이 아니라 무지이다.

인간이 좀 깨이면 붉은 것이 원래 붉지 아니하였는데
세월의 변화에 의해 점점 붉어져갔다는 것을,
푸른 것 또한 점점 푸르게 변해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제행무상이다.

더욱 지혜가 쌓이면
붉은 것이 붉어졌기 때문에 푸른 것이 푸르러졌음을 알게 된다.
밝음이 빛나기 때문에 어둠이 어둡게 보이는 것이다.
하나가 지면 반드시 하나는 이기고
하나가 이기면 반드시 하나는 진다.
기아가 이기므로 현대가 진 것이다.

더욱 심오한 깨침은
하나가 이기면 하나가 진 것이 아니라
실은 둘다 이기거나 둘다 지는 것이다. 현대가 이기므로 기아가 진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선전하여 명승부를 펼치므로 승자도 패자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합은 내년에도 있기 때문이다.
한쪽만 늘 이기면 관중은 줄고 시합은 폐지된다.
푸름과 붉음이 서로 대립하지 아니하고
빛과 어둠이 서로 잡아먹지 아니하고 오히려 서로 북돋우어 함께 사는 것이다.

최상급의 깨달음은
다시 본래의 공(空)함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최초의 푸른 것은 푸르고 붉은 것은 붉음으로 돌아가서
산은 다시 산이 되고 물은 다시 물이 된다.
그러나 이 때의 산은 서로 다르고 서로 차별하고 서로 미워하고 구분되는 산과 물이 아니라 산수화 그림처럼 어울려 하나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이 무상의 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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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제 1 -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그들은 서로 다르다.
아군이거나 적군이며 선하거나 악하다.
누가 카인이고 누가 아벨인가?

의제 2 - 산은 산으로 되어갔고 물은 물이 되어갔다.
최초에 하나의 판게아 대륙으로부터 나왔으나.
마치 아담과 이브에게서 난 카인과 아벨같이.
근본은 같으나 서로 다르게 되어갔다.

의제 3 - 산이 산이 되었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물은 물이 되었다.
카인이 특별히 나쁜 사람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아벨 을 총애하니까 결국 그렇게 되었다.

의제 4 - 산과 물은 서로 높고 깊어지며
이는 양자에 같이 유익하거나 같이 불리하다.
산이 높아서 득보고 물이 깊어서 손해는 아니다.
카인의 죄로 아벨이 행복해진 것은 아니다.
인간의 죄는 공유된다. 선도 악도 하나가 된다.

의제 5 - 산을 높게 하고 물을 깊게 하는 것은 비바람이다.
카인을 카인으로 아벨을 아벨로 만든 것은
하나의 하느님이다.
다시 본래의 [산은 산 물은 물]로 돌아왔으나
이미 산과 물은 물에 발담그고 산을 베게삼은
나무꾼에 의해 하나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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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언행을 보면 그 지혜를 알수있다.
산이라는 아이와 물이라는 아이가 있다.
친하지 않는 그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된 귀하는 어이할 것인가?

착한 아이와 나쁜 아이를 구분하여 편을 가르고 한쪽을 편애하고 한쪽을 매도하는 선생님은 의제 1의 수준에 있는 무지한 자이다.

본래 같은데 점점 착해져가고 점점 나빠져감을 알아
선을 장려하고 악을 계도하여 모두 잘되게 하려는 이는 의제 2의
수준에 있다.

그들은 각자의 개성을 가지고 있는데 시험치고 비교했기 때문에
하나는 좋은 아이 하나는 나쁜 아이로 인상지워지는 것임을 알아
되도록 비교하지 않고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는 선생님은 의제 3의 지혜를 가진 것이다.

무작정 시험을 반대하고 개성을 존중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경쟁시켜가면서 각자의 소질을 개발해주는 선생님은 의제 4의 지혜를 가진 것이다. 서로 비교했기 때문에 산은 착한 아이 물은 나쁜 아이가 된 것이 아니라 물의 감추어진 소질을 선생님이 찾아주지 못했기 때문에 산의 장점만 드러난 것이다.

산은 투수가 되고 물은 포수가 된다. 산은 공격수가 되고 물은 수비수가 된다. 그들은 서로 다르므로 오히려 호흡이 맞는다.
하나는 잘하고 하나는 잘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적절히 역할분담되어 둘다 잘하게 된다. 고로 최초의 [산은산 물은물]로 돌아왔지만 이제 둘은 비교되는 적이 아니라 한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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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산을 취하고 물을 버리는 자 물을 취하고 산을 버리는 자 있고
산의 성질을 추구하는 공자와
물의 성질을 추구하는 노자가 있었다..

산의 성질을 가진 전두환과 물의 성질을 가진 노태우.

둘이 서로 다를 때 하나를 취하고 하나를 버리는 자가 가장 아둔한 자이며 (이들은 전두환 같이 단순무식하다)

좀 모자라는 한쪽도 키워보려고 노력하는 노력만능주의자가
의제 2의 지혜이며 (이들은 노태우 같이 무조건 노력으로 밀어붙인다. )

장점은 집중하고 단점은 피하며 [견제와 균형]을 추구하는 중도파가 의제 3의 지혜를 가진 자이며 (이들은 중간에서 눈치나 보는 기회주의자다. 이수성 이홍구같은 자)

어느 쪽도 버리지 않고 각자의 장점을 살려 둘의 조화를 꾀하는 자가 의제 4의 지혜를 가진 자다. (김대중 쯤 된다)

그냥 내버려두면서도 모든 것을 각자의 길로 가게 한다. 이것은 예수와 부처가 목사와 스님이라는 거렁뱅이들을 먹여살리는 방법이다.

무상의 지혜는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두면서도
그들 스스로 자유롭고 아름답게 피어나게 하는 것이다. 거름이 되므로서만이 가능하다.

집은 좁고 가진 것은 없는데 산과 물이 서로 가지려고 다툰다.

의제 1..말안듣는 놈은 죽인다.
의제 2..말안듣는 자는 말들을 때까지 두들겨 팬다.
의제 3..말안듣는 자는 말들을 때까지 기다린다.
의제 4..말안듣는 자에게 유인동기를 제공하여 말듣게 만든다.
의제 5..넓은 집으로 이사하므로 굳이 말들을 필요가 없다.

무상의 지혜는 터가 넓어서 굳이 말을 듣고 복종할 이유도 없이
[산은 산 물은 물] 제맘대로 뒹굴어도 좋은 것이다.
그것은 신이 인간을 다스리는 방법이다.
인간이 신의 말을 듣던 안듣던 인간은 결국 신의 의도되로
되게 되어 있다.

무상의 지혜는 간섭하지 않는 방법으로 간섭하는 것이다.
진정한 도에는 언어가 필요없다.
이러쿵 저러쿵 말하는 자는 무지한 자다.

신은 인간에게 단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인간은 신의 모든 말을 알아채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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