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이란
read 3168 vote 0 2002.09.09 (15:52:10)

심 층 구 조


질은 결합하고 입자는 독립하고

힘은 교섭하고 운동은 변화하고

양은 침투한다.








향이 안녕~!
전화로 목소리를 들으니까
나는 반갑기만 해서 아픈지 몰랐어 미안.
보낸건 구조론인데 압축할 줄 몰라서 그냥 보낸다.
잘 도착했는지 모르겠다.
총 열 개의 파일이야.
책 한권 분량으로 엮으려다가 중단한 건데
미완성이지만 대략 개념은 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렵다면 설교를 좀 해볼께.

그러니까 이 세상은
여러가지 알갱이들의 덩어리로 되어 있어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이 이른바 원소설이지.
이 세상은 빛과 어둠
혹은 선과 악
혹은 물질과 마음
혹은 물
혹은 4원소나 5원소
혹은 원자
혹은 기
혹은 공으로 되어 있다는 주장들이 있지

구조론이란
세상을 이루는 근본 알갱이가
빛이든 어둠이든 선이든 원자든 물질이든 소립자든
4원소든 5원소든 뭐든 간에
하여간에
그 구성요소들의 결합하는 방식에 의해 세상이 결정된다는 것이지
즉 세상을 맹그는 기본 알갱이가
원자든 소립자든
화,수,목,금,토 오행이든 음양이든
쿼크든 초끈이론이든 뭐든간에
세상의 기본 성질은
어떤 것(요소)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것(요소)들의 결합방식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야.

그 결합방식은
물리학과 수학, 미학, 논리학, 언어학으로 알수 있는데
그 정수의 정수
핵심의 핵심
원리의 원리만을 모아놓은 것이
김동렬의
★-자기복제이론(물리학에 기초한 이론)
★-집적이론(수학에 기초한 이론)
★-구조론(미학에 기초한 이론)
★-일반이론(논리학에 기초한 이론)
★-분류이론(언어학에 기초한 이론)
이 다섯가지가 나의 존재론이야.

이 존재론에 대응하는 이론이 인식론이고
이 인식론에서 유도된 이론이 정신론이고
그 정신론을 일반화한 이론이 방법론이고
그 방법론을 현실에 적용한 이론이 문명론이야.

즉 김동렬의 철학은 크게

김동렬의 존재론 - 궁극적 근거로서의 절대진리를 제시함 - 진리
김동렬의 인식론 - 진리를 인간이 받아들이는 방법을 제시함 - 깨달음
김동렬의 정신론 - 삶에 투영하여 가치를 판단하고 목적을 제시함 - 삶
김동렬의 방법론 - 그 구체화로서 변혁의 방법을 말함 - 실천
김동렬의 문명론 - 최종적으로 현실세계를 조명함 - 결실

이 다섯가지 범주가 있는데 정리하면

먼저 진리로서의 존재론이 있고 - 존재론
그 진리를 깨달으므로서 인간이 받아들이며 - 인식론
깨달음을 체화하여 인간다운 삶으로 소화해내며 - 정신론
사회적으로 실천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며 - 방법론
그 결과 세상이 어떻게 변하는가? - 문명론

이 중에서 가장 핵심의 핵심
원리의 원리
진리의 진리
알맹이의 알맹이 되는 것이 바로
절대진리 곧 김동렬 존재론이야
존재론 만이 절대진리이며
그 이하 인식론, 정신론, 방법론, 문명론들은
더 상대적인 세계
하부구조라 할 수 있지.

그 근본영역인 존재론을 구성하는 이론이

김동렬 물리학이라 할 수 있는 자기복제이론
김동렬 수학이라 할 수 있는 집적이론
김동렬 미학이라 할 수 있는 구조론
김동렬 논리학이라 할 수 있는 일반이론
김동렬 언어학이라 할 수 있는 분류이론들이야.

김동렬 이름을 계속 붙이는 것은
단어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단어이지만
그 뜻하는 바는 전혀 새로이 정의되어야 하는 즉
기존에 없는 새로운 것이기 때문이야.

새로운 것이라고 내멋대로 이름을 붙이면
이해될 수 없기 때문에 기존의 어휘를 차용하는 거지.

보내준 구조론 10개 파일들은
이 다섯가지 이론에 대한 개론이라 할 수 있는데
이름을 구조론이라 붙인 것은

구조론에 앞서는 자기복제이론과 집적이론은
물리학과 수학이라서 넘 딱딱하고
그에 종속되는 일반이론과 분류이론은
논리학, 언어학이라서 별로 재미없어.

고로 그 중간에 있는 미학을
위 다섯 개의 이론을 대표하는 전체의 이름으로 하여 구조론인 거야.

구조론이란 간단히 말하면 세상은
원자(알갱이)가 아니라 구조로 되어 있다는 거지

고로 물리학자들이
오원소설(화수목금토)
4원소설
3원소설
돌턴의 원자가설
소립자설
상대성이론
기타등등
모든 이론을 잠재우는 이론인 것이야.

그거 다 필요없어.
세상은 구조론에 의해서만 온전히 파악될 수 있어.

이를테면 바둑이라고 하자.
바둑의 기보는 무한대로 만들어질 수 있어,
세상이 무한한 것과 같지.
하늘과 별과 은하와 시간과 공간은 다 무한한 것처럼 보여지지.

그 모든 것들이 다 어디서 나올까?
재래의 원자설 - 검은돌과 흰돌에서 나온다

검은돌과 흰돌을 망치로 깨보고
도가니에 갈아보고
비이커에 넣고 알콜램프로 끓여보고
아무리 실험해봐도 정석을 알수 없어.

바둑을 알려면
검은돌 흰돌을 분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361로의 바둑판(그것은 공이지)
그 위치와 위치들간의 상관관계를 알아야 한다는 거지

바둑에서 승부가 나고, 집이 나고, 패가 나는 것은
검은돌 흰돌에 의해서가 아니라
놓여지는 위치들의 수학적 상관관계에서 결정된다는 것이지

근데 지금 물리학자들은
바둑알을 가져와서 끓여도 보고 삶아도 보고
바둑알을 두들겨 보고 튀겨보고 볶아보고
그렇게 해서 뭔가 알아내려고 하는데
그게 말짱 황이라는 거야.
바둑알을 아무리 굴려보고 던져보고 실험해봐야
이창호정석은 알아낼 수 없어.
바둑의 정석은 흰돌 검은돌과 상관없는 거야
바둑돌 없이도 바둑 둘 수 있어.

그게 구조론이야.
구조론은 사물들이 서로 얽히는 방식을 연구하지
그 사물들을 구성하는 근본 요소가
뭔지 알 필요도 없어

그래서
김동렬의 철학을 알려면
김동렬의 존재론, 인식론, 정신론, 방법론, 문명론을 공부해야 하는데
그 량이 너무나 방대하므로

그 중에 으뜸인 존재론
존재론을 구성하는
자기복제이론-태초에 무에서 유로의 이행..사물들의 발생원리를 추적하지
집적이론-발생한 사물들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지는 원리를 추적하고 있지
구조론-집적된 사물이 변화, 이행, 작용하는 원리를 추적하고 있지.
일반이론-사물들이 변화하여 전개할때 이를 구분하는 방법을 추적하지
분류이론-그렇게 구분된 사물들을 이름붙여 정리하는 거지

다시 한번
자기복제이론 - 태초에 만유는 어떻게 생겨나는가?
집적이론 - 생겨난 만유는 어떻게 서로 결합하는가?
구조론 - 결합한 만유는 어떻게 서로 작용하고 변화하는가?
일반이론 - 작용하여 서로 섞여버린 것들을 어떻게 구분해내는가?
분류이론 - 구분해 낸 개별자들을 어떻게 정리하여 이름붙일 것인가?

한번 더
★ 자기복제이론 - 물리학 : 기존의 이론물리학이 원자, 혹은 소립자를
출발점으로 삼는데 비해 원자 이전의 세계를 규명하고 있다.
★ 집적이론 - 수학 : 자기복제원리에 의해 발생한 최초 구성요소들이
집적하여 소립자, 원자, 분자, 물질로 비약해 가는 과정을 추적하고 있다.
★ 구조론 - 집적원리에 의하여 알갱이 혹은 원자의 형태를 이룬 물질이
서로 작용하여 변화하는 과정을 추적하고 있다.
★ 일반이론 - 구조원리에 의해 변화하여 『질-입자-힘-운동-양』으로
전개되는 과정을 추적하고 있다.
★ 분류이론 - 최초의 근본원리에서 일체의 만유로 전개한 사물들의
발생경로를 따라 분류구분하고 명명한다.

이것이 구조론이야.
구조론의 진수는 불교사상하고 비슷한데
만유는 고유한 자성이 없다는 거야.
즉 바둑판의 흰알, 검은알 속에는 암것도 없다는 거지
변화무상하고 복잡다단한 세상은
바둑알(만유를 이루는 궁극적 소립자) 속에 뭔가 잔뜩 들어서가 아니라
바둑알과 바둑알이 만나는 방법이 복잡해서 그렇다는거야.

얼마나 복잡한가 하면
사실은 무지하게 쉬워

어떤 단일한 한 개의 개별자가
임의의 대상과 만나는 방법에는 다섯가지의 양식만이 존재해.

이 다섯가지가 또 다섯가지를 낳고
그런 식으로 새끼를 쳐서 복잡하게 보이는 거 뿐

세상은 알고보면 무지 단순해
그래서 근본 원리를 깨우치면 알아내지 못할 것이 없지.

그 다섯가지 만나는 방법이 차원이론인데
차원이 다섯가지가 있어.

그 내용은 수학적인 방법으로 규명이 가능해.

여기에 어떤 하나의 위치가 있다.
거기에 다른 어떤 것을 아무런 방법으로던 대응시킨다.

즉 하나에 다른 것을 관련시키는 것이지.
이 관계들은
유도관계
대응관계
의속관계
인과관계
표상관계의 다섯가지 관계가 있는데
다섯가지 이상 관계시키는 방법은 없어.

고로 이 다섯가지 관계들의 관계하는 순서와 방향만 알면 되는거야
작용하는 데는 일정한 순서가 있거던

바둑하고 비슷한 건데
수순이 있다 이거야.

즉 어떤 하나에
다른 무언가를 관계시키기 위해서는 그에 앞서 또다른 어떤 거를
먼저 관계시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규칙이 존재하는 거야.

이렇게 해서 그 하나에 관계시킬 수 있는 총 수는
3125개로 정확히 산출되고 있어.

그래서 어떤 완전계
완전계란 어떤 하나의 위치에 관련될수 있는 것들이 적절한 방법으로
관련되어 있어서 외부의 에너지 작용에 대응하고 있는데

그 대응되는 구조체 내부에서 에너지 흐름의 1사이클이 발생하는 즉
일을 해내는 것을 완전계라고 하는 거야.

즉 어떤 기계가 있다면 인간이 작동해주지 않는 한 스스로 작동하지 않잖아

근데 우주는 스스로 작동하거던
그래서 우주는 완전계이지

생명체도 스스로 작동하기 때문에 완전계야.
에너지가 그 대상을 통과하여 새나가지 않고 자기완결형으로
내부에서 에너지 순환이 일어나는 거야.

그것이 완전계인데
하나의 완전계의 최소구성요소의 수가 3125라는 거지.
고로 어떤 뭔가가 있는데 그곳에 3125개 이상의 구성요소가 있다면
그 중 일부는 역할이 중복되고 있다는 거지.

그 완전계는
동력원 동력발생 동력제어 동력전달 동력효과로 구성되는데
우주가 그러하고 생명체가 그러하거던

위에서 동력은 곧 에너지야.
그래서 에너지 흐름이 완전한가 혹은 중간에 막히는가를 보고
그 대상이 완전계인가 불완전계인가를 알 수 있는데

에너지(힘)를 작용했을 때
한 단계에서 에너지 흐름이 막힌다. - 집적도 1
두 단계에서 흐름이 끊어진다. - 집적도 2
세 단계에서 흐름이 끊어진다. - 집적도 3
네 단계에서 흐름이 끊어진다. - 집적도 4
에너지가 내부에서 완전히 순환한다 - 집적도 5

을 보고 관찰하여 그 대상이
어느 정도의 집적정도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낼 수 있는데
다시 말해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태가
에너지 흐름의 정도를 파악하여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어느 부분까지 진행되는지 알아내므로서
앞으로 어느 선까지 더 진행할지를 예측할 수 있는 거야.

지금 에너지 작용이 1단계에서 끊긴다면
앞으로 네 번의 진행단계가 남아있으므로 그 주식은 장기보유 -
4단계에서 끊긴다면 앞으로 한번의 큰 장이 남아있는 거고
에너지순환이 일어나고 있다면 상투잡은 거니까 팔아야 해.

이 원리를 이용하여 만유를 예측하고 판단할 수 있지.
미래를 예견할 수가 있는거야
내가 새롬기술 주식을 사야한다고 말하는 것은
새롬이 위 두 번째 단계에 와 있으므로 앞으로 세 번의 장이
남아 있다고 보는 것이야.

왜 새롬기술이 두 번째냐 하면
소재의 차별화 다음에 오는 기능의 차별화이기 때문이야.

그래서 이 원리를 알면 세상 모든 것을 다 알수가 있어.
미래예측이 가능하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분해 낼 수 있는 거지.

그래서 나의 똥점은 틀리는게 적고 맞는게 많아.
시시콜콜 세부적인 분석 같은거 필요없어.
에너지 흐름이 진행되는 정도만 파악하는 거야.

물론 이론이고
이론은 항상 잘못 적용될 수 있기 때문에
이론이 옳아도 예측이 빗나가는 경우는 많아.
그래도 이론이 있으면 틀렸을 때 틀린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
내 예측이 빗나간다 해도 왜 빗나갔는지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
그러므로 오류수정하여 다음번의 예측은 더 정확해지는 거지.
예측이 무조건 맞는건 아니지만
이론이 있으면 예측이 빗나가도 다음번의 예측을 위한 자료로 사용되기
때문에 쓸모가 있는거야.

근데 이론이 없으면 설사 한번 예측이 맞더라도
또 변화가 무궁하므로 두 번째 예측은 빗나가거던
고로 남는게 없지

이론예측 - 텍스트의 정확도에 비례하여 근사치의 답을 제시하며
틀렸을 경우 틀린 이유가 확인되고 나중을 위한 자료로 이용된다.

경험예측 - 작은거 잘 맞지만 큰거 한번 빗나가서 그간의 성과를
쓸모없게 하며 틀렸을 때 이유를 알수 없고 나중에 아무런 자료가
남지 않는다.

고로 예측은 이론으로 해야 하는거야.
이론으로 예측하면 틀려도 남는게 있으니깐

구조론을 알면 예측이 가능하고 오류검증을 통하여
학문적인 성과를 남기므로 매우 쓸모가 있다는 이야기였니라.










심 층 구 조


질은 결합하고 입자는 독립하고

힘은 교섭하고 운동은 변화하고

양은 침투한다.









마전작경

마 전 작 경 - - 벽돌로 거울을 만들다.

남악 - - 보니 좌선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좌선해서 무엇을 얻으려고 하나 ?
마조 - - 부처가 되고자 합니다.
(남악은 벽돌 하나를 주워 바위에 갈아대기 시작했다)
마조 - - 스님, 벽돌은 왜 가십니까 ?
남악 - - 거울을 만들고자 하네 ~~
마조 - - 벽돌을 간다고 어찌 거울이 되겠습니까 ?
남악 - -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들수 없을진대 자네가 혼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좌선한다고 부처가 되겠나 ?
마조 - - 그렇다면 어찌해야 성불을 하겠습니까 ?
남악 - - 소달구지가 저기 지나가네. 달구지가 움직이지 않으면 소를 채찍질하는가? 달구지를 채찍질하는가 ?

이다와 있다, 알다와 낫다와 하다와 되다가 있다.
┌───────────────────────────┐
그것은 │사과이다. (이다) │
├───┬───────────────────────┤
여기에 │사과가│ 있다. (있다) │
나는 │사과가│ 무엇인지 안다. (알다) │
│사과는│ 배보다 먹기가 낫다. (낫다) │
│사과를│ 먹으려고 나는 요리를 한다. (하다) │
│사과를│ 먹었더니 나의 기분이 좋아지게 되었다. (되다) │
└───┴───────────────────────┘

위에서 어떤 규칙성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다.
사과이다의 이다는 술어로 기능하고 그 밑으로는 주어로 기능하고 있다.
술어라는 것은 곧 존재론의 영역임을 말하고 주어라는 것은 곧 인식론의 영역임을 말한다.
즉 술어는 존재론이고 주어는 인식론이다.

인식론에서 있다는 점점 길이가 늘어져서 (구체화되어) 있다가 사과로부터 분리되어 (이다는 사과와 결합)
있다 (1)
알다 (2)
낫다 (3)
하다 (4)
되다 (5) 로 최소 구성요소의 수가 늘어난다.

즉 되다 라는 말이 언어적으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주어인 사과를 제외하고 독립된 구성요소 5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들의 일상적 언어사용에 있어서 상당한 생략과 함의가 들어가므로 우리는 잘 눈치채지 못하지만 집적도 개념을 인식한다면 그 내부요소를 파악할 수 있는 만큼 이러한 언어법칙을 유도해 낼 수 있다.

대저 깨닫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되다 (5)를 있다 (1)로 상향시키고 그것을 다시 이다(존재론)의 자연으로 회귀시키는 것이다. 인식론은 인간의 지적영역이고 존재론은 자연의 섭리이다.
깨닫는다는 것은 부처가 되다 (5)를 부처가 있다 (1)로 상향시키고 다시 부처이다(존재영역)으로 환원시키기이다.

즉 언어에 있어서 (되다)라는 표현은 집적도 5의 개념이며 거기에는 강력한 함의가 개입해 있는 것이다.
사과이다는 즉자적 존재여서 아무것도 개입할 필요가 없다.
인식론이란 거기에 인간의 정신이 개입했음을 의미한다.
있다는 인간정신이 거기 대응할 뿐 내부에 침투하지 않는다.
알다는 대상의 바깥에서 안으로 침투한다.
낫다는 비교된 즉 해체하고 내부침투하여 구조화한 경우이다.
하다는 대상을 지배하여 변화시킨 즉 시간 경과 상태에서 대상을 변형시켰음을 의미한다.
되다는 그 침투와 조작이 제 3의 결과를 낳았음을 의미한다.

있다, 알다, 낫다, 하다, 되다는 인식이 대상으로 침투하는 시간과정의 순서이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이것을 거꾸로 되돌림이다.
부처가 되다 ..> 부처노릇을 하다 ..> 부처가 낫다..> 부처를 알다 ..> 부처가 있다 ..> 부처이다.

인간은 누구나 되다의 상태에 있다.
무슨 뜻인고 하니 부처(존재)와 인식이 작용하여 제 3의 것(아트만)을 낳았다는 뜻이다. 즉 인간은 선존재와 인식의 대응결과로 피조되어 있는 존재 (비참한 존재)로 있는 것이다.

최초에 부처가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인식이 개입하기 전의 순수자연이다. 거기에 인간의 정신이 개입하여 침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관념(비참함)이 생겨났다.
그 관념의 자손(되다)를 있다(순수정신)로 되돌리면 부처(순수자연)를 만나게 된다. 거기서 자기정신을 배제할 수 있다면 부처이다.
즉 자기정신은 어떤 결과이며 그 결과는 환경의 억압 가운데서 났고 자기정신에서 환경의 억압이라는 외부교란 변수를 제거하면 순수한 나(있다)를 만나게 되고 그 순수한 나가 순수한 자연(부처)를 만나게 된다는 이론이다.

간단히 말하면 부처가 [된다]에서 된다는 어떤 작용의 결과이며 결과는 현상의 반영인 즉
소달구지를 끄는 소(원인)를 채찍질해야 달구지가 나아가듯이 달구지(결과)를 채찍질 해보았자 소달구지는 나아가지 않듯이 되다를 있다로 되돌리지 않고 거기서 다시 이다로 환원시키지 않고 부처를 만나지 못한다는 그런 쉬운 결론인 것이다.
벽돌을 간다(작용)는 것은 이미 있는 부처에 인식(벽돌)을 대응시켜 되다(결과)를 낳은 적 달구지 채찍질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식하려(벽돌을 갈아서) 해서는 결코 인식할 수 없다는 결론이다.

인식한다는 것은 시간상에서 미래지향을 말한다. 자동차가 고장났다. 이때에는 우선 자동차를 멈추어야만 수리할 수가 있다.
자동차의 목적은 나아가는 것이므로 자꾸만 자동차가 나아가야 된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으면 결코 자동차를 수리하지 못하고 그 자동차는 어디에 충돌하여 파괴될 뿐이다.
남악은 [만약 나아가고자 하려거든 우선 멈추어라]는 준엄한 진리를 들려준다.
무지한 인간들이 여전히 달구지 채찍질, 벽돌갈기를 일삼고 있다. 그러나 결코 부처가 되지 못한다. 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는 엔트로피의 법칙에 위배되는 것이다. 테두리 바깥으로 단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만약 그대가 병 안의 새를 꺼내려 하거든 앞으로 나아가려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 병이 제조되기 이전의 상태로 가장 크게 물러서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부처가 된다는 것은 되다가 아니라 이다가 되는 것이다. 즉 사실을 말하면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즉 당신이 부처가 되려하기(되다) 전에 당신이 이미 부처이다(이다)는 진리를 깨닫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되다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 순수자연(부처)과 인간정신(의식)이 마찰하여 이루어진 결과(되다)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이 석가 식으로 말하자면 번뇌이며 [고]이다.
이 왜곡된 의식을 본래의 순수한 상태(순수정신)로 되돌리면 순수존재(부처)를 만날 수 있다.
그러면 당신은 결코 부처가 될수(되다)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대신 당신은 이미 부처임(이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벽돌을 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에는 어떠한 노력도 필요없는 것이다. 좌선도 명상도 깨달음에는 필요하지 않다. 그 어떠한 노력도 브레이크 고장난 자동차에 액셀레이터를 밟는 효과를 가져올 뿐이다.
순수자연에 순수정신으로 맞설 뿐이다. 그러면 당신은 [있다]가 아니라 [이다]임을 깨닫게 된다. 즉 당신은 본래 존재하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당신은 본래 순수존재의 일부였던 것이다.
당신이 증명할 수 있는 것은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의 길이 뿐이다. 여기서 부처라는 말이 맘에 안들면 [신]이라고 불러도 [범천]이라고 불러도 답은 매한가지이다.
당신이라는 존재는 순수존재(부처)에 시간상수(인식)를 대입시켜 결과(되다)로 나타난 현상일 뿐 소가 지나간 뒤의 발자국일 뿐 소 그 자체는 아니었던 것이다. 즉 당신이 [나]라고 철썩 같이 믿어 의심하지 않는 그 단단하고 가득한 덩어리는 실은 진정한 [나]의 소발자국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당신의 야심만만한 채찍질은 소달구지의 소를 때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달구지 지나간 바퀴자국을 때리고 있는 것이다.

이다 <..순수존재 (수레주인)

있다 <..인식의 개입 (마부)
알다 <..인식의 내부침투 (소)
낫다 <..인식의 대상해체 (수레)
하다 <..인식의 대상변화 (수레의 진행)
되다 <..그로 하여 얻어진 결과물 (바퀴자국)

부처가 되려하는 당신의 노력은 바퀴자국을 떠밀면 수레가 나아갈 줄 아는 것이다. 소발자국을 보고 소를 찾았다고 믿는 것이다. 깨달음은 소를 매질하는 것도 아니고 마부를 꾸짖는 것도 아니다. 마차주인의 의사에 맞겨두는 것이다. 거기서 당신은 그 어떠한 인위적인 노력도 불필요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역사의 필연과 당위가 나아가는 흐름에 당신을 의탁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무슨 수를 쓴다고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 부처이므로 아무런 노력이 필요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이다 있다 알다 낫다 하다 되다의 원리를 깨우치는 데는 1분의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이미 한국말을 할줄 아는 당신이 다 알고 있는 것이다. 이미 알고있다는 것을 모를 뿐이다. 그걸 모르고는 어법에 맞는 말을 할수가 없기 때문이다. 부처가 되는 데는 어떠한 노력도 인위도 필요하지 않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존재이다. 순수존재의 자연성이다. 물론 그걸 안다고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매우 자연스러워지는데 성공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이 현상계에서 취할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이다. 순수존재의 자연적 성질에 의탁하여 매우 자연스러워지거나 야심과 욕망의 노예가 되어 매우 부자연스러워지거나 그 둘 중 하나이다.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

[난 정말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어]
이 말은 자체모순이다. 그는 적어도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식으로 말해서는 아니된다.
불교적 선지식에 뭐 [불립문자] 운운하여 모르는 것이 큰 지식이라도 되는 양 떠드는 인간들이 있다. 주로 라즈니쉬 류의 신비주의자들이다.
[난 깨달았어. 난 지혜있는 자야~~! 뭘 깨달았냐구? 난 아무것도 몰라. 난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엄청난 진리를 깨달았어 난 위대한 스승이야]
이래서는 아니된다. 이런 소리가 나오는 이유는 논리학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기술이 논리학이라면 이들은 논리를 모르므로 위대한 지혜란 논리없이 언어로 표현할수 없다는 것을 알아챈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난 정말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어] 할 것이 아니라 일단은 논리학을 배우고 볼 일이다.
그렇다. 누구나 알고 있다. 단지 정확히 표현해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섯가지의 난관이 있다.

1. 대상은 고착되어 있는가?
2. 자산은 충분한 시간과 방법을 가지고 있는가?
3. 도구들은 준비 되었는가?
4. 상대방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5. 과연 유효한가?

안다는 것은 그냥 아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설명하여 타인에게 전달하고 그로부터 유효한 결실을 이끌어낸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그 와중에 이렇게 다섯가지의 난관들이 있다.

1.은 인식론의 경계바깥이 아닌가의 여부, 곧 아직 확정되어 있지 않은, 알수없고 알려고 해서도 않되고, 알것도 없는 문제를 두고 고민하는 우를 범치 않았는가의 난관,
2.는 알려면 알수는 있지만 이론적으로 가능할 뿐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까마득한 미래에는 가능한, 미래형 컴퓨터로만이 계산가능한 그런 문제를 두고 고민하는 경우의 난관
3.은 알고는 있는데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언어가 없는 경우, 이를테면 눈으로 본걸 타인에게 말로 정확히 전달하기는 불가능하다. 사진기로 찍어뒀더라면 좋았을걸 하는 경우의 난관이다.
4.는 나는 알고 있고 설명할수도 있으나 상대방이 돌빠가라서 어휴 차라리 벽보구 말하는게 낫지 하는 경우의 난관이다.
5.알고 있고 설명할수도 있으나 실은 상대방에게 아무 도움이 안되는 쓸데없는 경우 ..말하면 되려 손해인 난관이다.

우리가 [아으 다롱디리. 나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어] 하고 말하고 싶어지는 경우들은 실은 몰라서 문제가 아니라 바로 이런 난관들 때문이다.

1. 내일 치를 시험의 성적을 지금 모른다고 고민하는 우를 범하지 말자. 근데 인간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아휴 많은 인간들이 내일 치를 시험의 성적을 지금 알지 못한다고 고민하고 있다. 그거 몰라도 되여. 내일 일은 내일 고민하자. 그건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알 필요도 알 수도 없는, 알아서도 안되는 것이다.

2. 알수는 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가능할 뿐 현실적으로 불가능 한 경우가 많다. 조급해 하지 말자. 역사를 믿고 기다리자.

3.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체험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정확히 전달할 수는 없다. 말로 설명하려들지 말고 상대방이 직접 체험하게 해주자. 백마디 말보다 한 번 체험이 낫다.

4. 나는 알고 있다. 설명할수도 있다. 그러나 상대방은 내 말을 들을 준비가 안되어 있다. 조급해 하지 말자. 세상 어딘가에 내 말을 알아들을 사람 하나 없으랴. 최소한 두 명은 있다. 하나는 나 자신이고 하나는 신이다.

5. 난 알고 있다. 설명할 수도 있다. 허나 말하지 말자. 상대방에 아무 도움이 안된다. 당신이 이미 먹은 짜장면에 들어간 바퀴벌레가 세마리였다고 정확히 알려주는 것은 인도주의가 아니다.

안다고 해서 다 아는 것이 아니다. 아는 것보다 이런 중간과정들을 돌파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지혜있는 자가 침묵하는 것은 몰라서가 아니라 이런 중간단계들을 돌파하는 것이 매우 피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 보자. 지혜있는 자가 알고 있으면서도 위 중간단계의 문제로 침묵하고 있으니까 라즈니쉬 같은 사이비들이 조잘조잘 떠들어대면서도 말해바라 하면 [불립문자] 운운하고 사기치는 것이다.
알수있다. 말할수도 있다. 이 세상에 깨달은 자가 알수 없는 것은 없다. 다만 1, 알아서는 안되는 영역, 2, 아직은 말할 때가 아닌 영역, 3, 언어로 통하지 않는 영역, 4, 상대적인 영역, 5, 이롭지 못한 영역들 때문에 잠시 또 길게 침묵하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주어진 문제에 대하여 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주어지지 않은 문제, 곧 인간의 영역 바깥의 것을 알지 못한다고 괴로워 한다. 일테면 나의 내세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난 몰라~! 하고 괴로워 한다. 내세의 운명은 모르는 것이 아는 것이다. 내세의 운명... 그런거 없으니까~!
논리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세상의 모든 영역은 정확히 알수 있거나 아니면 정확히 경계지을수 있거나 둘 중의 하나다. 정확히 알수 있는 영역은 인간의 인식보다 작은 영역이고 정확히 경계지을수 있는 것은 인간의 인식보다 더 큰 영역이다.
기본적인 문제는 자가 대상보다 작다면 길이를 잴수 없다는 문제이다. 그러나 이 때의 역설은 그 작은 부분은 전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법칙이다.
원주율은 3,1415....밑으로 무한정 이어지지만 그 미세한 부분은 우리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즉 이 세상에는 적절한 정도의 유드리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윈도 95의 작은 오류에도 불구하고 잘 팔린다는 것이다.
깨달은 자에게는 모르는 것이 없다. 그러나 겨우 디렉토리 구조의 접근경로를 파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앎이 문제를 곧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하나의 단계를 넘어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너머에 또다른 봉우리가 하나 있다.
경계지을수 있다는 것은 화성에 모래알이 몇 개인지 알수는 없지만 어떠한 방법으로 알아낼수 있는지는 알고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알아낼수 있는 방법을 사용했다 치고 화성에 있는 모래알의 총 숫자가 정확하게 똑 떨어지게 단단위까지 알아낼수 있는가? 하고 시비하지 말지어다. 어디에나 유드리가 있는 법, 그 알아내는 목적에 유효한 정도의 유드리를 계산해내는 선에서 충족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깨달은 자는 정확하게 가르쳐 주거나, 정확하게 알아내는 방법을 가르쳐 주거나, 알고자 하는 자에게 유효한 정도의 유드리를 제공하거나,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가르쳐 주거나, 알 필요가 없다는 점을 가르쳐 주거나 하지 그냥으로 에헴~~! 고오얀 ~~! 감히~~! 불립문자이니라~! 하고 헛폼만 잡지를 않는다.
혹자는 그렇게 [몰라도 되여]하는 것이 뭐 아는 것이냐? 하고 시비함직도 하다. 그러나 앎이란 기본적으로 인식론적 개념이다. 그리고 인식론은 존재론의 하위 디렉토리다. 앎이란 말 자체가 존재곧 있음에 대한 상대개념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느냐 모르느냐가 있느냐 없느냐에 앞설수는 없는 것이다. 기대치를 터무니 없이 높여놓고 그 기대치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나무래서는 아니된다.
진정한 결판은 안다 모른다 차원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있다 없다 차원에서 결정된다. 인간이 깨달아서 얻어내는 소득은 주요한 부분에 있어 알아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이 현상계의 모든 구조를 정확하게 알아내었다고 해서 결코 현상계를 정확하게 지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그 우물의 정확한 구조를 파악했다고 해서 우물의 운명을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우물의 운명을 지배하려면 우물 바깥으로 나와야 한다. 그러나 개구리가 알게되는 것은 개구리는 결코 우물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 또한 마찬가지다. 인간이 이 현상계의 정확한 구조를 단단위까지 계산해 내었다고 해서 현상계를 지배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대신 신을 단독자로 만나게 된다.
인식에 대해서 회의적인 사람들..[인간은 아무것도 아는게 없어]하는 이들은 대개 도달불가능한 억지목표를 세워놓고 존재하지 않는 허구를 무서워 하며 그 없는 것을 없애줄수 없다고 괴로워 하는 자들이다.
내세는 없다. 그런데 아으 인간은 내세도 몰라, 인간은 아는게 없어, 인간은 죽어야 돼, 인간은 바보야 이러구 있는 것이다.
혹 [내세는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하겠지만 내세는 공간의 문제(있다 없다)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의미여부)이기 때문에 그런 식의 질문 자체가 오류에 빠진 것이다.

이쯤에서 결론은 ...

1. [안다]의 개념은 인식론에 해당하고 인식론은 존재론의 하위 디렉토리이므로 주요한 문제에 있어서 전지(완전한 앎)가 답을 못내놓는다고 해서 불만을 터뜨려서는 안된다.

농부가 사과나무에 몇 개의 사과가 열렸는지를 다 세어놓았다고 해서 그 사과가 다 자기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전지전능이라고 한다. 전지면 전능일까? 천만에 전지면 전지일 뿐이다.

2. 완전한 깨달음은 존재론의 디렉토리 구조 안에서 그 하위 디렉토리들(정신론, 방법론, 문명론)을 완벽하게 장악할수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그 점에 있어서 깨달음은 완벽하게 유효하다.

깨달음은 확실하게 문제가 주어졌을 때 문제 그 자체를 백프로 수용할수 있음을 말한다. 농부가 마침내 사과를 수확했을 때 97개 뿐이 없었다. [사또..나머지 3개는 어디갔느냐 네놈이 먹었지?] [농부..까치가 하나를 파먹었고 삼돌이가 하나를 서리해갔고 이방이 하나를 잘못세었습니다.] 깨달음은 완벽하게 예측하거나 예측이 빗나갔을 때 빗나간 이유를 완벽하게 설명해낸다.

3. 깨달음은 [불립문자] 하고 맥놓고 하늘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문자 대신에 [음성기록 사진판독 엑스레이] 등 대안을 제시한다. 가장 좋은 처방은 직접체험이다. 적어도 체험방법을 가르켜 준다.

깨달음이 문자를 부정하고 선을 권장하는 것은 문자가 유효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직접체험이 가장 빠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높은 경지에서 그렇고 낮은 경지에서는 여전히 문자가 유효하다. 문자가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문자 다음 단계로 체험인 것이다.

4. 깨달음이 만명의 다중들을 설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다중들에서 리더가 되는 한 사람만 설득하면 된다. 첫째는 저 자신이며 둘째는 신이다.

아인시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이해하는 자가 몇 명이나 되는가? 99.999프로의 사람들은 이해하고 아는척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인시타인을 인정한 사람들의 권위를 수용하는 것이다.

5. 깨달음이 직접 이익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앎은 오히려 병일수 있다. 그러나 그 앎의 병을 고치는 것은, 더 큰 앎이지 모름이 아니다.

인간은 알아가는 동물이기 때문에 결국 알게 된다. 모름이 일시적인 처방일수 있으나 근본 아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
우리가 문명과 산업의 해악을 내세워서 반대하고 자연에 숨어 자연보호 하지만 죽음 이외에 완전한 자연보호는 없다. 문명과 산업이 해악을 낳지만 그 해악을 치유하는 것 또한 문명과 산업이다.
앎이 인간들을 얍삽하게 하고 뺀질이로 만들고 타락시키지만 그 타락을 치유하는 것 또한 앎이다. 혹 당신은 문명과 산업의 해독을 반대하고 앎을 반대하고 원시의 순수로 돌아가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이 문명과 산업과 앎을 반대하고 자연에 들어가서 할 수 있는 일은 배설 뿐이다. 주요한 점은 당신이 아니하면 남이 해버린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산업과 문명과 앎의 해독을 모르는 남이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보다는 문명과 산업의 해독을 아는 당신이 문명과 산업의 적입자이다.
깨달음은 당신의 앎을 비약하여 전지에 올려 놓는다. 그러나 전지가 전능은 아니다. 전지란 하위 디렉토리의 완전장악에 불과하다. 아무리 많이 알아도 상위 디렉토리(존재론)에는 1의 영향도 미칠수 없다.
세계는 그 자체로 커다란 하나의 컴퓨터다. 깨달음은 이 세계라는 컴퓨터의 주인(운영체제 OS)이 되는 것이다. 세계는 그 자체로 지식의 덩어리이므로 깨달음은 곧 전지이다. 그러나 세계 안에서 조율할 뿐 세계 바깥에서 흔들수는 없다.
진정한 주인은 따로 있다. 그건 신이다. 그러나 그 신의 자판 입력에 따라서 적어도 OS기능은 할수 있다. 그것이 인간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깨달아야 한다. 깨달음으로서 오류가 없는 완전한 앎에 이를수 있다.
혹 이런 이야기에 [어째서 전지가 가능한가?] 하는 식으로 시비함 직도 하다. 그러나 그건 [앎이란 무엇인가?] 하는 정의의 차원이지 아는가 모르는가의 차원이 아니다.

김빠빠라기 ..돈이면 다 된다. 돈으로 빤스도 살 수 있고 빤스고무줄도 살 수 있다.
빤스맨 ..천만에 돈으로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돈으로 싱킴싱킴콩삭디국의 왕이 될 수도 없고 돈으로 시간여행을 할수도 없으며 돈으로 외계인을 데려올수도 없다.

누구말이 맞을까? 논리학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빠빠라기는 돈의 기능을 말하고 있고 빤스맨은 돈의 정체에 대해 말하고 있다. 즉 빤스맨은 아직 돈이 뭔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삼돌이...자동차로 서울이든 부산이든 어디든 갈수있다.
삼순이...난 공중이나 땅속으로 가고 싶어 그러면 먼저 에베르스트산 꼭대기부터 가자. <-- 삼순이는 아직 자동차가 뭔지 모르고 있다.

컴퓨터로 커피를 끌일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직 컴퓨터가 무엇인지 파악이 안된 사람이다. 인식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들은 대개 인식론에 대해 개념정립이 안된 사람이다. 논리학을 배우지 않은 까닭이다.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은 없다.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앎과 모름이 무엇인지 정의가 안된 사람이다. 안다는 것은 그 기능에 따라 유도(요소와 효과의 유도기능)하고 분류(내포과 외연의 대응기능)하고 의속(실체와 관계의 의속기능)하고 인과(원인과 결과의 인과기능)하고 표상(본질과 현상의 표상기능)한다는 것이다. 알수 있다는 것은 그걸 할수 있다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존재로부터 이끌어오고 인식에서 분류하고 대상에서 조율하고 사실에서 진행하고 현상에서 나타낸다는 것이다.
나는 자동차를 안다...자동차를 가져오고(유도) 자동차를 분류하고(대응) 자동차에 올라타고(의속) 자동차를 운행하고(인과) 자동차운전을 보여주면(표상) 그 사람은 자동차를 안다고 말할수 있다.

삼순이..너 자동차를 안댔지? 이 자동차의 무게가 얼마지?
삼돌이..1.5톤이야
삼순이..저울로 달아보자. 흙이 묻어서 1.5톤하고 2.5키로 하고 120그램이군..봐 넌 틀렸어..넌 자동차를 모르는거야..

이렇게 삼순이 마냥 억지를 쓰면 안된다. 유효성을 기준으로 근거삼아 판단하는 것이다.

삼돌이..난 모든 문제를 풀수 있어.. 3+4=7, 4+4=8이지...!
삼순이..이 엉킨 실 좀 풀어줄래~!


방 법

방법적 접근으로 생각을 훨씬 더 잘할 수 있다.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로 생각을 훨씬 더 잘할 수 있다. 깨달음에 의한 인식의 비약으로 생각을 훨씬 더 잘할 수 있다. 일이 잘 안되는 것은 그 대상에 접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접근하지 못하는 것은 잘못된 길을 가기 때문이다. 적절한 경로지정으로 효율을 두 배로 높일 수 있다. 질은 결합하고 입자는 독립하고 힘은 교섭하고 운동은 변화하고 양은 침투한다. 이 원리를 이해하면 모든 것을 다 파악할 수 있다.

생각한다는 것은 분류한다는 것이다. 분류기준과 분류공식을 알고 있다면 훨씬 빠르게 생각하기에 성공할 수 있다. 주어진 논제에 대해서 요소와 효과, 내포와 외연, 실체와 관계, 원인과 결과, 본질과 현상의 분류법을 알고 있다면 훨씬 더 빠르게 생각하기에 성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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