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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양을 쫓는 모험
read 6966 vote 0 2010.03.23 (21:38:18)

1. 스마스마(SMAPxSMAP)

 

 

2010년 2월 22일 방송된, 일본 쇼프로그램 스마스마(SMAPxSMAP)에 냉전을 종식시키고, 새 시대를 연 소련의 지도자 고르바초프가 출연했다. 이런 한때 세계의 절반을 손안에 넣었던 고르바초프가 일본의 쇼 프로그램에 출연하다니 그 자체가 잇슈가 아닐 수가 없다.

 

스마스마_고르바초프01.JPG 

 

모르는 사람을 위해 친절하게 소개를 하자면, 스마스마(SMAPxSMAP)라는 쇼프로그램은 다섯명의 SMAP멤버가 나와서 게스트가 요구하는 음식을 직접 요리하여 대접하고, 게스트가 더 맛있게 요리한 쪽에 손을들어주는 형식의 요리대결 토크쇼, 비스트로가 간판 코너였고, 한국의 최홍만, 이병헌, 장동건, 이영애도 출연한 적이 있는, 아는 사람한테는 잘 알려진 프로그램이다. 그러니까 이날 고르바초프는 '비스트로'의 게스트로 나온 것이었다.

 

 

 

2. 남자가 되는 것

 

 

비스트로 전반부에는 '이케가미 선생님'이라는 사람이 나와서 고르바초프가 누구이고, 그 당시의 냉전시대가 어땠고, 고르바초프가 무슨 일을 했는지에 관해서 알기 쉽게 설명을 하였다.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수장으로 활동했던 당시에 나는 아마도 여섯살부터 열살 정도가 아니었을까 헤아려 본다. (1985년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서기장으로 취임하여, 1990년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1991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당시가 몹시 혼란스럽고, 시끄러웠던 시기라는 것, 그 분위기, 공기의 냄새 정도였다. 소련의 고르바초프 라는 사람이 자주 뉴스에 나왔고, '페레스트로이카'라는 외국어가 유행어처럼 쓰였고, 어느날 갑자기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고 했다. 각종 언론에서 그렇게 떠들었지만, 사람들은 정작 그것이 자신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아이들은 어려서 몰랐고, 어른들은 역사와 자신과 이어지는 선을 긋지 못해서 몰랐다. 하지만 당시가 몹시 혼란스러운 느낌이라는 것만은 또렷하게 기억한다.

 

이나가키 고로가 고르바초프에게 물었다.

 

"남자로서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뭐라고 생각하세요?"

 

고르바초프는 말했다.

 

"남자가 되는 것. 가장 중요한 건 남자가 되는 것. 그 다음이 인간이 되는 것. 자신의 지인이나 친구들과 제대로 된 관계를 쌓을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겁니다."

 

나카이 마사히로가 물었다.

 

"어렸을 때부터 이 나라를 이대로 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셨어요?"

 

고르바초프는 답했다. 

 

"아니오, 젊었을 때는 안 그랬어요. 스탈린을 믿고 나라의 정치를 믿었죠. 전 대학을 졸업하고 정치의 세계에 입문했는데, 사회에 대해 알게 되면서 다른 인간으로 변하게 됐죠. 우리 소련의 생활은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안 좋다는 걸 알게 됐죠. 돈도 없고 살 것도 없었어요. 그래서 난 내 나라를 어떻게든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겁니다."

 

 

"인상에 남는 미국의 대통령이 계신가요?"

 

"난 두 분의 미국 대통령과 일을 했는데, 레이건 대통령과 제네바에서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단 둘이서 얘길 나눴어요. 그 후에 내가 내 보좌관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을 때, 그들은 레이건 대통령이 어떤 사람이었냐고 물어왔어요. 난 이렇게 말했어요. "저건 공룡이야!" 레이건 대통령은 날 "고르바초프는 융통성 없는 공산주의자다!" 라고 생각했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공동선언으로 도달해서는 "핵전쟁은 있어서는 안된다.", "핵전쟁의 승자는 없다." 난 레이건 대통령을 만났던 밤을 잊지 못할 겁니다."

 

쇼프로그램에서는 고르바초프가 먹고싶다는 장어요리와 튀김을 만들고 시식하고, 또 여러가지 질문과 답이 오갔지만, 내게 기억되는 것은 위의 세 가지 질문밖에 없었다. 그가 말한 '주변사람들과 제대로 된 관계를 쌓을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이 여러가지로 해석 될 수 있겠지만, 나름 내 방식대로 해석하자면, 각자 자기원칙이 있는 상태에서 그 점과 점을 이어 소통하는 관계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소통은 선이고, 선은 점과 점을 이은것이다. 자기 인생의 방점을 찍지 못하면, 누구와도 진심으로 연결될 수 없으리라.

 

고르바초프라는 사람의 인품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그 역사적인 평가도 관점에 따라서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어쨌거나 나는 다큐멘터리가 아닌 이웃나라의 쇼프로그램을 통하여, 역사의 전환점이 된 한 남자의 과거의 외로운 밤을 상상했다. 그는 공산주의를 신봉하고, 스탈린을 존경했던 한 청년이었다. 그리고 그가 지식인으로서, 권력자로서 세상과 마주했던 어느순간 생각을 전환하였다.

 

인간이란 동물은 관성에 쉽게 지배되어버린다. 게다가 그것이 한 개인이 아니라, 한 국가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라면 그 관성에 맞서서 방향을 전환한다는 것이, 그 외로운 싸움을 시작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라. 1989년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그는 잠을 자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장벽이 무너지는 지도 몰랐다고 했다. 그 밤은 그리도 길었던 것일까?

 

 

 

3. 페레스트로이카 & 글라스노스트

 

 

사람들은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이 말을 기억할까? 그땐 그랬다. 뭔가 알지는 못하겠는데, 여기저기서 쑥덕쑥덕 떠들어댔다. 그 요상한 말이 뭐라고... 그것은 고르바초프가 공산세계의 수장이 되면서부터 주장한 두가지 원칙이었다. 페레스트로이카는 우리말로, '개혁'이라고 하고, 글라스노스트는 '개방'이라고 한다.

 

그는 무엇을 개혁하고, 무엇을 개방하려고 했던가? 보통 정치의 세계에서 개혁과 개방이라고 하면, 내부를 개혁하고, 외부로 개방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이당시의 개혁과 개방은 좀 다른의미였다. 글리스노스트(개방)은 언론의 자유가 없던 당시에 국민 앞에 경제적으로 궁핍한 소련의 현실을 고백하는 것이었다. 개방은 외부로 개방이 아닌 내부에 정보공개였다.

 

어느날 아버지가 가족들을 불러놓고, "아빠 회사에서 짤렸다.", "혹은 부도났다." 라고 알리는 것을 그는 '개방'이라고 말했다.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의 무게, 그리고 한 국가를 넘어 하나의 세계를 짊어지고 해야만 하는 고백. 그가 스스로 그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고르바초프-03.jpg 

 

 

페레스트로이카(개혁)은 오히려 외부의 미국과 회담을 열어, 손을 잡고 군비경쟁의 치킨게임을 더이상 하지 말자고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소비에트 연방의 각 국가들의 미래는 그들 스스로 결정하도록, 그 어떠한 폭력도 행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민주화의 열망이 소비에트 연방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참 이상하기도 하지. 현재의 개혁이라면, 국가 내부의 낡고 부조리한 제도와 인물을 바꿔보자는 것이고, 개방이라면 FTA처럼 외국과 손을 잡아 새로운 문화와 제도, 제품을 받아들이고, 또한 내보내자는 것일텐데... 모든것이, 개념이 뒤바뀌어 버렸다. 그리도 더 재미있는 사실은 한국인의 생각도 완전히 뒤바뀌어버렸다. 불과 20년 전의 일인데도 말이다. 그의 전환이 세계인의 전환으로 이어져버렸다.

 

 

 

4. 역사의 우연, 혹은 필연

 

 

BBC방송은 1985년 3월10일 콘스탄틴 체르넨코 당시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갑자기 숨진 뒤, 정치국 최연소 위원이었던 고르바초프가 최고 자리인 서기장으로 선출되기까지 하룻동안 일어난 밀실의 알력다툼을 소개했다.

 

당시 대부분의 정치국 위원들은 나이가 많아 서기장 자리를 넘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체르넨코 전 서기장이 이미 고르바초프를 비공식적인 후계자로 삼은 상황이었다. 그는 정치국 원로들에게 가장 큰 적수였던 그리고리 로마노프보다 인기가 좋았다. 로마노프 세력은 영향력이 컸던 드미트리 우스티노프 국방장관이 1984년 말에 숨진 뒤 힘이 크게 약해져 있었다.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 설계자’이자 절친한 조언가가 된 알렉산드르 야코블레브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한 것도 큰 도움이 됐다. 85년 3월11일 고르바초프는 정치국 모임으로는 이례적으로 총회에서 한 연설을 소비에트 언론에 내보냄으로써, 그의 권력 승계를 만천하에 공표했다.

 

 

고르바초프-01.jpg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서기장으로 취임한 것은 역사의 우연일까? 필연일까?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은 역사의 우연일까? 필연일까? 이런 질문은 인류의 삶 자체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것일까? 보이는 손에 의한 것일까? 라는 질문과 같다. 눈을 감은자에겐 보이지 않고, 눈을 뜬 자에겐 보이는 것일까?

 

그렇게 개혁적인 사고를 가진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수장이 되는 것은 우연이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피폐해진 국가의 경제사정에 기인한 어쩔 수 없는 필연이었을까? 우연까지도 역사의 필연의 부분인 것일까? 그리고 역사의 필연을 믿고, 현실을 잊고, 두려움 없이 등불아래 함께하여야 할 것인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역사의 역설 속에서 늘 잘못된 판단을 하고, 그것을 잊고, 현실에 굴복하고, 또한 반복한다. 20년 전의 전두환, 노태우의 시대의 사람들은 지금 그때의 생각이 지금을 충분히 예측하고 준비했던가?  2010년의 이명박 시대의 나는 충분히 미래를 예측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본 미래가 현실이 될 것인가?

 

 

 

5. 그 후 20년

 

 

그 당시의 정치적인 이야기는 모르더라도, 내가 확실하게 기억할 수 있는 것은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종합순위 1위를 했던 소련이 그 다음인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그 이름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소련' 이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독립국가연합' 이라는 이름이 대신하였다.

 

'독립국가연합' 이라고, 난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가 완전히 사라졌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고르바초프는 개혁과 개방을 주장하며 역사의 큰 전환점을 남겼지만, 그것으로 모든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1991년 소련 내의 보수파의 쿠데타에 의하여 그는 그의 별장에 연금되고 말았다.

 

그러나 KGB의 사전검거를 면한 보리스 옐친 러시아 연방공화국 대통령과 소프차크 레닌그라드(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됨) 시장 등 개혁파 인사들은 러시아 공화국 의사당에 집결,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쿠데타 세력을 궁지로 몰아넣었고 80만의 시민이 소련 전역에서 반쿠데타 시위를 벌였다. 21일 새벽 의사당에 대한 공격이 5명의 사망자를 낸 채 실패한 뒤 강경보수파의 쿠데타는 3일천하로 막을 내렸다.

 

고르바초프는 보수세력과 개혁세력간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했지만, 보수세력의 쿠데타 실패로 인하여, 세력의 무게중심이 개혁세력으로 쏠리면서, 오히려 고르바초프는 개혁세력 속의 보수세력으로 입지가 축소되어갔다. 그는 어떻게든 연방의 형태를 유지하려고 애를 썼지만, 소수민족의 독립운동을 잠재울 수가 없었다.

 

12월 25일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사임연설이 텔레비전을 통하여 전국에 방영되었다. "나는 이제 우려뿐만 아니라 인민 여러분의 지혜와 의지에 대한 희망을 지닌 채 대통령직에서 물러납니다. 나는 알마아타 합의가 진정한 사회적 동의를 이끌어내고 개혁과정을 용이하게 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나의 능력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스마스마_고르바초프03.JPG 

스마스마_고르바초프05.JPG 

 

그리고 20년이 지났다. 정작 러시아에서는 그의 업적이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여론조사 결과는 러시아 국민의 45%는 고르바초프를 싫어한다고 하였다. 아마도 그것은 끊임없이 개혁과 개방을 단행했던 노무현 시대의 사람들이 받았던 그런 종류의 스트레스와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냉전을 종식시켰으며, 여전히 한 시대의 영웅으로 남았다.

 

이제 열정적인 정치가 고르바초프는 간데없고, 배나온 늙은이 고르바초프만 남았다. 그는 비스트로에서 증손자에게 다정한 할아버지가 되냐는 질문에 "민주적으로 대합니다. 내 생각을 강요하지는 않아요." 라고 답했다. 스튜디오에는 그의 손녀인 아나스타샤도 함께했다.

 

그는 역사의 평가는 뒤로한 채, 단지 가족을 사랑하고, 인연을 소중히 하는 하나의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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