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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이금재.
read 1942 vote 0 2021.09.23 (20:32:47)

고수는 수비를 선호하고 하수는 공격을 선호한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상황에 따라 다르다. 명칭에 고수가 들어갔다는 사실을 먼저 인지해야 한다. 고수는 이미 이겨있다. 이미 이겨있는데 굳이 공격할 이유가 없다. 가만히 있어도 이긴다. 하수는 자기가 져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할 수 없어 공격한다. 이런 공격은 씨알도 안 먹힌다. 먹힐 리가 없잖아. 공격은 개뿔. 그냥 몸부림이지. 


공격과 수비라는 용어는 좋지 않다. 공격이라는 말에 우월하다는 느낌이 이미 반영되어 있다. 힘이 남아도니깐 공격한다는 식이다. 그런데 공격을 해보면 안다. 공격해야 할 압박을 느껴 공격'된'다. 이미 나의 의지가 아니다. 상황이 날 조정한다. 고수는 선빵을 날리지 않아도 이길 수 있다. 괜히 고수가 아니다. 우리는 싸움의 승부가 해봐야 안다고 생각하지만, 많은 경우 싸우기 전에 이미 결정나있다. 굳이 싸워보는 이유는 상대가 납득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실내에서 승부가 명확하면 싸움이 나질 않는다. 애매하면 싸움이 나는 것이다. 사람은 눈을 달고 있다. 눈으로 보면 대강 감이 잡힌다. 보고도 모르겠다고? 최홍만을 보고도 당신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공격한다는 것은 선빵을 날린다는 것이다. 수비도 공격한다. 창과 방패의 모순은 모순이 아니다. 창이 있고 또다른 창이 있을 뿐이다. 원리적으로 방패는 없다. 빛이 있고 그림자는 없는 것과 같다. 선빵 창과 후빵 창이 있을 뿐이다. 권투를 하는데 공격주먹과 수비주먹이 따로 있을 리 없다. 


사람들과 섞여있다보면 유난히 공격적인 사람을 보게 된다. 우리는 그들이 미친놈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는 압박을 느끼고 있다. 여기저기 찔러보려는 마음이 생기는 이유는 후발주자이기 때문이다. 선발주자는 공격하지 않는다. 이미 이겨있다니깐. 


때로는 선빵도 필요하다. 아무도 나서지 않을 때 몸소 몸빵탱커 역할을 하는 자도 필요하다. 이때 고수의 진짜 가치가 드러난다. 알려져있지 않은 대상과 상호작용을 할 때는 먼저 간을 봐야 하는데, 대개 간보는 지는 피똥을 싸므로 아무도 그것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데 반드시 이 과정은 필요하다. 그래야 후발주자가 나설 수 있으니깐.


사람에게 말을 걸어보자. 길거리예수쟁이가 말을 거는 것은 무례한 것이지만, 소개팅 자리에서는 누군가 먼저 말을 걸어야 한다. 서로가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도무지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를 몰라 선뜻 나서기가 어려운 것이다. 일을 해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초기 데이터를 얻어야 한다. 그런데 그는 반드시 실패한다. 당연하다. 처음 하는 거니깐.


그러므로 아무나 선빵을 날릴 수 없다. 선빵 날리면 죽는데, 죽으면 다음이 없으니깐. 그래서 예비 자원이 넉넉한 자가 선빵을 날릴 수 있다. 다 계획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선빵이 실패했을 때 날아오는 피드백에 대한 대비책이 있는 것이다. 반면 하수는 선빵을 날리고 죽어버린다. 뒤를 기약할 계획도 경험도 자원도 없다. 그러니깐 하수다. 


우리는 구분해야 한다. 고수라서 선빵을 날리는 건지 하수라서 선빵을 날리는 건지를 봐야 한다는 말이다. 고수라면 상황에 따라 적절히 대응할 수 있다. 교착되어 진전이 없을 때는 선빵으로, 이미 결정나 있을 때는 후빵으로 간다. 노무현은 선빵을 문재인은 후빵을 선호한다. 굳이 말하자면 노무현이 더 고수다. 노무현이 있어야 문재인이 있을 수 있으니깐.


노무현이 위대한 것은 질 것을 알면서도 공격하기 때문이다. 단기전에서는 지지만 장기전에서는 결국은 이긴다. 그는 져도 문재인은 이긴다. 그걸 우리는 그의 눈빛에서 읽을 수 있었다. 이것이 정치에 관심없어 노무현이 누군지도 모르던 21살의 내가 군대에서 노무현에 표를 던진 이유다. 눈빛이 좋다. 너프-노무현이지만 이재명도 나름 괜찮다. 지금 20대는 그의 눈빛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애매하다면 눈을 돌려 이낙연을 보라. 어떤가 분명하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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