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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5]오세
read 3848 vote 0 2011.03.01 (00:51:35)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가관이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들이다.

강이 죽고 사람이 죽고 돼지도 죽고 다 죽어가는 가운데,

우리는 증오라는 독가스를 들이마시며 증오라는 독가스를 내뿜고 있다.

 

누군가 무대에 등장한다. 조두순이란 이름의 사이코패스, 김인혜라는 이름의 폭력교수, 아라이라는 극악무도한 해적.....

거대한 처형식의 막이 오른다. 모두가 흥분하고 먹이감을 기다린다. 마침내 증오의 먹이감의 죄상이 낱낱이 밝혀진다.

매스미디어와 인터넷을 통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인간이 발가벗겨진다.

그렇게 한 인간을 발가벗겨 대중 앞에 세워 아주 공개적으로 처형한다.

중세시대가 따로없다.

 

피해자의 고통에 대한 지극한 공감이 어느새 가해자에게 그 이상의 고통을 가해야 한다는 보복의 논리로 둔갑한다.

사람이 개로 변신한다고 해도 이보다 더 극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다들 사이코패스를 욕하면서 사이코패스를 닮아간다.

폭력교수를 욕하면서 폭력교수 못지않은 폭력을 휘두른다.

강간범은 죽여도 된다고 어느 놈이 댓글을 달면 맞장구치는 놈들이 한두릅이다.

사이코패스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한 공감을 잃어버릴 때가 바로 사이코패스라는 것을 모른다.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를 일으킨 놈을 없애면 된다고 말한다. 히틀러처럼 말하고 부시처럼 말하고 카다피처럼 말한다.

 

 <저 놈이 문제다! 저 놈을 없애자!> 

 

그러나 다들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가슴 속 깊은 곳에선 알고 있다.

 

그 서슬푸른 언어의 칼날 속에 우리는 가해자 뿐만 아니라 우리의 존엄도 같이 죽이고 있다.

몸이 죽어야 사람이 죽는가?

존엄이 죽을 때 사람이 죽는다.

진실로 이 세상엔 죽일놈도 없고 죽어마땅한놈도 없고 악마도 없고 사탄도 없고 사이코패스도 없다.

 있다면 나와 타인에 대한 기본적인 공감을 잃어버린채 서로의 고통에 무감각해진채 예리한 칼날을 입으로 휘두르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이 세상에 죽일놈이 있고 죽어마땅한놈이 있고 악마가 있고 사탄이 살아숨쉬고 사이코패스가 암약하고 있다고 믿을 때,

우리는 그 믿음 그대로의 세상을 확대재생산한다. 사람들로부터 공개된 광장에서 온갖 질타를 받고 있는 가해자들, 그러한 절차를 이미 밟고 만신창이가 되어 구겨져 이게 휴지조각처럼 되어버려 마침내 세상의 휴지통에 처박힌다. 우리는 그렇게 애초에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어떻게 가해자가 이토록 끔찍한 폭력을 저지를 수 있었는지에 대한 고민도 마찬가지로 휴지통에 처박는다.

 

이 낡은 세상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쌓인 분이 산이고 받은 고통은 대해와도 같으니 그것이 터져나오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그 고통을 우리는 굳이 서로를 향한 폭력으로 풀어야만 하는가? 그것이 정녕 우리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주던가?

 

혹자는 말한다. 저 위에 있는 자들, 우리를 지금 이 모양 이꼴로 만드는데 기여한 저 무리들을 욕하고 저주하는 것은 우리의 당연한 권리라고.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숨도 쉴 수 없을 거라고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그들을 향해 날선 비방을 하고 분노하고 욕하고 저주의 댓글을 달아도 그들이 지닌 권력과 부와 지위가 너무나도 견고하여  눈하나까닥하지 않고 조금의 상처도 입지 않을 것이며 설령 입는다하여도 그것이 미약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럴 수 있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보자. 한 번 공감해보자.

 

우리가 지금 비난의 화살을 쏟아붓고 있는 그들에게도 어린시절이 있었음을 떠올려보자. 그들에게 당한 희생자들도 마찬가지지만 가해자 역시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무자비하고 폭력적이고 잔인하고 악마적인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 역시 순진무구하고 보기만 해도 미소를 짓게 만드는 그런 갓난아이부터 출발하였다.

 

그런 그들이 지금처럼 질타받는 모습이 된 것은 무엇때문일까? 

 

잠시 눈을 감고 상상해보자.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을지를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말이다.

 

우리는 눈을 떠서 눈을 감을 때까지 온갖 신체적 언어적 폭력에 노출되어 살아왔다. 폭력이 인간세상의 디폴트값이 되어버린 상태에서 자라 그것이 폭력인지도 모른다. 가정, 학교, 사회, 국가 내에서 자행되는 온갖 종류의 폭력과 억압과 부자유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고통에서 떨어뜨려놓기 위해 자기자신과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을 묻어둔다. 그것이 인간이 지닌 가장 큰 자원이자 능력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묻어둔다. 그래야만 더 이상 타인의 고통을 보며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는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도 둔감해진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나도 괴롭기 때문에.

 

만연한 폭력 속에서, 그것이 물고기에게의 물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속에서,

오늘날 우리의 손가락과 돌팔매와 경멸과 증오를 온몸으로 맞고 있는 이들이 자라났다.

그들 역시 미소만으로 우리에게 행복을 안겨다주는 천사였지만, 정의가 아니라 폭력이 강물처럼 흘러넘치는 이 미친 세상에서 사이코패스가 되고 폭력교수도 되고 성폭력범도 되고, 그렇게 모두의 질타를 받는 '악마'가 되었다.  

 

분노하지 말자는게 아니다. 화를 내지 말자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 분노와 화를 무자비한 증오와 비난과 모욕이라는 또다른 폭력으로 풀지 말아야 함을 말하고 싶다.

 

오직 폭력만이 상대방의 반성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믿는 이들에겐

그 폭력이 반성을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타고난 성품에 오히려 등을 돌리게 만드는 <반성反性>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오직 폭력만이 상대방의 폭력을 끝장낼 수 있다고 믿는 이들에겐

그 폭력이 폭력을 종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증식시킨다고 말하고 싶다.

 

한 인간을 향한 가능한 모든 모욕과 비난이 담긴 말들중 그 어떤 말도 이 땅에서 그가 저지른 폭력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 하나도 없다.

 

감히 말한다. 우리는 피해자 뿐 아니라 가해자에게도 공감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이 폭력이란 이름의 가스실 밖으로 나올 수 있다. 서로를 향한 증오가 또다른 독가스를 내뿜는 이 정신나간 짓거리를 멈추려면 우리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저지른 폭력을 저지함과 동시에 가해자가 입을 폭력도 막아야 한다. 폭력이란 이름의 독가스는 우리가 가해자에게 가하는 폭력에서도 뿜어져나오기 때문이며 그 유독함은 모든 독가스가 그렇듯 결국 우리에게 치명적인 해를 입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정 분노해야 할 대상은 한 개인이 아니라 이 낡은 세상 전체다. 피해자와 가해자는 둘 다 이 낡은 세상이 낳았다. 그리고 그 낡은 세상은 몇몇 사악한 개인이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만든 거다. 우리 모두가 어느정도는 조두순이고, 어느정도는 김인혜고 어느정도는 이명박이다. 썩은 콩도 콩이고 썩은 팥도 팥이다.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난다고 했다. 대체 누가 그 콩을 심고 팥을 심었는가? 그리고 대체 누가 콩과 팥을 심어놓고 관리를 제대로 못해  '존엄'이란 거름을 제대로 주지 않고 '사랑'이란 햇볕을 못쬐게 한 채 병들고 썩게 하였는가? 대체 누가 씨앗에 담긴 공감의 유전자가 소통이란 꽃을 피워내지 못하게 교육이란 이름의 '유전자 조작질'을 하였던가?

 

우리다.

 

오늘날, 낡은 세상 속에서 폭력이란 가스실에 갇혀 희미한 공기를 찾아 미친듯이 손과 발을 휘둘러보지만 결국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해치고마는 이 비극같은 현실 속에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당장 가스실문을 박차고 나오는 것이다. 그 어떠한 형태의 폭력이라도, 심지어 가해자에 대한 폭력이더라도 그것에 대한 정당화를 그만두어야 한다. 우리는 그렇게 가스실 밖으로 당장 빠져나와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비로소 '존엄'이란 이름의 태양 아래, '자유'를 숨쉬고 '사랑'을 나누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행복을 누리리라.

 

 

 

 

 

 


[레벨:15]오세

2011.03.01 (00:52:23)

아참! 양모님.

창틀 칼럼 제목을 마음의 소리를 들어라에서 걍 깨달음의 심리학으로 바꿔주세염~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양을 쫓는 모험

2011.03.01 (01:48:54)

오세 님의 카테고리 명은 '깨달음의 심리학' 입니다. '마음의 소리를 들어라' 는 오세 님과 담 님의 칼럼을 한곳에 묶어 메인화면의 티에디션으로 넣은 것이구요. '마음의 소리를 들어라'는 얼마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아직 담 님의 글이 안올라와서 메인화면만 보면, 오세 님 글들로만 채워진 듯 보일 것 입니다.)


다만, 담 님과 오세 님을 메인화면에 한 곳에 분류한 것은 각자의 카테고리 별로 메인화면에 다 띄우면 독자입장에서 난잡해보이고, 레이아웃 잡기도 어렵고, 카테고리만큼의 컨텐츠가 빨리 올라오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도 정리를 해야겠습니다.


봉하에서 만나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15]aprilsnow

2011.03.01 (02:01:03)

인과응보 사필귀정

 

---------------

단, 원인의 문제를 폭력의 스트레스 속에서만 풀려고 하면 그 차원을 벗어날 수 없거나,

스스로 또 같은 문제에 걸려들게 되므로

바른 원인을 파악하여 해결하려고 하는 공동체의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정의의 성숙과 진보가 필요한거겠지요.

그것이 깨달음일테고.

 

'모든 일에는 그에 따른 정당한 댓가가 따른다.'

하지만  정의로운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을 때 나약한 개인의 울분이 방향을 잃고 커지는 것이고...

나약한 인간에 대한 보편적 연민은 있을 수 밖에 없겠지만  공동체와 역사의 심판은 준엄해야 할 것이고. 

 

하지만 폭력의 가스실에 갇히지 않아야 한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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