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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2559 vote 0 2021.10.18 (18:43:05)

    결정론이냐, 자유의지냐? 소크라테스 시절에 시작된 논쟁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데. 유치하기 짝이 없다. 인류는 이 부분에 있어서 아이큐가 떨어지는게 분명하다. 관점의 문제다. 사물을 보면 결정론이 옳고 사건을 보면 자유의지가 옳다. 그런데 자유의지라는 것은 애매한 말이고 상호작용이 맞다. 세상은 주체와 타자 간의 상호작용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신은 전지전능한가? 이 말은 어법에 맞지 않다. 신은 자살할 수 있는가? 신은 1+1=3으로 만들 수 있는가? 바보 같은 말이다. 이것은 언어의 문제다. 말을 그 따위로 하면 안 된다. 전지전능이라는 단어는 불성립이다. 언어파괴다. 언어에 규칙이 있는데 그 규칙을 깬다. 신이라도 현재 존재하는 것을 재현할 뿐이다. 현재 없는 미지의 어떤 것을 만들었다면 그것이 기대한 것과 같은 것인지 확인할 수 없다. 의미가 없다. 세상은 톱니가 맞물려 돌아간다. 하나를 건드리면 전부 어긋난다. 전지전능은 신을 파괴한다. 전지전능이 신보다 세기 때문이다. 전지전능이 신보다 약하면 전지전능이 아니다. 말장난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자유의지도 같다. 어디까지 자유의지인지 특정할 수 없다. 자유의지라는 말 자체가 결정론적 사유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이다. 결정론은 틀렸다. 그런데 왕을 끌어내리고 다른 사람을 그 자리에 갖다 놓으면 안 된다. 자유의지냐, 결정론이냐 양자택일을 요구한다면 자유의지를 결정론의 위치에 두려는 것이다. 신의 전지전능은 가능하다. 단, 안 되는 거 빼고 가능한 범위 안에서. 마찬가지로 자유의지는 가능하다. 단, 안 되는 거 빼고 가능한 범위 안에서. 그 가능한 범위를 찾아야 한다. 결정론은 절대적으로 결정되지만 자유의지는 상대적인 자유의 크기만큼 가능하다. 개나 소는 자유가 없으므로 자유의지도 없다.


    판단기준은 '자아'다. 자아의 밖에서 운명이 결정되느냐, 자아 안에서 내가 결정하느냐다. 배가 아프다면 자아 바깥에서의 소식이다. 호르몬이 나온다면? 배도 내 배고 호르몬도 내 호르몬이다. 돈이 있거나 없다면? 돈은 내 돈이다. 나와 타자를 구분하는 경계는 애매하다. 내 자식을 내 맘대로 할 수 없고, 내 마음도 내 맘대로 할 수 없다. 마음이 마음대로 된다면 알콜이든 마약이든 중독자는 없을 것이다. 도대체 어디까지 자아에 속하는가? 그것은 게임에 따라 다르다.


    우리가 세상을 사건으로 보고, 상호작용으로 보고, 게임으로 보는 시선을 얻어야 한다. 주체와 타자의 문제다. 주체가 이기느냐, 환경이 이기느냐? 인간은 운명을 개척하는 능동자인가, 환경에 지배되는 수동자인가? 적극적인 공자의 길을 갈 것인가, 소극적인 노자의 길을 갈 것인가? 능동적으로 나의 길을 개척할 것인가, 수동적으로 환경에 적응할 것인가? 긍정하고 낙관할 것인가, 부정하고 회의할 것인가? 주체냐 타자냐에 많은 것이 연동되어 있는 것이다. 합리와 실용, 진보와 보수, 공격과 수비가 거기서 한꺼번에 결정된다. 당신은 공격수인가, 수비수인가? 자유의지는 공격수고 결정론은 수비수다.


    그전에 게임이 존재한다. 게임이 없는데 공격이냐 수비냐는 무의미하다. 그런데 게임은 원래 주체가 이기도록 설계된다. 창이 방패를 이기는 데서 게임이 시작된다. 방패가 이기면 전쟁이 멈춘다. 원래 공격과 수비가 동일한 조건에서 싸우면 수비가 이기도록 되어 있다. 수비가 이기는 지점에서 전쟁이 멈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연의 어떤 상태는 수비가 이겨서 전쟁이 멈춘 밸런스 상태인 것이다. 혁신이 일어나서 밸런스가 깨지고 공격이 이겨버리면 다시 게임이 시작된다. 공수의 랠리가 이어져서 다시 수비가 이기게 되고 밸런스가 회복되면 그 지점에서 전쟁은 중단된다.


    생물의 진화와 문명의 진보는 공격이 부단히 수비를 이겨서 일어난 것이다. 자연상태는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수비가 이기므로 공격의 승리는 환경변화에 의해 일어난다. 모종의 변화가 일어났다는 전제로 게임이 시작되는 것이다. 갑자기 컴퓨터가 등장했다거나 이전에 없던 스마트폰이 출현했다거나 하면 룰이 바뀌게 된다. 피아간에 공방을 벌이며 랠리를 이어가다가 마침내 수비가 이기는 지점에서 룰이 고정된다. 다시 밸런스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므로 게임은 원래 자유의지가 이기도록 설정되어 있다. 프로팀이 새로운 포메이션을 실험한다면 그것은 자유의지다. 그러고 싶으면 그러는 것이다. 그런게 없다면 게임을 할 이유는 없다. 어차피 독일이 우승컵을 들게 되어 있다면 월드컵은 폐지해야 한다.


    자유의지가 없다는 말은 어차피 전쟁은 끝까지 가면 수비가 이긴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수비가 이길 때까지는 공격이 이긴다. 여기서 전략의 문제다. 1차전을 져주고 2차전을 이기는게 전략이다. 어차피 진다는건 결정론이고 지는 게임을 내가 결정할 수 있다는건 자유의지다. 자유의지가 있는 이유는 거기에 인간의 의도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난수표를 생각할 수 있다. 난수 만들기 어렵다. 예측할 수 없으면서도 확률과 맞아야 한다. 직접 만들면 무의식적 편향이 작용하므로 외주를 주는게 맞다. 여러 곳에 별도로 난수를 만들어 섞어버리면 완벽하다. 신문지 백 번 접기를 참고한다면 몇 번의 단계를 두는 것만으로 큰수의 법칙이 작용하게 만들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른 확률을 만들어낼 수 있다. 결정론자는 그것도 소립자 단위로 추적하면 계산해낼 수 있다고 억지를 부리지만 중요한 것은 의도다. 전략이 먹히는 이유는 상대가 예측하지 못하게 할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일부러 허위정보를 주는 것이다. 도루를 하지 않으면서 할 것처럼 하거나, 사인훔치기를 하지 않으면서 훔치는 척해서 상대의 맞대응을 끌어낼 수 있다. 상대가 대응하게 만들면 이미 자유의지는 작동한 것이다.


    자유의지와 결정론의 판단기준은 신이 전지전능으로 인간의 운명을 예측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신의 할배라도 그 상황에서는 전술적 맞대응을 할 수밖에 없는게 아니냐가 결정하는 것이다. 신이 전지전능으로 1루 주자가 도루를 할 것인지 안 할 것인지 알아내는 것보다 그냥 견제구를 던지는게 낫다. 신은 바보가 아니므로 그 상황에서 견제구를 던져 도루를 막는다. 그게 더 비용이 적게 먹힌다. 자연의 기본 전제는 효율성이다. 자연은 이기는 길을 선택한다. 비용을 줄여야 이긴다. 신이 견제구를 던지도록 만들었으므로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다.


    자유의지 논쟁에 양자역학을 끌어들이는건 오버고 본질은 상대의 전략적인 맞대응을 부르느냐 여부다. 내가 무슨 수단을 쓰던 무시하고 상대가 백만대군으로 짓밟아버리면 자유의지가 없는 것이고, 반대로 내가 수단을 쓸 때마다 상대가 전술적 맞대응을 하면 자유의지가 있다. 코끼리가 개미를 밟아버리면 개미는 자유의지가 없다. 개미가 코끼리의 귀로 들어가서 간지럽히면 코끼리도 곤란해진다. 상대의 맞대응을 끌어내면 자유의지의 승리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는 있다. 인간은 환경을 변화시킨다.


    인생은 환경과의 게임이다. 내가 이겨서 환경을 바꾸면 자유의지가 있고, 환경이 이겨서 나를 바꾸면 결정론이 맞다. 문제는 내가 변한다는 사실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른 사람이다. 내가 결혼하고 취업하고 진학하면 신분이 변한다. 사회적 위치가 변한다. 내가 주변을 장악하고 확대한다. 내 가족, 내 나라, 내 우주가 나의 레이다에 잡히면 나는 확대된다. 인간이 환경을 바꾸고 환경이 인간을 바꾼다. 그것이 상호작용이다. 자유의지는 원래 희미하고 그것을 명확하게 만드는 과정이 인생이다.


    우주는 미리 결정될 수 없다. 결정되면 게임에 지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기계론은 톱니가 맞물려 돌아간다는 말이다. 톱니처럼 맞물리면 부분의 실패가 전체의 붕괴로 이어져서 아군이 전멸한다. 부분의 고장으로 인한 피해는 부분에 한정되어야 한다. 포드시스템은 한 명이 잘못해도 라인을 멈춘다. 뭉쳐 있으면 몰살되고 흩어져 있으면 각개격파 된다. 효율은 비효율이다. 전략은 상대를 속이고 자기 편도 속이므로 미리 결정하면 안 된다. 난수와 같다. 나도 모르고 상대도 모르게 한다. D-DAY는 누구도 모른다. 적이 알아채고 대응하면 날짜를 바꾼다. 전략의 기본은 세부를 확정하지 않고 모호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인생은 주체와 타자의 게임이다. 그것은 인간과 환경의 상호작용이다. 주체를 크게 보면 자유의지, 타자를 크게 보면 결정론이다. 답은 상호작용이다. 자유의지로 보면 인생은 권력적, 긍정적, 낙관적, 능동적이고 결정론으로 보면 인생은 운명적, 부정적, 회의적, 수동적이다. 공자는 자유의지파, 노자는 결정론파다. 강자는 자유의지, 약자는 결정론이다. 주인은 애완견을 선택할 수 있고 애완견은 주인을 선택할 수 없다. 상사는 부하를 고르고 부하는 상사를 고를 수 없다. 인간은 음식을 고르고 음식은 인간을 고를 수 없다. 이긴 자는 자유의지, 진 자는 결정론이다. 한국팀은 자유의지, 중국팀은 결정론, 합쳐서 상호작용론이다.


[레벨:4]고향은

2021.10.19 (14:29:49)

인간은 벗어날 수 없는 테두리에 처해 있으면서-
또한 테두리의 새로운 버전 version을 욕망한다
그것은 자율성과 권위의 속성을 지닌, 갈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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