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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944 vote 0 2021.10.01 (11:40:00)

    써놓은 글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거 다 읽는 분은 용감한 분입니다.


    우리말 '진리'는 절대적이고 유일하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이다. 사물에는 그것이 없지만 사건에는 그것이 있다. 하나의 스위치를 조작하여 일만 개의 가로등을 켜고 끌 수 있다. 산의 정상처럼 뾰족한 그것은 있다. 그것을 표현하기에는 인간의 언어가 부족하다. 언어를 탓해야지 진리를 탓하면 안 된다. 



    게임의 시작


    게임은 그라운드에서 시작된다. 선수들이 차례로 입장한다. 인간의 사유는 어디에서 시작되어야 하는가? 선수들은 모두 테이블에 앉았는가? 연결이 첫 단추다. 그리고 마이너스가 진행된다.


    열역학 1 법칙과 2 법칙은 하나로 합쳐진다. 1 법칙이 변화를 다룬다면 2 법칙은 사건을 다룬다. 1 법칙은 2 법칙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다. 닫힌계 안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변화가 사건이다. 사건은 움직이고 움직이면 외부와 단절되어 닫힌계를 이루며 이후 외부의 영향이 없이 자체의 원인에 의해 변화가 진행된다.


    변화에 필요한 동력을 닫힌계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조달해야 하므로 사건은 에너지의 잉여가 일어나는 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며 그 방향은 마이너스다. 마이너스는 연결이 끊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초에 사건의 시작은 모두 연결되어 있음이어야 한다. 그것이 진리다.


    처음 상태는 내부적으로 모두 연결되어 평형을 이룬다. 사건이 격발되어 연결이 끊어지면 불균형이 발생한다. 이에 따른 복원력에 의해 사건은 차례로 진행된다. 이쪽에서 하나가 끊어지면 저쪽도 하나를 끊어 균형을 맞추는 형태다.


    투수는 와인드업 동작으로 균형을 만들고 다시 오른팔을 뒤로 젖혀 불균형을 만든다. 뒤로 물러난 팔을 본래의 위치로 되돌려 균형으로 돌아오는 형태로 투구동작을 시작한다. 균형에서 멈추지 않고 관성력으로 더 치고나간다. 왼발을 앞으로 내딛어 새로운 균형을 만든다. 새로운 균형점인 왼발을 지나쳐 오른팔이 더 전진한다. 균형>불균형>균형>불균형>균형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신체의 일부가 밸런스에서 빠져나간다. 처음 와인드업 자세에서 인체의 백퍼센트가 균형에 참여하지만 투구동작이 진행될수록 일부가 빠져나가서 나중에는 어깨와 팔 그리고 팔꿈치와 손목만 균형에 동원된다. 사건의 진행에 필요한 균형에 일부만 참가하고 나머지는 빠지는 것이 마이너스다. 하나의 사건에서는 5회에 걸쳐 마이너스가 일어난다.


    플러스를 하려면 동작을 멈추어야 하므로 사건의 진행이 불가능하다. 활을 당긴다면 처음에는 궁수와 활몸과 활시위와 화살이 모두 팽팽하게 당겨져서 균형에 참여하지만 먼저 궁수가 시위를 놓고 밸런스에서 빠진다. 다음 활몸이 에너지를 활시위에 넘기고 게임에서 빠진다. 다음은 활시위가 에너지를 화살에 넘기고 빠진다. 단계적인 마이너스에 의해 사건은 진행되는 것이다.


    비행기가 이륙하면, 배가 출항하면, 자동차가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면 움직이게 되고 움직이는 상태에서는 추가적인 에너지 투입이 불가능하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을 수 있지만 자동차가 멈추면 사건이 종결된 것이다. 사건은 움직이는 상태를 다루며 움직이는 동안 에너지를 소비하는 마이너스만 가능하다.


    인류의 제 1 지식은 엔트로피다. 엔트로피는 닫힌계 안에서 저절로 진행되는 사건은 의사결정비용을 조달할 수 있는 한 방향으로 굴러간다는 것이다. 그 방향은 마이너스다. 진리는 연결이고 연결된 것은 끊어진다. 사건 안에서 인간은 연결을 끊는 행동만 할 수 있다.


    진리가 연결이면, 구조는 연결방법이며, 엔트로피는 연결방향, 권력은 연결의 스위치, 사건은 연결고리다.



    무한동력과 엔트로피


    우주의 제 1 지식은 엔트로피다. 엔트로피는 마이너스다. 그것은 연결의 단절이다. 단절은 연결되어 있음을 전제로 한다. 그 연결되어 있음이 진리다. 연결되어 있으므로 끊을 수 있다. 진행되고 있는 사건 안에서는 끊는 결정만 할 수 있다. 여기서 사건의 큰 방향이 결정된다. 게임이 스타트 된 이후로는 앞단계의 결정에 연동시키는 자동진행 모드로 놓고 일사천리에 파죽지세로 간다. 그러므로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한다.


    사건의 첫 단추는 엔트로피다. 첫 단추 앞에서는 진지해야 한다. 그대 첫 소풍 때는 설레이지 않았던가? 그대 강렬한 첫 키스의 추억을 잊어먹었다는 말인가? 신혼 첫날 부터 나사가 빠지면 안 되는 거잖아. 첫 출근 때는 당신도 지각을 안했잖아.


    무한동력의 딜레마가 참고가 된다. 무한동력은 플러스고 엔트로피는 마이너스다. 플러스는 절대로 없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이론적 확신이다. 혹시 모르잖아, 만의 하나 하고 의심병이 도져서 한 눈을 팔면 안 된다. 그게 첫 단추의 의미다. 과학가는 이론적 확신을 가지고 일사천리로 가야 한다.


    무한동력을 이해하려면 창조자 입장에서 생각해봐야 한다. 당신이 신이라면? 세상을 어떻게 만들어야 잘 만들었다는 칭찬을 듣지? 무한동력이 있으면 안 된다. 동력이 무한히 발생해서 애써 창조해 놓은 우주가 단숨에 뽀개진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연도 할 수 있다. 자연의 어느 귀퉁이에서 무한동력이 발생하여 에너지를 계속 생산하면 지구폭발에 이어 우주멸망. 하느님의 창조작업은 시작도 못해보고 물거품이 된다.


    엔트로피는 우주 안의 모든 문제를 한 줄에 꿰는 첫 번째 구슬이다. 에너지의 방향성을 결정한다. 모든 삽질은 바로 이 부분에서의 오판 때문에 일어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기타등등 모든 문제의 오판은 에너지의 방향성 판단에 실패한데 따른 후과다. 필요한 것은 닫힌계 개념이다. 닫힌계 안에서 외부사정의 개입이 없이 자체적으로 일어나는 변화는 변화의 비용을 소비한다. 전체비용 - 변화비용 = 변화결과다. 변화결과로 얻은 값은 에너지 총량에서 변화비용을 뺀 값을 넘을 수 없다. 이게 엔트로피다.


    입력 = 변화비용 + 출력


    제품의 원가에 보관비, 운반비, 택배비, 포장비가 포함된다는 말이다. 3만원 이상은 배달료 무료. 이런건 눈속임이고 원가에 다 포함되어 있다. 장사꾼이 밑지고 판다는 말을 믿어?


    구조론은 연역으로 이해하기다. 쉽게 가자. 귀납은 설명이 복잡해서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연역은 단순하므로 믿을 수 있다. 변화는 움직이고 움직이면 헷갈린다. 헷갈리지 않게 외부에 울타리를 치면 닫힌계다. 세균을 실험한다면 비이커에 넣고 끓인다. 살균하고 입구를 틀어막는다. 통조림이라는 닫힌계 속에서 뭔가가 자연발생하는 일은 없다.


    외부의 간섭을 차단한 것이 닫힌계다. 닫힌계 안에서의 변화는 변화에 필요한 비용을 뺀 만큼 가능하다. 총량 = 변화비용 + 변화결과. 구조론은 쉽게 설명한다. 열역학은 쉬운 것을 어렵게 설명하여 사람들을 피곤하게 한다. 연역적 사고를 통해 배워야 한다. 원리의 힘은 막강하다는 사실을. 절대로 그렇냐? 추호의 의심도 없느냐? 만의 하나 다른 가능성은 없느냐? 구조론은 이런 의심병 공격에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힘을 제공한다.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는다.


    세상의 모든 실패는 원가에 묻어가는 의사결정비용을 무시하는데 따른 착오 때문에 일어난다. 어떤 사건의 초기단계는 외부에서 도와주므로 열린계다. 초딩의 첫 등교는 엄마가 도와준다. 남녀가 미팅을 해도 주선하는 사람이 있다. 닫힌계가 아니다. 그러나 사건은 점점 커지고 더 이상 도와줄 수 없게 된다. 조중동이 윤석열을 밀어주는 데도 한계가 있다.


    사건이 열린계로 시작했다가 닫힌계로 바뀌는 지점에서 인간의 실패가 일어난다. 기업이 처음 투자자의 돈으로 연명하다가 자체 수익구조로 바뀌는 지점이 있다.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이다. 위태롭다. 아빠찬스로 무한동력을 구가하다가 어느 순간 향토장학금이 끊어지고 제한동력으로 바뀌는 것이다. 남녀가 연애를 하더라도 처음에는 낯선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서로 긴장하므로 과대평가를 하게 된다. 어느 순간 방귀를 트면서 냉정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위기다.



    구조론은 진리다


    우리말 '진리'를 영어로 옮길 수 있는 적당한 말은 없다. truth는 성경에 나오는 말로 '진리'보다는 '사실'에 가깝다. 예수의 부활을 사실로 받아들일 것이냐다. 우리가 진리라는 단어에서 받게 되는 압도적인 느낌은 참이냐 거짓이냐의 차원이 아니다. 참이든 거짓이든 그것은 언어다. 진리를 언어에 가둘 수 있다는 말인가?


    구조론의 진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음'이다. 사건으로 보면 우주 안은 전부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진리다. 진리는 언어에 있지 않고 사건에 있다. 우주를 전부 연결하는 것은 커다란 사건이라야 한다. 우리는 우주단위, 문명단위, 역사단위의 커다란 사건 속에서 모두 연결되어 하나가 된다. 월드컵이 열리면 국대팀의 16강 진출을 염원하면서 5천만이 하나가 되듯이 말이다.


    갈림길에서 선택해야 한다.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가? 선택지는 둘이다. 하나는 연결된 길이고 하나는 막다른 길이다. 당연히 연결된 길을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진리다. 쉽잖아. 세상은 복잡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은 단순하다. 그것은 연결과 단절 중에서 연결을 선택하는 것이다.


    진리는 최종보스 느낌이다. 막차가 오면 그 차를 탈 것인가 말 것인가? 섬에서 막배를 놓치면 숙소를 잡아야 한다. 순간의 선택에 따라서 결혼까지 가는 수가 있다. 운명이 결정된다. 그런 느낌이다. 진리는 세상과 나를 일대일로 맞서게 한다. 일대일은 단순하다. 단순하기 때문에 위로가 된다. 마지막 순간에 우리는 하나의 스위치를 조작하여 연결과 단절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방법으로 신과 맞서게 된다. 거기서 운명을 결정한다. 마지막 스위치는 내가 쥐고 있다. 통쾌하지 않은가?


    진리가 사건을 연결하는 방법은 구조다. 길이 있다면 선택지는 둘이다. 그 길을 가거나 가지 않거나. 밥이 있다면 선택지는 둘이다. 먹거나 먹지 않거나? 그런데 길이 어떻게 대문까지 이어졌지? 짜장면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그것은 구조다. 길은 네거리로 연결된다. 짜장면은 배달로 연결된다. 진리는 구조로 연결된다. 구는 공간을 연결하고 조는 시간을 연결한다. 연결된다는 것은 통제가능하다는 것,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할 수 있으며 서로 통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권력이 내게 있다는 말이다. 어찌 유쾌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노상 신에게 기도하지만 신과 연결된다면 그 뿐이지 더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기도는 신과 단절되었다는 전제로 연결해 달라고 애걸하는 짓이다. 내 손을 잡아주세요. 이런 거다. 불쌍하다. 자식은 부모와 연결된다. 자식은 부모와 통한다. 그 뿐이다. 부모에게 손을 잡아달라고 애걸하는 자식은 없다. 통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신과 통하지 못하므로 신에게 매달린다. 그들은 미션을 받지 못했다. 신이 설계한 사건 속으로 뛰어들지 못했다. 겉돌고 있다.


    진리는 사건을 통해 인간을 연결한다. 우리는 사건 속의 존재다. 사건의 이름은 문명의 진보다. 문명의 진보에 동참하라는 미션을 받은 사람은 기도할 이유가 없다. 통했기 때문이다. 부모와 자식 사이는 믿음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통하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신의 미션을 수행해서 내가 무언가 보상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부모라면 자식이 대신 보상을 받아도 좋다. 집단이라면 대표가 대신 보상을 받아도 좋다. 의사결정의 중심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내 욕망을 달성해야겠다고 우긴다면 그게 하지마라는 자기소개다. 그것은 콤플렉스를 들키는 것이며, 열등의식을 보상받으려는 것이다. 수렁에 빠져서 구원의 동아줄을 기다리는 것이다. 제대로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확실한 연결을 바라며 눈에 띄려고 돌출행동을 한다. 상대를 자극하여 반응을 끌어내려고 한다. 무언가 받으려고 하는 즉 게임에 진 것이다. 이기려고 하는 즉 져 있다. 주최측은 잘하는 팀이 올라가서 흥행되기를 바랄 뿐 우승을 바라지 않는다.


    신과 통하는 사람, 진리와 연결된 사람, 사건 안에서 역할과 포지션을 얻은 사람, 이어진 길을 가는 사람은 주최측의 마음을 가진다. 게임에 참여하지만 승부에는 초연하다. 중요한 것은 롤 플레잉 게임의 밸런스다. 진보와 보수가 팽팽하되 근소한 차이로 진보가 이겨야 밸런스가 맞아져서 흥행이 된다. 매번 강팀이 이겨도 재미가 없다. 신인이 이겨야 재미가 있다. 진보가 이겨야 하는 이유다. 4년마다 독일팀이 이기면 월드컵은 하나마나다. 주최측의 마음을 가지면 답이 나온다. 젊은이가 기득권을 이기고, 변방이 중심을 이기고, 진보가 보수를 이겨야 문명은 흥행이 된다.


    비극은 열등의식의 보상심리다. 상대를 이겨먹으려는 마음 때문이다. 그들은 무언가 다짐받고, 확인하고, 인정받고, 도장 받고 격려받으려고 한다. 불안하기 때문이다. 연결이 끊어져 있기 때문에 불안하다. 맞물려 돌지 않고 겉돌기 때문에 불안하다. 기관차와 객차가 처음 연결될 때의 철커덩 하는 느낌에서 인간은 쾌감을 느낀다. 그것을 재현하려고 한다. 첫 승리, 첫 소풍, 첫 여행, 첫 합격, 첫 키스의 강렬한 인상을 재현하려고 한다. 신과의 연결을 재확인하려고 한다. 소인배는 어떻게든 상대방을 자극하여 반응을 끌어내려고 한다. 하수는 상대의 패를 봐야지만 자기 패를 결정할 수 있다. 연결상태가 불안한 자의 아우성이다.


    남녀가 의리로 연결되든, 개인이 미디어로 집단과 연결되든 본질은 같다. 인간은 그저 환경과 긴밀하게 상호작용 하려는 것이다. 진리를 보지 못한 자는 불안해 하며 양치기 소년의 행동을 반복한다. 늑대의 출현을 알리면 아저씨들이 몽둥이 들고 달려온다. 집단과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안도한다.


    진리를 본 자는 우주가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알고 있다.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된다. 그것은 방해자를 토벌하고 본래의 연결되어 있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문명의 방향성을 확인하고, 진보의 기세를 유지하고, 권력의 스위치를 확보하는 것이다.


    언제나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끊어진 길과 연결된 길이 있다. 연결된 길을 선택해야 한다. 문제는 환경의 변화다. 익숙한 것을 연결하기는 쉬운데 변하는 것을 연결하기는 어렵다. 변화의 흐름에 휩쓸리고 빠지고 떠밀리고 몰려서 막다른 길을 선택하는 실패를 피해야 한다. 변화는 두 얼굴을 가졌다. 변화는 아군인듯 적이고, 왼쪽인듯 오른쪽이고, 앞인듯 뒤고, 머리인듯 꼬리다. 변화를 따라잡지 않으면 안 된다. 변화를 이겨서 변화와 나란할 때 연결을 유지할 수 있다.


    인생의 많은 고민은 사실이지 남의 걱정을 대신 걱정하는 것이다. 평판이니 체면이니 위신이니 하는 것들 말이다. 그것은 내 문제가 아니다. 나는 길을 가면서 부단히 연결을 선택하는 방법으로 확률을 높이면 된다. 결과가 나쁘다면 운이 없는 경우다. 그 운은 다른 사람이 가져갔다. 내가 그 떡을 먹지 못했어도 나 대신 누군가가 그 떡을 먹었으면 반대로 남 대신 내가 먹을 확률도 높아졌으니 셈셈이다. 기어코 내가 떡을 취해서 남들 앞에서 뽐내려 한다면 그걸로 아빠한테 기특하다는 칭찬을 듣겠으나 당신은 더 이상 남들에게 평가받는 어린이가 아니라야 한다. 평판이든 체면이든 위신이든 그것은 타인에게 평가받으려는 소인배의 행동이며 그 이유는 내 입지가 불안하기 때문이다. 세상과 이어주는 내 동아줄이 튼튼하지 못하니 남들에게 의지하려고 눈치를 보는 것이다. 타인에게 칭찬들을 생각은 버리고 누가 이겨도 상관없는 주최측의 허심탄회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게임은 흥행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기세가 붙고, 기세가 붙어야 다음 단계의 진행이 순조롭다. 진리를 알고, 내가 지금 해야할 일을 알고, 길이 연결되어 있고, 누가 이겨도 상관없는 주최측의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다면 당신은 게임을 즐길 수 있다. 이것이 인생의 답이고 그 바깥은 없다. 당신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 페이지 안에서 승부를 내야 한다. 홀가분하지 않은가? 당신이 해야할 것을 구조론이 도와주지는 못하지만 당신이 하지 말아도 되는 것은 구조론이 일러줄 수 있다. 등에 짊어진 짐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다.



    진리의 의미


    인생이 한 판의 바둑이라면 나와 바둑을 두는 상대는 누구인가? 나는 도무지 누구와 게임을 벌이고 있다는 말인가? 신이다. 바둑판은 우주다. 바둑의 진행은 자연이다. 바둑에서 나의 벌어놓은 집은 문명이다. 바둑의 행마는 진보다. 바둑의 기보는 역사다. 바둑의 정석은 진리다. 정석을 알아야 바둑을 둔다. 진리를 알아야 인생을 산다. 우리는 부단히 의사결정의 기로에 선다. 이거든 저거든 선택해야 한다. 아무데나 두면 안 된다. 손 따라 두면 좋지 않다. 상대의 의도에 말리게 된다. 악수와 덜컥수를 피하고 꼼수의 유혹을 극복하려면 마땅히 진리에 의지해야 한다. 진리는 역사와 문명과 자연과 신과 동급이다. 나와 타자를 묶어주는 그 무엇이다. 문명이라는 배가, 역사라는 항해를 떠나, 자연이라는 바다를 건너며, 신이라는 등대를 바라볼 때, 선장이 잡아야 하는 키는 진리다.


    나는 많은 바둑알 중에 하나이지만 승부처에서는 한 점이 전체를 대표한다. 한 점을 따먹혀서 대마가 죽고 한 점을 이어서 승부를 역전시킨다. 승부처에서 바둑알 한 알은 바둑 전체의 비중과 맞먹는다. 나의 반대편에 우주가 있고 둘 사이에 상호작용이 있다. 연극이라면 신이라는 작가와 진리라는 대본이 있고 우주라는 무대에서 자연이라는 공연이 벌어진다. 문명은 흥행이고 진보는 성적이다. 톱니가 맞물려 돌아간다. 인간은 홀로 광야를 헤매는 존재가 아니라 신과 진리와 문명과 역사와 진보와 자연과 우주와 함께 긴밀하게 호흡하는 존재다. 상호작용하는 존재다. 톱니가 맞물려 돌아간다.


    우리는 많은 것을 알 필요가 없다. 내가 게임의 플레이어라는 사실, 바둑에 정석이 있다는 사실, 인생에 목표가 있다는 사실, 삶에 이유가 있다는 사실, 사건이 다음 단계로 연결된다는 사실, 그 연결에 인간이 추구하는 의미가 있다는 사실, 바둑알 통에 바둑알이 충분하므로 실탄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 함께 전투할 동료가 있다는 사실, 바둑은 상대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 마음이 편하다.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된다. 응수타진을 해보고 되돌아오는 반응에 따라 결정하면 된다.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므로 긴장이 유지된다. 힘들게 모아둔 기세를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면 슬픈 거다. 그런데 인생은 답을 알 수 있다. 바둑판에 와서 승부로 간다. 진리대로 결정하여 사건을 연결시켜서 의미를 달성하고 다음 주자에게 넘겨주면 된다. 내 할 일은 그걸로 끝.


    바둑판은 계속 메워진다. 361로 외에 더 둘 자리가 있을 텐데 나만 모르는게 아닐까? 그런 걱정은 필요가 없다. 361로에서 한 점도 늘지 않는다. 둘 자리는 갈수록 줄어든다. 길은 명백하다. 토너먼트는 올라갈수록 참가팀이 줄어든다. 인생의 선택지가 점점 줄어든다. 젊어서 폭 넓게 포석을 전개해두지 않으면 늙어서 코너에 몰린다. 그래서 진리인 것이다. 첫 한 점을 둘 때 신과 우주와 자연과 역사와 문명과 진보를 두루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361로의 점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어디로든 갈 수가 있다. 나만 모르는 감춰진 뒷길은 없다.


    우리는 진리에 의지할 수 있다. 진리는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다. 플라톤은 진리가 만약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하고 상상한 사람이다. 플라톤이 틀렸다. 진리는 대상화 되지 않는다. 진리는 주체인 나의 바깥에 타자로 존재하는 어떤 금덩이나 다이아몬드나 무엇이 아니다. 진리는 게임의 룰이고 게임은 상호작용이며 상호작용은 나의 바깥에 별도로 성립할 수 없다. 톱니는 맞물려 돌아야 한다. 내가 첫 한 점을 두면서 진리는 바로 반응해 온다. 플라톤은 게임이 일방작용이 아니라 상호작용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일방작용은 혼자 자위행위를 하듯이 맘대로 하는 것이다. 아뿔싸! 우주는, 문명은, 역사는, 인생은, 게임은 상대가 있다. 언제라도 파트너의 허락을 구해야 한다. 상대를 납득시켜야 한다. 톱니가 맞물려서 게임을 진행한다는게 진리다. 더 무엇을 구하리? 그것으로 충분하다. 인생의 허다한 실패가 자신이 선수이고 지금 시합이 진행 중이며 남들이 지켜보는 무대에서 한 곡조 뽑아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난다. 사람들은 나의 밖에서 무엇을 찾는다. 황금이든 다이아몬드든 뭐든 근사한 것이 저 멀리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없다. 내 연기와 받쳐주는 무대가 서로 호흡이 맞아야 한다.


    게임의 이해가 필요하다. 게임은 상호작용이다. 서로 맞물려 돌아간다. 진리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브라질 팀에 실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펠레와 가린샤가 뛰는 데도? 진리가 상대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한국팀이 운으로 월드컵 사강 올라갔다고 믿는 것이다. 게임은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므로 바로 알 수 있다. 진리는 있고 절대적이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면 바로 슛이 날아온다. 5 대 0의 참패를 면할 수 없다.


    진리는 우주와 역사와 문명과 진보와 자연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세트로 간다. 그냥 진리 한 단어를 쳐다보면 안 된다. 도로와 차와 바퀴는 뗄 수 없다. 차가 있다면 도로도 있고 바퀴도 있다. 우주가 있고 자연이 있고 문명이 있으면 진리도 있다. 게임이 있으면 그라운드도 있고 선수도 있고 심판도 있고 관중도 있다. 있을 것은 다 있다. 그런데 관념은 없다. 사랑이니 자유니 정의니 평등이니 평화니 하는 관념어은 바둑을 두는 도중에 일어나는 변화다. 그라운드와 선수와 심판과 관객과 축구공은 실제로 있고 절대적으로 있다. 패스와 드리블과 작전은 상대적으로 있다. 관념은 상대적인 존재다.


    바둑이 있고, 상호작용이 있고, 게임이 있고, 승부가 있고, 진리가 있고, 의사결정이 있다. 자유, 평등, 정의, 평화, 행복 따위 관념은 그 게임을 미사여구로 수식하는 것이다. 관념들도 써먹을 수는 있지만 대개 바둑 포석을 잘못해놓고 꼼수를 궁리하는 거다. 진지하게 바둑을 배우려는 사람은 정석에 치중한다.


    우주는 일방작용이 아니라 상호작용이다. 일방작용이 없다는 이유로 진리가 없다고 말하면 안 된다. 쌍방 중에서 일방만 보고 진리가 상대적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 부부는 실제로 존재한다. 집만 감시하면서 남편이 퇴근하면 부부가 있다고 하고 남편이 출근하면 부부가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사건이 아닌 사물을 보는 관점이다. 사건으로 보고 상호작용으로 보면 진리는 있고 절대적이다. 남편이 출근하고 없어도 부부관계는 그대로 유지된다. 관점을 바꿔야 한다.



    이론은 이론이다


    구조론은 이론이다. 우리는 이론 중심의 사유를 훈련해야 한다. 이론은 건조하다. 거기에 감정이 들어가면 안 된다. 구조론은 일원론인데 사람들은 다원론을 선호한다. 일원론이든 다원론이든 그냥 하나의 단어일 뿐이다. 특정 단어에 대한 호불호가 판단에 영향을 미치면 안 된다. 진지하지 않은 자세가 문제다.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배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식당에 가도 메뉴가 다양한게 좋더라. 옷장에는 옷이 많을수록 좋더라. 막연히 선택지가 다양하면 좋다고 여긴다. 과학은 냉정하다. 개인의 경험을 들이대면 피곤하다. 자신을 식당에 온 고객으로 착각하고 갑질을 시도한다면 번짓수를 잘못 짚은 것이다. 누구 마음대로 손님 포지션을 차지하는가? '다양한 메뉴로 나를 만족시켜봐.' 이러면 곤란하다. 거꾸로 당신이 요리사 입장이 되어야 한다. 하나뿐인 최고의 요리를 고객들에게 납득시켜야 한다. 이런 때 일원론이 요구된다.


    구조론은 의사결정이론이다. 의사결정권자는 언제라도 하나를 골라야 한다. 양다리 걸치기 안 된다. 의사결정은 전기회로와 같아서 이쪽을 연결하면 저쪽이 끊어진다. 스위치의 조작 횟수는 최소가 되어야 한다. 당신이 직원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회사의 사장이라면? 한 국가의 대통령이라면? 한 번의 명령으로 백만대군을 지휘해야 한다면? 일원론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포지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객석의 청중과 무대의 가수는 바라보는 방향이 다르다. 무대에 서려면 청중에 머물러 있을 때의 태도를 버려야 한다. 관점이 변한다. 갑을관계가 바뀌는 지점이 있다. 청중은 다양한 곡을 듣고 싶지만 가수는 한 곡이라도 제대로 불러야 한다. 생일을 맞은 아이는 다양한 선물을 받고 싶지만 아빠는 한 개의 선물을 골라야 한다. 자신을 선물 받는 어린이로 규정하고 혹은 객석의 청중으로 규정한 채로 '네가 나를 만족시켜 봐. 내가 평가해줄게.' 하는 태도라면 구조론을 배울 자격이 없다. 갑질하려는 자세를 버려라.


    애초에 어깃장을 놓겠다는 마음을 먹고 접근하는 사람이 다수다. 상대를 자극하여 반응을 끌어내려는 소인배의 관종본능 말이다. 무언가를 받는 사람이 아니라 무언가를 주는 사람이 구조론을 배운다. 입장바꿔 생각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지휘관의 명령이 어지러우면 병사가 헷갈린다. 지휘관은 일원론을 선호한다.


    읍참마속의 고사를 돌이켜 보자. 마속의 잘못도 있지만 제갈량이 장합의 빠른 기동을 예상하지 못하고 가정전투의 목적을 정확히 알려주지 않았다. 마속을 장기판의 말로 여기고 재량권을 주지 않은 것이다. 수비를 하라고 하니 고지식한 마속이 명령대로 수비를 하다가 망했다. 지형의 이용에 능한 장합이 경험이 부족한 마속을 잘 공략한 것이다. 삼국지연의는 마속이 제갈량 말을 안듣다가 망한 걸로 써놨지만 사실은 융통성 없이 제갈량이 시키는 일만 했다가 망했다. 현장은 변화무상하다. 천리 밖에서 시시콜콜한 명령을 내리면 안 된다. 의주로 도망친 선조가 이순신 장군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격이다.


    남북전쟁의 게티즈버그 전투도 같다. 리가 명령서를 너무 예의바르게 써서 망한 것이다. ‘반드시 고지를 점령하라’고 해야하는데 ‘가능하다면 점령하도록 하시게나’ 하고 점잖은 남부신사 문체로 쓴 결과로 멸망. 크림전쟁의 발라클라바 전투는 to 부정사와 점 하나를 잘못 찍어서 영국 경기병 여단이 전멸했다고. 역시 현장을 무시한 지휘부의 지나치게 세밀한 지시가 문제다. 대장은, 감독은, 지휘관은, 사장은, 대통령은, 보스는 일원론의 중요함을 안다. 다원필패 일원필승. 지휘계통을 일원화 시켜야 전쟁에 이긴다는건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독자들은 자신의 처지를 대입한다. 나는 평범한 서민이고 서민은 쪽수가 많으니 다원론이 우리편이라는 식이다. 단어에 집착하지 말고 이론을 보라. 이론은 포지셔닝 게임이다. 지도자는 한 명뿐이다. 여러분이 지도자가 아니라면 구조론을 배울 필요도 없다. 버스에는 운전사가 한 명이고, 전함에는 선장이 한 명이다. 당신이 선장이라면 일원론을 선호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느끼는 일원론이라는 단어는 독재자를 연상시키고 가부장을 연상시킨다. 그게 하지마라는 자기소개다. 당신이 아버지의 일원론에 시달리는 자식이고, 사장의 일원론에 고통받는 노동자라는 이유로 다원론을 선호하면 안 된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


    공격과 수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전쟁은 기본적으로 자기 진영에서 싸우는 수비가 유리하다. 공격이 유리하면 죄다 공격해서 수비가 유리한 지점까지 국경선이 확장된다. 수비가 유리한 지점에서 공격이 멈추므로 수비가 유리할 수밖에. 이것이 밸런스의 원리다. 수비가 유리하면 다들 수비만 하므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환경변화가 일어나면 그 변화가 공격무기가 되므로 변화를 선점한 쪽이 공격을 하는 것이다. 이윽고 국경선이 재조정된다. 공격의 이점이 사라진 지점에서 국경선이 새로 그어진다. 그러므로 자연의 어떤 상태는 수비가 유리할 확률이 높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밸런스의 개입이다. 보통은 관성의 법칙에 따라 자연의 밸런스가 판을 유지하려는 수비 편을 들기 때문에 현상이 유지된다. 왜 지구는 더 빨리 돌지 않는가? 왜 태양은 하루에 48시간씩 내려쬐지 않는가? 왜 토끼는 더 많은 새끼를 낳지 않는가? 왜 호랑이는 더 많은 사냥을 하지 않는가? 거기가 공세종말점이라서 거기서 공격이 돈좌되어 멈춘 것이다. 그 지점부터는 수비가 유리하므로 더 이상 공격을 못한다. 토끼는 한꺼번에 백 마리의 새끼를 낳지 못하고, 코로나19는 더 빨리 전파되지 못한다. 물고기는 백만 개의 알을 낳고 나무는 천만 개의 씨앗을 뿌린다. 생물은 최대한 공격한다. 그러다가 어떤 한계를 만나서 멈추게 되고 그 한계는 수비가 유리한 지점에 형성되기 마련이다. 그 선을 넘으면 수목한계선이다. 거기서는 생명이 살 수 없다. 이는 우주의 보편원리다.


    일원론과 다원론, 공격과 수비, 플러스와 마이너스는 그냥 단어다. 단어에 집착하면 안 된다. 단어는 상대적으로 혹은 절대적으로 사용된다. 맥락에 따라 다르다. 구조론은 진리를 논한다. 진리는 절대적이다. 상대적인 부분은 논외다. 진리는 죄다 연결된 상태이고 거기서는 오로지 마이너스만 가능하므로 일원론이 옳고 수비가 이긴다. 거기에 조절장치가 되는 밸런스가 있다. 밸런스는 한 방향으로만 작동한다. 더하고 빼면 되는데 빼기만 하고 더하지 않는다. 그 비밀을 아는게 중요하다.


    부하는 더하기도 하고 빼기도 하는데 상사는 빼기만 한다. 자식은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하는데 부모는 주기만 한다. 어장관리 할 때는 더하기도 하고 빼기도 하는데 결혼할 때는 파트너 하나 남기고 빼기만 한다. 결정적인 순간은 빼기만 한다. 그것이 의사결정의 원리다.


    더하고 빼는건 변화다. 일원과 다원은 변화를 반영한다. 공격과 수비는 변화다. 변화를 보지 말고 배후의 밸런스를 중심으로 사유해야 한다. 배의 바닥짐과 같은 것이 있어서 변화를 받아들이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변화를 차단한다. 바닥짐이 배를 흔들리게 하지만 동시에 보트의 전복을 막고 복원시킨다. 가끔은 그 밸런스가 움직인다. 환경변화가 일어날 때다. 그 때는 변화를 선점하는 쪽이 이긴다. 그때는 공격이 먹힌다. 징기스칸과 알렉산더가 그렇고 나폴레옹과 카이사르가 그렇다. 그들은 상대가 가지지 못한 것을 하나 더 가지고 있다. 게르만은 용맹했지만 보급부대가 없어 장기전을 수행할 수 없다. 로마군은 게르만이 갖지 못한 플러스알파를 가졌다.


    단어에 집착하면 안된다. 애플 에어팟이나 갤럭시 버즈나 비슷하지만 애플은 커다란 아이팟의 사이즈를 마이너스하여 작은 에어팟을 만들었고, 갤럭시 버즈는 그냥 애플이 하는 것을 따라했다는 점에서 플러스다. 겉보기로는 비슷하지만 잘 살펴보면 차이가 있다. 언제나 마이너스가 정답이다. 인간의 언어는 헷갈리지만 자연의 이론은 어김없이 적용된다. 배후에 숨은 게임의 밸런스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이론적 확신


    이론은 연역이다. 연역은 동어반복이므로 무조건 맞다. 1+2=3=4-1=5-2=6-3... 무한히 비틀 수 있지만 그래봤자 같은 3이다. 다만 이론을 말로 풀어내는 과정에서 말이 헷갈릴 수는 있다. 말을 잘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문장이 길어진다. 구조론의 제자라면 이론적 확신을 가져야 한다. 이론과 사실이 어긋나면? 갖다붙인 말을 의심해야 한다. 이론은 오류가 없다.


    밸런스의 복원력이 사건에 개입하므로 다른 조건이 대등할 때 환경이라는 플러스 알파를 이용하는 쪽이 유리하다는게 구조론이다. 그런데 문장이 길다. 일원론이 옳다거나, 수비가 이긴다거나, 마이너스라는 말은 문장을 짧게 하려고 직관적인 표현을 쓴 것이다. 적지에서 싸우는 공격보다 홈에서 싸우는 수비가 환경을 이용할 확률이 더 높다. 싸움은 기본적으로 수비가 유리하다. 그런데 길거리 싸움은 홈이 아니고 중립이다. 길거리 싸움은 기습이 허용되므로 선빵이 타이밍과 장소를 정하는 점에서 환경을 더 많이 이용한다. 이런 점 때문에 헷갈릴 수 있다. 전쟁도 단기전은 공격이 유리하다. 공격이 장소와 시간을 정하는 점에서 환경을 더 많이 이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통은 전쟁이 장기화 되고 결국 수비가 이긴다. 공격이 이기면 수비가 유리한 지점에서 국경선이 재조정되기 때문에 결국은 수비가 유리하다. 공격이나 수비라는 단어에 집착하지 말고 환경의 이용이라는 밸런스의 본질을 봐야 한다. 밸런스는 누구 편을 들겠는가? 밸런스는 밸런스 편을 든다. 밸런스의 관성력을 이용하는 자가 유리하다.


    바둑은 흑이 유리한가, 백이 유리한가? 당연히 흑이 유리하다. 이건 과학적으로 증명된다. 내가 아는 기원 형님은 백을 잡고 이기던데. 이런 소리 하면 안 된다. 실력이 대등한 두 사람이 덤 없이 대결하면 흑을 잡겠는가, 백을 잡겠는가? 당연히 흑을 잡아야 승률이 높다. 흑이 먼저 두므로 흑이 유리한 위치를 선점한 상태에서 백이 그 위치를 뺏으려고 공격을 한다. 흑이 먼저 두므로 공격 아닌가? 아니다. 빈 바둑판에 한 점을 두는 것은 공격이 아니다. 그 한 점을 잡으려는 백이 공격이다. 구조론에서는 구조론 용어로 받아들여야 한다.


    야구는 초 공격보다 말 공격이 유리하다. 9회 말에 상대의 점수를 보고 싸우기 때문이다. 축구는 홈팀이 유리하다. 그라운드에 물을 뿌리는 꼼수가 있기 때문이다. 홈 어드밴티지가 있다. 병법에 공성전은 공격측 병력이 수비측의 10배가 되어야 공격을 한다고 했다. 성벽이 아홉 사람 몫을 한다. 지형을 이용하는 수비가 이긴다.


    역사에는 공격측의 승리가 많이 기록되어 있다. 그건 구조론과 상관없는 결과론이다. 공격이 유리하면 다들 공격해서 전 세계가 다 한 나라로 통일되어 있지 않겠는가? 양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이유다. 과학의 발달로 신무기가 대거 등장했다. 기관총과 전투기다. 먼저 공격해야 살아남는다고 믿고 미친 듯이 공격을 했다. 수비가 유리하기 때문에 지구에 200개 국가가 남아있는 것이다. 그럼 중국은? 중국은 큰 산과 바다가 없어서 방어에 이용할 구조가 없다. 중국은 상대적으로 공격이 유리한 나라다. 오랑캐들에게 천 년 이상을 털렸다. 공격이 유리하면 나라가 합쳐져서 국가가 소멸하므로 공격할 수 없다. 방어가 유리한 지점에 국경이 만들어진다.


    섬나라는 공격이 유리하다. 방어하려면 도망가야 하는데 섬은 도망칠 곳이 없다. 영국이 쳐들어오면 아일랜드는 어디로 도망가서 방어하지? 역사기록에는 공격이 이길 때가 더 많다. 이길 자신이 있으니까 공격하지 질 것이 뻔한데 공격할 바보가 어디에 있나? 애초에 대등한 조건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나폴레옹과 알렉산더는 압도적인 실력이 있어서 공격한 것이다. 그런 능력자는 빼고 구조론은 실력이 대등한 상태에서 흑을 쥐느냐, 백을 쥐느냐다. 대등한 조건에서는 수비를 선택하는게 맞다. 포먼은 알리에게 졌고, 타이슨은 홀리필드에게 졌고, 파퀴아오는 메이웨더에게 졌고, 마빈 해글러도 슈거레이 레너드에게 깨졌다. 큰 경기는 수비 잘 하는 선수가 이긴다.


    창과 방패가 싸우면 창이 이긴다. 창은 창날의 힘 + 투창수의 팔힘이 얽히지만 방패는 방패수의 팔힘과 관계가 없다. 구조는 얽힘이므로 이 경우는 창이 구조다. 창이 공격이지 않은가? 창을 공격으로 단정하는 것은 일상의 경험이지 구조론이 아니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닭이 주변과 더 많이 얽혀 있다. 언제나 전체가 부분에 앞선다. 전체가 더 많이 얽혀있다.


    수부테이는 61번 공격을 해서 다 이겼다. 공격이 이기네? 수부테이와 수부테이가 붙는다면? 수비하는 수부테이가 이긴다. 단기전, 국지전, 제한전은 공격측이 날짜와 장소를 정하므로 유리하다. 그러나 날짜와 장소를 이용했으므로 환경을 더 많이 이용하는 쪽이 이긴다는 구조론의 본질을 어기지는 않는다. 장기전, 전면전, 총력전으로 흘러가면 수비측에서 환경을 이용할 확률이 더 높다. 중립지대에서 선빵이 이기는 것과 홈에서 수비가 이기는 것이 얼핏 모순처럼 보이지만 환경을 이용하여 써먹을 카드를 버는 점에서는 같은 원리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므로 공격측의 승리 위주로 역사를 기록하는데 따른 착시가 상당하다.



    언어의 문제


    문제는 언어다. 언어에는 관점이 있다. 관점의 문제는 원래 해결이 안 되는 문제다. 인류가 다 같이 한 자리에 모여 합의해야 할 판이다. 물론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면 문제를 우회할 수도 있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주관이냐 객관이냐다. 주체의 관점이냐 타자의 관점이냐다. 주는 쪽이냐 받는 쪽이냐다. 갑을관계가 있다. 대부분 관점의 혼란 때문에 논쟁이 길어지는 것이다. 주는 사람이 보는 공정과 받는 사람이 보는 공정은 다르다. 주는 사람은 공정한 기회를 주지만 받는 사람은 공정한 보상을 바란다.


    관점의 문제는 변화의 문제다. 변화의 문제는 사건의 문제다. 사건은 원인과 결과가 있고 전체와 부분이 있다. 우리는 어떤 둘을 동시에 추적하지 못한다. 엄마곰과 새끼곰이 흩어지면 사냥꾼은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사건은 변화를 일으키고 우리는 그 중에서 일부를 포기하게 된다. 오류가 일어나는 이유다.


    인간의 실패는 사건의 내막이 복잡한데 그것을 언어로 충분히 나타낼 수 없다는 언어적 한계에서 비롯된다. 말하기 쉬운 부분만 말하는게 언어의 병폐다. 구조론은 숨은 내막을 들추어 표현한다.


    언어의 걸림돌은 관점이다. 관측자와 관측대상이 있다. 둘이다. 벌써 헷갈린다. 하나는 쉽지만 둘은 동시에 추적하기 어렵다. 관측대상이 움직인다. 관측자도 움직인다. 관측대상과 그 움직임, 관측자와 그 움직임까지 넷을 동시에 추적해야 한다. 이를 추적하여 언어로 나타내기는 매우 어렵다. 움직임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관측할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다. 그것은 나란히 가는 것이다.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건의 밸런스다. 그것이 구조다. 사물은 움직이나 사건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추적할 수 있다.


    어떤 A와 그 변화에 연동되어 움직이는 대칭 B와 그 변화까지 통일하는 대칭의 밸런스 C와 그 변화를 안다면 한꺼번에 전부 추적할 수 있다. 사건을 통째로 감당할 수 있다. 진리의 스위치는 그곳에 위치해야 한다. 전부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변화를 일방작용으로 착각한다. 사실은 상호작용이다. 화살이 날아가는 것은 일방작용이다. 테니스공이 오고가며 랠리가 길게 이어지는 것은 상호작용이다. 공은 움직이나 랠리는 유지된다. 공을 추적하면 정신없지만 랠리를 추적하면 편하다. 랠리를 유지시키는 것은 밸런스다. 사건의 밸런스를 추적하면 2가 1로 환원되므로 간단하다. 복잡이 간단으로 정리된다.


    내가 공을 세게 치면 상대방도 세게 쳐서 랠리가 이어진다. 선수는 공을 네트 너머로 보내면서 다음에 어디로 날아올지 예측할 수 있다. 문제는 심판의 개입이다. 랠리가 길게 이어지지 않으면 게임이 재미가 없다. 주최측은 룰을 바꿔서라도 랠리가 이어지게 만든다. 우리가 그것을 알아야 한다. 랠리가 끊어지면 일방작용이고 랠리가 이어지면 상호작용이다. 세상은 작게 보면 일방작용이고 크게 보면 상호작용이다. 우리가 세상을 상호작용으로 보는 관점을 얻어야 한다. 그러려면 판을 키워야 한다. 개인전은 일방작용이고 단체전은 상호작용이다. 국지전, 제한전, 단기전은 일방작용이다. 전면전, 총력전, 장기전은 랠리가 길게 이어지는 상호작용이다.


    작게 보면 변화가 보이고 크게 보면 불변이 보인다. 우리는 보는 방법을 바꿔야 한다. 그것이 관점의 이동이다. 대동소이라 했다. 크게 보면 같고 작게 보면 다르다. 크게 같은 것은 연결이고 작게 다른 것은 단절이다. 연결로 보면 같고 단절로 보면 다르다. 연결은 도로이고 단절은 집이다. 도로는 같이 쓰고 집은 다른 집에 산다.


    연결은 마이너스를 하고 단절은 플러스를 한다. 연결되어 있으므로 마이너스를 할 뿐이고 단절되어 있으므로 플러스를 할 뿐이다. 단절이 무언가를 플러스 해봤자 상대가 맞대응 하므로 도로아미 타불이다. 상대가 대응하기 전까지 일시적 승리가 가능할 뿐이다. 반면 연결을 끊으면 사건이 영원히 종결된다. 플러스는 마이너스의 일부, 부분은 전체의 일부, 단절은 연결의 일부, 일방작용은 상호작용의 일부다.


    우리는 원인과 결과의 시간추적에 능할 뿐 전체와 부분의 공간추적을 못한다. 원인에서 뿌린 것은 결과에서 수확하고 전체에서 뿌린 것을 부분에서 수확한다. 상호작용은 사건 전체이고 일방작용은 한 쪽 부분이다. 둘이 맞물려 돌아가는 사건 전체를 보는 눈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언제나 전체가 먼저고 전체가 원인이고 전체가 앞서며 전체에 답이 있다.


    사건과 사물이 있다. 사물은 짧고 사건은 길다. 교통사고가 났다면 사물의 문제다. 자동차에 결함이 있다. 그런데 같은 장소에서 사고가 반복된다면? 그것은 사건의 문제다. 도로를 잘못 설계했다



    공간의 인과법칙 구조론


    근대과학의 궁극적인 비빌 언덕은 수학의 근거가 되는 인과율이다. 이 하나의 논리로 인류는 여기까지 온 것이다. 석가의 연기법과 같다.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 원인이 일어나면 결과가 일어난다. 그런데 다르다. 서양의 인과율은 시간의 선후를 따라간다. 원인이 먼저 가면 결과가 뒤따른다. 석가의 연기법은 공간의 인과율이다. 전체가 움직이면 부분에서 포착된다.


    통나무 둘을 서로 기대 놓았다 치자. 그 중에 하나를 빼면 다른 하나도 자빠진다. 건물의 아치구조에서 돌 하나를 빼면 전부 무너진다. 공간의 연기가 먼저다.


    부부 중에 한 사람이 죽으면 나머지 한 쪽도 과부나 홀아비가 된다. 나는 가만 있었는데 뭔가 변화가 일어났다. 내게는 원인이 없다. 아무 짓도 안 했다. 그런데 결과가 주어졌다. 자고 일어났더니 홀아비가 되어 있고 과부가 되어 있다. 이상하잖아. 서방이 죽고 아내가 죽은 것은 내가 한 짓이 아니다. 원인이 없는데 결과가 있다. 인과율이 틀렸잖아? 사실은 전체의 변화가 부분의 변화로 파급된 것이다. 서양수학과 근대과학은 이 부분을 놓치고 있다.


    부부는 둘이 서로 기대고 있다. 그런데 바람이 불어오므로 통나무 두개를 기댈 수는 없고 보통은 솥발처럼 셋을 기댄다. 소총을 세우더라도 삼각형 모양을 만들어야 바람이 불어도 쓰러지지 않는다. 사실은 중력이 있기 때문에 버티는 것이다. 중력까지 넷이네? 아니다. 지구가 받쳐주니 다섯이다. 우리는 보통 둘 사이를 바라보지만 부부가 둘이라도 주례가 있고 자녀가 있고 증인이 있다. 최소 다섯이라야 하나의 구조가 유지된다. 둘은 대칭이고 셋은 밸런스고 넷은 방향성이고 다섯은 기세다. 원인과 결과 둘로 설명하는 인과율을 질, 입자, 힘, 운동, 량 다섯으로 설명하는게 구조론이다.


    최종적으로 기세다. 플러스 알파다. 기세를 타야 도는 팽이가 자빠지지 않고 달리는 자전거가 쓰러지지 않는다. 인과는 둘이다. 둘로는 복잡한 세상을 설명할 수 없다. 사건은 포지션 다섯이 있다. 원인은 사건 전체에있고 닫힌계에 있다. 결과는 부분에서 나타난다. 공간의 전체에서 부분으로 관측자인 인간의 관점이 이동하는 것이 마이너스다.


    상호작용은 사실 이 다섯 포지션 전체가 동시에 작용하는 것이다. 전체에서 일어난 사건이 부분에서 포착된다. 우리는 드러난 부분을 본다. 그것을 일방작용으로 보는 것이다. 그 관점은 틀렸다. 부부가 다투어도 원인은 전체에 있다. 주변사람까지 포함한 전체에서 뭔가 끊어진 것이 부부 둘의 불화로 나타나는 것이다. 자녀가 없거나 시부모가 영향을 미치거나, 회사가 망했거나다.


    구조론은 공간의 인과율이다. 공간은 대칭과 밸런스의 삼각관계다. 축과 대칭으로 이루어진 의사결정구조에서 축이 이동하기 때문에 공간이 만들어진다. 그 축이 또다른 축에 꿰어져 있으므로 대칭의 날개가 타원궤도로 뛰쳐나갔다가 핼리혜성처럼 돌아오면서 공간을 연출한다. 여기에 시간의 전후를 더하면 구조론의 다섯 포지션이다.


    시간의 정체도 알 필요가 있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 시간 차가 있다. 그 시간은 뭘까? 누가 공간을 물으면 허공을 가리키면 된다. 시간을 질문하면? 시계나 달력을 보여주랴? 인류의 문명이 의외로 허술한 기반 위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과율은 사실 증명된게 아니고 경험칙이다. 시간은 관측자 개입이다. 원인과 결과 사이의 시간차는 그것을 관측자가 알아보는데 걸리는 시간이다. 로또 당첨은 마지막 공의 배출과 동시에 확정되지만 발표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아카데미 수상자는 결정되어 있는데 사회자는 괜히 시간을 끈다. 사건의 당사자는 구조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의사결정 자체는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공과 배트가 충돌했다. 배트가 밀려 파울인가, 공이 밀려 홈런인가? 맞는 순간 결정된다. 시청자가 알아채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시간은 관측자에 정보를 전달하는 시간이다.


    관측자가 반드시 외부에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랠리를 이어가는 내부의 상호작용 대상이 관측자다. 의사결정에 관여하는 것은 모두 관측자다.



    진리의 완전성


    근본적인 사유의 갈림길이 있다. 진리와 개소리가 가려지는 지점이다. 상호작용이냐 일방작용이냐다. 마이너스는 상호작용이고 플러스는 일방작용이다. 배구를 하는 두 팀이 랠리를 이어간다. 여기서 어떤 변화는 마이너스다. 랠리가 끊어지는 것이다. 랠리가 연결될 수는 없는가? 없다. 왜? 이미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게임은 동적상태이기 때문에.


    공중에 뜬 비행기와 같다. 거기서 어떤 변화는 추락이다. 물에 뜬 배와 같다. 거기서 어떤 변화는 침몰이다. 마이너스는 가능하고 플러스는 불가능이다. 죽은 3층석탑을 4층으로 증축할 수는 있다. 살아있는 사람의 다리를 하나 더 추가할 수는 없다. 반면 다리를 하나 자를 수는 있다. 존재는 게임이고 랠리가 이어지는 게임의 연결상태에서 뗄 수는 있고 붙일 수는 없다.


    진리는 연결된 상태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세계, 게임의 세계, 살아있는 세계, 동적환경의 세계이며 거기서 마이너스는 가능하지만 플러스는 불가능하다. 진리는 없다거나, 상대적이라거나, 있어도 알 수 없다거나 하는 다양한 개소리들. 무한동력부터 지구평면설, 음모론, 텔레파시, 외계인, UFO 등등 괴력난신의 공통점은 일방작용이라는 거다. 자유, 평등, 평화, 정의, 행복, 도덕, 윤리, 사랑 어쩌구 하는 허구적 관념들도 일방작용이다.


    게임은 상호작용이다. 상호작용은 마이너스다. 스타트를 알리는 총성이 울리면 선수들을 출발선에서 뛰쳐나간다. 이후 조금도 보태줄 수 없다. 방해할 수는 있다.


    모든 거짓의 공통점은 일방작용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뭔가 플러스 하는 것이다. 일방작용이면 내막을 들어볼 필요도 없다. 무조건 아웃이어야 한다. 물론 같은 말이라도 아는 사람이 하면 상호작용일 수 있다. 보통사람이 말하는 사랑은 일방적인 짝사랑이고, 예수의 사랑은 공자의 의리와 같은 상호작용 개념이다. 공자의 인의는 상호작용을 의미하지만 제자들은 그것을 일방작용으로 오독했다. 유교가 겉치레로 변질된 이유다.


    노와 돛은 일방작용이다. 배의 키는 상호작용이다. 키 하나로 배와 물을 동시에 통제하고 있다. 1로 2를 해결하기다. 배의 키는 물 A와 바람 B를 동시에 통제하는 C다. 삼각돛이나 쌍돛은 선원의 솜씨에 따라 상호작용을 해낸다.


    세상을 바라봄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시각교정이 필요하다. 세상을 상대가 있는 게임으로 보고 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봐야 한다. 세상을 노나 돛으로 보지 말고 키로 봐야 한다. 갤리선의 노는 많을수록 좋고, 범선의 돛은 클스록 좋다. 그게 플러스다. 아무리 큰 배도 키는 하나라야 한다. 마이너스다. 진리는 마이너스다.


    상호작용은 2다. 그 2가 공유하는 1을 포착해야 한다. 밸런스로 보고 조절장치로 보고 기세로 보고 플러스 알파로 보고 외부와 연결하는 촉수로 보고 거기서 자체 에너지를 가지고 능동적으로 말을 거는 구조를 찾아낼 수 있어야 완전하다. 여전히 세상을 일방작용으로 보고 있다면 소통은 불능이다.


    고대의 원자론과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헤겔의 변증법까지 죄다 일방작용 관점이다. 석가의 연기법은 상호작용의 맛을 살짝 본 셈이지만 더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이것과 저것 둘이다. 둘이면 부족하고 둘을 통일하는 하나의 밸런스를 찾아야 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둘이다. 둘 사이의 밸런스를 끌어내는 하나의 키를 찾아야 한다. 그것은 기세다. 플러스 알파다. 양의 피드백이다. 기세가 죽으면 밸런스가 깨지면서 이것과 저것이 따로 놀게 되어 망한다.



    고수와 하수


    권투를 한다면 상대의 주먹을 1센티 차이로 피하되 날아오는 펀치에서 눈을 떼지 말아야 한다. 상대의 주먹을 보고 눈으로 거리를 재고 신체의 밸런스를 통해 다음 동작을 읽어내므로 고수는 한 방도 맞지 않는다. 메이웨더 얼굴을 정통으로 때려먹은 선수는 아직 없다.


    미야모도 무사시와 대결하는 상대는 칼을 휘둘러보지도 못한다. 보통은 상대의 칼을 쳐내면서 거리를 조절하는데 미야모도 무사시는 스텝을 이용하여 암묵적으로 약속되는 칼치기 거리 안으로 불쑥 들어온다. 상대는 거리가 안 맞으니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치게 된다. 몰려서 엉덩방아를 찍는다. 칼날 한 번 못 부딪혀 보고 게임 아웃.


    권투에서 스텝을 쓰느냐 안 쓰느냐는 하늘과 땅 차이다. 권투의 반은 풋워크라는 말이 있다. 하수는 주먹으로 권투하고, 중수는 위빙을 써서 허리로 권투하고, 고수는 풋워크를 써서 발로 권투하고, 초고수는 거리를 재서 눈으로 권투한다. 최종보스는? 합기로 권투한다. 이건 단 한 사람 메이웨더만 할 수 있다.


    수준이 다르다. 영화에는 무사들이 칼값 비싼 줄 모르고 칼치기를 하고 있다. 실전에서 그렇게 하다가는 3분 만에 칼이 톱으로 변한다. 고수는 칼을 아끼므로 날을 부딪히지 않는다. 거리를 재서 칼을 휘두르는 반경 안으로 뚫고 들어가면 승부는 이미 끝이 나 있다.


    사유에 있어서도 프로와 아마의 차이는 크다. 사유는 1+2=3처럼 계산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세계다. 수학문제 풀듯이 공식에 빈 칸을 그려놓고 맞는 것을 채운다. 이것이 아는 사람의 사유법이다. 공식은 맞물려서 대칭을 이루는 A의 변화 + B의 변화는 둘이 공유하며 밸런스를 이루는 C의 변화다. 여기에 빈 칸을 채우면 된다.


    감정을 희롱하면서 그걸 사유로 착각하는 초딩들은 어른의 대화에 끼워줄 수가 없다. 그런 사람에게 죽음은 삶이 다하는 사건이 아니라 느낌이다. 어떻게든 뭔가 느껴먹으려고 용을 쓰는데 아주 생똥을 싸고 있다. 나이롱 불교신도 중에 많은데 깨달으려고 사유를 하는게 아니라 깨달음에 의해 얻어지는 무아지경을 느껴 보려고 용을 쓴다. 그 방법은 자기 신체의 학대다. 호흡을 멈춘다든가 음식을 끊는다든가 별짓을 다해서 임사체험을 해놓고 그걸 깨달음의 경지로 착각하는 거다. 질식상태나 죽음에 근접한 상태에서는 엔돌핀이 나오므로 우주와 내가 하나가 된 것 같은 무아지경을 본다. 사실은 뇌가 박살난 거다. 그럴 때 쾌감이 쏟아진다. 대마초 한 대 피우면 도달하는 경지를 얻으려고 10년 동안 토굴에서 면벽수행을 하다니. 어휴. 라즈니쉬는 그냥 LSD 먹으라고 권유한다. 어차피 그게 그거잖아. 뇌를 박살내는게 목적인데.


    사건으로 보면 진리에 의해 우주는 모두 연결되어 너도 없고 나도 없고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으며 있지도 않은 죽음에 관심을 둘 이유는 없으며 그걸로 고민한다는게 초딩인증이다. 감정의 희롱은 사유가 아니다. 구조론에서 쪽팔리게 어린이 행동 하지는 말자. 메이웨더라면 여전히 주먹으로 권투하는 초딩과 맞춰주고 싶겠냐? 메이웨더에게 배우러 왔으면 위빙과 스텝은 떼고 와야지. 타이슨과 파퀴아오는 발로 권투한다. 먼 거리에서 갑자기 불쑥 들어오는데 빠르다. 거리도 정확히 잰다. 메이웨더는 그 동작을 다 읽어낸다. 알리는 포먼의 호흡을 정확히 헤아리고 있다.


    호랑이나 사자는 눈을 가늘게 뜬다. 동공이 커지면 상대의 동작을 읽을 수 없다. 상대의 신체가 졸라맨으로 보여야 한다. 애초에 보는 방법이 다르다는 말이다. 눈동자 크기가 다르다. 상대의 동작을 볼 뿐 아니라 자기동작과의 합까지 같이 봐야 한다. 메이웨더는 합기도식 권투를 하고 있다.


    죽음의 공포란 본능이 인간을 부려먹는 기술일 뿐, 거꾸로 삶이 빈곤한 자가 말을 돌려서 하는 것이다. 머리에 힘 주고 앉아있으면서 그걸 명상이라고 착각하고 뭔가를 느껴보려고 용을 쓰는 자는 어른들의 판에 끼워줄 수 없다. 생각을 좀 잘하자.



    진리의 의미


    사건은 맞물려 돌아간다. 그러므로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 우주가 있으면 내가 있다. 우주와 내가 있으면 둘을 중재하는 진리도 있다. 심판이 있으면 게임은 있다. 게임이 있으면 선수도 있다. 심판은 있는데 게임은 없거나 게임은 있는데 선수가 없을 수는 없다. 주체가 있으면 대상이 있고 주체와 대상의 상호작용이 있으면 사건이 있다. 셋은 동시에 성립하고 동시에 사라진다.


    주체, 관측자 – 인간, 문명, 역사, 진보 

    대상, 관측대상 – 신, 우주, 자연, 진리 

    사건 - 상호작용, 밸런스, 기세, 방향성


    사건은 상호작용의 주체와 대상이 있다. 인간과 신의 상호작용에, 문명과 우주의 밸런스가, 역사와 자연의 기세로 나타남이 진보와 진리의 방향성이다. 이들은 하나의 사건을 구성하는 다양한 측면이다. 인간의 드러남이 진보라면 신의 드러남이 진리다. 왜 진리는 드러나는가? 들여다보므로 드러난다. 개나 소는 우주를 들여다보지 않으므로 진리가 없다. 오직 인간에게 진리가 있다.


    눈을 감고 있으면 드러나지 않는다. 자신이 눈을 감았다는 생각을 못하고 진리가 드러나지 않는다고 남탓을 한다. 이제는 그 감은 눈을 뜰 때이다.


    진리가 있다는 것의 의미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명백하다는 거다. 상대가 있는 게임이다. 농구선수는 그물에 넣으면 된다. 배구선수는 공을 네트 너머로 보내면 되고, 야구선수는 공을 외야로 날려보내면 된다. 진리가 없다면 랠리의 연결도 없다. 허공에 붕 뜬다. 개울에서 물장구를 치며 노는데 발이 땅에 닿지 않으면 불안하다. 사차원의 문에 끼면 골치가 아프다. 여우가 둔갑하고, 귀신이 환생하고, 텔레파시에 음모론에 웜홀에 힘들다. 손톱 속에 또 다른 우주가 있을지도 모른다. 국정원이 내 귀에 도청장치를 설치했다.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진리가 있으면 모두 연결되어 있으므로 바로 반응이 온다. 동떨어진 얄궂은 공간은 없다. 텔레파시도 사차원도 외계인도 둔갑술도 타임머신도 없다. 걱정할 이유가 없다. 눈앞의 적만 해치워라. 내 할 일만 하면 된다. 왜? 인간과 신이 핑퐁을 하고, 문명과 우주가 게임을 벌이고, 역사와 자연이 기세를 올리고, 진보와 진리의 방향성이 있기 때문이다. 톱니가 빈틈없이 맞물려 돌아간다는 말이다. 랠리가 이어지는 중에 외부의 것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날아가는 비행기에, 항해하는 배에 개입할 수 없다.


    상호작용에는 상대가 있으므로 꼬리가 길어서 밟힌다. 혼자라면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지만 무대에는 청중이 지켜보고 감독과 코치가 뒤를 받쳐주고 손에는 대본이 있고 연기에는 파트너가 있으니 흐름에 맡기면 해결된다. 그 받쳐주는 상대에 의해 걸러진다.


    자동차가 있으면 바퀴도 있고 엔진도 있고 도로도 있고 주유소도 있고 자동차 회사도 있다. 그 긴 꼬리들에 의해 걸러진다. 전기가 있으면 전봇대도 있어야 하고 변전소도 있어야 하고 전구도 있어야 한다. 도로도 없는데 자동차가 몰래 숨어서 오거나 하는거 없다. 전봇대도 없는데 전기가 몰래 숨어서 기어들어 오는 일은 없다. 구조론으로 보면 하나가 있으면 다섯이 있고 하나가 움직이면 다섯이 다섯 번 움직여 25개가 변한다. 25개나 되는 거미줄의 그물코에 걸려서 들통이 난다. 최대 3125개까지 그물코가 늘어난다.


    텔레파시든 사차원이든 음모론이든 외계인이든 괴력난신이든 혼자 조용하게 숨어들어오지 못하고 패거리를 몰고 시끄럽게 몰려오므로 들통이 나는 것이다. 팽팽하게 진행되는 게임에서 선수는 잠시도 한눈을 팔 수 없다. 우주는 절대로 한눈을 파는 일이 없다. 자연은 한눈을 팔지 않는다. 진리는 빈틈이 없다. 동떨어진 뭔가는 없다. 바늘 하나 꽂을 틈이 없다. 핑퐁의 랠리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상호작용의 톱니가 맞물리기 때문이다. 우주는 아름답다. 그 긴밀한 맞물림을 이용하여 하나를 보면 천리 앞을 내다볼 수 있다. 멋지잖아.



    생각을 잘 하자


    사유를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은 사건을 따라가야 한다. 사건은 연결을 따라간다. 인간의 사유도 사건의 연결을 따라가야 한다. 눈 앞에 연결과 단절이 있다면 그 중에서 연결을 선택하기를 반복하면 된다. 마침내 사건의 출발점에 이른다. 찾아야 할 사건의 실마리는 그곳에 있다.


    선택지는 연결과 단절 뿐이다. 단절은 배제한다. 그쪽은 쳐다보지도 말자. 연결이 남는다. 찜한다. 이 패턴을 반복하면 된다. 그런데 인간들은 단절을 선택한다. 관점이 틀어져 있다. 관측자 포지션이 관점이다. 사건은 시간좌표의 원인에서 결과로 가고, 공간좌표의 전체에서 부분으로 간다. 연결에서 단절로 가는 것이다. 원인을 공략하고 전체를 다루고 연결을 추적해야 한다. 그곳에 플러스 알파가 되는 기세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대로 간다.


    연결은 원인이고 단절은 결과인데 인간이 사건을 인지했을 때는 시간이 흘러서 관측자가 단절 포지션에 가 있다. 자연스럽게 눈 앞에 보이는 단절을 선택한다. 연결은 흘러간 과거로 은폐된다. 연결은 전체이고 단절은 부분인데 인간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부분으로 간다. 전체는 버겁고 부분은 만만하기 때문이다. 버거운 몸통보다는 만만한 귀퉁이를 손으로 잡는다. 공략하기 쉬운대로 하므로 실패한다. 보이지 않는 배후의 밸런스가 불쑥 나타나서 성과를 틀어버린다.


    우리가 파헤쳐야 하는 대상은 사건이다. 사건에는 기세가 걸려 있다. 톱니가 맞물려 있다. 상호작용의 랠리가 기세를 만든다. 기세에 의해 공간은 좁혀지고 시간은 압박한다. 인간들은 암시에 걸린다. 무의식이 작동하고 호르몬이 가세한다. 현장의 흐름과 기세와 분위기와 바람잡이에 홀리고, 몰리고, 휩쓸리고, 흥분해서 결국 미끼를 물고 낚이는 것이다.


    기세의 압박에 초조해져서 눈앞의 단절을 선택하므로 실패한다. 이성을 회복하고 냉정하게 연결을 선택해야 한다. 경쟁자들은 보나마나 기세에 홀리고 밸런스에 되통수 맞아 코너에 몰릴 것이므로 차분하게 반대로 기동하여 연결을 선택하면 그 판을 독식할 수 있다. 남들이 어떻게 실패하는지를 잘 관찰했다가 반대로 가면 된다. 대부분 흐름을 따라간다. 역으로 찔러야 한다.


    형사가 범인을 추리해도 연결을 찾는다. 범인과 피해자가 흉기로 연결되는 점을 이용하는게 알리바이다. 어떻게든 사건은 연결된다. 형사는 담배꽁초에 묻은 타액을 단서로 추리한다. 연결, 연결, 연결을 추적하여 범인을 잡아낸다. 일본말로 '겐또' 짚는게 문제다. 넘겨짚기다. 연결되지 않고 건너 뛴다. 단계를 빠뜨린다. 톱니가 맞물리지 않는다. 상호작용이 아닌 일방작용이다. 사소한 일은 넘겨짚기가 먹힌다. 일상은 반복되기 때문이다. 경험칙이 있다. 여러 번 가 본 길이다. 그러나 과학을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 과학은 처음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익숙한 분야에서 먹히는 넘겨짚기 수법을 과학이라는 생소한 분야에 적용하므로 실패하는 것이다.


    세상은 연결 아니면 단절이다. 연결만 선택하라. 50 퍼센트 먹고 들어간다. 남들이 단절을 선택하므로 상대적인 이익을 챙긴다. 단절을 선택하는 이유는 기세 때문이다. 밸런스가 개입하여 뒤통수를 친다. 계에는 에너지가 걸려 있다. 정신없다. 공간으로 좁혀오고 시간의 초읽기로 압박한다. 홀리고 낚여서 차분하게 생각할 수 없다. 말단부로 도망치다가 코너에 몰려서 잡힌다. 그럴수록 역으로 찔러서 사건이 연결되는 중심부로 쳐들어가야 한다. 찾아야 할 등잔 밑은 그곳에 있다.


    사건은 원인에서 결과로, 전체에서 부분으로, 연결에서 단절로 간다. 우리는 사건의 흐름에 휩쓸린다. 수학문제 풀듯이 차분히 풀면 된다. 모르는 부분은 미지수 X로 비워놓았다가 빈 칸을 채워넣으면 된다. 논리의 비약을 저지르는 사람은 넘겨짚는다. 사건의 빠른 진행이 인간으로 하여금 생각을 못하도록 압박하므로 생각을 하지 않는다. 늑대에 쫓기는 사슴처럼 직진만 선택한다. 넘겨짚기는 책임을 떠넘기는 비겁한 행동이다. 아무나 하나 찍어서 네가 범인이지 하고 윽박지르면 상대가 변명하는 과정에서 혹시 괜찮은 단서가 나올까 싶어서 상대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로또 긁는 것과 같다. 운으로 해결하려는 철부지 행동이다.


[레벨:4]고향은

2021.10.01 (13:47:03)

"의사결정의 중심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의사결정의 중심은
원圓의 구심력과 같다는 생각이다
어떤 일의 구심력은 그 일의 얼굴이다

얼굴은 "이건 아니라고 봐! 아닌 건 아닌겨!"
가 의미하는 보편성을 상징한다

구심력과 숫자많은 원심력들이
맞물려서 나란히 가려면
먼저, 서로 간에 희롱이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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