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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5718 vote 0 2013.04.12 (23:34:54)

 

    생각하는 방법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가장 중요한 지식이 생각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생각은 그냥 하는 것이 아니고 공식에 대입하여 문제를 푸는 것이다. 종이에 순서대로 써놓고 빈 칸을 채우면 된다.


    공식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황당한 것은 국어교과서다. ‘나, 너, 우리, 우리나라, 대한민국’ 이런 것이 왜 국어교과서 첫 페이지에 나오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아무거나 두서없이 써놓은 거다. 국어는 언어다. 언어는 말이다. 말은 생각에서 나온다. 생각하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는데 언어가 무슨 소용인가? 인문학은 생각학이다. 인문학의 기본은 언어다.


    언어는 표면이고 이면은 생각이다. 국어수업에서 생각하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 생각에 대해서는 여러 명상법이 주장되나 대개 봉건적이다. 불교의 사마타, 위빠사나, 간화선을 참고할 수 있다.


    ● 자기 ↑
    ◎ 수행.. 염불, 기도, 수피즘, 요가 등 육체의 행동을 수반하는 명상법.
    ◎ 사마타.. 하나의 대상에 정신을 집중하는 명상법.
    ◎ 위빠사나.. 자신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관찰하는 명상법.
    ◎ 간화선.. 화두를 들고 타파하는 명상법.
    ◎ 직관.. 구조의 모형을 사용하는 명상법.
    ● 타자 ↓


    다섯째의 직관은 필자가 주장하는 것이고 첫번째 수행은 여러 종교에서 주장하는 일체의 단순반복적인 육체적 행동이다. 수행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거짓이므로 명명하기 곤란해서 둘러댄 거다.


    수행이라는 단어에 구체성이 없다는데 주목해야 한다. 명상을 표방하지만 흉내일 뿐이다. 명상하는 시늉을 하는 여러가지 괴이한 행위들에 수행이라는 변명이 붙는다. 주어가 생략된 개념이다.


    수행(修行)은 닦음이다. 그런데 뭘 닦지? 주어가 없다. 거짓은 대개 이런 식이다. 무엇을 닦는가? 나를 닦는다. 대개 자기 자신을 어떻게 해보려고 한다. 어리석은 짓이다. 자기에 붙잡인 것이다.


    이 다섯가지 명상법의 구분기준은 주관이냐 객관이냐다. 주관을 극복하고 객관으로 나아가야 한다. 주관은 자신의 에고에 붙잡힌 바 되기 때문이다. 사마타 역시 자기 자신에게 붙잡혀 있다.


    수행하지 않는 것에서 진정한 명상은 시작된다. 자기로부터 떠나는 지점에서 진짜는 시작된다. 위빠사나는 자기를 관찰한다. 그런데 자기를 관찰하려면 자기 바깥에서 자기를 바라보아야 한다.


    객관화 해야 위빠사나는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위빠사나는 진정한 명상의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여전히 자기에 붙잡혀 있다. 이걸로는 충분하지 않다. 간화선은 확실히 자기를 떠나 있다.


    객관성을 획득하고 있다. 그러나 모형이 없으므로 실제로는 그냥 머리에 힘 주고 있는 거다. 간화선에서 제시하는 화두들은 직관적 모형의 단서가 있다. 그러나 단지 단서가 주어질 뿐이다.


    이 방법은 우연히 성공될 확률이 있으나 과학적이지 않다. 명상은 자기를 배제하기다. 그 자리에 모형이 들어어야 한다. 모형은 구조론이 제시한다. 자연의 패턴을 관찰해서 모형을 얻는다.


    초등학생의 일기쓰기에 비유할 수 있다. 초등학생은 무의식적으로 일기의 첫줄을 ‘나는 오늘..’이라고 쓰고 만다. 에고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숨은 전제 때문이다.


    ◎ 명제 : 전제 + 진술


    명제는 전제와 진술로 조직된다. 전제를 다른 사람이 제시하고 자신이 진술하는 입장에 서기 때문이다. 죽 누가 자신에게 ‘너 오늘 뭐했니?’ 라고 질문하면 그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인 거다.


    일기를 쓰는 초딩은 ‘나 오늘 뭐했자?’ 하고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 대답을 일기로 쓴다. 잘못되고 만다. 질문자의 의도에 갇혀버린다. 사고의 폭은 좁아지고 만다. 천편일률이 된다.


    ◎ 전제 – 타자 : ‘너 오늘 뭐했니?’
    ◎ 진술 – 자기 : ‘나는 오늘 놀이터에서 놀았다.’


    정신차려! 아무도 당신에게 묻지 않았다. 누가 물어봤냐고? 대답은 필요없다. 이렇듯 포지션이 멍청해져버리면 끝장이 나고 만다. 깨달음은 이러한 무의식의 잘못된 포지셔닝을 깨뜨린다.


    일기를 쓰려면 자신이 능동적으로 질문해야 한다. 문제를 해결하지 말고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내야 한다. 타자의 시선에 답하는 포지션, 문제를 해결하는 포지션에 서는 즉 잘못되고 만다.


    예컨대 남자가 여자친구와 피자집에 간 풍경이라면 어떨까? ‘피자 먹을래?’ ‘아냐 다이어트 해야 해.’ ‘그럼 간단한 셀러드로 할까?’ ‘셀러드는 싫은데.’ 인터넷에 널리 알려진 장면이다.


    여기서 숨은 전제는 남자가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는 거다. 누가 문제 냈냐고? 남자는 얼른 피자든 뭐든 주문해야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다. 틀렸다. 분위기를 즐기고 대화를 즐겨야 한다.


    남자는 얼른 피자를 주문해서 그 상황의 뻘쭘함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며 그 자체로 실패다. 포지셔닝이 잘못된 것이다. 피자집에 가서 앉아있는 자신의 포즈가 어색한 것이다.


    남자는 위기탈출을 궁리하고 있다. 도망치려고 한다. 왜 도망치려 하지?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나? 왜 그 공간을 누리지 않나? 왜 대화를 즐기지 않지? 주인이 아닌 객의 포지션이다.


    마치 남의 집에 온 사람처럼 안절부절이다. 도시에 처음 온 시골촌놈의 표정이다. 편안하지가 않다. 그 남자의 연애는 실패다. 먼저 그 공간을 장악해야 한다. 그 공기를 데워야 한다.


    언어는 전제와 진술의 구조로 세팅된다.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자기를 진술자의 포지션에 둔다. 실패다. 그런 식으로는 그 공간에 가득찬 공기의 온도를 올릴 수 없다. 긴밀해질 수 없다.


    참된 명상은 자기를 벗어나는 것이며, 진술자의 포지션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 공간이 자기집처럼 편안해야 한다. 그 공간을 즐겨야 한다. 손님이 아닌 주인의 포지션에 서야 한다.


    그 공간과 일체가 되어야 한다. 그럴 때 직관의 모형이 얻어진다. 진정으로 명상할 수 있다. 그 공간을 연주할 수 있다. 그 공간을 그려낼 수 있다. 그 공간을 필름에 담아낼 수 있다.


    바른 생각의 방법은 모형을 사용하는 것이다. 먼저 모형을 얻어야 한다. 모형은 자연의 패턴을 관찰하여 획득한다. 자연에는 인간도 포함된다. 쉽게는 언어에서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


    언어는 완전하다. 완전해야 소통되기 때문이다. 물론 언어는 확실히 불완전하고 그 만큼 소통은 실패다. 그러나 조금 소통된다. 조금 완전하다. 충분하지 않으나 소통된 만큼은 완전하다.


    수학으로 접근할 수 있다. 3=2+1이다. 보통 1+2=3이라고 하지만 이는 플러스적 사고다. 구조론은 마이너스이므로 큰 숫자가 앞에 온다. 모형은 연역이고 연역은 전체가 앞서기 때문이다.


    ◎ 3=2+1
    ◎ 새는 난다.


    여기서 여러분은 위화감을 느껴야 한다. 뭔가 아귀가 맞지 않다. 3은 무겁고 2는 가볍다. 그러므로 +1로 균형을 이룬다. 새는 무겁고 난다는 가볍다. 새는 몸통이 있고 날개도 있다.


    ◎ 3=2+1
    ◎ 새는 난다. + 하늘을


    난다는 날개만 있다. 양쪽의 균형이 맞지 않다. 저울이 기울었다. 바로잡아야 한다. 이에 하늘을 투입한다. ‘새는 : 하늘을 난다.’ 이제 균형이 맞아졌다. 이건 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냥 느낌이 들어온다. 충일감이다. 가득 채워지는 느낌, 떳떳한 느낌, 당당한 느낌이 들면 맞는 거다. 허전하면 틀린 거다. 여기까지는 초딩이고 중딩이 되면 비례식을 쓴다. 수는 비례다.


    ◎ 1 : 2 = 2 : 4
    ◎ 새가 날면 밤이 떨어진다.


    1 : 2 = 2 : 4다. ‘새가 날면 밤이 떨어진다.’ 전제와 진술로 세팅되어 명제의 형식이 갖추어졌다. 이 명제가 사실 맞는지 틀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포메이션을 갖추는게 중요하다.


    전제와 진술이 갖추어지면 된다. 그러나 아직 부족하다. 여전히 아래쪽이 허전하다. 꽉 차는 느낌을 얻으려면 괄호가 있어야 한다. 명제로는 부족하고 담론의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


    ◎ ( 1 : 2 = 2 : 4 )
    ◎ 새가 날면 밤이 떨어진다. 왜냐하면 까마귀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가 갖추면 담론이 이루어진다. 명제는 누군가의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이다. 혹은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형식이다. 이때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있다. 포지션이 나누어졌다.


    실패다. 역할이 나누어지면 곤란하다. 무의식적으로 대본을 읽게 된다. 역할극에서 벗어나야 한다. 명제로는 안 되고 담론의 형식을 갖추어져야 한다.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어야 한다.


    인간을 배제하고 언어는 언어 그 자체의 완전성으로 무위자연하여 나아가야 한다. 결따라 가면서 언어가 언어를 복제하고 인간은 다만 보고할 뿐이다. 이 구조 안에 완전성의 모형이 있다.


    완전성의 모형을 미리 세팅해놓고 빈 칸에 채워야 한다. 새가 들어갈 자리에 수달이나 담비를 넣어도 된다. 담비가 뛰면 호두가 떨어진다. 반드시 구색을 맞추어야 하나의 견해가 된다.


    그냥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식의 진술은 필요없다. 누가 물어봤냐고? 결코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말라. 객관화 하라. 당신의 의견은 필요없고 전제와 진술의 갖추어진 명제가 필요하다.


    ◎ 반응하기.. 위화감 느끼기, 하나가 된 느낌, 충일감 느끼기
    ◎ 대칭찾기.. 선악, 상하, 정사, 진위, 등 대칭구조 세팅하기
    ◎ 올라서기.. 층위발견, 상부구조, 의하여, 입체적 사고, 상호작용
    ◎ 일의성 찾기.. 에너지와 의미 태우기, 결정하기, 한줄에 꿰기
    ◎ 모형화하기.. 관점찾기, 객관화 하기, 비유하기. 메커니즘


    완전성의 모형에 도달하기까지 생각을 집적하는 과정은 다섯 단계를 거친다. 반응하기≫대칭찾기≫올라서기≫일의성찾기≫모형화 하기다. 이렇게 얻은 모형을 대상에 적용하여 풀어낸다.


    먼저 자연의 숨은 패턴에 반응하고, 다음 거기서 짝지어진 대칭을 찾고, 상부구조로 올라서고, 전체를 한 줄에 꿰는 일의성을 찾고, 마지막으로 이를 모형화 하면 생각의 툴은 완성된다.


    그렇게 획득된 생각의 툴에 적용하여 빈 칸을 채우면 된다. 수학문제 풀 듯 문제를 대입하여 풀어내는 것이다. 이때 생각은 포드시스템으로 대량생산된다. 자기 안에 생각공장 짓기다.


    먼저 반응하기다. 무엇보다 자연의 패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특히 초등학교의 인성교육은 반응성 교육이 중요하다. 문제풀이 위주의 교육은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문제를 풀어서 없애지 말고 반응하여 문제를 생산해야 한다. 섬세함으로 무장하고 문제가 아닌 것을 새롭게 문제삼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이는 세상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태도의 문제다.


    누군가 길거리에서 동물을 때리고 있다면 그것은 문제일까? 뭐 대수랴 하고 그냥 지나가면 그만이지만 그 사람의 반응성이 떨어진다. 생각하는 힘은 졸아들고 만다. 점차 바보가 된다.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결코 동물학대를 좌시하지 말아야 한다. 분노할 일에 분노해야 한다. 어색한 일에 어색해해야 한다. 자연의 미세한 차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아이가 천재다.


    반응은 실로 포지션에 반응하는 것이다. 어색함, 부자연스러움을 찾아내는 것이다. 어색할 때와 자연스러울 때의 차이를 기억해야 한다. 그 안에 숨은 모형이 있다. 주어진 포지션이 있다.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어색함을 피해서 보이지 않는 연극을 한다. 까뮈의 이방인에 묘사되어 있다. 남편역할, 아내역할, 부모역할, 선배역할, 후배역할로 우스꽝스런 연극에 동참한다.


    역할극은 어리광이다. 아기는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어도 선생님이 꾸짖으면 억울해 한다. 잘못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선생님은 당연히 내편이어야 한다는 포지셔닝의 설정 때문이다.


    무의식적인 포지셔닝은 모두 아기의 어리광이 발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를 강자로 설정하고 자신을 약자로 설정한다. 따라서 상대는 추궁하는 자가 되고 자신은 진술하는 자가 된다.


    명제를 구성하는 전제와 진술의 구조에서 타자가 전제를 맡고 나는 진술을 맡는 것이다. 실패다. 내 생각은 이렇다고 들이댄다면 우습다. 내 생각을 말하지 말라. 그 공간의 생각을 말하라.


    찻집에 왔다면 찻집이 자신의 마음에 드는가를 말하지 말고 내가 그 찻집에 어울리는 포즈인가를 판단하라. 등산을 한다면 내 마음에 드는 옷이 아니라 산에 어울리는 옷을 입어야 한다.


    그 공간과 친해야 한다. 그 공간이 편안해야 한다. 그 공간이 자신의 신체 일부로 여겨져야 한다. 그럴 때 그대는 자연스러워진다. 떳떳해진다. 그렇게 되도록 자기를 확장시켜야 한다.


    반면 어리광에 빠져서 자신을 해치려는 자로 타자를 규정하고, 수동적으로 방어하려 하며, 상대의 말에 반박하려고 하면, 응수하려 하면, 피해자 코스프레를 시작하면 비참해지고 만다.


    선문답을 논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질문에 답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하고 운을 띄우면 당연히 운에 맞는 시구가 나와줘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답하려 한다. 혹은 반론하려 한다. 응수하려 한다. 이기려고 한다. 이기려고 하는 이유는 자신이 졌다고 믿기 때문이다. 응수하려고 하는 이유는 자신이 공격당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미 포지션에 갇힌 것이다. 깨뜨려야 한다. 어리광에서 벗어나야 한다. 누가 물어보지 않았는데도 ‘난 이렇게 생각해.’ 하며 상대방의 전제에 맞추어 자신의 진술을 들이대면 곤란하다.


    상대와 자신이 주거니 받거니로 가면 곤란하다. 자기 언어로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질문하는 자가 되고 스스로 노래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맞서지 말고 조율해야 한다.


    반응함으로써 가능하다. 반응하는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스스로 이야기를 갖추지 못하고 따라서 상대방의 선창에 후창하게 된다. 어리광에 빠진다. 역할극에 갇힌다. 끌려다닌다.


    반응할 때 비로소 자기 이야기를 생산할 수 있다. 남의 말에 반론하지 않고 먼저 말을 꺼낼 수 있다. 어리광을 극복할 수 있다. 문제를 생산할 수 있다. 센세이션을 일으킬 수 있다.


    반응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발언권이 없다. 발언권이 없으니 침묵한다. 공기가 어색하다. 무리하게 역할극을 한다. 전제도 없는데 진술을 한다. 공격하지 않았는데도 혼자 피해자인척 한다.


    북한이 남침하려 하고 있다고 외치는 수구꼴통처럼, 미제가 침략하려 하고 있다고 외치는 북한처럼, 가상적을 만들고, 마녀를 생산하고 피해자를 자처하며 울부짖고 있다. 인간의 비참이다.


    반응했다면 대칭을 찾아야 한다. 대칭찾기는 동양인들에게 익숙한 것이다. 한자어에는 음양, 선악, 상하, 좌우, 정사, 조종, 길흉, 진위, 귀천 등 수백개의 대칭을 나타내는 단어가 있다.


    조사해보면 일천개가 넘을지도 모른다. 어떤 위화감을 느꼈을 때는 그 구조 안에서 대칭을 찾아야 한다. 희와 비, 행과 불행, 애와 증, 우와 열, 너와 나, 여당과 야당의 대립구도가 있다.


    먼저 자연의 숨은 패턴을 찾아 반응하고 그 구조 안에서 대립구도를 찾아 그 대칭의 긴장상태를 포착해야 한다. 공기의 떨림이 있다. 예리하게 반응하는 반응점이 있다. 모형이 있다.


    술자리 모임이 뭔가 어색하고 부자연스럽다면 그 안에 신입과 고참, 선배와 후배, 우리학교와 다른 학교, 젊은이와 노인네, 깡패와 신사, 음치와 가수, 친구와 낯선 이 등의 형태로 대칭이 있다.


    팽팽하게 긴장된 현이 작동하고 있으며 건드리면 소리가 난다. 잘못되면 싸움난다. 기어코 일은 터지고 만다. 생각의 첫 단추는 그 긴장된 공기에 반응하는 것이며 다음은 대칭 찾아내기다.


    대칭을 찾았다면 올라서야 한다. 대칭은 수평의 선 구조에 교착된다. 수직의 입체로 올라서는 것이다. 수평에서 마주보고 교착된 것은 수직에서 층위를 나누는 방법으로 타개할 수 있다.


    뭔가 대칭되어 긴장된 채 갈등하고 있다면 반드시 그것을 해소하는 층위가 있다. 상부구조로 올라서면 문제가 해소된다. 예컨대 남녀가 백화점을 들렀다고 치자. 이미 남자는 긴장해 있다.


    여자가 ‘이 옷 어때?’ 하고 물으면 남자는 난감해진다. ‘넌 너무 뚱뚱해서 그 옷이 몸에 맞지 않아.’ 하고 진실을 말했다가는 재난을 면할 수 없다. 이때 곤란해진 남자의 정답은 무엇일까?


    올라서야 한다. 올라서기의 명수는 유재석과 강호동이다. 그들은 강력한 리액션으로 난국을 타개한다. 정답은 호들갑스러운 감탄사다. 그것은 그 공간의 공기를 데워 온도를 올리는 것이다.


    여자가 옷에 대해서 질문했다고 해서 남자가 고지식하게 옷에 대해서 대답하면 곤란하다. 옷의 문제가 아니다. 그 쇼핑이 즐거운 추억이 되게 하는게 중요하다. 답은 적절한 포지셔닝이다.


    치어리더가 되어야 한다. 격려하고 응원해야 한다. 문제된 사실을 떠나 그 공간을 장악하고 그 공간의 주인이 되어 그 공간을 편안해 하고 그 공간에 활기를 채우는 것이 올라서기다.


    이 방법으로 거의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문제는 사실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의 위태로움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옷이야 어떻든 그것이 인간을 해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문제가 있다면 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당신이 잘못된 공간에 가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우주의 주인이 될때 모든 문제는 해소된다. 문제는 상호작용의 과정에서 절로 용해되어 사라진다.


    올라서기는 내용에서 형식으로, 진술에서 전제로, 답찾기에서 문제찾기로, 너와 나에서 우리편으로, 결과에서 원인으로, 끝에서 시작으로 올라서는 것이다. 새로운 게임을 설계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제 일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거짓이다. 사실은 내일의 계획이 없기 때문이다. 기승전결의 기에 서지 않은 때문이다. 잘못된 과거가 아니라 부실한 미래가 문제다.


    올라서는 방법으로 미래를 설계하고, 문제를 제시하고, 능동적으로 사건의 원인이 될 때 둘 사이에 새로운 설레임이 일어나고, 흥미가 살아나고, 신뢰가 굳건해지고 사랑이 무르익는다.


    둘 사이의 공간이 똘망똘망해진다. 공간의 밀도가 높아진다. 관계는 견고해진다. 문제는 스스로 퇴장한다. 어떤 일의 시작단계, 설레이는 첫 만남의 단계를 유지하는 것이 올라서기다.


    올라섰다면 전체를 한 줄에 꿰어야 한다. 일의성 찾기는 돌아가는 판구조 전체를 한 줄에 꿰어내는 끈 혹은 코어 찾다. 자연에서는 에너지가 꿰어낸다. 인문에서는 의사결정이 꿰어낸다.


    에너지는 낙차를 따라가고 의사결정은 편의를 따라간다. 의사결정이 에너지다. 인간은 대개 결정하기 편한 것을 결정한다. 가장 결정하기 편한 것은 결정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이다.


    결정오류는 시행착오에 따른 오류시정으로 극복된다. 문제는 결정회피다. 이는 의사결정 스트레스 때문이다. 의사결정 스트레스는 공동체의 밀도가 낮아 관계의 긴밀함이 떨어질 때 일어난다.


    아프리카의 부족민 사회는 국가가 덜 만들어져 있다. 족장은 권한이 없고 원로는 힘이 없고 가부장은 가족을 통제하지 못한다. 가족과 부족과 국가가 전체적으로 덜 긴밀하게 구성되어 있다.


    둘 사이를 메우는 공간의 온도가 낮은 것이다. 이에 서로 쭈볏해지고 어색해지고 부자연스러워진다. 말 걸기가 사납다. 중국의 거리에서 사고로 아이가 죽어있어도 외면하듯이 모른체 한다.


    공간의 밀도가 떨어지는 바 덜 구축된 사회에서는 남의 일에 개입하여 판단하고 결정하기가 어렵다. 의사결정 스트레스다. 이때 공동체는 아무런 의사결정을 하지 않는 방향으로 세팅된다.


    실로 인간사회에서 제반 시스템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의사결정 스트레스를 어떻게 회피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권위주의가 대표적이다. 권위주의는 의사결정을 위임한다.


    위정자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방법으로 의사결정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남북한 수구꼴통의 전쟁책동도 그러하다. 무언가 적극적으로 판단하고 생각하고 결정하기가 싫은 것이다.


    그들은 복잡한 상황을 단순화 시키려고 한다. 쉬운 방법은 누군가를 마녀로 몰아 희생시키고 배제하고 금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문제해결이 아니라 눈을 감고 문제를 밖으로 밀어내려 한다.


    자연에서 모든 것은 에너지의 결을 따르고 인문에서 모든 것은 의사결정의 결을 따른다는 본질을 알면 문제는 쉽게 풀린다. 공간의 구조를 의사결정하기 좋은 구조로 세팅하면 풀린다.


    경마장에서 돈을 잃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기는 말에 베팅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결정공식에 베팅하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우수한 말에 베팅하여 돈을 따는 것이 정석이다. 그런데 아니다.


    꿈 속에서 본 숫자에 베팅하여 돈을 따는게 더 결정하기 편하다. 설사 우수한 말에 베팅해서 돈을 땄다고 해봤자 다음 번 경주에서 다시 우수한 말을 찾으려면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결국 자기와의 싸움이다. 대개 자기에게 스트레스가 아닌 상을 주는 결정을 내린다. 점괘가 좋게 나온 말에 베팅하여 돈을 땄다면 다음 번에도 점괘로 쉽게 결정할 수 있다. 돈을 잃는다.


    정치가들도 이 방법을 써야 한다. 대중이 판단하고 결정하기 쉬운 의제를 던져주면 대중은 일제히 그 방향으로 몰려간다. 특히 진보정치인은 대중의 이러한 속성을 새겨두어야 한다.


    정치가는 자신이 합리적인 판단을 할 것이 아니라 대중이 합리적인 판단을 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그러나 진보정치인은 대중이 헷갈려 하는 애매모호한 의제를 던져서 스트레스를 준다.


    이는 자기의 스트레스를 대중에게 토스한 바 비겁한 행위다. 자신이 능동적으로 결정해야 하고 대중으로부터 의사결정의 권한을 위임받아야 한다. 자신이 스트레스를 감당해야 한다.


    그러나 안철수처럼 헷갈리는 행보로 ‘대중이 결정해주면 나는 따를께.’ 하는 식의 소극적인 정치에 함몰된다. 정치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이에 따른 우선순위 결정의 문제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가 아니라 무엇을 먼저하고 나중할 것이냐다. 이 순서를 잘 세팅하는 방법으로 대중의 의사결정 스트레스를 감소시키면 정친는 순탄해진다. 노무현의 정치가 그렇다.


    조직이 의사결정하기 쉬운 구조를 만들어내면 그 조직은 매우 탄탄해진다. 그러나 함부로 의사결정의 편의를 쫓다가 유치해지고 만다. 어려운 결정을 과감하게 해낼 수 있어야 한다.


    고도로 손발을 맞춘 패스축구를 하면 시합 중에 많은 결정들이 가능해진다. 뻥축구는 의사결정의 회피다. 팀플레이는 의사결정능력을 향상시킨다. 단독드리블은 의사결정능력을 떨어뜨린다.


    진보는 팀플레이에 치중하다가 패스가 엇나가서 망하고 보수는 단독드리블로 관중을 열광시키지만 안드로메다슛으로 나라를 거덜낸다. 의사결정을 용이하게 하려면 매뉴얼이 필요하다.


    약속플레이를 해야 한다. 팀 케미스트리를 높여야 한다. 마지막 단계의 모형화 하기는 이러한 전개과정 전체를 하나의 형태로 세팅하는 것이다. 모형은 미리 갖추어야 한다. 객관화로 가능하다.


    메커니즘에 태우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만유인력의 법칙이다. 개별적인 사안들을 통합적으로 풀어낸다. 여러개의 고철들을 하나의 용광로에 집어넣어 한꺼번에 일괄타결한다.


    이게 이렇게 되면 저게 저렇게 된다는 상호작용의 구조를 갖추는 방법으로 가능하다. 대개 그 구조가 바깥에 잇다. 바깥에서 상대가 어떻게 하는지를 봐가면서 자기 행동을 결정한다.


    상대의 행동에 따라 응수하려는 것은 에고에 사로잡힌 것이며 자기를 전제가 아닌 진술의 포지션에 두는 것이며 어리광이다. 메커니즘은 객관화 하는 것이다. 포지션을 갖지 않는 것이다.


    내용이 아닌 형식, 사실이 아닌 포지션, 말이 아닌 공간을 바라보는 것이다. 상대방의 말을 귀담아 듣지 말고 너와 내가 함께 앉아있는 공간에 밀접해야 한다. 서로 긴밀해야 한다.


    밀도를 끌어올려야 한다. 공간이 후끈 달아올라야 한다. 그럴 때 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 그림이라면 관점이 있다. 소실점이 있고 원근법이 있다. 이는 객관화 하기로 가능하다.


    자신이 그림 바깥에 있고, 사건 바깥에 있고, 무대 바깥에 있어야 한다. 그라운드 바깥의 감독처럼 자신을 게임에서 배제해야 한다. 자신이 자신을 포함한 우주 전체의 밖에서 대결해야 한다.


    사건에 개입하면 곤란하다. 세상은 너와 나가 아니다. 나와 나를 포함한 우주 전체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다섯 단계를 하나의 메커니즘으로 모형화 할 때 생각공장은 갖춰진다.


    모형화에 성공했다면 그 다음은 분류하기다. 모형의 빈 칸에 채워넣는 것이다. 공장에서 생각을 포드시스템으로 생산할 수 있다. 모형은 간단히 선악, 흑백과 같은 이분법 모형이 있다.


    이는 유치한 단계이다. 일단 이 모형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자기편과 적을 구분해야 한다. 다음은 셋으로 나누어야 한다. 서구에는 삼위일체 사상이 있고 동양에는 천지인 사상이 있다.


    3위일체 모형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상호작용관계로 본다. 신은 인간에게 성경책을 주고 약속을 한 다음 떠나간 것이 아니라 현재 부단히 소통하고 있다. 즉 과정의 문제로 보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 상호작용을 끼워넣어 포지션을 셋으로 설정했다. 이는 흑백논리의 교착을 타개한다. 천지인 사상 역시 같은 개념이다. 헤겔의 변증법이나 석가의 인연-연기 개념도 같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 중간과정을 끼워넣어 양자를 통합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 피자가 좋은지 혹은 저 피자가 좋은지는 두 피자를 비교하여 판단한다면 흑백논리의 관점이다.


    3위일체 3단모형으로 보면 그 공간의 밀도를 판단하여 결정한다. 이때 2에서 3으로 올라선다. 봄에는 꽃과 어울리는 옷이 좋고, 여름에는 초록색 수목이나 푸른 바다와 어울리는 옷이 좋다.


    가을에는 단풍과 어울려야 하고 겨울에는 흰 눈과 어울려야 한다. 둘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제 3의 공간과 비교하여 판단한다. 이러한 3단모형으로 보면 흑백논리의 교착은 타개된다.


    어른과 아이가 같이 잘못했을 때는 아이가 옳다. 정부와 노동자가 같이 잘못했을 때는 노동자가 옳다. 공간에 가까운 쪽이 이긴다. 둘 다 점수가 같을 때는 보훈대상자가 합격한다.


    남자와 여자가 같이 잘못했을 때는 힘센 남자가 잘못이다. 힘을 가진 쪽이 힘을 제어할 부담을 지기 때문이다. 부자와 빈자가 대립할 때는 빈자가 우선이다. 모든 문제에 답이 있다.


    다음은 사건의 기승전결 네 단계로 전개시켜 보는 것이다. 이때 사실이 아니라 사건이라는 관점이 중요하다. 그 안을 에너지가 관통하고 있다. 에너지의 결 중심으로 판단하여야 한다.


    세(勢), 법(法), 술(術)의 원칙이 있다. 합법칙성이나 실용성을 후순위로 되고 기세를 앞세우는 것이 기승전결의 관점이다. 합법칙성이나 실용성은 사건이 충분히 전개되었을 때 대두된다.


    아직 사건이 무르익지 않았는데 법대로 하자거나 혹은 실용적으로 하자는 식은 곤란하다. 어린이는 아직 인생이라는 사건이 무르익지 않았다. 어린이에게 실용주의 교육은 곤란하다.


    법치주의 교육도 곤란하다. 어린이는 시작단계이므로 기세가 중요하다. 꿈이 중요하고 이상주의가 중요하고 친구가 중요하다. 법대로 원칙대로는 그 다음이며 실용주의는 노인에게 필요하다.


    일의 진행단계에 따라 다른 전략을 적용하는 것이 기승전결의 4단모형이다. 기승전결은 원형이정에서 나왔고 원형이정은 봄여름가을겨울에서 나왔고 이는 인의예지 사단과 통한다.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은 태양이라는 하나의 에너지에서 비롯된다. 반드시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가 있다. 인문은 주로 의사결정능력이라는 하나의 에너지에 의하여 전부 결정된다.


    남녀관계라도 어떤 남자 혹은 어떤 여자를 선택하는가는 지속적인 의사결정이 가능한가로 결정된다. 물론 여기에는 매력이나 금력이나 신분이 포함된다. 어떻든 결론은 결정가능성이다.


    매력이든 지위든 금력이든 의사결정을 돕는 것이며 지속적인 의사결정에 의해 남녀관계는 유지된다. 나쁜남자 신드롬도 이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나쁜남자는 뭐든 빠르게 결정을 내린다.


    이때 여자는 일단 결정과정을 지켜보자는 심리가 된다. 다음 단계를 기대한다. 홀리고 만다. 아무런 결정을 못할 때, 결정할 전망이 없을 때 답답해지고 그때의 결정은 현장이탈이다.


    관계는 실패로 된다. 이는 정치나 경제라도 이는 마찬가지다. 옳고 그르고 간에 아무 것도 결정할 수 없는 민주당 상태가 가장 나쁘다. 물론 진보당은 더 결정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당의 여러 부분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만 아무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서로 눈치만 보고 있다. 그 결과는 끝없는 분열이다. 그들은 옳다/그르다 뒤로 숨지만 본질은 무능이다.


    당원이 열명만 되어도 열가지 의견으로 갈라져서 결정은 하나도 못하고 토론만 계속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의사결정을 가능하게 하는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다. 자체동력의 부재다.


    보수는 돈으로 에너지를 삼으니 돈의 서열에 따라 쉽게 결정한다. 진보는 신뢰를 에너지로 삼아야 하는데 지식을 에너지로 삼으니 누구 지식이 맞는 지식인지 판단을 못해 결정은 실패다.


    김대중, 노무현은 꾸준히 신뢰를 쌓아왔기 때문에 결정할 수 있는 구조를 세팅하는데 성공했다. 유시민은 신뢰를 쌓지 못했고 문재인은 시간이 없었다. 안철수는 꼼수정치로 신뢰를 잃었다.


    구조론은 기승전결의 사단에 에너지를 태워 오단으로 완성한 것이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모형에 사건을 대입하면 분류가 이루어진다. 이때 생각은 대량생산된다. 길어졌으므로 줄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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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은 자연에 가득차 있습니다. 빨대 꽂고 쪽쪽 빨아먹으면 됩니다. 문제는 자연과 친해지느냐입니다. 자연의 목소리를 들어내느냐입니다. 반응하는 힘을 키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반응하는 교육을 해야 합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27]오리

2013.04.13 (00:07:13)

이거 참 공짜로 알기가 미안하군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3.04.13 (01:20:48)

그럼....
오백원~.....
ㅋㅋ...^^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3.04.13 (01:31:15)

● 자기

◎ 수행.. 염불, 기도, 수피즘, 요가 등 육체의 행동 을 수반하는 명상법.
◎ 사마타.. 하나의 대상에 정신을 집중하는 명상 법.
◎ 위빠사나.. 자신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관찰하는 명상법.
◎ 간화선.. 화두를 들고 타파하는 명상법. ◎ 직관.. 구조의 모형을 사용하는 명상법. ● 타자 ↓


.................
실로.... 위의 오단계로 보자면....
저 단계를 다 거쳐 온듯...

수행이라는 단계는...그저 보통 사람들의 생각과 같은 것이고. 그런 반면에 편하면서도 가장 막연한 상태.
사마타... 이때쯤 되면 뭔가 좀 인식하는 단계. 앎의 기쁨을 느낌.
위빠사나... 자신에 대해 안다는 것. 객관화 시킨다는 것. 그러나 더이상 관계를 도약시키지는 못함. 알면서도 괴로운 상태라 해야 하나...
간화선... 뭔가를 알지만, 파워가 없음.
직관.... 늘어 벌려진 것을 쌓을 수 있음. 정리가 되어짐. 명쾌해짐.

이 오단계를 따지자면 누구나 겪는 단계이자 겪을 수 있는 단계라고 보임. 그리고 겪으려면 직관까지 와야 한다고 보임.
우울함을 이겨낼 진짜 힘은 직관.
프로필 이미지 [레벨:11]까뮈

2013.04.13 (09:48:37)

종합선물셋트를 받았네요.

힘차게 주말 시작합시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9]무득

2013.04.13 (10:06:22)

님들은 좋겠습니다.

저는 알듯 말듯합니다.

한가지 예를 들었으면 지속적으로 벗어나지 않아야 이해도 있을 텐데

계속 다른 예가 등장하여 촛점을 흐리고 있다고 느껴지네요.

이것도 제가 아직 부족해서겠지요?

매번 글을 읽을 때마다 초보자가 느끼는 감정입니다.

일관성이 있는 것 같으나 두렷함이 없고

핵심이 있는 것 같으나 내용이 없고

논리적이나 앞뒤를 모르겠고.  ㅠㅠㅠㅠ

 

생각하는 방법을 읽고 나니 생각이 복잡해 집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3.04.13 (10:40:42)

한 문장도 아니고 한 단어로 충분한 것을

500쪽짜리 푸짐한 단행본 한 권으로 써서 내는게 보통이지요.

 

그거 읽고 만족하는 사람은 많이 봤지만

그거 읽고 무언가 얻었다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이곳은 연구소입니다.

같이 연구하는 포지션이 아니라

 

소비하는 포지션이 되면 곤란합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11]까뮈

2013.04.13 (15:05:32)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에 대입하면서 구조론을 보면 조금씩 보입니다.걱정 마세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9]무득

2013.04.13 (22:28:22)

부분적으로는 이해가 되는데 전체적 개념이 잘 잡히지 않아서요.

물론 그렇다고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나 정확한 개념이 잡혀야 응용이 되는데

몇번을 읽어도 알듯 말듯해서요.  스스로에게 답답함을 느낍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3.04.14 (00:35:59)

지난 시간들 동안 겪어본 감정. 그런데도 설명하기 애매함.

연역과 귀납이 혼재된 글. 그런데 이런 글을 읽어내고 머리속에 드는 느낌을 잡아채야 하는데, 흩어져 있어서 어려움을 느끼는 것. 이렇게 연역과 귀납이 혼재된 글, 즉 상부구조와 하부구조가 혼재된 글은 읽는 훈련도 필요 하다는 생각.
[레벨:3]낙오자

2013.04.14 (13:07:35)

인간의 모든 비참과 비극은 가짜에 의존하기 때문.

그렇다면 가짜를 버리고 진짜를 찾으면 된다. 진짜는, 일단 신이라 부르자.

 

신을 어떻게 만날 수 있나?

신을 만나는 방법을 알려주마!

 

역대 최다 합격생 배출=불교 ; 수험생 백만 명 중 한 명 꼴로 성공...........앓느니 죽지.

 

구조론이 이 난국을 타파해 갈 수 있을런지!

프로필 이미지 [레벨:18]차우

2013.04.14 (22:12:14)

질문입니다.

 

  어른과 아이가 같이 잘못했을 때는 아이가 옳다. 정부와 노동자가 같이 잘못했을 때는 노동자가 옳다. 공간에 가까운 쪽이 이긴다. 둘 다 점수가 같을 때는 보훈대상자가 합격한다.


여기서 공간에 가깝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공간에 밀접한사람, 공간과 긴밀한 사람을 말하는 것 같긴한데, 

단순히 상대적 약자를 공간과 가깝다고 표현하시는 것 같지는 않고요,

예전에 말씀하셨던 약한고리가 떠오르긴 하는데 진도가 안나갑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실 수 없는지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6]id: 15門15門

2013.04.14 (23:23:49)

댓글을 보고 생각해보니 저역시도 궁금하네요. 

저같은 경우는 카나리아를 예를 들어 생각했었는데 탄광 속 공기가

오염되었다는 사실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카나리아고 이 카나리아의

죽음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그래서 약하다는 것은 환경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다는 맥락이고

환경에 민감하다는 것은 그만큼 그 공간과 가까운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에

이르렀죠. 그래서 카나리아처럼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존재를

동렬님이 천재라고 부르는 것은 아닐까 제 나름대로 정리라고 해보았더랬습니다.


저도 모르게 당연하구나 여기는 부분에서 민감하게 반응하시는 차우님이

어쩌면 카나리아처럼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존재가 아닐지 생각이 드네요.


차우님을 통해 저도 그 질문에 답을 알고 싶은 1인으로 줄을 서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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