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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0186 vote 0 2013.05.28 (00:50:35)

     고쳐쓰면서 추가한 자투리글들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이 무슨 뜻일까? 명사들의 아포리즘에는 사실이지 내부에 심오한 뜻이 있는게 아니라 외부에 폭넓은 반응이 있는 것이다. 주목해야 할 포인트는 안이 아니라 밖이다.

 

    데카르트의 이 말이 세상과 격렬하게 반응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세상의 어떤 급소를 친 것이다. 어느 지점이 반응했을까? 존재다. 중요한건 포지션이다. 데카르트가 존재를 언급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존재야말로 모든 인문학적 사유의 출발점이다.


    사유한다는 것은 판단한다는 것이다. 인문학은 사유의 결과인 판단에 맞추어 자신의 행동을 결정한다. 인문학은 한 마디로 의사결정학이라 하겠다. 결정을 이끌어내는 판단의 단위가 존재다. 숫자는 1부터 시작된다. 계산에 있어서는 1의 확정이 중요하고 나머지 2, 3, 4, 5.....는 일사천리로 전개된다. 1이 사과냐 복숭아냐 ,혹은 1킬로그램이냐 1톤이냐를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작이 반이 아니라 99퍼센트다.


    오래도록 물질은 원자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되었다. 원자가 1이다. 근래에는 소립자가 발견되고 더 나아가 소립자 이전의 존재가 거론됨에 따라 원자가 1의 포지션에서 내려왔지만 어쨌든 어떤 일의 시작점을 찍어주는 1의 포지션 지정이 가장 중요하다. 그림이면 소실점이 있다. 소실점이 1이다. 악보라면 음표가 있다. 음표 하나가 1이다.


    데카르트는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것’을 찾았다. 물질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고 여겨졌다. 그렇다. 데카르트는 원자론의 개념을 차용한 것이다. 그런데 원자도 쪼개지고 소립자도 쪼개진다. 쪼개지지 않는 최후의 단계는 규명되지 않았다. 그것은 원래 없는지도 모른다. 자연수는 1로부터 시작된다. 1 이하는 없다. 원자론은 숫자 1의 개념을 차용한 것이다.


    ◎ 데카르트의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것.
    ◎ 원자의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성질.
    ◎ 자연수 1의 더 이상 조깰 수 없는 성질.


    쪼갤 수 없다는 개념은 이상하다. 1도 쪼개면 쪼개진다. 숫자가 자연수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2는 1의 반복이다. 사건에서 원자의 역할을 하는 것은 반복의 단위다. 반복의 단위를 찾아야 진짜다. 데카르트는 판단의 1 단위를 찾으려 했던 것이다. 그것은 존재다.


    숫자는 1이 반복의 단위고, 문자는 자字가 반복의 단위고, 책은 권이 반복의 단위고, 음악은 곡이 반복의 단위고, 그림은 점點이 반복의 단위고, 음식은 끼가 반복의 단위다. 배추면 포기가 있고, 열무면 단이 있고, 바둑은 국局, 스포츠는 시합, 컴퓨터는 1 byte, 삶은 평생이 단위를 이룬다. 단위를 지정하는데서 인문학적 사유는 시작된다.


    ◎ 존재는 판단의 최소단위다.


    문제는 존재가 사건이냐 사물이냐다. 우리는 무심코 사물을 존재로 치지만 실제로는 사건이 존재다. 한 채의 집이 있다면 그것을 사물이라 할 수 있다. 집 앞에 집을 한 채 더 지으면 그 사이에 골목길이 생긴다. 문제는 집을 지었을 뿐 골목길을 짓지 않았다는데 있다. 골목길은 저절로 생겨난다.


    남자와 여자가 있다면 둘 사이에 사랑이 생겨난다. 축구선수가 모이면 시합이 생겨나고, 바둑기사가 모이면 대국이 생겨나고, 국가가 모이면 그 사이에 국경선이 생겨난다. 존재를 사물로 보는 관점은 존재의 이러한 측면을 담아낼 수 없다. 이는 인식의 오류이다. 존재는 사물이 아닌 사건이다. 사건은 여러 가지 작은 판단들이 결집하여 마침내 완성된 형체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판단들을 연결할 의미가 필요하다. 인문학은 그 의미를 추적한다. 그리고 독립적인 의사결정을 통해 하나의 사건을 완성시킨다.


    ◎ 존재는 사물이 아닌 사건이다.


    인문학의 이해는 사건의 의미를 찾아내는데 있다. 문제는 사람들이 사건 안에서 답을 찾으려 한다는데 있다. 그럴수록 주의는 사건이 아닌 사물에게로 향한다. 축구시합을 이해하려 한다면 주최측을 봐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축구공만 쳐다보고 있다. 바깥이 아닌 안을 보고 있다. UEFA 챔피언스리그에는 총 6억달러 가까운 상금이 걸려있다. 마케팅이익 분배금을 포함하면 총상금 규모는 10억달러를 넘어간다. 바깥을 보는 것이 맥락이다.


    사건은 기승전결로 전개된다. 기起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보통은 결結을 바라본다. ‘그래서? 결론이 뭐야?’ 하고 다그치는 식이다. ‘참가하는데 의의가 있다’고 둘러대지만 반응은 시큰둥하다. ‘참가해서 뭘해? 우승컵을 따야지.’ 하는 식이다. 어쨌거나 주최측 입장으로 보면 실력있는 팀이라면 한 팀이라도 더 참가시켜야 흥행을 보장할 수 있다. 맥락이 중요하다. 맥락은 의미에 선행한다. 바깥쪽의 맥락을 알면 안쪽의 의미는 자연히 알게 된다.


    ###


    ◎ 바른 사유≫합리적인 의사결정≫가치창출≫힘의 통제≫미美의 완성


    인문학은 사유하여 의사결정을 하며 최종적으로 가치를 창출한다. 사유의 대상은 존재다. 존재라는 첫 단추를 잘 꿰면 나머지는 일사천리로 전개된다. 존재에 대한 대응은 의사결정이다. 바른 사유에 따른 합리적인 의사결정으로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인문학의 목적이다. 그 가치로 힘을 통제할 수 있으며 그 결과는 미의 완성으로 나타난다. 인문학의 가치로 자연의 힘을 적절히 다스리면 세상은 그만큼 아름다워진다.


    물고기는 물의 흐름이라는 힘을 통제한 결과 몸매가 미끈해졌다. 새는 공기의 흐름이라는 힘을 통제한 결과 아름다워졌다. 포유류들은 짝짓기 과정에서 사랑이라는 힘을 통제한 결과 성선택에 의해 아름다워졌다. 물론 바다 밑바닥에 붙어 있는 아귀들은 힘을 통제하지 않으므로 얼굴이 못생겼다. 깜깜한 동굴속에 은둔하는 박쥐들도 힘을 통제하지 않으므로 생김새가 못생겼다. 깡패들이나 수구꼴통들도 힘을 통제하기는커녕 거꾸로 힘을 과시하므로 못생겨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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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답다는 것은 어떤 힘을 가진 대상이 적절히 통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연은 대칭을 통해 힘을 통제합니다. 그러므로 자연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기본적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람의 얼굴과 몸도 두 눈과 두 귀와 두 팔다리가 대칭되어 있습니다. 대칭을 이루려면 평등해야 합니다. 남녀 사이에, 노소 사이에, 여야 사이에, 노사 사이에 불균형이 일어나서 그 대칭이 붕괴되면 세상은 그만큼 추해집니다. 지성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일베충이 됩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3.05.28 (01:35:14)

멋진글....
이걸 알아야 사유함네 글을씀네 존재 함네 사랑함네... 뭐좀한다 함네...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레벨:1]까치산

2013.05.28 (17:41:31)

데카르트

그냥 do와 be의 관계 말한 것

굳이 존재를 be라 하자면 do라는 사건을 통해서 확인?되니까

 

데카르트야 밥먹고 하는 일이 생각이니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일 뿐...머 생각이 특별히 중요한게 아니고...

 

I DO(뭐가 됬든) SO I BE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3.05.28 (17:51:49)

그것을 하나의 명사로 조직하기 전에는 아는 척 하면 안 되죠.

발언권이 없습니다,.

둘 다.

 

be가 do를 담보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그림자처럼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마는 것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전형적인 귀납적 사고의 병폐.

데카르트는 걍 헛소리고 사람들이 데카르트의 헛소리에 반응한 이유는

 

일상의 경험에 따른 직관 때문입니다.

모르긴 해도 무언가 있다는 거죠.

  

 

데카르트가 말한 생각한다존재한다의 연결에는 엮임에 의한 일의성이 담보되어 있지 않다. 세상에는 그림자나 신기루와 같은 불완전한 존재들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빛은 입자가 있지만 어둠은 입자가 없다. 그러므로 날이 어두워졌다고 해서 어둠의 존재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둠은 빛의 부재를 나타낸다. 존재는 어디까지나 빛이지 어둠이 아니다. 데카르트의 명제는 오류이며 사람들이 데카르트의 명제에 반응한 것은 엮임에 의한 일의성 때문이고 우리는 데카르트의 명제에서 직관적으로 일의적인 존재의 모형을 꿰뚫어볼 수 있다. 어둠은 없어도 빛은 있다. 데카르트의 명제는 불완전하나 그 불완전성 조차도 완전성의 존재라는 전제 하에 성립한다. 완전성은 반복에서 찾아진다. 사건event은 주사위를 1회 던지는 것이다. 주사위는 반복하여 던져진다. 반복의 단위가 판단의 단위다. 데카르트는 판단의 1 단위를 찾으려 했다. 그것은 존재다. 생각하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기를 반복하므로 그 반복의 단위가 존재한다. 

[레벨:1]까치산

2013.05.29 (17:34:40)

빛은 입자가 있지만 어둠은 입자가 없다 그래서 빛이 존재고 어둠은 존재가 아니다?

뭐 그렇게 존재를 정의한다면 더 할 말이 없고요

 

굳이 구조론 용어 좀 빌리면 존재자가 아닌 존재 그 자체는 질이어서 입자가 아니고

 

예를 들어 천지창조시 빛이 있다는 명제를 좀 건드리면

1.최초의 빛이 존재할 근거로서의 빛이 없음(이걸 어둠이라고 해야하나?)이 존재 그 자체=신=완전=없음(님은 이 없음을 이해 못하시죠 대부분)

 

또는 오직 빛만 있다가 비로소 빛의 부재가 어느 구멍에서 생겼을 때 물리학적 빛이 생겼거나...이 경우 빛이 존재라 하면 되고...

 

인간이 한 말 중에 아는 것은 단 하나도 없소...

아는 척 하는 거지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3.05.29 (20:45:53)

네! 이런걸 얼빠진 자의 말장난이라고 하지요.

님은 사실을 논하는 척 위장하였지만 단순히 언어파괴를 저지른 것 뿐입니다.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언어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언어를 만들때 헌법제정하듯 학자들이 모여 합의한거 아니거든요.

 

언어는 어쩌다보니 그냥 생긴 겁니다. 

이러한 언어의 태생적인 헛점을 이용하여 사람을 속이는 거짓말입니다.

 

그러나 소통의 법칙이 있으므로

이러한 속임수는 소통원리에 의해 백퍼센트 걸러집니다.

 

존재라는 것은 작용에 대응하여 반작용하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대응하는 것입니다.

 

이때 작용측과 수용측은 동시발생, 동시소멸하며

이 둘을 다 있다고 주장하면 거짓말입니다.

 

때림과 맞음이라는 두 사건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말하면 거짓말입니다.

대부분 사기꾼들은 요걸로 속이는 거에요.

 

의사결정을 한 스위치쪽만 존재로 치고 반대쪽은 소거합니다.

류현진이 포수의 미트에 던진거지 포수가 미트로 공을 빨아당겨온 것은 아닙니다.

 

빛이 존재할 근거는 필요없고

그것이 없지만 있다쳐도 작용할 수 없고 대응하지 않으므로 무입니다.

 

신이 있는데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면 없는 겁니다.

數가 존재할 근거로 수의 신이랄까 뭔가가 있는건 아닙니다.

 

수의 근거와 상관없이 사과나 바나나가 있으므로 수가 있는 겁니다.

우주 안의 모든 존재는 모두 연결되어 덩어리를 이루므로 그딴거 필요없습니다.

 

님은 구조론을 모르므로 질과 입자와 힘과 운동과 량이 하나라는 본질을 속이고

질과 입자가 둘인 것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그딴건 다 님의 얼빠진 망상이구요.

더 이상 논할거 없습니다.

 

"인간이 한 말 중에 아는 것은 단 하나도"..

아는게 없는게 아니고 언어가 없는 거에요.

붓이 없는 넘이 그리려 하고, 손가락이 없는 사람이 피아노를 연주하려 하고 

입이 없는 주제에 말하려 하고

언어가 없는 사람이 발언권을 행사하려 들고

이건 곤란합니다.

 

자기 언어 없는 탓을 하지 않고 왜 진리를 탓합니까?

라디오가 없는 사람이 방송국이 없다고 말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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