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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2814 vote 0 2012.06.19 (00:24:23)

 

믿음이란 무엇인가?

 

도덕적 당위에 따른 인간의 신념과 자연의 법칙은 일치하지 않는다. 인간은 살아야 한다는 것이 도덕적 당위다. 그런데 인간은 죽는다. 다만 공동체는 죽지 않는다. 여기서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

 

◎ 이상이 옳다.≫현실은 그렇지 않다.≫끝까지 가면 공동체적 이상이 옳다.

 

인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논쟁은 이거다. 여기서 첫 번째 이상과 마지막의 이상이 다르다는 점이 각별하다. 아주 다른건 아니다. 이상은 원래 공동체적 개념이다. 끝까지 가는게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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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태 화백의 영웅열공전을 참고하자. 믿음이 생각을 낳고, 생각이 말을 낳고, 말이 행동을 낳고, 행동이 습관을 낳고, 습관이 가치를 낳고, 가치가 운명을 낳는다. 그런데 너무 길다. 7개나 된다.

 

‘믿음, 생각, 말, 행동, 습관’에서 자르자. 여기까지는 구체적인 인간의 행동이고 그 뒤의 가치, 운명은 추상개념이니 구분이 다르다. 하여간 ‘믿음≫생각≫말≫행동≫습관’이 구조론의 결과 같다.

 

간디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믿음≫생각≫말≫행동≫습관’이 되려면 긴 시간이 필요하다. 습관이 운명으로 굳어지려면 최소 30년 잡아야 한다. 그런데 이건 시간이다. 공간도 봐야 한다.

 

이상이 현실을 이기려면 혼자서는 안 되고 백만 명, 천만 명이 합세해야 한다. 한 명의 ‘믿음≫생각≫말≫행동≫습관’이 아니라 백만 명, 천만 명의 ‘믿음≫생각≫말≫행동≫습관’이 운명을 바꾼다.

 

다른 패턴을 보자. 돈보다 인간이 우선이라는 것이 도덕적 당위다. 그런데 현실은 인간이 돈에 밀린다. 그런데 공동체는 돈에 밀리지 않는다. 공동체로 보면 다시 돈보다 인간이 우선이다.

 

◎ 인간이 돈에 앞서야 한다.(도덕적 당위)
◎ 현실은 돈이 인간에 앞선다.(자연의 법칙)
◎ 진실은 공동체가 돈에 앞선다.(보편적 진리)

 

개인으로 보면 인간은 죽는다는 자연의 법칙이 인간은 살아야 한다는 도덕적 당위을 이기지만, 공동체로 보면 다시 인간은 살아야 한다는 도덕적 당위가 이기듯이 공동체로 보면 인간이 이긴다.

 

김진태 화백의 만화로 돌아가서 믿음≫생각≫말≫행동≫습관은 수준이하의 표현이고 여기서 믿음은 곧 공동체적 입장이다. 믿음이 생각을 낳는게 아니고 공동체적 입장이 생각을 낳는 거다.

 

◎ 공동체적 입장≫개인의 포지션≫생각과 의도≫말과 행동≫공동체의 운명

 

특히 종교에서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절대자에게 판단과 결정을 위임하는 건데 이건 멍청한 거고 과학으로 보면 인간이 개인이 아닌 공동체적 포지션을 가지는 것이고 그것은 존엄이다.

 

개인이 인류의 대표자 마음을 가지는 것이 존엄이다. 그것이 참된 믿음이다. 절대자에게 판단과 결정을 위임하는 종교인의 믿음은 거짓 믿음이다. 혹은 공동체에 의존하는 어리광도 가짜다.

 

◎ 참된 믿음 – 공동체의 대표자 포지션에 서는 것. 깨달음의 입장.
◎ 종교 믿음 – 절대자에게 판단과 결정을 위임하고 속편하게 사는 것.
◎ 본능 믿음 – 인간의 타고난 공동체적 본성. 어리광.

 

세 가지 믿음이 있다. 참된 믿음은 깨달음의 믿음이다. 그것은 인류의 대표자 마음을 가지는 것이며 존엄을 얻는 것이다. 개인이 죽지 공동체는 죽지 않는다. 인류는 죽지 않고 우주는 죽지 않는다.

 

종교의 믿음은 절대자에게 판단과 결정을 위임함으로써 마음의 평안을 구하는 정신의 도피다. 이건 권할 바가 못된다. 그런데 왜 인간이 종교를 믿느냐다. 그것은 본능의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어떤 대상을 믿는 것이 아니라 원래 천성으로 믿음을 가지고 태어나며 그것을 신앙대상에 투사한. 인간이 신앙하는 진짜 이유는 내면에 믿음이 넘치기 때문이다.

 

인간은 억압이 있기 때문에 맞서서 저항하며 자유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원래 자유가 넘친다. 그것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것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원래 인간 안에 사랑이 고여 있다.

 

어떤 대상을 사랑하는게 아니라 원래 내 안에 사랑이 들어차 있으며 그것이 특정한 시공간의 지점에서 반응하는 것이다. 종을 때리면 소리가 나고 유황과 적린을 반응시키면 불꽃이 일어난다.

 

아티스트가 맥점과 급소를 찾아 반응을 끌어낸다. 종은 의도 때문에 소리를 토하는게 아니고 화약은 의도 때문에 불꽃을 내는게 아니다. 믿음도 마찬가지다. 특정 환경에서 본능이 반응한다.

 

믿음은 지극히 인간적인 행동이며 자연스러운 거다. 근데 그 믿음의 과정에서 거짓을 꾸며낸다. 화약이 불을 내는 것은 자연의 반응인데 따지니까 나쁜놈 태워죽이려 한다는둥 이유를 꾸며댄다.

 

무신론자라 해도 관찰해보면 특별히 스트레스 받는 지점이 있고 그것은 타고난 믿음의 본성 때문이다. 어떻게든 사회성을 드러내고 만다. 존엄해야 속도 편하고 행동도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참된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공동체적 입장을 가지는 것이며 존엄을 얻는 것이며, 우주의 대표자 마음을 얻는 것이며, 한 개인이 아닌 인류 전체, 우주 전체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크게 세력을 얻고 김연아의 실수를 피한다. 김연아는 피겨스케이팅의 대표자가 되었으면 한 단계 올라서서 인류의 지성과 어울려야 한다. 광고쟁이 비위나 맞춘다면 슬픈거다.

 

단어가 함정이다. 교주가 ‘믿느냐?’고 할 때 그 의미는 애매하다. ‘내 말 좀 들어라’는 뜻일 때가 많다. 믿음이라는 단어는 얼마든지 속임수에 쓰일 수 있다. 공동체적 포지션도 너무 길다.

 

존엄이 좋은 단어이나 알아먹을 사람이 많지 않다. 깨달음 역시 약간 각도가 어긋난다. 참된 믿음을 나타내는 단어는 없다. 그러므로 아무도 말하지 않은 것이다. 구조로 볼 밖에.

 

인간의 언어는 진리를 나타낼 수 없다. 그래도 포지션은 있다. 구조로 보면 인간의 행동은 전체≫부분이다. 당신의 전체는 무엇인가? 무엇이든 그 전체를 기준으로 행동하는 것이 믿음이다.

 

나침반을 가져야 한다. 좌표를 읽어야 한다. 항상 전체를 보는 눈을 뜨고 있어야 한다. 긴장타야 한다. 그리고 작은 바람에도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섬세해야 한다. 완전성의 눈을 떠야 한다.

 

그것이 독락당의 의미다.
커다란 전체에 도달하면 내려가는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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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상이든 시조는 바른 말을 한다.

그러나 뒤에 온 중흥조는 반드시 참뜻을 왜곡시키고 만다.

시조는 진리를 나침반으로 삼지만 중흥조는 시조의 어록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인간의 언어는 이미 상대성이 들어간 것이며 그때부터 수요공급의 법칙이 기능한다. 

사회가 그 말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부터 사회의 필요에 맞추어 왜곡된다.

 

http://gujoron.com




[레벨:11]큰바위

2012.06.19 (07:27:10)

참된 믿음, 종교 믿음, 본능 믿음

믿음의 세 종류 공감합니다.

그리고 깨달음의 믿음이 참 믿음이라고 한 것도 공감합니다.

 

결국 잘 보고, 잘 들으라는 것은 제대로 꺠닫지 못하면 허당이라는 거죠.

결국 듣는다고 다 듣는 것이 아니며, 본다고 다 보는 것이 아니죠.

 

공동체의 믿음은 결국 인류 공동체를 말하는 것으로 들립니다.

사회학적으로 공동체에 대한 정의가 94개 정도 된다고 합니다.

 

이쪽에서 community 할 때는 마을, 동네를 일컬을 때가 많은데, 공동체가 애매하죠.

 

결국 공동체의 한계, 즉 시공이라는 한계를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공동체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고,

그 공동체에 따라 믿음도 달라진다고 봅니다.

 

그런 면에서 참 믿음은 인류 공동의 선과 관련되어 있다고 봐야겠지요.

진리, 선함, 아름다움, 신의 뜻 모두가 결국 참 믿음과 통하는 것이어야겠지요?

 

제대로 깨닫기만 하면 믿음이 절로 생긴다고 봅니다.

 

깨달음을 나누어 주셔서 감솨.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2.06.19 (10:19:01)

공동체는 특정한 것이 아닙니다.

한 개인이라도 그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공간의 바운더리 전체를 바라보는 것이 공동체고

둘이면 두 사람과 그 두 사람의 공유하는 전체 공간이 공동체고

가족이면 가족, 국가면 국가, 인류면 인류, 무엇이든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근데 그냥 인류라고 하면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바운더리 개념은 빠지기 때문에

어떤 단어로도 나타내기 어려운 것이고 오직 구조로 보아야 합니다.

구조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지점이 공동체인 것입니다.

항상 전체를 봐야 하는 것이며 위하여가 아니라 의하여에 서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항상 그것을 나타내는 단어가 없습니다.

설렁탕이라고 표현했지만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함흥에 차사를 보낼 때는 이성계의 친구로 차사를 보내야 합니다.

아무나 보내면 목만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영배 형님이 설렁탕을 논하는 뜻은

자신이 차사로 나서야 동교동 화갑성계와 대화가 된다는 뜻인데

그걸 표현하기에는 영배형님 어휘력이 딸립니다.

 

근데 당시 어떻게 했습니까?

 

광재 : (전화로) 여보세요? 거기 한화갑의원님 있습니까?

화갑 : 아니 저 미친 넘을 봤나. 직접 찾아와서 협상을 해도 뒷배를 맞추기가 여간 쉬운 일이 아닌데

그걸 찾아오지도 않고 전화로? 오성급 호텔에 밀실 잡아놓고 독대를 해서

은밀히 협상을 해도 거래가 쉽지 않은 판인데

 

독대불가? 전화통보? 에라이 미친 놈아.

 

이건 대화가 안 되는 거죠.

항상 중요한 것은 그것을 표현할 언어가 없다는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구조의 나침반으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그냥 GPS 좌표를 찍어주면 됩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2.06.19 (11:17:11)

언어를 죽일 것인가? 살릴 것인가?
어떠한 것에 대해 표현한 언어를 바로 지금 우리안에서 살릴수도 있고 죽일수도 있는데, 공동체 안에서 거부하여 죽어버린 사어들이 생겨난다면 그 지점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다고 생각되네요. 언어가 의미하는 그 본래의 의미가 그대로 전달만 되어도 큰 무리는 없는데, 그 사회를 인식함에서 언어는 왜곡되어 전달이 된다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죽이지 말아야 할 언어들이 죽는다면 그 사회가 그만큼 뒤틀려 있거나, 혹은 그것을 바로 잡아야 하는 동기를 부여 한다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표현하는 언어적 표현은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 살아남은 언어도 있고 죽는 언어도 있고, 새롭게 재구성 되는 언어도 있지만, 그 언어가 품고 있는 의미에 대해서 거절해버리는 일이 많아질수록 언어가 협소해져서 점점 입지가 좁아지기도 한다고 보입니다. 언어가 품고 있는 보이지 않는 표현들을 제대로 살펴줄 필요도 있다고 생각되네요.
동렬님 글들은 대체로 그 넘어에 있는 보이지 않는 부분을 규명해주는 글들이라고 생각됩니다.
언어에서도 그 넘어의 것을 왜곡되지 않게 살피면 인식도 어느 정도는 바로 잡힌다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레벨:11]큰바위

2012.06.19 (20:58:30)

말을 뱉고 보니, 영 그 표현이 아니로군요.

그래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은 되는데,

마땅히 이를 말이 없다.

그래서 좌표를 찍는다.

 

근데, 그 인생에 좌표하나 찍기 참 힘들군요.

애절합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2.06.19 (21:23:02)

community의 어원은 '한 몸'이라는 뜻입니다.

여럿인데 실제로는 마치 하나처럼 작동한다는 거죠.

 

정확히는 com(꿰다)+mun(몸)인데 몸을 합쳤다는 뜻.

harmony도 어원이 같은데 여럿이 하나처럼 조화된다는 뜻.

 

개별적인 것에 어떤 보편성, 공통성이 있다면

그 이전에 이미 보이지 않는 전체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 전체는 명명되어 있지 않으므로 이름이 없지요.

그러나 분명히 있습니다.

 

지구상에 국가가 하나밖에 없다면 그 국가는 명명되지 않습니다.

이스터섬처럼 완벽하게 고립되어 있다면.

 

경쟁국가가 등장하면 비로소 이름이 붙습니다.

하나일 때는 이름이 없고 둘이 되어 경쟁해야 비로소 명명됩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5]이기준

2012.06.20 (07:15:45)

공동체의 모양은 실존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인식속에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무형의 바운더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질세계의 현상에 그 의식을 투영하고 행동하는 것이 인간이 사고하고 행동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의사소통 중에 공동체라는 말을 사용할 때 우리는 사실 그 의식에 접근해서 그 의식을 공유하고, 재구성하는 활동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을 잘 하려면 이 의식의 바운더리가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 파악하고 재구성(재조립)하는데 익숙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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