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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0112 vote 0 2013.03.14 (00:04:58)

          주체성이냐 타자성이냐. 필자는 관객이 되지 말고 감독이 되라고 했다. 영화감독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일상성 속에서도 얼마든지 권(權)의 문제는 작동한다. 말하자면 생활의 발견이다.


    주체성은 자신이 주도적으로 판을 설계하고 일의 전체과정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런건 눈빛에 반영된다. 그 눈빛을 읽힌다. 포지션이 바뀌면 인생이 바뀐다. 삶이 송두리째 달라진다.


    예컨대 집에 하수도 배관을 고치러 온 노동자가 있다고 치자. 그 사람을 내집을 방문한 손님으로 보는가 아니면 그냥 일꾼으로 보는가다. 여기서 지배하려고 하는가 상대하려고 하는가다.


    여기서 말하는 ‘지배’는 긍정적 의미에서의 지배다. 말하자면 게임의 지배와 같다. 너와 나의 상호작용 속에 성립하는 게임의 판을 지배하라는 말이다.


    지배하지 않고 상대한다는건 ‘니가 이렇게 하면 나는 이렇게 한다’는 응수의 관점이다. 그 경우 상대방에게 주도권이 간다. 게임을 지배하지 못한다.


    모든 사물에 자기가 능동적으로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연필 하나라도 내가 구입한 볼펜과 그냥 연필은 다르다. 연필의 한 자루의 가치는 시장이 결정하는게 아니라 내 몸값이 결정한다.


    천원짜리 연필을 천원짜리로 치는 사람은 자기 몸값을 천원으로 정한 것이다. 그는 세상으로부터 천원짜리로 대접받는다. 타자성을 극복해야 한다.


    주식을 하더라도 그렇다. 개미가 돈을 잃는 이유는 타자성의 포지션에 서기 때문이다. 감독의 마음이 아닌 관객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평균 8000원짜리 값싼 주식을 샀다가 오르면 팔고 떨어지면 보유한다. 망한다.


    고수는 평균 4만 5천원짜리 주식을 샀다가 오르면 보유하고 떨어지면 판다. 이건 누가 판을 설계했는가의 차이다. 남이 설계한 판에 손님으로 끼면 기본적으로 먹튀의 사고를 가지게 된다. 오르면 판다.


    떨어지면 팔지 않는 이유는 자신은 초대받은 손님이므로 의사결정을 할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내 책임이 아니라는 거다. 심리적인 도피처가 마련되면 퇴행적인 행동을 한다. 이익을 볼 수 없다.


    도박을 하든, 사업을 하든, 게임을 하든 그러하다. 자신이 직접 판을 설계하고 일의 전 과정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 자세로 살아야 한다. 라면을 끓이더라도 그러하고 설거지를 하더라도 그러하다.


    일상성 안에 권(權)이 있다. 생활 안에 주체성과 타자성이 있다. 포지셔닝 잘해야 한다. 잘못하면 당한다. 인생을 송두리째 당한다.


    종교를 믿더라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능동적으로 사랑해야 믿음이다. 믿는다며 손을 떼고 신에게 맡기는건 믿는게 아니다. 믿음은 사랑이며 사랑은 영향력이다. 능동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여 게임을 설계하고 판을 지배해야 믿음이다. 다시 강조한다. 사람을 지배하라는 말이 아니다. 게임을 지배하라는 말이다.


    막연히 종교를 비난하기는 쉽다. 문제는 과학이 대체재를 제시하지 못한다는데 있다. 종교가 가진 큰 시장과 막대한 에너지를 포기한다면 어리석다.


    종교를 신앙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수준 좀 높이자는 거다. 왜? 함께 가기 위해서다. 적어도 말은 통해야 하지 않겠는가? 대화만 된다면 종교를 믿는 안 믿든 무방하다.


    그러나 종교인이 종교어를 쓰는 지점에서 말문은 닫히고 만다. 종교를 믿는 과학자도 많다. 그러나 논문을 종교어로 쓰지는 않는다. 종교인이 사회에서 종교어를 쓴다면 그것은 사회에 대한 배척이다.


    이미 등을 돌린 것이다. 등 돌리고 말한다면 이상하다. 소통은 없다.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곧 무리짓는다는 것이다. 왜? 불안하기 때문이다. 겁 많은 양떼가 다투어 무리의 가운데로 파고들려고 하는 것과 같다. 물고기가 공 모양으로 뭉쳐다니는 것과 같다.


    불안한 이유는 실상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종교를 믿는 이유는 종교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문제는 종교가 믿음이라는 행위를 반복한다는 거다. 이거 이상하다.


    결혼하면 더 이상 결혼하지 않는다. 입학한 학생은 다시 입학하지 않는다. 오늘 깨달았는데 내일 또 깨닫는다면 깨달은게 아니다. 신분상승은 1회로 종결된다. 병장을 달면 더 이상 상병은 아니다.


    그런데 종교의 믿음은 반복된다. 매일 믿고 또 믿는다. 거짓 믿음이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가 다 마찬가지다. 유교나 도교는 약간 예외인데 그래서 망했다. 그렇다. 깨달음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이다.


    깨달음은 반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피아구분이다. 저쪽에서 이쪽으로 38선을 넘어오면 그만이다. 결코 되돌아가지 못한다. 주체성과 타자성도 같다. 선을 넘어가면 그만이다.


    믿음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 권(權)의 선을 넘어 다른 세계로 가는게 믿음이다.


    신에 대한 개념은 다섯가지다. 이들이 종교에 어떻게 반영되는가다. 첫째 정령신은 본능적인 복종심의 표현이다. 이는 타고난 노예근성의 발현이다. 교육받지 못한 자의 야만이다. 교육에 의해 극복되어야 한다.


    둘째 영웅신은 힘을 갖고자 하는 욕망의 투영이다. 기도를 하거나, 백팔배를 하거나, 부적을 쓰거나, 터부를 지키거나, 계율을 지키거나, 예배를 보거나, 기수련을 하거나, 명상을 하거나 다 마찬가지다. 정신적으로 강해지려는 것이다.


    셋째 시조신은 세력을 업으려는 타산이다. 미국으로 건너간 교포들은 모두 교회에 다닌다고 한다. 교회에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이 명절에 큰 집에 모여 제사를 지내는 것도 같다. 친척 덕을 보자는 거다.


    종교는 모두 이 수준에 머물러 있다. 제법 아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종교 지도자의 입장이고 신도들은 이 수준이다. 이 수준을 넘으면 종교를 신앙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무리지을 필요가 없다.


    그렇다. 종교를 믿는 이유는 첫째가 본능적인 두려움의 극복, 둘째가 정신적 힘, 셋째가 세력의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는 것은 믿음이다. 진정한 믿음은 깨달음이다.


    무엇인가? 신에 대한 관점은 자신과 맞서는 대상의 규모를 나타내며 그것은 동시에 자기 자신의 규모를 나타낸다. 핵심은 의사결정이다.


    존재란 무엇인가? 외력의 작용에 대항하면 그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허깨비는 외력에 맞서 대항하지 않으므로 존재가 없다. 어떻게 대항할 것인가 하는 물음은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이다. 믿음이 그 가운데 있다.


    주체성과 타자성이다. 믿는다는 것은 타자성을 극복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네 번째 관념신과 다섯째 소통신이다. 관념신은 기승전결의 기에 포지셔닝 하는 것이며 권(權)을 획득하는 것이다.


    권을 획득하면 내것이기에 믿고 안믿고가 없다. 작가는 내 작품을 믿을 이유가 없다. 상관없다. 나는 작품을 믿는다고 말할 이유는 없다. 이건 내 작품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설계한 게임이기 때문이다.


    운전자는 내 차를 믿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운전한다고 말한다. 술 취한 사람이 운전대를 잡으면 불안해 하지만, 자신이 술을 먹은 상황에서는 태연하게 운전대를 잡는게 인간심리다. 자기 책임이면 불안하지 않다. 이는 이미 믿고 안 믿고를 넘어선 경지다.


    사랑은 영향력이다. 곧 지배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지배한다는 것이다.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판을 지배하는 것이다. 자신이 설계해야 판을 지배할 수 있다. 게임을 지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며, 자신이 설계한 판을 지배한다는 것이며, 그것은 자신이 의미부여하고 책임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소통이다.


    자물통과 열쇠는 서로를 지배한다. 전극의 플러스와 마이너스 두 극은 서로를 지배한다. 이렇듯 둘이 합쳐야만 앙상블이 되는 구조가 사랑이며, 사랑은 그 앙상블을 연주하는 것이고 믿음은 그 판을 설계하는 것이다.


    소통신은 그 앙상블이 제 소리를 내는 것이다. 이때 피아노 연주자와 바이얼린 연주자는 서로를 지배하지 않는다. 간섭하지 않는다. 참견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배한다. 게임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소통이다.


    주체성
    ◎ 소통신 – 자신이 설계한 판에서 게임을 지배하는 것.
    ◎ 관념신 – 기승전결의 기에 포지셔닝하여 권을 행사하는 것.


    타자성
    ◎ 시조신, 영웅신, 정령신 – 상대의 행동을 보고 의사결정 하는 것.


    소통신은 두 사람이 대등하게 주거니 받거니 하며 개그를 치는 것이고, 관념신은 한 사람이 주도하여 이끌어가고 다른 사람이 따라가는 것이다. 소통신의 포지션이 제대로 된 믿음이다. 사랑은 그 안에 있다.


    세상과 나 사이에 의사결정영역이 있다. 그것이 존재다. 그 안에 상호작용이 있고 그 상호작용의 구조, 곧 게임을 설계하는 것이 믿음이며, 그 설계에 따른 영향력의 행사가 사랑이다. 그것은 상대방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주체성은 그 안에 있다.


    ◎ 세상 ↔ 나
    ◎ 세상 ← 상호작용 → 나
    ◎ 세상 ← 상호작용하는 게임의 판 설계가 믿음 → 나
    ◎ 세상 ← 상호작용의 게임 진행이 사랑 → 나


    세상이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거기에 맞추어 내 행동을 결정하는 즉 선수가 아닌 후수를 잡히는 것이 불신이다. 그런데 종교가 말하는 믿음은 후수다.

 

    P.S.

    정답은 상호작용이다. 믿음은 관계를 설계하고 사랑은 관계를 진행한다. 믿음은 악보를 그리고 사랑은 연주한다.

   

 

   

 

    ###

 

   

345678.jpg

 

    믿음은 대상과 나 사이의 관계를 정립하여 거기서 또다른 존재를 도출합니다. 앙상블을 이루는 두 연주자처럼 서로 간섭하지 않으면서 서로를 완벽하게 지배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 게임을 설계하고 사랑은 그 게임을 연주합니다. 설계하지도 않고 연주하지도 않으면서 입으로만 되뇌이는 믿음은 거짓입니다.   

 

 




[레벨:15]오세

2013.03.14 (00:53:28)

전송됨 : 트위터

영화 신세계를 보면, 

이정재가 경찰 스파이 노릇하다가 자신의 보스이자 브라더인 황정민의 죽음을 접하면서 스파이 노릇 접고 진짜 보스가 되어 자기가 스파이라는 거 아는 넘들 다 죽이고 조직을 접수하오. 말그대로 게임을 다시 설계해서 게임마스터 노릇하는게 결말인데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실제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는 점이오. 


사람들도 알고 있소. 상대성에 휘둘려 남이 설계한 판에서 이리저리 왔다리갔다리 하다가 마침내 절대성을 획득해 자신이 설계한 판에서 마음껏 놀 때의 그 희열. 남이 설계한 게임을 리셋시키고 이제 자신의 룰로 룰(지배)하는 것. 그것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쾌감을 주오. 상대성으로 압박하다가 절대성으로 풀어주기. 앞으로의 흥행영화의 공식이 될 것이오.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사발

2013.03.14 (01:04:54)

김동렬 선생님의 칼럼 중에 어떤 부분은 도통 무슨 소린지 모르겠고 어떤 것은 대충 알아듣습니다.

 

이 칼럼은 후자인데 이런 글을 읽을 때마다 김동렬 선생님을 알게해주신 마케터님에  대해 감사의 념이 솟구칩니다. ㅠ.ㅠ

 

마케터님! 세상 福을 다 받으소서!!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3.03.14 (11:27:47)

어느 부분이 이해가 안 되는지 말해주시오.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사발

2013.03.14 (12:15:06)

그 질문에 대답하려면 제가 공부를 많이 해야 합니다.

 

당장은 곤란합니다. 제가 지금 심사가 좀 복잡해서....

[레벨:6]빛의아들

2013.03.14 (17:50:06)

믿는다고 하면서  두번 말하고 세번 말하는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는다는 말에는 믿음이 없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지요!

고로  믿음이 있으면 믿는다고 말할필요가 없습니다.

믿는다는것을 아는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앎은 곧 깨달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깨달음 앎으로  믿는다고 말하지 않아도 이미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12]wisemo

2013.03.14 (18:21:52)

느낌 몇자 적습니다.

"자신이 술을 먹은 상황에서는 태연하게 운전대를 잡는게 인간심리다. 자기 책임이면 불안하지 않다. 이는 이미 믿고 안 믿고를 넘어선 경지다. "
"이렇듯 둘이 합쳐야만 앙상블이 되는 구조가 사랑이며, 사랑은 그 앙상블을 연주하는 것이고 믿음은 그 판을 설계하는 것이다. "

"세상과 나 사이에 의사결정영역이 있다. 그것이 존재다. 그 안에 상호작용이 있고 그 상호작용의 구조, 곧 게임을 설계하는 것이 믿음이며, 그 설계에 따른 영향력의 행사가 사랑이다. "  등등

 

심리학, 신학, 경영학 모든게 중첩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현재 관찰중인 것이 협력인 2인을 데리고 영업을 하는 사람으로서 사실상 콘트롤 불가인 상황(후리랜서처럼 근무...)하에서도 일이 이상하게 진행되는 것을 보고  이 글을 읽으며 분석을 해보게 됩니다. 그냥 신경끄고 내버려둬도 흘러가는 구조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요컨데 이들이 자기가 자기책임하에 주인인 것 처럼 일하는 게 아니었는지를 관찰중에 있습니다... 나만 모르고 있는...세상이 있었다...^

김 선생님 글에 에너지가 있다는 느낌이 좋습니다. 에너지을 어디서 보고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획득하는지가 항상 질문인데... 그리고 포지션 생성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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