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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2260 vote 0 2021.11.26 (19:55:40)

    구조론은 사건을 해석하는 도구다. 도구는 중립적 위치에서 주체와 객체를 연결한다.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는다. 도구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다. 요리사가 쓰면 좋은 칼이 되고 살인자가 쓰면 나쁜 칼이 된다. 인간들이 따지기 좋아하는 선악은 그 칼을 쓰는 사람에게 있다. 칼은 죄가 없다. 도구는 죄가 없다. 도구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이고, 보편적이다. 좋은 사람이 쓰면 좋아지고 나쁜 사람이 쓰면 나빠진다. 도구가 잘못되면 새것으로 교체하면 된다.


    사람은 진리에 의지하면서 막연히 그 진리가 내편이기를 원한다. 부모에 의지하면서 부모가 내편이기를 믿어 의심치 않듯이. 대중은 중립적이지 않은 진리를 원한다. 나의 응석을 받아주는 착한 진리를 원한다. 진리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있으나 대개 사람의 욕망을 반영한 것이다. '이랬으면 좋겠다' 하는 바램인데 말하기 좋도록 '이렇다' 하고 단정해 버린다. 인류 문명사 1만 년 동안 그래왔다. 고대의 원자론에서, 기독교의 창세기에서,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석가의 해탈론에서, 근래의 마르크스주의까지 '이랬으면 좋겠다.'는 개인의 희망사항을 그대로 말하면 '누가 네 생각 물어봤냐?'는 빈정거림이 되돌아올 것 같으니, 남들 앞에서 말빨이 서도록 거짓말 조금 보태서 단호한 표정을 짓고 '그렇다.'고 말해버리는 것이었다. 듣는 사람의 입장을 배려해서 청중이 듣기 원하는 말을 해준 것이다. 사실이지 그들은 서비스업 종사자였던 것이다. 청중이 갑이고 그들은 을이다. 주문자 상표부착 OEM 전략으로 가는 수밖에. 나쁜 사람을 벌하고 좋은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것이 진리라고 그들은 말해버린다. 듣기는 좋다.


    대중은 사탕발림 거짓말을 좋아하지만 그럴 때 언어가 죽는다. 천하의 공물인 언어를 죽이고 사사로운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그렇게 첫 단추는 잘못 꿰어졌고 누구도 이를 바로잡지 못했다. 21세기에 와서 진리라는 말은 웃음거리가 되었다. 나무위키에서 '진리'를 검색하면 한 뼘 정도의 분량으로나온다. '개돼지'를 검색하면 꽤 분량이 길다. 진리는 개돼지보다 못한 대접을 받고 있다. 왜? 자신의 직업을 서비스업으로 생각한 철학자들이 1만 년 동안 독자가 원하는 개소리를 쌓아왔기 때문이다.


    도구 중심의 사유를 얻어야 한다. 자연의 도구는 무엇인가?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관문이 있다. 그것은 탄생의 자궁이다. 거기서 딱 걸린다. 거기서 존재는 본질을 들킨다. 요리는 주방장의 칼끝에서 탄생한다. 칼은 도구다. 스포츠 스타는 그라운드에서 탄생한다. 그라운드는 자궁이다.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출발점은 그것의 탄생과정이다. 세상은 원자가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러한 탄생과정의 의사결정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존재는 도구의 날끝에서 탄생된다. 자궁은 도구가 활동하는 공간이다. 칼은 도마 위에서 춤추고, 배우는 무대 위에서 연기한다. 칼이 도구라면 도마는 자궁이다. 무엇이든 탄생의 자궁이 있고 의사결정하는 도구가 있다. 자궁은 그것을 가두고 도구는 그것을 빚어낸다. 반드시 있다. 거기서 존재는 내막을 들키고 만다.


    그 자궁 속에서 그 도구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보자. 그 빵가마 속에서 그 뜨거운 화력이 무엇을 구워내는지 보자. '사건'이라는 자궁 속에서 '의사결정'이라는 도구가 일을 저지른다. 시스템이라는 자궁 속에서 구조라는 도구가 작품을 빚어낸다. 그리고 이야기는 시작된다. 도구가 있어야 한다. 칼 없는 무사, 총 없는 포수, 펜 없는 작가는 도구를 잃은 사람이다. 무대를 잃은 배우, 연재처를 잃은 만화가, 팀을 잃은 선수는 자궁을 잃은 사람이다. 도구를 잃고 자궁을 잃으면 실패한다.


    철학자라는 사람들이 내뱉은 말은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식당에서 테이블에 앉아 기다리다가 웨이터가 날라주는 음식을 맛보고 '흠 이 요리는 맛이 없어.' '흠 이 요리는 먹을만 하구만.' 하는 식의 평론을 베푼다. 배고픈 자는 맛있다고 찬양하고 배부른 자는 먹어보지도 않고 수저를 던진다. 중립적인 평가가 아니라 자신의 입맛과 욕망이 반영된 것이다. 능동이 아니라 수동이다. 음식은 요리사가 하고 미식가는 뒤에서 트집을 잡는다. 별점을 아껴야 평론가의 권위가 서기 때문이다. 능동적으로 주방에 들어가서 도마 위에서 요리사의 칼이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살펴보는 사람은 없었다.


    오래도록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는 소리 있었고 구조론이 처음으로 응답을 시작했다. 세상을 시스템과 도구로 보는 관점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도구는 만인이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레벨:4]고향은

2021.11.27 (13:27:13)

"칼이 도구라면 도마는 자궁이다"


도마라는 시스템은 공유자산이다
개체라는 도구는
하인이 아닌 주인의 신분으로서-
도마를 만들어 간다

서로의 상호작용으로 존재는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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