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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2111 vote 1 2023.01.07 (15:14:39)

    옛날에는 식객들이 어진 군주를 찾아 천하를 주유하곤 했다. 한비자의 세난과 같다. 흉중에 깊은 뜻을 품고 감당할 그릇이 되는 인걸을 찾아다닌다. 많이 기대할 것은 없고 관중과 포숙아에 제환공 정도의 스토리만 나와주면 된다. 인터넷 시대에 발품을 팔고 다닐 이유도 없다.


    만화는 만화고 현실은 현실이다. 나는 진작부터 인간이라는 것들에 대해 실망해 왔다. 이는 역으로 그만큼 기대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짧았지만 만화가 현실이던 때가 있었다. 노무현 시대다. 한국인들은 감당하지 못했다. 그들은 재빨리 만화를 집어던지고 현실로 돌아왔다.


    '노무현을 죽여. 이상이 현실 되면 곤란해. 이상은 어디까지나 이상에 머물러야 한다구. 현실은 언제나 시궁창이어야 한다구. 그렇지 않으면 끝도 없는 인간들의 오버를 감당할 수 없어. 인간들 기를 죽여놔야 해. 인간들이 턱도 없이 희망을 가져버리면 뒷감당 어떻게 하겠어?'


    한국인들은 아뜨거라 하고 똥 씹은 표정을 짓더니 재빨리 본래의 시궁창 속의 지렁이로 돌아갔다. 기득권들 다 그렇다. 희망은 재앙이고 절망이 살 길이다. 좋은 시절은 분명 있었다. 짧은 추억이지만 여운은 오래 간다. 2002년에 한국인들은 두 번이나 연거푸 기적을 보았다. 


    대중은 전율하고 지식인은 겁먹었다. 내가 김어준을 발견한 때는 30년 전인데 아직도 김어준이다. 그를 능가하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오래 가는 유행을 나는 본 적이 없다. 그 무렵 유시민은 동아일보에 칼럼을 썼다. 그를 능가하는 칼럼니스트는 나오지 않았다. 


    유시민, 김어준이 특별히 뛰어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때만 해도 김어준 급은 수십 명이 떼지어 나올 것이라고 믿었다. 쉽잖아. 따라하면 되잖아. 김어준이 '우리는 강팀이다' 하고 선창하면 '졸라리 강팀이다' 하고 추임새 넣어주면 되잖아. 비슷한 것도 나와주지 않았다.


    유시민은 턱없이 김대중을 비난해서 탐탁치 않게 보았다. 단지 그를 능가하는 글쟁이가 나오지 않았을 뿐이다. 유시민을 능가하기는커녕 한글이 되는 글쟁이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조리있는 문장을 쓸 수 있는 사람도 없다시피 하다. 심지어 써놓은 글을 읽을 줄도 모르더라.


    유시민은 아마 이해찬을 염두에 두고 김대중을 깠을 것이다. 주군을 위해 인위적으로 판을 짠 거. 한비자의 세난을 읽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 지금은 국민이 군주다. 설득하기 어렵다. 판은 하늘이 짜는 것이고 인간은 불을 전달할 뿐이다. 그 전달할 불이 있어야 한다. 


    많은 세월이 흘렀다. 이제 유시민이 누구를 위해 판을 짜는 역할을 맡지는 않는다. 하늘이 판을 짜고 부르면 달려가는 거다. 생각하면 김대중 이후 김대중 없고, 노무현 이후 노무현 없고, 유시민 이후 유시민 없고, 김어준 이후 김어준 없다. 비슷한 것도 없고 근처 간 것도 없다. 


    이유가 있다. 시대가 인물을 만든다. 나는 그것을 대표성이라 생각한다. 벙어리 마을에서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 비뚤어질 수 없는 운명이다. 다른 길은 모두 봉쇄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지 못한다. 그가 김대중이고 노무현이고 유시민이고 김어준이다. 


    다른 사람은 벙어리 마을에서 태어나지 않았던 게다. 노무현은 청와대에 들어가서 한 달 안에 죽어서 나올 수도 있다고 당신 입으로 말했다. 한국의 기득권 집단이 얼마나 악랄한 똥인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노무현은 당신의 목에 떨어지는 칼날을 뻔히 보고도 피하지 못했다. 


    피하면 가족과 친구의 목을 치기 때문이다. 말년에는 사람 만나기를 거부했다. 봉하에 내려오지 말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았지만 막지 못했다. 그리고 똥들은 앞과 뒤에서 다투어 칼을 찔렀다. 형님 한칼 들어가고 아우 한칼 들어가고 진중권, 유창선, 성한용이다.


    예로부터 인간은 참으로 드물다. 김어준이 인물인가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 천만에. 사람 얼굴 쳐다보는 사람과는 대화할 수 없다. 사람이 아니라 게임을 믿어야 한다. 그 사람이 어떤 게임에 속해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그 게임을 지배하는 에너지의 기세를 믿어야만 한다. 


    벙어리 마을은 원래 잘 없고 벙어리 마을에서 유일하게 말하는 사람도 드물다. 그런 시대가 드물게 있고 운명의 격랑 속에 빠져 탈출할 수 없을 뿐이다. 나는 시대를 믿을 뿐 사람을 믿지 않는다. 운명을 믿을 뿐 인간을 믿지 않는다. 사람은 변하지만 벌어진 게임은 계속된다. 


    유튜브에 세 치 혀를 잘 놀려서 떡상을 쳤다는 집금명인이 널려 있지만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없다. 벙어리 마을에 살아본 적이 없으니 말이 귀한 줄 모른다. 한 사람이 말하면 다들 일제히 쳐다볼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자기 생각을 말하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뎅?' 


    이런 것은 똥들의 입에서나 나오는 소리다. 진짜는 날아오는 패스를 골로 연결하는 것이다. 좋은 어시스트를 올리는 것이다. 그들은 있어야 할 자리에 미리 가 있다. 크로스를 올리려고 하면 이미 골대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가서 서 있어야 할 자리를 아는 사람이 진짜다. 


    입으로 말해지는 생각, 이념, 도덕, 인격, 성품, 평판, 명성, 성찰, 진정성 다 필요 없다. 말이 통하고, 말귀를 알아듣고, 말이 귀한 줄 알고, 하늘의 소리를 중계하는 자가 진짜다. 젊었을 때의 유시민은 뒤에서 어시스트나 올려주려고 했을 것이다. 지금은 골을 넣어야만 한다. 


    어진 군주 밑에서 재주 있는 식객 노릇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은 김어준이 어시스트 올리고 유시민이 골을 넣어야 한다. 윤석열, 한동훈이 자기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고 판을 그렇게 만들어가고 있다. 저쪽에서 끝판왕 나오면 이쪽도 끝판왕으로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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