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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28526 vote 1 2016.03.16 (00:10:13)


- 그동안 했던 이야기 총결산입니다. 종교에 비유하면 불교의 금강경이나 기독교의 사도신경처럼 골수가 되는 부분만 모아놓았습니다. 가끔 들러서 다시 읽어보시라고 공지로 설정합니다. - 

     


   구조론의 개요


     

    구조론의 세계에 빠져보자


    거기에 황금이 있다는 확신이 있으면 백 미터도 파들어가는게 인간이다. 구조론이 어렵게 생각될 수 있지만, 딱 이것이 전부이고, 이 바깥에 아무 것도 없다는 확신을 가진다면 도전해볼 만 하다.


    ‘완전성’에 대한 감각이 중요하다. ‘완전한 것은 이런 것’이라는 대략적인 느낌을 가져야 한다. 타격감을 잃어버린 야구선수가 전성기 때의 모습을 담아놓은 비디오를 보고 그 때의 느낌을 떠올려 밸런스를 회복하는 것과 같다.


    완전한 것은 조절이 가능한 것이다. 조절은 외부에서 유입되는 에너지에 ‘의하여’ 가능하다. ‘의하여’가 중요하다. 항상 상부구조가 있는 것이다. 반면 ‘위하여’는 망한다. 계 전체를 통제하는 조절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에너지는 외부에서 지속적으로 유입되어야 한다. 그럴 때 계 전체가 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통제가 가능하다. 그럴 때 완전하다.


    언어로 깨달아야 한다. 존재는 사건이다. 언어는 사건을 반영한다. 사건은 시공간에 펼쳐진다는 점에서 완전성이 있다. 언어 역시 완전성을 반영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언어는 대개 불완전하다. 사건의 일부만을 반영한다.


    관측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눈, 코, 귀, 입, 몸으로 통해 얻은 데이터를 뇌에서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잘못된다. 파편화된 사건의 부스러기를 언어화 한다. 사건 전체를 온전히 전달하지 못한다.


    깨달음은 완전한 언어의 획득이다. 완전한 언어는 공간적 대칭과 시간적 호응으로 조직된다. 전제와 진술로 대칭을 이루고, 조건문과 반복문으로 호응을 이룬다. 하나의 언어 안에 두 개의 사건이 연결된 구조가 있다.


    어떤 A의 변화가 B의 변화를 부를 때, 그 A와 B를 통일하는 제 3의 C의 존재와 그 C의 변화하는 방향성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때 사건은 완전해진다. C는 계나 장의 형태로 존재한다.


    “바람이 불면 춥다. 추우면 옷을 입는다.” 완전한 문장의 예다. 생략되고 함축된 것을 펼쳐보자. ‘바람이 불면 몸이 춥다. 몸이 추우면 옷을 입는다.’ 여기서 두 개의 사건은 바람과 몸의 관계, 그리고 몸과 옷의 관계다.


    조절장치는 바람이 부는 정도에 따라 더 많은 옷을 입는 것이다. 바람이 부는 A와, 이에 따라 몸이 추운 B와, 이에 맞서 옷을 입는 C와 더 많은 옷으로 조절하는 C의 변화까지 풀세트로 갖추어졌다. 완전하다.


    딱 느낌 와주는 거다. 뭔가 일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똥꼬부터 뻑적지근하게 차오르는 충일감이 있다. 이 구조를 갖추지 않으면 뭔가 허전하고 어색하다. 느낌이 어색하면 보나마나 틀린 거다. 안철수가 하는 짓을 보면 나사가 하나 빠져 있는 느낌이 딱 들지 않는가. 그런 거다.


    깨달음은 느낌으로 직관한다. 소실점이 맞지 않는 이발소 그림을 봐도 온 몸이 뒤틀리지 않는 사람과는 대화할 수 없다. 느낌이 와줘야 한다. 1초 안에 기계적으로 몸이 반응한다. 체온이 올라가고 등이 따끔거린다.


    ‘개가 꼬리를 친다. 반갑다는 신호다.’ 어색하지 않는가? 조절장치는? 개는 꼬리를 몇 번 흔들어야 하지? 한 번? 두 번? 세 번? 도둑놈에게는 왜 꼬리를 흔들지? 왜 개는 꼬리 흔드는 횟수로 반가운 정도를 조절하지 않을까? 여기서 온 몸이 뒤틀리는 느낌이 와줘야 한다. 두 말이 필요없다. 이런건 개소리다.


    개가 꼬리를 흔드는 진짜 이유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항문냄새를 전달하려는 것이다. 도둑에게는 꼬리를 흔들어 위협한다. 주인에게는 꼬리를 흔들어 자기 존재를 알린다. 개는 겁먹었을 때만 꼬리를 감춘다.


    여기서 개가 꼬리를 흔드는 횟수는? 어떻게 조절하지? 안테나와 같다. 안테나는 지속적으로 켜져 있어야 한다. 상대방과의 대치상태가 유지되는 한 꼬리를 흔들어야 한다. ‘나는 너를 쳐다보고 있어.’ <- 이 상태를 유지하는 한 계속 꼬리친다.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긴밀하게 대응하는 것이다.


    ‘고양이가 주인에게 얼굴을 부비는 이유는?’ 마찬가지다. 눈밑에 냄새를 분비하는 취선이 있다. 냄새를 자기 얼굴에도 바르고 사람에게도 바른다. 고양이가 세수를 하는게 아니라 냄새를 바르는 것이다.


    고양이는 외출했다 돌아온 주인에게서 낯선 냄새가 나면 도망가기도 한다. 냄새에 대해 호불호가 있다. 여기에 조절장치가 있다. 고양이는 어느 정도로 얼굴을 부비지? 냄새가 충분히 묻혀질때까지 얼굴을 부빈다. 조절장치가 작동하고 있으면 보나마나 맞는 말이다. 직관으로 알 수 있다.


    ‘냇물 속에 가만이 서 있는 학은 왜 한쪽다리를 들고 있을까?’ ‘추워서’라고 배운다. 틀렸다. 관찰해보면 알겠지만 많은 새들이 한쪽다리를 들고 서 있다. 체온을 절약하기 위해 한쪽다리를 들고 있다면? 아기새들은 추워서 물에 안 들어가려고 할 것이다. 어떻게 조절하지? 조절할 수 없다.


    체온을 절약하기 위하여라고 했다. 위하여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모든 ‘위하여’는 조절할 수 없다. ‘의하여’가 조절장치다. 그러므로 ‘위하여’는 틀렸고 ‘의하여’는 맞다. 맞는 말인지 개소리인지는 이것으로 1초만에 판별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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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하여’는 상부구조를 끌어들이므로 에너지가 있고 조절이 가능하다. 조절되면 완전하다. 어떤 주장이든 말이 되려면 A와 A의 변화, 이에 연동된 B와 B의 변화 그리고 둘을 통합하는 C와 C의 변화가 진술되어야 하며 C의 변화에 일정한 방향성이 있어야 하고 C는 계나 장의 형태를 가져야 하며 C의 변화는 의하여로 표현되어야 한다. 이 구조를 훈련하면 직관력을 키울 수 있다. 1초 안에 판단한다. 이 구조는 대칭과 호응의 형태로 언어에 반영되어야 한다.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가리켜지는 달도 보지 말고 둘 사이의 관계를 봐야 합니다. 둘 사이에서 치고 나가는 방향성을 봐야 합니다. 에너지가 유입되는 부분을 봐야 합니다. 조직이 뻗어나가는 생장점을 찾아야 합니다.

     

    완전하면 예측할 수 있다


    ◎ A – 총이 있다.
    ◎ A의 변화 - 총을 쐈다.


    ◎ B – 피해자가 있다.
    ◎ B의 변화 – 피해자가 맞았다.


    ◎ C – A와 B는 원한관계가 있다.
    ◎ C의 변화 – 예상되는 다음 단계와 연결된다.


    A가 B를 쐈다. 둘은 원한관계 C에 의해 통일된다. 여기서 조절장치는? 원한의 깊은 정도다. 원한이 깊다면? 한 방 더 쏠지도 모른다. 즉 다음 단계의 예측이 가능한 것이다. 하나의 사건이 또다른 사건을 불러 일으킨다. 완전하다. 의미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졌다.’ 까마귀와 까마귀의 날아감 그리고 배와 배의 떨어짐 사이에 둘을 연결하는 고리는 없다. 우연의 일치다. 이 경우에도 둘을 연결하는 C는 있다. C는 우연이다. 우연히 까마귀와 배는 같은 시공간에 존재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단계의 예측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예측가능성이 없다. 조절장치가 없다. 다음 단계가 없다. 완전한 언어는 의미를 획득하며 다음 단계의 예측이 가능케 하며 구조를 복제한다. 에너지 조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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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와 B의 대칭에서 둘을 통일하는 토대의 공유 C를 찾아 호응시키면 다음 단계의 예측이 가능하므로 언어는 비로소 의미를 획득한다. 다음 단계를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나 실패한다. 성춘향 A와 변학도 B의 대칭은 알아채지만 성춘향과 이몽룡을 연결시켜준 ‘계급제도의 모순’이라는 호응 C를 모른다. 그러므로 그 C의 변화 곧 계급제도의 해체와 발전을 모른다. 그러므로 관객은 옳게 호응하지 못한다.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자신이 왜 감동받았는지 모른다. 하녀가 주인에게 매맞는 내용의 연극을 보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지만 극장 밖에서 기다리는 하녀가 추위에 자신의 장갑을 꼈다는 이유로 귀싸대기를 올려붙인다.


    깨달음은 타고난 뇌기능이다. 자신이 깨달아놓고도 무엇을 깨달았는지 모른다. 깨닫지 못한다면 감동받을 수 없다. 드라마를 보고 감동받은 사람은 누구나 깨달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다음 단계로 연결되지 않는다. 호응되지 않는다.


    극장에서 박수로는 호응하는데 현실에서 행동으로 호응하지 않는다.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때는 모든 한국인이 호응하여 애도했지만 투표장에서는 배반한다. 호응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 깨달아 놓고도 깨달음을 쓰지 않는다.


    깨달음은 본능이다. 호응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누구나 호응한다. 그러나 잠시 뿐이다. 극장에서 잠시 눈물을 훔치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진짜 호응해야 한다. 다음 단계로 진도를 나가줘야 한다. 다음 단계를 예상할 때 인간은 강해진다.


    에너지는 다음 단계와의 낙차가 정한다. 질이 입자와 힘과 운동과 량을 거느리므로 다음 단계가 많다. 다만 불확실하다. 일이 과연 입자로 힘으로 전개할지는 미지수다. 힘과 운동은 끄트머리라서 다음 단계가 적다. 대신 목표달성이 쉽다.


    98퍼센트 갖추었으므로 2퍼센트만 채워도 성공할 수 있다. 보수는 쉬운 목표를 기대하여 힘과 운동으로 승부하고, 진보는 원대한 계획을 세워 질과 입자로 승부한다. 진보가 장기전이라면 보수는 단기전이다. 장기전 수행능력이 깨달음이다.


    호응하여 다음 단계를 예측하고 대비하고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 보수는 남의 다된 밥을 나꿔챈다. 진보는 바깥으로 나가서 새로 전단을 연다. 남이 벌여놓은 일에 끼어들어 빼먹지 말고 자신만의 새로운 싸움을 열어갈 수 있어야 한다.

   

     

    사건에서 언어로


   
    세상은 사건의 집합으로 되어 있다. 단위 사건은 에너지의 입출력, 원인과 결과 그리고 의사결정으로 조직된다. 하나의 사건은 이를 반영하는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다섯 가지 매개변수를 가진다.


    우리는 이 다섯 가지 중에서 원인과 결과 둘만 알고 있다. 부족하다. 그러므로 본질과 현상, 형식과 내용, 알맹이와 껍데기, 뼈와 살 등으로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 존재의 실체를 가늠하지 못한다.


    사건이 아닌 것은 물질 알갱이다. 세상은 원자 알갱이의 집합으로 구성되었을 수 있다. 물질은 작용을 가했을 때 반응하는 것이다. 위치와 속도로 관측되는 반응이 인간의 경험적 지각을 구성한다.


    경험되지 않는 부분은? 모른다. 반응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물질개념은 피상적 관찰의 결과이며 인간은 물질의 실체를 모른다. 양자역학이 파헤치고 있지만 여전히 인간은 세상의 근원을 모른다.


    어쨌든 세상은 존재한다. 가장 큰 개념인 존재가 모든 형이상학적 사유의 출발점이 된다. 그런데 존재라고 하면 우리는 막연히 ‘공간적 존재’로만 여긴다. 시간을 제쳐놓았다. 이는 언어의 함정이다.


    ‘있다is’는 말 자체가 턱으로 공간의 어떤 사물을 가리키는 데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헷갈리기 시작한다. 실수를 깨닫고 실재reality, 실존existence, 존存, 재在 등으로 표현하니 어수선하다.


    사건은 공간적 존재에 에너지를 태우니 시공간적 존재다. 에너지 관점의 도입이다. 에너지적 요소와 물질적 요소가 결합되므로 잘 뭉쳐지지 않고 결을 드러낸다. 마른 논바닥처럼 결따라 갈라진다.


    원자 알갱이 개념은 ‘잘 뭉쳐진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가는데 잘 갈라진다. 숨은 전제를 파헤쳐보자. 세상은 물질의 집합이므로 집합시켜야 한다. 모은다는 것이다. 잘 모여야 한다. 뭉쳐져야 한다.


    과연 그럴까? 잘 갈라져야 한다. 운동선수가 근육을 키우는 방법은 근육세포를 찢는 것이다. 찢으면 상처가 아물면서 커진다. 키가 한창 자랄 때는 성장통을 느낀다. 살이 찢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갈라지거나 혹은 결합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의사결정이다. 세상은 의사결정의 집합이다. 의사결정이 사건을 이룬다. 의사결정하려면 먼저 의사결정할 수 있는 상태로 가 있어야 한다.


    네거리로 가야 길을 꺾을 수 있다. 그것은 대칭이다. 세상은 대칭으로 되어 있다. 대칭은 둘의 대칭이다. 의사결정하면 갈라진다. 그러므로 A와 결합한다는 것은 동시에 B와 찢어진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세상이 깨진다. 그 찢어진 상처를 봉합하는 것은 호응이다. 세상은 대칭과 호응으로 의사결정한다. 이합집산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구조는 항상 이중구조다. 상부구조가 있고 하부구조가 있다.


    형식이 있고 내용이 있다. 본질이 있고 현상이 있다. 즉 관측되는 것 외에 무언가 하나가 더 있다는 말이다. 관측되는 부분이 물질이라면 관측되지 않는 부분은 에너지다. 에너지는 열역학이 규명한다.


    열역학 1법칙과 2법칙으로 모두 설명한다. 모래시계에 모래가 다 떨어져도 뒤집으면 그만이다. 이것이 1법칙이다. 그런데 누가 뒤집지? 이것이 2법칙이다. 사건은 안과 밖이 있다. 계系 혹은 장場이다.


    모래시계를 뒤집는 손은 반드시 계系 혹은 장場의 바깥에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건은 밖≫안의 방향성을 가진다. 에너지는 자유로운 형태바꾸기가 가능하지만 통제하려면 사건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만큼 손해를 보므로 그만큼 사용할 수 없게 된다. 현실에서는 주로 열로 변해서 빠져 나간다. 열손실이다. 부분의 합은 전체보다 작아진다. 부분을 결합하려면 누군가 밖으로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대략 윤곽이 드러났다. 사건은 처음 밖으로부터 에너지를 유도하는 데서 시작된다. 안으로 들여와서 대칭을 조직하면 사건의 시작점이 생긴다. 보통 이를 원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의사결정한다.


    의사결정은 공간적 방향의 선택이며 그 실행은 시간적 순서의 선택이다. 그 실행을 결과라고 한다. 최종적으로 에너지의 회수가 있다. 사건은 의사결정을 가운데 놓고 원인과 결과가 앞뒤로 놓여진다.


    다시 그 바깥에 에너지의 입력과 출력이 있다. 입력≫원인≫의사결정≫결과≫출력의 다섯 매개변수가 사건을 조직한다. 의사결정을 중심으로 그 앞부분인 입력과 원인은 사건의 상부구조를 구성한다.


    그 뒷부분인 결과와 출력은 하부구조가 된다. 원인과 결과는 관측으로 알 수 있다. 의사결정은 내부에서 일어나므로 잘 관측되지 않는다. 에너지의 입출력도 보통 무시한다. 배경으로 치는 것이다.


    그 배경이 사실은 진짜 원인이라는 것을 모른다. 남녀가 연애를 한다면 눈에 보이는 사건 밖에 어떤 열정, 성적 긴장, 욕구불만이 있다. 이 부분은 논하지 않는다. 남북한의 물리적 충돌은 보인다.


    그 이전에 군사적 긴장상태는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보통은 갈등이라든가 마찰이라든가 원한이라든가 이런 모호한 말로 대충 뭉개고 넘어간다. 그래서 사건이 제대로 해결이 안 되는 것이다.


    밑바닥 에너지를 보지 않으므로 노동자가 왜 새누리당에 투표하는지 모른다. 지식인의 현학적인 언동이 노동자들의 자존감을 뭉갰기 때문이다. 존엄의 훼손에 의해 그쪽에 에너지가 고인 것이다.


    노동자가 모르는 어려운 말을 쓰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이를 모욕으로 여긴다. 지식인은 자신이 노동자를 모욕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모욕할 의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보통 이렇게 망한다.


    에너지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되어야 한다. 구조라고 하면 뼈대를 떠올리겠지만 뼈대야말로 에너지가 지나가는 길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형태는 살이다. 그 뒤에 뼈대로 가는 에너지가 덧씌워져 있다.


    무엇이든 한 겹 더 있다. 모래시계는 2층이 있다. 정치에는 배후가 있다. 바둑에는 포석이 있다. 축구에는 포메이션이 있다. 야구에는 작전이 있다. 전쟁에는 전술 위에 전략이 있다. 반드시 더 있다.


    감추어져 있는 하나를 더 찾아내지 않으면 알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보는 세계는 물질세계이고 그 위에 한 겹 더 있다.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가 있다. 인력으로 설명된다면 배후에 척력이 있다.


    당신이 사랑을 논한다면 그 사랑 위에 무언가 있다. 당신이 영화를 보고 재미를 논한다면 그 재미 위에 무언가 더 있다. 당신이 그림의 아름다움을 논한다면 그 표피의 아름다움 위에 하나 더 있다.


    당신이 음식의 맛을 논한다면 그 맛 위에 분위기가 있다. 당신은 돈을 좋아하지만 그 돈 위에 그 돈으로 사려고 하는 권세가 있다. 그 권세 위에 진짜는 존엄이다. 당신은 열등감의 보상을 원한다.


    그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아야 한다. 정상에서 전모를 보는 관점이라야 한다. 맨 꼭대기에 무엇이 있는가? 신과의 일대일이다. 거기서 바라봐야 세상이 보인다. 그 눈높이로 올라서지 않으면 안 된다.


    불교의 금강경처럼 핵심을 압축해서 설명해 보려고 한다. 세부적으로는 이야기가 길지만 대략 개요는 이렇다. 대략 이런게 있다는 것만 알아도 본전은 건진다. 당신이 무엇을 보든 표피를 본 것이며 속에 뼈대가 있다. 반드시 하나가 더 있다. 이야기는 그 높은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깨달음 시험문제



    패러다임의 전환


    깨달음은 ‘연역적 사유’다. 연역은 툴tool을 사용하므로 특별히 훈련해야 한다. 수학이라도 처음에는 주먹구구로 셈을 하지만, 난이도가 올라가면 반드시 공식을 외어야 하는 것과 같다. 깨달음은 정해진 공식에 대입하여 단번에 풀어내는 사유방법이다. 완전히 다른 세계가 열린다.


    깨달음이 쓰는 연역적 사유의 툴tool은 구조론이 제공한다. 구조론의 세부내용을 몰라도 깨달음의 툴을 쓸 수 있다. 원리를 몰라도 공식을 외어 문제를 풀 수 있고, 컴퓨터를 몰라도 이메일은 보낼 수 있다. 깨달음의 깊은 경지에 이르지 못해도 툴을 빌어쓸 수 있다. 단 참여하는 사람이 많아야 한다. 내가 이메일을 보내도 상대방이 받지 못하면 실패다. 많은 사람이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와야 ‘깨달음의 스타일’이 먹힌다. 거기에는 시간이 걸린다.


    그렇다. 단지 시간이 문제일 뿐 언젠가는 인류 모두가 이 방법을 쓰게 된다. 총은 7세기에 그 원시형태가 출현했지만 전쟁의 형태를 바꾼 것은 그로부터 800년이 지난 16세기의 일이었다. 다시 400년이 지나고서야 칼과 활을 전쟁터에서 퇴장시켰다. 마침내 전쟁의 패러다임이 바뀐 것이다.


    깨달음도 마찬가지다. 패러다임의 전환이 문제가 된다. 바꾸려면 학계의 시스템까지 다 바꾸어야 한다. 인류의 의사결정 방식을 통째로 갈아엎어야 한다. 그런데 구조론이 아니라도 문명의 패러다임이 바뀔 조짐이 있다. 바야흐로 인공지능의 시대가 열리려 한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로 입증된 것은 바둑의 상부구조가 완전히 해명되지 않았다는 거다. 인류는 아직 바둑을 잘 못 둔다. 바둑이 가야할 길이 아직도 멀다. 알파고가 먼저 가서 인간을 손짓해 부르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한편으로 알파고도 중대한 약점을 드러냈다.


    인간의 뇌구조를 모방했지만 여전히 구조를 모른다. 일본로봇 아시모군이 이족보행에 도전한지 30년 지났지만 여전히 동작이 어설프다. 혼다가 인체의 구조를 모르기 때문이다.


    인류는 도처에서 구조의 문제에 부딪혀 있다. 귀납의 한계다. 연역하지 않으면 구조의 마지막 천장을 뚫지 못한다. 구조론이 답을 제시한다. 언젠가 모두가 함께 가게 될 길을 먼저 가면 즐겁다.


    귀납은 모방이다. 연역은 복제다. 자연의 표피를 모방하지 말고 원리를 복제해야 한다. 깨달아야 할 연역원리는 자연의 의사결정원리다. 의사결정은 ‘일’을 처리한다. 구조론은 ‘일’을 복제한다. 하나의 일은 원인에서 결과까지 다섯차례 의사결정으로 성립한다.


    다섯차례 의사결정으로 구조가 복제된다. 일사결정의 주체는 에너지의 결이다. 에너지의 결은 열역학 1법칙과 2법칙으로 해명된다. 알파고는 정책망과 가치망을 쓴다. 정책망이 시나리오를 추출하면 가치망이 확률을 평가하는 순서가 의사결정의 결이다.


    정책망이 가치망에 앞선다. 열역학 2법칙이 열역학 1법칙에 앞선다는 것이 구조론이다. 2법칙이 시나리오를 제출하고 1법칙이 가치를 평가한다. 2법칙이 에너지 효율성에 근거하여 시나리오를 제출하고, 1법칙이 에너지의 형태를 바꾸어 실행한다.


    구조론은 질, 입자, 힘, 운동, 량 다섯 매개변수를 쓴다. 정책망과 가치망 외에 셋이 추가된다. 질에서 확산의 방법으로 경우의 수를 모으고, 입자에서 이를 수렴시켜 시나리오를 추출하고, 힘에서 평가하여 의사결정하고, 운동에서 실행하여 일을 진행하면 량에서 결과값이 제출된다. 알파고가 아니라도 무슨 일이든 하다보면 에너지 효율이라는 덫에 걸리므로 결국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다.


    일을 깨달아라


    세상은 일이다. 일은 곧 사건이다. 존재는 사건이다. 세상도 하나의 사건이고, 인생도 하나의 사건이다. 세상의 사건에 대응하려면 자신도 사건을 일으켜야 한다. 사건을 일으키려면 ‘의사결정’이 필요하다. 깨달음은 능동적 의사결정에 필요한 연역적 사유 능력이다. 연역이 아니면 귀납이다.


    귀납으로는 사건의 전모를 알 수 없다. 대응할 수 없다. 어떻게든 대응하려면 연역해야 하므로 ‘숨은 전제’를 만들어 가짜 연역을 하게 된다. 말하자면 일종의 ‘가상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언어는 전제와 진술로 조직된다. 전제를 알아야 연역할 수 있다. 전제를 모르고 진술하면 거짓 전제를 만들게 된다. 혹은 전제 없이 불완전하게 말한다. 주어가 없거나 목적어가 없는 말을 한다.


    언어가 엉터리다. 언어에 전제가 없지만 마치 전제가 있는듯이 기능하는 것이 ‘숨은 전제’다. 언어가 틀렸는데도 감으로 의사소통이 되는 것이다. 그게 위험하다. 깨달음은 ‘숨은 전제’의 타파다.


    때로는 전제를 숨기지 않고 귀신이나 음모론처럼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는 꾸며낸 ‘거짓 전제’다. ‘유태인이 음모를 꾸몄다.’고 선동하는 것이 거짓 전제의 대표적 예다. 진짜로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 독일인이 단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숨은 전제는 ‘의사결정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것이다. 즉 스트레스에 시달리느니 지도자에게 의사결정을 위임하고 맘 편하게 지내자는게 독일인의 본심이다. 의사결정을 회피하는 비겁한 짓이다.


    전제를 숨기거나 거짓으로 꾸며내는 언어도단을 타파해야 한다. 츤데레 행동에서 숨은 전제를 알 수 있다. 친하게 지내고 싶지만 상대방이 오해하여 오버할까봐 한편으로는 호의를 보이면서도 일정한 선을 긋는 것이 츤데레 행동이다. 상대방을 무시하면서도 상대방의 작은 행동에 일일이 반응하는게 재미지다.


    깨닫지 못하면 의사결정할 수 없다. 상대방의 행동에 수동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상대방의 선제행동을 기다리다가 지쳐서 자신이 먼저 집적거리게 된다. 그것이 귀신이나 음모론 등으로 나타난다.


    북한이 미국에 대해 하는 행동도 비슷하다. 평화협정이라는 의사결정을 주도할 능력이 자신에게 없으므로 미국의 제안을 기다리다가 지쳐서, 한미군사훈련을 두고 미국의 선제공격이라는 거짓 전제를 만들고 소동을 피운다. 관심끌기 행동이라는 점에서 츤데레의 일종이다. 까불지만 귀엽다.


    의사결정 장애를 극복하라


    깨닫지 못한 사람의 ‘의사결정장애’를 통해 역설적으로 깨달음의 의미를 알 수 있다. 대개 자신을 피해자로 규정하고 대항하려고 한다. 주체적인 의사결정을 못하므로 상대방을 괴롭혀서 되돌아오는 반응을 보고 거기에 맞추어 대응하려고 한다. 한 마디로 쿨하지 않고 찌질하다. 질척댄다. 공통점은 숨은 전제가 있거나 혹은 거짓 전제를 깔고 들어간다는 점이다.


    1) 귀신병
    - 귀신을 무서워한다. 초능력, UFO, 외계인, 간첩, 땅굴, 음모론도 원리는 같다. 심해지면 망상증으로 발전한다.


    2) 종교병
    - 귀신병의 순화된 형태다. 광신도, 환빠, 점장이, 미신, 주술, 암시, 손없는 날 따지기 등의 유사종교 행동이 있다.


    3) 증오병
    - 자신을 피해자로 규정하고 상대를 미워한다. 지역주의, 반페미니즘, 반북, 반일, 반미, 반중, 반노, 반지식 따위다.


    4) 혐오병
    - 증오병이 약자에게 향해진다. 동성애, 소수인종, 다문화, 노숙자, 왕따, 이지메 등으로 사회적 약자를 공격한다.


    5) 위세병
    - 완장차고 권위주의를 휘두른다. 애국놀음, 의전행사, 가부장, 허세, 패거리, 서열, 선후배 따지기로 사람을 제압한다.


    6) 역할병
    - 위세병의 방어적 형태다. 답게행동, 대칭행동, 파벌행동, 평판공격, 성역할, 뒷담화 등 칸을 나누어 의사소통의 장벽을 만든다.


    7) 몸에좋다병
    - 역할병을 자신에게 적용한다. 음식가리기, 결벽증, 나르시즘, 자기혐오, 건강염려증 등 신체로부터 반응을 끌어내려 한다.


    8) 신경증
    - 선천적 본능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노이로제, 과민행동, 강박증, 편집증, 벌레나 쥐, 뱀, 닭, 개를 무서워 하기도 한다.


    9) 중독병
    - 신경증이 특정 대상에 꽂힌다. 도벽, 도박, 술, 담배, 마약, 쇼핑, 거식증, 과식증, 수집증 등 각종 중독이 이에 해당된다.


    10) 망상증
    - 시나리오를 만들고 증거를 수집한다. 의처증, 의부증, 빨갱이증, 국정원증, 해킹증, 감시증 등 자신을 가두고 고립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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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 열 가지 ‘의사결정장애’는 능동적인 의사결정을 못할 때 수동적으로 반응하기 위해 상대방이 먼저 자신을 공격했다며 ‘가상적’을 만드는 것이다. ‘거짓 전제’를 핑계삼으나 사실은 본인도 모르는 ‘숨은 전제’가 있다. 대개 무의식이 가하는 스트레스로부터의 회피기동이다. 무의식의 압박은 집단으로부터 가해진다. 집단의 의사결정 중심으로 쳐들어가야 안정감을 느낀다.


    귀신이라는 개념은 집단이 전염병이나 천재지변에 대응하거나, 혹은 집단의 의사결정을 위해 정치적 구심점을 만들려는 것이다. 리더를 뽑기 힘드니까 ‘조상신’을 가상의 리더로 만든다. 종교의 탄생이다. 찾아야 할 숨은 전제는 ‘집단의 의사결정’이다. 하느님이나 귀신, 조상신은 집단의 의사결정을 위해 만들어낸 거짓 전제다.


    의사결정 장애를 극복해야 한다. 어떻게 가능한가? 사건을 일으켜야 한다. 사건을 일으키려면 에너지를 조달해야 한다. 에너지는 중첩에서 조달된다. 존재의 중첩을 깨닫는 것이 깨달음이다.


    중첩은 전체다. 파편화된 부스러기가 아닌 온전한 사건 전체다. 사유는 전체에서 부분으로 나아가야 한다. 눈으로 보면 소실점의 중첩이 보여야 하고, 귀로 들으면 화음의 중첩이 들려야 한다. 그림은 중첩을 구도로 풀어내고 음악은 중첩을 장단으로 풀어낸다.


    언어 역시 대칭과 호응으로 중첩된다. 그러므로 반드시 숨은 전제가 있다. 숨은 전제는 대칭과 호응을 끌어내는 논리장치다. 그걸 숨긴다는 것은 거짓말을 하거나 혹은 틀린 말을 한다는 거다. 양치기 소년과 같다. 산중에 혼자 있으니 무섭다는 사실이 숨은 전제다.


    언어는 대칭과 호응에 의해 작동한다. 대칭되지 않았어도 보이지 않게 대칭되어 있고, 호응되지 않았어도 보이지 않게 호응되어 있다. 숨은 반쪽을 찾아야 한다. 화자話者가 엉터리로 말해도 똑똑하게 알아들어야 한다.


    언어는 동사의 중첩으로 명사를 조직하고, 명사의 중첩으로 주어를 조직하고, 주어의 중첩으로 문장을 조직하고, 문장의 중첩으로 명제를 조직하고, 명제의 중첩으로 담론을 조직한다. 문장의 중첩은 대칭을 쓰고 명제의 중첩은 호응을 쓴다. 이에 맞게 말해야 바른 언어다. 무엇보다 언어가 떳떳해야 한다.


    중첩은 구조를 이룬다. 세상은 구조다. 구조는 이중구조다. 살이 있으면 보이지 않아도 뒤에 뼈가 감추어져 있다. 반드시 구조가 하나 더 있다. 의사결정은 어떤 대칭된 둘의 ‘사이’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나면 의사결정할 수 없다. 대칭이 사이를 만든다.


    정치는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다. 결혼은 남녀 사이에서 일어난다. 전쟁은 국가 사이에서 일어난다. 반드시 둘의 대칭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 대칭을 이룬 상대편이 진술되지 않으면 숨은 전제다.


    그 ‘사이’를 만드는 것은 ‘하나’다. 하나는 길이다. 둘 사이에는 보이지 않아도 길이 있다. 길은 결이다. 결은 에너지가 가는 길이다. 에너지는 하나다. 남녀 사이에 결혼이 있다면 사랑은 하나다. 축구팀 사이에 대결이 있다면 우승은 하나다. 먼저 둘의 대칭을 찾고 다시 대칭에서 사이를 찾아야 한다.


    그 사이에 움직여가는 것이 있다. 에너지다. 에너지는 방향성이 있다. 역사는 진보의 방향으로 간다. 두 나라가 갈등하지만 문명은 진보의 일방향으로 간다. 두 가게가 경쟁하지만 번영의 일방향으로 가고, 두 팀이 대결하지만 흥행은 일방향이다. 진보와 보수가 대결하지만 사실은 그 보수도 진보에 디딤돌로 쓰인다. 보수하기 위한 보수는 없다. 거기 까지 알아채면 깨달음이다. 진리의 일방향성이다.


    언제나 뒤에 하나가 더 있어서 둘의 대칭을 이루고 그 대칭된 둘의 뒤에 또 하나가 있다. 그 하나를 찾아야 호응할 수 있다. 깨달음이다. 둘의 대립을 찾기는 쉽다. 딱 봐도 대립되어 있잖아. 몽룡과 변학도의 대립이 아니더라도 모든 이야기는 대립을 끼고 간다. 그 대립된 둘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와, 그 하나의 진보하는 방향성까지 알아야 비로소 언어는 호응된다. 호응되면 사건은 복제된다. 깨달아야 할 완전성은 그곳에 있다. 완전성은 복제의 완전성이다.


    수수께끼는 모두 풀렸다. 보이지 않아도 둘이 중첩되어 있으니 둘 사이에는 반드시 소실점이 있고, 화음이 있고, 황금률이 있다. 그 지점이 고착되지 않고 움직인다는 것이 깨달음의 묘미다.


    반드시 중앙이 있는데 그 중앙이 고착되어 있지 않고 움직여 다닌다. 식물이 자라면서 생장점을 밀고나가듯이 진보는 중앙을 움직여 간다. 바둑은 중앙을 먹으면 이긴다. 그런데 그 중앙을 알 수 없다. 천원은 중간이지 중앙이 아니다. 먼저 귀에서 살아야 그 두 귀의 대칭 사이에서 중앙이 도출된다. 두 귀를 연결하여 중앙을 만들면 이긴다. 깨달아야 할 중용의 경지다.


    망둥이가 뛰면 꼴뚜기도 뛴다


    언어는 호응呼應된다. 호呼는 부르는 것이요 응應은 응하는 것이다. 망둥이가 부르면 꼴뚜기가 응답한다. 안철수가 호呼하면 김한길이 응應한다.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하나의 사건이 또다른 사건을 촉발한다. 여기서 완전성이 성립한다.


    언어 역시 하나의 생각이 또다른 생각을 복제하면 완전하다. 암수가 교미하여 새끼를 낳으면 완전하다. 새끼를 낳지 못하면 불완전하다. 언어도 그러하고 사건도 역시 그러하다. 이 구조에서 뇌가 반응한다. 전율하는 지점이 있다.


    대칭 다음에 호응이라야 한다. 여기에 함정이 있다. 인간의 뇌는 한 꺼번에 두 가지 판단을 하지 못한다. 둘을 판단하려면 중첩시켜 하나로 만든 다음에 판단해야 한다. 이 절차를 어기는 방법으로 속임수가 가능하다.


    망둥이가 뛰면 꼴뚜기도 뛴다. 여기서 망둥이가 뛴다는 사실만 이야기하면 명제다. 명제는 전제와 진술로 조직된다. 망둥이가 왜 뛰었는지 말해야 판단이 가능하다. 그렇게 성의껏 말하는 사람이 잘 없다. 전제 빼고 진술만 읊조린다. 그리고 곧 호응을 요구한다. 안철수처럼 ‘죽어도 좋다’고 말하면서 누가 죽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말을 엉터리로 하는데 호응하면 낚인다.


    신경통 환자는 날씨가 흐리면 무릎관절이 쑤신다. 기압이 떨어지면 관절내부의 압력이 높아져서 통증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기압 이야기 해줘야 한다. 그것이 전제다. 판단할 수 있게 말해줘야 한다.


    깨달음은 숨은 전제를 간파한다. 전제가 숨는 이유는 사람들의 관심이 호응에 쏠리기 때문이다. 제비가 낮게 날면 비가 온다. 제비가 사건 1이면 비는 사건 2다. 안철수가 뛰면 김한길이 뛴다. 김한길로 주의가 쏠려버린다. 안철수가 왜 뛰었는지 들여다보지 않는다. 분위기를 띄워 호응을 하도록 유도한다. 낚인다.


    흥분하면 당한다. 호응하지 말고 낚시질을 꿰뚫어봐야 한다. 영화감독들은 주로 가족이야기로 눈물을 짜서 관객의 호응을 유도한다. 배우가 눈물을 흘리면 관객도 눈물을 흘린다. 배우가 왜 눈물을 흘리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과연 그게 눈물 흘릴만한 사정인가? 설득력이 없는데 말이다.


    열 가지 의사결정 장애행동 곧 귀신, 종교, 증오, 혐오, 위세, 역할, 몸에좋다, 신경증, 중독, 망상은 모두 호응을 강제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여기서 호응이 꼭 ‘긍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부정’해도 낚인다.


    야바위꾼이라면 일체의 대응을 하지 말아야 한다. ‘아직도 저런 야바위가 있나. 하고 혀를 차며 멈춰섰다가 털린다. 대신 돈을 걸어준다며 지갑을 뺏는 사람이 있다. 이때 경찰이 나타났다고 소리치며 일제히 도주한다. 지갑을 되찾으려 하지만 행인1이 교묘하게 앞을 차단한다. 알고보니 모두가 한 패다.


    사기꾼의 약점을 파악했으니 같이 혼내주자는게 사기꾼이 전매특허로 쓰는 수법이다. 합작으로 사기를 치는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사기를 당한 거였다는 식이다. 자신이 범인이므로 신고도 못한다.


    북한의 일거수 일투족에 일일이 반응하는 조중동과 박근혜 정권이 사실은 북한에 적대적 공생으로 호응하고 있는 것이다. 일체의 대칭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이 설계한 판이 아니면 돈을 걸지 말아야 한다. 주도권을 잃으면 찬성해도 낚이고 반대해도 낚이는게 법칙이다.


    트럼프의 공약이 옳으냐 옳지 않느냐는 생각하지 않는다. 트럼프의 다음 행동이 궁금하다. 어떻게든 호응하게 된다. 이미 낚여 있다. 트럼프를 비판해도 오히려 기름을 붓는 형국이 된다.


    무엇인가? 사건은 기승전결로 이어진다. 누군가 기起에 서서 바람을 잡으면 찬성하든 반대하든 상관없이 거기에 대응하는 것만으로 승承이 되어버린다. 김종인이 기에 서버렸기 때문에 안철수의 반대든 김한길의 찬성이든 상관없이 승이 되었다. 사건은 기승전결로 가버린다. 에너지의 흐름에 휩쓸린다.


    상대방의 말에 호응하지 말고 자기 언어 안에서 호응시켜야 한다. 상대방의 말에 호응한다는 것은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고 의사결정을 회피하는 것이다. 이유를 대도 자기 자신의 비전에서 이유를 대야지 상대방이 어떻게 했으니 내가 어떻게 응수한다는 식은 온당치 않다. 내가 천하통일의 비전을 세웠으므로 이렇게 한다고 말해야 한다. 자기 언어가 완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깨달아야 할 사실들 당신은 한국말을 배웠지만, 당신은 아직 한국말을 배우지 못했다. 누구도 당신에게 한국말을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기 때 배웠다고? 그것 말고! 또다른 세계가 있다. 언어 위의 언어가 있다. 세계 위의 세계가 있다. 존재 위의 존재가 있다. 그것은 의사결정의 세계다. 아자황이 두는 것은 바둑알이요 알파고가 두는 것이 진짜 바둑이다. 아자황 위에 알파고 있다.


    당신은 결정된 것을 전달하는 언어를 배웠을 뿐, 의사결정하는 언어를 배우지 못했다. 당신은 가만 있어도 저절로 떠오르는 생각을 말하여 전달하는 기술을 배웠을 뿐 능동적으로 사유를 조직하는 기술을 배우지 못했다. 관측되는 물질세계 위에 그것을 조직하는 에너지세계가 별도로 있다.


    아마와 프로의 실력차이는 크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세계다. 언어에 대해서도 당신은 아마추어이고 사유에 대해서도 당신은 아마추어다. 더 높은 세계로 올라서야 한다. 밖으로 표현하지 말고 내부에서 조직하라. 언어를 막 내뱉어버리지 말고 내 안에서 그것을 완성시켜라. 무엇보다 자기 언어를 얻어야 한다.


    인간이 언어를 배우는 방법은 ‘호응’이다. 자연이 먼저 그대에게 말을 걸어온다. 그대는 응답하는 자의 포지션에 선다. 포지션이 잘못되었다. 이미 틀려버렸다. 이는 언어의 절반에 불과하다. 당신은 한국말을 조금 배우다 만 것이다. 당신의 언어는 불완전하다. 포지션을 바꾸어야 언어가 완전해진다.


    다른 사람의 말을 곧잘 알아듣고, 자기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자기 사유를 조직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깨달음에 의해 언어는 완전해진다. 다른 사람이 부르는 언어에 호응하고 혹은 전달하는 포지션을 넘어 자기 사유를 조직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냥 떠오르는 생각은 온전한 내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황에 반응하는 것이며, 반응하면 낚인다. 주도권이 상대방에게 있기 때문이다. 권리를 빼앗겨 있다. 상황에 반응하지 말고 그 상황을 연주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지금 당신의 언어는 다른 사람이 운전하는 버스에서 좋은 승객 노릇에 불과하다. 그 버스를 운전하지는 못한다. 깨달음은 완전성의 깨달음이다. 완전한 것은 복제한다. 암컷과 수컷이 만나 새끼를 복제하듯이, 범종과 당목이 만나 소리를 복제하듯이, 모든 완전한 것은 어떤 둘의 만남과 의사결정, 그리고 복제의 형태를 가진다. 당신은 ‘만나’고 ‘결정’하고 ‘복제’해야 한다.


    그것은 언어에도 있고 자연에도 있고 어디에든 있다. 당신은 자연과 만나고 세상과 만나고 집단과 만나고 인류와 만나야 한다. 그리고 의사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세상이 그대를 쥐고 흔들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당신의 사유는 외부의 영향에 흔들리는 소리에 불과했다.


    혹은 둔탁한 소리를 내고 혹은 청량한 소리를 내지만 그대는 연주되는 악기에 불과하다. 연주자가 아니다. 당신의 언어는 당신 내부에서 조직된 것이 아니다. 당신은 동물처럼 반응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당신에게는 권리가 없다. 정답은 ‘만나기≫의사결정하기≫복제하기’다. 인간의 언어 역시 이 수준에 올라야 한다. 세상을 이 구조로 이해해야 한다.


    ◎ 틀린 언어 – 말을 걸어오는 상황에 반응하기
    ◎ 바른 언어 - 만나기≫의사결정하기≫복제하기


    깨달음은 사건의 깨달음이다. 존재는 시공간상에 조직되는 하나의 사건이다. 사건은 원인에서 결과까지 일사천리로 쳐들어 간다. 기승전결로 간다. 그 사이에 의사결정이 있다. ‘시작≫원인≫의사결정≫결과≫끝’의 형태다.


    이 전개과정에서 결정할 것인가 아니면 결정당할 것인가다. 가만있는 것도 보이지 않게 내부에서 의사결정하고 있다. 남산 위의 바위가 가만있어 보이나 중력과 열심히 상호작용하고 있다. 가만이 서 있는 건물도 비바람을 막아 의사결정하고 있다. 양자단계까지 쪼개면 우주 안에 가만있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이 사건이다. 사건은 의사결정한다.


    의사결정으로 보는 관점을 획득해야 한다. 이미 결정된 것을 판단하고 전달하는 ‘옳다/그르다’ 관점을 버리고 현재진행형 관점을 얻어야 한다. 옳든 그르든 진행과정에서 다 용해되고 만다. 현재의 확률을 계산하지 말고 미래를 꿰뚫어 ‘응수타진’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흑돌을 쥐면 고전하는 AI가 잘 못하는 것이다.


    1) 어떤 둘 ‘사이’에서 의사결정이 일어난다.
    2) 하나의 토대를 공유하는 둘의 대칭에 사이가 있다.
    3) 깨달아야 할 ‘숨은 전제’는 ‘토대의 공유’로 존재한다.
    4) 두 시선의 만남에 소실점이, 두 음의 만남에 화음이 있다.
    5) 두 바퀴의 만남에 바퀴축이, 두 변의 만남에 중앙이 있다.
    6) 대칭된 전제와 진술, 두 언어의 호응에 하나의 깨달음 있다.
    7) 둘을 통일하는 하나에서 계 전체를 꿰는 에너지가 조달된다.
    8) 에너지가 치고나가는 결이 일의 방향과 순서로 정해져 있다.
    9) 에너지의 결은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다섯 단위를 이룬다.
    10) 확산방향을 수렴방향으로 바꾸면 에너지의 장場이 조직된다.
    11) 구조의 중첩이 확산을 수렴으로 바꾸어 에너지를 유도한다.
    12) 개인의 의사결정이 중첩되는 부분은 상부구조인 집단이다.
    13) 마음을 움직이는 에너지는 상부구조인 집단에서 유도된다.
    14) 사회의 의사결정에서 구조의 중첩은 권리≫권력을 이룬다.
    15) 상부구조인 집단에 일의 대표성인 ‘권리 메커니즘’이 있다.
    16) 상부구조로 쳐들어가서 일의 대표성인 권리를 얻어야 한다.
    17) 권리≫권력 메커니즘을 따르지 않으면 역설적 자기소개다.

    18) 소아병적 자기소개는 사건으로 나를 쳐서 발언권을 얻는다.
    19) 상부구조 해명의 발언권 획득없이 말하는게 숨은 전제다.
    20) 내 입맛이 아닌, 고객 입맛이 아닌, 음식 입맛을 따르라.
    21) 맛의 상부구조인 음식입맛에서 나의 발언권이 유도된다.
    22) 눈앞의 목적이 아니라 과정에서 구조의 진화가 목적이다.
    23) 구조의 진화가 상부구조이며 눈앞의 목적은 자기소개이다.
    24) 실행하는 변방인에서 결정하는 천하인으로 갈아타야 한다.
    25) 변방인은 상대방의 행동을 지켜보고 자기행동을 결정한다.
    26) 천하인은 자기 캐릭터를 밀어붙임으로써 발언권을 이룬다.
    27) 기승전결의 기에 서서 합을 맞추면 권리가 있어 즐겁다.
    28) 만나서 합을 맞추어 사건을 일으키는 자가 되어야 한다.
    29) 수레가 화물을 운반하나 그 운반하는 수레가 화물이다.
    30) 언어가 의미를 전달하나 그 의미를 싣는 언어가 의미다.
    31) 에너지가 물질을 조직하나 그 에너지가 물질의 진짜다.
    32) 사건이 존재를 연출하지만 그 사건이 그 존재의 진짜다.
    33) 자연과 인간의 모든 것은 의사결정원리 하나로 환원된다.
    34) 상부구조의 의사결정에 권리와 발언권과 대표성이 있다.
    35)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계속해가는 것이 인생의 정답이다.
    36) 상대의 수에 반응하지 말고 선제대응으로 권리행사하라.
    37) 선제대응을 하려면 사건 전체의 시나리오를 가져야 한다.
    38) 깨달음은 세상과 나를 아우르는 사건 전체의 시나리오다.
    39) 전체 시나리오의 추출이 알파고의 정책망이 하는 일이다.
    40) ‘신과의 일대일’ 대칭에서 ‘사건전체 시나리오’를 얻는다.


    형상법칙Constructal Law이 참고가 된다. 형상법칙은 자연계에서 최적의 적응 형태를 만들어가는데 따른 규칙이다. 가뭄으로 인한 논바닥의 갈라짐이나 거북등의 모양이나 동물의 허파꽈리나 눈송이의 결정이나 천체들의 형성에 이르기까지 자연계의 모든 디자인 형태를 결정한다.


    구조론은 형상법칙을 보편화 한다. 단 형상법칙이 수동적인 적응이라면 구조론은 능동적인 조직이다. 형상법칙이 주어진 에너지 한도 안에서 최적의 의사결정을 한다면, 구조론은 백지상태에서 처음 그 에너지를 조직하는 부분까지 다룬다. 구조론은 보다 높은 층위의 의사결정구조까지 탐색한다.


    자연과 인간의 모든 의사결정에 구조론이 적용된다. 형상법칙의 논바닥 갈라짐 뿐만 아니라 생물의 진화, 물질의 진화, 집단의 발전, 회사의 성장, 국가의 조직, 우주의 진화에 이르기까지 망라한다. 마음의 구조, 일의 구조, 정치의 전략, 바둑의 수순, 전쟁의 전술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의사결정에 ‘질, 입자, 힘, 운동, 량’이라는 구조론의 다섯 가지 매개변수가 사용된다.


    구조론은 구조주의를 넘는다. 구조주의는 주어진 환경 안에서의 최적화를 지향한다. 구조 이전에 에너지가 있다. 에너지는 환경을 새로 조직한다. 최초 에너지의 유도절차가 가장 중요하다. 구조론이라고 명명한 것은 구조가 인간이 관찰가능한 가시적 형태이기 때문이다. 에너지는 추론될 뿐 직접 관찰되지 않는다.


    구조체 위에 에너지 있다. 그러므로 구조론은 에너지 이론이다. 구조는 에너지가 가는 길이다. 에너지가 반복적으로 가면 구조가 드러난다. 강물이 반복적으로 흐르면 물길이 드러나고, 사람의 발길이 반복되면 길이 생긴다. 구조는 2차적이고 1차적인 것은 의사결정원리다. 에너지는 의사결정원이다.


    ◎ 구조 위에 에너지가 있다.
    ◎ 에너지는 의사결정원源이다.


    구조론은 의사결정이론이다. 결정된 것을 관측하는 자의 포지션에 서면 이미 틀려버린다. 결정하는 자의 포지션에 서야 한다. 결정하는 주체는 에너지다. 그 에너지의 효율성이다. 그 효율성이 정하는 공간의 방향이다. 그리고 그 공간의 방향에 연동되어 결정되는 시간의 순서다.


    이 부분을 해명하는 것은 열역학 2법칙이다. 최초 무無에서 사용가능한 열역학적 에너지 도출은 척력을 인력으로 바꾸는 즉 장場에서 입자로의 전환이다. 곧 구조의 중첩이다. 중첩은 효율성을 내부에 숨긴 즉 에너지다. 구조체 내부에 잠복한 효율성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다.


    자연은 효율을 감추었다가 그것을 풀어내는 방법으로 의사결정한다. 마이너스 원리다. 물이 가는 길은 효율적이다. 낮은 곳으로 마이너스 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가는 길도 그러하고 전기가 흐르는 길도 그러하다. 정치가 가는 길도 마땅히 효율을 따라야 한다. 장사꾼이 돈을 버는 길도 보나마나 효율이라야 한다.


    있는 효율을 쥐어짜는건 쉽다. 약자를 착취하면 된다. 이는 보수꼴통이 쓰는 방법이다. 운동에너지다. 없는 효율을 새로 생성하기는 어렵다. 집단의 지혜를 모아야 한다. 이는 진보가 추구하는 방향이다. 위치에너지다. 여럿을 한 자리에 모아놓으면 중구난방으로 떠들어서 망한다. 축을 부여하고 대칭을 조직하여 확산방향을 수렴방향으로 바꾸어야 에너지가 생성된다. 이에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바둑의 수순처럼 엄격해야 한다. 아니다. 그 반대다. 바둑의 포석처럼 자유로워야 한다. 그래야 창의가 가능하다. 아니다. 바둑의 사활은 정해져 있어서 한 수라도 틀리게 놓으면 죽는다. 구조론은 포석처럼 자유로우면서도 사활문제처럼 엄격하다. 룰을 알면 자유롭고 룰을 모르면 자유가 없다. 초보는 사활문제를 배우니 엄격하고 고수는 포석을 연습하니 자유롭다.


    상부구조는 자유롭고 하부구조는 엄격하다. 사건의 원인에 서면 자유롭고 결과에 서면 엄격하다. 기승전결의 기에 서면 자유롭고 결에 서면 엄격하다. 이심전심이 되면 자유롭고 소통이 불통이면 엄격하다. 토론 때는 자유롭고 실천 때는 엄격하다. 군자의 길은 자유롭고 소인의 길은 엄격하다.


    손자병법에서 오자병법으로


    구조론의 세계는 방대하나 대강 맛뵈기는 이러하다. 모든 사람이 구조론의 대가가 될 수는 없겠으나 구조론의 스타일을 따라갈 수는 있다. 구조론의 운전기사는 못 되어도 좋은 승객은 될 수 있다. 승객이 많이 모여 있으면 운전기사는 저절로 나타나는 법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내가 모르는 또다른 세계가 있구나 하고 받아들이면 된다. 원래 한국의 순장바둑은 포석이 없었다. 화점에다 돌을 깔아놓고 싸움바둑만 한다. ‘포석’이라는 또다른 세계가 있구나 하고 알아채면 된다.


    그 세계에는 고수 위에 더 고수가 있다. 하수의 싸움바둑 위에 집의 효율을 따지는 도이사쿠의 실리바둑이 있고, 실리바둑 위에 두터움을 추구하는 우칭위엔의 세력바둑 있다. 그 위에는? 없다. 거기가 끝이다. 알파고가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었지만 역시 현대바둑의 범주 안에 있다.


    묻지마로 돌격하는 항우병법 위에, 안 싸우고 무위로 이기는 손자병법 있고, 손자병법 위에 완벽하게 털어버리는 오자병법 있다. 그 위에는? 없다. 거기가 끝이다. 힘 위에 입자 있고 입자 위에 질 있다. 그 위에 뭐 없다. 알렉산더는 순발력을 앞세워 힘으로 이기고, 한니발은 기병을 양날개로 붙이는 편제를 갖추어 입자로 이기고, 미군은 핵무기를 앞세워 질로 이긴다. 핵무기 위에는? 없다. 거기가 천장이다.


    힘으로 이기는 왈자 위에, 머리로 이기는 노자 있고, 머리로 이기는 노자 위에 덕으로 다스리는 공자 있다. 덕 위에는? 없다. 덕이 이득을 주므로 덕의 베풀음에 덕본 사람이 자연히 따르기 때문이다. 사람이 무리지어 따르면 자연히 구조는 복제된다. 완전성이 그곳에 있다. 손자병법 사상의 원초인 노자는 써먹을 지식을 주지만 오자병법 사상의 원초인 공자는 따르는 무리를 준다. 사람이 먼저다. 노자 위에 공자 있다. 공자 위에는? 없다.


    힘으로 쥐어짜는 재벌 위에 훔치는 갤럭시 있고, 훔치는 갤럭시 위에 창의로 덕을 베푸는 스티브 잡스 있다. 스티브 잡스 위에는? 없다. 스티브 잡스의 덕을 본 사람이 앱을 만들어 다른 사람에게 덕을 베풀 때 구조가 복제되므로 이미 완전하다. 득得이 덕德을 복제하니 일의 한 사이클이 그것으로 완결된다.



      깨달음 5분요약

       

    ‘바람이 불면 춥다.’ ‘추우면 옷을 입는다.’ 이것이 하나의 완전한 언어다. 완전한 언어는 구조의 복제가 가능해야 한다. 완전한 언어에는 대칭과 호응이 있어야 한다. 대칭은 공간적으로 벌리고 호응은 시간적으로 연결한다.


    ◎ 사건 1 - 바람이 분다. 몸이 춥다.
    ◎ 사건 2 – 몸이 춥다. 옷을 입는다.


    바람에서 몸으로 공간이 확장되었다. 이것은 대칭이다. 바람이 불어 몸이 추운 사건과, 몸이 추워 옷을 입는 사건이 시간적으로 연결되었다. 이것은 호응이다. 하나의 사건이 또다른 사건을 일으킨다. 구조의 복제가 일어난다.


    이러한 구조로 되어있어야 완전하다. 어떤 A와 B가 있고, A의 변화가 B의 변화를 촉발한다. 이때 A와 B를 통일하는 제 3의 존재를 포착하는 것이 깨달음의 핵심이다. 그것은 보통 어떤 장場, 혹은 계系의 형태로 존재한다.


    ‘상품공급이 감소하면 물가가 오른다.’ ‘물가가 오르면 소비가 감소한다.’ 두 개의 사건이다. 두 사건을 통일하는 제 3의 존재가 있으니 그것이 ‘시장원리’다. 이 구조로 되어 있으면 완전하다. 당신은 무언가를 깨달은 것이다.


    이 구조가 정치에도 있고, 경제에도 있고, 사회에도 있고, 언어에도 있고, 역사에도 있고, 양자역학에도 있다. 이 구조는 방향성이 있다. 시장원리는 시장을 활성화 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왜인가? 에너지 유입 때문이다.


    장場과 계系는 서로 다른 둘을 연동시켜 묶어놓는데 거기에 에너지가 소비된다. 그러므로 태양이 지구에 빛을 쏘아보내듯이 에너지가 지속적으로 유입되어야 장이나 계가 형성된다. 태양의 에너지 공급이 생태계를 이룬다.


    장과 계는 에너지의 지속적인 공급에 의해 시계태엽처럼 전체가 한 방향으로 풀려나간다. 진보와 보수라도 마찬가지다. 진보가 이렇게 되면 보수가 저렇게 되는데, 둘을 통일하는 제 3의 존재가 있으니 곧 역사의 진보다.


    인간의 지식이 축적되므로 전체는 진보방향으로 간다. 자동차가 균형을 잡기 위해서 움직이면 전진하게 된다. 운동선수가 밸런스를 잡기 위하여 노력하면 실력이 늘게 된다. 뭔가 플러스 되어야만 평형이 유지되는 것이다.


    나침반이 남북을 가리킨다. 달에서도 남북을 가리킬까? 아니다. 지구 깊은 곳에 철이 회전하고 있으므로 자기장이 있는 것이다. 어떤 서로 연결된 두 가지 변화가 있으면 그것을 통일하는 제 3의 어떤 존재는 반드시 있다.


    그 제 3의 존재는 명명되어 있지 않다. 이름이 없으므로 생각할 수 없다. 그것에 명명하는 자가 그 분야의 태두가 된다. 권위자가 된다. 이는 특별히 배워서 아는게 아니라 언어감각으로 그냥 알게 된다. 그래서 깨달음이다.


    소실점이 안 맞는 그림은 어색하다. 화음이 안 맞는 음악은 불편하다. 조리에 안 맞는 언어는 찜찜하다. 그 감각이 깨달음이다. 에너지가 지속적으로 공급되므로 어색함과 불편함이 있는 것이다. 그림이라면 일단 시야가 넓다.


    인간의 눈이 어떤 것을 보고 끝나는게 아니라 조금 더 보기 때문에 그 에너지 증가에 의해 소실점이 있다. 귀로 조금 듣고 끝내는게 아니라 더 듣기 때문에 화음이 있다. 언어 역시 더 많은 정보를 담으므로 깨달음이 있다.


    어떤 증가하는 곳에는 반드시 그것이 있다. 우주는 팽창하고, 시간은 흐르고, 인구는 늘어나고, 사건은 많아지니, 자연은 증가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깨달음이 있다. 에너지 추가공급이 멈추면 죽는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말로 의사소통한다. 우리말은 그냥 만들어진 것이지 세종대왕이 특별히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보통사람이 우리말을 만들었다. 보통사람 기준에 맞추어진 것이다. 특별히 심오한 경지를 말하려면 우리말로 안 된다.


    언어 이상의 언어가 있다. 깨달음이다. 간단하다. 대칭과 호응을 이루도록 말하는 훈련을 하면 된다. 대칭과 호응이 안 되면 어색함을 느껴야 한다. 자연을 관찰하다 호응이 안 되는 지점을 발견하면 가시처럼 걸려야 한다.


    호응이 되도록 퍼즐을 맞춰보면 진리가 찾아진다. 시장원리를 찾아내듯이, 마음의 소통원리도 찾아내고, 정치의 진보원리도 찾아내고, 예술의 공감원리도 찾아낼 수 있다. 장場이나 계系가 있고 치고나가는 방향성이 있다.



aDSC01523.JPG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가리켜지는 달도 보지 말고 둘 사이의 관계를 봐야 합니다. 둘 사이에서 치고 나가는 방향성을 봐야 합니다. 에너지가 유입되는 부분을 봐야 합니다. 뻗어나가는 생장점을 찾아야 합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6.03.16 (03:32:19)

저는 이왕지사 이리된거...알파고가...인간의 모든 삶을 다 살아볼수 없고..인간을 이해 하려면, 모델이 필요할 것이니....알파고가 인간이란 이런 존재였구나....하는...그런 삶을 지금처럼 계속 살아보는 것으로다가...알파고의 수집에 한 번 덕을 베풀어 볼까나....하는 생각 드네요. ㅎ~~~
[레벨:7]아바미스

2016.03.16 (11:01:39)

감사합니다. 뻥 뚫리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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