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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인가? 황태연-강준만 논쟁에 관하여 진중권

한겨레 21에 민주당내 후보단일화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황태연-강준만 논쟁을 읽고,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이번에는 강준만의 말이 옳고, 황태연씨 얘기는 틀렸다. 그는 대학에서 소위 '정치학'을 가르치는 학자라고 한다. 하지만 지금 황태연이 펴는 논리는 학자의 양심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학자의 정치적 앙가주망은 이런 것이 아니다.

순도가 많이 떨어지는 그의 주장을 내가 차마 '곡학아세'라 부르지 못하는 것은, 그가 "추석민심"을 들먹이며 세상에 아첨은 하고 있지만 아직 '학'을 동원하지는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그의 발언은 올바른 정치의 원칙을 세워야 할 학자의 입이 아니라 모후보의 선거캠프에서나 나올 수 있는 뻔뻔한 동원 이데올로기이다. 지금 나는 학자의 윤리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중이다.

후보단일화의 명분

소위 '후보단일화'가 필요한 이유를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평화, 개혁 세력의 대선 승리는 중차대한 민족사적, 세계사적 변화의 시기에 민족화합을 통해 한반도와 동북아에 영구평화를 정착시키고 이 평화를 바탕으로 반도강국을 건설해 통일비전을 구현할 '중도개혁 정권의 창출'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그래서 "대국적으로 후보를 단일화하여 2파전 구도로 냉전, 수구세력과 일합을" 겨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 정몽준의 집권이 이렇게 "중차대한" 의미를 가졌는지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근데 언제부터 그가 "민족사적", "세계사적" 사명을 가진 후보로서 "동북아에 영구평화"를 정착시키고 "반도강국"을 건설할 슈퍼맨이 되었을까? 이런 것을 전문용어로 '뻥'이라 부른다. 도대체 이걸 우리보고 믿으라는 얘기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정몽준과 그의 정당에 대해 일반인들이 가진 이미지와는 상당히 많이 동떨어져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나는 얼마 전에 정몽준씨가 노무현과 단일화를 할 수도 있고, 이회창씨와도 단일화를 할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 신문에서는 "과거를 불문하고" 개나 소나 다 받아주겠다고 말하는 것을 읽은 것 같다. 이어지는 그의 주장은 이렇게 요약된다.
(1) 수구세력의 집권을 막아야 한다는 게 "추석 민심"이다
(2) 단일화가 안 되면 선거에서 정몽준에게 표를 몰아줘야 하는데
(3) 표분산이 일어나기 쉬우므로 단일화를 통해 표 손실을 막자
(4) '중도연합'이라는 면에서 노와 정의 차이는 크지 않고
(5) 절차적 정당성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6) 수구세력 집권 저지가 더 큰 대의이므로
(7) 자민련까지 포용하는 덧셈정치를 해야 한다.
재미있게도 그는, '노무현이 자기 색깔만 고집하고 후보직을 안 내놓으면 DJP 연대를 위해 후보를 사퇴한 김종필보다 못한 사람이 된다'는 말로 글을 맺는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인가?

후보 단일화론의 실체

이것은 황태연의 논리이자 동시에 '후보단일화'를 추진하는 민주당 의원들의 견해이기도 하다. 문제는 '후보단일화'의 논리가 얼마나 현실성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강준만이 이미 강조했듯이 한 마디로 '단일화'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정치밥 먹은 민주당 의원들이 설마 이것을 모르겠는가? 걔들, 홀딱 까져서 알 거 단 안다. 안 되는 거 뻔히 알면서도 주장하는 거다.

그럼 상식적으로 저들이 왜 저런 주장을 하는지, 그것을 분석해 제시하는 것, 그리하여 유권자들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객관적 자료를 주는 것, 그게 정치학자의 과제일 터이다. 저들은 대체 왜 저러는 걸까? 왜 실현가능성도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 단일화 타령을 하는가? 황태연씨가 '정도령' 타령으로 덮어버린 그 진리를 발가벗겨 보겠다. 뭐, 대단한 게 아니라 알만 한 사람들은 이미 다 아는 거다.
(1) 노무현은 대통령 후보가 되어도 "설렁탕" 안 사주더라
(2) 다음 총선에 금뱃지 달려면 빵빵한 놈 밑에 있어야 한다.

한 마디로 (1)과 (2)를 몸으로 주장하는 방식이 바로 그 거창한 후보단일화론이다. 여기서 이 추접한 개인정치가 졸지에 얼마나 근사한 얘기로 둔갑하는지 황태연 저(著) '정감록'을 다시 한번 인용한다. 명문이다.
"평화, 개혁 세력의 대선 승리는 중차대한 민족사적, 세계사적 변화의 시기에 민족화합을 통해 한반도와 동북아에 영구평화를 정착시키고 이 평화를 바탕으로 반도강국을 건설해 통일비전을 구현할 '중도개혁 정권의 창출'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보라, 얼마나 근사한가. 보스한테 설렁탕 얻어먹고, 보스 믿고 금뱃지 달아, 팔자 좋게 골프를 치며 탱자탱자 하기 위해 유전자를 바꾸어 밤섬의 철새가 되는 게 졸지에 이렇게 심오한 민족사적, 세계사적 의미를 띠게 되지 않는가. 이데올로기는 원래 이렇게 작동하는 법이다.

물론 정치가들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학자라면 정치가들이 이런 근사한 레토릭을 구사할 때 그 바탕에 깔린 물질적 이해관계가 무엇인지 드러내서 보여줘야 한다. 그게 학자의 임무다. 그런데 황태연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기껏 '추석 민심' 빙자하여 공론의 장에 정치권의 거짓말을 그대로 옮겨놓고 있다.

물론 학자가 정당의 이데올로그의 역할을 할 수가 있다. 그러려면 그 정당의 이념과 정책을 수호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황태연의 이념은 무엇인가? 미췬 놈 널 뛰듯 하는 "추석 민심"이다. 그의 정책은 무엇인가? "군왕도 민심을 잃으면 옥좌를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국민경선으로 뽑힌 후보에게 옥쇄 내놓으란다. 감히 당신이 뭔데?

이게 이념인가? 이게 정책인가? 이게 정치학인가? 앞으로 황태연씨가 재직하고 있는 동국대학교에서 정치학과 학술 심포지움은 추석날 시아버지 박사, 시어머니 박사, 삼촌 박사, 이모 박사, 조카 박사 초빙해서 광 팔며 고스톱 치는 것으로 대체할 일이다

민주당의 정체성

모택동의 권력은 총구에서 나오고, 황태연의 권력은 추석날 고스톱 판에서 나온다. 이게 우리 정치의 수준이고, 우리 정치학의 현황이다.

한 정당의 이념을 담당했던 사람의 수준이 이 지경이니, 평범한 민주당 지지자들이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얘기다. 정당은 이념을 가져야 하고, 정책을 가져야 하고, 그것으로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 그 정체성은 '수구세력 집권저지'와 같은 네거티브한 양상이 아니라 포지티브한 형태로 정식화되고, 또한 실천되어야 한다.

이회창의 집권을 저지하는 것도 진보? 믿지 말라. 그걸로 일시적으로는 한 걸음 나갈 수 있을지 몰라도, 결과적으로는 두 걸음 후퇴하게 된다.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고 실천하는 대신에 '이회창의 집권'을 무슨 종말론적 상황이나 되는 것처럼 묘사해 대니까, 결과적으로 정몽준 버전의 '소극적 진보론'이 등장하고, '될 사람 밀어주자'는 논리가 유권자들에게 먹히는 것이다. 그 결과는? 정체성의 혼란. 그 댓가는? 분당과 탈당...

선거 때만 되면 '종말론'이 등장한다. 가령 조중동과 한나라당은 현 정세를 묵시록에 나오는, 7년 대환란의 시대나 되는 양 묘사한다. 이제 구세주가 오실 일만 남앗다는 것이다. 회창 주님을 영접하세, 아멘. 반대 편에서는 한나라당이 집권할 경우 그리스도에 의해 무저갱으로 쫓겨났던 사탄이 사슬을 끊고 마귀권세를 행사하러 돌아온단다. 이런 종말론의 상황에서는 당연히 '승리'가 최고가치가 되고, 그 결과 최소한의 '윤리'마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한나라당이 집권한다고 지옥이 되는 것도 아니고, 정몽준이 집권한다고 천국이 되는 것도 아니다. 노무현도 마찬가지다. 그는 슈퍼맨이 아니어서 이 땅을 지상낙원으로 만들 수 없다. 설사 그가 순수한 의지로 충일하고, 다수의 지지를 받아 집권해도, 정치는 어차피 역관계, 타협할 수 밖에 없다. 다만 이 사회에 아주 작지만 중요한 변화를 일으킬 수는 있다. 가령 돈이 덜 드는 정치, 원칙에 따른 정치, 소신이 존중받는 정치. 원래 '진보'란 이렇게 누추한 것이다.

'집권'을 해야만 진보하는 게 아니다. 집권해도 퇴보할 수 있고, 집권못 해도 진보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사회를 한 발짝씩 앞으로 전진시키는 이들은 특정 정당의 집권이 아니라 권력과는 관계 없는 누추한 실천을 통해 그 일을 하고 있다. 집권에 목 매지 말라. 집권은 진보를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꾸준하게 원칙을 지킴으로써 신뢰를 얻을 때 비로소 미췬 넘 널 뛰듯 하는 '민심'이 아니라, 지속적이며 안정적인, 진정한 의미의 정치적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개혁' 어쩌구 하던 김근태 의원은 애매모호함을 버리고 빨리 확실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대접 받고 싶으면 먼저 대접하라. 노무현이 지금 받는 대접, 언젠가 김근태 의원 자신도 받게 될 것이다. 서울대, 내가 다녀봐서 아는데, 꼴통들이 득실득실한 똥통학교다. 게다가 어차피 민주화 운동 하시느라 강의실도 제대로 못 들어갔을 텐데, 대체 뭘 망설이는가? 김민석 의원, 지난 6월 광화문에서 빨간 곳 입고 함께 "대~한민국" 외쳐주던 사람이 누구였던가? 장신기씨가 말한 "운명공동체"란 운명을 같이 하는 몸이라는 뜻이다.

민주당의 정체성을 위해 어차피 떠날 사람들은 빨리 떠나야 한다. 집권을 못 해도 실망할 것 없다. 세력이 적어진다고 좌절할 필요 없다. 희망은 다수에 있는 것도 아니고 집권에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 사회의 희망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지켜야 원칙을 지키며, 지켜야 할 자리를 지키는 그 사람들에게 있다. 그렇게 남은 사람들의 수, 그것이 우리 희망의 양이며, 그렇게 남은 사람들이 간직한 소신, 그것이 우리 희망의 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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