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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3053 vote 0 2005.05.16 (17:52:37)

일본에 있는 이중섭 화백의 유족들이 150점의 적지도 않은 유작을 국내로 들여와서 전시회를 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위작논쟁이 일어난 일이 있다. 한국미술품 감정협회가 상당수의 작품을 위작으로 감정한 것이 발단이 됐다.

필자가 보기에도 가짜처럼 보인다. 그림에 성의가 없다. 이중섭 특유의 기(氣)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유족들이 진짜라고 주장하면 그 말을 믿어야 할 것이다. 설마 유족들이 거짓말을 하겠는가?

문제는 그 작품들이 제대로 그린 유화그림이 아니라 사적으로 오고간 편지들 사이에 묻어간 태작이라는 점이다. 진위여부를 떠나.. 이중섭 화백이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자신의 손으로 불태워 없앴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평론가도 있다.

이중섭은 생전에 많은 소품들을 폐기한 적이 있다. 대부분의 저명한 화가들도 그렇게 하고 있다. 유족들이 시중에 유통되어서 안되는 천재 화가의 태작을 몇 푼의 돈과 바꾸려 한다면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의 마음 속에 신비화 되어 있는 대가 이중섭의 명성에 걸맞지 않는 사적인 유품들을 함부로 노출시킨다는 것은, 위대한 영웅의 사사로운 흠결을 들추어내는 일과 마찬가지로 온당치 않은 일일 수 있다.

물론 그 반대의 입장도 있을 수 있다. 사료적 가치가 있는 유품들을 태작이라 해서 폐기할 이유는 전혀 없다. 진품이 맞다면 유족들의 입장도 이해못할 일은 아니다. 두 입장은 당분간 평행선을 그리며 논쟁을 계속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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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리통에 일행과 떨어져 길을 잃은 왕자가 어느 가난한 농부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농부는 한눈에 그가 왕자임을 알아보았지만 왕자의 초라한 행색 때문에 아무도 농부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농부는 곤란에 빠져 버렸다. 왕자에게 호의를 베풀어 두었다가 나중 궁으로 초대되어 합당한 보상을 받는 것이 옳지만, 그에게는 꽁보리밥 한그릇과 냉수 한사발 밖에 대접할 것이 없다.

도리어 왕자의 추한 모습을 엿본 죄로 은밀히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다. 농부에게는 기회이면서 위기다.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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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2일은 휴거되기로 신도들과 약속한 날자다. 날자는 하루하루 다가오고 그는 곤란에 빠져버렸다. 5월 12일이 되기 이전에 자신의 휴거를 방해할 괘씸한 녀석을 창출해내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식의 딜렘마는 어디든지 있다. 대가의 미완성작을 우연히 발견한 아마추어 화가의 고민 말이다. 대가의 반쪽짜리 작품을 자신의 손으로 완성시켜 자랑하고 싶지만 실력이 안된다는게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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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신당동 어느 골목에서 우연히 예수님을 만난다면 입장은 난처해진다. 예수는 신당동에 재림해서 안된다. 가리봉동에 재림한다 해도 곤란하기는 마찬가지다. 굳이 재림하시려면 백두산 정상에 오색 무지개를 타고 내려온다거나.. 하여간 그런 걸맞는 장소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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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에는 스포일러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어차피 독자들은 영화를 보지 않을 것이다. 설사 본다해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원래 재미없는 영화이므로 줄거리를 알고 보건 모르고 보건 아무런 차이가 없겠다.

휴일 강남역 시너스 G에 김기덕의 활을 보러갔다. 100석 남짓한 조그만 극장에 20여명의 관객이 들었다. 과연 김기덕은 1천명 이상의 한국인이 이 영화를 보게 하는데 성공할 수 있을까? 일단은 어렵지 싶다.

(덧붙여.. 주말동안 996명이 들었다는 뉴스가 떳음)

잼있는건 5월 12일이다. 극 중에서 소녀와 노인이 결혼하는 날자가 5월 12일인데 지난 5월 12일은 주목할만한 시선으로 깐느에 초대된 활이 오프닝 영화로 선정되어 끌로드 드뷔쉬에서 상영한 날과 겹친다.

그는 어떻게 자신의 영화가 5월 12일에 칸에서 상영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을까? 그냥 우연의 일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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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영화에는 많은 상징과 기호와 암시가 숨어 있다. 그것을 찾아내는 일은 재미있는 게임이 될 수도 있고.. 피곤한 일이 될수도 있다. 하여간 모르고 보면 재미없고 알고보면 재미있는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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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관음보살일 수도 있고 성모 마리아일 수도 있고 하느님일 수도 있는 어떤 완전성을 표상한다. 그 완전성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격리된 공간이 필요하다.

바다 그리고 배.. 그 바다는 인생의 바다일 수 있다. 당신이 학생이라면 학교가 그 바다이다. 당신이 직장인이라면 직장이 그 바다일 수 있다. 하나의 닫힌계.. 미학적 측면에서 완전성을 추구하는 하나의 동그라미다.

노인.. 득도를 원하는, 혹은 구원을 찾는 불완전한 존재.. 그는 대가의 태작을 훔쳐놓고 어쩔줄 몰라하는 아마추어 화가이거나 혹은 길 일은 왕자를 모시게 된 가난한 농부의 입장이다.

또는 용케 노무현을 발견한 명계남의 입장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욕 먹게 되어 있다. 명계남은 욕 먹게 되어 있다. 왕자가 알고보니 사실은 평범한 인간이더라는 사실을 아는 위험한 존재라면.. 제거되어야 한다. 대가의 명성에 먹칠이나 안하면 다행이지만.. 보통 인간들은 그 상황에서 먹칠을 하고 만다.

이중섭의 유가족들이 결국은 고인의 명성에 오점을 남기고 있듯이 말이다.(물론 이 부분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노인은 예정된 자신의 득도일.. 혹은 휴거일 혹은 휴거실패일을 앞두고 날자가 하루하루 다가갈수록 초조해 지는데.. 이런 때 당연히 낚시꾼의 형태로 휴거방해자가 등장한다.(사실은 노인이 간절히 바라는^^)

낚시를 하러 왔던 한 젊은이가 노인을 유괴범으로 고발한 것이다.(이 부분은 감정협회가 이중섭의 유작을 가짜로 판정한 것과 같다. 사실은 진짜인데..T.T)

다행스런 일이다. 노인은 자신의 실패를 정당화 할 수 있는 알리바이를 얻은 것이다. 결국 노인은 득도에 실패하고 만다. 그는 더 이상 소녀를 씻겨줄 수 없게 되었다.

소녀는 완전한 존재.. 노인은 완전해 지고자 하는 존재.. 그 완전을 추구하는 작은 하나의 동그라미 안으로 문득 끼어든 낚시꾼 젊은이에 의해.. 노인은 완전무결해야 할 소녀(그것은 당연히 진리의 은유)에게 흠집을 낸 죄로.. 탄핵될 위기에 몰린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동시에 그 노인의 분신이다. 자작극인 것이다. 자신이 자기 자신을 탄핵하는 것이다. 젊은 김기덕이 늙은 김기덕을 탄핵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는 힘을 잃고 만다. 노인의 드라마에서 젊은이의 드라마로 순조롭게 옮겨와야지만 봄여름가을겨울 다음에 오는 봄이 되는데.. 영화는 겨울에서 파산을 선고한다.

관음보살과 같은 소녀의 자비심에 의해 노인은 생 어거지로 구원되고 청년은 뻘쭘하게 서서 그 과정을 지켜본다.(영화에서는 소녀와 노인의 결혼으로 묘사된다.)

바다에 배 한척 띄워놓고 98분 동안 관객의 긴장을 잡아놓는데 성공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백지에 점 하나 찍어놓고 100분 동안 그걸 쳐다보고 있으라는 격이다. 김기덕의 무리한 시도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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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은 소품이다. 빈 백지 위에 점 하나 찍는다는 기분으로 그려본 거장의 습작이다. 금강경을 한 줄에 담아보려고 애를 쓴 흔적이 역력하다.

구도영화는 예로부터 많았다. 득도영화는 없었지 싶다. 이 영화는 구도자의 관점이 아닌 득도자의 관점에서 본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성(性)을 매개로 하여 깨달음을 은유하는 설정은 진부하다. 그러나 진리는 원래 진부한 것일 수 있다.

진리 그 자체를 영화로 옮긴다는건 무모한 일이다. 어쨌건 말을 참았어야 했다. 끝내 말을 해버렸으므로 잘 나가다가 장선우가 되어버린 감이 없잖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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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은 느슨한 이완이 아니라 팽팽한 긴장이라는 것이 김기덕의 결론. 활시위처럼 팽팽한 긴장 말이다. 수긍한다. 그런데 그걸 연출의 방법이 아니라 글자로 자막에다 써버렸기 때문에 대략 낭패.(장선우스럽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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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라는 소통의 도구가 진정한 소통을 원하는 이에게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결함투성이의 도구라고 여기는 사람과, 언어로도 충분히 소통할 수 있다고 믿고 열심히 수다를 떨어대는 사람들간의 마찰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온갖 상징과 기호와 암유가 있다. 메시지는 넘치나 물을 소쿠리에 담아주는 격이다. 메시지를 기대하는 자는 실망할 것이다. 다만 그 메시지를 담는 그릇으로서의 소통의 채널을 얻으려는 이는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체험을 공유한 자는 소통의 오르가즘을 맛볼 것이며 체험하지 않은 이는 아무런 느낌도 얻지 못할 것이다.(득도의 오르가즘을 너무 적나라 하게 묘사해서 대략 낭패.. 김기덕 감독 당신 요즘 말이 많아졌소이다.)

이 영화를 아무에게도 권하고 싶지 않다.
김기덕 본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것이 아닐까?

혼자 힘으로는 날아오를 수 없는 새처럼.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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