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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2892 vote 0 2005.05.27 (20:01:15)

한나라당의 전략
톰 크루즈 주연의 ‘라스트 사무라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검을 든 사무라이들이 총을 든 신식군대를 격파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가짜다.

물론 영화와 같은 장면들이 실제로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기록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 반대의 장면들이 더 많았다고 한다.

메이지 직전 일본에서 봉건무사들과 신식군대 사이에 상당한 정도의 내전이 있었다. 사무라이들은 16세기 식의 갑주로 무장하고 화려한 깃발을 든 채 말을 타고 돌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막상 전투가 벌어지자 그들은 도망을 치고 말았다. 신분이 낮은 농민군의 손에 목이 달아나는 수치를 당하기 싫어서다. 사무라이가 농민들 총에 맞아죽다니 말이나 되는가?

가문의 수치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은 농민의 손에 죽음을 당하는 수치를 당하느니 차라리 할복하는 길을 택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어이없는 일이지만 그 당시는 말이 되는 이야기였다.

대정봉환을 주도한 조슈와 사츠마의 낭인들은 하사(下士) 혹은 향사(鄕士)라 해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한 이유로 신분이 강등된 농민계급이 주도하고 있었다. 그 유명한 사카모토 료마부터 따지고 들면 무사신분이 아니다.

그들은 칼을 찰 권한은 가졌지만 게다를 신을 자격은 없었다. 제대로 무장을 갖추지도 못했고 갑주도 입지 않았다. 단 칼이 아닌 총을 들었다.

당시 무사들에게 있어서 전투는 일종의 예법이었다. 화려한 갑옷을 입고 멋진 무공을 세워서 주군의 눈에 들어야 했다. 말하자면 멋진 갑옷을 입지 않는다는 것은 무사로서의 예의가 아닌 것이다.

전쟁에서도 예는 갖추어야 한다. 그래야만 주군으로 부터 전공을 인정받아 땅뙈기라도 한뼘 얻어걸리는 것이다. 무엇인가? 그들은 대의명분과 같은 정사(正邪)의 개념이 없었다. 주군의 은혜를 갚는다는 사적인 충성심이 동기가 되었다. 미처 근대주의가 발붙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도 신지 못한 남루한 복장의 총을 든 하층민들과 화려한 복장을 갖추고 칼을 든 무사들의 싸움이다. 그런데 무사들은 도무지 무슨 뼈다구로 총을 든 신식군대와 맞섰을까?

진실로 말하면 그들은 싸우기 위해 전장에 온 것이 아니다. 그렇게 화려한 무구를 갖추고 정련한 대오를 짓고 행진하여 오는 것만으로 적들이 겁을 먹고 알아서 도망질을 쳐주기를 기대한 것이다.

문제는 농민군들이 신분이 높은 무사들이 무시무시한 갑옷을 입고 화려한 깃발을 앞세워서 대오를 갖추고 행진하여 오는 데도 겁을 먹지 않았을 뿐더러 도망을 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으로 전쟁의 승패는 결정되었다.

모택동의 인해전술
625 때 선보인 모택동의 인해전술이야말로 과장되어 잘못 알려진 무모한 전술 중 하나이다. 그들의 전술은 간단하다. 새카맣게 들판을 메우고 북치고 장구치며 기세좋게 전진하는 것이다.

무모한 전술이 아닐 수 없다. 기관총 밥으로 되어 전멸하기 딱 좋다. 실제로 모택동의 인해전술은 막대한 인명피해를 유발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모택동이 그 무모한 전술을 사용한 이유는?

국군과 미군이 겁먹고 전의를 상실하여 도망쳐 주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러나 영리한 리지웨이는 곧 인해전술의 속임수를 간파해 버렸다. 그들의 공세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었던 것이다.

중국군은 수만 명의 병사가 들판을 가득 메우고 일제히 밀고들어오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기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왜? 보급이 안되기 때문이다. 전선에 그렇게 많은 군대를 투입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중국군은 허장성세를 한 것이다. 병력이 많아보이도록 가장하기 위하여 일부러 병사를 집결시키지 않고 대오도 갖추지 않고 들판에 고루 흩어 놓은 것이다. 이건 위험천만의 전술이다. 전멸하는 수가 있다.

보급이 안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돌격을 시켜 미군의 전의를 상실케 하는 방법으로 미군을 멀리 쫓아놓고는 다시 기지로 후퇴하여 보급이 오기를 기다리는 식으로 이보전진과 일보후퇴를 반복한 것이다.

리지웨이는 중국군의 인해전술에 결정적인 허점이 있음을 간파하고 그 점을 적절히 역이용하여 막대한 피해를 안겨주었다. 수십만의 중국군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허망하게 죽어갔음은 물론이다.

모택동군의 얄팍한 전술과 명치시절 일본 사무라이들의 전술은 닮은 점이 있다. 싸우지 않고 이기려고 꾀를 쓴 것이다. 겁을 주어서 적이 자멸하여 도주해주기를 기대한 것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심리전이다.

이런 방법이 1회용으로는 통한다. 그러나 상대편이 그 본질을 알아버리고 그 허를 찌르는 전술로 나오면 전혀 쓸모가 없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도 비슷한 방법을 사용했다. 그들은 멀리서 대포를 쏘아댈 뿐 가까이서 접전하지 않으려 했다. 그들은 처음부터 싸울 의사가 없었던 것이다. 왜군이 쫄아서 후퇴해주기를 열망했다.

명나라 군대의 대포사격에 겁을 먹은 왜군이 평양성에서 철수하자 작전이 먹힌다 싶었다. 벽제관에서 같은 수법으로 겁을 주려다가 혼줄이 났음은 물론이다.

한나라당의 허장성세
한나라당의 전술도 마찬가지다. 허장성세로 겁을 주어서 이쪽이 자멸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실제로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그 전술의 허점이 드러났을 때 두 번 그 방법이 통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이회창의 전술은 먹혀들었다. 민주당은 후단협이니 뭐니 해서 자멸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노무현은 강단이 있는 사람이었다. 노무현이 겁을 먹지 않으니 한나라당의 전술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생각하면 히딩크 이전의 한국축구도 비슷한 점이 있었다. 강팀과 붙으면 겁먹고 쫄아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편의 작은 반칙도 큰 죄를 지은 것처럼 느껴지고, 상대편의 노골적인 반칙은 뛰어난 기량으로 받아들여지던 시기가 있었다. 그 허상을 박찬호와 박세리가 부숴놓았음은 물론이다.

이제는 한국인들도 알아버렸다. 그들의 위세에 겁 먹고 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이회창 방식은 강력한 단일대오를 형성하여 위엄을 부리고 눈알을 부라리고 호통을 치고 겁을 주는 것이다. 조중동이 그들의 화려한 갑주가 되고 늘여세운 기치창검이 되어줌은 물론이다.

앞으로 2년여.. 우리는 모택동군의 피리소리와 북소리에 잠을 설쳐야 할 것이다. 겁먹을 이유는 없다. 적들이 우리의 사격거리 안으로 진입하기 까지 쫄지 않고 버티기만 해도 우리가 이기는 싸움이다.

왜 우리가 승리하는가?
역사의 큰 흐름으로 보아야 한다. 20세기는 우리가 서구의 것을, 또 앞서있는 미국의 것과 일본의 것을 모방하고 학습하던 시기다. 21세기는 다르다. 이제는 우리 내부에서 찾은 가치로 자립하여 일어설 때다.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고 일은 역사적 ‘성장통’이라 하겠다. 학습의 시대에서 자립의 시대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기성세대의 세상을 보는 눈이 15세의 지학(志學)에 머물러 있다면 신세대의 세상을 보는 시야는 30세의 입지(立志) 혹은 이립(而立)에 가 닿아 있다 할 것이다. 이러한 본질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황우석의 교훈은 무엇인가?
황우석의 쾌거 이전에 월드컵 4강의 드라마가 있었고 문화계의 한류붐이 있었고 또 인터넷 강국으로의 데뷔가 있었다. 최근에는 삼성전자의 기세와 조선업계의 싹쓸이 수주가 있다.

이들의 성공시리즈에는 어떤 하나의 일관된 흐름이 있고 또 공통점이 있다. 그 안에서 성공모델을 찾아내어 전파할 필요가 있다. 그 성공들의 흐름 안에서 우리의 역할모델을 찾아낼 필요가 있다.

필자의 주장은 진부한 자본주의, 사회주의 논쟁을 버리고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흔히 자본주의니 사회주의니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대개 유럽식을 빌어올 것이냐 미국-일본식을 학습할 것이냐다.

필자의 견해는 유럽식도 맞지 않고 미국식도 맞지 않으며 한국식을 일구어야 한다는 거다. 왜인가? 20세기 문명과 21세기 신문명은 그 문명의 형태에서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각론을 더하자면 이야기가 길어질 터이므로 하회에서 다루기로 한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학습의 시대는 갔고 자립의 시대가 왔기 때문에, 한국인들의 자립하려는 열망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미-일의 것을 학습하자는 한나라당과 유럽의 것을 학습하자는 민노당의 주장은 한국인들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또한 역사의 필연이다. 우리당이 나아가야 할 길이 이 안에 다 있다. 다른 길은 없다. 문제는 우리당의 머리 나쁜 지도부에 이러한 사정을 어떻게 납득시킬 것인가 하나 뿐이다.
실사구시님의 글을 덧붙인다.

2002년부터 지금까지 크고 작은 싸움이 있었다. 이긴 적이 많았지만 진 적도 있었다. 이기고 진 전투를 분석하면 하나의 패턴이 있다. 국민 대중들이 주동력이 된 싸움에서는 이겼고 소위 웃대가리들 지네들끼리만 테크닉으로 맞선 싸움에서는 졌다.

2002년 국민경선에서 이겼고, 투표율이 낮은 지방선거는 졌고, 국민을 믿고 승부를 건 단일화 여론조사에서는 이겼고, 역시 국민들이 대거 참여한 대선에서 이겼다. 임기초반부터 밀리는가 싶더니 국민의 결정에 맞기자는 각오로 내놓은 재신임 정국에서 반전을 일으켰고, 국민은 아니지만 국민의 염원을 실은 대선자금 수사로 한나라당에 크나큰 압박을 가했다.

이어 국민을 믿고 굽힘없이 나간 탄핵 싸움에서 승리했으며 이어 총선에서도 과반수를 차지했다.

그러다가, 국민을 배제시킨 채 진행되던 행정수도 이전 싸움에서 이쪽의 허점을 발견한 헌재 수구세력들에게 일격을 당했다. 국가보안법 폐지 전투에서도 국민의 역할을 배재시키고 지네들끼리 협상으로 어떻게 해보려다 스타일만 구기고 물러서야 했다.

앞으로의 싸움도 마찬가지. 그야말로 '국민'들을 어떻게 '참여'시키는가가 승부의 관건이 된다. 쉬우면서도 상당히 어려운 문제이다. 당분간은 내부역량을 강화하는데 주력을 해야 할 것 같다. -실사구시-

실사구시님 글에서
"국민 대중들이 주동력이 된 싸움에서는 이겼고 소위 웃대가리들 지네들끼리만 테크닉으로 맞선 싸움에서는 졌다."

적들은 테크닉을 발휘하여 심리전을 구사한다.
우리는 실력으로 이긴다.

적은 겉으로 함성을 질러대며 속으로는 싸울 의사가 없이 우리가 자멸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적들이 우리가 구성해놓은 화망 안으로 들어올 때 까지 버티기만 해도 승리한다.

리지웨이는 제공권으로 인해전술을 이겼고 료마와 그 일당들은 총으로 사무라이의 칼을 이겼다.

우리의 본 실력은? 대한민국이 학습의 시기를 졸업하고 자립의 시기로 나아간다는 시대정신으로 우리는 승리한다. 그것이 한나라당의 칼에 맞서는 우리의 총이고 조중동의 인해전술에 맞서는 우리의 제공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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