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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1679 vote 0 2011.02.18 (17:23:07)

 

 

인생이란 무엇인가?


왜 사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으며, 지금 어디로 가고 있고, 어디까지 와 있는가? 이런 거 다들 한번 쯤 생각해 보셨을 거다. 한 마디로 ‘인생이란 무엇인가?’인데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이 실존 개념이다.


본질 ↔ 현상


실존이란 무엇인가? 실존은 현상이다. 현상이란 무엇인가? 본질에 대해서 현상이다. 본질이란 무엇인가? 하느님이다. 신(神)이다. 혹은 인간에게 투영된 신의 어떤 속성이다. ‘인간이 왜 사는가?’라는 물음에는 ‘신이 살라고 해서 산다.’는 답이 주어진다. ‘인간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에는 역시 ‘신이 딱 시키는데로 살면 된다.’는 답이 주어진다. 어떻게 사는 것이 신이 시키는대로 사는 것인가? 그 구체적인 내막은 목사나 신부들이 알려준다. 시키는대로 하면 된다.


나는 누구인가? 하느님 자식이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느님의 자식이 하느님이 살라는데로 살다가, 하느님 심판받고 천국가고 지옥가는 것이 인생이다. 이렇게 정답이 나와있다. 그런데 과연 이걸로 충분한가? 여기에 만족하는가?


만족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게 과연 맞는 말인지 따져보자는게 실존주의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회에서 하는 말이 과연 맞느냐 틀리느냐가 아니다. 중요한건 구조다. 내용을 보지 말고 형식을 취해야 한다. 다른 이야기도 많은데 왜 이 이야기가 맨 앞에 나오느냐다. 왜 여기서부터 이야기를 풀어가느냐다.


왜 사는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이것이 동서고금의 철학의 출발이다. 이 법칙은 다른 종교나 철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어떤 주의 주장도 피해갈 수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가르침의 첫번째 관문이다.


‘왜 사는가?’ 하는 질문에 하느님이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산다‘고 대답하는 기독교 교리와 상관없이 이러한 질문과 응답의 구조는 유효하다. 유교와 불교에도 이와 비슷한 논리구조가 있기 때문이다. 설명하기에는 조금 복잡하지만 노자 도덕경 첫머리에 등장하는 ’도가도 비상도‘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모든 철학 사상에 비슷한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 여기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이러한 논리구조는 연역법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게 핵심이다. 연역의 출발점 찾기다. 논리전개는 어떤 말뚝을 박아놓고, 그 말뚝을 깃점으로 삼아 고리를 연쇄적으로 거는 형태로 되는데, 이 패턴이 철학의 첫번째 말뚝이다.


유교에서는 하늘의 ‘원형이정’이 인간의 ‘인의예지’로 나타난다는 논리구조가 있다. 이것이 동중서의 천인감응설로 전개되어 송나라때 주희에 의해 성립한 주자학의 기본원리가 된다. 불교 역시 ‘인생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서부터 논리전개를 시작하고 있다. 석가는 처음 ‘인생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제시하고, ‘인생은 고(苦)다’는 응답을 제시했다. 이 또한 동일한 연역적 전개구조다.


인생은 무엇인가? 인생은 고다. 고는 어디서 나오는가? 고는 집에서 나온다. 집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집은 멸해야 한다. 멸은 무엇으로 가능한가? 멸은 도로 가능하다. 여기서 고집멸도 사성제가 나오고 팔정도로 전개된다. 불교나 기독교나 유교나 노교나 출발점에서의 논리구조는 같다.


기독교 - 신의 본질에서 완전성 유도 (신 -> 인간)
유교 - 하늘의 원형이정에서 완전성 유도 (원형이정 -> 인의예지)
도교 - 언어의 불완전성에서 완전성 탐색 (도 -> 언어)
불교 - 사성제의 기승전결 완전성에서 팔정도, 12연기법칙 (인간 -> 법칙)
실존주의 - 인간의 삶을 앞세우는 점에서 불교와 유사하다.


여기서 불교, 유교, 도교, 기독교, 실존주의 사상에 공통되는 패턴을 보라는 것이다. 하늘은 질문하고 인간은 응답하는 공식이다. 여기서 발견되는 규칙은 신과 인간의 대칭관계다. 신이 위에 있고 인간은 아래에 있다. 신은 문제를 내고 인간은 답을 제시한다. 신의 문제가 본질이고 인간의 응답이 현상이다. 신의 본질과 인간의 현상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관계가 있다. 구조가 있다.


본질(신) - 기독교(신의 계획에서 답을 구함)
↕(구조). . 신과 인간의 관계. ↑ 깨달음. 인간에서 신으로 비약.
현상(인간)-실존주의(인간의 삶에서 답을 구함)


여기서 기독교와 유교는 하늘을 앞세우고 불교와 실존주의는 인간을 앞세운다는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본질은 같다. 왜인가? 인생이라는 것은 인간의 삶 전체를 통일하는 동그라미다. 즉 완전성이다. 불교의 사성제는 기승전결 형태로 자체완결되어 있다. 동그라미를 이루었다. 즉 완전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의 완전성으로부터 또다른 완전성을 유도하는 형태로 소통은 일어난다.


불교와 실존주의는 공통적으로 인간의 삶 그 자체에서 숨은 완전성을 찾으려 하고 있고 거기서부터 논리를 전개하려고 한다. 유교와 기독교는 하늘의 법칙에 완전성이 있다고 믿고 거기서 인간의 삶의 완전성을 유도한다.


하나의 완전성으로부터 또다른 완전성을 유도하는 패턴이 연역법이다. 더 큰 완전성으로부터 작은 완전성을 찾아내는 공식이다. 완전성은 단위를 의미한다. 예컨대 군대라면 대대에서 중대가 나오고, 중대에서 소대가 나오고, 소대에서 분대가 나오고, 분대에서 병이 나온다. 각각은 하나의 의사결정 단위다.


대대는 숙영하는 단위, 중대는 행군하는 단위, 소대는 전술단위, 분대는 전투단위, 병은 임무단위로 구분할 수 있다. 각각의 의사결정단위가 존재하는 것이다. 단위로부터 단위를 끌어내는 구조다. 이것이 연역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도 있는데, 수신은 나 자신의 완전성이다. 나의 완전성에서 가족의 완전성, 국가의 완전성, 천하의 완전성으로 연역논리의 연쇄고리를 꿰어 전개하는 것이다. 인간이 생각하는 모든 논리는 이 구조를 가진다.


기독교나 유교는 신이라는 완전성의 단위로부터 인간의 삶이라는 완전성의 단위를 끌어내고, 불교나 실존주의는 무신론적 삶이라는 단위에서 일상이라는 더 작은 단위의 동그라미를 끌어낸다. 구조는 같다.


어떤 독립적인 두 개의 완전성이 확보될 경우 제 3의 완전성이 찾아지는 것은 자연의 법칙인데 이는 삼각측정의 예로 입증될 수 있다. 대포소리를 들었는데 발사지점을 추적하려면 두 지점에서 소리를 측정하여 비교하면 된다. 확실한 둘이 있으면 세번째가 확보된다. 지진이 났을 때 진앙지를 찾는 방법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 반복하면 세상 모든 것을 다 명확하게 확보할 수 있다.


사성제>팔정도>12연기
원형이정>인의예지>희노애락애오욕
(하늘의 법칙>인간의 본성>삶의 전개)


모든 논리전개는 이 패턴을 적용한다. 여기서 우리가 봐야 할 것은 신과 인간 사이, 단위와 단위 사이에 과연 무엇이 있는가다. 완전성이다. 신은 종교적 표현이므로 신이라는 단어를 완전성이라는 단어로 대체할 수 있다. 진리라고 해도 좋고, 불교식으로 법(法)이라고 해도 좋고, 도교 식으로 도(道)라고 해도 좋다. 중요한건 포지션이다. 이런 구조의 포지션들이 있다. 상부구조와 하부구조가 있는 거다. 그리고 그 사이에 깨달음이 있다.


상부구조(신)의 낳음. 신의 완전성
(우주의 전개, 진화형 생장구조, 생육하고 번성하여 발달하는 성질)
↕ (깨달음)
하부구조(인간)의 창조. 인간의 소통성(불완전 하나 완전의 가능성)
(공동체의 완성, 집단인격 형성, 문명과 역사의 진보)


인간이 널리 소통함으로써 상승하여 신(神)에게, 혹은 신의 완전성에, 혹은 진리에, 법에, 도에 도달하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깨달음은 신의 완전성을 인간의 소통가능성 형태로 인간 내부에 세팅하는 것이다. 인간이 신의 역할인 위대한 낳음을 일정부분 대리하는 것이다. 신의 완전성이 인간에게 투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립된 한 개인은 짐승과 다를바 없다. 개미보다 인간이 우월하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인간은 특별한 소통능력이 있으며, 이를 통하여 집단인격을 형성한다. 즉 인간이 잘났다고 뻐기는 것은 현생인류의 역사 수 만년간 집적한 지혜의 총합에 기댄 거다. 인간 개인이 개보다 낫다는 증거는 없지만 수만년 지혜의 총합으로 보면 인간은 개보다 낫다.


더욱 인간은 계속 진보하는 성질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미래가치까지 끌어다 쓸 수 있다. 인간의 가치는 앞으로 인류가 일구어낼 미래의 수 만 년 가치가 더해진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위대성은 소통에 의해서 성립한다. 인간에게는 소통할 수 있는 성질이 감추어져 있다는 거다.


소통한다는 것은 인류 전체 지혜의 총합을 도출할 수 있고 한편으로 개인이 대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 속에 숨은 금맥이다. 그것을 드러내어 실현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소통하여 개인이 전체를 대표하는 성질을 활용하는 거다. 그 결과로 존엄을 얻는다.


신의 완전성. 위대한 낳음을 통하여 망라함.
↓ 완전성에서 완전성으로 연역한다.
인간의 소통. 소통하여 결집하고 대표하며 진보와 예술로 사랑을 실천한다.


신의 완전성에서 인간의 소통가능성으로 연역된다. 소통함으로써 인간은 완성되는 것이다. 소통하지 못하는 인간은 불완전하다. 소통은 한 개인이 인류 전체를 대표하는 성질이다. 여기에는 과거와 미래의 잠재적인 가능성까지 포함된다. 이는 문명의 진보와, 문화 예술의 전개와, 사랑의 실천을 통해 달성된다.


임금이 타국에 보낸 사신은 그냥 한 사람이지만 그 나라 전체의 권익을 대표한다. 그 이유는 그 사신이 그 임금과, 그 국가와 소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신과 소통한다면 한 개인이 우주 전체를 대표할 수 있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신의 완전성으로부터 인간의 완전성을 연역하여 내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왜 사는가? 나는 누구이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실존적 질문에 대한 답은, 인간이 신의 완전성을 본받아, 인격 내부에 그것을 세팅함으로써, 곧 깨달음으로써, 그리하여 존엄을 얻음으로써, 신의 일인 ‘낳음을 통하여 망라함’을 인간의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공동체를 진보시키고, 인류의 집단인격을 형성하며, 역사와 문명의 진보를 끌어내고, 문화와 예술의 형태로 인간의 활기찬 삶 자체를 꽃피움으로써, 인간을 자연의 시간과 공간 상에서 완성시키는 것, 인간의 잠재한 가능성을 최대한 끌어내어 펼쳐내는 것, 개인의 차원에서 깨달음으로 완성하고 그것을 전파하여 널리 완성하는 것이다.


연역원리-높은 단위의 완전성에서 낮은 단위의 완전성을 끌어낸다.


구조로 보면 성공의 방법은 먼저 어떤 하나를 완성하고, 다시 그것을 전체에 전파하여 모두를 완성시키는 형식으로 된다. 다같이 조금씩 발전하는게 아니라, 어떤 하나를 완벽하게 완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를 하더라도 제대로 완성해야 한다는 거다. 연역원리에 따라 완전성의 단위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리는 잘 알려진 마르크스의 양질전화 원리와 반대되는 것이다. 구조로 보면 집단이 조금씩 진보하는 일은 없다. 밑에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하든 처음부터 양을 많이 모을 필요는 없고 하나라도 질적으로 우수한 것을 완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완전성에 도달하는데 성공하면 꽃을 피우고 향을 전하여 널리 전파가 된다. 소통하는 거다. 이에 따라 문명은 비약적으로 진보한다. 깨달음이란 근본 소통을 깨달음이며, 소통이란 한 개인의 것이 어떻게 모두의 것이 되느냐, 반대로 모두의 것을 어떻게 한 개인이 대표할 수 있느냐다. 완전성에 이르느냐다.


사회에서 이러한 완전성은 존엄으로 나타난다. 존중하는가? 존중받는가이다. 하나의 작은 씨앗도 아직 구체적으로 실현되지 않은 미래의 떡잎과 줄기와 꽃과 열매를 대표하는 것이다. 그 씨앗의 가치를 그 시공간 전체의 가치로 치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 인간답게 존중받고 사는 거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왜 사는가? 개인이 전체를 대표하고, 개인이 창발한 가치를 전체가 공유하는 에너지 흐름, 신의 낳음으로 망라하는 에너지 흐름에 이미 올라탔기 때문에 그 길을 계속 가는 것이다. 더 높은 단위의 완전성으로부터 유도되었기 때문이다. 바퀴가 가는 이유는 구동축이 가기 때문이고, 구동축이 가는 이유는 미션이 가기 때문이고, 미션이 가는 이유는 엔진이 가기 때문이고, 엔진이 가는 이유는 운전자가 서울을 가기 때문이다.


쏜 화살은 에너지가 고갈될 때 까지 계속 간다. 우리는 왜 이 길을 가는가? 이미 화살은 쏘아졌고 인간은 에너지 흐름에 태워졌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 그 에너지는 신의 완전성에서 온 것이고, 인간에게는 소통가능성으로 나타나며 구체적으로는 문화와 예술과 진보로 나타난다. 인간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내는 단계까지 쏘아진 화살은 계속 간다. 아직은 에너지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소셜미디어는 한 개인의 작은 아이디어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점점 살이 붙어서 생명체처럼 계속 진화하는 성질이 있다. 아이디어가 한 번 에너지 흐름에 올라타면 자체의 관성이 성립하여 계속 가는 것이다. 그 안에 완전성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도 이러한 생명성을 얻어 계속 가는 것이다. 그것이 소통의 성질이며 깨달음은 바로 그러한 에너지 흐름에 올라타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그러한 깨달음의 실천이며 소통의 실천, 집단인격 형성의 실천이다. 인간이 매일 뉴스를 듣고, 정보를 얻고, 이웃과 대화하고, 서로 교류하며, 시시덕거리고 감정을 나누고 행복해 하며 잘 사는 것은 곧 개인이 소통하여 전체 인류의 대표자가 될 자격을 얻는 것이다.


소셜미디어에서 한 개인의 아이디어가 이 사람 저 사람 손을 거치면서 점차 살이 붙어가듯이 인간 사이의 감정과 행복도 그러한 교류 안에서 에너지를 타고 뻗어가는 것이며 삶은 그 흐름 가운데 존재한다. 그 방법으로 인류의 집단인격을 형성해 간다. 산다는 것은 그렇게 내 안에 감추어진 완전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 완전성은 더 높은 단위의 완전성으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구조론이란 무엇인가?


이상의 논리전개를 뒷받침하는 이론이 구조론이다. 구조론은 앞에서 말한대로 연역원리에 따라 높은 단계의 완전성에서 낮은 단계의 완전성을 연속적으로 끌어내어 전개하는데 따른 이론이다.


구조론은 좀 어려운 이야기지만 어려울수록 도전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남이 안 가는 길이니까. 구조론은 신대륙과 같다. 새로 난 길이어서 먼저 간 사람이 대거 먹는다. 구조론은 이미 많은 성공사례가 만들어지고 있다.


구조론은 어렵지만, 몰라서 그렇고 사실 알고보면 쉬운 것이다. 깨달음도 사실 쉬운 것이지만, 쉽게 만들어 놓아서 쉬운 것이고, 원래는 어렵다. 자동차와 같다. 자동차의 발명은 어렵고, 설계는 더 어렵고, 제작도 매우 어렵지만 그럴수록 운전은 쉽다. 쉽게 만든 자동차는 운전하기 어렵다. 어렵게 만든 자동차가 운전하기 편한다. 구조론을 현장에서 적용하는 것은 쉽다. 구조론을 적용해서 효과를 보았다는 사람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구조론이 뭐냐? 구조론은 말 그대로 구조에 대한 이론이다. 구조가 뭐냐? 그걸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내가 구조를 말하는 것이다. 구조라고 하면 현대사회에서 굉장히 많이 쓰이는 말이다. 구조라고 하면 일단 건축구조를 떠올리겠지만 비단 건축구조 뿐만 아니라 유식한 사람들이 아는 척 할 때 흔히 쓰는 말이 구조다. 세상의 모든 조직이나 생명체나 자본이나 예술이나 미디어나 운동이나 어떤 발전하고 진보하는 것은 전부 구조가 적용된다.


건물도 1층 2층 층수가 자꾸 올라가는데 이렇듯 점점 커지는건 다 구조가 있다. 구조는 간단히 점점 커지는 것이 계속 커질 수 있게 하는 원리다. 풍선이 너무 커지면 터져버린다. 이렇듯 조직이든 생명체든 건축물이든 모든 커지는 것은 구조적인 모순과 결함이 있는데 이 문제를 절묘하게 비켜가면서 계속 커질 수 있게 하는 것이 구조다. 이 커지는 원리를 알면 모든 것을 다 이룰 수가 있다.


모든 성장은 안에서 밖으로 전개한다. 그런데 성장하려면 자원이 밖에서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여기서 밖으로 나가는 성장과 안으로 들어오는 자원이 충돌한다. 이것이 구조적 모순이다. 이 모순을 해결하려면 고도의 교통정리가 필요하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이론이 구조론이다.


우리가 사회에서 당면한 모든 문제들이 알고보면 커지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공부를 잘한다든가, 친구를 사귄다든가, 회사를 키운다든가, 가족을 꾸린다든가, 국가가 발전한다든가 알고보면 다 커지는 문제이다. 어떤 조직이 커지면서 필연적으로 한계와 모순에 부닥치게 되는데 그걸 어떻게 빠져나가느냐다.


현대라는 시대 자체가 커지는 시대이다. 현대사회를 특징지우는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유통, 대중미디어 다 커지는 거다. 극장에는 관객이 커지고, TV에는 시청률이 커지고 트위터에는 팔로워가 커진다. 점점 커지는 거다. 현대는 커지는 시대이다. 근데 잘못 커지면 풍선처럼 터진다. 게딱지처럼 살이 안으로 쪄서 터지기 전에 허물을 벗고 누에가 고치를 뚫고 나와 나방이 되듯이 거듭나야 한다.


현대라는 이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이 구조주의 철학인데 헤겔에서 마르크스 이후 현대철학의 큰 흐름이 구조주의다. 헤겔의 변증법 자체가 일종의 원시적인 구조원리다. 구조주의 사상가들이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고 있는데 알고보면 둘 다 구조주의다. 구조적 관점에서 접근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이 양반들이 구조주의를 하면서도 정작 구조를 모른다.


구조주의 철학자들이 쓴 책을 봤는데 이 양반들이 제목은 구조라고 써놓았지만 내용에 구조가 안 나온다. 고작 한다는 소리가 ‘축과 대칭’ 정도인데 이 두 단어로 방대한 구조의 세계를 다 설명하는건 무리다. 더 수준을 높여야 한다.


지식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 구조다. 뭔가를 안다는 것은 곧 구조를 안다는 거다. 정치를 안다는 것은 정치의 구조를 안다는 것이고, 세상을 안다는 것은 세상의 구조를 안다는 것이다. 구조를 모르면 모르는 거다.


구조의 구는 우물정 자 모양으로 켜켜이 쌓는 것이고, 조는 짓는다는 뜻이다. 얽어서 짓는 것이 구조(構造)다. 세상은 얽음과 지음에 의해 만들어졌으므로 구조의 얽음새와 지음새를 아는 것이 세상을 아는 것이다. 세상은 크다. 얽음과 지음에 의해 커진 것이다. 얽음은 공간적으로 꾸미는 것이고 지음은 시간적으로 진행하는 것이다. 시공간적으로 꾸며서 세상은 만들어졌다.


다르게 말하면 구조는 곧 이론이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이론이 나온 것이다. 지금까지 이론 비슷한 것은 많았지만, 대개 이론에 어떤 사물을 대입하여 풀어낸 것인데 이는 응용한 것이고, 순수한 이론 그 자체는 지금까지 없었다. 이제 처음으로 이론이 나왔는데 그게 구조론이다. 이제 인류는 바야흐로 이론의 시대에 접어든 거다. 지금까지는? 이론이 없이 떠드는 주먹구구 시대였다.


이론이란 간단히 말하면 ‘이게 이렇게 되면 저게 저렇게 된다’는 규칙이다. 여기서 이것과 저것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얽음이 있다. 즉 구조가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인류가 고찰한 이론들은 이게 이렇게 되니까 저게 저렇게 되더라 하는 경험이지, 이게 이렇게 되면 저게 저렇게 되어야 한다는 필연은 아니다. 그 필연의 규칙을 쫓아가는 것이 이론이고 구조다.


그렇다면 이 구조론으로 뭘 하느냐? 모든 학문의 토대가 되는 수학을 구축한다. 수학이야말로 1부터 시작해서 점점 커지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구조론은 수학의 출발점을 지정한다. 컴퓨터로 말하면 C언어와 같다. 태초의 언어가 있어야 한다.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창조를 할 때 ‘빛이 있으라’고 말했는데 아무도 그 말을 알아먹지 못하면, 하느님도 참 골치가 아픈 것이다. 태초의 언어가 구조다.


인간은 말로 소통을 하지만 태초에는 말이 없었다. 어떻게 소통했을까? 구조로 소통한 것이다. 패턴과 포지션과 밸런스와 메커니즘과 시스템으로 소통하는 것이다. 예컨대 늑대가 사슴을 사냥할 때, 한 마리가 왼쪽으로 가면 다른 한 마리는 자동으로 오른쪽으로 간다. 양쪽에서 포위한다. 이런건 말로 안해도 저절로 이루어진다. 그게 바로 구조다. 구조는 언어 이전의 언어다.


선이면 앞과 뒤가 있고, 면이면 좌우가 있고, 입체면 위아래가 있고, 밀도면 경중이 있다. 늑대는 평면에서 활동하므로 좌우로 벌려서 포위하면 된다. 그런데 사슴이 선으로 도망치므로 좌우로 벌린 다음에는 다시 앞뒤로 포위해야 한다. 어느 쪽이 먼저냐 하면 좌우가 먼저고 앞뒤가 나중이다.


만약 입체라면? 비행기가 공중전을 한다면? 밀도라면? 밀도는 생명체처럼 성장하여 자라는 것인데 그 경우는? 이렇게 단위를 높여가면 매우 복잡해진다. 이걸 한 눈에 척 보고 알게 하는 것이 구조론이다.


결론부러 말하면 밀도의 경중에서, 입체의 위아래에서, 면의 좌우에서, 선의 앞뒤로 몰아서 최종적으로 점에서 잡아야 한다. 중->경, 높음->낮음, 넓음->좁음, 뒤-앞의 순서로 점점 좁혀서 하나의 점이 되면 잡는다. 이렇게 한 줄로 꿰어보면 굉장히 간단하다. 복잡하던 것이 왜 이렇게 간단해져 버리느냐 하면 앞에서 말한 연역원리를 적용하기 때문이다.


높은 단위의 완전성에서 낮은 단위의 완전성으로 연쇄적으로 빼내는 기술을 사용하면 전부 한 줄에 꿰어지기 때문에 하나의 명령으로 백만대군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서 경찰은 도적을 체포할 수 있고, 늑대는 사슴을 잡을 수 있고, 생명은 성장할 수 있고, 공동체는 진보할 수 있고, 인간은 성공할 수 있다.


이러한 구조의 경중, 상하, 좌우, 전후로 구조가 조직되는 법칙은 인간 사회에서 남편과 아내의 역할분담, 어른과 자식 사이의 서열, 친구와 동료의 협력 형태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수직으로 내려가는 법칙도 있고, 수평으로 맞서는 법칙도 있고, 차례대로 줄 서는 법칙도 있고 다양하게 나타난다.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고 하는데, 우리가 손으로 물건을 쥘때 왼손이 왼쪽을 잡으면 오른손은 가만 있어도 지가 알아서 오른쪽을 잡는다. 걸을 때 왼발이 앞으로 가면 오른발은 뒷땅을 밀어서 균형을 잡아준다. 이건 뭐 누구한테 배우는게 아니다. 이게 구조다. 손발이 척척 맞아주는 거다.


왜 오른손을 옳다고 할까요? 오른손이 바른손이 되고 왼손이 남는손이 된 것은(외다는 어원으로 보면 남는다는 뜻. 이는 영어의 라이트, 레프트도 같음) 전쟁을 할때 무기를 오른 손에 들어야 동료를 찌르지 않기 때문이다. 오른 손에 창을 들고 왼손에 방패를 들어야 팔랑크스 형태로 중갑병 밀집대형의 방진을 짤 수가 있다. 이런 식으로 저절로 만들어지는 자연의 규칙이 구조다. 이걸 최초 패턴에서, 발전하여 포지션으로, 포지션에서 발전하여 밸런스로, 그리고 메커니즘으로 시스템으로 발전시켜 놓은 것이 구조론이다.


태초에 하느님이 ‘빛이 있으라’고 했다는데, 태초에 아무 것도 없는 판에 도대체 누가 이 말을 알아먹겠는가 말이다. 이건 뭐 골 때리는 현상이다. 언어 이전의 언어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구조론이다. 구조론은 얽음이고 수학은 그 얽음을 해체해 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구조론은 수학과 대칭된다. 구조의 반대편에 수(數)가 있는 거다.


구조(얽힘) < - > 대수(풀림)


수학의 출발점은 정의다. 기존의 수학에는 그것이 없다. 예컨대 1이 뭐냐? 정의를 못한다. 무정의요소, 무정의술어, 무정의용어라고도 하는데 정의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수학의 구조를 모르기 때문이다. 수학의 구조는 정의, 분류, 비교, 연산, 측정인데 이거 아는 사람 지구에 두 사람 있다. 모든 학문적 탐구의 최초 출발점을 찍은 것이 구조론이라 하겠다.


구조는 다섯 가지가 있다. 시스템구조, 메커니즘구조, 밸런스구조, 포지션구조, 패턴구조인데 이를 집적하여 하나의 모형으로 나타낸다. 구조론은 모형을 제시한다. 언어 이전의 언어이기 때문에 모형으로 밖에 나타낼 수 없다. 노자 도덕경 첫머리에 도가도 비상도라는 말이 나오는데 바로 그거다. 노자가 구조론을 배웠다면 ‘바로 이거야’ 하고 무릎을 쳤을 것이다.


수학자는 수학으로 무엇을 하느냐? 자를 만든다. 그 다음은? 자로 사물을 재는 것이다. 즉 계산을 히는 것이다. 수학의 목적은 측정이며, 이 측정을 위한 이전 단계들이 정의, 분류, 비교, 연산인데 보통 우리가 수학으로 아는 것은 이 중에서 네번째 연산이다. 그런데 최종적으로는 측정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쓰는 30센티 자는 덧셈자인데 사실은 곱셈자, 방정식자, 함수자, 미적분자 등등 다양한 자가 있다. 그걸 공식이라고 부르는데 그게 자다. 자는 막대기에 눈금을 그은 건데 그걸 종이에 그리면 공식이다.


수학=자(공식)
구조=모형(깨달음)


수학은 한 마디로 자인데, 그 자는 구조의 모형을 해체해서 풀어놓은 것이다. 그것이 풀리기 이전상태, 본래의 완전한 상태를 찾아가는게 구조론이다. 구조론의 모형이 수학의 자와 다른 점은 자와 콤파스가 하나로 붙어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실은 수학에서도 자와 콤파스를 같이 쓴다.


콤파스 다리가 두 개인데 그걸 분질러서 하나를 따로 떼내면 자가 된다. 자는 원래 콤파스의 일부인데 그걸 해체해서 쓰는 거다. 그럼 콤파스는 무얼 하느냐 하면 콤파스는 원을 그리는게 아니고, 같은 크기를 대량으로 복제한다.


수학의 기본은 ‘=’인데 이게 다리가 두개이다. 같다는 뜻이다. 콤파스는 같은 사이즈를 대량으로 복제해 낸다. 거기서 위대한 진보와 성장과 발전이 일어난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넷이, 되고 점점 많아져서 세상을 가득 채우니 비로소 천하는 크게 이루어졌다.


우주가 탄생하는 원리, 생명이 창조되는 원리, 유전자가 복제되는 원리, 공동체가 진보하는 원리, 자본이 증식되는 원리, 세상이 진보하고 발전하는 원리, 인간의 마음이 소통하는 원리가 모두 이 안에 들어 있다.


깨달음의 모형


구조론은 모형을 만드는데 이걸로 무엇을 하는가? 생각을 한다. 사유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연역법이고 하나는 귀납법이다. 그런데 귀납법은 사실은 사유의 방법이 아니다. 이건 착각이고 엄밀하게 말해서 우주 안에 사유의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그건 연역법이다.


연역법이란 무엇인가? 모형을 가지고 거기서 복제해내는 것이다. 생각이란 머리로 곰곰이 생각하는게 아닙니다. 머리를 쥐어짜고 고민하는건 바보들이 골머리를 앓으며 뻘짓 하는 거고, 진짜 생각은 그냥 자로 계속 재는 것이다. 하드디스크에 있는 것을 메모리로 불러와서 자로 재는게 생각이다.

 

◎ 생각하는 방법은? - 자로 재는 것이다.
◎ 일일이 재면 시간이 걸린다? - 하나만 재서 복제한다.


머리를 쥐어짜서 골똘히 생각한다는 바보 짓은 이제 제발 그만두시라. 분명히 말하자만 사유는 자로 재는 것이다. 쓱싹쓱싹 금방 다 잰다. 생각은 머리가 아니라 원래 손으로 하는 거다. 근데 머리로 생각을 이유는 자가 없어서 언어로 자를 대신하는 거지 원리는 자로 재는 것과 같다. 머리 속에 도마와 같은 것이 있어서 뇌가 거기에 재료를 올려놓고 칼질을 한다. 척척척척 잘라내는 거다. 머리 속에 플랫폼이 있는데 거기에 개념을 불러들여 도마위에 올려놓고 조합을 한다.


근데 많은 재료를 전부 다 재면 너무 일이 많으니 대표로 하나만 재고 복제한다. 1천명의 키를 일일이 다 재는게 아니고, 키대로 줄세운 다음 중간에 있는 사람을 한 명만 불러내서 그 사람의 키를 재고 곱하기 천 하는 것이다. 그게 구조론이다. 다 재면 일이 많다. 대표로 하나만 재고 증폭하라. 이거다.


어렸을 때 자치기 해본 사람 있을 것이다. 자치기 할때 100자를 먹으면 자를 백배 복제하는 것이다. 1+1=2를 알면 2+2=4는 안 가르쳐줘도 그냥 안다. 이게 지식의 복제다. 지식은 자로 재는 것인데 콤파스가 있으면 무한복제가 된다. 그게 연역법이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지식은 전부 복제에 의해 탄생한다. 공장에서 지식을 대량으로 찍어내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 거푸집이 잘못만들어지면 곤란해진다. 미술시간에 석고상을 데생하는데, 석고상 만드는 아저씨가 낡은 거푸집으로 계속 만들어내다보니 금형의 모서리가 닳아서 석고상이 점점 못생겨진다. 닳아서 못 쓰는 거푸집으로 찍어서 둥글넙적한 엉터리 석고상을 애들이 그리고 있으니 그림실력이 늘지를 않는다.


생각은 복제를 하므로 원본이 중요하다. 닳지 않은 새 거푸집이 있어야 한다. 그 원본이 구조론이고 깨달음의 모형이다. 닳지 않는 싱싱한 원본을 얻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거 하나만 얻으면 만사형통이다. 이제 끝났다. 끝났어.


그럼 귀납은 뭐냐? 자기가 연역해서 알아낸 지식을 타인에게 설명할 때 반쯤 깎고 들어가는데 그 이유는 언어의 한계 때문이다. 바람풍 해도 바담풍으로 들으니까 가르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합의가 된 부분, 경험을 공유하는 부분만 소통을 하는데 그게 귀납이다.


아프리카 안 가본 사람에게 아프리가를 설명하는건 불가능한다. 인간은 절대적으로 경험을 공유하는 한도 안에서만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호랑이를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호랑이를 설명한다는건 불가능한데, 그래도 호랑이 꼬리는 대략 설명이 안 되겠나 하는 식이다. 아쉬운대로 부분만 합의하는게 귀납이다.


어차피 의사소통이 안 되지만 그래도 조금 되는 부분만 소통하자 이거다. 연역은 지식의 창조방법이고, 귀납은 그 지식을 타인에게 설명하고 전달하는 방법인데,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오류가 일어난다. 코끼리를 아무리 잘 설명해도 결국 장님 코끼리 만지기가 된다.


연역-(모형중심 사고) 지식을 창조한다.
귀납-(단서중심 추론) 지식을 전달하고 축적한다.


코끼리를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말로 코끼리를 설명하기가 귀납법이다. 결론적으로 지식은 경험없는 사람에게 전달되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귀납법은 지식의 바른 탐구방법이 아니고 불완전한 전달방법 및 축적방법이다.


인간이 불완전한 귀납법을 쓰는 이유는 연역법으로는 지식을 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연역법으로 전달하려면 실제로 체험하는 수 밖에 없다. 고고학자는 과거로 타임머신 타고 가야 한다. 불가능한다. 어차피 연역이 불가능하니 불완전한 귀납을 하는 것이며, 이 때문에 지식이 체계적으로 왜곡되어 왔다.


결론적으로 인간의 의사소통은 경험의 공유라는 대전제 안에서만 기능하는 것이며, 경험이 공유되지 않았으므로 의사소통은 절대적으로 실패이며, 그 때문에 귀납은 원초적으로 오류이며, 연역을 해야 바른 지식이 찾아지는 것이며, 연역은 모형을 사용하는데, 그 모형이 바로 경험이 되는 것이며, 모형으로 인해 의사소통은 비로소 성공하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 모형이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내가 모형을 만들었다. 말하자면 자와 콤파스를 발명한 거다. 자가 없을 때는 수학을 아무리 잘해도 그걸로 집을 못짓는다. 자와 콤파스가 있어야 수학자가 아는 지식을 현실에 적용하여 사용할 수 있다. 뛰어난 작가라도 연필이 없으면 소설을 못 쓰고, 뛰어난 의사라도 청진기가 없으면 병을 못고치고, 뛰어난 포수라도 총이 없으면 사냥을 못 한다.


작가에게는 연필을, 의사에게는 왕진가방을, 포수에게는 총을, 운전기사에게는 자동차를 주어야 한다. 생각을 하려면 절대적으로 구조의 모형이 있어야 한다. 내가 이미 모형을 만들었으므로 이제부터는 연역해서 지식을 대량생산하면 된다. 그 사유의 모형을 획득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모형으로 사유하라


수학자가 자와 콤파스가 없다는 것은 포수에게 총이 없고, 농부에게 땅이 없고, 어부에게 배가 없고, 조종사에게 비행기가 없다는 것과 같아서 말짱 황이다. 개뻥이다. 수학자는 반드시 자와 콤파스가 있어야 한다.


이는 목수가 규구를 가져야 하는 것과 같다. 규구라고 하면 콤파스와 곱자인데 목수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권력의 상징이다. 재판관은 저울이 상징이다. 서초동 대법원에 가보면 정의의 여신상이 있는데 오른손에 천칭저울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저울이 모형이다. 그게 반드시 있어야 한다.


1) 사유에는 두 가지가 있다.
2) 연역과 귀납이 사유의 방법이다.
3) 연역은 지식의 창조에 쓰이고 귀납은 의사전달에 쓰인다.
4) 경험의 공유가 안 되면 의사소통은 장님코끼리 만지기로 실패다.
5) 귀납은 반드시 그것을 경험하게 하는 모형이 있어야 한다.


모형이 없었으므로 인간은 의사소통을 못했다. 그러나 내가 이제 모형을 만들었기 때문에 여러분은 깨달음을 다운로드 받기만 해도 된다. 깨달음 역시 대량생산, 대량복제, 대량전파가 된다.


석가의 제자 500비구는 다 깨달았다. 석가가 깨달음을 다운로드를 해줬기 때문이다. 육조 혜능의 제자들도 다 깨달았다. 그 당시의 문제들을 실제로 해결했다. 당시 사회에 진보의 기운이 크게 일어났다. 그러나 지금까지 불교는 과학에 밀렸다. 문제해결을 못 한다.


인생은 무엇인가? 인생은 고(苦)이고, 고는 집에서 나오고, 집은 멸로 타파해야 하며, 멸은 도로 가능한다. 문제는 요즘 인간들이 도무지 고(苦)가 없다는 거다. 현대인은 그다지 고롭지 않다. 다들 행복하게 잘먹고 잘 삽니다. 생노병사의 고는 의사를 찾아가서 해결한다.


그러므로 깨달은 사람이 할 일이 없다. 중생의 괴로움을 고쳐주려고 하나 중생들이 병원에 가서 괴로움을 잘 고치고 있다. 깨달은 사람이 중생을 구제하려고 했더니 재벌이 일자리 창출해서 중생구제 한다며 큰소리를 치고 있다. 그러므로 깨달음이 할 일을 얻을 때까지 수준을 높여야 한다. 그래서 깨달음은 매우 어려운 일로 되었고 근자에 와서는 깨달은 사람이 사라졌다.


그러나 이제 이렇게 연장이 나왔으므로, 포수가 총을 얻었고 농부가 땅을 얻었고, 어부가 배를 얻었고, 조종사가 비행기를 얻었으므로 그냥 복제하면 한다. 여러분은 힘들게 머리에 힘주고 명상할 필요없다. 마음수련 그딴거 사실 필요없다. 그냥 저한테 깨달음을 다운받으면 된다. USB에 담아준다. 단 구조는 알아야 한다. 구조는 깨달음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USB에 담아줘도 디바이스가 없으면 쓸모가 없는 것이다. 구조론이 디바이스다.


이제 수행할 필요도 없고, 명상할 필요도 없다. 다 필요없다. 연장이 있어야 한다. 명상가의 연장은 구조론의 모형이다. 의사가 의사노릇을 하려면 청진기가 있어야 한다. 의사는 청진기가 환자와 소통하는 수단이다. 깨달음은 구조론이 세상과 소통하는 수단이다.


사랑이라고 하면 섹스를 의미할 수도 있고, 연애를 의미할 수도 있고, 더 깊은 의미의 사랑도 있다. 그 중에 어떤 사랑을 말하는지 알려면 그 사랑을 해봐야 한다. 여러분 중에 24시간 마음이 업되어 있는 진정한 사랑을 해본적 있는 사람이 있는가? 아마 그런 사랑 해본 사람 많지 않을 것이다. 그걸 안해본 사람에게 진정한 사랑을 설명한다는건 허무한 일이다.


깨달음으로 소통할 수 밖에 없다. 내가 경험한 것을 바로 상대방이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깨달음의 모형으로 뇌를 다시 세팅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깨달음이 무엇인가? 깨달음으로 타인과 소통할 수 있는 것이 깨달음이다. 수학자들끼리는 외국어 몰라도 소통이 된다. 연주자들끼리는 외국어 몰라도 소통이 된다. 축구선수들은 외국어 몰라도 패스만 잘 한다.


우리는 보통 포지션으로 소통한다. 한 사람이 말리면 하나는 부추기고, 하나가 남편역할하면 한쪽은 아빠역할, 하나가 이쪽으로 가면 하나는 저쪽으로 돌고, 사슴을 쫓는 늑대무리처럼 구태여 말 안해도 손발이 척척 맞는다. 그러나 그러한 역할게임에 빠져버린다. 남편역할, 아내역할, 자식역할, 그 역할에 빠져서 편견과 고정관념과 집착과 타성에 빠지는 것이다.


아이는 사고칠때 주목을 끌고, 아빠는 호통칠 때 주목을 끌고, 엄마는 뜯어말릴때 존재감을 느낀다. 인간이 포지션으로 소통하면 점점 배가 산으로 간다. 아이는 계속 사고치고, 아빠는 계속 호통치고, 엄마는 계속 말리고 점차 코메디가 되어 간다. 그 경우 변화에 취약하다. 집안에 문제가 닥치면 해결을 못한다. 포지셔닝 게임에 중독되었기 때문이다. 늘 같은 방법으로 대응하기 때문이다.


뭔가 문제가 생겼는데 골키퍼는 자꾸만 골대로 가고, 공격수는 자꾸 공몰고 가고, 타자는 자꾸 방망이만 돌리고, 감독은 덕아웃에 들어가서 안 나오고 그러면 안 된다. 문제가 생겼을 때는 자기 역할을 버리고 광장으로 걸어나와야 한다. 대통령도 나오고 총리도 나오고 장관도 나오고 다 나와야 한다. 계급장 떼고 원점으로 돌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역할을 다시 정해야 한다.


왜 사람들이 점차 편견과 고정관념과 집착에 빠질까? 그래야 소통이 잘 되기 때문이다. 남편은 사고쳐야 부인이 말리고, 그래야 부부간에 대화도 한번 해보고, 점점 심해져서 결국 가정파탄이 난다. 연인간에 사랑싸움도 그렇다. 잘 관찰해보면 서로 삐치고 등돌려야 밀도있는 소통이 일어난다.


그냥 서로 좋아좋아 하고, 장단이나 맞춰주다보면 본질이 되는 중요한 이야기를 못한다. 사랑싸움을 해야 서로 마음에 있는 불만을 털어놓고 진짜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사랑싸움 하다가 그게 진짜싸움이 되어서 결국 갈라선다.


말로 풀어야 할 것을 포지셔닝으로 풀면 망하는 것이다. 근데 다들 포지셔닝으로 풀려고 한다. 왜? 그래야 긴장도가 전달이 되기 때문이다. ‘내 생일이 몇월 며칠인데 선물 줘’ 이렇게 좋게 말로 하면 소통이 안 된다. 그 생일날 까먹는다. 화를 내고, 토라지고 해야 눈치를 채고 선물을 한다.


인간사회에서는 말로 좋게 대화하는 것 보다 틀어서 안티로 가는 전략이 오히려 대화가 잘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안티로 가다가 결국 갈라선다. 인간 사회의 모든 실패는 이 공식대로 일어난다. 이명박 정권도 보면 좋게 말로 하면 못 알아먹고 촛불을 들어야 그나마 약간 알아듣는다.


연애할 때는 남자가 한없이 떠받들다가 결혼하면 바로 돌변하여 길들이기 들어간다. 결국 작전이 안 먹혀서 갈라선다. 인간이 언어로 할 것을 감정으로 하고, 눈치를 주고, 핀잔을 던지고, 화를 내고, 토라지고, 삐치고 하는 이유는 그래야 그 사건의 중요도가 전달이 되어 진정한 소통이 되기 때문인데, 이것은 독약과 같아서 점점 중독되면 내성이 생겨서 결국 파국이 일어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언어로는 진정한 소통이 불가, 포지셔닝으로 가도 중독되어 파국이다. 답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모형을 구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형으로 소통해야 완전하다. 모형의 소통이 이심전심의 소통이다.


가부장은 권위를 휘둘러야 소통이 되고, 말썽쟁이는 반항을 해야 소통이 되고, 울보는 울어야 존재감을 느끼고, 부인은 잔소리를 할때라야 역할을 인정받고, 선생은 권위적으로 군림해야 학생이 복종하고, 군대에서는 얼차려를 줘야 후임병들이 따르고 그러다가 인류는 점점 바보가 되어가는 것이다.


인간은 언어가 아닌 포지션으로 중요한 소통을 한다. 정설보다는 역설로 소통한다. 그 방법으로 긴장도를 전달한다. 그러다가 망한다. 그렇다면 그 포지셔닝의 원리를 정확히 이해하는 수 밖에 없다. 그것은 경험에 의해서 가능하며 그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깨달음이고 구조론의 모형이다. 이거 하나로 해결보는 것이다.


사람을 살리는 중요한 사건과 돈을 버는 큰 사건이 있다면 어느 쪽부터 해결해야 할까? 눈앞에서 죽어가는 사람부터 구해야 할까? 아니면 1억짜리 사업을 먼저 성공시켜야 할까? 대부분의 속임수는 이런 형태로 일어난다. 중요한 것이 먼저고 큰 것이 나중인데 이걸 속이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중요한거 먼저 큰거 나중이다. 화장실을 먼저 갔다오고 난 다음에 밥을 먹어야 한다.


관념좌파.. 큰일부터 하자.
개혁세력.. 중요한일부터 하자.


무뇌좌파와 개혁세력의 논쟁이 대부분 이걸로 싸우는 것이다. 이는 현장에 있느냐 이선에 있느냐의 차이다. 현장을 떠나 있으면 뭐가 중요한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단 시동부터 걸어야 차가 가는데, 무조건 ‘가자’고 외치는 거다. 왜냐하면 차를 타 본 적이 없으니까. 이러한 수순을 알게 하는 것이 모형이다.


유재석은 팀원들 간의 밸런스를 잡아줄줄 아는 사람이고, 강호동은 상황을 주도하고 난국을 돌파하는 리더십이 있다. 이건 양반이다. 그 포지션을 넘어선 것이다. 자기 포지션에 빠져 있는 사람은 대개 이죽거리거나, 방해하거나, 심통부리는 방법으로만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그 경우 잘못을 지적할 수는 있어도 바른 길을 제시할 수는 없다.


코미디 프로 보면 한 사람은 열심히 웃기는데 다른 한 사람은 옆에서 받아주기만 하고 못웃기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옆에서 받아주는 사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모형이 있어야 이 역할을 할 수 있다. 서로 웃기려고 이상한 짓 하면 팀이 깨져서 낭패다.


가정파탄이 일어나는 이유, 조직파탄이 일어나는 이유, 구조붕괴가 일어나는 이유는 서로 웃기려고 해서 그런 것이다.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하면서 점점 극단으로 간다. 중간에서 받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다 깨져 버린다. 모형이 있어야 밸런스를 이루어 붕괴를 막을 수 있다.


중요한 역할 - 중간에서 잘 받쳐주는 사람.
큰 역할 - 잘 웃기는 사람.


썰매개가 열여섯마리 개썰매를 끌 때 대장개가 지휘를 하는데, 개들이 잘못된 코스로 접어들면 맹렬하게 짖고 목덜미를 물어서 혼을 낸다. 노련한 썰매개 대장은 개들을 잘 지휘해서 급커브에서 속도를 줄이지 않고 기가 막히게 회전을 성공시킨다. 근데 썰매개 대장이 잘못된 길을 지적할 수는 있어도 바른 길을 안내할 수는 없다. 오직 화를 내고 성질을 부리는 방법으로만이 지휘할 수 있다. 이런 거다. 포지셔닝으로 소통하면 지금 우리나라 정치판 하고 비슷해서 자살골 넣기 시합이 된다. 잘해서 점수를 따는게 아니고 잘못해서 점수를 잃는 것이며 덜 점수를 까먹는 쪽이 이기는 거다. 이건 바보짓이다.


긍정적인 방법으로는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왜? 바보니까. 오직 반대할 때만 존재감을 드러내고, 오직 시비할 때만 역할을 얻고 그러는데, 이걸 넘어서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런데 부부간에도 친구간에도 서로 비웃고, 핀잔을 주고, 경멸하고, 주먹으로 생일빵을 치고 뭐 이렇게 친하게 지내는 바보들 많다. 만나면 반갑게 ‘야 임마. 또라이!’ 하고 인사하는 양아치들 많다. 이건 아니다. 이게 다 강호동, 유재석이 없어서 그런 거다. 이경규 인기가 떨어진 이유는 중간에서 받아주는 역할을 안 해서 그런 거다. 김구라가 뜨지 못하는 이유도 마찬가지.


반대하고 비난할 때 뿐 아니라 긍정하고 주도하면서도 존재감을 줄 수 있고, 정해진 자기 역할을 넘어서면서도 존재감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영화를 봐도 약방에 감초 아저씨는 감초 역할밖에 못하고 평생 조연만 한다. 조영남은 늘 TV 나와서 뺀질거리고 욕먹는거나 하고, 이경규는 호통이나 치고, 꼬장이나 부리고, 박명수도 호통개그 외에 못하고, 김구라는 게스트를 당황하게 만들고, 또 자학개그만 하는 사람도 있고, 다들 자기 역할에 갇혀서, 여자는 여자답게 남자는 남자답게 선생은 선생답게 그 답게에 갇혀서 빠져나오지를 못한다. 빠져나와야 한다. 다른 사람을 받아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역할게임에 갇혀 있어서는 평생 조연이나 하지 주연은 못되고 더욱 연출자나 감독이나 작가는 못된다. 진정한 사람은 조연에서, 주연으로, 연출자로, 프로듀서로, 작가로 계속 올라설 수 있어야 한다. 깨달음의 모형으로 가능한다. 중간에서 받아줌으로써 가능하다. 깨달음은 포지셔닝 구조의 바른 모형을 제시하므로 그 포지셔닝 구조에 갇히지 않는다. 진정한 자유를 얻는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 슬퍼하고, 고통을 주고, 심통을 부리고, 못된 짓 하고 하는게 사실은 악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방법으로만이 감정을 전달하고 긴장도를 전달하고 소통의 밀도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 필요해서 하는 거다. 그러다가 망하는 거다. 초등학교 꼬마가 여자애들 노는데 가서 훼방놓는 방법으로만이 관심을 표시할 수 있다거나, 혹은 시설에 수용된 어린이가 오줌을 싸는 등 퇴행적인 행동으로만 보모의 관심을 끈다거나 하며 망가지는 거다.


김정일이 지금 꼴통부리고 있는 것도 실은 미국과 한국의 관심을 끌어보자는 애정표현을 이상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정면으로는 말을 못하고 항상 안티로만 말을 거는 그런 사람 있다. 사랑한다면서 더 화를 내는 그런 사람 있다. 뭔가 필요하면 그걸 달라는 말은 못하고 대신 인상만 쓰는 사람 있다. 구조의 모형으로 보면 다 보인다. 좋아하는데 그럴수록 오히려 화를 내고 결국 멀어지고 그런 인간들의 한심한 모습이 다 보인다. 속 보인다. 속보여.


우리나라가 중간에서 받아주는 역할을 해야, 동북아중심국가 역할을 해야 북한과 미국, 중국과 일본이 동시에 정리되는데 중간에서 안 받아주고 일본, 미국에 붙어버렸으니 밸런스가 깨져서 다 망가지는 거다. 생색나는 큰 역할보다 드러나지 않아도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의존하게 해야 한다. 필요한 때 자신을 찾도록 해야 한다. 삼국지의 유비나 수호지의 급시우 송강 캐릭터가 그러하다.


구조론은 증폭한다.


구조론의 핵심사상은 노력의 투입을 최소화 하고 대개 공짜먹자는 것이다. 양질전화의 법칙에 따라 물을 백도로 끓이려면 많은 에너지가 들지만 이는 물이 분자상태의 큰 덩어리 상태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물 분자가 소립자 단위로 잘게 쪼개어져 있다면 화약을 폭발시키듯이 아주 적은 에너지로도 단 번에 끓일 수 있다.


양질전화는 착각에 불과한 것이고, 물이 백도에서 끓는다는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 기압을 낮추면 물은 훨씬 낮은 온도에서도 끓다. 일정한 조건을 갖추어주면 이론적으로는 0도에서도 끓을 수 있다. 반대로 영하 40도까지 얼지 않는 과냉각 상태의 물도 있다.


물질이 소립자 단위로 쪼개져 있다면 아주 적은 에너지로 성질을 변화시킬 수 있다. 물로 금을 만들 수도 있는 거다. 단 하나의 이유 - 덩어리 때문에 안 되는 것이다. 한국이 안 되고 있다면 이유는 가족, 부족, 지역주의, 인종주의, 성차별, 학벌, 재벌, 강남이라는 골칫 덩어리들 때문이다. 언제나 덩어리가 문제다. 이들을 잘게 쪼개어 ‘강한 개인’으로 되돌리면 적은 에너지로 진보의 빅뱅을 이룰 수 있다. 폭발적으로 진보할 수 있다.


반대로 한국이 잘 되고 있다면 작은 나라 특유의 빠른 의사결정 속도 때문이다. 덩어리가 작아서 잘 되는 거다. 미국이나 영국이나 일본이나 중국이나 다 덩어리가 커서 의사결정 속도가 느려요. 관료주의가 심한 거다.


어떤 사람이 일본에 살다 한국에 와서 한다는 소리가, ‘와 한국 좋네. 일본에서 자동차 면허갱신 하려면 하루를 휴가내야 하는데 한국은 뭐 3분만에 따끈따끈한게 바로 나오네.’ 하고 감탄을 한다. 이와 비슷하게 외국에서 뭐 좀 하려면 공무원 뿐 아니라 민간인들도 다들 느려터져서 속 터진다는 이야기 매우 많다. 잘게 쪼개야 효율이 생겨난다.


중국이 안 되고 있는 것은 역시 덩어리가 크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덩어리를 쪼개서 희망을 봤다. 미국은 너무 덩치가 커서 인류의 부담이 되었다. 과거 일본은 300여개의 봉건소국으로 나누어져 있어서 개화에 성공한 것이다. 일본은 작은 한 부분인 조슈와 사쯔마에서 먼저 개화파가 권력을 잡고, 그 성공사례를 전파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전제국가라서 지역에서 시범케이스로 일단 한번 해보고 이런게 없다.


쪼개서 한 부분에서 먼저 성공시켜야 한다. 필자가 참여당에 주목하는 이유도 작은 집단이 쉽게 정치실험을 할 수 있고 성공사례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은 덩어리가 커서 정치개혁을 못한다. 작은 한 곳에서 먼저 성공한 다음에 이를 전파해야 한다.


1) 마르크스의 오류 - 전체가 다 잘될 때 까지 계속 불을 땐다. (이들은 안 되는 이유를 외부로 돌리고 세계를 탓하며 세계혁명을 시도한다. 북한이나 쿠바처럼 70년째 군불만 계속 때고 있는 곳도 있다.)


2) 자본숭배 수구꼴통 - 먼저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은 남는다. (한 부분에서 성공하면 다른 지역을 분리하여 배제하고, 소통하지 못하게 장벽을 쌓은 다음 자기네끼리 만족하며, 다른 지역은 게으르기 때문이라고 남탓한다. 자기들만의 세계에 고립되어 점점 쇠퇴한다.)


3) 좌파꼴통의 오류 - 전체가 다 같이 반걸음만 가자며 발맞추기 하는데 발이 잘 안 맞아서 시간만 계속 끈다. 이들은 실험을 안 해봤기 때문에 현장경험이 없어서 의사결정을 못하고 한 없이 시간만 끈다.


바른 노선은 한 부분을 먼저 성공시키고 이를 전파해서 전체가 일제히 성공하는 혁명적인 방법이다. 이런 위대한 혁신들은 언어가 처음 탄생했을 때, 문자가 보급되었을 때, 종교가 전파되었을 때, 금속활자가 보급되었을 때, 근대식 소총이 발명되었을 때, 상업혁명이 일어났을 때, 자동기가 발명되었을 때, 민주주의 시민혁명이 일어났을 때, 전기가 보급되었을 때, 인터넷과 대중미디어가 등장했을 때 한번씩 일어났다. 지금도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도 일어난다. 혁신은 지속적으로 일어난다.


깨달은 사람은 무엇을 하는가?


이렇게 깨달음에 대한 이론들은 다 나왔다. 이 원리를 마음에 적용한 것이 마음의 구조다. 내용은 같다. 상부구조가 있고 하부구조가 있다. 그런데 근대 심리학은 하부구조만 보고 있고 상부구조는 못 보고 있다. 이를 통일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깨달음을 통하여 마음의 문제는 해결된다 이런 내용이다.


서구의 임상심리학, 실험심리학 따위는 귀납적 접근으로 환자의 치료에 이용될 뿐 환자가 아닌 사람을 상승으로 이끌지 못한다. 병자를 고칠 뿐 멀쩡한 사람을 상승시키지 못한다. 이건 가짜다. 서구 심리학은 통째로 가짜다. 자동차에 비유하면 자동차 운전기사가 되어야 하는데 카센터 아저씨가 되어서 수리만 한다.

 

서구 실험심리학 - 고장난 자동차를 수리한다.
깨달음의 심리학 - 멀쩡한 자동차를 운전한다.


누가 멀쩡한 자동차 수리해 달랬나? 운전해 달랬지. 마음은 자동차와 같아서 운전을 해야 한다. 어떻게 마음을 운전할 수 있는가? 마음의 구조에 다 나와 있다. 이대로 마음을 운전하면 된다. 차를 운전하려면 일단 기름을 넣어야 한다. 에너지 흐름에 올려태워야 한다는 거다. 그것이 존엄이다.


기름 안 넣고 핸들 아무리 돌려도 차는 꿈쩍도 안 한다. 존엄에서 자유가 나오는 것이다. 존엄이 없으면 자유가 없고 기름이 없으면 운행이 없는 것이다. 이 마음의 구조를 알면 자동차만 운전할 수 있어도 마음을 자유자재로 운전할 수 있다. 원리는 같으니까.


결론적으로 중요한 것은, 현대불교가 막혀버린 사태는, 깨달음이 출구를 못 찾고 혼란에 빠져버린 이유는, 깨달은 다음에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목사들은 무엇을 하는가? 설교를 한다. 깨달으면 무엇을 하는가? 바로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깨달은 사람이 절을 떠나서 갈 곳이 없으니까 못 깨닫는 것이다.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석가의 제자 500비구들은 갈 데가 많았다. 그래서 다 깨달았다. 육조 혜능의 제자들도 갈 데가 많았다. 다 깨달았다. 현대의 스님들은 도무지 갈 데가 없어서 못 깨닫는다.


깨달은 사람은 마음의 마이스터가 되어야 한다. 깨달음은 어떤 사실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뇌구조를 일정한 모형에 맞추어 세팅하는 것이다. 이는 절대적으로 훈련되어야 한다. 건반을 익혀서 피아니스트가 되듯이 마음을 연주하는 방법을 익혀서 마음의 마이스터가 되어야 한다. 마음의 장인이 되어야 한다. 마음의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 마음의 연주자가 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깨달은 사람은 서구 중심의 심리학과 싸워야 한다. 교회의 목사나 신부들과도 경쟁해야 한다. 서구 실험심리학이 하는 일을 깨달은 사람이 해야 한다.


그러려면 역시 포수에게는 총이 있어야 하고, 조종사에게는 비행기가 있어야 한다. 마음의 마이스터에게는 모형이 있어야 한다. 도구가 있고 연장이 있어야 기술을 부릴 수 있다. 모형으로 소통하는 깨달음의 언어를 획득해야 한다.


임상심리학은 정신병 환자의 병을 고치는데, 깨달음은 멀쩡한 사람을 상승시켜야 한다. 소통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존엄을 얻게 해야 한다. 더 높은 가치를 바라보게 해야 한다. 신과의 대화가 가능하게 해야 한다. 내 안의 완전성을 끌어내야 한다. 인류의 집단인격을 형성해야 한다. 신의 완전성이 인간에 반영된 것이 소통이다. 언어를 넘어 이심전심으로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하늘의 완전성에서 인간의 완전성을 끌어내는 것이 앞에서 말한 연역원리다. 하늘의 완전성은 원형이정이고 인간의 완전성은 인의예지다. 거기서 희노애락애오욕이 펼쳐진다. 마찬가지로 마음의 완전성이 존엄이다. 존엄을 얻어야 마음이 다스려진다. 그런데 서구의 심리학에는 존엄이 없다. 개념 자체가 없다. 존엄이라는 단어는 필자가 적당히 발굴해서 쓰는 것이다.


기독교나 불교, 유교, 도교 등 모든 종교에는 존엄의 개념이 있다. 불교의 깨달음이나 기독교의 신이나, 공자의 인의나, 도교의 도덕이나 다 존엄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인간 안에 있는 완전성을 끌어내기 위하여 하느님이라는 관념을 이용하고 불교는 인간을 상승시켜 내 안의 완전성을 끌어내는 방법으로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다. 종교에는 있는데 서구의 심리학에 없다. 그래서 깨달음이 경쟁력이 있는 것이다. 저쪽에는 없고 이쪽에는 있으니까.


[마음의 구조]


입력                  출력
(상부구조)   (하부구조)
정신 의식 의도 생각 감정
존엄 자유 사랑 성취 행복
원형이정    →    인의예지


마음의 구조에서 말하는 것은 한 마디로 정신차려라다. 긴장하라는 거다. 정신차린다는 것은 긴장하여 전체를 하나로 통일한다는 것이다. 마음의 작은 부스러기들을 한 줄에 꿰어 하나의 방향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마음 안에 들어와 있는 다양한 이질적 존재들을 하나의 방향으로 조직해 내는 것이 긴장이다.


인간이 마음을 다치는 이유는 내 마음 안에 다른 것이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집 안방에 호랑이가 들어와 있는데 그걸 모르고 있으면 정신 못차린 거다. 마찬가지로 자기 마음 안에 사랑이 들어와 있는데 그걸 모르고 있다면 정신 못차린 것이다. 내 마음 안에 무엇이 들어와 있는지 알아채야 한다.


그걸 알아채지 못하는 이유는 존엄이 없기 때문이다. 존엄이 없으면 사건을 주도하려 하지 않고 상대방의 행동을 관찰한 다음 거기에 연동시켜 자기 행동을 결정하려 한다. 앞에서 말한대로 포지셔닝 게임을 하는 거다. 상대가 왼쪽으로 가면 자기는 무조건 오른쪽으로 돌고 무조건 상대방 반대로 한다. 아니면 무조건 추종하여 아무 생각없이 뒤만 졸졸 따라가거나다. 추종하든 안티하든 다 상대를 이용하려는 거다. 상대를 주로 놓고 자기를 종으로 놓아 종속시킨다.


내 마음 안에 들어와 있는 상대를 타자화 하는 것이다. 그 방법으로 내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은 찢겨지고 만다. 이미 내 안으로 들어와 있는 것을 밖으로 밀어내니 마음이 찢기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걸 극복해야 한다. 자기를 존중하면 내 마음 안에 신도, 역사도, 진리도, 진보도, 창조도, 사랑도 다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럴 때 마음이 다스려진다. 내 마음 안에 다른 것이 잔뜩 들어와 있다면 그것이 결이다.


나무의 나이테처럼 마음에 결이 나 있다. 마음에는 마음 자신의 의도가 있고, 가는 길이 있고, 추구하는 바가 있다. 마음의 마음이 있다. 인간은 누구든 마음이 자신의 의도를 따라오기 바랄 뿐, 마음 자신의 의도에는 귀기울이지 않다. 마음에도 마음 자신의 결이 있고, 구조가 있고, 논리가 있음을 알아채야 한다.


인간은 공동체적 동물이며, 마음은 언제라도 그대를 공동체의 중심, 세상의 중심, 신의 완전성에게로 이끌고자 한다. 마음이 인간을 이끄는대로 따라가면 마음을 다치지 않다. 마음이 평온해진다.


그것은 행복을 추구하기 전에 성취를 얻고, 성취를 얻기 전에 사랑을 얻고, 사랑을 얻기 전에 자유를 얻고, 자유를 얻기 앞서 존엄을 얻는 것이다. 존엄은 신과 소통하고 우주와 소통하고 인류 전체와 소통하는 것이다. 자신을 인류의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총괄하는 대표자로 내세우는 것이다.


자기를 최고로 대접하는 것이 타인을 최고로 대접하는 것이며, 그것은 나의 전부로 상대의 전부를 끌어내는 것이다. 나의 표피가 아닌 밑바닥을 드러내는 것이다. 상대방의 전부를 끌어내어 서로의 종이 울리게 하고 북이 소리를 내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연주하는 것이다. 인간의 인의예지가 하늘의 원형이정에 닿듯이, 내 마음 안의 질서가 객석에 앉아있는 청중들의 마음의 질서와 연동될 때 위대한 화음은 얻어진다. 하늘의 소리가 메아리친다.


인간은 언어로 소통하는듯 하지만 실제로는 포지션으로 소통한다. 포지션으로 소통하다보니 포지션에 중독되어 빠져나오지 못한다.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도둑은 도둑답게, 경찰은 경찰답게, 군인은 군인답게, 하는 답게에서 홀려서 발을 빼지 못하는 것이다.


남자는 남자답게 근육을 키웠는데 여자들이 그거 안 좋아한다. 여자는 여자답게 스모키화장을 했는데 남자들이 그거 안 좋아 한다. 자식은 자식답게 응석을 부렸는데 부모가 안 좋아 한다. 어른은 어른답게 권위를 세웠는데 그거 아무도 안 좋아한다. 경상도남자는 경상도남자답게 ‘아는? 밥도. 자자.’ 딱 세 마디만 하는데 그거 아무도 안 좋아 한다. 그래서 망한다.


왜 이런 바보짓을 하느냐? 그렇게 하는게 소통하기에 빠르다. 남자답게 여자답게 어른답게 자식답게 답게로 가는게 눈치가 빨라서 더 빨리 알아먹는다. 말로하면 긴장이 전달이 안되어서 들어먹지를 않으니까. 즉 인간은 소통하기 편한대로 소통하는데 한 가지 소통밖에 못해서 망하는 거다.


안티를 하고 포지셔닝 게임을 하고 역할극을 해야 긴장이 전달된다는 것은 상대방이 정신차리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는 정신 안 차리고 상대방만 정신차리게 하려고 한다. 자기가 문제를 해결할 생각은 안 하고, ‘나 삐졌어 흥’ 하고 선언해서, 엄마가 정신차려서 내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거다. 그런데 요거 먹힌다. 그러다가 재미나서 망가진다. 엄마 품에서 평생 못 벗어난다.


모든 차별과 편견과 고정관념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차별하는 이유는 차별해야 의사소통의 속도가 빨라지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계급을 정해놓고 차별을 하니까 명령전달이 기가 막히게 빠른 거다. 먹을 입은 많고 나눌 빵은 적은데 나누기에 시간이 걸리니까 차별해서 고참이 독식하기로 한다. 확실히 결정은 빨라진다.


그러니 소통의 속도는 빠른데 정해져 있는 딱 한 가지 소통밖에 못한다. 지하철에서 알아서 자리를 양보하는 것보다 경로석을 지정해놓는 것이 빠르다. 모든 차별은 속도를 빠르게 한다. 그러다가 망한다. 나쁜 것도 더 빨라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트레스를 덜 받는 방향으로 움직이며, 그 때문에 점차 왜곡되고 위축되고, 길이 난 쪽으로만 움직여서,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다. 한가지 음식만 좋아하고, 한 가지 노래만 부르고, 한 가지 취미만 하고, 딱 한 가지만 하려고 하다가 점점 옹색해져서 망한다. 명품녀가 ‘난 명품이 좋아’ 하고 선언하는 격이다. 그 방법으로 빨리 자신을 부각시킬 수 있다. 자신의 의도를 명확히 할 수 있다. 자기가 싫어하는 음식을 탐식하는 아이러니를 실천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변신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인간이 진보다 보수다 하고 나누어져서 싸우는 것도 다 이러한 원리 때문이다. 스트레스를 회피하려는 거다. 많은 문제가 있는데 이를 해결하려면 골치가 아프고 스트레스를 받으니 차별한 다음 ‘니탓이다’ 하고 ‘해결끝’ 선언해버리니 해결은 되었는데 가짜다.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자기를 기만했을 뿐이다. 이게 이명박 방식이다. 뭔가 불도저로 일은 빠르게 하는데 다 눈가림이고 속임수라 대강대강 얼렁뚱땅 하니 도무지 구제역이 안 잡힌다.


조선일보는 보수꼴통이고 한겨레는 진보꼴통인데 이렇게 극단으로 나누어 놓는 것이 더 의사소통이 빠르다. 중도로 가면 당췌 먼 소린지 알아먹지를 못한다. 그러므로 극단에 서야 소통이 되고 이 때문에 극단으로 가서 망한다.


실제로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언론이 중립적인 위치에서 기사를 쓰는 것보다는 확실히 한쪽편을 들어야 독자들이 정확하게 판단한다. 조선일보는 수구꼴통질 하는게 맞고 한겨레도 왼쪽극단으로 가는게 맞다. 문제는 조선일보 하나 정도는 괜찮은데 조중동문 떼거리가 너무 많다는 거다. 밸런스가 깨진 것이다.


영화평을 하는데 네티즌들이 0점 아니면 10점을 준다. 별 0개 아니면 다섯개다. 중간이 없다. 근데 평균으로 보면 이게 또 신통하게 맞다. 반면 평론가들은 무난하게 별 세개를 주는데 이게 아무 도움이 안 된다. 평론가 별점은 있으나 마나다. 극단으로 가서 포지셔닝 게임을 해야 의사소통이 정확하고, 더욱 치우치고 말썽을 부리고 깐죽거리고 꼴통을 부려야 존재감이 살아난다. 근데 환경이 변했는데도 계속 그짓하다가 망가지는 거다.


이러한 악순환을 극복하려면 구조의 모형을 세팅해서 존엄을 얻어야 한다. 역할극을 끊어내고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진보나 보수라는 포지션에 갇히지 말고, 중도로 물타기 해서 맹탕되지도 말고 집단이 나아가는 방향성을 제시하면서 정교하게 디자인 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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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의 구조가 새로 나왔습니다. 인간은 공동체적 동물이며, 마음은 언제라도 그대를 공동체의 중심으로 이끌고자 합니다. 공동체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 존엄이 있습니다. 존엄을 얻을 때 마음은 진정으로 다스려 집니다.


http://gujoron.com




[레벨:15]오세

2011.02.18 (20:07:29)

조문도석가사의
프로필 이미지 [레벨:1]나무그리는이

2011.02.19 (04:47:24)

나는 신이란 관념에 불과 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체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실체, 실존은 생명이고 우주라고 생각 합니다.  생명은 구조의 모습을 띄고 있는 것 같씀니다.  또 생명은 우주를 닮아 있지요.  생명은 끈임없이 완전성을 향해 진화 할거라 생각합니다.  영생 불사가 인생의 답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주는 순환 구조가 아닌가 하고 생각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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