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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김동렬*
read 7862 vote 0 2012.10.21 (18:42:20)


    옛날 글인데 추가했소. 

 

 

 

    까뮈의 이방인

 

    인간은 부조리한 존재이다. 어떤 욕망도 희망도 야심도 상심한 한 인간을 설득할 수는 없다. 미래에 대한 찬란한 약속 따위는 무시된다. 본질에서 인간은 무언가를 ‘위하여’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 번 살아봐. 심심하지는 않을 거야. 힘내라구.’ 하고 격려하는 사람도 있지만 공허할 뿐이다. 기어이 맛보게 되는 것은 환멸이다. 삶이 죽음보다 낫기 때문에 우리가 이 삶을 살아가는 것은 결단코 아니다. 예컨대 ‘부작용이 없는 마약이 발명된다면 그대는 그 약을 먹을 것인가?’ 버려야 할 것이다. 그대가 권하는 희망 혹은 욕망이란 것이 설사 가치를 지닌다 해도 그것은 부작용 없는 마약에 지나지 않는다. 신통한 일은 어디에도 없다. 권태와 환멸을 넘어 있어야 하는 그것은 의식의 표백이다. 늘 그렇듯이 오늘은 어제의 표절이다. 내일은 오늘의 복제판이다.

 

    그러므로 나는 너 너는 나. 그렇게 너와 내가 하나될 수 있다면. 그러한 방법으로 신을 만날 수 있다면. 신의 고독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차라리 반항이겠다. 희망과 야심을 온전히 버렸을 때 밑바닥에서의 에너지가 노출된다.

 

    김기덕의 피에타에서 주인공 이강도처럼 황폐한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논리는 애시당초 없다. 그 황폐한 대지에서 말이다. 황폐함과 치유됨의 변증법이라는 노를 저으며 묵묵히 나아갈 뿐이다. 김기덕은 그 황폐한 대지에서 또다른 황폐함의 화살 하나를 쏘아보낸다. 뱀이 뱀을 낳고 전갈이 전갈을 낳듯이.

 

    인생은 허무하다

 

    그렇다면 그 허무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아니야, 삶은 멋진 거야.’ 하고 자신을 위조할 수 있지만 그 약효는 길지 않다. 그것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그대 자신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빛나는 사람들이 있다. 내 사랑하는 고흐가 그러했고, 이중섭이 그러했고, 이상이 그러했고, 전태일이 그러했고, 천상병이 그러했고, 경허가 또한 그러하였듯이.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그 절절한 허무를 두말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있어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상처이다. 그 상처를 핥는 것이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신의 친구가 될 수 있다.

 

    참된 사람은 거짓 위안을 거부하고 진실한 폭로에서 어떤 가능성을 발견한다. 슈퍼맨이 날아와서 인간을 구원해준다는 헐리우드 영화의 뻔한 거짓말에서 절망을 맛보게 되지만, 그 어떤 거짓 구원의 가능성도 악착같이 차단하는 김기덕 영화에서는 한 줄기 희망을 본다. 신의 화살은 그렇다치고 나의 화살은 이제부터 시작이기 때문이다. 화살은 날아가면서 또다른 화살을 쏜다. 그것은 화살 자신의 화살이다. 그것이 스타일의 창의다.

 

    바둑의 이창호

 

    옛 사람이 이르기를 효성(曉星)에는 계단을 두지 않는다고 했다.
   초단은 수졸(守拙)이니 근근히 지켜낸다.
   2단은 약우(若愚)이니 어리석으나 패기가 있다.
   3단은 투력(鬪力)이니 힘이 강하다.
   4단은 소교(小巧)이니 작은 꾀를 낸다.
   5단은 용지(用智)이니 지혜를 사용한다.
   6단은 통유(通幽)이니 깊이가 그윽하다.
   7단은 구체(具體)이니 판의 전모를 본다.
   8단은 좌조(坐照)이니 앉아서도 훤히 본다.
   9단은 입신(入神)이니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그대는 바둑을 처음 발명한 사람에게 몇 단을 수여할 생각인가? 김기덕 감독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자기만의 스타일을 발명했다. 서푼짜리 영화평론가들이 무려 효성에게 급수를 매기려들고 있다. 웃기는 일이 아닌가?

 

    효성은 태양을 대지로 안내하고 홀연히 사라진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효성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1999년 한 해의 극장가

 

    재난영화 도입부의 공식은 이러하다. 조만간 재난의 한가운데 서게 될 운명의 주인공이 말한다. 
   “큰 일 났어. LA 시가지 한가운데서 화산이 폭발했다구.”
   이때 심드렁한 관객의 부아를 돋구는 역할을 맡은 조연이 말한다. 
   “야아 썰렁하다야. 너 어디 아프니?”
세기말 1999년 한 해의 극장가는 유난히 재난영화들로 채워졌다. ‘타이타닉’을 필두로 ‘딥 임팩트’ ‘고질라’ ‘쥐라기공원2’ 등.
   30년대의 대공황, 40년대의 2차 세계대전 등 힘들고 우울할 때 찰리 채플린의 코미디를 보며 위안 받았듯이 사상 유례 없는 미국의 대호황기를 맞아 도리어 재난영화를 보고싶어 했던 것이다. 다행히 재난이 우리 마을은 비켜갔다는 사실에 안도하기 위하여.
   주인공의 말은 실은 그 영화를 만든 감독 자신의 말일 수 있다. 관객의 부아를 돋구는 조연은 실은 그 영화의 관객인 바로 당신일 수 있다. 이 희곡의 작가인 감독은 말한다. 
   “큰일 났어. LA 시가지 한가운데서 화산이 폭발했다구.”
   관객인 당신은 조소한다. 
   “야아 썰렁하다야. 3류감독 주제에 나를 한번 놀래켜 보겠다는거니?”
   물론 영화에서는 그렇게 뺀질거리며 말하는 사람이 그 재난에 제일 먼저 희생된다. 감독은 그러한 방법으로 무개념 관객에게 복수한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보고 비난을 퍼붓는 관객들은 무의식중에 역할하는 조연들이다. 정신차렷! 당신은 이미 무대 안에 있다.

 

    햄릿의 마지막 대사는 이렇다. 
   “이 비극에서 무언의 역을 맡았거나 혹은 극을 관람하는 관객에 불과한 여러분. 아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호레이쇼. 알지 못하는 모두에게 나의 행동과 그 이유를 전해주게.”
   신의 무대에서 당신은 오늘도 관객이다. 알지 못하는 모두에게 신의 행동과 그 이유를 전해주고 싶다.

 

    마이너리티 리포트

 

    주변인들의 시대가 있다. 막이 오르기 전에 삐에로가 나서서 한마디 하는 시간이 주어진다. 그러나 풍각장이의 시대는 길지 않다. 주인공이 등장하면 삐에로는 그만 퇴장해야 한다.
정치적 소수자도 대접받아야 한다. 때로 위대한 변혁은 변방의 작은 사람들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마이너리티에게는 마이너리티의 문제가 있다. 그들은 판을 벌이기가 무섭게 자기 역할을 찾아버린다. 스스로 게릴라를 자처하고 삐딱이를 주장하며 주변인으로 자족한다. 거기서 시작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지 않고 거기서 멈추어 그것을 자신의 캐릭터로 삼는다. 
   진짜가 아니어서는 안 된다. 역할 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형제여! 부디 도중에 주저앉아 점방을 열려고 하지 말라. 변방에서 틈새시장을 개척하지 말라. 구색을 맞춰주는 주류의 양념이 되지 말라. 비록 출발은 변방에서 아웃사이더로 작았으나 곧 죽어도 중앙의 무대로 뛰어들고 보아야 한다. “왜 포기하는가?”

 

    지식인들이 김기덕 감독의 성공을 배아파 하는 이유는 김기덕 감독이 무려 그들을 가르치려 들기 때문이다. 조연이 주연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크게 화를 낼 때는 대개 서로간의 역할이 바뀌었다고 믿을 때다. 용기있게 역할을 바꾸라. 바로 그것이 깨달음이다.

 

    생각하라! 불멸의 세익스피어도 한 때는 비극을 팔기 위해 희극을 쓰지 않았던가? 모든 위대한 것은 변방에서 온다. 작은 풀잎처럼 온다. 그러나 거기에 주저 앉아서는 안된다. 더 크게 싸우고 길을 열어가며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화엄사 대웅보전 현판

 

    추사는 금석학을 연구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본래 문자의 바탕이 갑골이나 금석에서 비롯되어 죽간과 종이로 바뀌어감에 따라 전서와 예서, 해서로 자체가 변해왔음을 본 것이다. 비석이나 인장의 글씨는 돌에 새기는 것이므로 전서가 자연스럽고 현판은 나무에 새기므로 예서가 자연스럽다. 세련된 종이글자체인 해서로 현판을 쓴다면 이상하다.
추사는 제주도로 유배를 가는 도중에 화엄사에 들러 원교 이광사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보았다.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주지스님을 꾸짖어 현판을 떼어버리게 했다. 10년 후 유배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다시 화엄사에 들러 이번에는 떼었던 현판을 도로 걸게 했다. 
   글자 안에는 글자가 없다. 천 자를 쓰고 만 자를 써도 글자를 쓰고 있어서는 명필이 될지언정 신필이 될 수 없다. 글자를 뛰어넘는 철학이 있어야 한다. 자와 획이 모여 글자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종이의 마음을 알아야 하고 먹의 마음을 알아야 하며 또한 붓의 마음까지도 끌어낼줄을 알아야 한다. 마침내 글자의 한계를 뛰어넘는 보편적인 울림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제주도 유배 동안 추사는 마침내 여기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나무와 돌에 결이 있듯이 또 종이와 붓에도 결이 있고 마음이 있다. 그것은 하나의 동그라미다. 동그라미와 동그라미가 충돌하며 더 큰 동그라미를 불러내는 형태로 진보는 일어난다.

 

    영화에는 영화의 결이 있다. 평론가들의 다툼은 대개 영화 안의 여러 질서들 중에서 어느 것을 더 강조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자와 획의 균형만 따지는 석봉체를 우러르는 평단은 김기덕 감독을 비난하지만 종이의 마음, 붓의 마음, 먹의 마음까지 고려하는 추사체를 떠받드는 베니스는 김기덕 감독에게 황금사자상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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