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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2647 vote 0 2011.08.24 (00:49:57)

세상의 작동에는 한계효용의 법칙이 적용된다. 주사위 두 개를 함께 던지면 처음에는 굉장히 많은 다양한 조합이 나와줄 것 같지만 주사위가 가진 경우의 수는 최대 36조합으로 한정된다. 갈수록 이전에 나온 조합이 재탕될 확률이 높아져 점차 주사위 던지기가 무의미해진다. 자원은 점차 고갈되며 세상은 작동하면서 중간에 한때 반짝 증가했다가 서서히 감소된다.

 

처음 한 두 번 작전을 성공시키면 굉장히 다양한 방법으로 적을 공략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작전을 반복할수록 패턴이 노출되어 결국 공략당하고 만다. 오히려 작전을 쓰지 말고 능력을 감추어야 찬스에 결정적인 한 방을 먹일 수 있다.

 

바둑과 같다. 바둑판은 넓은데 정석대로 두면 처음에는 둘만한 장소가 몇 곳 없다. 결국 정석대로 뻔한 장소에 두게 된다. 중반에 전투가 무르익으면 두어야 할 장소가 매우 많다. 그러나 갈수록 둘만한 장소가 사라진다. 끝내기 단계에 도달하면 다시 뻔한 장소에 두게 된다.

 

세상의 전개도 처음 단순한 상태에서 출발하여 중반에 복잡해졌다가 다시 단순해진다. 처음 갓난 아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몇 가지 없다. 먹기와 싸기, 울기, 웃기, 놀기 정도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할 일이 매우 많아진다. 노인이 되면 다시 아기로 되돌아간다. 포지션을 잃어 할 일이 없어지는 것이다.

 

처음에는 선택할만한 카드가 몇 장 없지만 게임이 무르익어 포지션을 조합할수록 굉장히 많은 카드를 손에 쥐게 된다. 공격도 가능하고 수비도 가능하다. 그러나 카드의 조합이 계속될수록 점차 선택지가 줄어든다. 계속 끌려가다가 막판에 몰리면 패를 덮고 항복하는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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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든 기업이든 국가든 문명이든 무한히 커지지 않는다. 처음부터 포지션은 정해져 있고 선택할 수 있는 카드의 수는 제한되어 있다. 단지 큰 게임을 벌여 매우 넓은 바둑판을 사용하면 그 사이클의 주기를 늘릴 수 있을 뿐이다.

 

◎ 만유는 탄생기, 성장기, 전성기, 쇠퇴기, 사멸기의 순환주기를 가진다.

◎ 포지션 조합은 초반 선택지가 적고 중반에 활발하다가 막판 소멸한다.

 

재벌이 무한정 팽창할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탄생기, 성장기, 전성기, 노쇠기, 사멸기의 주기를 가진다. 단지 처음부터 판도를 크게 잡으면 탄생기와 성장기를 늦출 수 있지만 대신 한 국가 안에 큰 재벌이 여럿 있을 수 없다. 그 국가의 인구가 수용할 수 있는 최대재벌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다.

 

대한민국 안에 삼성과 현대 같은 대형재벌이 무한정 탄생할 수 없다. 만약 대형재벌이 포화상태에 도달해 있다면 있다면 다른 중소기업의 성장잠재력을 잡아먹고 있는 것이며 해외로 진출하여 다국적기업이 된다고 하더라도 지구인구 70억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가 정해져 있다. 그 한계에 도달하면 점차 쇠퇴하게 된다. 혹은 타 기업과 국민에게 민폐를 끼치게 된다.

 

세상모든 것이 그러하다. 생노병사의 주기를 가진다. 공장의 제품도 그렇다. 소재, 기능, 성능, 효능, 양식에 있어서 각 단계별 혁신이 일어난다. 소재의 혁신이 먼저 일어나고 다음 기능, 성능, 효능, 양식으로 완성되며 더 이상의 창의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창의하려면 처음부터 젊은 소재단계를 공략해야 한다. 늙은 양식단계에 몰입하면 미래가 없고 비전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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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래의 플러스적 세계관은 0에서 출발하여 1, 2, 3, 4....로 무한히 전개하며 그 끝은 알 수 없다. 밑도 끝도 없는 불가지론에 빠져버린다. 이 경우 통제할 수 없다. 어디에서 멈추어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부자들은 계속 부자가 되고 제국은 계속 정복하고 인구는 계속 늘어나고 끝없이 전개하는 식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문명은 최초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출발하여 이집트와 소아시아를 거쳐 지중해를 건너 그리스반도와 이탈리아 반도를 타고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하여 프랑스로 진출했다가 다시 영국과 네덜란드를 거쳐 아메리카와 일본을 거쳐 한국과 중국으로 전개하고 있다.

 

문명은 어느 한 지역에서 무한히 성장할 수 없다. 구조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도시는 무한히 팽창할 수 없다. 기업은 무한히 성장할 수 없다. 성장사이클이 있으며 중국대륙처럼 토대가 넓으면 그 성장주기가 느려지고 반대로 토대가 좁으면 그 성장주기가 빨라질 뿐 시작과 끝이 분명하게 있다. 쥐는 성장주기가 짧고 코끼리는 길다. 그만큼 수명의 차이가 있을 뿐 성장주기는 분명히 있다.

 

구조론의 마이너스적 세계관은 주사위 던지기와 같다. 주사위 두 개를 던지면 처부터 36포지션이 정해져 있다. 그러나 주사위는 두 개 뿐이고 눈은 여섯 뿐이다. 나머지 경우의 수는 감추어져 있다. 주사위를 던지면 감추어져 있던 포지션들이 일제히 드러나게 되므로 사람들은 곧 흥분하여 기업이 무한성장을 할 것으로 착각하지만 주사위 던지기를 반복하면 더 이상 신통한 수가 나와주지 않는다. 패턴이 읽혀져서 패망하고 만다. 성장을 지속하려면 주사위를 추가해야 한다. 그러나 역시 한계가 있다.

 

어떤 하나의 소재로 창의할 수 있는 가능성의 숫자는 제한되어 있다. 발견과 발명은 무한히 일어나지 않는다. 20세기 초반에는 발명특허가 유행하여 못 하나로만 수천가지 특허가 나왔지만 대개 같은 모양이 반복될 뿐 거기에 진보성은 없다. 혁신성이 없다. 그냥 못을 다양한 형태로 구부려놓고 발명했다고 우기는 것이다. 억지 발명에 지나지 않는다.

 

소재는 기능을 제한하고, 기능은 성능을 제한하고, 성능은 효능을 제한하고, 효능은 양식을 제한하므로 창의성의 무한전개는 없고 무한발명은 없으며 소재에서 시작하여, 기능 단계에서 크게 혁신이 일어났다가 성능, 효능을 거쳐 양식단계로 가면서 점차 퇴화하여 모방을 답습하게 된다. 이 시기에는 창의하였다고 우기지만 실제로는 다른 사람의 음원을 짜깁기하여 같은 패턴을 반복하는 후크송에 다름 아니게 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교묘하게 법을 피해간 기술적 표절이다.

 

바둑과 같다. 초반에는 피아간의 거리가 멀어 창의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적다. 중반에 서로 얽히면서 다양하게 창의하게 된다. 막판에 승부가 기울어지면서 역시 혼자 놀게 된다. 상대가 응수하지 못하므로 창의할 수 없다. 중반에 피아간의 거리가 좁혀지고 밸런스가 팽팽할 때 넉넉히 창의할 수 있다. 그 시기는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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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것은 기승전결의 사이클, 생노병사의 사이클을 가진다. 초반은 창의할 것이 별로 없지만 큰 잠재력을 가져서 드물게 거대한 혁신이 일어난다. 중반은 고만고만한 아이디어가 무수히 쏟아져 나온다. 막판에는 표절만 난무하고 신통한 창의는 일어나지 않는다.

 

음악의 유행, 회화의 발전, 문예사조의 유행, 기술의 진보에도 이러한 기승전결의 주기가 있다. 탄생기, 성장기, 절정기, 쇠퇴기, 사멸기의 순환주기가 있다. 우주의 탄생에도 그것이 있고, 한 개인의 인생에도 그것이 있으며, 한 커플의 연애에도 그것은 있고, 한 작가의 창작에도 그것이 있고, 한 기업의 흥망에도 그것은 있다.

 

절정기에 도달하면 굉장한 거품이 일어난다. 그 거품은 잘못된 것이 아니고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인상주의 회화의 등장이든, 낭만주의 문학의 등장이든, 서태지의 댄스음악이든, 요즘 유행하는 아이돌이든 그것이 있다. 처음 하나가 일어나지만 곧이어 우후죽순으로 번성하고 나중에는 서로 표절하다가 망한다.

 

마이너스라고 했지만 그냥 줄어들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를 알아갈수록 신선함이 줄어들지만 대신 관계가 밀접해지면서 다양한 창의가 가능해진다. 미지의 새로운 분야가 끝없이 개척되는 것이다. 만약 토대를 늘릴 수 있다면 서로간의 간격과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크게 세력을 떨칠 수 있다. 남녀간의 연애라도 그러하고 한 기업의 팽창이라도 그러하다.

 

종래의 플러스적 세계관은 위험하다. 뭔가 점점 늘어나서 통제불능에 빠지기 때문이다. 주역의 음양사상과 같다. 처음 음양에서 4괘 8괘, 16괘, 64괘로 늘어나서 무한대가 되어버린다. 통제불능이다. 허무해지고 만다. 숫자가 증가할수록 싱거워진다. 단위당 비중이 엷어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여진족도 핏줄이 섞인 우리민족이고 몽골족도 신화와 전설을 공유하는 우리민족이라고 우긴다. 그러다가 점차 영역이 넓어져서 수메르 민족까지 간다. 그 경우 민족이 커진 것이 아니라 단어의 뜻을 바꿔놓은 것이다. 민족이라는 단어에 물타기를 계속해서 그 의미가 계속 싱거워진다. 결국 전 인류가 한 민족이 되어 민족이라는 단어가 필요없게 된다. 허무한 거다.

 

민족은 밀접한 의사소통을 통한 의사결정의 효율성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민족의 의미를 넓힐수록 관계의 밀접함은 사라지고 만다. 단어의 의미가 죽어서 죽도 밥도 안 되는 것이다. 물타기는 멈추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이제마의 4상의설을 능가하는 8상의설을 주장하자 여기저기서 16상의설, 32상의설 64상의설이 나왔다. 숫자가 늘수록 의미가 엷어져서 만상의설이 되면 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 차별성을 유지하고 긴장감을 유지하려면 대척점이 분명해야 하며 맹렬하게 맞붙어야 한다. 그러려면 극단에 서야 한다. 극단은 둘 뿐이다. 2상을 넘어 4, 8, 16으로 갈수록 물타기가 되어 관계의 밀접함은 사라지고 창의는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세상의 작가들이 다양한 소설을 창작하는 것은 남녀의 성이 단 둘 뿐이기 때문이다. 남녀 외에도 다양한 성이 있어서 백성, 천성, 만성이 되면 성의 의미가 없어져서 모든 로맨스는 빛을 잃고 만다. 전기가 플러스 마이너스 외에도 다양한 극이 있다면 맹렬한 스파크는 일어나지 않는다.

 

바둑판에 흑과 백 외에도 청홍적황녹회들이 잔뜩 있다면 재미가 없는 것이다. 종래의 플러스적 세계관은 일본만화처럼 주인공의 무공이 점점 늘어나 급기야는 장풍으로 태양과 달을 날려버리고 허무해져서 같은 패턴을 반복하게 된다.

 

마이너스적 세계관에 탈출구가 있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와 같다. 출구는 막혀 있고 제한된 공간 안에서 서로를 소모시킨다. 등장인물은 하나씩 제거되며 추가로 투입되지 않는다. 최종단계에는 단 두 사람만 남는다. 그 지점에서 긴장감은 최고가 된다. 황야의 무법자처럼 대결을 거듭할수록 인물이 점점 감소한다.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좋은놈, 나쁜놈, 못생긴 놈처럼 마지막에 세 사람이 남아 대결하다가, 다시 두 사람으로 줄어들고, 결국 한 사람이 주인공이 살아남아 표표히 떠나가는 거다. 마이너스라야 이야기가 된다. 작품의 완결성이 얻어지는 것이다. 플러스로 가면 결말이 흐지부지 하게 된다.

 

대부분의 한국영화들이 초반에 기발한 아이디어로 기세좋게 가다가 중간에 힘이 딸리면서 계속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키다가 막판에 흐지부지 되고 마는 것은 닫힌공간 안에서 갈등하며 서로를 소모시켜 가면서 판을 흔들어 서로간에 공유한 토대를 발견시켜 낸다는 마이너스적 세계관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거 없으면 작품의 완성도는 기대할 수 없다.

 

마이너스는 줄이는 것이며 계속 줄이다보면 0에 도달한다. 더 이상 줄일 수 없는 어떤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정답이 딱 나와준다. 황금률처럼 더 이상 더하고 뺄 수 없는 상태가 있으며 그 상태는 주로 비례로 나타난다.

 

마이너스 세계관은 그 정확한 비례에 도달했을 때 작동을 정지한다. 정답 찍어주는 것이다. 무한이라는 허무의 바다에 빠지지 않는다. 유한의 세계, 정답 나와주는 세계, 비례식의 세계. 네가 이렇게 하면 나는 이렇게 한다는 대칭성과 상호작용의 세계, 치열한 긴장감의 세계, 팽팽한 대결의 세계, 절묘한 밸런스의 세계, 똑부러지는 정답을 찍어주는 세계다.

 

마이너스는 서로 대칭을 이루고 교착되어 있으며 그 정점에는 계 전체가 맞물려 있어서 급소가 되며 그 급소를 타격하면 와르르 무너져 버린다. 비로소 세상이 설명된다. 그 급소에 주인공이 위치하고 있으며 그 한명의 주인공이 죽을 때 천하는 무너지고 우주는 파멸하게 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은 신과 대등하게 된다. 작품은 바로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마이너스가 생노병사, 기승전결, 탄생-성장-절정-노쇠-사멸의 순환주기를 가지지만 막연한 순환은 아니다. 원점으로 되돌아오는 순환은 아니다. 화살은 날아가면서 하늘과 만나고, 참새와 만나고, 공기와 만나고, 나뭇잎을 스쳐가면서, 중간에 온갖 것들을 만나지만 결국 과녁에 도달하여 멈춘다. 일직선으로 곧장 가는 것이다. 중간의 짝짓기가 온갖 스토리를 만들어내지만 그래도 길을 잃지 않고 똑바로 날아간다.

 


http://gujoron.com




[레벨:15]오세

2011.08.25 (11:2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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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노병사의 세계관. 

시작이 있고 끝이 있고

만남이 있고 헤어짐이 있는 세계.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1.08.25 (13:19:25)

그것이 제자리에서 맴을 도는 것이 아니라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오.

 

[레벨:15]오세

2011.08.25 (13:4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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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선같은 것이 아닐까하오.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1.08.25 (14:11:35)

바퀴는 회전운동을 하지만 자동차는 일직선으로 달려가오.

그 일직선을 보아내는데 성공하느냐가 중요하오.

물고기는 꼬리를 좌우로 흔들지만 일직선으로 가는 것.

나선같은 것은 없소.

단지 그렇게 보여질 뿐.

파도는 오르내리지만 겉보기일 뿐 일직선으로 가는 것이오.

팔은 앞뒤로 흔들지만 사람은 똑바로 가는 것이오.

 

 

제 이야기를 잘 알아들어야 하오.

이게 무슨 이야기냐 말이오.

나선이냐 직선이냐가 요점이 아니오.

나선과 직선이 공존하면 직선을 보고 나선을 버려야 주식투자를 해도 대박을 먹는다 이말이오.

나선 따라간 사람은 다 쪽박찼소.

 

나선은 있어도 폐기요.

그건 안 쳐주는 것이오.

 

세상 어느 곳이라도 마찬가지요.

나선을 본 자는 망할 것이요 직선을 본 자는 흥할 것이니라.

나선이냐 직선이냐가 논점이 아니고 직선을 봐야 한다는게 논점이요.

 

돈은 인간에게 이로울까 해로울까..

이로운 점은 대화할 가치가 있지만 해로운 점은 논외가 되오.

주식해서 흥했다는 사례는 연구가치가 있지만 망했다는 사례는 연구가치가 없소.

주인공이 바보로 설정되어 있는 영화는 볼 필요가 없소.

우승자가 어떻게 우승했는지는 조사되어야 하지만

패배자가 왜 졌는지는 물어볼 이유도 없소.

주인공이 왜 거기로 갔는지는 따져볼 일이지만

엑스트라가 왜 거기에 서 있었는지는 물어볼 일이 없소.

돌이 99퍼센트에 금이 1퍼센트면

금 1프로가 토론대상이지 나머지 돌 부분은 잊어도 좋소.

그건 상관없는 것이오.

반대로 식당에서 나온 밥에 파리가 있다면

파리 1이 문제이지 나머지 멀쩡한 99프로는 논의대상이 아니오.

세상은 언제나 직선이고 마이너스이며

그 부분을 보아내는 자는 대박을 얻고 못 보는 자는 쪽박을 차는 것이오.

나침반은 다만 북극을 가르키면 그 뿐 나머지 방위는 고려할 이유도 없소.

 

달이 지구를 도는데 직선운동이냐 나선운동이냐

직선운동은 과학이고 나선운동은 관측자료일 뿐이오.

지구가 태양을 돌아도 공간이 굽은 거지 지구는 직선으로 가는 것이오.

[레벨:15]오세

2011.08.25 (14:5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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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은 인간 개인의식, 집단의식의 발달을 나선형으로 보오. 

하지만 직선이구려. 

일방향성.

진보는 있고 보수는 없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1]id: 느닷없이느닷없이

2011.08.25 (19:00:15)

나선의 회전보다는 직선의 진행성, 즉 진도 나감에 주목해야한다는 말씀인 듯 합니다.

 

나사못의 작동 방식과 유사하군요. 십자 드라이버로 나사못을 회전시키지만, 결국은 빗면의 원리에 의해서 그 회전이 나사를 앞으로 진행시키지요.

 

중요한 것은 빗면의 구실을 하는 것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일까요...

 

어쨌든, 중력의 양자화를 가로막는 것이 무한대라는 계산 결과때문인데, 구조론의 마이너스적 세계관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하겠군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1.08.25 (19:16:58)

 

어떤 것을 이야기하려면

확실한 판정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로켓은 분명앞으로 가지면 연료는 뒤로 가거든요.

로켓이 앞으로도 가고 뒤로도 간다고 말하면 안 되죠. 

로켓은 앞으로 갑니다.

 

그 기준은 센터입니다.

반드시 센터가 있고 센터를 기준으로 논해야 합니다.

센터는 무게중심, 운동의 중심, 힘의 중심으로 존재하는데 이 센터는 언제나 직진합니다.

그러나 외부적으로는 여러가지 상호작용에 의해 포물선이 될 수도 있고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뱀이 S자 모양으로 가지만 운동의 중심으로 보면 직선입니다.

 

하여간 이 이야기의 중핵은

나선이냐 직선이냐가 아니고 어떤 경우에도 직선만 채택해야 한다는데 있습니다.

어떻든 운동의 중심은 직선이니까.

무슨 뜻인가 하면 나선을 그릴 때 그 나선의 범위 전체를 하나의 계로 보아야 한다는 거죠.

 

지구는 태양의 오른쪽 혹은 왼쪽에 어딘가에 있는게 아니라 원형궤도상에 있다고 말해야 한다는 거죠.

물론 지구는 태양의 주변 어딘가에 있습니다.

분명히 특정시점에는 어딘가 특정위치에 있지요.

그러나 이와 별개로 어떤 과학적인 규명을 할 때는 전체범위를 계로 설정하고 이야기를 진행해야 합니다.

근데 보통 그러한 '닫힌계의 설정'을 생략하고 논의를 해서 대화가 산으로 가는 거지요.

의사소통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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