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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8163 vote 1 2013.10.21 (23:07:10)

 

    과학의 첫 단추


    구조론은 하나의 존재가 5회의 연속적 의사결정에 의해 성립한다는 이론이다. 세상은 의사결정단위들의 집합이며, 이러한 의사결정원리로 과학의 최종적인 근거를 삼아야 한다는 생각이 구조론이다.


    자연에서는 구조다. 구조는 어떤 둘이 맞물려 하나로 행세하는 것이다. 이때 축 하나가 대칭된 둘을 동시에 통제하는 원리가 일의성이다. 둘이 하나가 되는 일의성에 의해 세상은 모두 연결된다.


    둘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역으로 하나가 둘이 되는 것이며, 이를 전개하면 둘이 넷이 되고, 넷이 여덟이 되는 식으로 계속 펼쳐져서 세상을 망라하게 된다. 이를 추적하여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


    하나에서 둘로 펼쳐지고, 둘에서 하나로 매듭짓는 의사결정의 단위가 일의성이며, 세상은 이러한 의사결정단위들의 집합이다.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넷으로 펼쳐지므로 서열대로 족보가 있다.


    건물이면 설계도가 있고, 영화면 시나리오가 있고, 바둑이면 족보가 있고, 진화면 계통이 있고, 강물이면 본류가 있고, 산맥이면 대간이 있다. 상부구조와 하부구조가 있다. 순서와 방향이 있다.


    씨줄과 날줄이 있고 북과 바디가 있고, 경도와 위도가 있고 북극과 남극이 있다.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의 한 방향으로 흐르듯이 공간도 수렴의 극에서 확산의 극이라는 한 방향으로 전개된다.


    시간으로 순서를 알고 공간으로 방향을 알아, 지로 무지를 극복하고, 완전으로 불완전을 극복하고, 내비게이션으로 길치를 극복하고, 화음으로 소음을 극복할 수 있다. 바른 답을 찾을 수 있다.


    이에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세계관을 바꾸고, 가치관을 바꾸고, 인생관을 바꾸어야 한다. 수평에서 맞대응하는 태도를 버리고 높은 층위에 올라서서 제어하는 태도로 바꾸어야 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바꾸어야 한다. 그러려면 지금까지 자신이 세상을 이해해온 방식을 재검토해야 한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은, 인과율에 근거하여 결과에서 원인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원인은 입자로 가정된다. 입자는 더 이상 쪼개지지 않으며 내부에 고유한 속성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문제는 한계의 설정이다. 쪼개지지 않는다거나 고유하다는 것은 더 이상 어쩔 수 없다는 거다.


    왜 한계선을 긋지? 과학은 의심에서 출발한다. 마땅히 의심되어야 한다. 섣부른 한계선의 설정은 비지성적이다. 한계선의 설정은 일상의 경험으로부터 유추된다. 고추는 맵고 설탕은 달고 소금은 짜다.


    원래 그렇다. 여기서 더 쪼갤 수 없다. 설탕이나 소금을 더 잘게 분해할 수는 없다. 설탕의 단맛이나 소금의 짠맛은 원래부터 고유한 바탕의 성질이라고 판단한다. 과연 그런가? 고추는 맵지 않다.


    매운맛은 없으며 그것은 통증이다. 고추의 캡사이신이 신경을 건드려서 통증을 유발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단맛은 없으며 그것은 혀가 음식을 안쪽으로 잡아당기는 반응을 뇌가 임의로 해석한 것이다.


    단맛은 혀끝에서 반응하기 때문이다. 맛은 자극에 반응하는 혀의 위치를 뇌가 인식한 것 뿐이다. 단맛은 안쪽으로 음식을 밀어넣고, 짠맛은 가장자리에서 안으로 뒤섞고 쓴맛은 밖으로 밀어낸다.


    떫은 맛은 혀에 달라붙는다. 떫은 맛은 없다. 떫은 맛을 느끼게 하는 타닌성분이 수분을 흡수하므로 떫은 감을 먹으면 변비에 걸린다. 쓴맛은 없다. 쓴맛은 음식을 밀어내므로 호흡에 방해된다.


    호흡은 공기를 안으로 빨아들이는데 쓴맛은 밖으로 밀어내므로 호흡에 방해된다. 숨이 답답해져서 싫어하는 것 뿐 커피는 쓸수록 맛이 좋다. 그러므로 맛이라는 것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맛의 실체가 있다면 그것은 입자여야 하며 ‘맛자’로 명명해야 한다. 왜 아무도 맛자를 명명하지 않았을까? 왜 국어사전에 맛자는 없을까? 있어야 명명하지. 그러므로 맛은 원래 없는 것이다.


    없는 것을 없다고 해야 한다. 사물의 고유한 속성은 없다. 그것은 뇌가 만들어낸 환영이다. 소금에 ‘짬’이 들어있고 커피에 ‘씀’이, 설탕에 ‘닮’이 들어있고, 감에 ‘떫’이 들어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사물의 실체를 낱낱이 규명해보면 그야말로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경지로 흘러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심하여야 한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은 가짜다. 진실은 무엇인가?


    인과율이 틀렸다. 인과율은 시간을 추적한다. 시간이 흐르면 사실이 왜곡된다. 결과에서 원인을 보는 것이 인과율이다. 결과를 확보했을 때 원인은 흘러간 과거다. 결과에서 원인을 바로 볼 수 없다.


    마술사는 이를 이용하여 사람을 속일 수 있다. 그러나 사진을 찍는다든가 등의 방법으로 원인을 잠가둘 수 있다. 인과 사이의 간격을 좁혀 그 과정에 외부요소가 개입하지 못하게 차단할 수 있다.


    속이지 못하게 막을 수 있으므로 인과율은 제한적으로 진리의 추적에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불완전하다. 인과율은 원인을 입자로 가정한다. 입자는 쪼개진다. 그러므로 불완전하다.


    소금과 설탕을 쪼개지 못했던 것은 그때 그시절 이야기다. 지금은 이미 쪼개져서 설탕은 탄소로, 소금은 염소와 나트륨으로 해체된다. 단맛과 짠맛은 달아나고 없다. 쪼개지 못했던 시절이 편했다.


    그때는 ‘소금은 원래 짠거야!’, ‘설탕은 원래 단거야.’ 하고 말하면 사람들이 납득했다. 그시절 ‘아기는 어떻게 태어났지?’ 하고 물으면 ‘황새가 물어다 준 거야!’ 하고 대답하면 서양 아이는 납득했다.


    한국에서는 ‘다리밑에서 주워왔어!’ 방법을 쓴다. 한국 아이들도 납득했다. 지금은 ‘인과-원자-입자-본성-한계설정’ 수법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아기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정직하게 답해야 한다.


    어느 시대든 더 이상 추궁할 수 없는 어떤 절대적인 벽이 있어왔다. 그것은 대개 인간의 감각기관으로 연결된 부분으로 설정되었다. 붉은 색이 붉고, 푸른색이 푸르며, 물은 차고 불은 뜨겁다.


    종은 종소리 나고, 북은 북소리 난다. 향은 향내 나고 변은 구린내 난다. 날짐승 날고 길짐승 긴다. 남자는 남자고 여자는 여자다. 귀족은 귀족이고 상놈은 상놈이다. 거기서 막히고 더 이상 추궁은 없다.


    그러나 한 번 소금이 염소와 나트륨으로 쪼개지자 지적 재앙은 시작되었다. 남자인데 남자가 아닌 동성애자가 있다. 귀족인데 귀족이 아니개 되고 상놈인데 상놈이 아니게 된다. 대혼란이 일어난다.


    다시금 무너뜨릴 수 없는 어떤 절대적인 벽을 설정해야 한다. 그 옛날에 인간의 신체감각이 넘사벽이었면 지금은? 그 벽은 처음 분자단위에서 출발하여 원자단위로, 그리고 소립자 단위로 나아갔다.


    표준모형은 최후의 벽이다. 누구도 이 벽을 넘을 수는 없다. 그만 포기하시라. 더 이상 물음표를 날리지 마시라. 그리하여 이제 만족하는가? 천만에. 힉스입자는 거대한 장막을 새로 열어젖혔다.


    새로운 벽을 만들면서 동시에 그 벽을 넘어버린 것이다. 처음 분자시대에서 원자시대로 넘어왔을 때 ‘여기가 한계다.’ 하고 금을 그은 것이 아니라 원자에서 소립자로 한 꺼풀 더 벗겼듯이 말이다.


    표준모형이라는 넘을 수 없는 한계에 직면하여 인류는 다시 한 꺼풀을 더 벗고자 한다. 표준모형 다음에는 무엇이 있는가? 어떻든 인류는 계속 양파껍질을 벗겨왔다는 것이다. 또 벗겨낼 것이다.


    ◎ 본성법 : 왜 소금이 짜지? .. 소금 내부에 어쩌구 저쩌구
    ◎ 구조법 : 왜 소금이 짜지? .. 뇌가 어쩌구 저쩌구


    그렇다면 이제는 그 벗김과 벗겨짐으로 설명해야 한다. 소금의 짠맛은 소금이 아니라 뇌로 설명해야 한다. 남자가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은 그것이 좋아서가 아니라 여자를 의식했기 때문이다.


    개인이 어떤 목표를 가지는 것은 그것이 좋아서가 아니라 집단의 압박 때문이다. 자연상태에 머무르는 원시부족을 관찰하면 알 수 있다. 인간의 행위동기로 분류된 것들이 그들에게는 없다.


    그들은 출세도, 성공도, 섹스도, 야망도, 돈도 관심이 없다. 이것들은 집단 안에서의 의사결정 포지션일 뿐 인간의 고유한 본성이 아니다. 뇌가 맛을 만들어 내듯이 사회가 만들어낸 환상이다.


    여기서 두 가지 설명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소금을 쪼개는 법과 뇌를 상대하는 법이다. 구조론은 이제 그만 소금쪼개기를 포기하고, 뇌쪼개기로 가야 하는게 아니냐 하는 거대한 방향의 전환이다.


    답은 소금에도 없고 뇌에도 없다. 둘 사이에 있다. 무엇이 있는가? 일의성이 있다. 하나이면서 둘이다. 이쪽을 담당하면서 저쪽도 커버한다. 이에 맞추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입자가 아니라 구조다. 세상은 원자의 집합이 아니라 의사결정의 집합이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쪼개지고 합쳐지는 일의성이다. 한계선을 긋는게 아니라 완전성을 취하는 것이다.


    ◎ 인과율 ( X ) ≫ 일의성 ( O )
    ◎ 원자 ( X ) ≫ 구조 ( O )
    ◎ 더 이상 쪼개지지 않음. ( X ) ≫ 쪼개지거나 합쳐짐을 결정함 ( O )
    ◎ 입자 ( X ) ≫ 의사결정
    ◎ 한계선 설정 ( X ) ≫ 완전성 획득


    더 이상 어쩔 수 없다는 한계는 역으로 바로 거기서 출발한다는 의미다. 그것은 완전성이다. 완전성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세상은 단단한 알갱이가 아니라 무른 사건 안에서의 상호작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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