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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8958 vote 0 2013.12.09 (20:24:49)

 

    유전자로 보는 분자생물학이 진짜다. 유전자 단위로 보면 생물의 본성이 구조론적인 상호작용임을 알 수 있다. 종이라는 모호한 개념에 집착하는 진화생물학은 사실이지 소설 쓰는 거다. 종은 의사결정단위가 아니다. 종은 사건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애초에 번짓수를 잘못 짚은 거다.


    ‘이기적 유전자’를 쓴 리처드 도킨스와 ‘지구의 정복자’를 쓴 에드워드 윌슨의 논쟁이 제법 흥밋거리가 된다. 혈연선택의 이기적 경쟁이냐 집단선택의 이타적 경쟁이냐다. 많은 종들은 가까운 혈연을 돕는 전략을 취한다. 이는 이기적인 혈연선택이다. 반면 개미나 사람은 고도의 집단행동을 한다. 동료를 위해 얼마든지 희생한다. 이는 집단선택이다. 집단선택은 일부 측면에서 다윈의 생존경쟁원리에 위배되는 것처럼 보인다. 어느 쪽이 옳을까?


    옛날에는 인간만이 유일하게 도구를 사용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동물이 도구를 사용한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악어가 나뭇가지를 사용하여 둥지를 지을 나뭇가지를 구하는 새를 잡거나, 문어가 쪼개진 코코넛 껍질에 몸을 숨기거나 하는 식이다. 도구의 의미를 넓게 적용하면 새의 부리나 맹수의 이빨이나 발톱도 도구다. 황소의 뿔이나 말의 꼬리는 몸에 이어져 있다. 신체의 일부다. 그러나 의사결정은 뇌에서 일어난다. 뇌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 타자다. 뇌 바깥은 모두 내가 아닌 남이다. 진화생물학자들이 종을 의사결정단위로 보거나 혹은 심리학자들이 나를 의사결정단위로 보는 것은 비과학적인 태도다. 정확하게는 상호작용 영역 안에서 유전자와 뇌다. 상호작용단위가 의사결정단위다.


    나라는 개념이나 혹은 종이라는 개념은 그냥 어떤 아저씨가 모르고 지어낸 생각이다. 이런 원시적인 개념을 쓴다면 과학자로 볼 수 없다. 이는 마치 정글의 부족민에게 자석이나 라디오나 카메라를 보여주면 이를 곧 마법으로 알아듣는 것과 같다. 배가 아프다면 뱃속을 봐야 한다. 문제가 일어난 지점을 봐야 한다. 마법에 걸렸다며 푸닥거리를 한다면 곤란하다. 바깥으로 나가서 너무 크게 범위를 잡는 것이다. 대개 이런 식의 비과학적인 의사결정단위를 지정하는 오류를 저지른다.


    이기적 유전자냐 이타적 유전자냐를 논쟁하는 것도 그러하다. 이기가 이타다. 지구가 멸망할 위기에는 누구라도 몸을 사리지 말고 지구를 구한다. 이는 이타적인 행동이 아니라 이기적인 행동이다. 부부싸움을 벌이다가도 도둑이 침범하면 부부는 협력한다. 나와 남의 경계는 원래 없다. 경계는 의사결정의 현장에서 도출하는 상대적인 경계다. 종은 단기전이냐 장기전이냐에 따라 생존전략과 세력전략을 쓴다. 혈연선택은 단기전의 생존전략이며 집단선택은 장기전의 세력전략이다. 종은 환경이 나쁠 때 생존전략을 채택하고, 환경이 양호할 때 세력전략을 채택한다. 대칭되는 둘은 실제로는 하나인 것이다.


    척력과 인력은 본래 하나다. 인력은 원래 없다. 척력이 교착되면 인력으로 나타난다. 전기는 N에서 S로 이동한다. 하나의 방향이 두 극을 만든다. 어떤 하나의 방향이 있으면 반드시 상하, 좌우, 전후, 원근, 중앙과 주변의 두 방향이 생긴다. 고저, 장단, 음양, 남녀, 내외, 경중 등의 형태로 모든 대칭되는 것은 실제로는 하나다. 그것이 하나임을 확인하려면 반드시 상부구조로 올라가야 한다.


    중요한 것은 언제라도 상부구조가 먼저 해결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부부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가족의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한다. 부부 사이에 자식이 있다면 둘이 공유하는 자식의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부부의 문제도 해결된다. 이처럼 문제해결은 먼저 나와 타자 사이에서 대칭이 일어나는 지점을 찾고 다시 한 층위 위로 올라가서 양자를 통일하는 축을 찾는 형태로 대칭≫비대칭을 성립시키는 방법을 쓴다. 예외는 없다.


    가족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가족 위의 부족을 찾아야 한다. 현대사회는 회사나 친척집단이나 지역공동체가 부족이다. 부족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국가를 찾아야 하고, 국가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인류를 찾아야한다. 문제의 해결은 대칭≫비대칭의 공식을 가지며 이때 한 단계 위의 층위로 올라서야 한다. 헤겔의 변증법과 비슷하지만 다르다. 헤겔의 합은 정과 반의 절충이지만, 구조론의 비대칭은 상부구조에 있다. 이때 상부구조가 먼저다. 인과율에 따라 원인이 결과에 앞선다. 시간적으로 앞설 뿐 아니라 공간적으로 위선다. 합이 먼저 있어야 정과 반이 도출될 수 있다. 화살의 몸통이 먼저 있어야 앞과 뒤가 있다. 대칭은 인과원리를 따르며 같은 층위에서는 인과법칙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철학자가 자신은 반자연주의자라고 선언했다. 자연주의는 자연법칙 일반으로 인간의 지식영역 전반을 설명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 양반은 신비주의나 불가지론으로 빠지지 않고도, 자연법칙으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인문영역 특유의 지점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동전의 양면이다. 자연과 반자연의 대칭은 하나의 몸뚱이 안에서 머리와 꼬리로 나누는 것이다. 생물의 진화가 이타적이냐 이기적이냐 논쟁하는 것과 같다. 이기적인 것이 이타적인 것이다. 이기주의는 나를 의사결정의 중심으로 잡는데, 그 이기를 결정하는 나의 범위는 절대 나의 층위에서 판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정의하려면 나의 가족까지 진도를 나가줘야 한다. 가족을 정의하려면 부족까지 가줘야하고, 부족을 정의하려면 국가와 민족까지 가줘야 한다. 결국 인식의 최대범위까지 가는 것이며, 그러므로 판단의 출발점은 자신의 인식한계 전부다. 진리와 자유와 사랑과 정의와 진보와 역사와 인류와 신의 완전성까지 가줘야 답이 나온다. 나침반은 작아도 북극을 가리킨다. 큰 나침반만 북극을 가리키고 작은 나침반은 그냥 동구밖이나 읍내 사거리 정도만 가리켜줘도 된다? 그런건 없다. 절대로 없다. 봐주는 거 없다. 북극 외에 극이 없다. 진리 외에 답이 없다. 무조건 인식의 최대한으로 기준선을 잡아야 한다.


    개미는 개미의 서식지 전체가 개미의 이기에 해당한다. 개미는 개미의 무리 뿐만 아니라 개미집을 포함 개미와 상호작용하는 일체를 자기자신으로 규정한다. 상호작용 단위가 의사결정 단위이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은 지구 전체, 나아가 우주 전체를 나로 규정한다. 아는 정도가 나의 범위를 결정하는 것이다. 모르는 사람은 자기 자신 마저도 적으로 규정한다. 알콜중독자나 마약중독자가 그렇다. 자신의 신체까지 버리고 자신의 쾌감만 나로 규정한데 따른 실패다. 자신의 두려움이나 부끄러움, 슬픔도 의연한 자세로 나의 일부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두려움을 피하고 부끄러움을 피하고 슬픔을 피하려는 즉 힙리적인 의사결정의 실패다.


    모든 종은 생존전략과 세력전략, 이기전략과 이타전략, 혈연선택과 집단선택을 동시에 가지며 단기전이냐 장기전에냐에 따라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 자신의 상호작용 범위가 곧 나이며 장기전은 상호작용범위가 큰 것이다. 프로야구만 해도 페넌트레이스냐 코리언시리즈냐에 따라 전략을 다르게 가져간다. 단기전은 올인전략을 쓰는게 정답이고 장기전은 확률전략을 쓰는게 정답이다. 단기전인데도 올인을 거부하다가 패배한 감독이 두산의 김진욱이요 장기전인데도 올인을 서슴지 않다가 오링되는게 초장끗발이 개끗발이 되는 경우다.


    여야는 국회 안에서 대칭이지만, 행정부와 의회의 대결로 가면 여야가 힘을 합쳐서 행정부를 견제하는 것과 같다. 전략의 선택은 어느 층위의 대칭을 불러오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염소는 태어나자마자 이동하는 무리를 쫓아간다. 그만큼 성장기가 짧다. 개는 다섯 살이면 충분히 커서 사냥도 하고 새끼도 낳는다. 곧 생존전략이다. 재빨리 몸집을 키우고 사냥을 해야 살아남는 것이다. 인간은 특별히 20년이나 되도록 미성년이다. 인간은 특별히 장기전을 선택함으로써 대신 무리의 결속을 유지한다. 집단에 어린이가 있어야 무리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모계사회에서 여성이 성숙하면 곧 분가하므로 씨족이 깨진다. 아이를 돌보는 할머니의 역할도 뺏긴다. 그러므로 최대한 성장을 늦춘다. 곧 세력전략이다. 실제로는 생존전략과 세력전략을 넘나들며 그때그때 골라 쓴다. 둘은 별개의 가치가 아니라 하나의 상호작용단위 안에서 작동한다. 결과로 보면 이기와 이타, 혈연과 집단, 생존과 세력 둘이지만 원인으로 보면 상호작용 하나다.


    이렇듯 의사결정원리 중심으로 보면 서로 대립적인 관점이 하나로 통합된다. 중관파와 유식파의 대립을 해소한 원효의 화쟁사상과 같다. 원효는 공空과 유有, 진眞과 속俗, 염染과 정淨으로 대칭되는 개념들을 일심一心, 일리一里, 일법一法으로 통일시켰다. 구조론의 일의성과 같다. 모든 논쟁들은 의사결정을 담고 있으며 모든 의사결정은 사건 안에서 원인과 결과를 대칭시켜 인과율을 이룬다. 구조론의 일의성이 대칭을 비대칭으로 도약시킨다. 같은 층위에서 일어난 대칭은 다른 층위에서만 해소된다. 이것이 의사결정원리로 보는 구조론적 사고방식이다.


55555.jpg

    양자역학이 이러한 점을 해명한다. 양자는 의사결정단위다. 곧 에너지 세계의 상호작용 단위다. 양자의 불확정성은 원효의 일심과 같다. 대칭을 품은 하나다. 코펜하겐 해석을 주도한 닐스 보어는 이를 상보성원리로 설명한다. 1947년에 기사 작위를 받은 보어는 상보성원리를 나타내는 태극을 가문의 상징으로 삼았다. 우리는 스크린에 연출된 상을 본다. 파동이든 입자든 원인이 아닌 결과다. 진짜는 원인이며 원인은 스크린이 아닌 필름에 있다. 관측하면 파동이 입자로 바뀐다. 관측은 스크린을 들이대는 것과 같다. 우리는 다른 곳을 봐서 헛다리 짚고 당황해한다. 진실은 다른 층위에 있다. 불확정성은 관측의 한계가 아니라 양자세계의 고유한 속성이다. 양자는 아기를 품은 자궁과 같으며 자궁 안의 모습은 확률로만 성립한다. 그것이 구조론의 일의성이다.


   


[레벨:15]오세

2013.12.09 (21:02:02)

이거다!

[레벨:10]다원이

2013.12.09 (21:35:47)

이거다!2
[레벨:9]길옆

2013.12.09 (21:53:53)

http://blog.daum.net/slowdream/6042509

 

상보성원리(相補性原理) 

‘없음’에는 ‘없음에서 벗어나려는 경향’ 존재
진공(眞空)과 묘유(妙有)의 관계도 이와 같아
 
용수보살(龍樹菩薩, Nagarjuna, 150~250)은 중론에서 연기(緣起)를 중도(中道)로 해석하여 어떤 고정적인 견해에 집착하는 모든 것을 논파하였다. 중도란 ‘상주(常住)’나 ‘단멸(斷滅)’같은 고정된 하나의 상태로 사물의 모습을 기술할 수 없다는 뜻이다. 용수는 중도의 원리를 네 쌍의 대립되는 개념으로 분류하여 팔불중도(八不中道)를 말하였지만 꼭 연기를 여덟 가지의 대립되는 개념으로 분류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대립되는 개념들의 쌍을 하나로 묶어 음(音)과 양(陽)이라고 불러도 상관없을 것이다.

 

현대물리학의 기본이 되는 양자역학의 철학적 토대를 마련한 사람은 덴마크의 물리학자 보아(Niels Henrick David Bohr, 1885~1962)다. 보아는 음-양의 개념을 자연현상을 기술하는 기본 개념으로 보고 이를 물리학적 원리로 정리하였다. 이 원리를 상보성원리(相補性原理, Complementary Principle)라고 부르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자연현상은 반드시 서로 상보적인 두 조(組, Set)의 물리량으로 기술되며 서로 짝이 되는 한 쌍의 상보적인 양은 동시에 정밀하게 측정할 수 없다.”

 

‘물리량’을 물리현상을 나타내는 ‘상태’라고 보아도 좋다. 양자역학보다 한걸음 더 나아간 양자장론(量子場論, Quantum Field Theory)에서는 실제로 ‘상태’를 기본적인 물리량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이 ‘상태를 나타내는 물리량’에 대응하는 ‘상보적인 물리량’이란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을 가리킨다.

 

즉 자연현상은 하나의 고정된 개념만으로는 결코 기술할 수 없고 반드시 이 개념과 짝이 되는 대립되는 개념을 함께 사용해야만 사물을 제대로 기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대로 기술한다고 하지만 필수적으로 불확정성원리에 따라 어떤 불확실성이 따라야 한다. 그러니 상보성원리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미시세계의 자연 현상은 반드시 이 현상을 나타내는 ‘기본적인 상태’와 이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으로 기술되며 이 ‘상태’와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을 동시에 정밀하게 알 수는 없다.” 이 원리는 일체의 기본적인 물리량에 대하여 불확정성원리가 성립토록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일반화한 것이며 자연을 기술하는 기본적 물리량 하나하나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보아는 상보성원리를 가리켜 음양설(陰陽說)의 물리적 표현이라고 불렀는데 음과 양은 어느 한 쪽을 ‘자연의 어떤 상태’라고 본다면 다른 하나는 ‘그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이 된다. 상보성 원리를 음양설과 같다고 하면 세상은 음과 양의 이원론적 구조로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상보성이란 파동성과 입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니 상보성은 이중성과 같은 말이다.

 

다만 이중성이라고 하면 하나의 사물이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성질’을 갖는다는 것을 뜻하는데 비해 상보성이라고 하면 우주는 음양(陰陽)의 조화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상보성원리로 불교를 해석하면 “고정된 하나의 개념으로는 사물을 기술할 수 없다”가 된다. 고정된 하나의 개념은 자성(自性)을 말하는 것이니 상보성원리는 제법무아를 뜻하는 것이며 단멸과 상주를 버리고 중도를 취한다는 것과도 같은 말이다. 또한 상보성원리는 왜 ‘공’이 미묘한 개념인지를 말해준다. 공을 ‘없음’으로 해석하면 반드시 거기에 덧붙여 ‘없음에서 벗어나려는 경향’ 즉 묘유(妙有)를 말해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이 중도이기도 한 것이다.


 

[레벨:11]비랑가

2013.12.09 (22:5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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