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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9461 vote 2 2013.12.02 (21:25:17)

 

    아래 글에 분량을 늘린 확장판입니다. 


    자아와 의식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자의식이다. 자아는 의사결정의 주체이고 의식은 의사결정의 영역이다. 중요한건 의사결정이다. 구조론은 의사결정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다른 동물에게 없는 의사결정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를 넘어서는 독립적이고 적극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느냐다. 그것이 그 사람의 인간다움을 결정한다. 


    국가에 비유할 수 있다. 국가는 의사결정의 최대 단위다. 국가의 3요소가 영토, 주권, 국민이라면 인간의 3요소는 의식, 자아, 신체다. 국민은 정해져 있으나 영토와 주권은 변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신체는 타고나지만 자아와 의식은 후천적으로 성숙되고 확장된다. 의사결정능력에 달려있다. 사람이 잘 살고 못 사는 것은 최종적인 결과다. 그것은 끝까지 가봐야 아는 것이고, 지금 이 순간은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계속하는 수 밖에 없다. 두려움 없이 내 스타일로 밀어붙이기다. 


    ◎ 국가의 3요소 - 영토, 주권, 국민
    ◎ 인간의 3요소 – 의식, 자아, 신체


    주권은 국민을 노예의 위치에서 주인의 위치로 올라서게 하고, 영토는 개인의 위치에서 세계의 중심으로 나아가게 한다. 마찬가지로 자아는 노예의 마음에서 주인의 마음으로 올라서게 하고, 의식은 개인의 마음에서 인류의 마음으로 확장되게 한다. 더 높은 단위의 의사결정에 참여한다는 말이다.


    사람이 잘 살고 못 살고는 각자의 주관에 달렸다. 그러나 높은 단위의 의사결정에 참여하여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계속한다면 이는 모두가 수긍할 수 밖에 없는 객관적인 가치가 된다. 높은 단위의 무대에 올라서서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해냈을 때 결과야 어떻든 그 사람의 삶은 성공적인 것이다. 후회없는 삶이다. 이순신 장군의 삶처럼 말이다. 잘 살겠다는 결과지상주의 태도를 버리고, 내 스타일로 밀어붙여서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계속하겠다는 과정중심주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럴 때 그대 유쾌할 수 있다. 태산같이 의연할 수 있다.


    ◎ 자아의 높이 – 노예인가 주인인가?
    ◎ 의식의 넓이 – 개인인가 인류인가?


    국가의 실체가 있어도 영토를 잃거나 주권을 잃으면 존중받지 못한다. 강대국은 약소국을 의사결정의 상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사전에 아무런 통보도 없이 남의 나라 영해에 항공모함을 밀어넣고 비행기를 들여보낼 수 있다. 마찬가지다. 사람도 의식을 넓히고 자아를 성숙시켜야 의사결정의 상대로 인정받을 수 있다.


    문제는 개인이 실제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느냐다. 아이가 보채고 우는 것은 주체적인 의사결정이 아니다. 자신의 문제에 엄마를 개입시키는 행위다. 자신이 해야할 의사결정을 엄마에게 위임하는 것이다. 아기의 포지션으로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있다. 투덜거리며 남탓을 일삼는 사람이다. 그들은 자신을 의사결정의 주체로 보지 않는다. 다만 다른 사람의 의사결정이 잘못되었다며 항의한다. 자신이 해야할 의사결정을 타자에게 위임한다면 그 위임된 의사결정은 잘못될 수 밖에 없고 그 사람의 투덜거림도 계속될 뿐이다. 노예가 주인에게 의사결정을 맡겨놓고 주인의 결정이 잘못되었다며 화를 내는 것과 같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이다 하며 평생을 투덜거리지만 계속 그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된다.


    어떤 사람이 한 번 사기를 당했다면 가해자의 잘못이다. 그러나 두 번, 세 번 반복하여 사기를 당했다면 피해자에게 문제가 있다. 모든 속임수는 의사결정을 타인에게 위임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적극적인 의사결정을 회피한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 주체적인 의사결정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설령 자빠지고 엎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자기가 결정하고 자신이 책임지기다.


    인간은 어디까지 주체적인 의사결정을 하는가? 호랑이가 무서워 도망간다면 의사결정은 호랑이가 한 것이지 내가 한 것이 아니다. 섹스가 하고 싶어서 섹스를 한다면 성호르몬이 의사결정한 것이지 내가 결정한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가 진정한 나인가? 흔히 사물의 고유한 내적 속성에 의하여 의사결정이 일어난다고 믿는다. 소금이 짜고, 설탕이 달고, 생선이 비린 것은 그 사물 내부의 사정이다. 소금과 설탕과 생선 안에 짠맛과 단맛, 비린내의 요인이 있다. 과연 그러한가? 천만에. 소금은 짜지 않고, 설탕은 달지 않고, 생선은 비리지 않다. 그것은 뇌가 만들어낸 환영에 불과하다. 소금과 설탕의 이온이 내는 전기신호를 뇌가 임의로 해석한 것이다. 소금과 뇌의 상호작용에 진정한 원인이 있다. 구조론은 세상을 상호작용으로 본다. 이때 내부요인과 외부요인이 맞아떨어져야 한다. 범종과 당목이 마주쳐야 소리를 낸다. 자기 내부에도 원인의 일부가 있지만 마음은 상당부분 외부요인이 결정한다. 자동차가 어디로 가느냐는 도로가 결정한다. 결대로 가는 것이다. 마음은 상당부분 공동체에서 걸린 스트레스가 개인의 내부에 반영된 것이다. 나의 마음이 나의 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나의 욕망이 나의 몸뚱이 내부의 사정에 연동되어 결정되는게 아니라 대개 인류의 집단의지에 연동되어 결정된다. 물론 각자가 외부환경을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르므로 내부에도 절반의 요인은 있다. 인류학이 이를 증명한다. 내가 원하는 출세, 성공, 야망 이런 것들이 정글의 부족민에게는 없다. 심지어 그들은 섹스에 대해서도 그다지 관심이 없다. 결혼도 하지 않는다. 씨족 내부는 근친이고 부족은 대개 이웃 부족과 잠재적 전쟁상태로 있기 때문에 섹스는 불가능하다. 부족민들의 성본능은 억제되어 있으며, 전투 중의 짧은 휴전시기나 혹은 이웃 부족 남자들이 사냥을 핑계로 슬쩍 자리를 비켜주었을 때라야 습격의 형태로 섹스가 가능한 정도이다. 섹스보다 전쟁에 더 관심이 있는 경우가 많다.


    인간의 욕망은 집단의지가 투영된 것이다. 집단의 의지가 강한 유태인은 노벨상을 휩쓸고, 집단의 의지가 약한 부족민은 큰 성과를 내지 못한다. 개인의 욕망은 집단의 의사결정구조가 지배한다. 의사결정으로 보면 나와 나 아닌 것은 섞여 있으며, 나와 나 아닌 것을 가르는 분명한 경계는 없다. 그것은 각자가 환경과 상호작용하여 정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그 의사결정영역이 넓은 사람과 좁은 사람이 있다. 그 영역을 넓혀가는 것이 의식의 확장이고, 그 수준을 높여가는 것이 자아의 성숙이다. 그 수준이 낮고 그 폭이 좁다면 미성숙하다.


    의식의 넓이


    세 가지 의사결정의 경계면이 있다. 첫째 나와 타자의 경계면이다. 둘째 개인과 인류의 경계면이다. 셋째 인류와 비인류의 경계면이다. 세 가지 의식의 지평선이다. 지평을 넘어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 나와 타자의 경계면 - 자유인이 되어야 한다.
    ◎ 개인과 인류의 경계면 - 인류의 대표자 마음을 가져야 한다.
    ◎ 인류와 비인류의 경계면 - 창의와 진보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첫째 나와 타자의 구분이다. 도무지 어디까지가 나에게 속하고 혹은 나에게 속하지 않는 타자의 영역인가? 가족은 어디까지가 가족인가? 가족이나 친구의 어느 부분까지 나의 참견이 허용되는가? 마약에 중독되었을 때 그 중독된 부분을 나로 볼 것인가? 마약을 복용하고 싶다면 그것은 나의 욕망인가? 이 부분에서 확실한 경계를 설정해야 한다. 의식이 박약한 사람은 그 경계가 설정되어 있지 않다. 자신의 주체적인 판단과 환경으로부터의 신호에 의한 수동적인 반응의 차이를 알아채지 못한다.


    이 부분에서 훈련된 사람은 끊어야 할 때 끊을 것을 끊을 수 있다. 이성은 원하지 않는데, 몸이 요구하고 마음이 끌리는 주객전도를 극복해낸다. 내 안에서 확고한 이성의 지배를 실현시켜야 한다. 끊어야 한다고 판단했을 때는 알콜중독을 끊고 니코틴중독을 끊어야 한다. 가족중독도 심각한 문제다. 임성한 작가의 미친가족월드에 묘사되는 바 타인의 의사결정영역에 함부로 침범하는 재난과 혼란 말이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혹은 친구라거나 후배 또는 부하라는 이유로 타인의 의사결정영역에 개입한다면 의사결정의 재난이다. 팬이라면서 연예인을 공격하는 행동도 의사결정의 재난이다. 국가라면 전쟁상태이고 개인이면 심리장애다. 임성한 월드의 등장인물들이 모두 심리장애를 겪는 환자임을 알아야 한다. 작가 역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런 드라마가 나오는 것이다.


    의사결정영역을 분명히 하는 자의식은 사춘기 때 처음 형성된다. 이 시기에 분명한 자기영역을 획득하면 어른이 된다. 어른이 되지 못하면 평생 투덜거리며 남탓하는 사람이 된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이야’ 하는 말버릇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선제적인 행동에 방어하는 형태로만 의사결정을 하는 소극적 인생을 살게 된다. ‘북한의 남침이 우려된다’는둥 하며 무언가를 걱정하는 형태로만 의사결정을 하는 보수꼴통이나, ‘모든게 미국 때문이다’며 역시 환경걱정, 건강걱정, 걱정타령으로만 대화를 할 수 있는 일부 무뇌좌파들이 그렇다. 그들은 정신적 미성년자이거나 심리장애를 겪는 환자이다. 이를 극복하고 나와 타자의 경계면에서 이성의 지배를 실현시켰을 때 진정한 자유인이라 하겠다.


    둘째 인류 앞에서의 대표성이다. 나의 욕망들은 나의 내부에서 비롯되는 고유한 속성에 따른 것이 아니라 상당부분 집단의 의지가 내면으로 침투한 것이다. 그러므로 집단의 의지를 명확히 읽어야 한다. 문제는 각자의 집단이 다르다는 데 있다. 이건희 같은 사람도 가족끼리는 공산주의를 한다. 공산주의 방식으로 자녀들과 사유재산을 공유한다. 문제는 그들이 가족만을 자신의 집단으로 보는데 있다. 국가나 인류를 외면하는 것이다. 또는 현재만을 수용하고 미래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 집단의 크기가 최대화 되어야 한다. 개인에 앞서 가족, 가족에 앞서 부족, 부족에 앞서 국가, 국가에 앞서 인류, 인류에 앞서 신과 우주와 진리의 의지를 나의 의지로 삼아야 한다.


    이 부분의 의식은 백범이나 김대중, 노무현과 같은 뛰어난 리더의 특징이다. 스님들이 한 소식 했다면서 이거 안되는 경우가 많다. 뭔가 깨달은 듯 하지만 평화로운 산중에서나 평상심의 유지가 가능할 뿐, 세속으로 오면 호텔에서 도박하다 걸린 조계종 스님으로 퇴행하고 만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쫄지 않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어야 한다. 30년간 산중에서 수도한 스님이 정치판에서 훈련받은 지도자보다 낫다는 보장이 없다. 평범한 사람이라도 불타는 자동차에서 위험에 처한 어린이를 구출할 수 있어야 한다. 과연 그렇게 할 수 있느냐다. 일본 지하철역에서 술취한 사람을 구하려고 몸을 내던진 고 이수현씨처럼 말이다. 인류 앞에서의 대표성을 훈련한 사람만이 가능하다. 개인과 인류의 경계면에서도 확실한 이성의 지배를 실현할 수 있다. 합리적인 의사결정이 가능하다.


    셋째 인류와 비인류의 경계면이다. 개는 언제나 개일 뿐이고, 고양이는 언제라도 고양이일 뿐이나 인간은 다르다. 10만년 전 크로마뇽인과 현재의 문명인은 분명히 다르다. 자기존재를 변화시킬 수 있는 특별한 존재가 인간이다. 인격을 결정하는 것은 자아이고, 자아를 결정하는 것은 의사결정이며, 의사결정을 결정하는 것은 상호작용이다. 동물은 그 상호작용 대상이 자연환경이다. 인간은 그 상호작용대상이 사회환경이다. 동물에게는 자연이 자연이지만 인간에게는 환경이 자연인 것이다.


    동물은 자신이 사는 서식지를 보호하려고 한다. 호랑이는 자기구역 안에서 다른 맹수를 모두 쫓아낸다. 오직 자신이 낳은 딸 호랑이에게만 사냥터인 호숫가의 일부를 나눠준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자신의 서식지인 사회를 보호하려고 한다. 가족과 국가와 인류는 호랑이가 호숫가를 아끼듯이 보호해야할 대상이며 때로는 환경을 자신의 생명보다 앞세워서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한다.


    문제는 의식이 박약한 사람이다. 그들은 가족만 보호하고 국가를 해친다. 심지어는 자신만 보호하고 가족을 해친다. 더 심한 경우는 자신의 욕망만 보호하고 자신의 신체를 해친다. 자신의 본능만 보호하고 영혼까지 해친다. 퇴행이 이 정도까지 이르렀다면 입원하여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당신이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인 이유는 인류의 집단 작업 안에서 당신이 한 명의 선수로 뛰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팀에 들어서 팀 플레이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벗어난 히틀러나 일베충은 더 이상 인간일 수 없다. 인간임을 입증하고자 한다면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만의 속성을 드러내야 한다. 그것은 동물이 자연환경인 서식지를 아끼듯이 인간의 서식지인 사회환경을 아끼는 것이다. 그것은 창의하고 진보하는 것이다. 쉬지 않고 새로움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상호작용의 수준을 지속적으로 높여온 것이 사회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상호작용의 수준이 더 이상 상승되지 않을 때 문명은 몰락하고 인간은 파멸한다. 이는 팽이가 돌아야만 자기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사회의 고유한 속성이다.


    인간은 창의하고 진보해야 한다. 예술가의 직업을 가진 사람만이 창의하는 것은 아니다. 예술의 속성인 완전성을 반영하면 누구라도 창의하는 편에 들게 된다. 스티브 잡스의 많은 작품들은 신의 완전성을 반영한 작품이다. 기업가나 정치가라도 완전성을 반영한 완벽주의로 갈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설거지를 해도 완벽한 설거지가 있다. 일체의 처음 시도되는, 남이 하지 않는 것을 하는, 모험적인 길을 가는, 인류 전체의 소통총량을 높여가는 행위는 창의다. 작가는 작품으로 창의하지만 관객은 작가의 창의적인 작품을 알아보는 방법으로 창의한다. 영화를 보거나 옷을 입어도 창의적인 삶의 스타일 획득은 가능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과 짐승이 구분된다.


    ◎ 주체의 확립 - 개인에게서 끊을 것은 끊어라.
    ◎ 공간의 확장 - 집단 앞에서 대표할 것은 대표하라.
    ◎ 시간의 연속 - 세상 앞에서 없는 것을 새로 시도하라.


    인간은 세 가지 의사결정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첫째 의사결정의 주체를 드러내는 것이며, 둘째 그것을 공간적으로 확장하는 것이고, 셋째 시간적으로 연장하는 것이다. 첫째 분명한 나의 씨앗을 심고, 둘째 공간에서 나의 나무를 키우며, 셋째 시간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럴 때 나는 완성된다. 개인은 자유인이 될 때 한 사람의 인격체로 독립하며, 인류의 대표자로 우뚝 설 때 지성인이 되며, 창의하고 모험하고 진보하는 편에 설 때 아름답게 완성된다. 이는 인류의 결이며 결대로 가야 한다. 결따라 의사결정 해야 한다. 두려움 없이.


    자아의 높이


    독립적이고 적극적인 의사결정이 가능한 사람이 지성인이다. 문제는 그러한 결정권이 있느냐다. 결정권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쟁취해야 한다. 의사결정은 사회적인 의사소통과 상호작용이라는 절차를 거친다. 이때 소통의 코드가 맞지 않으면 상호작용은 실패다. 의사결정권은 사라진다.


    외국인과 만나 언어가 통하지 않으면 어떠한 의사결정도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어린이와 어른이 만나도 의사결정은 불가능하다. 미성년자와는 사랑할 수도 없고 결혼할 수도 없다. 노예와 주인의 만남이라도 그러하다. 서로간에 격이 맞아야만 의사소통은 가능하다. 아기는 자라서 언젠가는 어른이 된다. 문제는 스스로의 판단으로 정신적 노예상태에 머물러 있으려는 사람이다. 그들은 자아가 미성숙하며 의사결정권이 없다. 대화가 되지 않기 때문에 소통에 실패한다. 의사결정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인생이라는 무대 앞에서 을이 아닌 갑의 포지션을 차지해야 한다. 노예 포지션에서 주인 포지션으로 갈아타야 한다. 의식의 확장은 자아의 성숙에 의해 격발된다. 남자나 여자의 신체로 태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노예와 주인의 지위는 노력하여 바꿀 수 있다. 지금은 신분이 예속된 봉건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급이 없어도 포지션이 있다. 사회적 역할극이 있다. 주인이 되려면 주권을 얻어야 한다. 개인의 내면적인 주권은 죽음의 극복에서 얻어지고, 사회적인 주권은 자기 스타일의 완성에서 얻어진다. 자기 안에서 이성이 마음의 주인이냐다. 사회 안에서 자신이 그 사회의 주인공이냐다.


    ◎ 이성의 지배 - 나와 환경의 대결에서 죽음을 극복하라.
    ◎ 사회의 주인공 - 나와 세상의 대결에서 자기 스타일을 완성하라.


    회사의 일에 비유한다면 의식은 업무와 같고 자아는 직책과 같다. 적극적인 의사결정을 하려면 많은 업무를 획득해야 하지만 그 이전에 높은 직책에 올라서야 한다. 그것은 첫째 죽음의 극복, 둘째 자기 스타일의 완성으로 가능하다. 죽음의 극복은 자기 안에서 자신이 갑이 되는 것이다. 죽음이 두렵다는 것은 환경의 침해가 두렵다는 말이다. 환경과 인간의 대결에서 자신이 승리해야 한다. 그래야 삶이라는 회사에서 대리든 과장이든 직책을 얻는다.


    죽음이 두렵다면, 호랑이도 무섭고, 질병도 무섭고, 뱀도 무섭고, 불량식품도 무섭게 된다. 결국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죽음의 두려움은 환경의 지배에 대한 두려움에서 유래한다. 질병에 걸린다면 환경의 지배를 받게 된다. 어쩔 수 없다. 불가항력적 상황이다. 이러한 물리적 억압의 극단적인 형태가 죽음이다. 죽음을 두려워 하면 이미 노예가 되어 있다. 능동적인 의사결정의 권한은 포기된다.


    사회적인 주권은 자기 스타일의 완성에서 얻어진다. 사회 안에서의 역할극에서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역할극은 남편이라는, 부인이라는, 스승이라는, 친구라는, 선배라는, 지식인이라는, 윗사람이라는, 아랫사람이라는, 포지션에 따라 거기에 맞게 행동하려는 것이다. 이때 그 고정된 포지션이 자신을 지배하게 된다. 능동적인 의사결정을 못하고, 남편이니까, 아내니까, 상사니까, 부하니까, 친구니까, 후배니까, 이웃이니까 하고 잘못된 의사결정에 끌려가는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주인공이 될 수 없다. 평생 들러리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무대 위의 배우가 주어진 배역을 연기하는 것과 같다. 문제는 대본이 언제나 타자에게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 대본은 그대에게 노예의 배역을 연기하게 한다. 아빠니까, 엄마니까, 형이니까, 선배니까 하고 그 배역을 받아들인다. 그럴 때 침범당한다. 당신은 파괴되고 만다. 막아내야 한다. 자신의 배역은 자신이 대본을 써야 한다.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서 그대는 그대 자신의 완성된 대본을 가지고 있는가?


    그대는 남편도 아니고, 아내도 아니고, 형도 아니고, 선배도 아니고, 상사도 아니고, 부하도 아니고 순수한 그대 자신이어야 한다. 그러려면 그대 자신의 대본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없다. 대본이 없으므로 눈치를 보다가 상대가 하는 행동의 반대로 행동하거나 혹은 거기에 박자를 맞추어 행동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순종적인 노예가 되어 있다. 정신적으로 죽어 있다.


    예술가들은 자기만의 대본을 가지고 있다. 그래야만 창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스타일이다. 일관된 자기다움을 형성하고 있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연결시키는 맥락을 가지고 있다. 예술가라면 예술가다운 스타일이 나와주어야 하고, 정치가라면 정치가다운 이상이 나와주어야 하며, 교사라면 스승다운 품격이 나와주어야 하고, 코미디언이라면 역시 해학이 나와주어야 한다. 포즈가 있어야 하며 그 포즈는 멋있어야 한다. 선은 굵어야 하고 색은 진해야 한다. 의사결정이 가능한 구조를 반영하는 스타일이어야 한다.


    대개는 남의 행동을 보고 자기 행동을 결정한다. 자기가 우러러보는 사람이 가는 방향으로 가거나, 아니면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이 가는 방향의 반대로 움직인다. 대칭행동을 하는 것이다. 비대칭으로 갈아타야 한다. 대칭행동은 상대방에게 의사결정권을 주는 행동이다. 북한을 미워하면서 북한에게 주도권을 내주는 새누리 정치가 그렇다. 북한을 비난하면서 북한 내부의 소소한 사정을 보도해주는 조선일보의 행태가 그렇다. 이는 굉장한 이적행위다. 조선일보에 보도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북한이 잘되었다 하고 도발을 하는 것이다.


    자기 스타일을 완성한 사람만이 상대방의 대응에 개의치 않고 선제대응하는 비대칭행동을 할 수 있다. 자기 안에 대본이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 3류 드라마의 전형적인 패턴은 초반에 주인공이 불행을 당하는 것이다. 나는 가만있는데 질병이 엄습하고, 재난이 닥치고, 도둑이 침범하고, 외적이 쳐들어온다. 실패다. 질병이 결정하고 재난이 결정하고 도둑이 결정하고 외적이 결정한다. 질병이 없고, 재난이 없고, 도둑이 없고, 적군이 없어도 능동적으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끓어오르는 에너지를 주체할 수 없다는듯이 즐겁게 뛰어노는 어린이처럼 말이다. 어린이는 잘도 뛰어노는데 왜 어른은 질병과 상실과 도둑과 악당에게 걸려 곤욕을 치르고서야 뒤늦은 의사결정에 나서는가?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다. 스타일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 대본이 없기 때문이다. 삶의 부분과 부분들을 하나의 커다란 모듈에 연동시켜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생이 아파도 자신은 아프지 않고, 지구가 오염되어도 자신은 아프지 않고 따라서 아무런 의사결정을 못하는 것이다.


    좋은 드라마는 주인공이 불청객처럼 찾아오는 형식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돈키호테는 누가 불러주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여행을 떠난다. 자기 안에 에너지가 넘치기 때문이다. 스타일이 있기 때문이다. 스타일이 있다는 것은 삶의 모든 부분을 서로 연결시켰다는 것이며, 지구와 나의 관계가 방송국과 라디오의 관계가 되도록 서로 연동시켰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신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는 것이다. 그래서 적극적인 의사결정을 한다. 그런 사람은 얼굴빛이 상기되어 있으며 내면의 에너지가 끓어 넘친다. 기운이 펄펄 난다. 세상과 한통속으로 연동되어 있어서 세상의 모든 신호를 감지해낸다. 안테나가 살아있다.


    참된 지성인


    이 시대에 스승이 없다. 참된 지성이 없다. 비판적 지식인이 있으나 그들의 낯빛은 창백하다. 그들은 우국충정을 가진 지사들이다. 언제나 무언가를 걱정하고 있다. 나라를 걱정하고, 환경을 걱정하고, 전쟁을 걱정하고, 테러를 걱정하고, 지구온난화를 걱정한다. 이들은 선의를 가졌지만 내부에 에너지가 없다. 그들은 선제대응하지 못하고 언제나 뒷북을 친다. 그들의 행동은 대칭행동이다. 그들은 사회가 써 준 대본을 읽는다. 촘스키나 최장집 같은 사람들이 지식인입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선제대응하는 꼴을 못봤다. 인격자인 촘스키보다는 차라리 망나니 스티브 잡스에게 더 배울 것이 많다.


    선지식 중에도 스승은 없다. 깊은 산중에 고립되어 혼자만의 평화를 자랑하고 있으나 세상과 연결하는 안테나는 끊어져 있다. 싸이가 유튜브에서 10억뷰를 올려도 그들은 춤 추지 못한다. 의사결정 하는 방법을 모른다. 그들은 단지 아무 것도 결정하지 않기로 결정할 뿐이다. 그들의 지성은 가면 뒤에 숨어 있다. 2500년 전의 노자나 석가는 당대의 천재들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사유의 모형을 제시했고 그 모형은 만인의 가슴에 복제되었다. 그들과 대화하는 사람은 우주의 중심과 대화한다는 기쁨이 있었다. 지금은 천재들이 IT업계에 가서 수학문제나 풀고 있다. 비트코인 캐는데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


    아인슈타인과 스티븐 호킹이 명성을 얻었으나 그들의 신화는 언론이 만들어준 것이다. 그들과 대중을 연결하는 라인은 끊어져 있다. 아인슈타인이 혀를 내밀고 있는 유명한 사진은 물리학자들이 다들 창백한 얼굴로 앉아있으니까 신문기자가 부탁해서 특별히 포즈를 취해준 것이다. 그것도 자동차 안에서 급하게 찍은 사진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을 도려낸 것이다. 대중과 친근한 천재의 캐릭터를 연기해준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 그들도 한낱 배우에 불과했다. 그나마 노벨상이라는 신화만들기 무대가 있었기에 그 정도의 허상이라도 조작해낼수 있었던 것이다.


    진정한 포즈는 과단성있는 의사결정에서 얻어진다. 그것은 자기만의 스타일을 갖추었을 때 그 스타일이 세상과의 충돌을 일으키는 형태로만 가능하다. 우리는 노무현의 삶에서 그러한 포즈를 엿볼 수 있다. 헤밍웨이는 죽었다. 까뮈도 죽었다. 샤르트르도 죽었다. 독재자들도 죽었다. 영웅들의 시대는 갔다. 비틀즈도 떠났고 찰리 채플린도 떠났고 서태지도 무산되었다. 이제 베토벤이나 모차르트는 태어나지 않는다. 고흐도 피카소도 태어나지 않는다. 만델라도 마틴루터 킹도 태어나지 않는다. 민율이와 지아와 윤후가 그 자리를 채울 판이다.


    ◎ 죽음은 극복하라.
    ◎ 스타일 완성하라.
    ◎ 자기안은 끊어라.
    ◎ 집단은 대표하라
    ◎ 새것은 창의하라.


    지성인이라면, 인격자라면, 깨달았다면 세 가지 지점에서 의사결정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전에 두 가지 지점에서 의사결정의 권리를 얻어야 한다. 먼저 결정권을 얻고 그 다음에 이를 실행하는 것이다. 죽음을 극복하면 인생의 수비수에서 공격수로 포지션이 바뀐다. 역할이 바뀐다. 언제라도 공격수가 결정권을 가진다. 선제대응해야 한다. 사고난 뒤에 수습하는 역할이 아니라 먼저 사고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스타일을 완성하면 그 무대의 주인공이 된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 20세기는 영웅의 시대였다. 그들은 자기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다. 눈치보지 않고 남보다 한 걸음 앞서 먼저 치고나간 것이다. 그런 시대였다. 격동의 시대였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수학문제 풀고 있다. 비트코인 캐고 있다. 스타 물리학자도 없고, 세기적인 석학도 없고, 쿠데타를 일으키는 호걸도 없고, 카리스마 넘치는 독재자도 없고, 천재 발명가도 없고, 세기의 작가도 없고, 희대의 스타도 없다. 인류는 긴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의사결정을 못한다. .


    낙담할 일은 아니다. 영웅의 시대가 가면 대중의 시대는 온다. 이제는 모두가 의사결정에 나서야 한다. 이제는 모두가 스티브 잡스가 되어야 하고 빌 게이츠가 되어야 한다. 베토벤이 되어야 하고 모차르트가 되어야 한다. 세상을 통째로 뽀득뽀득 씹어먹는 게임에 나서야 한다. 지금은 한 사람의 작은 목소리가 순식간에 70억 인류에게 리트윗 될 수 있는 스마트 시대이기 때문이다. 스마트 시대에 맞게 스마트 영웅이 나와줘야 하는 것이다.


    결정권을 행사해야 한다. 첫째 끊을 것을 끊고, 둘째 대표할 것을 대표하고, 창의할 것을 창의하면 된다. 물론 구태여 끊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는 끊을 필요가 없다. 술도 끊고, 담배도 끊고, 취미도 끊고, 오락도 끊고, 기호도 끊고, 미련도 끊고, 사랑도 끊고, 모조리 다 끊어버린다면 자기 삶을 왜소하게 만들 뿐이다. 삶은 풍부할수록 좋다. 술도 좋고 담배도 좋고 오락도 좋고 사랑도 좋다. 다만 습관화 된 관성의 법칙을 극복하고 필요한 때 결정할 수 있느냐다. 평소에는 그냥 헤헤거리고 살면 된다. 폼 잡을 필요없고 무게 잡을 까닭없다. 그러나 누군가 위험에 처했을 때는 예수처럼, 전태일처럼 몸을 던져야 한다. 더 나아가 창의하고 모험하는 삶, 앞장서서 길을 여는 삶, 진보주의자의 삶, 완전성을 실천하는 삶, 먼저 사고치는 삶, 일단 저질러 보는 삶, 신의 길을 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인간은 저지르고 신은 수습한다. 해낼 수 있어야 한다.


    왜인가? 결정하지 않으면 결정당하기 때문이다. 능동적으로 환경을 조율하지 않으면 그 환경에 억압당하기 때문이다. 흐르는 강물에서는 파도의 리듬에 장단을 맞춰야 한다. 그래야 도리어 편안하다. 술집에서는 마셔줘야 편안하고 클럽에서는 흔들어줘야 편안하다. 급류에서 고요하게 앉아있다가는 물에 빠진다. 달리는 말에 몸을 맡기고 리듬을 타야 한다. 그러므로 피할 수 없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 이와 같은 지성인의 삶, 인격자의 삶, 깨달음의 삶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은 소통의 시대다. 인격이 완성되지 않은 사람이라도 공동체와의 소통되는 정도에 따라서 일시적으로는 고도의 의식적인 행동이 가능하다. 주위에서 바람을 잡아주면 냉철하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이 가능하다. 훈련된 병사처럼 당신도 해낼 수 있다. 참된 지성인이면 앞장서서 저질러야 한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남이 할 때 따라해야 한다. 바람을 잡아줘도 따라가지 못한다면 전문가의 상담을 받아야 한다. 그 사람은 환자다.


    평범한 사람이 대담한 의사결정을 못하는 이유는 심리장애 때문이다. 불안장애나 강박증 따위는 개인의 의사결정을 사회에 떠넘기는 장치다.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함부로 판단하고 결정하면 그만큼 인류는 위태로워진다. 그런 때는 말려야 한다. 모르면 침묵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모르는 일은 차라리 집단에 떠넘기도록 인간의 뇌는 세팅되어 있다. 갖가지 정신질환들은 그 때문에 존재한다. 그렇다고 해서 집단에 떠넘기면 인격이 미성숙한 것이다.


    노자가 무위를 말하고 석가가 해탈을 말하던 때는 2500년 전이다. 그때는 개인이 고립되어 있었다. 그 시대의 목표는 개인이 하나씩 자재를 가져와서 인류가 공유하는 커다란 한 척의 배를 만드는 것이었다. 제자백가의 시대였다. 그 배는 클수록 좋고 그 내부는 다양할수록 좋다. 지금은 스마트 시대다. 그 배가 발동을 걸고 뱃고동을 울리며 힘찬 항해를 시작했다. 70억 인류 전체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다. 이런 때는 모두가 팀플레이를 해야 한다. 다양성도 좋지만 먼저 인류가 가는 방향을 바라보아야 한다. 배는 항구를 떠나 출항했기 때문이다. 하늘은 비행기로 이어지고, 바다는 선박으로 이어지고, 땅은 자동차로 이어지고, 마음은 스마트폰으로 연결되었다. 70억이 한 배에 타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팀플레이를 해야 한다. 구석에 고립된 채 혼자 배짱을 과시하는 시골영웅의 시대는 20세기다. 그때는 김일성이나 카스트로나 카다피 같은 변방의 꼴통들도 나름대로 입지가 있었다. ‘맞아! 세상은 넓으니까 극동의 촌구석이나, 카리브해의 섬이나, 사막의 오아시스에는 저런 괴짜들도 하나씩 있어주는게 정상이야.’ 하고 태연히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 시대는 갔다. 지금은 21세기다.


    의사결정해야 한다. 인류호의 팀플레이를 해야 한다. 소비를 하더라도 실용적인 소비보다는 스타일 나와주는 예술적인 소비를 해야 한다. 그래야 인류의 집단지능의 향상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못되어도 최소한 예술작품의 관객은 되어주어야 한다. 대중이 객석에 앉아서 박수나 치고 스타를 향해 휘파람이나 불던 시대는 지났다. 유튜브라는 무대 안에서는 대중이 스타여야 한다. 그런 자세로 서로 소통할 때 그 상호작용에 따른 상승효과에 의해 인류의 아이큐는 극적으로 높아진다. 인류의 문제해결능력은 향상된다. 창의하고 모험하는 자의 포지션에 서야 한다. 전혀 다른 관점에서 새로운 진보주의 설계도가 나와주어야 한다.


   


[레벨:15]오세

2013.12.02 (21:55:05)

그 설계도 내 안에도 있소. 

남들은  Autocad로 그린다지만, 

난  최신 소프트웨어 gujoron으로 그리고 있소. 



프로필 이미지 [레벨:7]風骨

2013.12.02 (21:59:54)

오늘도 좋은 글 보고 갑니다.

 

천하의 지식인들에게 던지는 격문이자

선언문이라고 할 만한 글입니다.

 

지식인들이여 스타일을 완성하고

인류와 접속하라!

 

[레벨:10]다원이

2013.12.02 (22:12:00)

시원하면서도 한편 두렵습니다...
[레벨:6]목양

2013.12.03 (08:41:38)

때때로 김동렬님의 글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나를 보고 있습니다....

 

마치 내 생각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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