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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3086 vote 0 2022.10.06 (13:26:28)

    유대인과 그리스인은 여러모로 다르다.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차이다. 당시는 그리스가 먹던 시대였다. 그리스는 여러 번 이스라엘을 침략했고 그때마다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를 해야만 했다. 곳곳에 그리스식 신전과 극장이 세워졌고 소피스트의 논쟁술이 보급되었다.


    유대인은 유목민이고 그들은 떠돌이 생활을 했다. 2천 년이 지난 아직도 그런다. 반면 그리스인은 도시사람이다. 그들은 목청이 크고 논쟁을 좋아한다. 성경은 그리스적인 유행을 따라 예수에게 논쟁을 거는 시비꾼과 철저하게 유대적인 사고로 이를 타파하는 예수의 이야기다.


    그리스적인 것은 상대주의다. 네가 이렇게 하면 나는 이렇게 응수한다는 게임의 법칙. 반면 예수는 절대주의다. 네가 어떻게 하든 나는 내가 정한 길을 간다는 거다. 어? 논쟁은 그렇게 하는게 아닌데? 구경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수는 논파하는게 아니라 제압하는 사람이다.


    더 높은 단위의 가치와 기준을 들이대는 것이다. 한동훈이 받아치는게 소피스트의 상대주의다. 예수의 논법과는 정확히 반대되는 궤변가의 논법이다. 로마의 민중은 그리스의 상대주의보다 예수의 절대주의에 매료되었다. 왜냐하면 사회 단위가 터무니없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리스 도시국가는 작다. 상대가 어떻게 하든 맞대응을 한다. 아테네의 도편추방은 6천 표로 가능하다. 로마의 정복사업으로 사회단위가 커졌다. 궁극적으로는 절대주의가 상대주의를 이긴다. 로마인들이 그리스 철학을 배웠지만 그리스인의 말재간으로 제국을 통치할 수는 없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미묘한 차이도 거기에 있다. 소크라테스는 상대주의로 상대주의를 깨는 사람이다. 절대기준의 부재를 들춘다. 반면 플라톤은 확실한 절대주의자다. 이데아라는 절대적 기준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그 기준이 없다. 플라톤은 기독교 세계에서 환영받았다. 


    아테네인들은 소크라테스를 전형적인 상대론자에 궤변가로 보았다. 플라톤이 기록한 소크라테스는 보편주의자다. 아테네 법정은 소크라테스를 저급한 말재간을 구사하는 전형적인 소피스트로 취급했다. 자신의 주장을 펼치지 않고 상대방의 말에서 허점을 찾아서 논박한다.


    아테네 법정은 소크라테스에게 벌금을 매기거나 해외로 추방할 생각이었다. 배심원 판단에 의외로 무죄가 많았기 때문에 충분히 벌금으로 끝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에 고무된 소크라테스가 흥분해서 올림피아 우승자의 영예를 받아야 한다고 헛소리를 하는 바람에 사형되었다. 


    한동훈의 삽질처럼 상대를 이겨먹으려는 소인배 기질을 들킨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주장을 펼치지 않고 오직 상대방의 허점을 파헤쳤을 뿐이다. 그게 상대주의다. 소크라테스 자신의 주장은 무엇인가? 모른다는 것이다. 모르는게 지혜라고 주장하니 궤변으로 보일밖에


    소크라테스는 절대진리를 추구하며 상대주의 소피스트를 논파한 사람이지만 절대진리를 찾아낸 사람은 아니다. 상대주의로 상대주의를 깨는 수법이 먹힐 리가 없다. 말은 그럴듯한데 내심으로 승복하지 않는다. 재판을 이기려고 하지 않고 법정을 이기려고 하는 바람에 죽었다. 


    도교와 유교의 관계도 비슷하다. 중국은 인구가 많다. 거대한 에너지 흐름을 타야 한다. 상대주의로 가는 도교가 먹는다. 반면 엘리트 세계는 쪽수가 적다. 절대주의로 가는 유교다. 대중을 상대할 때는 도교술이 먹히고 지식인을 상대할 때는 유교술이 먹힌다. 천하를 상대하면?


    좁은 시골에서는 유대인의 가부장적인 절대주의가 먹히고 넓은 도시에서는 그리스인의 장사꾼식 상대주의가 먹히지만 다시 더 넓은 로마로 가면 유대인의 절대주의가 먹힌다. 적은 숫자는 절대주의, 많은 숫자는 상대주의, 더 많은 숫자는 다시 절대주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다르다. 처음의 작은 가부장적 절대주의와 넓은 인류의 보편주의는 다르다. 유대인 특유의 유목민 부족주의 사고와 예수의 보편적 사유는 절대주의라는 점에서 같으면서 사유의 사이즈가 다른 것이다. 유목민이냐, 장사꾼이냐, 세계시민이냐에 따라 보는 관점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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