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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9444 vote 0 2009.07.31 (15:00:10)

왜 사는가?

목적있는 삶이어야 한다. 왜 샤나건 ’웃지요’ 하고 둘러대서 안 된다. 그것은 개가 ‘짖지요’ 하는 것과 같고, 돼지가 ‘꽥이요’ 하는 것과 같다. 확실히 개는 짖어대고 돼지는 꽥꽥대지만 삶이 아니다.

삶은 하나의 컨셉이다. 무엇인가? 때리면 ‘맞지요’라든가, 속이면 ‘속지요’라든가, 욕하면 ‘받아치지요’ 라든가, 이런 작은 부스러기 파편들이 아니라 통째로 ‘삶이면’에 ‘삶이요’로 응수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 점에 관해서 나보다 더 많이 생각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구조론을 모르면 생각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언어가 없는 동물이 깊이있는 생각을 할 수 없음과 같다.

깨달음은 언어를 넘어서는 새로운 형태의 언어다. 인터넷이 언어와 문자와 신문을 넘어선 새로운 소통의 수단이듯이, 영화가 그림과 음성을 결합한 새로운 매체이듯이 깨달음은 참된 사유의 소스다.

왜 사는가? 정답 나왔다. 그것은 첫째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을 전제로 한다. 둘째 ‘세계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전제로 한다. 셋째 ‘세계 안에서 나의 포지션은 어디인가?’ 하는 물음을 전제로 한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다. 삶은 존재 그 자체를 구축하는 과정이다. 소속, 영역, 파트너, 포지션, 임무를 쟁취하여 시간과 공간의 좌표 위에 한 걸음씩 구축하는 가는 것이다. 그것이 삶이다.

태어날 때 부터 나의 존재가 완성되어 있다고 믿는다면 개는 짖지요 돼지는 꽥이요 하는 것이다. 의미없다. 삶이란 단어 자체가 필요없다. 그냥 숨쉬다가 짖다가 꽥꽥대다가 벌레처럼 죽어질 뿐이다.

결국 삶이란 ‘삶 단위의 소통’을 말하며 그것은 지구촌 인류문명의 건설이라는 신 앞에서의 소명 안에서 유효한 것이다. 무엇인가?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나의 범위는 확정되어 있지 않다. 불확정적이다.

내 몸뚱이가 나의 전부인 것은 전혀 아니다. 내 시선이 닿는 범위, 내 생각이 미치는 범위, 내 마음이 전달되는 범위가 전부 나에 속한다. 그러므로 나는 얼마간 너와 겹쳐 있다. 너는 나의 일부다.

그러므로 삶은 나의 영역을 확정해 가는 과정이다. 희미한 나의 존재를 굳건하게 구축하여 가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나의 가치, 나의 의미는 나와 관련된 모두에 의해서 점차 명백해져 가는 것이다.

나의 일부는 네 안에 있다. 너의 일부는 내 안에 있다. 꺼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삶이라는 단어 자체가 의미없다. 개가 무슨 소리를 해도 결론은 멍이요. 돼지가 무슨 소리를 해도 결론은 꽥이요.

소통으로 하여 비로소 완전해지는 것이며 삶은 미학적으로 가꾸어진 소통의 양식 안에서 유의미하며 그것은 서로 겹쳐져 있는 너와 내가 서로의 존재를 명백하게 구축하여 가는 과정이다.

그것은 개인이 임의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결정되어 있다. 인류문명의 진보는 인류 유전자가 출현하는 순간에 이미 설계도 나왔다. 인류의 목적은 정해져 있고 그 안에서 너와 나의 삶의 목적도 정해진다.

물론 모두가 그러한 것은 아니다. 개가 멍이요 하듯이 또 돼지가 꽥이요 하듯이 인간들 중에서도 일부는 자신이 사는 목적을 모르고 산다. 그것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삶아짐을 당하는 것이다.

자신이 어디쯤 와 있는지 모르고 어데로 가는지도 모르고 흐르는 물 위에 떠서 부평초처럼 흘러가는 삶이라면 당하는 삶이다. 주체적인 삶이 아니다. 타자에 의해 이용되는 삶이다. 외부에서 조종되는 삶이다.

두 종류의 유형이 있다. 하나는 자신이 사는 목적을 알고 능동적으로 삶을 실천하고 완성하여 가는 삶이다. 하나는 어디서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무리에 휩쓸려 멍이요 꽥이요 짖어대며 흘러가는 삶이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다. 나의 참된 주소지는 내 몸뚱이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건설하여 가는 ‘지성의 네트워크’ 안에 있다. 우리는 지성의 네트워크를 건설하여 가는 바 ‘의도있는’ 삶의 주인들이다.

이게 진짜다. 의도없는 삶은 개나 돼지의 생존현상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자연의 생태계 일부를 구성할 뿐 문명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주소지를 가지지 못한다. 그 존재는 바래어지고 희미하다.

지성의 편이어야 한다. 불쌍한 저쪽 딴식구들은 자본의 편이다. 자본은 한 그루의 나무와 같다. 그 나무는 크게 자란다. 그러나 그 속은 생물학적으로 죽어 있다. 그들은 살아있으나 혼이 죽은 자들이다.

인류문명과 소통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성의 네트워크는 그 자본이라는 나무의 겉을 덮어싸고 생장점을 밀어올리는 수관부의 층이다. 그 부분은 살아있다. 결론적으로 두 종류의 인간유형이 있다.

인류는 자본이라는 나무를 키우면서 동시에 그 죽어있는 자본나무의 겉에 지성의 네트워크라는 생장점을 걸쳐놓았다. 그 위에 올라타고 가는 것이다. 율곡이 ‘이가 기를 올라타고 간다’고 말했듯이.

그들은 자본이라는 나무를 키워서 세계라는 생명체를 끌고가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앞에서 끄는 것은 소다. 지성의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가는 우리는 그 소와, 그 말 위에 올라타고 가는 기수다.

그렇다. 그들은 소처럼 앞에서 끌고 가고 우리는 기사처럼 타고 간다. 그들은 소처럼 자신이 가는 목적지를 모르면서 열심히 간다. 우리는 뒤에 있는듯 보이지만 그 눈은 1키로 전방에 선발대로 나가 있다.

그렇다. 문명은 ‘자본과 지성’ 두 축에 의해 움직여간다. 자본은 끌고가는 역할이요 지성은 타고 가는 역할이다. 자본의 나무가 자랄수록 지성의 생장점이 그 위를 크게 덮어버린다. 둘은 항상 같이 간다.

자본의 나무가 자라지 않은데 지성만 자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조선시대 사림들의 오만과 같아서 허무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지성이 없는 자본의 폭주는 기수를 잃은 말과 같이 들판을 헤매다가 제자리로 원위치다.

확실히 피아구분을 해야 한다. 저들은 자본의 수레를 끌고가는 소다. 우리는 그 소를 책임지는 주인이다. 그들은 파편화 되어 있고 우리는 네트워크를 건설한다. 그 점에서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http://gujoron.com


프로필 이미지 [레벨:11]불그스레

2009.07.31 (16:23:19)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24]꼬치가리

2009.07.31 (17:39:13)

왜 사는가?

먹기 위해 산다? 살기 위해 먹는다?
닭이 먼저다? 계란이 먼저다?

이 모든 것이 부질없는 짐승들의 목 따는 소리 내지는 짖는 소리였다는 것.
참 명쾌하구료!

090728_blossom.jpg
첨부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양을 쫓는 모험

2009.07.31 (21:27:49)

최근 생각한 것과 연관된 내용인 것 같소.

'에너지 + 메세지 = 생명력' 이라는 것이오. 에너지는 실체고, 메세지는 방향이오. 

그것은 정자가 난자와 만나서 생명을 잉태하는 것과 같은 것이오. 정치도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은 것이오.
극우보수는 에너지는 있지만 메세지가 없어서 망하고, 먹물좌파는 에너지는 없고 메세지만 있어서 망하는 것이오.
본문에서 언급한 자본과 지성도 같은 관점이라고 생각하오. 자본은 에너지고, 지성은 메세지 인것이오.
그러므로 끊임없이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인 것이오.

왜 사는가? 소통하기 위함이고, 그 소통은 생명력을 잉태하기 위함이오.
수억의 정자가 흩뿌려져도, 결국 난자와 통하여 생명을 이루는 것은 단 하나 뿐이오. 
세상을 움직이는 단 하나의 메세지를 낳아내야 하오.
그것이 내가 사는 이유라오.
프로필 이미지 [레벨:22]id: ░담░담

2009.07.31 (21:58:45)

자본은 다스리고,
지성으로 사귀고,
문명을 완성하는 것.
인류지성망(#) 완성하기.

석가가 보고 좋아했던 것,
예수가 알고 질러나간 길,
노무현이 보여주고 성큼성큼 완성하여 간 것. 
사는것!

 

[레벨:3]율두스

2009.08.03 (08:16:59)

아!  넘 좋구려.

자본, 소, 지성의 네트워크, 자부심...
프로필 이미지 [레벨:15]aprilsnow

2009.08.04 (01:46:46)

줄곧 알게 모르게 고민하여도....
멈칫거릴 수 밖에 없었던.... 발목을 잡았던 것들을 날려버리는
계속해서 명쾌하고 시원한 자각!
[레벨:7]꼬레아

2009.08.05 (14:08:42)


오호 ~ ! 
가장 훌륭한 글에 가장 더러운(?) 댓글을 답니다

 " ~생각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 이는 언어가 없는 동물이 깊이있는 생각을 할 수 없음과 같다. "


여기서 언어가 없는 동물이란 코딱지 후비는 쥐바기류나 딴나라떼를 말합니다


코딱지 후비는 쥐새끼 한마리와
굵디 굵은 발가락에 다이아반지 끼우는 묘기를 발휘한 암퇘지 한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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