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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꼬레아
read 10063 vote 0 2011.09.13 (12:11:50)

[12회] 상고졸업 노가다판 인부로

노무현 평전/[3장] 막노동에서 사법시험 합격까지 2011/09/13 08:00 김삼웅

 

노무현은 1966년 2월 부산상고를 졸업했다. 제53회 졸업생이었다. 노무현은 학교를 졸업하면 고향으로 가서 부모님을 모시고 살 생각이었다. 그래서 농협 직원 채용시험에 응시하였다. 신입사원이 출신지에서 근무한다는 농협에 취직하면 고향에서 노령에 든 부모를 모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보기좋게 낙방하게 되고,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취업이 어려웠던 시기여서 경쟁률이 높았다. 졸업 때가 되자 학교에서 직장을 알선해 주었다. 노무현과 친구 세 명이 삼해공업사라는 어망회사에 취업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취업한 회사는 공장 청소를 비롯하여 자존심이 상하는 온갖 잡일을 시키고는 한 달 뒤 2,700원을 월급이라고 주었다. 노무현이 사장을 찾아가 항의하니 4,000원으로 올려주겠다고 했으나 하숙비도 안 되는 월급을 받으며 이렇게 살 수는 없다고 판단, 회사를 그만 두었다.

함께 입사한 4명 중 노무현과 친구 한 명은 떠나고 두 명은 그대로 남았다. 노무현은 한달 반 급여로 6,000원을 받아 평소 갖고 싶었던 기타와 헌 고시책 몇 권을 샀다. 그리고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빈손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고향집의 실정은 여전히 엉망이었다. 큰형은 실직 상태이고 둘째형도 얼마 뒤에 직장을 그만 두었다. 늙은 부모가 고구마순을 팔아 겨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부모님에게 면목이 없었다.

노무현은 사법고시를 준비하기로 하고, 둘째형은 5급 세무공무원 시험을 보기로 했다. 그래서 형제는 마을 건너 산기슭에 토담집을 짓고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산에 가서 구들도 직접 떠나르고 둘이서 돌도 주워 날랐다. 밤에는 남의 산에 가서 소나무를 베어 서까래를 올렸다. 이집 저집 다니며 볏짚도 한 단씩 얻어 지붕을 올렸다. 근사한 집이 완성되었다. 거기서 고시공부를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주석 1)

노무현은 ‘근사한 집’이라고 표현했지만, 전혀 경험이 없는 두 청년이 지은 토담집이 근사하면 얼마나 근사했을까. ‘동업자’ 노건평은 이 집의 구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동생과 나는 우리집 건너편 산기슭에 작은 토담집을 하나 지었습니다. 나무와 흙을 써서 우리 힘으로 그 집을 지었지요. 방 한 칸에 부엌 하나, 우물이 달린 그 집에 아버님이 마옥당(磨玉堂 : 구슬을 가는 집)이라는 현판 지어주셨지요.

전기가 안 들어오니 밤에 촛불을 켜야 했고 들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으스스했지요. 나는 가끔 무서운 생각이 들었지만 동생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고시공부를 하는데 그걸 보니까 ‘아, 동생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형님 공부하던 스타일과는 딴판이었으니까….

공부하는 때 필요한 환경과 도구들을 잘 정비했어요. 과학적으로 하더라고요. 톱밥과 널빤지를 구해와 방의 사방 벽을 둘러쳤어요. 그렇게 하고 나니 밖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절간 같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완벽한 방음장치였습니다. 나무로 독서대를 만들어 특허를 내기도 했어요. 참 좋은 독서대였습니다. 누워서도 책장을 넘기며 공부할 수 있는 독서대였지요.
(주석 2)

공부방은 마련되었으나 먹고 살 방법이 묘연하고 사법고시 준비용 책을 사기도 힘들었다. 당시에는 대학 2학년을 수료해야만 사법고시 응시의 자격이 주어지고 노무현처럼 고졸 출신들에게는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이란 것을 거쳐야만 했다. 일종의 ‘예비고사’였다. 노무현에게는 또 하나 넘어야 할 험난한 산성(山城)이었다.

당장 하루하루의 생계가 막막하고, 상업학교를 졸업하면 취직을 해서 부모님을 편히 모시겠다고 장담해왔다가 공부한다고 빈둥거리는 태도에 부모님의 실망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공부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노무현은 정신적으로 방황하게 되었다. 그래서 고민한 끝에 울산으로 가기로 했다.

당시 울산은 박정희 정권이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 공장이 들어서고 있었다. 울산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마을의 청년들 중에는 울산으로 떠나가는 사람이 많았다.

노무현은 무작정 울산으로 갔다. 그리고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하게되었지만, 공치는 날이 많아서 밥값을 대기도 어려웠다. 배가 고파 남의 과수원에서 배를 훔쳐먹기도 하고 닭서리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공사장에서 부상을 당하여 막노동도 하기 어렵게 되었다. 뒷날 노무현은 이런 사실을 숨기지 않고 모두 기록했다.

‘한국비료’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친구와 난 거기서 막노동을 시작했다. 일당 180원, 함바와 콘크리트 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그 위에 자리를 만들어 잠을 잤다. 하루 세 끼를 얻어먹는데 105원, 그 밥값을 제하면 겨우 75원이 남았다. 그나마 일자리가 없어 하루 일하면 이틀은 공쳐야 했다.

그때 울산에는 서생 배밭이 있었는데, 거기서 배 도둑질도 해 먹고 닭서리도 해 먹었다. 돈도 못 벌면서 그렇게 어울려 다니기만 한 것 같다. 그러다 하루는 공사장에서 큰 못에 발을 찔려 더 이상 품도 팔 수 없게 돼 버렸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자니 밥값이 2,000원 이상이나 밀려 있었다. 도망을 가는 수밖에 없었다. 일하러 간다고 거짓말을 하곤 식당주인 몰래 울산역으로 내달렸다. 그때 울산역 플랫폼에서 얼마나 뒷꼭지가 당기고 또한 서럽든지….
(주석 3)

6ㆍ25전쟁 뒤 한국사회에서 힘 있고 돈 있는 소수를 빼고는 누구라고 고통스럽게 살지 않는 사람이 없었겠지만, 노무현의 고난과 역경은 특히 심했던 것 같다. 막노동판에 나가 일하고 부상을 당하게 되고 외상 밥값을 갚을 길이 없어 뺑소니를 쳐야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숨김없이 기록으로 남겼다.


주석
1> <여보 나좀>, 181쪽.
2> <월간중앙>, 75쪽.
3> <여보 나좀>, 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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