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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양을 쫓는 모험
read 8778 vote 0 2010.09.12 (14:38:10)

 

1. 프로레슬링의 기억

지금의 아이들은 잘 모르겠지만, 내가 어렸을 때만해도 프로레슬링이 남자 아이들 사이에서는 인기였다.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흑백TV 조차도 귀하던 시절, 김일의 박치기를 기억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 세대가 경험한 프로레슬링이란 채널을 돌리고 돌리다보면 "지지직" 노이즈가 춤을추는 AFKN 채널에서 나오는 미국의 WWF(World Wrestling Federation) 였다.


영어로 쏼라쏼라~ 알아듣지도 못하면서도 참 열심히도 봤다. 당시에 기억나는 선수로는 워리어, 헐크 호건, 릭 플레어, 빅보스맨, 자이언트, 달러맨, 마초맨, 언더테이커 등등... 사흘 전 일은 쉽게 잊어먹으면서 왜 20년도 지난 그 이름들을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로프를 덜덜 흔드는 워리어, 셔츠를 찢는 헐크 호건, 요상한 걸음거리의 릭 플레어, 수갑과 몽둥이를 든 빅보스맨... 아직도 눈에 선하다. WWF의 경기 동영상은 한참이 지나서야 비디오 대여점에 들어왔다. 헐크 호건은 몇몇 영화에도 출연했고, 문방구에서는 미국의 프로레슬러의 스티커도 팔았다. (물론 제대로 저작권을 지키지 않았겠지만...) 극소수의 광팬은 어렵게 WWF 잡지를 구해 보기도 했다.


아이들은 어느곳에서건 그들을 따라했다. 쉬는 시간에 교실이나 복도에서 있지도 않는 로프에 로프반동을 해서 별별 기술이 들어갔다. WWF의 이런 인기는 한국 프로레슬링에도 좋은 기회가 되었다. 어느 특집 프로그램에서 당시 인기있는 코미디 코너였던 <봉숭아 학당>의 맹구도 이왕표, 노지심과 함께 레슬링을 했으니 말이다.


 

 

2. 무한도전의 WM7


 

무한도전.jpg 


MBC 무한도전이 지난 1년간 고생해서 프로레슬링에 도전했다. 이미 워낙 화제가 된 사건이라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WM7은 정말이지 나의 기대치를 넘어선 경기력과 감동을 주었다. 사실 그 정도의 레슬링 기술이 나올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어린시절에 보았던 <봉숭아 학당>의 맹구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경기였다.


특히 정준하와 정형돈의 기술이 인상 깊었는데, 정준하는 모습은 어쩐지 워리어 같았지만, 초크슬램과 툼스톤은 영락없는 언더테이커였다. 물론 WWE에서 보는 초크슬램은 상대를 거의 키높이 까지 들어서 던져버리는 기술이지만, 아마추어인 점을 감안하면 꽤나 깔끔하게 해낸 것이다.



정형돈은 평소에 뚱뚱하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링 위에 서니 생각만큼 뚱뚱한 것 같지는 않았다. 족발당수(드롭킥)와 스피닝 힐 킥과 같은 공중 기술을 무리없이 소화했고, 무엇보다도 상대의 기술을 잘 받아주었다. 오히려 유재석의 피니쉬는 정형돈이 다칠까봐 노심초사한 흔적이 역력했다. 그러다보니 사실은 더 위험할 뻔 했다.


큰 기술은 없었지만, 전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선수나 심판을 매수하고, 반칙을 일삼는 박명수 였다. WM7의 협회장이라는 역할로 나왔는데, 이건 사실 WWE의 빈스 맥마흔의 캐릭터를 따라한 것이다. 심판을 맡은 하하는 정말 센스있게 기술을 구사했고, 길은 큰 기술은 없었지만, 코믹한 악역을 잘 소화했다. 노홍철은... 잘 모르겠다.

 

 


3. 프로레슬링, 왜 재미있나?



무한도전의 프로레슬링은 결과적으로 대박이 났다. 재미와 감동도 있었고, 윤강철과 김태호PD의 공방도 있긴 했지만, 어쨌든 대박이다. 그런데 왜 재미있었나? 프로레슬링이라는 게 원래 재미있어서 재미있는거라면, 여태 그 프로레슬링은 어디 짱박혀있다가 나왔나? 다들 아는 것처럼 무한도전이 했기 때문에 대박이 났다.


현재 한국 프로레슬링은 어떤지 모르지만, 아마도 참 열악한 환경에서 레슬링을 할 것이다. 장충체육관의 만석관중, 그리고 화려한 LED 화면, 특수효과... 아마도 그네들에게는 꿈도 못 꿀 정도의 레슬링 환경일 것이다. 어쨌거나 정형돈의 말처럼 무한도전팀은 최고의 경기력을 보여주진 못했지만, 최선을 다한 경기를 보여주었다.

 

raw.jpg 

 


어린시절 그렇게 WWF의 프로레슬링을 보다가 또 한참 안보고 잊혀졌다가, 20대 중반에 또 한동안 WWE를 보게 되었다.(간만에 보니, WWF가 WWE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못보던 선수들이 대부분이었고, 전보다 경기는 더 재미있고 화려해졌다. 그때 내가 본 선수는 더 락, 존 시나, 랜디 오턴, 빅쇼, 케인, 레이 미스테리오, 에디 게레로(고인이 된), 트리플 H, 부커 티, 바티스타 등이 있었다.


WWE가 더 재미있어진 이유는 전보다 경기 방식이 더 다양해졌고, 선수들이 말이 많아진 것이다. 전에도 그랬긴 하지만 링위에서나 링 밖에서나 더 많은 말을 쏟아낸다. 소위 Mic. Work 라고 말을 함으로서 선수와 선수사이의 필연적인 갈등을 만들어 드라마를 연출한다. 그러니까 프로레슬링 마니아들은 단지 그들이 링 위에서의 기술 뿐 아니라, 회마다 이어지는 드라마를 즐기는 것이다.


사실 연기도 연기지만, 레슬러들은 그런 링 위에서의 연기가 모여서 하나의 캐릭터를 형성하게 되는데, 무한도전 멤버들은 레슬링을 하기 이전부터 각자의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엄청난 장점으로 작용을 한 것이다. 거기에 기술도 생각 이상으로 잘 했으니 대박은 당연한 것이다.


프로레슬링의 구조를 보면 이렇다.


 

시장 > 캐릭터 > 스토리 > 테크닉 > 결과

 


보통의 다른 운동경기와는 다르게 프로레슬링은 경기라기보다는 하나의 쇼(show)이고, 짜고치는 고스톱이다. 그럼에도 WWE는 미국에서 4대 스포츠인 야구, 미식축구, 하키, 농구 다음으로 인기있는 스포츠로 자리를 잡았다. 쇼는 가짜지만 기술은 진짜이기 때문이고, 그러한 액션이 때로 어떤 영감을 주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폭력성을 대리만족 시켜준다.


무한도전이 성공했던 가장 큰 이유는 적어도 무한도전의 멤버들은 다들 연기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Mic Work이 기본적으로 되는 사람들이다. 프로레슬링을 좀 멀리서 바라보면, 참 말도 안되고, 유치하더라도 이렇게 연기력이 되고, 기술이 되면 꽤나 볼만해진다.

 


 

4. 한국 프로레슬링, 캐릭터의 부재?



미국의 프로레슬링은 볼만한데, 한국의 프로레슬링은 좀 아니다. 기술의 차이도 있겠지만, 연기력의 부재가 가장 크다. 연기력이 안되니 캐릭터를 만들 수가 없다. 왜냐? 꾸준히 TV에 방송이 되고, 경기가 열려야 연속적인 스토리가 나오고, 캐릭터가 만들어지는데, 일단 프로레슬링 자체가 없다.


프로레슬링에서는 테크닉보다 캐릭터가 상부구조다. 테크닉은 순간이지만, 캐릭터는 오랜시간 기억에 남기 때문이다. 필자가 20년도 지난 레슬러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 처럼 말이다. 프로레슬링은 그 캐릭터와 테크닉의 밸런스를 맞추어야 성공한다. 경기력이 떨어져도 안되고, 캐릭터가 어설퍼도 안된다.

 
10년된 스타크래프트는 스타리그로 자리를 잡았는데, 50년이 넘은 프로레슬링은 아직도 자리를 못잡았다. 물론 WWE도 들쭉날쭉한 살인적인 스케쥴로 부상과 약물복용 등의 부작용등의 문제를 안고있긴 하다. 그 차이는 WWE는 있고, 한국은 없다는 것. 안정적인 무대가 있어야 뭘 하든말든 할 텐데, 가끔 명절때나 김일 추모 때나 되어야 언론의 주목을 받는둥 마는 둥 하니...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구조의 문제라는 것. 최초의 구심점이 있어야 거기에 살이 붙는데, 그 구심점이 없다는 것이다. 아직은 팬을 위한 레슬링이 아니라 레슬러를 위한 레슬링을 하는게 아닌가 싶다. 그러니 윤강철과 김태호PD의 공방도 이해가 된다. 윤강철 입장에서는 장충체육관에 사람 가뜩 모아주고, 화려한 LED 등장화면에 특수효과 좀 해주면 무한도전 보다 훨 잘 할 수 있는데... 하는 거다. 뭐 틀린말도 아니고... 프로레슬링 선수도 아닌 손스타에게 무한도전 멤버들의 트레이닝을 맡기니 속이 뒤집어지는 건 당연하다. 한마디로 좀 섭섭할 것이다.


 

 

5. 시장이 먼저



일전에 야구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이번 경우도 야구와 비슷하다. 메이저리그는 시장이 크니까 선수들 연봉을 수십억씩 줄 수 있고, 연봉을 많이 주니까 자율야구가 되고, 한국 프로야구는 연봉이 시원치 않아서 대신에 빼빼로와 줄빠따 야구 하다가 IMF 이후엔 또 갑자기 글로벌 기업이 되면서 김성근식 관리야구가 먹힌다.


시장크기가 작을땐 줄빠따 야구가 통하고, 시장크기가 보통이면 관리야구가 통하고, 시장크기가 커지면 자율야구가 통한다. 한국 야구가 자율야구가 되려면  한, 중, 일 통합리그가 생겨서 시장이 확보되어야 기업도 시장보고 연봉 팍팍 쏘고, 그래야 자율야구가 된다. WBC를 하는 이유는 바로 시장 때문이기도 하다.


프로레슬링.jpg 


 

무한도전은 되는데, 한국 프로레슬링은 안되는 것이 있다. 캐릭터냐, 테크닉이냐 이전에 시장을 가지고 있냐는 것이다. 무한도전은 무한도전의 고정팬과 어느정도 보장된 시청률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고스란이 프로레슬링으로서의 시장으로서의 기능을 했다. 그러니 참으로 아이러니다. 무대가 있어야 캐릭터를 만들고, 스토리를 만들고, 기술을 부리고, 인기를 얻는데, 반대로 현재 인기가 없으니 돈 있는 자들이 투자를 안한다. 무대를 만들 수가 없다.


꼭 공중파 방송이 아니더라도 케이블TV에서, 혹은 스마트TV에서 한국 프로레슬링이 정착이 되어야 살길이 열릴듯... 윤강철은 김태호PD한테 섭섭할 수도 있겠지만... (시장을 쥐고 있으니 김태호PD는 배짱 튕길 수 있고, 손스타는 덕분에 평생소원 풀었다.) 어쨌거나 그래도 무한도전 프로레슬링의 대박은 한국 프로레슬링에도 잘 된 일이다. 이것으로 한국에 프로레슬링이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레벨:15]오세

2010.09.12 (16:04:57)

이 글을 읽고나니 프로레스링을 한중일 통합리그로 출범시켜도 될듯 싶구려,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양을 쫓는 모험

2010.09.14 (15:26:36)

통합리그를 출범시키면 시장 자체는 커지지만, 각각 나라마다 언어가 달라서 Mic. Work을 할 수 없게 되오. 뭔가 썰을 풀어야 스토리가 나오는데, 서로 못알아들으면 애매한 상황이 될듯...
프로필 이미지 [레벨:14]곱슬이

2010.09.12 (22:54:07)

어느날 누군가에게 저런걸 누가 보길레 하냐고 물었더니,  심심한 아줌마나 할머니들에게 즐거움을 주기때문이라고 대답하더이다.  나는 그말이 진짜인줄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보오.  진짜루 잼나오?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양을 쫓는 모험

2010.09.12 (23:27:40)

언젠가 르페님과 홍대 어느 카페에서 만나서 얘기하는데, 그곳 주인 아주머니가 프로레슬링을 즐기더이다. 즐기는 사람은 TV안의 폭력이 진짜건 가짜건 중요하지 않소. 다만 때때로 머릿속 어딘가를 긁어주는 효과는 있소.

프로필 이미지 [레벨:14]곱슬이

2010.09.13 (09:54:00)

화려한 폭력과,  화려한 근육

그래서 프로레스링(미국것)은 여자들의 전유물인줄 알았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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