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이란
read 4472 vote 1 2002.09.09 (15:03:08)

신과 인간

[실재로서의 신]

세상은 신의 반영이요 신은 세상의 실재다. 세상은 나타나는 것이요 신은 있는 것이다. 둘은 하나다. 세상과 신을 분리하여 별개로 생각할수 없다. 신은 세상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을 창조한 것이다.

인간과 유리된 신은 신이 아니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도 인간이 신을 창조한 것도 아니다. 창조 그 자체가 신이며 인간의 창조는 신의 창조를 빌어 모사한 즉 신없이 인간은 어떠한 것도 창조할수 없다.

세상은 신의 몸이며 신은 세상의 영이다. 세상은 신의 하드웨어이며 신은 세상의 소프트웨어이다. 세상은 신의 육이며 신은 세상의 영이다. 인간은 신의 반이고 신은 인간의 전체다. 하나될 수 있다.
신은 불완전한 존재이며 완전을 지향하여 세상을 창조한다. 창조는 일회성 사건이 아니어서 현재진행형의 부단한 호흡이다. 인간은 신의 창조를 배달하여 문명을 창조하므로서 신의 창조에 기여할수 있다.

창조의 입장에서 신은 완전하다. 창조와 구분될 때 신은 불완전하다. 불완전한 신이 신일수 없다. 창조를 떠나 신은 신일수 없다. 신은 창조자가 아니라 창조 자체다. 인간은 창조할수 없다. 신의 창조를 증거할 뿐이다.

[인간이 신을 창조하였는가 신이 인간을 창조하였는가?]

창조는 발견과 발명의 결합이다. 발견없이 발명없다. 자동차를 발명하려 한다면 먼저 자동차의 원리를 발견해야 한다. 만약 수레를 발명하려한다면 먼저 바퀴의 원리를 발견해야 한다.

발견은 발명에 선행하고 발명은 발견을 완성한다. 둘은 합하여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 창조는 발견과 발명을 통일한 전체다. 발견은 대발명이요 발명은 소발견이다. 인간의 발명은 모두 소발명이다.

인간은 창조할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창조는 발명이지 발견이 아니다. 물론 인간은 때때로 발견한다. 그러나 무엇을 발견한다는 것인가? 그것은 원래 있던 것이다. 인간에 의해 새로이 생겨난 것이 아니다.

발명이란 없는 것을 있게 함이다. 그러나 천지창조 이후 없던 것이 생겨난 적은 없다. 있는 것이 모습을 바꾸었을 뿐이다. 신의 창조가 대발명이라면 인간의 창조행위는 실용신안이나 의장등록이 된다.

발견은 영의 질서요 발명은 육의 질서다. 육의 질서는 인간이 개입하여 조정할수 있지만 영의 질서는 인간의 영역 바깥에 있다. 인간은 빌수 있을 뿐 스스로 제조할수 없다. 인간의 모든 발명은 완전한 창조가 아니다.

인간이 자동차를 발명했다면 그 발명된 자동차는 인간의 것이나 그 발견된 자동차의 원리는 인간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창조될수 없다. 인간은 자동차를 창조할수 없다. 인간은 아무것도 창조할수 없다.

인간은 신을 창조할수 없다. 인간은 어떤 것도 창조할수 없다. 인간의 창조란 신의 창조를 전달받아 사물에게로 배달하는 것이다. 인간은 배달하는 존재이다. 배달의 한 단계에서 거쳐가는 정거장일 뿐이다.

[제신]

신의 본질이 구원인데서 기독교의 신이 근접하고 있다. 구원의 본질이 창조인데서 힌두교의 창조신이 근접하고 있다. 종교들은 제각기 신을 말하고 있으나 인간에 의해 요청된 신은 신일수 없다.

기독교의 신은 정치적이다. 봉건군주에 비견된다. 절대권력을 가지고 인간의 밖에서 인간을 심판하기도 하고 구원하기도 한다. 인간은 정치적 재난으로부터 안전을 담보받기 위하여 신을 필요로 한다.

정치는 두사람 이상이 모여서야 성립한다. 인간은 정치에 선행한다. 신은 인간에 선행한다. 신에게 정치를 맡긴다면 신을 바로 파악한 것이 될 수 없다. 신은 정치하지 않는다. 신은 심판하지도 구원하지도 않는다.

신은 인간을 구원하지 않는다. 신은 구원 그 자체다. 신은 곧 창조이며 창조는 배달이다. 신은 인간을 통하여 진리에게서 사실에게로 배달한다. 인간이 창조에 관계하므로서 신의 구원 그 자체에 속한다.

창조의 신 브라흐마는 신의 본성에 근접하고 있다. 그러나 창조가 과거의 어떤 사건일수는 없다. 현재와 분리된 과거는 없으며 과거와 분리된 미래 또한 성립할수 없다. 시간은 통일적으로 존재하며 공간과 분리되지 않는다.

공간은 시간과 하나로 교감하며 창조는 시공간과 분리되지 않는다. 창조는 부단히 호흡하는 역동적 진행과정이지 단일한 사건이 될 수 없다. 발견과 발명이 호응하고서야 창조되며 둘은 교감하고 호흡한다.

[창조적 신]

신을 바로 이해하여야 한다. 신은 인간 밖의 어떤 대상이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전체로서 존재한다. 인간은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전체의 한 구성소일 뿐이다. 인간이 신을 섬긴다면 자기를 섬기는 격이다.

신은 인식대상이지 숭배대상일 수 없다. 인간이 최고의 경지에 이른다면 신을 이해할수 있고 더 나아간다면 신과 대화할수 있고 더하여 신과 함께할수 있다. 어차피 인간은 신과 함께다. 알고하는가 모르고 하는가다.

신은 창조다. 창조는 발견과 발명이며 발견은 배달받기고 발명은 배달하기다. 인간은 배달받아 배달한다. 인간의 창조는 불완전하다. 신의 창조 또한 불완전하다. 완전한 것은 창조 그 자체다.

신은 인간과 분리되어 대상화 될수 없다. 신이 인간의 대상으로 인간앞에 설 때 신은 불완전해지고 신은 신일수 없다. 고로 신은 인간에 의해 숭배될수 없으며 인간을 지배할수도 심판할수도 없다.

신은 완전하므로 신이다. 신이 인간에게 개입한다면 그로서 불완전이다. 부분은 전체에 개입하지만 전체는 부분에 개입하지 않는다. 인간은 신에게 덤비지만 신은 인간을 방어하지 않는다.

손가락은 인간에 개입할수 있다. 인간은 손가락에 개입하지 않는다. 만약 개입한다면 다른 손가락이다. 내가 내손가락에 개입할수 없는 것은 내손가락 이미 내이기 때문이다. 개입은 사후의 것, 전체는 부분에 선행하는 까닭이다.

신과 인간은 대화한다. 인간은 신에 맞선다. 인간은 신에게 도전한다. 인간은 신을 인식한다. 인간은 신을 왜곡한다. 그러나 신은 자기자신과 대화할 뿐이다. 신은 인간에 맞서지도 응전하지도 않는다.

[신의 실재에 대한 바른 증명법]

신은 창조적 신, 존재는 곧 창조이다. 창조는 발견과 발명이다. 발명은 대상에 개입하여 질서를 부여하기이고 발견은 그 질서를 찾아내기이다. 우주는 존재하며 우리가 접촉하는 우주는 그 발명된 질서의 표상이다.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주의 질서가 합법칙, 합목적, 창조성, 곧 배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변화의 세계에 살며 질서의 세계를 보고 있다. 신의 증거는 변화가 질서를 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물론은 우주가 우연히 만들어졌다고 본다. 우연은 무질서다. 우주는 질서다. 무질서에 의한 질서이면 자기모순이다. 엔트로피의 원리와 충돌한다. 엔트로피의 비가역법칙은 자연계에서의 모든 변화가 질서에서 무질서의 일방통행임을 이미 증명하고 있다.

자동차의 원리발견 없이 자동차가 만들어진다는 생각과 같다. 바퀴의 원리를 모르고 바퀴를 발명할수 없다. 우연히 만들어진 바퀴에는 바퀴축이 없다. 우연히 만들어진 바퀴축에는 바퀴와 바퀴축을 통일하는 수레가 없다. 이러한 과정은 가역과정이며 엔트로피의 비가역법칙과 충돌한다.

발견(가역과정)과 발명(비가역과정)은 분리될수 없으므로 우주는 우연히 만들어질수 없다. 대상에 질서를 부여하기로서의 발명은 부여될 대상(비가역성)으로서의 우주 외에 부여할 주체(가역성)로서의 제 2의 우주와 양자를 통일(창조성)할 제 3의 우주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모순이다.

[신의 직접증거 자연의 피드백 원리]

신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엔트로피의 원리(비가역성)에 반대되는 피드백 원리(가역성)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재정렬이다. 존재론의 질서는 엔트로피의 원리를 따라 일방통행한다. 세계는 피드백원리에 따라 쌍방향통행한다.

피드백은 인식론이다. 인식론은 존재론을 반영하며 존재론의 거울이다. 인식론이 있다는 것은 영이 있다는 것이다. 우주의 자동차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둘을 가지고 있다.

창조는 가역과정(발견)과 비가역과정(발명)을 하나로 통일하므로서 성립한다. 자연계의 변화는 엔트로피의 원리에 따라 하드웨어의 작동처럼 비가역적으로 일방통행한다. 그렇다면 그 컴퓨터는 누가 켰는가?

소프트웨어의 재정렬없이 하드웨어는 작동할수 없다. 입력없이 출력없다. 우리가 보는 우주는 거대한 하나의 출력장치다. 우리는 자판없이 모니터만 있는 컴퓨터를 상상할수 없다.

우리는 엔트로피의 법칙을 인정해야 한다. 우주는 출력장치이며 출력장치 내부에서는 가역과정이 없다. 우리는 모니터의 우주를 보고 있다. 모니터 속에 자판이 있을수 없다. 반엔트로피의 세계인 자판의 우주는 따로 있다.

피드백을 무시하고 본 우주는 자동차가 운행없이 내리막길에서 저절로 미끌어져가듯 한다고 생각되었다. 피드백의 직접증거는 물질의 진화와 생물의 진화이다. 재구축은 부단히 진행된다.

우리는 생물만 진화한다고 생각하지만 물질도 진화한다. 은하계도 진화하고 별자리도 진화한다. 진화의 원리는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을 통한 피드백원리이다. 이것은 진화의 직접증거이기도 하다.

[가역과정과 비가역과정]

우주는 곧 창조이며 창조원리는 가역과정과 비가역과정의 통일이다. 가역과정은 발견되는 세계, 입력의 세계, 반엔트로피의 세계이며 인식론의 세계이다. 비가역과정은 발명되는 세계, 출력의 세계, 엔트로피의 세계, 존재론의 세계이다.

엔트로피의 원리와 충돌하는 것은 모두 진화이며 인식론의 영역이고 피드백의 산물이다. 존재는 100프로 에너지로 치환될수 있으며 에너지는 비다. 비는 산화에 대한 환원이다. 양자를 통일하는 것은 배달이며 배달은 산화, 환원의 각 단계들에서 높은 단계와 낮은 단계사이에서의 배달이다.

동력이 자동차의 엔진에서 바퀴로 지표면으로 전달될수록 엔트로피는 증가한다. 여기서 엔진은 바퀴보다 질서도(집적도)가 높다. 즉 모든 자연계의 변화는 집적도 1에서 2,3,4,5로 이행하며 예외는 없다.

자연계에서 에너지의 흐름은 엔트로피증가의 일방향성을 가지는데 물질의 입자상태(소립자, 원자, 분자, 행성, 은하, 은하단, 우주)는 강한 집적상태를 보이므로서 우주발생의 초기 강력한 반엔트로피과정이 존재했었음이 증명된다.

자기복제이론은 이러한 반엔트로피과정을 규명한다. 집적이론은 가역상황에서의 재구축현상을 규명한다. 구조론은 가역과정에서의 질서도를 산출한다. 우주의 탄생은 강력한 하나의 반엔트로피, 가역과정인 것이다.

우주는 한번 탄생으로 끝나지 않는다. 반엔트로피는 지금도 마이너스의 세계에서 쉼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우주는 부단히 재창조되고 있다. 재구축의 1단위인 시간단위 1, 공간단위 1이 존재한다. 입력과 출력의 호흡은 부단히 진행되며 우리는 보이는 출력측면의 일면만을 본다.

[배달의 세계]

세 개의 세계가 있다. 우리가 보는 세계는 컴퓨터의 출력측면인 엔트로피의 세계이다. 비가역의 세계, 존재론의 세계, 양의 세계이다. 또 다른 세계가 있다. 피드백의 세계, 가역의 세계, 인식론의 세계, 음의 세계이다.

둘 다 허상이지 실재가 아니다. 존재는 그 자체로 허상이다. 있는 것은 없다. 진정한 세계는 창조의 세계이며 자기복제의 세계, 집적의 세계, 구조의 세계이다. 가역과정과 비가역과정을 통일하고 있다.

운동은 실재가 아니다. 움직임은 없다. 우주는 팽창도 축소도 없다. 크기가 없기 때문이다. 공간은 없다. 그것은 인식의 틀일 뿐 실재가 아니다. 크기의 세계 반대편에 모든 크기를 무화하는 비의 세계가 있고 더 높은 곳에 양자를 통일하는 배달의 세계가 있다.

A에서 B로 가는 것은 없다. A에서 소멸 B에서 발생이다. 시간단위1, 공간단위1은 소멸과 발생의 1단위이다. 우리눈에는 이러한 재구축과정이 보이지 않는다. 반엔트로피과정은 관측되지 않는다. 그러나 실재한다.

세계는 입력과 출력의 둘로 구성되며 우리가 사는 우주는 그 가운데 출력측면이다. 우리는 모니터의 세계에 살고 있다. 우리는 바퀴의 세계에 살고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 자판이 있고 핸들이 있다. 더 높은 곳에 양자를 통일하는 운전의 세계, 배달의 세계가 있다.

바퀴에 사는 인간들은 운전의 존재를 알수 없으므로 이 자동차가 내리막길에서 저절로 미끌어져 간다고 생각한다. 깨달음은 또다른 곳에 있는 운전의 존재를 알아채고 운전과 차를 통일하는 운전수까지 알아채기다.

[물질과 에너지]

우주는 일방향적 폭발, 팽창이 아니라 들숨과 날숨의 부단한 호흡이다. 빅뱅의 날숨으로 우주는 조금도 커지지 않는다. 빅뱅의 팽창일변도는 열역학 제1법칙과 충돌한다. 피드백의 들숨으로 팽창된 만큼 비로 환원된다. 늘어나는 것도 줄어드는 것도 없다. 신은 그 호흡의 주인이다.

물질은 출력이고 에너지는 입력이다. 물질이 질서를 가지듯 에너지도 질서를 가진다. 두 질서의 이행방향은 상반된다. 엔트로피를 따라 물질의 질서는 무질서도의 증가방향으로 이행하고 피드백을 따라 에너지의 질서는 질서도의 증가방향으로 이행한다.

집적도 물질질서(엔트로피증가↓) 에너지질서(피드백↑)
5 - 질 위치에너지
4 - 입자 전기에너지
3 - 힘 화학에너지
2 - 운동 운동에너지
1 - 량 마찰에너지
양의 우주 ← 비가역과정 가역과정 → 음의 우주

물질의 질서는 (질->입자->힘->운동->량)으로 갈수록 낮아지고 에너지의 질서 (마찰->운동->화학->전기->위치)로 갈수록 높아진다. 양의 세계는 물질의 질서를 따라 엔트로피 증가로 날숨을 쉬고, 음의 세계는 에너지의 질서를 높이는 방향으로 들숨을 들이쉰다.

창조의 우주는 두 세계의 질서를 통일하며 호흡한다. 우리는 그 일면만을 본다. 날숨만을 보되 들숨을 보지 못한다. 신을 이해한다는 것은 양의 우주와 음의 우주를 통일하는 제 3의 우주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물질세계에서 최고의 근거는 있음 곧 존재다. 존재가 모든 연역추론의 제1근거가 된다. 그러나 창조의 세계에서 보면 존재는 제 1근거가 될 수 없다. 있음은 그 자체로 하나의 과정일 뿐이며 반대편에 모든 있음을 공으로 되돌리는 비가 있고 더 높은 곳에 양자를 통일하는 배달이 있다.

[에너지는 비다]

물질은 실재가 아닌 허상이다. '범소유상 개시허망'이니 인간에 의해 관측되는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세계는 가짜다. 물질은 에너지로 변한다. 물질은 색이며 색은 공(에너지)으로 환원되고 공은 색으로 나타난다.

위치에너지 - 동력원 - 만유인력 - 궁극적 에너지원이 된다.
전기에너지 - 동력발생 - 전자기력 - 쌍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화학에너지 - 동력제어 - 팽창력 - 일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운동에너지 - 동력전달 - 움직임 - 시간에 지배된다. (에너지사용)
마찰에너지 - 동력효과 - 흔적, 자취 - 사용할수 없다.

에너지의 질서가 낮을수록 사용할수 없는 에너지가 된다. 마찰에너지는 에너지의 흡수, 환원이어서 이미 사용된 것이니 그 자체로는 사용할수 없다. 엔트로피가 낮을수록 에너지의 자유도(자유에너지)가 높아 마찰은 적어지며 엔트로피가 커질수록 마찰은 커진다.

전기에너지나 화학에너지는 그 자체로 사용되지 않는다. 낮은 단계의 운동에너지와 마찰에너지로 전환될 뿐이다. 에너지를 사용한다는 것은 운동에너지를 마찰에너지로 전환시킨다는 것이다.

자연계의 변화는 마찰없는 집적상태에서 마찰된 해체상태로의 이행이다. 만유인력은 마찰이 없는 자유에너지로 존재하며 모든 변화는 에너지 자유도의 감소 곧, 마찰방향으로의 이행한다.

에너지의 가장 높은 단계는 위치에너지이며 위치란 자유에너지의 자유도를 의미한다. 구조론에서 구성소들의 기하학적 배열형태가 마찰면이 적은 배열을 이룬 것이다. 집적방식에 따라 마찰은 늘어나고 자유도는 감소한다.

(위치->전기->화학->운동->마찰)의 에너지질서 차이는 자유에너지의 자유도가 낮아져가는 과정이다. 구성소들의 집적정도에 따라 집적도가 높을수록 밀집하여 많은 여유공간을 가진다. 집적이 해체될수록 여유공간이 사라져서 마찰비율이 높아진다.

물질의 세계가 가짜이듯 에너지의 세계도 가짜이다. 진정한 것은 정보이며 세계는 그 자체로 하나의 정보일 뿐이다. 물질의 색이 가짜이듯 에너지의 공도 가짜이다. 부단한 창조의 호흡만이 실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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