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이란
read 4162 vote 0 2002.09.09 (15:09:33)

<이야기>


1. [문명의 전환점에 서다]

1999년 인류는 거대한 전환점 앞에 서 있다. 이제 문명의 위기다. 우리는 위험의 본질을 잘 알고 있다. 자원고갈, 환경파괴, 윤리상실, 과학만능, 생산과잉의 위험 앞에서 인류를 구할 길은 오직 하나의 국제적 리더십, 세계적 표준, 전지구적 합의, 전인류적 헌장, 지구촌공동체를 조직하는 데 있다.

한세기 전만 해도 위험의 규모는 작았다. 전쟁이 나도 한 나라가 망하고 재앙이 닥쳐도 어느 한 지역이 파괴될 뿐이었다. 오늘날 물질문명은 위험의 규모를 전 세계적 단위로 확대하였다. 망하면 같이 망하고 흥해도 같이 흥한다. 다같이 살기 위하여 이제 인류는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

우리는 알고있다. 유엔이 결코 세계적 리더십을 창출할 수 없으며 미국이나 중국 혹은 러시아가 세계의 리더나 맹주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영국이나 프랑스의 표준이 결코 인류공통의 표준이 될 수 없으며 설사 어느날 세계인들이 모두 각성하여 그럴듯한 인류양심의 헌장을 발표하고 요란한 캠페인을 벌인다 해도 곧 분열하여 서로 쟁투하고 비난하며 흩어지고 만다는 것을.

우리 길을 알고 있으나 실제 그 길을 갈수는 없다. 마치 고대의 어떤 실력자가 힘으로 제후들을 눌러 회맹하고 피를 나누어 마시며 평화를 맹서한다 해도 그 조약문서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약속은 파토나고 맹서는 깨어지고 전쟁은 터지고 마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눈에 보이는 어떤 방법으로도 이 위험을 막아낼 수 없다. 위험은 근원적이고 본질적이다. 견고한 성벽과 요란한 선동과 튼튼한 조직으로도 막을수 없다. 한때 우리는 유엔이 그 일을 해줄것이라 믿었고 또 한때는 마르크스주의의 세계혁명이 대안이 되리라고 믿었다. 어떤 사람은 자본주의의 영속적인 발전이 그 풍요로움으로 하여 해결사일것처럼 턱없이 믿고 있기도 하다.

나는 말한다. 오직 진리만이 이 위기를 수습할수 있다고. 우리 진리로 돌아가야 한다. 깨달음으로 각자가 내 마음 안에서 근원의 진리를 영접해야 한다. 새가 알속으로 되돌아가는 거 만큼 힘든 일이다. 그러나 생각을 깬다면 새가 알을 낳듯이 간단히 해결되는 일이다.

내면으로부터의 혁명이다. 유엔이나 인터내셔널이 겉으로 드러나는 조직이나 정치집단 혹은 군대의 물리력에 의존한 겉으로부터의 혁명이라면 깨달음은 속으로부터의 혁명이다. 우리는 위로부터, 겉으로부터의 무력혁명에 실패해왔다. 이제 생각 바꾸어 자기 내면으로부터의 혁명에 나서야 한다. 필요한 것은 어둠 밝히는 하나의 횃불, 대중을 인도하는 하나의 깃발, 새벽을 알리는 하나의 나팔소리.

진실은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함으로 되지 않는다. 만인이 각기 자기 양심의 소리에 귀기울일 때 참된 혁명은 이루어진다. 내면의 거듭남으로 하여 인류가 국적과 인종과 성의 정체성을 불문하고 단 하나의 것, 근원의 신으로 돌아가므로서 진리의 종소리가 만인의 가슴에 동시에 울려퍼지게 한다. 오직 진리가 헌장이 되고, 진리가 표준이 되고, 진리가 리더십이 된다. 깨달음이 진리를 드러나게 한다.

닭이 달걀 속으로 되돌아가는 것 만큼이나 어려우리라. 정신차리고 다시금 보라. 암탉이 알을 낳듯 쉬운 일이다. 이르노니 형제여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오듯 그대 안의 에고를 깨고 진리를 그 자리에 두라.

2. [타인에게 말걸기]

나는 오래 생각하여 마침내 깨달았다. 사실은 먼저 깨닫고 오래 생각했다. 내가 무엇을 깨달았는지, 깨달은 바를 어떤 방법으로 타인에게 설명하고 전달할수 있는지를 생각해야했다. 아니 사실은 어느 쪽도 아니다. 나는 그것을 어떤 언어로도 용이하게 말해내지 못한다. 그것은 부단한 대화다. 신이 내게 말을 걸었고 나는 응답했다. 깨달음은 신이 내게 말을 거는 방식이었고 명상은 내가 신에게 말을 거는 방식이었다.

깨달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깨달음은 산수문제 풀기와 비슷하다. 그들은 스물한살에 혹은 서른다섯 살에 어디서 문득 깨닫는다. 나의 경우는 다르다. 나는 열살즈음 사람들과 전혀 다른 방법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일곱 살 때 혹은 더 아기였을 때의 어떤 인상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았다.

그것이 말해지는 깨달음과 같은 것임을 안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 열서너살때 누구와 논쟁해도 적어도 논쟁 그 자체에서는 이길수 있다고 생각했다. 열일곱살 때 나의 생각하는 방식을 보편화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했다. 필요한 것은 몇몇 새로운 어휘들과 그 언어들을 조직하는 규칙이었다.

스무살 때 긴 여행을 떠났다. 고독이라는 마을을 지나 노동이라는 도시를 거쳐 죽음이라는 강을 건너고 고통이라는 산을 넘었다. 10여년의 여행끝에서 만나고자 한 것은 나와의 부단한 대화 상대자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줄곧 대화해 왔다. 누구와 대화했는가? 신이다. 신은 진리의 방법으로 내게 말을 걸어온다. 그것이 곧 깨달음이며 명상은 나의 신에 대한 말걸기이다.

낯선 사람에게 말걸기다. 우리 서로 인사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자기를 낮추고 타인을 받아들이는 방법에 대해서 배워야 한다. 우리 자연과 인사하는 방법도 배워야 한다. 참된 것은 신과 인사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오직 진리의 이름으로만이 신과 대화할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신에게 말걸기 전에 언제나 신이 먼저 인간에게 인사하여 온다. 그대에게 유혹이 손을 뻗칠 때, 두려움이 엄습해올 때, 시련이 다가올 때 겁내지 말라. 그것은 신의 인사였으니 미소로 받아들이라.

인도의 현자 스와미 묵타난다는 어떤 사람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여섯살 때 나는 일곱 살을 향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일곱 살이 되자 나는 언제나 학교를 향해 가고 있었으며 그것은 보다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보다나은 인간이 되기보다는 현실적이고 영리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졸업후 나는 늘 성공을 위해, 행복한 미래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쉰살이 되고 보니 나는 내 자신이 무덤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참담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의 이야기를 하겠다. 나 아무데로도 가고싶지 않았다. 주저 앉아버렸다. 도무지 인생에 자신이 없었다. 삶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행복이나 성공 따위는 쳐다보기도 싫었다. 나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단지 잠시라도 내 자신일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응답했고 그는 또 말을 걸어왔다. 서로는 대화했고 그러면서 서로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서른 살을 넘겨 살아버렸다. 그것이 전부다.

나는 깨달음의 이름으로 그가 내게 말을 걸어오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려한다. 명상의 이름으로 내가 그에게 응답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실상 그가 내게만 말을 걸어온 것은 아니다. 그는 누구에게나 말을 건다. 그러나 인생이 어디론가 가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 스와미 묵타난다 같은 현자들은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어디론가 급하게 가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너무 일찍 패배를 배워버린, 그리하여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린, 어디로도 가고 싶지 않았던 한 겁많은 아이가 그의 말에 귀기울이었던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우리 서로 대화할수 있다.

3. [왜 명상을 하는가?]

명상을 왜 하느냐고 물으면 나는 내 경험을 들어 지극히 현실적인 답을 먼저 내놓을 것이다. 명상은 무료할 때 시간 보내기에 좋다. 머리가 좋아져서 집중력향상을 실감할수 있다. 문제들을 더 잘 해결할수 있게 되고 아는 바를 훨씬 더 조리있게 말할수 있게 된다. 대인관계가 개선되고 신용을 얻게 된다.

대뇌는 좌뇌와 우뇌로 되어있고 좌뇌는 이성을, 우뇌는 감성을 담당한다. 우리는 이 중 일부분만 사용한다. 사용하지 않는 부분을 사용하려는 성질이 있어 잠든 부분을 일깨우면 뇌내신경회로들은 극도로 고조되는데 이것이 신체적긴장으로 전이되어 극도의 희열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이 또한 아기가 신기한 것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에 다름 아니니 현혹되어서 안된다.

이건 명상의 본질이 아니라 후방효과다.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혹은 신통력을 가지거나 부처가 되기 위해서 명상을 한것은 아니었다. 깨달음의 법열을 즐기기 위함도 아니었다. 나는 늘 혼자였다. 혼자일 때 신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서로는 대화했다. 그것이 전부다.

세상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놀이는 싱거웠고 승부엔 관심이 없었다. 보다 나은 인간이 되고싶지 않았다. 이순신 같이 훌륭한 사람 생각만 해도 숨이 막혀온다. 정주영같이 성공한 사람 보기만 해도 징그럽다. 턱없이 행복해하는 사람들 바보같아 한심하다. 나 단지 나자신이 되고 싶었다. 내가 나답지 않다고 여겨질 때 슬퍼졌으며 나다웁다고 느껴질 때 희열을 느끼었다.

행복해지려고 밥을 먹는 돼지는 없다. 살기 위해 먹는 사람도 없다. 다만 배가 고프기 때문에 밥을 먹는 것이다. "왜 먹니?" 하고 질문하면 행복해지기 위해 혹은 살기 위해서라고 변명한다. 답이 궁하여 찾아낸 말이다. 실은 배가 고프니까 먹는 것이다. "왜 명상하는가" 하고 물어올 때 명상의 좋은 점을 말한다면 지어낸 말이다. 나의 진실은 이렇다. "고백하라. 그대는 왜 내게 말을 걸어오는가? 고독하기 때문이 아닌가?"

왜 명상을 해야 하는가? 명상하지 말라. 그러나 그대 고독하다면 달리 무엇을 할수 있는가? 문명은 도시화 산업화로 인간을 고립시킨다. 인간은 점점 고독해진다. 달리 출구는 없다. 명상은 친구를 얻게 한다. 친구를 얻지 못하더라도 자기자신과 친구하는 방법을 알게 된다. 자연과 사귀는 법을 알게 되고 세상과 교통하는 방법을 알게 된다. 신과 친구되는 법을 알게 된다.

왜 내 글을 읽고 있는가? 고백하라. 나는 그대가 고독하기 때문에 이 글을 읽는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어려운 것이 사람과 사람사이에서의 일이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일로 영혼에 상처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나의 고백을 들려준다. 그대 이 상실의 시대에 나서 세상으로부터 고립을 느낄 때 명상하여도 좋다.


4. [사람과 사람사이에서의 일]

서로 인사하자. "안녕하시오?" 하고 묻는 것은 상대방이 밤새 안녕하지 못했을까봐 염려해서가 아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하고 말거는 것은 상대방이 이 아침을 나쁜 아침으로 잘못알까보아 알려주려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겐 항시 본능적인 방어기제가 작동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죄의식으로도 부르고 부끄러움이라고도 부른다. 그것은 무의식이며 자기자신도 아지 못하는 사이에 상대에 대해 공격성을 드러내고 자신과 상대 사이를 차단하려 한다. 인사는 이러한 방어기제의 작동을 차단하고 사람과 사람사이를 개방한다.

아기는 낯선 사람을 보면 낯가림을 하며 수줍어 한다. 본능이 방어기제를 작동하여 타방의 접근에 대해 경계경보를 울리기 때문이다. 또 사람들은 성이나 범죄에 죄의식을 느낀다. 또한 본능의 방어기제가 인간을 보호하는 프로그램인 것이다.

사랑은 성접촉에서 방어기제의 작동을 차단한다. 사랑없는 성접촉에서 죄의식의 방어기제가 작동함은 당연하다. 사랑은 인사다. 음악은 신체활동에 대한 방어기제의 작동을 차단한다. 음악도 인사다. 문화, 예술은 그 자체로 자연과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인사다. 상식과 교양은 문명에 대한 인사다. 어찌 떳떳하지 않은가?

사람들은 타인과 인사할줄 안다. 그러나 정작 자기와 인사하지 못한다. 자연과 인사하지 않으며 세상과 인사할줄 모르고 신과 인사하지 않는다. 나의 명상법은 그저 인사법이다. 나는 나자신에게 세상 모두에게, 또 신에게 한걸음 먼저 다가가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한다.

인사는 짧고 쉬워야 한다. 인사가 제사지내기처럼 어렵다면 사람들은 인사하지 않을 것이고 서로 고립될 것이다. 명상은 인사다. 사람들은 몇가지 명상법을 생각해내었다. 그러나 한결같이 차례모시기보다 어렵다. 하여 나는 "안녕하슈" 간단한 명상법을 만들었다.

5. [사색에서 명상으로]

나는 쉽게 깊은 사색에 든다. 인사를 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인사를 모르므로 산만한 아이처럼 허둥댄다. 몇가지 명상법이 개발되어 있으나 한결같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오랜 시간이 걸리고서야 깊은 선정에 든다는 거다.

시간낭비 아닌가? 바쁜 현대사회에 비현실적이다. 나는 먼저 명상하고 다음 깊이 사색한다. 명상은 인사처럼 쉬워야 한다. 정신차렷-재정렬의 명상법은 자동차의 시동을 거는 것과 같다. 먼저 시동(명상)을 걸고 다음 주행(사색)한다. 고장난 차들은 내리막길에서 한참 밀고가다보면 그제서야 시동이 걸린다. 먼저 사색하고 후에 깊은 선정에 든다면 거꾸로다.

덕산의 방이나 임제의 할과 같다. 순간에 명상에 들며 사색은 절로 따른다. 사색은 정신집중이고 명상은 정신차렷이다. 정신차렷하면 저절로 정신집중된다. 억지 정신집중부터 하고자하면 잠든다. 몇몇 명상법들이 개발되어 있으나 정신집중 하는 사색이지 정신차렷하는 참된 명상이 아니다.

기도, 호흡, 고행을 위주로 한 사마타명상법(유루선정)과 석가모니가 주창한 위빠사나명상법(지혜해탈법), 보리달마 이후 화두를 들고 禪하는 간화禪법, 또 라즈니쉬가 주장하는 생활명상(?)들을 들수 있다. 어느 것이나 시간을 잡아먹는 고도의 수련과 정신집중을 필요로 한다. 도시생활에 바쁜 현대인들이 조용한 산사를 찾아 깊은 명상에 잠기기는 어려운 일이다.

정신집중(사색)이 아닌 정신차렷-재정렬의 명상법은 찰나에 깊은 선정에 드는 방법이다. 모름지기 깨달음은 전광석화 같아야 한다. 10초도 길다. 오랜 사색 끝에 내리는 결론은 깨달음이라 할수없다. 순간에 깨닫고 즉시 선정에 든다.

보통은 먼저 정신집중부터 하라고 한다. 그러나 어떻게 정신을 집중할수 있을까? 자세나 호흡법, 특별한 장소나 기이한 분위기연출로 정신을 집중할수 있다고 한다. 시간과 돈이 든다. 본능의 방어기제가 끊임없이 정신집중을 방해한다.

시작이 반이라고 했다. 인사는 시작이다. 인사를 발명한 이야 말로 그 어떤 성자보다 위대하다. 인사가 반이다. 동작그만~! 정신집중을 방해하는 본능의 방어기제를 차단하므로서 순간적으로 선정에 들게하는 참된 명상법이 있다.



6. [본능의 방어기제를 차단하라]

원효성사가 의상대사와 함께 당나라에 유학가는 도중 어느 무덤가에서 자게되었다. 해골바가지 물을 마시고 홀연 깨달았다. 정신차렷이지 정신집중이 아니다. 발명이 아닌 발견, 선택이 아닌 각성이다. 무엇을 발견하였던가? 해골바가지를 보고 구토하는 순간 본능의 방어기제가 작동하고 있음을 본 것이다.

아기들은 늘 명상에 있다. 두뇌는 활성화되어 있고 의식은 고조되어 있다. 방어기제가 작동하면 아기는 울음을 터뜨린다. 울지않는 동안 아기의 정신은 명상이기에 걸음마를 배우고 언어를 습득할수 있다. 아기가 성장하면 의식은 자동에서 수동으로 전환되고 본능은 뒤로 빠지며 마음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마음을 마음대로 할수 없으므로 뒤로 물러났던 본능의 방어기제가 끊임없이 침투하여 마음을 교란시켜 놓는다.

정신차렷-재정렬의 명상법은 먼저 본능(무의식)의 개입을 차단하므로서 의식의 재정렬, 마음의 피드백을 통하여 한순간에 정신을 고조시키는 방법이다. 정신은 고조(조증)되어 있거나 저하(울증)되어 있거나 둘 중 하나다. 항시 저하되어 있으면 우울증이며 고조와 저하를 왔다갔다하는 사람은 조울증이다. 정신차렷으로 한순간에 울증을 끊고 정신을 고조시킬수 있다.

의식의 항상성에 의하여 그대 깨어있다면 항상 무언가를 의식해야 한다. 의식은 가만있지 않고 끊임없이 흐른다. 금새 대상을 포착하고 마음에 받아들이며 사태를 분석하고 자기도 모르는새 방어기전을 작동하여 우울(단독무의식)해지거나 흥분하여 공격성향(군중심리-집단무의식)을 드러내게 된다.

의식의 흐름은 가만 있으면 습관과 학습에 의해 무의식의 영역에서 임의대로 흐르므로 이를 차단하고 피드백(feedback)하여 본래의 상태로 되돌려야 한다. 구령은 (동작그만>차려>경례>열중셔>편히쉬어) 그대로 마음의 동작그만, 마음의 정신차렷, 마음의 경례, 마음의 열중셔, 마음의 편히쉬어를 언제든지 한순간에 하는 것이 재정렬의 명상법이다.

덕산의 방과 임제의 할은 마음의 동작그만이다. 동작그만에서 끝나랴. 즉시 피드백이다. 피드백이란 전산출력을 즉시 입력으로 되돌림이다. 정신의 심층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이를 알고서야 올바른 피드백을 할수있다. 덕산과 임제는 동작그만에서 그치고 다음 구령을 불러주지 않았다. 나는 좀 더 정교하게 접근하여 다음 구령까지 불러주겠다는 거다.

7. [명상과 수행]

정신의 심층구조를 알면 마음을 마음대로 제어할 수 있다. 정신은 컴퓨터의 소프트웨어와 같아 정교한 내부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일정한 규칙에 지배되며 항시 시스템의 일부만 동작하고 있고 다른 부분들은 대기상태로 있다. 명상이란 지금 마음의 어느 부분이 동작하고 있는지 순간적으로 파악하고 적절히 피드백을 해주는 것이다.

정신은 마음의 집이고 마음은 의식의 흐름이다. 마음은 맑게 개어 있거나 흐트러져 있다. 기쁨으로 고조되어 있거나 불안하여 혼미하거나, 집중하여 몰입해 있거나, 유쾌하여 흥분해 있거나, 의기소침하여 저하되어 있다. 자각하여 의식적인 상태에 있거나 습관에 의하여 무의식 상태로 있다.

마음은 결코 가만있지 않는다. 마음은 끝없이 흐른다. 마음은 정신, 의식, 의지, 의사, 감정의 다섯가지 직렬회로의 심층구조와 오성, 이성, 지성, 덕성, 감성의 다섯가지 병렬회로의 사유영역이 조합되어 만들어낸 25가지 세부경로, 그리고 입력과 출력의 길항작용에 의하여 성립되는 50가지 변화섹터, 여기에다 습관과 학습이 개입하여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수백 수천의 복합감정까지 변화무상하여 거대한 바다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입력과 출력의 일정한 경로가 정해져 있어 정신이상이 아닌 이상 자기 마음의 현재위치를 즉시 파악할수 있다.

재정렬의 명상법은 먼저 마음의 흐르는 경로를 파악하고 지금 자기 마음이 가 있는 현재위치를 포착한 뒤 이를 한순간에 최초의 출발점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여기에는 정교한 기술적 접근이 소용되며 어느 정도는 훈련되어야 한다. 수행은 이를 기술적으로 최고의 수준까지 끌어올리기 위한 훈련이다.

명상과 수행은 별개이다. 수행은 하나의 테크닉이어서 타인을 가르치는 직업적 명상가가 아니라면 단지 한번쯤 경험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사람들에게 명상을 권유할 뿐 굳이 수행을 권유하지는 않는다. 모든 사람이 도를 닦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명상을 할 필요는 있다.

수행은 이론적으로 실제적으로 체험적으로 깨닫기 위한 것이며 명상은 단지 깨달음을 활용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수행은 전문적인 경지에 도달하여 사법고시를 패스하고 직업적 변호사가 되는 것이며 명상은 그저 법률상식을 알아 법질서를 잘 지키는 것이다. 모두가 법률가가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모두가 법질서를 잘 지킬 필요는 있다.

나는 수행에 해당하는 소승적, 이론적인 깨달음, 실제적, 체험적인 깨달음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것이다. 여기에는 정교한 방법론이 소용된다. 그러나 그 복잡한 내용을 속속들이 학습하지 않고서도 그 깨달음을 얼마든지 활용할수 있다.

모든 사람이 석가일 필요는 없다. 석가가 이미 깨달은 것을 후배가 반복할 필요는 없다. 석가는 선장이고 대중은 승객이다. 선장은 배를 움직여갈줄 알아야 하고 승객은 배가 어떤 것인지 정도는 알아야 한다. 재정렬의 명상법은 훌륭한 승객이 되자는 것이지 모두가 선장이 되자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선장은 신 뿐이다. 우리는 신의 배를 탄 승객이다. 선장의 의사를 알아들을 귀를 갖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승객이 된다. 대승적 측면에서 말한다면 깨달음은 신이 되자는 것이 아니라 신의 선장과 소통할수 있는 좋은 승객이 되자는 것이다.

8. [돈오돈수와 돈오점수]

불교적 의미에서 깨달음은 신에 가까운 특별한 존재로 이해되는 경지 이른바 부처가 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진실로 말하면 인간은 결코 신이 될 수 없으며 부처라는 것은 하나의 관념에 지나지 아니한다.

재정렬의 명상법은 깨달음의 활용이며 수행은 깨달음의 완성이다. 활용은 현실에서의 실천이며 완성은 미학적 측면에서 깨달음의 근접도, 완성도, 균형도, 속도, 정확도를 한층 극대화하는 것이다.

돈오는 명상이며 점수는 수행이다. 깨달음의 활용측면에서 보면 돈오돈수다. 굳이 힘들여 수행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수행을 체험하고 이해할 필요는 있다. 완성측면에서 보면 수행에는 끝이 없다. 영원한 수행이 있을 뿐이다. 활용에 치중할 것인가 완성에 치중할 것인가? 활용은 대승적 접근이며 완성은 소승적 접근이다.

선장은 수행해야 하지만 승객은 수행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승객은 선장의 지시를 따르기 위해서 선장을 이해할수 있어야 한다. 참된 의미에서 깨달음은 선장이 되는 것이지만 진정한 선장은 신 뿐이다. 인간은 신의 완전성에 대하여 그 미학적 근접도를 가능한 한 높이 끌어올릴수 있을 뿐이다. 수행자는 신의 입장에서 판단할수 있게 되지만 대중은 신과 대화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돈오돈수가 옳은가 돈오점수가 옳은가? 먼저 두가지 표준을 세울수 있다. 승객이 될것인가 선장이 될것인가? 법을 잘 지키는 시민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굳이 법률전문가가 될것인가? 대승적으로 볼것인가 소승적으로 볼것인가? 활용할 것인가 완성할 것인가? 대중은 전자를 택하고 수행자는 후자를 택한다.


9. [완성에서 실천으로]

노래하는 가수는 힘든 수행을 거쳐 음악을 만들어내지만 청중은 열린 귀로 충분하다. 깨달음의 완성은 영원한 수행을 필요로하지만 깨달음의 활용은 그저 정신차렷-소통의 명상법으로 충분하다. 가수의 열창과 객석의 청취는 무아의 경지에서 하나로 소통한다.

오랜 수행을 통하여 터득한 깨달음의 경지나 재정렬의 명상법으로 순간에 명상에 드는 것이나 깨달음의 본질에서 같다. 요리사가 한시간을 공들여 조리한 것이나 고객이 5분만에 먹어치운 요리나 같은 음식이다. 둘은 결코 다르지 않다. 깨달음은 험난한 수행을 거쳐야 하지만 재정렬의 명상법은 수행과정을 생략하고 곧장 깨달음의 경지로 치고들어간다.

깨달음은 방대하고 정교한 이론적 접근과 체험적 접근을 거쳐야 하지만 그 활용에 있어서는 단지 신과 대화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정신만 차리면 된다. 고객은 먹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그 요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알아야 한다. 수행과정을 거칠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수행을 이해해야 한다.

첫 번째 만남을 기억하는가? 첫 봄소풍을 기억하는가? 첫 출근을 기억하는가? 그 어떤 것이든 처음의 경우는 기억된다. 그때는 정신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인사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명상은 이와 같다. 그저 처음의 정신, 첫사랑의 기쁨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비극은 둘째날부터 시작된다. 익숙한 습관과 타성이 정신을 흐트려놓으면 무의식이 의식을 대신하고 마음은 관성의 법칙을 따라 제멋대로 흘러간다. 재정렬의 명상법은 약간의 훈련을 거쳐 언제나 첫인사하는 마음으로 정신차리고 있을수 있게 하는 것이다. 매일이 첫만남처럼 설레임으로 채울수 있다.

10. [수행과 깨달음]

명상이 마음과 정신 사이에서 경로설정에 의한 피드백이라면 깨달음은 나와 우주사이에서 경로설정과 피드백이다. 둘은 상반된 듯 보인다. 그러나 같다. 나를 기준점으로 할때 명상은 자기 내부로 쳐들어가며 깨달음은 자기 외부로 지향해간다. 둘은 반대방향이다. 그러나 동전의 양면과 같아 양자는 언제나 동시에 만난다. 둘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수행은 명상을 통하여 깨달음으로 간다. 그러나 깨달은 자 만이 명상할수 있다. 여기에 존재론과 인식론의 교감이 있다. 존재론은 하드웨어적 접근이며 인식론은 소프트웨어적 접근이다. 둘은 상반된다. 존재론에서 명백히 먼저 깨달은 후에 명상한다. 인식론에서는 이를 반영하여 명상을 통하여 깨닫는다. 명상은 존재론적 접근이며 수행은 인식론적 접근이다.

신이 먼저 인간에게 말을 거는 것은 존재론이며 인간이 이에 응답하는 것은 인식론이다. 컴퓨터에 비유하면 존재론은 최초 컴퓨터를 켰을 때 전원이 컴퓨터를 동작하는 순서이며 인식론은 컴퓨터가 이미 켜진 상태에서 외부정보를 처리하는 순서이다. 둘은 정반대의 입출력경로를 가지고 길항작용을 통하여 교감한다.

존재론적으로 보면 인간은 명상을 통하여 점차 깨달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저절로 깨닫는다. 진리의 보편성에 의하여 신의 진리가 인간정신에 이미 반영되어 있다. 진실을 말하자면 만인은 애초에 깨달아 있다. 깨달아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본래 부처임을 확인할 뿐이다.

무에서 유가 생겨나지 않는다. 깨달음은 백지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쥘부채를 펼치면 숨은 그림이 드러나듯 이미 갖추어 있는 것이 우연한 계기로 펼쳐져 보이는 것이지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쥘부채에는 애초부터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접혀져 있는 동안에는 그림이 없다. 인간은 우연한 계기로 그림을 슬쩍 보게 된다. 그것은 신이 인간에게 말을 걸어오는 방식이다. 수행은 우연히 흘낏 보았던 그림을 다시 정확하게 찾아가는 것이다. 또한 신의 부름에 인간이 응답하는 방식이다.

석가는 명상과 수행을 통하여 깨달은 것이 아니다. 이미 깨달아 있었으며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금 수행한 것이다. 인식론적으로 보면 우연한 깨달음은 곧 망각되어버리므로 수행을 통하여 그 찰나에 보았던 것이 무엇인지 검증해야 한다. 얻은 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깨달음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방법이다.



11. [왜 사는가?]

"왜 사는가?" 하고 물으면 나란 그저 열없이 웃을 수 밖에. 차마 나란 살지 않는다. 결코 삶이라 불리우는 작업을 진행하지 않는다. 그런거 없다. 나 정말이지 가만 있었다. 내 존재하기 앞서 태어나리라 결의한 바 없고 내 존재한 이후 살아가리라 결정한 바 없다.

나를 알았을 때 나 이미 태어나 있었고 나 이미 살아가고 있었다. 나란 정말이지 그냥 가만있었다. 인생의 목적이라든가 이유라든가 성공이라든가 사랑이라든가 사람들이 꾸며낸 말일 뿐 참말이지 그런거 없다. 나 가만있는데 누군가가 내 어깨를 툭 치면서 말을 걸어왔고 나 대꾸했을 뿐이다. 대화는 이어졌고 사람들은 그것을 삶이라 부르더라.

"인생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런거 없다. 아 정녕 오지 않았으니 가지 않는다. 나란 단지 대화할 뿐이다. 그것은 부단한 대화다. 그가 먼저 시비걸어오지 않으면 나 대꾸하지도 않는다. 삶의 이유? 인생의 목적? 그런거 없다. 내게 먼저 말을 걸어온 그에게 물어보라.

인간이 로봇을 만들어놓고 로봇에게 "왜 사니?" 하고 물으면 로봇은 "왜 묻니?"하고 대꾸할 밖에. 비참하지만 이것은 진실이다. 삶은 없다. 실재하는 것은 대화다. 교감이다. 접속이다. 소통이다. 인간은 본시 살지 않으며 인생은 어디로도 가지 않는다. 단지 소요할 뿐이다.

살려면 그 삶의 주인인 내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가 먼저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으면 나란 없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림자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가 먼저 내 이름을 불러 주었다. 그가 내게 말을 걸어왔고 나는 대꾸하였다. 그 대화 가운데서만 나는 성립한다. 나는 있는 것이 아니라 성립하는 것이며 신과 접속했을 때 한해서이다.

내가 없는데 어찌 삶이 있겠는가? 내가 없는데 어찌 어디론가 가겠는가? 그가 내게 말을 걸어오지 않으면 나는 점점 희미해진다. 내가 그에게 대꾸하지 않으면 나는 점점 바래어진다. 나는 있는 존재가 아니라 또렷하거나 희미하거나다. 돌아보라. 나 지금 얼마나 희미해져 있는가?

명상은 그가 내 이름을 불러주는 그 순간으로의 돌아감이며 수행은 대가 대꾸하므로서 내가 또렷해지는 것이며 깨달음은 그리하여 내가 내인 것이다. 인간은 대화할 때에 한해서 자기자신일수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대화한다는 것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대화를 끝없이 이어간다는 것이다.

인생이란 그 부단한 대화의 주제를 찾아낸다는 것이며, 명상이란 참다이 대화하기 위해 진정으로 인사한다는 것이며 수행이란 대화하므로서 내가 내가 되어가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그리하여 이루어진 나를 이름한다.

12. [수행이란 무엇인가?]

수행은 삶의 구체화다. 나는 삶을 부단한 대화라고 정의했다. 인간도 바탕에서 돌멩이와 같은 하나의 물질일 뿐이다. 대화하는 동안만 인간이며 대화의 크기만큼만 인간이다. 고로 깨어있어야 하고 소통해야 한다.

삶은 어디론가를 가는 것도 무언가를 획득하는 것도 아니다. 삶은 대화이며 진정한 대화는 깊은 만남에서 이루어진다. 깨달음은 커다란 만남이며 수행은 부단한 대화이다. 그것은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며 자기정체성을 확보해가는 과정이다.

혼자서는 대화할수 없다. 먼저 만나고 다음 대화한다. 자기와 만나야 하고 사회와 자연과, 진리와, 신과 만나야 한다. 궁극적인 대화상대는 신이며 인간은 신과의 관계를 통하여 신의 신성성을 빌어 영적으로 높은 존재로 거듭난다.

삶의 의미는 맹목의 生態와 수동적 生活과 능동적 人生과 주체적 實存과 배달로서의 生命을 포함한다. 이는 자기주도권 곧 정체성영역의 크기를 나타낸다. 자기정체성의 주인인 자아가 주인노릇을 하는 크기를 말한다.

로보트의 작동을 삶이라 부를수는 없다. 벌레의 한살이가 인간의 삶과 동일한 대접을 받을수는 없다. 식물의 생장과 동물의 생태는 다른 것이며 동물의 생태와 인간의 생활 또한 차원이 다르다. 인간 또한 근원에서는 하나의 물질, 하나의 로보트에 지나지 않는다. 신과 대화하는 정도에 따라 그 질을 비약시켜 나간다.

미물에 불과한 인간이 로보트가 가지지 못한 생장을 얻어 생물이 되고 정신을 얻어 동물이 되고 의식을 얻어 인간이 되듯이 나아가 자아를 획득하고 또 그것을 실현하므로서 더 높은 차원의 존재로 거듭나게 된다. 곧 깨달음이다.

생물은 무생물보다 더 높은 차원의 존재이며 동물은 식물보다 더 높은 차원의 존재이다. 진화의 단계에 따라서 점점 높은 차원의 생명체로 비약한다. 그 정점에 靈長의 인간이 있다. 이러한 생명성의 획득단계가 정신 내부에서도 일어난다. 아무 생각없을 때 인간은 돌멩이와 다르지 않으며 의식화의 정도에 따라 점점 더 영적으로 높은 존재되어 거듭난다.

그러나 약간의 지혜로 타인과 비교하여 우열을 논한다면 가소롭기 짝이 없다. 깨달음의 단계를 여럿으로 나누고 도토리키재기는 신 앞에서의 교만이 된다. 모든 것의 정점에 신이 거하며 신과 소통하는 것만이 진정한 것이다. 신과 접속하는 자 그 누구이든 이미 부처이다.

13. [깨달음은 사랑과 같다]

신이 먼저 인간에게로 다가와 어깨를 치며 말을 건다. 순간 깨달음이다. 깨닫고야 명상할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무지하므로 상대를 알아보지 못한다. 이미 만났으나 진정으로 만나지 않은 것이다. 이미 깨달았으나 자신이 깨달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수행은 둘 사이의 대화다. 대화의 깊이를 더해가므로서 더욱 깊숙한 만남을 끌어내게 되고 마침내 완전한 만남,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참되지 않다. 처음부터 상대를 알아본다면 수행은 필요없다. 신이 말을 걸어와 우연히 만난 것이나 뼈를 깍는 수행의 끝에 진정한 만남에 이른 것이나 같은 것이어서 첫만남에서 완전히 깨달아야 좋다.

수행을 통하여 점점 깨달아간다는 것은 결혼해서 같이 살다가보니 어느날 문득 그 여자가 자기마누라임을 알게되었더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지혜로운 자 첫만남에 사랑한다. 대화하다보니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대화한다. 수행하다보니 깨닫는 것이 아니라 깨달았기에 수행한다. 그렇다. 진정한 사랑은 단박에 찾아오지 점점 다가오지 않는다.

무명이다. 만나고서도 만나지 못한 것이니 정신차렷-그대 이미 만난 것이라네. 사랑하고 있으면서 자존심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 척 하는 것이니 정신차렷-그대 이미 사랑하고 있다네. 수행을 통하여 점점 깨달아가는 것이 아니라 애초의 만남이 진정한 것이었음을 확인할 뿐이다.

명상은 만남. 수행은 대화. 깨달음은 관계확인이다. 사랑은 만남. 연애는 대화. 결혼은 관계정립이다. 진정한 사랑이라면 연애라는 줄다리기가 필요없다. 처음 신이 그대에게 말을 걸어올 때 이미 만났던 것이어서 수행을 통하여 깨달은 자 없으나 깨달은 자는 수행한다.

연애가 먼저인가 사랑이 먼저인가? 사랑이 먼저다. 깨달음도 이와 같아 첫 눈길이 마주쳤을 때 사태는 끝난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진정한 것이 아니다. 돌멩이를 하나 줏었는데 갈고 닦아서 금을 만들었다는 것이 아니다. 금을 줏었는데 금인지 알수없어 갈고 닦아보니 역시 금이 맞더라는 거다.

14. [인간이란 무엇인가?]

삶은 (생명, 실존, 인생, 생활, 생태)의 통일이고 이는 정신에서 (정신, 의식, 의지, 의사, 욕망)으로 성립한다. 이를 외화하여 (소유, 지배, 성취, 사랑, 행복)을 얻으며 실패하면 (상실, 소외, 고독, 상심, 일탈)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성질이 (존엄성, 주체성, 정체성, 사회성, 문명성)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권태, 환멸, 표백, 무심, 지평)의 영적 초극이 필요하며 영적으로 승화되면 (영적 체험, 체험의 공유, 의식의 표백, 의식의 각성, 인식의 비약)을 거쳐 마침내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과정이 수행이다.

인간이 만유의 영장이다. 다른 모든 존재에 결단코 없는 것 곧 (존엄성, 주체성, 정체성, 사회성, 문명성)이라는 인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성은 교육과 문화에 의해 더욱 함양되며 함양된 정도를 인격으로 나타낸다. 이는 인간의 사유영역인 (오성, 이성, 지성, 덕성, 감성)에 기초하며 각각은 (창의력과 직관력, 상상력과 어휘력, 판단력과 사고력, 추리력과 이해력, 기억력과 인지력)의 인식하고 표상하는 길항작용으로 성립한다.

동물에게는 이러한 사유영역이 없으므로 인간은 본질적으로 동물과 차별화되는 각별한 존재이다. 인간에게만 (존엄성, 주체성, 정체성, 사회성, 문명성)이 있으며 이는 인간의 고유한 속성으로서의 인격성이다. 이 인성이 발달한 정도로 인격이 나타나며 수행은 인격의 질적 고도화다.

동물의 지능에는 사유영역이 없다. (오성, 이성, 지성, 덕성, 감성)이 없다. 이를 낳는 창의력, 상상력 판단력 등 예의 열가지 두뇌기능이 없거나 미미하다. 동물의 두뇌에는 사유를 담당하는 하드디스크공간이 비어서 없다. 고로 인격이 없다.

인간에겐 인격이 있다. 그러나 갓난 아기에게 인격은 씨앗으로만 존재한다. 그 (오성, 이성, 지성, 덕성, 감성)의 씨앗에 물을 주고 꽃을 피우는 것이 수행이다. 깨달음은 이러한 인격키우기 과정을 외화를 통해서가 아닌 자각을 통해서 단박에 실현하는 것이다.

수행한다는 것은 결국 인격을 드높이는 과정이며 인격은 (존엄성, 주체성, 정체성, 사회성, 문명성)의 인간성이며 이는 인간에게만 있는 두뇌기능의 사유영역에서 (오성, 이성, 지성, 덕성, 감성)에 기초한다. 이를 정신이 외화하여 (소유, 지배, 성취, 사랑, 행복)을 성취하게 되는데 문제는 실패한다는 것이다. 실패하면 (상실, 소외, 고독, 상심, 일탈)을 겪게 되는데 이를 방어하기 위해 정신의 초극이 필요하며 그것은 (권태, 환멸, 표백, 무심, 지평)이다. 초극은 (영적 체험, 체험의 공유, 의식의 표백, 의식의 각성, 인식의 비약)의 자각을 통하여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

인간은 정신에 사유영역을 지니므로서 (존엄성, 주체성, 정체성, 사회성, 문명성)을 추구하는 본성을 가지게 되고 그것은 정당하다. 이러한 인간본성이 외부적으로 표현되는 것이 외화이다. 곧 (소유, 지배, 성취, 사랑, 행복)의 추구이다. 그래서 이를 언제나 달성할수 있다면 명상도 수행도 필요없다. 그냥 (소유 - 행복)하여 잘살면 된다.

비극은 실패하는데 있다. 때로 (소유 - 행복)은 달성되지 않는다. (소유 - 행복)은 자기 바깥에서 조달되는 것이다. 필연 타자에 개입하고 파괴하고 쟁탈해야 한다. 고로 누군가는 반드시 (상실, 소외, 고독, 상심, 일탈)을 당하게 된다. 하나의 성공을 위해서 하나의 실패가 따라야 한다. 고로 자기 내부에서 초극할 수밖에 없다. 타자가 아닌 즉자의 영역에서 (존엄성, 주체성, 정체성, 사회성, 문명성)을 실현하는 것이 초극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고로 유능한 자 한때 (소유, 지배, 성취, 사랑, 행복)에 성공하기도 하지만 결국 누구나 죽기 때문에 최후의 순간에는 실패한다. 인간의 욕망은 정당하다. 인간의 (존엄성 - 문명성)은 인간본성이므로 이를 달성하기 위하여 (소유 - 행복)하려는 것은 전혀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실패한다. 욕망은 결코 죄악이 아니다. 단지 실패할 뿐이다.

깨달음은 인격의 완성이다. 외화하는 방법 곧 (소유, 지배, 성취, 사랑, 행복)을 통해서 완전해지고자 한다면 필연 실패한다. 완전한 소유, 완전한 지배 완전한 성취, 완전한 사랑, 완전한 행복은 없기 때문이다. 모든 성공은 비교된 성공이며 아무리 성공했다해도 누군가는 더 성공하고 누군가는 덜 성공한다.

초극은 비교되지 않는다. 고로 얼마든지 완전한 인격에 도달한다. 외화하는 방법에는 시간이 걸린다. 초극하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단박에 도달할수 있기 때문에 깨달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인간성의 (존엄성, 주체성, 정체성, 사회성, 문명성)은 본래 신의 것을 빌린바 되므로 신과 소통하는 즉시 누구든 완전한 인격, 영적 초극에 도달한다.
15.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석가는 어디까지 도달했는지 나란 알수없다. 나는 인간이 인간아닌 어떤 존재가 될수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잘하면 겨우 인간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은 영장이지 동물이 아니다. 동물에겐 없는 어떤 것이 인간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신의 사유영역이며 곧 인격성을 유도해낸다.

갓난 아기는 인격이 없다. 씨앗이 있을 뿐 꽃도 열매도 없다. 性은 요소로서의 가능성이다. 인격성은 있되 인격은 없다. 그릇은 있되 비어 있다. 거기에 얼마나 채울수 있는가? 그릇의 크기만큼 채울수 있다.

인간은 외화하는 방법 곧 (소유, 지배, 성취, 사랑, 행복)을 통해서 자기 인격의 크기를 증명한다. 성공한 사람은 인격이 크다. 행복한 이는 인격자이며 사랑하는 이도 인격자이고, 성취한 자도 인격자이며, 지배자도 인격자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것은 가짜다. 행복은 불행으로, 사랑은 이별로, 성취는 실패로 바뀌고, 지배는 전복되며, 소유는 상실한다.

인격이 있으므로 인간인데 과연 인격이 얼만큼이나 있는가? 인격은 사유영역에 의해 유도되고 이는 곧 오성, 이성, 지성, 덕성, 감성인데 곧 창의력 상상력 어휘력 등 10가지 지적능력에 기초하는 바 누구든 자기지능에 제약되는 법, 지능지수의 한도 안에서 도달할수 있는 최대한은 정해져 있다.

머리가 나쁘면 깨달을수 없다. 그렇다면 깨달음은 아이큐놀음이란 말인가? 아니어서 누구나 다른 크기의 그릇을 가지고 태어난다. 자기그릇의 크기만큼 채우면 깨달은거다. 자기 자신으로 돌아갈수 있다면 된거다. 석가는 석가 아닌 그 무엇이 될 수 없다. 석가가 가진 그릇의 크기 이상을 담을수 없다.

인간의 본질은 인격이다. 만약 깨달은 이가 신통력을 행사하거나 육감을 발휘하거나 한다면 이는 되려 동물적 퇴행이다. 개미는 페로몬으로 동료의 마음을 읽고 박쥐는 레이다가 있어 코로 본다. 부처가 신통력을 가진다면 개미나 박쥐가 된 격이다. 인격만이 가치있으며 곧 (존엄성, 주체성, 정체성, 사회성, 문명성)이다. 어떤 초능력도 인격에 비하면 하잘것없는 벌레의 묘기다.

벼룩은 자기 키의 300배를 뛰지만 인간이 본받을 바는 아니다. 인간의 가치는 오로지 인격의 가치로 평가되어야 하며 인격은 (존엄성, 주체성, 정체성, 사회성, 문명성)으로만 평가된다. 석가가 이 이외의 어떤 것을 얻었다면 가짜이다. 인격은 (소유, 지배, 성취, 사랑, 행복)으로 증거되며 정신은 깨달음을 통하여 초극한다.

물질을 정신을 외화하고 정신은 물질을 초극한다. 소유하지 아니하면서 천하를 소유하고, 지배하지 아니하면서 그 어떤 정복자보다 크게 지배하며, 성취하는거 없이 그 모든 것을 성취하고,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사랑하고, 행복을 버리므로서 가장 행복하다.

16. [깨달음의 가치]

인간이 벌레보다 더 나은 존재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사회가 인권을 소중히 여김은 인간이 별난 존재이어서가 아니다. 相補性의 원리가 있어 타인을 공격하는 것은 곧 자기를 공격하는 것이라 모든 살인은 자살이며 모든 자살은 살인이 되는 까닭에서이다.

깨달음의 목적은 더 높은 차원의 존재가 되는데 있다. 가능한가? 물론이다. 인간은 더 높은 차원의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실상 인간은 결코 모기나 벼룩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없다. 착각하지 말라. 이건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깨달음이 육체적인 어떤 변형을 가져온대서 누에가 나방으로 변태하는 것보다 흥미로운 일일수는 없다. 육체적인 변형은 없거니와 있대도 가치없다. 변형은 정신에서 일어나는가? 그렇다. 그러나 그 또한 가치없다. 진정한 것은 靈에 있다.

인격이 고매한 양반이 들판의 농부보다 더 나은 존재일수는 없다. 교양과 매너, 지식과 예절, 문화와 윤리로 무장한대서 행복한 돼지보다 더 우월한 존재인 것은 절대로 아니다. 육체의 우월이 곰이나 호랑이의 용맹에 지나지 않듯 정신의 우월 또한 속물의 지적 허영일 뿐이다.

문명과 문화는 거추장스러운 장식이다. 물질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신에서도 역시 인간은 고상한 존재가 될 수 없다. 깨달음은 육체적 물질적인 변형 추구하는 것이 아님과 마찬가지로 정신에서 어떤 변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천권의 책을 읽고 만가지 격식을 차리며 세련된 문화를 즐긴대도 가치없다. 교양이나 문화나 정신의 하드디스크에 쓸데없는 자료를 잔뜩 집어넣고 다니는 것이 깨달음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깨부수는 것이다. 되려 교양과 지식을 버리고 정신을 크게 비우므로서 아기처럼 천진해져야 참되다.

우리는 배워서 안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을. 하나의 단단한 벽이 있다면 거기 1키로의 힘을 가할 때 벽도 역시 1키로의 힘으로 맞서며 10키로의 힘을 가할 때 벽도 역시 10키로의 힘으로 맞받아친다. 신과 인간 사이에서 상보성의 원리가 작동할때 그것이 곧 깨달음이며 부처이다.

깨달음은 더 높은 차원의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러나 육체나 정신에서가 아니어서 세계와의 관계, 신과의 관계에서이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과 같아 신 앞에서 단독자로, 세상 앞에서 천상천하유아독존으로 더 높은 레벨의 싸움을 걸어갈 때 세상도, 신도 더 높은 레벨의 싸움으로 맞서온다.

더 높은 차원의 존재가 되자. 물질에서도 정신에서도 더 높은 차원의 존재가 될 수없다. 물질이 높아지면 돼지의 肥滿일 뿐이며 정신이 높아지면 속물의 虛榮일 뿐이다. 몸이 살쪄서 안되듯 정신이 살쪄서도 안된다. 몸은 다이어트를 해야하고 정신 또한 비워야 한다. 관계만이 진정하다. 영은 신과의 관계다.

17. [정신의 다이어트]

건강을 추구한다면서 비만에 이르는 우를 범하고 있지 않은가? 깨달음을 구한다면서 정신의 비만에 이르고 있지 아니한가? 경고한다. 정신 또한 다이어트를 해야한다. 깨달음은 넉넉하여 마음의 양식이 아니라 가난하여 마음의 다이어트다.

깨달음을 구한다면서 지적 허영에 빠져 넌센스게임을 즐기고 있지 않은가? 몸이 가벼워야 하듯이 머리도 가벼워야 한다. 양반의 매너보다도 농부의 소탈함이 요구된다. 세련된 예절보다 "일없수" 퉁명스런 한마디가 그립다.

깨달음은 인간이 더 높은 차원의 존재가 되자는 것이다. 몸이든 정신이든 무거워서는 높이 오를수 없다. 몸도 정신도 높아지지 않는다. 높아지는 것은 관계다. 완전한 인격은 완전한 정신이 아니라 완전한 관계다.

머리속에 만권의 책을 넣어두고 있다한들 세상과 단절하여서 아무것도 아니다. 최고의 지혜와 교양을 소유한들 신과 단절하여서 아무것도 아니다. 혹은 직장에서 간부로 승진하거나 어떤 조직에서 우두머리가 되거나 간에 인간이 더 높은 단계로 올라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신도 육체도 아니다. 관계다.

높이 올라갈수록 단순해진다. 더 적은 일을 하게 된다. 말단은 하루에 백번 판단해야 하고 중견은 열번 판단하고 보스는 한가지만 판단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언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앞서 관계를 맺는 것이다. 단 하나의 판단만을 요구하도록 최고레벨의 관계를 맺는 것이다.

단 하나의 판단밖에 필요하지 않으므로 지식이나 교양은 필요없다. 정신이나 물질을 드높이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드높이는 것이므로 하여 필요한 것은 진실과 순수 뿐이다. 깨달음은 자기정신이 세상과의 관계를 트는데 있어 단 한번의 판단, 단 한번의 만남, 단 한번의 포옹만으로 그 모든 것을 갈음할수 있을 만치 가장 높은 레벨의 관계를 맺는 것이다.

신이 인간의 인사를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인간이 여러번 말하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말을 바꾸기 때문이다. 말이 많아선 안된다. 변덕스러워서 안된다. 그것은 국가간의 정상회담 같아야 한다. 단 한번의 악수로 모든 것이 결정되어야 한다.

깨달음은 만남이며 그것은 최고레벨에서의 만남이다. "예스냐 노냐" 단 하나의 판단만을 요구하도록 극도로 단순화된 경지, 정점에서의 만남이다. 인간은 드 높은 차원의 존재가 될 수 있다. 높아지는 것은 관계이며 최고레벨에서의 만남은 신의 전부와의 만남이다. 이때 작용, 반작용의 상보성 원리에 따라 신과 인간은 50 대 50으로 하나가 된다.

18. [트루먼 쇼]

극장가에 짐 캐리의 트루먼 쇼가 붙었다. 트루먼 버뱅크라는 사람이 있다. 자기도 모르게 인기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 방영되고 있다. 애인도 어머니도 친구도 그 모든 사람이 사실은 탤런트들이며 몰래카메라의 각본에 따라 의도적으로 접근하여 연기하고 있다.

시헤이븐이라는 인공낙원이 있고 버뱅크는 그곳을 떠난적이 없다. 사실은 세계에서 가장 큰 스튜디오다. 공중에도 벽에도 땅에도 몰래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다. 자기만 모르고 있는데 모두들 그 드라마를 즐기고 있다. 어느날 우연히 공중에서 떨어진 카메라부품을 발견하고 비밀을 알아채게 된다.

만약 그대가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라면 어떻게 할것인가? 내 인생이 통째로 누군가의 조작에 의한 각본이었다니. 그 비밀을 알아챈 순간 나는 울었다. 너무 우스워서 울었다. 화낼 일은 아니지 않은가? 단지 서러웠을 뿐이다. 그 순간이 중요하다. 그대는 최대한 뻔뻔스러워져야 한다. 시치미를 뚝떼고 마치 아무 일없다는 듯이 태연할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다시 연기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모르고 연기해왔다면 이제 알고하는 연기인데 신나는 일이 아닌가? 먼저 알아챈 쪽이 이기는 게임이다. 게임의 주도권을 이쪽으로 가져온다.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거대한 전도이다. 관객과 주인공의 관계는 역전된다. 그때부터는 관객이 배우가 되고 내가 오히려 관객이 된다. 재미있지 않은가? 지금까지는 그들이 나를 엿보고 있었는데 이제부터는 내가 그들을 훔쳐본다.

깨달음은 삶이 실은 연기였음을 알아챔이다. 육체의 변태도 정신이 변이도 아니다. 변형되는 것은 관계이다. 지금까지는 내가 몰래카메라로 찍히었는데 이제는 이경규가 몰래카메라의 대상이 된다. 멋진 일이 아닌가? 그대라면 어이할 것인가? 비밀을 알아챈 순간 이경규의 멱살을 잡고 화를 내면서 따질 것인가?

나라면 시치미를 뚝 떼고 연기한다. 이경규를 몰카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연출자도 관객도 내손안에 들어온다. 내가 주도권을 잡아버리면 거꾸로 관객이 배우가 된다. 내가 관객이 되어 그들이 허둥대는 모습을 느긋하게 지켜본다. 나는 그들을 깜짝 놀라게 해줄수 있다. 그들은 내가 그네들이 의도하는 대로 움직여가지 않는데 대해 황당해할 것이다. 정말이지 신나는 게임이다.

그렇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육체적인 변태도 정신적인 변형도 일어나지 않는다. 달라지는 것은 관객과 배우의 관계이다. 지금까지 나는 수동적 종속적 위치에 있었다. 이젠 내가 주도권을 잡는다. 모든 것은 내 손바닥 안에 있다. 내가 연출자이며 내가 극장주인이다. 그것은 거대한 전복이다.

깨달음은 신과 인간, 세상과 인간의 관계, 우주의 나의 대립구조를 역전하는 데 있다. 신과 인간의 관계를 주인과 노예의 낮은 관계에서 친구 대 친구의 높은 관계로 다시 만나게 한다.

19. [첫번째 이야기]

이쯤에서 나의 이야기 첫 번째 장을 마칠까 한다. 명상과 수행 그리고 깨달음에 대하여 대략적인 개괄이다. 나는 종래의 명상과는 다른 방식의 명상법을 알고 있다. 석가나 혹은 선사들의 명상법과 본질에서 같으나 정교함에서 다르다.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법 보면 보이는데 보지 못하는 것은 볼수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무릇 자기가 깨달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깨달은 이의 입장에서 볼수 없으니 따라서 깨달을수 없다. 그대가 정녕 깨닫고자 한다면 먼저 깨달은 이의 관점, 신이 세상을 보는 관점에서 보는 버릇을 가져야만 한다.

자기가 신이라는데 대해 확신을 가져야 한다. 부처는 완전한 인격에 도달하자는 논의이며 자기가 신이라고 믿는 사람의 행동은 완전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대가 이미 깨달았으므로 신이 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음을 납득시키고자 한다.

그대는 절대로 신이 될수 없지만 신은 얼마든지 그대가 될수 있다. 그대가 마음에 순수를 담고 진실로서 신과 인사할 때 신이 그대 내부로 침투해 와 그대는 이미 부처이며 그대의 마음은 신의 마음이니 곧 신이라 여긴대서 신이 그대에게 상표권침해로 소송을 제기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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