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이란
read 5730 vote 0 2003.02.24 (17:24:58)

그대는 숙녀인가?

여자와 남자는 친구가 될 수 없는가? 여기에 두가지 대답이 있다. 없다고 말하는 경우와 있다고 답하는 경우다. 없다고 답하면 논의할 가치도 없다. 그러므로 무시해야 한다. 우리는 먼저 합의해야 한다. 남자와 여자는 친구가 될 수 있다.

물론 어려울 것이다. 다만 1퍼센트라도 가능한 경우가 있을 것이니 그 경우만 논의하기로 하자. 그것만이 역사가 진보하는 방향과 일치하니까.

사회가 발달하여 인간이 생존의 부담에서 자유로와졌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이라는 이상한 연극을 하는 이유는 얼마간 생존의 부담 때문이다. 생존의 부담에서 벗어나자 결혼이라는 요상한 연극을 할 이유가 상당부분 감소했다. 그 감소한 비례만큼 노처녀와 노총각이 늘어났다.

봉건시대에는 독신은 생존의 위협을 당하곤 했다. 과부와 고아는 사회의 우선적인 보호대상이었다. 21세기에는 그렇지 않다. 결혼을 안하는 동포들이 늘어남에 따라 인류는 또다른 생존방식과 문화를 고안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것은 변화이며 그 변화는 역사가 진보하는 방향으로의 변화이다. 우리는 이 문제에 진지하게 접근해야 한다. 진지하기 위해서 역사를 챔임져야 할 상위 1프로를 대상으로 논의해야 한다.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99프로는 일단 논외로 해야한다.

요즘 압구정동이나 명동의 거리에서 만나는 처녀들이 지나치게 화장이 진한 것은 국제망신이지만 그건 어린 백성이 차마 살아보겠다고 하는 짓이니 일단 스킵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고급문화 쪽으로 옮겨와서 우선 서점가를 들러본다면.

페미니즘 색채로 무장하고 여성들에게 용기를 붇돋워준다는 자서전들 있다. 내용은 대개 『여자도 할 수 있다. 나는 이렇게 성공했다』는 건데 하나같이 화장을 진하게 하고 예쁘장한 얼굴을 표지에 실었다. 얼른봐서는 여성잡지인줄로만 알겠다.

『우리 이제 나를 위해 살자』 45세 한국 최고 노래교실 스타 문인숙여사.
『여자가 변해야 세상이 변한다』정덕희교수의 성공메시지.

이런 따위가 눈에 띈다. 이런 자서전류에서 강조하는 내용은 하나같이 여자는 예쁘지 않아도 되지만 나는 제법 예쁘다. 이런거다. 웃긴다.

이런 때 인환의 목마와 숙녀 한구절이 생각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3류잡지의 표지처럼 통속적이다. 거기에 교양도 예지도 멋도 아취도 없다. 동네 고샅에서 따먹은 딱지 자랑하는 꼬맹이 같다.

여기서 통속적이란 표현은 답이 안나오는 하위 70퍼센트에 대해 논하는 말이다. 역사는 대책이 있는 상위 1프로가 이끌어가게 마련이다. 남보다 한 발 앞서가고 남보다 한걸음 멀리보는 잘난 그들을 잡고 시비하기로 하자.

명동이나, 압구정동이나, 남포동이나, 광복동이나, 동성로나, 충장로에서 만나는 그녀들, 그들의 속되고 소박한 행복을 질투하지는 말자. 내버려 둬라. 어차피 답이 안나오는 인생들이 아닌가? 난이도를 높여 보기로 하자.

임어당이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나와 논할수 있는 여성은 고사하고라도 이야기를 곧잘 들을줄 알고 또 얌전하고 생각이 깊은 얼굴을 하고 있는』 라고 말했을 때 임어당은 왜 『얌전하고 생각이 깊은 여자』가 아니라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여자』라고 했을까?

왜냐하면 그런 여자는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유사이래 생각이 깊은 여자가 존재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겨우 『생각이 있는 얼굴을 한 여자』로 만족하려는 것이다.

뭐 아무런 생각이 없더라도 생각이 있는 표정을 지을 줄 안다면 숙녀다. 여자가 아닌 숙녀에 대해 논하자는 거다. 숙녀란 무엇인가? 임어당의 표현을 빌면 『곧잘 말하여 담화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제법 질문 몇 꼭지를 던져 남자로 하여금 담화하게 하는데 성공하는 여자』다. 들어줄 귀는 있는 여자라면 숙녀다.

말을 잘해야 하는건 남자다. 여자는 적어도 질문을 던질 줄은 알아야 한다. 그것만으로 담화가 된다. 남자와 여자가 친구가 안되는 것은 -『여기서 친구란 친구사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기투합 할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부부간에도 또 친구간에도 마찬가지다. 의기투합할 수 있는가이다』 - 담화가 안되기 때문이다.

부부간에 애잔한 사랑이 있다해도 의기투합이 없으면 가짜다. 생식본능을 뛰어넘는 그 무언가 말이다. 담화가 되는, 비밀의 공유가 되는, 의기투합이 되는 그런거 말이다. 남자끼리는 가능한데 남녀간에는 잘 안된다. 여자가 숙녀가 아니기 때문이다. 먼저 그대 자신에게 자문하라. 여자여! 그대는 숙녀인가? 들을 귀는 갖추었는가?

남자는 어떤 계획을 가진다. 의식이 있는거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 계획을 함께 한다는 거다. 그러나 여자는 원래 아무런 계획이 없다. 차라리 힐러리가 낫다. 그녀에게는 계획이 있다. 그렇다면 그녀는 숙녀다.

남자가 여자에게 접근하는 것은 뭔가 계획을 꾸며보려는 본능이기 쉽다. 남자가 여자로부터 실망하는 것은 더이상 진도가 안나가기 때문이다. 그녀를 만나서 거창한 무언가를 도모할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막상 만나보니 뭐 더 이상 나오는 것이 없다면 남자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여자는 그걸 모른다.

사랑도 남자에게는 하나의 계획일 수 있다. 여자에게는 보험일 뿐이다. 결혼하면 남자가 달라지는 것은 계획이 계획단계에서 막혀버리기 때문이다. 골목 아이들의 본부놀이다. 또래들은 일단 본부를 지어놓으면 별거별거 다 할거 같은데 뒷동산에 본부를 지어놓고는 더는 할 놀이가 없다.

남자가 여자에게 실망하는 것은 여자의 무계획에 대한 실망이기도 하고 자신의 무설계에 대한 실망이기도 하다.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담화가 되어야 하고 담화가 되기 위해서는 여자에게도 뭔가 의기투합이 있어야 한다.

공동목표, 공동선, 정의, 사회적 규범, 진리와 깨달음에 대한 의기투합이 있어야 한다. 여자들은 그런걸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도원결의가 안되는 것이다. 남자가 남자를 믿는 것은 그리고 친구가 되는 것은 의기투합하기 때문이다.

성격도 취미도 다르지만 공동선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남자는 의기투합한다. 나는 이 사이버공간에서 몇몇 사람을 만났다. 그 중 몇몇과는 인생의 항로가 다르고 취미도 생각도 다르지만 의기투합이 되더라.

거기서 느끼는 것은 깊은 정이고 참다운 기분이다. 작은 이해관계를 논하는 약은 생각을 떠나 우주와 신과 진리의 편에 서므로서 서로간의 작은 섭섭함들을, 작은 부딪힘들을 그냥 털어버리는 허허로움에서 나오는 자유스러운 기분이다.

여자는 남자와 만나면 뭔가 우스개 얘기라도 해야한다고 믿는다. 본전을 뽑는다. 즐거워야 한다고, 유익해야 한다고 믿는다. 남자는 의가 통하는가를 판단한다. 여자가 구하는 것은 현재이며 남자가 구하는 것은 미래이다.

남자가 여자를 떠나는 것은 거기에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미래가 없는 것은 남자의 설계 때문이기도 하고 여자의 계획 때문이기도 하지만 남자끼리 친구가 되는 것은 현재에 유익하기 때문이 아니고 먼 미래에 언제라도 다시 만나게 될거같은 느낌 때문이다.

그대가 홀로 인적이 드문 높은 산에 올랐는데 산 정상에서 한 사람을 만났다면 지위와 학벌과 성격을 물론하고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항로를 가지고 있다는 것, 같은 편에 선다는 것, 같은 길을 간다는 것이 중요하다.

*** 여자가 생각이 없다는 말은 실제로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그러한 측면에서 이 게시판의 여성 여러분에게 시비를 걸어본다는 기분으로 ***



그대는 신사인가?

『그대는 숙녀인가?』 하고 따졌으니 또 『그러는 너는 잘나서 신사인가?』 하고 힐난할 법 하다. 도무지 뭐가 신사인지 따져보기로 하자.

숙녀 혹은 신사의 개념은 성모숭배신앙과 기사도의 서구적 전통에서 유래한 바 우리 정서와 좀 안맞다. 내가 주문하는 숙녀, 신사는 『왼쪽에서 걷는 숙녀는 숙녀가 아니고』하는 서구의 풍습을 배제하고 우리네 옛 선비, 혹은 한량의 개념을 도입하면서 무엇보다 이 시대와 역사가 요구하는 가치에 대어 볼 일이다.

선비는 좀 노땅이고 한량은 좀 난잡하다마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건 그 시대의 모럴이 있는 법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와 의가 통하는 사람이다. 의가 통한다는 것은 사회에서 추구하는 공동선이 일치한다는 말이다. 정의감이나 윤리의식이나 진리에 대한. 결국은 모럴이다. 과연 그대에게 모럴이 있는가?

우리는 서로 다른 길을 가지만 그 사람과는 십년 후에나 혹은 이십년 후에라도 우연히 길에서 다시 마주칠 법하다. 그것은 느낌이다. 나는 산을 좋아한다. 그도 산을 좋아한다. 그렇다면 몇십년 후의 어느날 우연히 같은 산에서 만나지 말라는 법 없다. 좋아하는 것이 같으면 의가 통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모럴이 그 개념자체가 여자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여자가 무언가 좋아한다는 것은 대개 현재에 유익한 어떤 것이다. 남자가 어떤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그런 유익함을 떠나 사회적 정의감, 공분, 의리 이런거다.

별로 질이 좋은 녀석은 아닌데 자꾸만 마주치는 녀석이 있다. 만화건 소설이건 남자는 그렇게 마주침으로 하여 정이 드는 법이다. 마주치는 것은 내가 즐겨찾는 데를 녀석도 즐겨찾기 때문이다.

꽤 질이 좋은 사람 같지만 행여나 손해되는 일이 생길까봐 단단히 대비하는 사람이 있다. 사후의 여파를 충분히 고려한 발언만 하는 자와는 의가 통하지 않는다. 막힌다. 벽이 느껴진다. 또 장대(張岱)가 말한 『흠결이 없는 자에게서는 깊은 정도 참다운 기분도 느낄수 없다』하는 뜻이겠다.

모럴은 어떤 것인가? 좁게 해석하여 윤리 도덕으로 치부하지는 말자. 넓은 의미로의 사회의식, 시민의식이다.

1. 자유 --- 초월적이어야 한다. 얽매이지 말라.
2. 믿음 --- 낙관적이어야 한다. 대비하지 말라.
3. 진보 --- 참여적이어야 한다. 배회하지 말라.
4. 표정 --- 관조적이어야 한다. 울지 말라.
5. 미학 --- 존엄적이여야 한다. 비굴하지 말라.

이것은 시대의 모럴로서 곧 신사의 자격시험이다. 이러한 태도를 가졌다면 그대는 신사일수 있다. 물론 기준은 순전히 내가 임의로 정한다.

자유가 없는 자 하고는 아무 말도 할수 없다. 깊은 정을 위해서는 목에 칼날이 들어오지 않는 다음에야 무슨 짓이든 가능해야 한다. 뭐뭐 때문에, 혹은 뭐뭐 해서 하고 항상 이유가 있는 자하고는 마주치기도 싫다. 자유롭다는 것은 이유를 가지지 않기다.

믿음이 없는 자는 신의 고민을 대신하여 잔머리를 굴리는 자다. 믿음이란 자신의 꾀보다는 역사와 신에게 맞기는 것이다. 인간이 겪는 모든 일이 인간의 판단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겨우 재주를 부려 불리함을 유리함으로 바꾸어 놓을수 있지만 근본 그런 모든 기회는 신이 주는 것이다.

진보를 믿지 않는 자는 적이다. 참여하지 않고 뒤에서 구시렁거리는 자는 자기만 아는 좁은 자다. 그런 자와는 상종을 안하는 것이 신사다. 진보란 이익보다 대의와 명분과 공분을 먼저 생각하는 것, 사회와 인류와 신을 생각하는 것이다.

표정이 쥐와 같은 자는 실제로 쥐의 후손이다. 오랜 골상학 연구의 결론을 말한다면 그 사람의 상이 좋지 않으면 상종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눈을 보면 안다. 생각하고 움직이는지 아니면 움직이기 위해 생각하는지.

미학을 모른다는 것은 멋을 모른다는 것이다. 미학은 인격적 존엄이다. 미학이 없으면 인간이 비굴해진다. 인간의 아름다움은, 인간의 멋은 정신의 고결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내가 싫어하는 인간은, 그리하여 신사가 못되는 인간은 한마디로 잡다한 이유가 많은 인간이다. 그들에게는 세상의 질서와 규칙과 법칙이 다 이유가 된다. 그리고 결국에 가서는 그게 다 돈과 권력으로 연결된다.

마지막에 가서는 항상 돈에 부딪히는 것이다. 인간이 돈과 권력을 완전히 떠나면 어떠한 제도도 법칙도 인간 위에 위치할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무엇이 신사인가, 신 앞에서 자유로운 인간이다.』

그들은 신을 믿기 때문에 자유롭다. 자유로우므로 세속적인 피폐함을 벗어나 멋을 아는 것이다. 그 멋은 행동으로 표정으로 사회적 참여로 역사에 대한 근원적 낙관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나는 숙녀를 사랑한다.

세상에 좋은 사람은 많다. 그러나 내게 좋은 사람은 많지 않다. 내게 맞는, 내게 좋은 사람을 찾기 보다 먼저 나 자신이 먼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빠르겠다. 좋은 사람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좋은 사람을 찾으려 들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보다 나은 사람을 찾아볼 일이다. 좋다는 것과 낫다는 것을 구분하자는 것이니 또한 주목해보자.

논하려는 것은 좋은 여자가 아닌 나은 여자다. 좋은 여자는 내 주관적 판단으로 나 자신에게 좋은 여자이고 나은 여자는 나와 무관하게 이 세상을 위하여 유익한 여자이다. 또는 남자에게서도 마찬가지이지겠다. 세상을 위하여 좋은 남자가 나은 남자다.

사랑스런 여자는 좋은 여자일 뿐 나은 여자는 아니다. 예쁘고, 귀엽고, 정답고, 사랑스럽고, 그런 관념을 떠나 더 나은 사람을 생각해보자. 그것이 숙녀를 논함이다. 물론 숙녀의 기준은 내가 임의로 정하는 거다.

남자에게 자유와 신뢰와 진보와 표정과 미학을 주문하였으니 여자에게도 마찬가지가 주문되어야 하리라. 본질에서 인간은 남자나 여자나 같으니까. 여자에게라면 나는 자유와 신뢰보다 표정과 미학을 먼저 요구한다. 같은 남자끼리라면 쉽게 접근할수 있지만 여자라면 접근 자체가 문제가 되기 때문에 순서가 바뀌는 것이다.

그것은 남녀간의 성 역할의 차이다. 그 역할이 봉건적 관점에서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혀 부정할수도 없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명백히 성 역할이 다르다. 이점 페미니즘을 논외로 하고 인정되어야 한다.

숙녀의 자격은 이렇다.
1. 미학 --- 세련되어야 한다. 우둔하지 말라.
2. 표정 --- 우아해야 한다. 천박하지 말라.
3. 진보 --- 동반해야 한다. 분별하지 말라.
4. 신뢰 --- 포용해야 한다. 일희일비 하지마라.
5. 자유 --- 발랄해야 한다. 집착하지 말라.

미학이다. 세련됨은 뭐 천하게 유행을 쫓아다니는 그런 따위를 말하는게 아니라 지적인 세련됨을 의미한다. 생각을 안해서 고상하기가 불능이라면 대신 눈치라도 발달해야 한다. 고상하지는 못해도 고상한 것을 알아채는 감각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표정이다. 남자도 마찬가지지만 사고의 수준이 눈빛에서, 행동거지에서, 말하는데서 다 드러나버린다. 고상한 여자가 따로있는 것이 아니고 표정연출이 고상하면 고상한거다.

말이 입에 붙어서 나오는 여자는 밥맛이다. 여자들이 말을 잘하는건 생각을 덜하기 때문이다. 생각이 깊을 수록 말하는 속도는 느려진다. 조건반사적으로 말하는 것은 최악이다. 『흥~!』 하고 콧방귀를 뀌는 버릇이 있는 여자도 있다. 남자라면 생각을 한바퀴 굴리는 음흉함이 있는데 비해 여자들은 그것이 표정으로 금방 나타나버리는 거다. 여성은 표정에서, 몸짓에서, 행동거지에서 다 들켜버린다. 우아하다는 것은 말하자면 좀 속이는거다.

진보다. 보수적인 여자. 조선시대의 관념을 가진 꽉막힌 여자는 말할 필요도 없다. 동반하려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남자가 하는 일은 몰라도 된다는 부부유별로 안된다. 세상에 대한 고민을 공유하지 않으면 안된다.

신뢰다. 여자들은 흔히 남자들이 추근댄다고 말하지만 이는 보이는 부분만 평가하려는 태도이다. 남자라면 상대방의 태도에서 그 다음과 그 다음다음을 읽는다. 남자가 접근하는 것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원하는 것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경험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그 상대방에 대한 태도가 아니라 그 인생자체에 대한 태도이기 쉽다.

자유다. 문제가 있으면 그걸 비껴갈 수도 있고 피해갈수도, 돌아갈수도 있는 법인데 여자의 경우 홧병이나도록 인내하거나 깨지거나 둘 중에 하나다. 답이 없다. 고부간의 갈등에서 부터 시작해서 여자는 문제가 생기면 결코 비켜가거나 우회하지 못한다.

숙녀가 필요하다. 숙녀란 정숙한 여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좋은 여자가 아닌 나은 여자다. 남자에게 유익한 여자가 아닌 이 세상이 굴러가는 편에 서 있는 여자다.

*** 여자가 생각이 없다는 표현은 굳이 시비를 걸기로 하면 그렇게도 말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해주기를 주문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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