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이란
read 6327 vote 0 2009.01.02 (10:50:12)

 

사랑을 깨달음




다섯가지 갈피

깨달음 

만남

우화

하나되기

맞물리기

나아가기

소통의 체계

함께 서기

소통하기

열어가기

존재를 깨닫기

인생을 깨닫기

공(空)을 깨닫기

마음을 깨닫기

실존을 깨닫기

가치를 깨닫기

심(心)을 깨닫기

날을 깨닫기

성(聖)을 깨닫기

소통을 깨닫기  

이심전심을 깨닫기

깨달음의 구조를 깨닫기

인식의 진화를 깨닫기

관(觀)을 깨닫기

자아를 깨닫기

네가 내임을 깨닫기

영성을 깨닫기

카리스마를 깨닫기

영혼을 깨닫기

평상심을 깨닫기

자유를 깨닫기

초극을 깨닫기

사랑을 깨닫기

닮음을 깨닫기

미학을 깨달음

멋을 깨달음

호연지기를 깨달음

언어를 깨달음

나는 무엇을 깨달았는가?

관계망의 세계관을 깨달음

맥락을 깨달음

언어의 쓰임새를 깨달음



(부록 - 나무 이야기) 









다섯가지 갈피


깨달음은 영성의 혁명이다. 인간에게는 다섯가지 능력이 있다. 본능과 감성과 지성과 이성과 영성이 그것이다. 깨달음은 영성의 영역에 속한다.


본능이 자기보호 능력이면 감성은 자기표현 능력이다. 지성이 학습능력이면 이성은 가치판단 능력이고 영성은 의사소통 능력이다.


본능의 목적이 생존이면 감성의 목적은 생활이다. 지성의 목적은 진보라면 이성의 목적은 완성이고 영성의 목적은 전파다. 전파하기 위해 소통한다.


본능은 타고나고 감성은 훈련된다. 지성은 학문에서 닦고 이성은 철학에서 닦는다. 영성의 계발은 깨달음을 통해 가능하다.


소통을 위해서는 자기통제가 필요하고 세상과의 교감이 필요하다. 자기통제로 얻는 것은 자유다. 세상과의 교감으로 얻는 것은 사랑이다.


깨달음은 나와 너 사이에 있다. 자유가 나와 너 사이에 막힌 것을 뚫어 소통하게 하고 사랑이 너와 나 사이에 끊어진 것을 이어 소통하게 한다.


자유를 통해 나의 깨달음은 완성되고 사랑을 통해 너의 깨달음은 결실을 맺는다. 그대에게는 사랑할 자유가 있다. 그러므로 깨달아야 한다.



깨달음 

깨달음이란 맞물려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세상은 크게 맞물려 있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서로 긴밀하게 맞물려서 관계를 맺고 있다. 


밤과 낮이 서로 맞물려 하루를 이루고, 암컷과 수컷이 서로 맞물려 한 둥지를 이루고, 하늘과 땅이 서로 맞물려 한 세상을 이룬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각자 자기 짝을 가지며 더불어 더 큰 하나의 세계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서로는 만나야 한다. 만나서 관계맺기에 성공해야 한다.


칼은 도마와 만나 한 그릇의 요리를 이루고, 연필은 종이를 만나 한 자(字)의 글씨를 이루고, 산은 강과 만나 한 누리의 자연을 이룬다. 


존재는 그렇게 스스로를 완성해 간다. 처음은 불완전 하지만 서로 만나고 맞물려서 관계를 맺고 소통함으로써 마침내 완성될 수 있다.



만남


깨달음은 인생을 깨닫는 것이다. 인생은 커다란 만남이다. 그 만남의 의미와, 가치와, 미학과, 소통을 깨닫는 것이다. 


이를 앎의 지식과 구분하여 깨달음이라 일컫는 뜻은 의미와 가치와 미학과 소통은 현실에서의 경험과 실천으로만 터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사이에 있다. 지식은 내 안에 축적된다. 깨달음은 나와 너 사이에 소통한다. 소통하기 위해서는 나를 나를 넘어 너를 만나야 한다.


나를 넘어섬이 자유라면 너를 만남은 사랑이다. 나를 넘어서기 위하여 그리고 너를 만나기 위하여 학문적 지식을 뛰어넘는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깨달음은 상대성의 세계다. 상대가 있다. 그 상대를 만나야 한다. 의미와 가치와 미학과 소통은 현장에서의 구체적인 만남에 의하여 얻어진다.


자동차의 핸들을 한 번도 잡아보지 않은 사람이 운전을 할줄 안다고 말한다면 거짓이다. 인식의 영역에는 반드시 경험을 필요로 하는 부분이 있다.


모든 것을 경험할 수는 없다. 세상에 죽음을 경험한 사람은 아무도 없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경험을 대체하기 위하여 깨달음이 필요하다.



우화


철학은 우화(寓話)다. 깨달음은 우화와 같다. 우화는 빗대어 말한다. 빗대어 말한다는 것은 다른 곳에서의 경험을 빌려쓴다는 것이다.


의미와 가치와 미학은 만나서 소통할 때 드러난다. 소통하지 않을 때 의미와 가치는 모습을 숨기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쓰이지 않는 칼은 쇠붙이에 불과하고 읽히지 않는 책은 쓰레기에 불과하다. 만나지 않고 소통하지 않을 때 존재는 의미를 잃고 가치를 잃는다.


만남의 형식은 하나다. 붓이 화가를 만남이나 바이얼린이 연주자를 만남이나 같다. 그러므로 하나를 온전히 만나면 세상을 모두 만날 수 있다.


진리의 특성은 보편성이다. 보편성은 막히지 않고 두루 통하는 성질이다. 소통은 통한다. 통하므로 이곳에서 얻은 경험을 저곳에 응용할 수 있다.


자전거나 오토바이에 익숙한 사람은 자동차 운전을 쉽게 배운다. 자전거와의 만남이나 자동차와의 만남이나 세상 모든 만남의 형식은 같기 때문이다.


이곳에서의 경험으로 저곳에서도 통함이 깨달음이다. 그러한 호환(互換)을 가능케 하는 근거는? 맞물려 있음이다. 그것은 구조다.


세상은 구조다. 구조는 부분과 전체가 맞물려 있음이다. 세상은 크게 맞물려 있다. 존재는 만남이고 만남은 곧 맞물려 있음에 의해 성립한다.


맞물려 있으므로 통한다. 부분과 전체가 소통할 때 오르가즘을 느낀다. 거기에 전율함이 있다. 울림과 떨림이 전파된다. 공명함이 있다.



하나되기


만남에는 기쁨이 있다. 만나고 맞물려서 하나됨은 아름답다. 하나되어 소통함은 즐겁다. 깨달음에는 기쁨과 아름다움과 즐거움이 있다.


이는 학문적 지식에 없는 것이다. 철학은 만남과 맞물림과 하나됨과 소통의 원리에 대한 이해다. 깨달음은 소통 그 자체다.


지식은 쌓이는 것이고 깨달음은 통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을 잘 안다는 것과 어떤 사람과 잘 통한다는 것은 다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을지라도 통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만남이 없고 통함이 없다면 죽은 지식이다. 거기에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다.


서로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의외로 통하는 친구가 있다. 연인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여자와 남자는 서로를 잘 모른다. 그러나 단번에 통한다.


맞물림이 있기 때문이다. 친구와는 역할을 통해 맞물릴 수 있고 연인과는 사랑을 통해 맞물릴 수 있다.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들어갈 때 통한다.


존재는 만나고 맞물려 하나가 된다. 그럴 때 아름답다. 꽃은 나비를 만나 아름다움을 더하고 갈대숲은 바람을 만나 아름다움을 더한다. 



맞물리기


존재는 크게 맞물려 있다. 맞물리는 것은 요(凹)와 철(凸)의 톱나바퀴다. 요철(凹凸)은 서로 닮아있다. 그러므로 세상 모든 구조는 같다.


구조의 동일성이 패턴이다. 만유는 패턴이다. 패턴으로 알 수 있다. 눈앞에 닥친 사실이 과거의 경험과 닮았음을 알아챌 때 무릎을 치고 깨닫는다.


존재는 구조다. 구조로 하여 세상은 크게 맞물려 있고 그러한 맞물림으로 해서 의미와 가치가 배달되고 미(美)는 이루어진다. 소통한다.

미(美)는 통한다. 한국에서 아름다운 것은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아름답다. 일본에서도 아름답고 중국에서도 아름답고 프랑스에서도 아름답다.


미(美)는 존재의 완전성에서 얻어진다. 모든 존재는 자끼 짝을 가진다. 존재가 짝을 찾아 더불어 함께 설 때 비로소 완전해진다.


칼을 도마와 짝이고 연필은 종이와 짝이고 잔은 음료와 짝이다. 바이얼린은 연주자와 짝이고 붓은 화가와 짝이다.


짝과 만나고 맞물려서 하나될 때 완전해지며 완전에 도달할 때 찬연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그 아름다움의 빛에 의해 소통한다.


아름답지 않으면 통하지 않는다. 그리지 못한 그림은 관람객을 감동시킬 수 없고 실패한 연주는 청중을 감동시킬 수 없다. 의미도 가치도 통하지 않는다.



나아가기


나무가 부분이면 숲이 전체다. 숲이 부분이면 산이 전체다. 산이 부분이면 자연이 전체다. 자연이 부분이면 세상이 전체다.


우리는 세상의 작은 한 귀퉁이 부분을 구성하는 불완전한 존재다. 모든 부분적인 존재는 불완전하다. 심 없는 연필, 날 없는 칼처럼 불완전하다.


불완전한 부분의 존재가 마침내 자기 짝을 찾아 하나되어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더불어 소통할 때 더 큰 완전의 세계로 나아간다.


칼은 도마를 만나 요리의 세계로 나아가고, 연필은 종이를 만나 글씨의 세계로 나아간다. 그렇게 더 큰 세계로 나아갈 때 아름답다.


미(美)의 완전성을 매개로 부분과 전체는 통한다. 그러므로 존재가 미(美)에 이를 때 부분을 앎으로써 곧 전체에 도달할 수 있다. 통달할 수 있다.


세상은 크게 맞물려 있다. 우리는 맞물려 있는 큰 세상의 작은 한 귀퉁이 부분으로 존재한다. 부분의 존재는 불완전하다. 불완전하므로 허무하다.


의미와 가치와 미학과 소통은 조각난 부스러기 같이 불완전한 존재가 톱니처럼 맞물려 스스로를 완성함으로써 더 큰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소통의 체계


수학수업에서는 수학사가 아닌 수학을 배운다. 과학수업에서는 과학사가 아닌 과학을 배운다. 그런데 철학수업에서는 철학 대신에 철학사를 배운다.


공자와 맹자와 석가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배운다 한들 그것은 옛날 사람의 철학일 뿐이다. 그것은 철학의 실패다. 


강단에서 이루어지는 지식 위주 학습에는 철학이 없고 깨달음이 없다. 거기에 소통이 없고, 미학적 완전성이 없고, 가치와 의미의 배달이 없다.


강단의 어떤 학자도 말하지 않았다. 소통을 말하지 않았고 깨달음을 말하지 않았다. 허무와 비참이라는 존재의 진실과 정면으로 대면하지 않았다.


거기에 만남이 없고 맞물림이 없고 함께 섬이 없고 하나됨이 없고 아름다움이 없다. 그러므로 소통이 없고 깨달음도 없다.


깨달음은 깨달음의 체계를 가진다. 깨달음의 체계는 소통의 체계다. 강단의 지식체계와 다르다. 진리와 대면하는 지점이 다르다.


지식이 절대성의 세계라면 깨달음은 상대성의 세계다. 소통은 상대가 있는 게임이다. 그러므로 다른 방법을 사용한다.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함께 서기


의미와 가치를 깨닫는 것이 깨달음이다. 가치는 곧 값이다. 값(cost)이라는 말의 어원에는 ‘같이 선다’는 뜻이 있다. 


의미가 맞물림이면 가치는 함께 섬이다. 수요와 공급은 맞물려 있다. 수요가 증가하면 공급도 증가한다. 둘이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 함께 섬이다.

처음은 물물교환이었다. 값(cost)은 함께(com)+서다(stand)로 물물교환에서 파는 사람의 상품과 사는 사람의 상품을 같이 세우는 것이다.


판매자의 상품이 카트에 쌓이면(stand) 구매자의 화폐는 계산대에 쌓인다. 수요와 공급은 둘이 마주보고 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모든 존재는 서로 정교하게 맞물려 대칭구조를 이루고 있다. 마주보고 대칭되는 한 쌍에서 하나가 일어서면 다른 쪽도 함께 일어선다.


하늘과 땅, 밤과 낮, 산과 강, 여자와 남자처럼 존재는 서로 마주보고 짝 지어 쌍을 이루고 함께 일어선다. 이 원리로 가치는 의미를 배달한다.


그것이 구조다. 구조는 대칭과 평형이다. 대칭이 맞물림이면 평형은 함께 섬이다. 구조와 평형의 원리에 의해 의미가 배달되고 가치가 보존된다.


금광에서 노다지가 쏟아지면 금값이 하락한다. 반대로 시장에서 상품의 생산과 유통이 늘어나면 금의 수요도 함께 상승한다.


금의 가치는 그 사회에 존재하는 자산의 총량과 함께 선다. 사회가 부유해지면 그만큼 금값이 올라가고 사회가 가난해지면 그만큼 금값이 하락한다.


이러한 함께 서기의 원리에 의해 금의 가치는 보존된다. 시장이 존재하는 한 금의 가치는 변함없이 보존되는 것이다. 


천칭저울의 두 접시는 함께 선다. 왼쪽 접시에 1그램이 증가하면 오른쪽 저울도 1그램이 증가해야 한다. 함께 서지 않을 때 평형은 무너진다.


의미가 맞물림이면 가치는 함께 섬이다. 의미는 맞물림에 의해 배달되고 가치는 함께 섬에 의해 보존된다. 이 원리로 세상 모두는 관계를 맺는다.


맞물려 있으므로 하나가 결정되면 다른 하나도 결정된다. 내가 바뀌어야 천하가 바뀐다. 천하가 바뀌려 할 때 잠든 나를 일깨워 불러낸다.


내가 나아갈 때 역사가 진보하고 내가 물러설 때 역사가 퇴보한다. 내가 일어서면 세상이 일어서고 내가 물러서면 세상이 물러선다.


세상과 맞물려 하나의 방향으로 함께 움직인다. 그것이 내 존재의 의미다. 세상과 나는 언제라도 함께 선다. 그것이 내 존재의 가치다.



소통하기


무릇 가치있다는 것은 이렇듯 함께 서 주는 짝이 있다는 것이고, 무릇 의미있다는 함께 설 수 있도록 정교하게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사회를 떠나 고립될 때 의미를 잃는다. 세상과 맞물리지 않고 역사와 맞물리지 않고, 역사의 진보와 함께 호흡하지 않을 때 의미를 잃는다.


세상과 함께 서지 않고 역사와 함께 서지 않을 때 가치를 잃는다. 함께 서는 짝을 잃을 때 존재는 불완전해진다. 그만 아름다움을 잃는다.

  

의미는 가치의 배달이고 가치는 의미의 보존이다. 짝을 찾아 함께 맞물려 있음으로 의미를 획득하고 짝과 함께 섬으로써 가치를 보존한다.


그 방법으로 존재가 스스로를 완성시킬 때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아름다울 때 공명한다. 울림과 떨림이 전파된다. 비로소 소통한다. 


짝을 잃으면, 세상과 맞물리지 못하면, 역사의 진보와 함께 서지 못하면 의미를 잃고 가치를 잃고 불완전해진다. 소통하지 못한다. 허무와 비참 뿐이다.



열어가기


가치의 창조는 소통에 있고, 가치의 완성은 미학에 있고, 가치의 보존은 구조에 있고 가치의 배달은 의미에 있고, 가치의 획득은 존재에 있다.


깨달음은 존재를 깨닫는 것이며, 의미를 깨닫는 것이고, 가치를 깨닫는 것이고, 미학적 완성을 깨닫는 것이고, 소통을 깨닫는 것이다.


존재는 곧 만남이고 의미는 곧 맞물림이며 가치는 곧 함께 섬이고 미학은 곧 어우러져 하나됨이고 소통은 전파하여 새로운 지평을 열어감이다.


● 존재 - 만나기

● 의미 - 맞물리기

● 가치 - 함께서기

● 미학 - 하나되기

● 소통 - 열어가기


앎이 아니라 깨달음이어야 하는 이유는 의미와 가치와 미학은 현실에서 실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전파해야 하기 때문이다. 체험이 아니고 안 된다.


외부에서 주입되어 내부에 축적되는 학습과 다르다. 현장에서 부닥쳐 무수히 깨지고 다시 일어서면서 얻은 체험을 바탕으로 자기 내부에서 각성된다.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오듯이 내 안의 마음과 내 바깥의 환경이 부단한 상호작용을 거쳐 쌍방향적인 소통을 이룸으로써 체득된다.


깨달음의 결실은 사랑이다. 사랑은 창조다. 혼자 창조할 수는 없다. 칼을 도마를 만나 요리를 창조하고 붓은 종이를 만나야 글씨를 창조한다.


열어가기는 전파하기다. 창조하고 전파하여 새로운 지평을 열어감으로써 그 안에서 하나됨과 함께섬과 맞물림과 만남을 모두 담아낸다.



존재를 깨닫기


의미는 배달된다. 우리가 무언가를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것은 이러한 짝짓기의 원리를 활용하여 짝을 지어 배달하는 것이다.


화물을 운반하려면 그 화물을 자동차에 태워야 한다. 화물을 자동차와 짝지어야 한다. 아기를 낳으려면 파트너와 짝을 지어야 한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누군가와 짝지워져 있다. 가족과 국가와 집단의 일원으로 짝지어져 있다. 그러나 인간은 본질에서 버려진 존재다.

  

3살 아기는 신처럼 떠받들어지지만 17살 소년은 심판대에 선다. 운명의 기로에 서서 어쩔 수 없이 선택을 강요당한다.


부모도, 국가도, 조직도, 집단도 등을 돌린다. 더 이상 나를 보호하지 않는다. 질병과 죽음이 다가온다. 소외와 고독과 이별과 상실이 엄습한다.


이런 때 허무를 깨닫고 비참을 깨닫는다. 그 어떤 것도 당신을 온전히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온전히 혼자임을 깨닫게 된다.


그 때가 위기다. 위기 때 깨닫는다. 본래 혼자였음을. 당신을 보호해 줄 것이라 믿었던 그 모두가 허상이었음을. 허무와 비참이 존재의 진실이었음을.


깨달음은 인생을 깨달음이고 인생은 만남이고 만남은 맞섬이고 맞섬은 존재다. 내가 디디고 선 발판과 맞서고 내가 나아갈 길과 맞선다.


내가 만나야 할 파트너와 맞서고 내가 개척해야 할 운명과 맞서고 내가 받아들여야 할 죽음과 맞선다. 이 모든 것들이 모여 나의 존재를 구성한다.


깨달음은 존재를 깨달음이다. 나의 존재는 일생동안 나와 맞서는 모든 것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깨달음이다. 그 허무와 비참을 깨달음이다.



인생을 깨닫기


7살 소년은 친구를 선택하고 17세 소년은 진로를 선택한다. 20살 창년은 직업을 선택하고 30살 청년은 배우자를 선택한다.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동시에 하나를 버리는 것이다. 가치는 곧 선택하고 버림의 가치다. 선택하고 버릴 때 마다 배반하고 배반당한다.


깨달음은 인생을 깨달음이다. 인생을 깨달음은 나를 깨달음이다. 나를 깨달음은 존재를 깨달음이다. 존재를 깨달음은 허무를 깨달음이다.


나의 존재는 가족과 친구와 직장과 재산과 위신과 체면과 추억들로 둘러싸여 있다. 그것들의 맞물림으로 인해 나의 존재는 확인되고 보장된다.


그러나 거짓된다. 독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온전한 나를 찾아야 한다. 그러한 보장은 부모로부터 독립하기 전 까지만이다. 17살이 한계다.


인생을 깨달음은 나의 주위를 둘러싸고 보호해주는 것들의 허무를 깨달음이며 그것은 그 누구도 나의 진정한 보호자가 아님을 깨닫는 것이다.


가족도, 국가도, 사회도, 계급도, 지위도, 자격증도, 배우자도, 돈도, 직업도 당신의 진정한 보호자는 아니다. 본질에서 당신은 버려진 채로 혼자다.


깨달음은 인생, 인생은 나, 나는 존재, 존재는 홀로, 홀로는 허무, 허무는 고립, 고립은 버려짐, 버려짐은 비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비참한 존재이다.


비참은 버려져 있음이며 구원은 비참을 극복함이다. 위기를 벗어나는 방법은 작은 가족과 짝을 지음이 아니라 큰 세상과 짝을 지음이다.


당신이 책임지고 적극적으로 선택해야 한다. 친구를 선택하고 진로를 선택하고 직업을 선택하고 파트너를 선택해야 한다. 선택하여 짝지어야 한다.


선택의 기로에 선다면 누구 편에 설 것인가? 역사의 편에 서고 진보의 편에 서야 한다. 사회의 편에 서고 문명의 편에 서고 신의 편에 서야 한다.



공(空)을 깨닫기


존재는 공(空)하다. 크게 비어 있다. 당신이 믿는 것, 당신이 마음 든든해 하는 것들, 당신이 의지하는 것들, 그 모든 것이 텅 비어 있다.


그러므로 허무하다. 허무의 바다에 표류하는 인생이 비참하다. 그 허무의 끝에서 의미를 만나야 한다. 비참의 끝에서 구원을 찾아야 한다.


의미는 짝 짓기다. 의미는 존재와 존재를 짝 짓는 하이퍼링크다. 의미는 세상과 당신을 잇는 징검다리다.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찾아나서야 한다.


의미는 실천이다. 제 자리에 가만이 앉아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해서 의미가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 번 의미를 얻었다 해서 성공은 아니다. 더 나아가야 한다. 의미에서 가치로, 가치에서 미학으로 미학에서 소통으로 나아가야 한다.


세상은 크게 맞물려 있다. 맞물려 있으므로 짝 지을 수 있다. 어떤 것이 의미가 있느냐는 말은 곧 짝지어질 수 있느냐는 말이다.


의미는 뜻이다. ‘뜻’의 어원은 ‘태운다’는 뜻이다. 마차에 짐을 싣듯이 짝 지어 태우는 것이 ‘뜻’이다. 도마가 칼을 태우고 종이가 연필을 태우듯이.


짝짓기 방법으로 태워가기다. 의미는 그렇게 올라탄다. 도마는 칼을 태워 요리라는 가치를 창조하고 종이는 연필을 태워 글씨라는 가치를 창조한다.


의미(meaning)의 어원은 머금는다는 뜻이다. 우리말 마음 역시 머금는다는 뜻이 있다. 덩어리로 뭉쳐(mass) 머금은 것이 마음(mean)이다.


세상만사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마음먹기는 뜻 머금기다. 어미닭이 알을 품듯이 내 속에 머금어 품는 방법으로 의미를 배달하기다.



마음을 깨닫기


의미는 루트다. 의미는 길이고 도(道)고 방법론이고 접근경로다. 의미는 존재가 서로 이어져 맞물려 있음이다. 맞물려 있으므로 운반할 수 있다.


의미 위에 가치가 있다. 가치는 대칭이다. 대칭은 함께 선다. 하늘과 땅, 앞과 뒤, 좌와 우 처럼 뗄레야 뗄 수 없다. 부부처럼 뗄 수가 없다.


도마와 칼은 뗄 수 없다. 종이와 연필은 뗄 수 없다. 떼어질 때 의미가 죽기 때문이다. 둘은 서로 마주본다. 고개를 돌리고 외면할 때 가치를 잃는다.


도마를 잃은 칼은 쓰임새를 잃는다. 종이와 헤어진 연필은 가치를 잃는다. 바퀴없는 수레, 화살없는 활은 쓰임새를 잃고 가치를 잃는다. 


명품 바이올린도 뛰어난 연주자를 만나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좋은 말도 그 말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기수를 태우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의미가 짝을 찾아 링크를 이어가는 과정이라면, 가치는 마침내 짝이 지워진 것이다. 의미는 가치의 하부구조이고 가치는 의미의 상부구조다. 


존재는 구조와 평형의 존재다. 구조 위에 평형이 있다. 구조가 맞물리기면 평형은 함께 서기다. 의미가 구조면 가치는 평형이다.


의미가 배달되고 가치가 완성되어 개별적 존재가 손을 잡고 함께 서서 하나될 때 아름다움이 얻어진다. 꽃이 나비와 함께 서듯이. 


그것은 미학이다. 미학은 함께 서기의 완성이다. 함께 서서 하나됨이다. 연필은 종이를 만나 글씨로 하나되고 칼은 도마를 만나 요리로 하나된다.


완성되면 하나되고 하나되면 소통한다. 모든 아름다운 것은 소통한다. 이심전심으로 소통한다. 소통하고 전파하여 창조함으로써 새로운 지평을 열어간다.

자녀는 부모를 닮는다. 부모가 창조하였으므로 자손은 부모를 닮아있다. 모든 창조된 것은 닮아있고 모든 완전한 것은 닮아있다.


모든 짝지워진 것은 닮아있다. 모든 맞물려 있는 것은 닮아있다. 요와(凹)와 철(凸)이 닮듯이 기어에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닮아있다.


모든 창조된 것은 신의 완전성과 닮아있다. 부스러기 존재를 극복하고 짝을 찾아 맞물리고 함께 서고 하나되어 소통할 때 닮아있다.



실존을 깨닫기


깨달음은 첫째 인생을 깨닫고 둘째 인생의 의미를 깨닫고 셋째 인생의 가치를 깨닫고 넷째 삶의 미학을 깨닫고 다섯째 세상과의 소통을 깨닫기다.


그리고 창조하기다. 그 창조된 것이 신의 완전성으로부터 비롯된 바 모두 닮아있음을 깨닫기다. 이 모든 과정이 전체로서 하나임을 깨닫기다.


인생은 당신에게 주어진 몫이다. 여행자인 당신은 그렇게 주어진 몫의 액수를 종잣돈으로 얻어 그것을 여비로 삼아 이 세상을 방문하고 있다.


그러나 곧 허무로 반전되고 만다. 열 걸음도 못 가서 당신의 종잣돈은 바닥이 나고 만다. 당신은 더 이상 보호받아야 할 어린아이가 아니다.


무지와 가난과 질병이 당신을 그렇게 만든다. 이별과 죽음과 상실과 고독과 실패가 당신을 허무와 비참의 구렁텅이에 빠뜨리고 만다.


가족과는 나이를 먹을수록 멀어지고 친구와는 배움의 차이만큼 멀어지고 국가와는 당신이 가진 능력의 차이만큼 멀어진다.


당신의 주위를 둘러싸고 보호하던 모든 것이 당신으로부터 멀어진다. 당신은 점점 세상과 무관한 존재가 되어간다.


더운 여름에 함께 나들이할 가족이 업고 서늘한 가을에 낙옆진 오솔길을 함께 걸을 연인이 없다. 계절의 바뀜조차 당신과 무관한 일로 된다.


신문과 TV를 장식하는 그 모든 뉴스가 죽음의 문턱에 선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로 된다. 그러므로 당신이 본래 내버려진 존재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이 실존이다. 인생의 문제가 곧 존재의 문제임을 깨닫기다. 그것이 나의 문제임을 깨닫기다. 나의 자아(自我)의 문제임을 깨닫기다.


인생은 세상과의 관계다. 7살 당신이 처음 소꿉놀이 친구를 선택했을 때 세상과의 관계맺기는 시작되었다.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초발심은 여기서 시작된다. 세상에 아무 것도 온전하지 않다는 사실, 아무도 당신을 보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가 당신이 떠날 때다.


● 존재를 깨닫기 - 만나기(허무를 깨닫고 독립하기)

● 의미를 깨닫기 - 맞물리기(짝을 찾아 길을 이어가기)

● 가치를 깨닫기 - 함께서기(짝을 지어 큰 하나에 이르기)

● 미학을 깨닫기 - 하나되기(더불어 아름다움을 완성하기)

● 소통을 깨닫기 - 열어가기(근원의 닮아있음에 이르기)


인생을 깨닫는다 것은 곧 존재를 깨닫는 것이다. 그것이 실존이다. 나를 깨닫고 나의 자아를 깨닫고 버려져 있음을 깨닫고 허무를 깨닫는 것이다.


너는 나, 나는 너. 소통할 수 있다면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힐 수 있다. 이것이 내가 당신을 유혹하려는 바다. 당신은 이 독배를 마시겠는가?



가치를 깨닫기


가치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를 결정하게 하는 판단기준이다.


더 나은 것을 선택해야 한다. 어떤 것이 나은가? 진위(眞僞) 중에는 진(眞)을 선택해야 하고, 선악(善惡) 중에는 선(善)을 선택해야 한다.


미추(美醜) 중에는 미(美)를 선택해야 하고 자유와 억압 중에는 자유를 선택해야 하고 성속(聖俗) 중에는 성(聖)을 선택해야 한다.


가치(value)의 어원은 바람(wind)과 가깝다. 바람이 불다(blow). 바람이 들어 부풀다(bubble). 바람이 들어 팔팔하다(vivid), 빵빵하다(valid)는 뜻이다.


모두 같은 어원에서 갈라져 나와 각기 진화한 단어들이다. 가치(value)는 팔팔한 것이다. 왜 팔팔할까? 팔팔하게 살아있기 때문이다.


고대의 물물교환에서 죽은 것 보다 살아있는 것이 더 좋은 값을 받았다. 가치는 살아있는 것, 생기있는 것, 팔팔한 것, 빵빵한 것이다.


선택의 기로에 선다면 더 좋은 것을 선택해야 한다. 선택한다는 것은 짝 짓는다는 것이다. 자신과 어울리는 좋은 짝을 찾아야 한다.  


어떻 것이 좋은가? 좋다(good)의 어원은 ‘가득하다’이다. 텅 비어 있는 것 보다는 빵빵하게 속이 가득찬 것이 더 좋은 값을 받았다.


그것은 무엇인가? 더 팔팔하고 더 가득한 것은? 더 새롭고, 더 높고, 더 아름답고, 더 자유롭고, 더 완전한 것이 가치있는 것이다.



심(心)을 깨닫기


인간은 가치를 추구한다. 더 팔팔하고 더 가득한 것이 가치있다. 어떤 것이 더 팔팔하고 더 가득한가? 심(心)이 있는 것이다.


가치란 팔팔한 것이며 그것은 심과 날을 가진 것이다. 심은 속에 뜻을 머금은 것이고 날은 외부의 타인과 맞닿아 접촉하는 접점이다.


심(心)은 중심이고 핵심이다. 변재(邊材)가 아닌 심재(心材)다. 연필심이나 볼펜심과도 같다. 심은 속에 뜻을 머금어서 가득(good) 들어차 있는 것이다.


가치(value)있는 것은 팔팔한 것이다. 팔팔한 것은 울림과 떨림에 공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반응하는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다.


마음(mind)의 어원은 머금음이다. 마음은 심(心)이고 심은 머금음이다. 머금어서 가득차 있는 것이다. 속이 가득찬 것이 반응하고 응답한다.


심지가 있어야 촛불을 켤 수 있다. 심이 있는 것이 반응한다. 존재의 심지는 생명이다. 죽은 것은 반응하지 않는다. 심장이 뛰지 않는다. 


미인은 나를 향해 미소를 짓는다. 그때 내 심장은 뛴다. 서로는 마주본다. 그리고 반응한다. 얼굴은 상기되고 눈은 빛난다. 반응하는 것이 아름답다.


한 떨기 꽃의 미소에는 벌과 나비가 반응하고 찬란한 태양의 미소에는 초목의 잎새가 반응한다. 모든 팔팔하게 살아있는 것은 반응한다.


살아있는 강아지는 나의 부름에 응답한다. 나를 향해 꼬리를 흔든다. 가치있다. 죽은 석상은 불러도 반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치없다. 


가치있는 것은 나와 함께 서는 것이다. 심이 있으므로 함께 선다. 연필은 심이 있으므로 글을 쓸 수 있고 칼은 날이 있으므로 무를 자를 수 있다.


연필은 심(心)이 심이고 칼은 날이 있다. 접촉면이 있고 접점이 있다. 그것이 심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날과 심이 있다. 소통한다.


컵은 물을 담을 수 있고 책은 글씨를 담을 수 있다. 인간은 마음을 담을 수 있고 존재는 생명을 담을 수 있다. 그렇게 머금을 수 있다. 마음이 있다.

  

일체유심조라 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은 적다. 마음은 변덕스런 인간의 감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감정으로 풀면 오해다.


가치는 성능을 결정하는 부분이다. 컴퓨터는 반도체를 머금고 자동차는 엔진을 머금는다. 속에 머금은 심이 성능을 결정한다.


일체유심조라 했다. 그 속에 무엇을 머금었는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자동차의 성능은 엔진이 결정하고 컴퓨터의 성능은 반도체가 결정한다.


당신의 존재 역시 당신이 속에 무엇을 머금었는지가 결정한다. 누구와 만나고 누구와 맞물리고 누구와 함께 서고 어떻게 소통하는지가 결정한다.



날을 깨닫기


숟가락의 끝이 둥근 것은 입술의 형태를 닮아있기 때문이다. 젓가락이 긴 것은 손가락의 형태를 닮아있기 때문이다.


가치는 의미를 배달한다. 의미의 배달은 톱니바퀴의 맞물림으로 가능하다. 톱니바퀴는 요철(凹凸)이다. 요와 철은 닮았다. 숟가락 날은 입술을 닮았다.


모든 존재는 맞물려 있다. 맞물려 있으므로 마주치는 접점이 있다. 힘을 전달하고 전달받는 부분이 있다. 소통이 이루어지는 부분이 있다.


그것이 날이다. 날은 마주치는 접점이다. 눈인사로 만날 때는 눈빛이 날이고 손으로 악수할 때는 손아귀가 날이다.


모든 존재는 심과 날이 있다. 볼펜은 잉크가 든 부분이 심이고 촉(觸)이 날이다. 종이는 페이지가 날이고 TV는 모니터가 날이다.


휴대폰은 반도체가 심이고 안테나가 날이다. 자동차는 엔진이 심이고 바퀴가 날이다. 심은 가운데서 중심을 잡고 날은 밖에서 접촉한다.


● 가치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기다.

● 가치있는 것은 속이 가득하고 겉이 팔팔한 것이다.

● 가득한 것은 속에 심(心)이 들어 있고 팔팔한 것은 겉에 날이 있다.

● 심은 속으로 의미를 머금고 날은 겉으로 외부세계와 접촉한다.

● 가치는 심에 의해 보존되고 날에 의해 소통된다.


날이 있어야 한다. 시퍼렇게 날이 서 있어야 한다. 날은 팔팔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칼날처럼 예리하게 반응하고 송곳처럼 섬세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진위(眞僞) 중에는 진이 반응하고, 선악(善惡) 중에는 선이 반응하고, 미추(美醜) 중에는 미가 반응한다.


자유와 업악 중에는 자유가 반응하고 성속(聖俗) 중에는 성이 반응한다. 거짓은 반응하지 않는다. 악(惡)과 추(醜)와 억압과 속(俗)은 반응하지 않는다. 


출력이 심이라면 주파수가 날이다. 심과 날은 연결되어 있다. 만년필 심은 잉크를 머금고 만년필의 날(촉)은 종이와 접촉하여 글씨를 쓴다.



성(聖)을 깨닫기


성(聖)은 산의 정상처럼 스스로를 뾰족하게 날을 세워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속(俗)된 것은 무리들 속에 묻혀 흘러가 버린다.


속된 자는 부름에 응답할 수 없다. 속물은 신의 부름에 응답할 수 없고 진리의 부름에 응답할 수 없고 역사의 부름에도 응답할 수 없다.


라디오는 안테나를 가진다. 안테나가 꺾이면 반응하지 않는다. 칼날이 무뎌지면 반응하지 않는다. 전축의 바늘이 무뎌지면 반응하지 않는다.


한 곡의 음악을 들을 때,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감상할 때 나의 심장은 뛴다. 반응한다. 성(聖)은 그 예리한 날을 휘둘러 잠든 나를 깨운다.


그러나 과연 반응하는가?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가? 슬픈 음악을 듣고도 눈물을 흘리지 못한다면 그대의 성(聖)은 흐려진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도 그 넉넉한 품 속에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대의 성(聖)은 이미 바래어지고 만 것이다.


독재자의 폭력을 보고도 모른체 눈 감는다면, 미치광이 제국의 침략책동을 보고도 분노하지 않는다면 그대의 날은 닳아 무뎌진 것이다.


나의 심장을 뛰게 하는 것, 아드레날린과 엔돌핀이 솟구치게 하는 것, 나로 하여금 반응하게 하는 것, 나를 일깨워 불러내는 것이 성(聖)이다.


당신의 존재는 시퍼렇게 날이 서 있는가? 당신은 분노해야 할 때 응당 분노하는가? 당신은 일어서야 할 때 일어설 수 있는가?


그대 역사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가? 그대 위대한 역사의 순간에 그 역사의 현장을 지켰는가? 역사가 그 현장으로 그대를 초대하던가?


만약 그리하지 못하였다면 그대의 성(聖)은 황폐해진 것이다. 진리의 부름에 응답하지 못하였다면. 자연의 유혹에 넘어갈 용기와 배짱이 없었다면.


날이 서 있어야 한다. 부름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반응해야 한다. 팔팔해야 한다. 예민해야 한다. 팽팽하게 긴장이 곤두서 있어야 한다.


자동차 엔진은 600도 온도에서 최대의 성능을 발휘한다고 한다. 최적화된 지점이 있다. 연인과의 첫 키스처럼 바짝 달아오른 상태.


섬세해야 한다. 예리해야 한다. 치열해야 한다. 열정이 있어야 한다. 정신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한다. 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진 활처럼.


성(聖)은 속(俗)에 맞선다. 당신은 속물이 아닌가? 안테나가 없는, 날이 무뎌진, 반응하지 않는, 예민하지도 섬세하지도 않은 속물과는 대화할 수 없다.


반응하지 않는 인간과는 사귈 수 없다. 반응하지 않으므로 사귈 수 없다. 짝을 지을 수도 없고 함께 설 수도 없고 하나될 수도 없고 소통할 수도 없다.


소통을 깨닫기  


깨달음의 본의는 소통(疏通)에 있다. 참된 소통은 어떤 주어진 사실에 대한 인식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반드시 실천이 따라야 한다. 


깨달음은 존재가 서로 긴밀하게 맞물려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맞서는 상대가 있다. 결혼을 앞두고 맞선을 보는 젊은이들 처럼 상대가 있다.


이심전심의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 실제로 스위치가 켜지고 전구에 불이 들어와서 마침내 어둠을 밝혀내는데 성공해야 한다.


자기 자신과 소통하고 타인과 소통하고 세상과 소통해야 한다. 소통함으로써 의미를 배달하고 가치를 보존하고 아름다움을 드러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사건에 개입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만나야 한다. 혼자서는 아름다울 수도 없고 가치를 실현할 수 없다. 


지식은 혼자라도 가능하다. 그러나 깨달음은 세상과의 적극적인 만남과 맞물림과 함께 섬과 하나 됨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깨달음은 능동적인 참여와 개입에 의한 창조의 과정이다. 두 전극이 맞물려서 스위치가 켜지고 도체에 전류가 흐르고 전구가 빛을 내는 것이다.


그것은 두려운 것이다.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를 선택할 때 하나가 버려진다. 그렇다면 긴장해야 하고 목숨을 걸어야 한다.



이심전심을 깨닫기


깨달음은 이심전심의 깨달음이다. 심(心)이 불안정한 인간의 감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변덕스런 인간의 감정으로는 소통할 수는 없다.


마음의 어원은 머금음이다. 뜻을 머금은 것이 마음이다. 속에 머금어진 것은 심(心)이다. 심은 핵심이고 중심이다. 심(心)은 심(沈)이고 심(深)이다.


겉이 아니라 속이다. 속에서 핵을 이루어 중심을 잡아준다. 연필의 중심은 연필심이 잡아주고 자동차의 중심은 엔진이 잡아준다.


마음은 머금는다. 의미를 머금고, 가치를 머금고 미(美)를 머금고 소통(疏通)을 머금는다. 속에 머금기 때문에 핵심이 되어 중심을 잡는다.


이심전심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통함이 아니라 완전에서 완전으로 통함이다. 성(聖)은 존재의 완전성이다. 날이 시퍼렇게 서 있어서 성(聖)은 완전하다.


이심전심은 온유함에서 온유함으로 통함이 아니다. 생명이 있고 촉수가 있고 날이 서 있어서 완전한 것이며 완전하므로 통함이다. 


성(聖)은 날이다. 칼날처럼 시퍼렇게 날이 선 날이다. 날이 서지 않은 칼로는 벨 수 없다. 날이 무뎌진 송곳으로는 뚫을 수 없다. 소통할 수 없다.


심금(心琴)을 울릴 때 이심전심은 이루어진다. 연주자는 손가락이 날이고 악기는 현이 날이다. 피아니스트의 손날이 피아노의 현을 울리는 것이다.


늘어진 현(絃)은 소리를 내지 못한다. 속물이 속물인 이유는 이심전심의 소통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현을 팽팽하게 조여매지 않으면 안 된다.


피어난 한떨기 연꽃은 완전하므로 아름답다. 완전하기 때문에 날이 서고 시퍼렇게 날이 서 있기 때문에 이심전심의 소통은 이루어진다.

모든 존재는 조각난 부스러기로 불완전하다. 의미와 가치를 머금어 완전에 이른다. 속에 심을 심고 겉에 날을 세워 완전에 이를 때 소통한다.


본래 불완전하고 허무하지만 신의 완전성과 소통함으로써 완전해진다. 인생은 비참 뿐이지만 만나서 맞물리고 함께 서고 하나됨으로써 구원된다.



깨달음의 구조를 깨닫기

  

깨달음은 어떤 정해진 사실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구조 그 자체를 깨닫는 것이다. 그것은 인식의 구조를 이해하기다.


인식은 외계에서 인간의 눈과 귀와 코로 주입되는 데이터와 자기 내부에서 그 데이터를 처리하는 소프트웨어가 옳게 만날 때 이루어진다.


하나의 실행파일이 처리할 수 있는 데이터의 용량은 한정된다. 많은 데이터를 동시에 처리하기 위해서는 높은 수준의 소프트웨어를 구동해야 한다.


깨달음은 인간의 뇌 내부에서 사용되지 않은 채 잠들어 있는 최고 수준의 소프트웨어를 일깨워서 사용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 인식되는 데이터의 패턴을 읽은 다음 과거에 동일한 데이터를 처리한 적이 있는 기록을 활용하여 대용량의 정보를 일거에 처리하는 것이다.


컴퓨터가 인터넷 웹페이지를 읽는 원리도 같다. 열어본 페이지 목록은 저장된다. 처음 읽는 페이지는 제법 시간이 걸리고 열어본 페이지는 빨리 읽는다.


핵심은 패턴의 기억 및 대조과정이다. 과거의 무수한 경험을 일일이 대조하기 위해서는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압축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정보의 압축을 통하여 질(質)적인 깊이에 도달하기다. 그것은 팩트와 패턴과 로직과 매커니즘과 패러다임의 집적원리로 가능하다.


그것은 정보에 대한 정보 곧 메타정보다. 지식이 외부에서 입수되는 데이터라면 깨달음은 메타정보를 활용하여 내부에서 그 데이터를 처리한다.



인식의 진화를 깨닫기


동물과 식물은 자연의 생태계 환경 안에서 진화해 왔다. 인간의 뇌내환경도 하나의 생태계와 같다. 인식은 내뇌 생태계 안에서 진화한다.


눈과 귀와 코와 몸의 신체감관으로 입수한 데이터 그 자체는 의미가 없다. 과거에 기억된 데이터와 대조하여 패턴이 발견될 때 의미가 부여된다. 


무의미하게 축적되는 데이터들이 과거의 데이터와 대조되는 과정에서 중요도가 판별되어 메타정보로 진화한다.


데이터는 의미와 가치를 먹고 자란다. 하나의 데이터가 뇌 안에서 자리잡고 다른 데이터와 뉴런으로 이어져 짝을 짓고 관계를 맺고 성장한다.


의미와 가치를 얻지 못한 데이터들은 뇌 안에서 자리잡지 못하고 사멸된다. 대부분의 데이터들은 뇌 안에서 오래 생존하지 못한다.


하나의 정보는 다른 정보와 만나고 맞물리고 함께 설 때 메타정보로 진화한다. 의미와 가치를 인정받고 미학적 포지션을 할당받아 소통에 기여한다.


보다 진화한 정보들은 뇌 안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더 많은 뉴런으로 연결된다. 깨달음은 뇌 안에서 최고단계로 진화한 메타정보다.


메타정보는 데이터를 제어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가진다. 깨달음은 메모리에 상주하면서 파일을 처리하고 운용하는 즉 역할있는 정보다.


깨달음은 뇌 안에서 최고수준의 정보를 처리하는 소프트웨어다. 다른 모든 정보의 출입에 개입하며 모든 형태의 가치판단에 영향을 미친다.


관(觀)을 깨닫기


가치는 함께 서기다. 세상 앞에서 어떤 자세로 설 것인가. 신 앞에서 단독자로 설 수 있어야 한다. 세상 전부와 일대 일로 맞장을 뜨기다.


세상을 바라보되 아래에서 위로 우러러 볼 것인가 아니면 위에서 아래로 굽어볼 것인가 혹은 대등한 위치에서 바라볼 것인가이다.


깨달음은 아래에서 위로 우러러보는 노예의 시선도 아니고 위에서 아래로 굽어보는 가부장의 시선도 아니다. 정상에서 또다른 정상을 바라보기다.


중요한 것은 세상과의 관계맺기다. 그것은 세상과의 맞짱 승부 기싸움이다. 그 승부의 결과에 따라 노예 혹은 주인 또는 친구의 관계로 정립된다.


세상과의 관계맺기가 어느 수준에서 결정되는가에 따라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 사회와 역사에 대한 태도, 종교에 대한 태도가 결정된다.


그러한 기본적인 자아(自我)의 포지션이 이후 모든 지식의 출입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것이 관(觀)이다. 관(觀)은 자아의 눈높이다.


관(觀)은 세상을 바라보는 격이다. 제왕의 마음으로 바라볼 것인가 노예의 마음으로 바라볼 것인가. 깨달음은 신과 대등한 친구가 되는 것이다.


존재에 대하여 인생관이 있고, 미학에 대하여 가치관이 있고, 세상에 대하여 세계관이 있다. 모두 이에 연동되어 결정된다.


진위에 대한 태도, 선악과 미추에 대한 태도, 자유와 억압, 성과 속에 대한 태도가 모두 세상과의 관계맺기에 따라 이에 연동되어 결정된다.


깨달음이 자아의 포지션을 결정한다. 한 번 결정된 포지션이 이후 뇌 안으로 입수되는 모든 데이터를 검열하고 대조하여 처리하기 때문이다.


어느 수준의 깨달음으로 자신의 관(觀)의 눈높이를 성립시켰는가에 따라 자신의 뇌가 어떤 데이터를 저장 혹은 폐기할 것인지가 규정된다.


만약 당신이 세상 앞에서 두려워 하고 자신없어 한다면 그것은 소년기에 성립된 당신의 관(觀)이 대부분의 데이터를 잘못 처리하였기 때문일 수 있다.




자아를 깨닫기


깨달음은 나를 깨달음이다. 그것은 곧 나의 자아(自我)를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자아를 형성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 자아를 극복하는 것이다.


자아를 형성함은 곧 자유를 획득하는 것이며 자아를 넘어섬은 개인의 자유로움에 그치지 않고 세계에 대한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자아를 형성함은 외부세계와의 소통을 위한 기지를 건설하는 것이며 자아를 넘어섬은 그 기지에 머무르지 않고 바깥세계로 나아가 사랑을 실천함이다.

  

어린이의 자아는 욕망과 두려움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것은 본능이다. 어린이는 본능이 자아를 대리한다. 이는 자아의 미성숙이다.


나와 나 아닌 것의 경계가 불분명하다. 나의 가족, 나의 친구, 나의 소유, 나의 권리, 나의 나라, 나의 세계에 대한 피아구분의 인식이 없다.


어린이에게는 부끄러움과 떳떳함, 어색함과 자연스러움의 판단이 나침반이 된다. 그것이 관(觀)을 대리한다. 가치관과 인생관 세계관을 대신한다.


세상과 나의 자아가 대립각을 세우는 지점에 대한 인식이 관(觀)이다. 세상과 내가 맞닥드리는 접점이 있다. 전선(戰線)이 형성되어 있다.


경계면 의식이다. 나와 남을 구분하는 기준이다. 그러한 관(觀)이 형성되지 않으면 부끄러움과 자연스러움의 나침반을 든 본능이 즉흥적으로 판단한다.


두려움과 욕망, 부끄러움과 자연스러움을 판단하는 본능이 메모리에 상주하며 입수되는 모든 데이터를 열람하고 처리한다. 일관성이 있을리 없다.


모든 소통하는 것에는 심과 날이 있다. 욕망과 두려움의 판단이 심이 되고 부끄러움과 떳떳함의 판단이 날이 된다.


그것을 이상주의와 가치관으로 바꾸어야 한다. 이상주의가 욕망을 대체하여 심이 되어야 하고 가치관이 부끄러움을 대체하여 날이 되어야 한다.


어린이의 미숙한 자아를 극복해야 한다. 욕망을 극복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부끄러움을 극복하고 어색함을 극복해야 한다. 


그것을 대체할 대체재가 있을 때 가능하다. 욕망을 대체할 이상주의가 있어야 한다. 부끄러움을 대체할 관(觀)이 있어야 한다.


본능과 감성과 이성이 있다. 중대한 위기상황에서는 본능이 뇌 안에서 모든 데이터를 검열하고 보고하는 최고 수준의 통제기관이다.


감성과 이성은 위기가 아닐 때 작동한다. 대단한 학자라도 죽음 앞에서는 어린이가 된다. 고상한 인격자도 식욕과 성욕 앞에서는 어린이가 된다.


이성은 칼이 비록 날카롭다 하나 작은 일에 맞서는 단검일 뿐이다. 결정적으로 파워가 없다. 깨달음의 영성이 이성의 뒤를 받쳐주지 않으면 안 된다.



네가 내임을 깨닫기

깨달음은 신의 자아가 나의 자아로 되는 것이다. 신의 완전성과 소통함으로써 가능하다. 나와 너의 경계가 소멸하는 것이다.


자아는 피아구분이다. 깨달음은 나의 자아가 나의 존재를 보호하는 집이 아니라 타인과 더불어 소통하는 통로가 되고 정거장이 되는 것이다.


욕망과 두려움의 센서를 갖춘 본능이 자아를 구성한다면 그것은 소통의 정거장이 아니라 공격과 방어의 진지가 된다.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깨달음은 소통이다. 그것은 나 자신과의 소통, 나와 너의 소통, 나와 세상과의 소통, 나와 우주와의 소통, 신의 완전성과의 소통이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다. 나와 너 사이에 경계가 있다. 단지 그 사실을 부인한다고 해서 나를 초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소통할 때 경계는 무너진다. 소통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문을 열고 손을 내밀어야 한다. 센서를 내밀고 주파수를 열고 출력을 높여야 한다.


미학이 센서다. 자유가 주파수다. 사랑이 출력이다. 사랑이 없으면 소통의 질은 낮아진다. 자유가 없으면 소통의 폭은 좁아진다. 미학이 없으면 단절된다.

우리는 서로 소통하기에 성공해야 한다. 모든 성공은 타인과의 소통의 성공으로 하여 얻어지고 모든 실패는 사회적인 소통의 실패로 하여 얻어진다.


나와 너와 통할 때 곧 내가 너임을 깨닫는다. 나와 우주와 통할 때 곧 내가 우주임을 깨닫는다. 그렇게 서로는 하나가 될 수 있다.


통하는 크기 만큼 나는 너다. 그것은 본능의 자아를 넘어서서 이성과 감성을 통제하는 영성의 자아를 얻는 것이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미학의 센서를 내밀고 자유의 주파수대를 폭넓게 개방하고 사랑의 출력을 최대치의 파워로 높여야 한다. 나와 너의 경계를 넘어서기다.



영성을 깨닫기


인간의 마음을 통제하는 힘은 첫째가 본능, 둘째가 감성, 셋째가 지성과 이성이다. 지성은 학습된 것이고 모든 학습은 본질에서 모방된 것이다.


모방은 가장 낮은 단위의 의사결정 시스템이다. 모방은 무의미한 단순 반복작업에서 기능한다. 지성은 시험문제를 푸는 단순작업에서 쓸모가 있다.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지성으로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단 누군가가 앞장을 서 준다면 뒤따라갈 수는 있다.


지성은 모방이고 모방은 타인의 행동을 모방함다. 인간은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지만 모방할 대상이 있을 때 한해서이다.


지도자가 있을 때 인간은 얼마든지 이성적이다. 누군가가 앞에서 시범을 보여주고 이끌어준다면 인간은 충분히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고독하게 혼자가 되었을 때는 이성을 잃는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영성의 계발이 필요하다. 영성은 소통이다. 소통하므로 혼자가 아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는 힘은 소통에서 나온다. 목숨을 내던져 아기를 보호하는 엄마의 용기는 아기와 내가 하나임을 깨달음에서 나온다.


사회와 하나가 되고 세계와 하나가 되고 진리와 하나가 되고 신의 완전성과 하나가 될 때 모든 두려움과 욕망을 극복할 수 있다.


이성은 관(觀)에 의해서 일관성이 부여된 지성이고, 영성은 소통에 의해 출력이 높아진 이성이다. 영성의 계발은 깨달음에 의해서 가능하다.


불의를 보았을 때 분노할 수 있어야 한다. 굶주린 사람이 배고픔을 느끼듯 정의에 굶주리고 미에 굶주리고 성(聖)에 굶주려야 한다.


본능이 감성과 이성을 통제한다. 영성이 본능을 대체한다. 욕망도 극복하고 두려움도 극복하고 부끄러움도 극복하고 어색함도 극복해야 한다.


이성은 옳다고 머리로 판단해서 행동한다. 영성은 옳지 않음에 대해서 참을 수 없는 거부감을 느끼게 한다. 어색함과 부자연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본능은 얼굴에 나타난다.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혹은 욕망에 끌린 얼굴로 나타난다. 영성은 얼굴에 나타난다. 세상과 맞서는 지점이 얼굴에 표시된다.


비굴한 자는 비굴한 표정을 짓고 거룩한 자는 거룩한 표정을 짓는다. 야비한 자는 야비한 표정을 짓고 고상한 자는 고상한 표정을 짓는다.


영성이 본능을 대체하기 때문이다. 생존모드로 문을 닫아건 자의 얼굴이 다르고 방관모드로 창을 내다보는 자의 얼굴이 다르다. 그 얼굴에 책임져야 한다.


이성과 영성은 다르다. 이성은 단지 시험문제의 정답을 찍을 뿐이다. 영성은 옳지 않음에 분노하고 아름다움에 찬탄하고 소통에 전율한다. 몸으로 반응한다.


영성이 진짜다. 진짜는 다르다. 머리 굴리지 않고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셈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눈치보지 않는다.

누군가 선례를 보이면 모방하고 지도자가 명령하면 추종하는 이성은 진짜가 아니다. 좋은 연주가 관객의 심금을 울리듯 몸으로 반응해야 진짜다. 


불의에 분노해야 진짜다. 진리를 욕망해야 진짜다. 이상주의를 탐해야 진짜다. 그릇됨에 어색해해야 진짜다. 자연에 자연스러워 해야 진짜다.



카리스마를 깨닫기


소통을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그것은 출력과 주파수다. 주파수는 코드의 일치를 조율하고 출력은 넓은 범위를 커버하게 한다.


정상에 선다면 360도를 파노라마처럼 볼 수 있다. 정상의 높이가 출력이라면 360도의 너른 시야는 주파수다. 비로소 소통할 수 있다.


시야가 좁아도 소통할 수 없고 정상이 낮아도 소통할 수 없다. 자유가 너른 시야의 확보라면 사랑은 그 정상의 높이다.


높이가 카리스마라면 시야는 관(觀)이다. 영혼은 소통의 개념이다. 영혼은 출력이라는 카리스마와 주파수라는 관을 필요로 한다.


관은 함께 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코드가 맞는 것이다. 가치관, 인생관, 역사관이다. 관을 타고 나는 사람이 있다. 그것이 끼다.


끼가 있어야 예술가가 될 수 있다. 예술이야 말로 소통의 문제로 바로 치고들어가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깨달음과 가깝고 영혼과 가깝다.


끼가 있어도 카리스마가 없으면 소통의 범위가 좁아진다. 춤을 잘 추고 노래를 잘 부르고 그림을 곧잘 그린다 해도 몇 명의 친구와 소통할 뿐이다.


끼가 있고 가치관이 맞아도 좁은 범위에서 소통할 뿐이다. 이상주의가 있어야 한다. 이상주의의 높이가 카리스마를 만든다. 그것은 꿈이다.


심과 날이 있어야 소통할 수 있다. 끼가 날이라면 꿈이 심이다. 가치관이 날이라면 이상주의가 심이다. 집단의 이상주의가 카리스마를 만든다.



영혼을 깨닫기


카리스마는 사회과학 용어로 널리 쓰이지만 본래는 기독교 용어였다. 어원적 의미로는 성령의 은혜 혹은 신의 은총을 뜻한다.


사회과학 용어로 쓰일 때 카리스마는 지도자의 권위가 가지는 대중과의 폭넓은 소통능력을 의미한다. 거기에 포스(Force)의 힘이 있다.


지도자에 대한 대중의 신뢰가 지도자의 행보를 제어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을 때 카리스마가 이루어진다. 집단의 꿈이 카리스마를 만드는 것이다.


카리스마는 지도자가 가진 초월적 능력이 아니다. 집단의 이상주의가 정서적인 깊이를 이루었을 때 역으로 지도자 운신 폭을 제어하는 것이다.


지도자와 대중의 정서적 교감이 피드백을 이루어 쌍방향적인 소통을 성립시킨다. 지도자가 대중을 통제하는 만큼 대중도 지도자를 통제한다.


지도자는 대중의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 대중이 예측가능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 자체가 관성이 되어 사회전체의 소통능력을 극대화 시킨다.

식민지에서 대량의 금을 들여오자 사회 전체의 신용이 상승하였다. 상업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이는 화폐가 없는 나라에 화폐가 처음 보급된 것과 같다.


물물교환에는 속임수가 따른다. 변질되어 질이 떨어지는 상품은 거래의 위험을 가중시킨다. 화폐와 금의 보급은 시장의 기반을 확대하고 있다.


지도자가 대중 사이에 쌍방향적인 소통이 이루어질 때 생겨난 카리스마가 사회전체의 신용을 증가시킨다. 이는 신의 은총과도 같다.


집단의 이상주의가 사회 전체의 신용을 증가시킨다. 특히 종교가 그 역할을 한다. 카리스마는 종교에도 있고 사회에도 있고 개인에게도 있다.


종교는 전통의 깊이가 카리스마를 이루고 사회는 이상주의에 바탕한 정서적 교감이 카리스마를 이루고 개인은 영혼의 순수가 카리스마를 이룬다.


그것은 정상과 지상 사이의 커다란 낙차와도 같다. 정상의 높이가 높을수록 소통의 출력은 높아진다. 그러므로 꿈이 있어야 한다.


카리스마가 카리스마인 것은 증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은 떨림들이 모여 커다란 맥놀이를 만드는 것이다. 개인의 꿈이 집단의 이상주의로 증폭된다.


평상심을 깨닫기


이성은 감성을 극복하게 하고 영성은 본능을 극복하게 한다. 본능은 자아를 공격과 방어의 진지로 삼고 영성은 자아를 소통의 정거장으로 삼는다.


욕망이 공격이면 두려움이 방어다. 인간은 욕망을 앞세워 외부세계에 참견하고 두려움을 앞세워 장벽을 쌓아 자신을 보호한다. 


● 본능 - 생존을 위한 욕망과 두려움, 떳떳함과 부끄러움.

● 감성 - 표현을 위한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분노.

● 지성 - 학습을 위한 모방과 명령의 수행.

● 이성 - 판단을 위한 가치관과 감성의 통제.

● 영성 - 소통을 위한 이상주의와 본능의 통제.


깨달음의 목적은 근원의 자연스러움에 도달하기다. 자연은 본래 자연스럽다. 인간의 마음을 자연의 흐름과 일치시킬 때 평상심에 도달한다.


공자의 중용, 노자의 무위, 석가의 중도, 선종불교의 평상심이 한결같이 자연스러움을 이야기하고 있다. 자연스러운 것이 떳떳한 것이다.


추(醜)가 어색함이면 미(美)가 자연스러움이다. 두려움 앞에서 비굴하지 않은 것이 자연스럽다. 욕망 앞에서 추잡하지 않은 것이 자연스럽다.

  

예술가는 자연의 자연스러움을 추구하여 인위의 어색함을 극복한다. 철학자는 신성(神聖)의 떳떳함을 추구하여 세속의 부끄러움을 극복한다.


그것은 본능에 맞섬이며 본능을 극복함이고 한편으로 본능에 호응함이기도 하다. 본능을 억압함이 아니라 본능과 동반하여 자연스럽게 풀어내는 것이다.


욕망을 부정함이 아니라 나의 욕망을 자연의 욕망을 일치시키기다. 나의 꿈을 사회의 이상주의와 일치시키고 역사의 진보와 일치시키기다.


일치할 때 전율한다. 자연과 일치할 때 전율하고 욕망과 일치할 때 오르가즘을 느끼고 사회의 흐름과 일치할 때 그 울림과 떨림이 전파된다.


이성은 감성과 호응하며 감성을 극복한다. 이성은 철학으로 도달할 수 있다. 가치관의 정립으로 감성의 변덕스러움을 극복하고 일관성을 얻을 수 있다.


영성은 본능과 호응하며 본능을 극복한다. 영성의 문제는 삶과 죽음의 문제다. 죽음의 극복은 철학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판단하기로 하면 죽음 앞에서 깊은 허무의 바다에 빠져버린다. 지구가 끝나는 시점이라면 그 어떤 가치판단도 소용이 없다.


욕망이 인간을 부끄럽게 하고 두려움이 인간을 비굴하게 한다. 막상 내 목에 칼이 들어왔을 때 이성이 받아들이려 해도 본능이 막아선다.


나와 너의 경계를 넘어섰을 때 죽음은 극복된다. 나는 죽어도 너는 살아있기 때문이다. 너와 소통하고 세상과 소통할 때 죽음은 극복된다.


부모는 죽어도 자식은 살아있다. 자신은 죽어도 세상의 삶은 계속된다. 죽음을 앞둔 부모가 삶을 계속할 자식과 소통할 때 죽음은 극복된다.


독배를 든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과 소통한다. 십자가 앞에 선 예수는 하느님과 소통한다. 본능의 극복은 깨달음의 소통으로 가능하다. 


자유를 깨닫기


깨달음의 목적은 자유다. 자유는 서구의 개념이다. 그러나 노자의 무위, 공자의 중용, 석가의 해탈에 자유의 의미가 있다.


자유도 여러 가지다. 리버티(liberty)가 있고 프리덤(freedom)이 있다. 리버티는 해방이다. 억압에서 풀려남이다. 이는 온전한 자유가 아니다.


프리덤은 겨우 무대 위에 오른 것이다. 아직 내 안의 끼를 발산하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결실로 나아가지 않은 잠재적이고 미완성의 것이다.


진정한 자유는 자기완성이다. 깨달음은 목적은 자기완성에 있다. 문제는 그 완성이 나의 내면에서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자유는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 마음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내 마음이 마음대로가 아니면 마음대로 하여도 마음대로가 아니다.


마음은 머금는 것이다. 속에 머금은 의도가 있어야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내 본능과 감성이 나의 의도와 일치할 때 마음대로가 된다.


내 마음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마음에 머금은 것이 있어야 한다. 먼저 의도가 있어야 한다. 그 의도가 세상과 맞서 가치로 발전해야 한다.


속에 머금은 것을 자유로이 풀어주어 진동시켜 세상에 전파하는 것이다. 울림과 떨림이 전파되어야 한다. 나의 마음이 세상의 마음과 공명해야 한다.


화가는 속에 머금은 그림의 재능을 드러내고 연주자는 머금은 연주의 재능을 드러내어야 한다. 그렇게 날을 세우고 주파수를 맞추어 공명시킨다.


자유는 나의 완성이다. 리버티는 결함의 치유다. 프리덤은 완성된 나를 무대에 올려놓기다. 진정한 자유는 무대 위에서 마음껏 발산하기다.

자유의 성취는 사랑이다. 사랑으로 결실하지 않으면 자유가 아니다. 나의 완성이 전파되어 세상의 완성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자유가 아니다.


진정한 자유는 모든 가치판단에 있어서 내가 선택의 우위에 서는 것이다. 능동적으로 개입하고 주도적으로 판단하며 적극적으로 선택한다.


두려움을 극복함은 리버티다. 석가의 해탈은 리버티에 가깝다. 마조의 평상심은 프리덤이다. 선종불교의 소요자재는 프리덤에 가깝다.  



초극을 깨닫기


진정한 자유는 리버티와 프리덤을 넘어 존재한다. 참된 자유는 정상에 도달함에 있지 않고 정상에서 새로운 소통의 지평을 열어감에 있다.


인간이 자유로운 이유는 눈과 귀가 있기 때문이다. 장님은 앞을 볼 수 없으니 자유롭지 않다. 벙어리는 뜻대로 말할 수 없으니 자유롭지 않다.


리버티는 억압에서 풀려나 해방에 이르는 것이다. 마침내 장님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두 다리로 일어서고 벙어리가 말문을 트는 것이다.


자유롭다. 그러나 자유로울 뿐 그것이 참된 자유는 아니다. 자유로움과 자유는 다르다. 그 뜬 눈과 튼 말문으로 해야할 일이 있다.


장님은 지팡이에 의존해야 한다. 센서가 없기 때문이다. 리버티는 센서를 얻음이다. 눈과 귀와 코는 세상과의 소통을 위한 센서다.


리버티는 독립적으로 안테나를 설치하고 자체 기지국을 여는 것이다. 그러나 기지국의 역할은 단지 외부로부터의 정보를 수신하여 중개할 뿐이다. 


프리덤은 독자적인 주파수대를 얻어 방송국을 여는 것이다. 그 방송이 가진 주파수 대역의 크기 만큼 자유가 얻어진다.


결정적으로 그 방송국에서 무엇을 방송할 것인가이다. 창조가 아니면 안 된다. 사랑이 아니면 안된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실천이고 개입이어야 한다.

참된 자유는 리버티의 안테나를 세운 프리덤의 방송국에서 사랑이라는 작품을 창조하여 전파하는 것이다. 사랑을 전파함이 내 존재의 이유다.


각자는 한 사람 몫의 사랑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 마음의 씨앗을 리버티로 길러내고 프리덤으로 꽃 피워서 그 광채와 향기로 전파하기다.


화가는 내 안의 재능을 드러내어 그려내는 것이 사랑이고 악사는 연주하는 것이 사랑이고 도공은 빚어내는 것이 사랑이다.


화가의 재능은 관람객의 마음에 전염된다. 연주자의 재능은 객석의 청중에게 전파된다. 사랑은 전염된다. 자유는 사랑을 전염시킬 자유다.


내 안에 머금은 의도가 없다면 머금은 이상주의의 심이 없고 가치관의 날이 없고 미학의 센서가 없다면 자유도 없고 사랑도 없다.



사랑을 깨닫기


깨달음의 결론은 이심전심이다. 이심전심의 성공은 소통이다. 소통의 성취는 창조다. 왜 소통하는가? 창조하기 위해 소통한다. 삶의 창조는 사랑이다.


나는 왜 존재하는가? 내 몫의 사랑을 전파하기 위해서다. 신의 방송국에서 사랑이라는 드라마를 수신하여 내 몫의 청중들에게 전파한다.


인간의 존재 의미는 신의 창조를 재현함에 있다. 신의 방송국이 창조한 것을 나의 라디오가 재현하여 세상에 전파한다. 그것은 사랑이다.


인간은 본래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버려진다. 버려짐은 비참이다. 비참의 극복은 구원이다. 구원의 끈은 의미다. 의미는 완성을 향해 나아가기다.


인간은 어떻게 완성되는가? 아름다움으로 완성된다. 완성의 빛은 미(美)다. 미의 근거는 닮음이다. 왜 아름다운가? 닮았기에 아름답다.


닮은 것은 친(親)하다. 친한 것은 서로 끌어당긴다. 너를 끌어당기는 것이 사랑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의 최종결론은 사랑이다.


깨달음의 결실은 창조이며 창조는 닮음의 창조이다. 그것은 신의 완전성을 재현함이다. 인간의 진실한 사랑 안에 온전한 신의 모습이 있다.  


깨달음의 종착역은 자유다. 자유는 실천을 촉발한다. 무엇을 실천하는가? 소통을 실천해야 한다. 울음소리를 토해내야 한다. 그것이 사랑이다.


혼자서 소리를 내는 북은 없다. 고립된 채 소통은 가능하지 않다. 고립된 은자의 깨달음에 그치지 않고 널리 세상과 소통함이 대승(大乘)의 정신이다.


그러므로 서로는 만나야 한다. 만나서 손 잡고 통해야 한다. 통하면 창조된다. 그럴 때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 속에 신의 모습이 있다. 그것이 사랑이다.



닮음을 깨닫기


소통은 상대가 있다. 소통의 세계는 상대성의 세계다. 상대와 닮아야 소통할 수 있다. 세상 모든 존재는 크게 닮아 있다.


소통은 능동적인 실천이다. 사회적이고 참여적이고 대중적이다. 상대방과의 관계맺기에 따라 소통의 주파수가 달라진다. 그 주파수를 내가 선택한다.


그러므로 관계맺기가 중요하다.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주인이 될 것인가 노예가 될 것인가 아니면 친구가 될 것인가?


상대가 어른이냐 아이냐, 윗사람이냐 아랫사람이냐에 따라 소통의 코드가 달라지고 주파수가 달라진다. 그러므로 출력이 필요하다.


어른이든 아이든 윗사람이든 아랫사람이든 구분없이 소통하기 위해서는 높은 출력의 파워가 필요하다. 포스가 필요하고 카리스마가 필요하다.

깨달음은 세상과의 관계맺기다.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세상 속에서 자신의 위치 찾기다. 위치는 성별로도 결정되고 신분으로도 결정된다.


소통의 코드는 인종으로도 결정되고 혹은 장애자로 혹은 정치적 소수자로도 결정된다. 그 코드는 자신이 스스로 정한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자유다.


자신을 여자로, 혹은 남자로, 혹은 아버지로, 혹은 남편으로, 혹은 노예로, 혹은 주인으로, 혹은 친구로 자유로이 규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실패한다.


규정하기 때문에 실패한다. 주파수가 달라져서 실패한다. 주파수를 바꾸다가 실패한다. 코드가 맞지 않아 실패한다. 자유로와서 실패한다.


그 규정을 뛰어넘기 위해서 참된 자유가 필요하다. 진짜가 필요하다. 그것은 속되지 않고 성스러운 것이다. 날을 시퍼렇게 세워 예리한 것이다.


자유라는 이름의 넓은 주파수대가 필요하고 카리스마라는 이름의 높은 출력이 필요하다. 온 세상을 커버할 수 있는 파워가 아니면 안 된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스스로 자기 존재를 규정할 수 있다. 그 규정할 수 있는 정도의 크기 만큼 세상과 만날 수 있다.


깨달음은 세상과의 거룩한 만남이다. 세상 전부와 만나기 위해서는 세상 전부와 닮아야 한다. 깨달음은 근원의 거룩한 닮음에 도달하기다.






미학을 깨달음


자연에는 다섯 가지 미(美)가 있다. 만남은 예쁨이고 맞물림은 고움이고 함께 섬은 어울림이고 하나됨은 아름다움이고 소통함은 멋있음이다.


만나기와 맞물리기, 함께서기, 하나되기, 소통하기는 만유에 공통되는 소통의 절차다. 소통의 진행에 따라 예쁘고 곱고 어울리고 아름답고 멋있다.


성공적인 만나기는 예쁘고 맞물리기의 성공은 곱고 성공적인 함께서기는 어울리고 하나되기의 성공은 아름답고 성공적인 소통은 멋있다.


● 만나기 - 예쁘다.

● 맞물리기 - 곱다.

● 함께서기 - 어울린다.

● 하나되기 - 아름답다.

● 소통하기 - 멋있다.


예쁜 것은 눈에 잘 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사물의 눈을 찾으려 하기 때문에 뱀이나 바퀴벌레나 쥐처럼 눈이 잘 보이지 않으면 징그럽다.

아기처럼 둥근 얼굴에 눈이 또렷하고 칼라가 선명할 때 예쁘다. 모든 포유류 동물의 새끼는 예쁘다. 어미 눈에 잘 띄어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부분과 부분의 연결이 매끄럽게 이어지면 곱다. 표면이 거칠거나 울퉁불퉁하여 인체의 각부분이 시각적으로 잘 연결되지 않으면 곱지 않다.


콜라와 햄버거처럼 잘 맞아떨어지는 것은 어울린다. 콜라와 햄버거, 파전과 막걸리, 김치와 쌀밥처럼 앙상블을 이루어 함께 서는 것이 어울리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각 부위가 따로 놀지 않고 팀을 구성하여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서로 간에 마찰과 분리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멋은 소통이다. 둘 이상의 개별적 존재가 하나의 공간 안에서 서로 마찰하지 않고 서로를 침범하거나 훼손하지 않고 무리없이 공존할 때 멋있다.  


자연은 소통할 때 멋있다. 소통하기 위하여 짝 지으니 아름답고 짝을 찾으니 어울리고 짝에게 다가가니 곱고 짝을 만나니 예쁘다.



멋을 깨달음


미학은 센서를 내미는 것이다. 들키지 않고 상대방의 마음속 깊은 곳 까지 쳐들어 갈 수 있는가이다. 자극하지 않고 타인에게 다가갈 수 있는 거리는?

                               

욕망을 앞세워 연인에게 다가가려 한다면 상대방은 달아나고 말 것이다. 두려움을 앞세운다면 당신 자신이 먼저 도망치고 말 것이다.


멋있기 위해서는 욕망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두려움을 버려야 하고 본능적 욕구를 이겨내야 한다. 욕망 때문에 다가간다 하더라도.


미학은 유혹하는 기술이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나 자신에게 다가오게 하는 기술이다. 놀래키지 않고 상대방에게 다가가는 기술이다.


엄마는 포근함으로 하여 아기로 하여금 자신에게 다가오도록 유도한다. 아기는 귀여움으로 하여 엄마에게 다가감을 허락받는다.


어미는 새끼를 품기 위하여 발톱을 감춘다. 공작의 수컷은 암컷을 끌어당기기 위하여 꼬리깃을 자랑한다. 자연은 아름다움을 통해 소통한다.


자연이 아름다운 이유는 소통하기 위하여 방해물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소통 역시 자연의 소통을 본받지 않으면 안 된다.


슬며시 다가갈 수 있을까? 살그머니 다가오게 할 수 있을까? 놀래키지 않고 상처주지 않고 자극하지 않고 훼손하지 않고.


곰과 호랑이를 한 우리에 가두어 둔다면 반드시 싸움이 일어난다. 개와 원숭이라도 그러하다. 무리없이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는 최적의 거리는?


멋은 어렵다. 부부가 하나의 가정에 공존한다 해도 서로를 침범하고 만다. 서로를 훼손하고 만다. 둘 중 하나는 약화되고 만다.


만약 남편이 가정의 행복을 위해 아내의 사회적 활동을 축소시킨다면 그만큼 상대방을 훼손한 것이다. 그렇다면 멋 없다. 아름답지 않다. 실패다. 


공존하면서도 침범하지 않고 도리어 서로의 역할을 극대화 하는 것이 멋이다. 참는 것은 적고 얻는 것은 커야 한다. 그럴 수 있을까?



호연지기를 깨달음


깨달음은 미학을 깨닫는 것이다. 맹자는 호연지기는 인격적으로 내면화 된 미학적 태도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호연지기를 얻는 것이다.


호연지기는 맹자의 유교적 이상주의에서 유래한다. 도덕적 지고함이 주는 당당한 태도가 카리스마를 이루어 천하와 더불어 널리 소통함을 말한다.


호연지기(浩然之氣)의 호(浩)는 호수와도 같은 넓음을 의미한다. 작은 일이 얽매이지 않고 폭넓게 소통할 수 있음을 말한다.


군자라면 성별과 인종과 계급과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자연과도 소통하고 역사와도 소통하고 진리와도 소통해야 한다.


호연지기는 인격적 완전성을 표상하는 정신의 기상(氣像)이다. 기상은 내면의 기운이 얼굴에 나타난 모습이다. 호연지기는 바르고 곧고 강한 정신이다.


호연지기는 인격적으로 내면화 된 미학이다. 완전의 경지를 탐해야 한다. 정상의 경지를 욕망해야 한다. 우주적인 시야를 얻어야 한다.


소년은 순수가 미학이고 학생은 치열함이 미학이고 청춘은 낭만이 미학이고 장년은 대범함이 미학이고 노년의 여유로움이 미학이다.


맹자는 호연지기가 미학이고 선종불교는 소요자재가 미학이고 노자의 무위가 미학이고 소크라테스는 기개가 미학이고 니체는 반항이 미학이다.


미(美)에 굶주리고 멋에 굶주리고 의(義)에 굶주리고 순수에 굶주려야 한다. 순수에 굶주리고 치열함에 굶주리고 낭만에 굶주려야 한다.

다투되 금전을 다툴 일이 아니라 진리를 다투어야 한다. 대결하되 라이벌과 대결할 것이 아니라 신(神) 앞에서의 정면승부여야 한다.


욕망하되 천하를 욕망해야 한다. 우주적인 규모의 스케일을 가져야 한다. 정상에서의 시야를 얻어야 한다. 더 높은 가치를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욕망할 일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인격을 욕망할 일이다. 신의 마음과 하나되기를 욕망할 일이다. 거침없이 나아갈 일이다.


언어를 깨달음


깨달음을 말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진정 무엇을 깨달았다는건지 모르겠다. 생산이 있어야 한다. 토해놓은 것이 있어야 한다. 낳음이 있어야 한다.


예수는 기독교를 낳았고 석가는 불교를 낳았다. 불교건 기독교건 나름대로 꾸려진 소통의 체계다. 그 중심에 이상주의가 있다.


불교는 불교식 이상주의가 있고 기독교는 기독교식 이상주의가 있고 유교는 유교식 이상주의가 있고 사회주의는 사회주의식 이상주의가 있다.


이상주의가 심이면 미학이 날이다. 불교에는 불교미학이 있고 기독교에는 기독교 미학이 있고 유교는 유교미학이 있고 사회주의는 사회주의 미학이 있다.


모든 형태의 이상주의는 신의 완전성으로부터 연역되는 것이다. 종교든 사상이든 신의 방송국에서 넘겨받아 중계하는 지방방송에 불과하다.


종교도 학계도 불완전하다. 종교는 참여자 숫자가 늘어날수록 소통의 질이 낮아진다. 학계는 질의 깊이에 다다를수록 소통의 폭이 협소해진다.


가족은 작은 소통의 단위다. 종교는 가족 보다 약간 더 큰 규모의 공동체를 이루고 소집단 안에서 내부적인 소통에 성공할 뿐이다. 그것은 교회다.


국가나 세계 단위로 나아가면 종교가 도리어 소통의 장벽이 되곤 한다. 종교가 오히려 모든 불화의 원인이 된다. 허다한 전쟁이 종교 때문에 일어난다.


반면 학계의 소통은 국경을 초월한다. 민족도 초월하고 성별도 초월하고 계급도 초월한다. 학계는 기본적으로 세계 단위로 소통한다.


학계의 폐단은 분야가 세밀하게 나누어져 있다는데 있다. 한 분야의 정상에 다다를수록 소통의 폭은 점차 좁아지고 만다.

이론물리학의 정상이라면 전 세계를 통털어 몇 명이 알고있을 뿐이다. 학계는 전공에 따라 장벽을 세우고 좁은 범위 안에서 각기 따로놀고 있다.


한국에서 한의학과 양의학은 소통하지 않는다. 서로 상대방이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 든다. 같은 양의학 안에서 의사와 약사가 충돌하기도 한다.

종교도 학계도 불완전하다. 가족도 국가도 민족도 불완전하다. 완전한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난한 개인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나의 계획은 종교와 학계를 넘어 온전한 소통의 체계를 세우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공동체와 집단이 아닌 개인이 재발견되지 않으면 안 된다.


종교는 교회가 수단이고 학계는 강단이 수단이다. 개인에게 있어서 소통의 수단은 언어다. 인간에게 있어 소통의 1차적인 수단은 언어다.


나는 언어를 발굴하고 그 언어의 새로운 쓰임새를 찾아낸다. 나는 언어를 가공하는 장인이다. 나의 작업에 의해 언어가 더 많은 쓰임새를 가지기 원한다.


이 기록은 나의 언어를 간추려 묶고 있다. 나의 언어가 온전한 소통의 체계를 확립해 나아감에 있어 기여가 있기 바란다.


언어 이전에 마음이 있다. 언어는 마음을 기호에 실어 운반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결국 참된 진리의 승부는 마음에서 난다.


교회도 아니고 강단도 아니고 국가도 아니고 조직도 아니고 집단도 아니고 시스템도 아니고 강령도 아니고 교리도 아닌 마음에서 진실이 이루어진다.


그 마음에 자유를 주고자 한다. 마음이 헤엄칠 수 있는 바다를 알려주고자 한다. 그 마음이 또다른 마음과 만나 사랑하기 바란다.


영웅은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가죽을 넘기고 철학자는 언어를 남기고 개인은 사랑을 남긴다. 인간은 소통하고자 하고 그 소통의 결실은 사랑이다.


깨닫고자 하는 이유는 자유를 위해서다. 자유는 사랑할 자유다. 이것이 본질이다. 이 근본이 바르게 설 때 종교와 강단과 국가의 불완전은 극복된다.



나는 무엇을 깨달았는가?


나의 이야기는 인생으로부터 시작된다. 두어 살 꼬마다. 어느 순간 눈을 떠 보니 엄마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문득 두려움이 엄습해 온다.


나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두려워서 울었다. 그런데 내가 무엇을 두려워 했지? 문득 내가 덩그렇게 내던져진 존재임을 알았다.


그때부터 줄곧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의문이 하나. ‘엄마가 보이지 않는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지?’


그렇다. 내 앞에는 인생이 한 뭉터기 던져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길을 가야한다. 내가 울었던 것은 인생이 두려워서였다. 


엄마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내 존재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전략을 세워야 했다. 대비해야 했다.


왜 사는가 하는 의문. 나는 누구인가 하는 의문.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하는가 하는 의문. 돌발상황에 대비한 마음의 준비를 위한 방어논리는?.


인생은 지금 이 순간들의 집합이다. 이 순간이 있고 그 다음이 있고 또 그 다음이 있다. 그렇게 끝없이 이어져 있다.


지금 무언가를 만난다. 상황에 맞닥드린다. 그 만남들의 모임. 접촉과 대면으로 된 점들의 집합. 점들이 이어져 선을 이루고 선은 이어져 각으로 꺾인다.


만나고 만나고 또 만나면서 점차 상황에 맞물려들고 그렇게 누군가와 짝을 짓고 그 짝과 함께 서고 그러다가 하나되고 그렇게 소통한다.


처음은 신경질이지만 점차 정이 들고 점차 서로의 존재를 공유하게 되고 그렇게 소통의 깊이를 더해가는 것이다.


석가는 인생이 고(苦)라고 했지만 나는 인생이 허무임을 알았다. 고는 집착에서 나오고 집착은 멸(滅)해야 하며 그 방법은 도(道)다.


나는 인생이 허무임을 알았고 허무는 고립에서 나오며 그 고립을 끊어내는 것은 의미라는 것을 알았다. 그 의미의 끝에서 신의 완전성을 만난다.


인생은 허무다. 허무의 원인은 단절과 고립이고 허무의 결과는 비참이다. 그 비참의 극복은 소통이다. 관계맺기다.


인생은 허무, 허무는 고립, 고립은 단절, 단절을 끊는 것은 의미, 의미는 만남, 만남의 소통, 소통을 가능케 하는 것은 완성이다.


나는 세상이 크게 맞물려 있음을 보았고 그것이 구원의 동아줄임을 알았다. 그 줄 끝에서 신의 완전성을 보았다. 존재는 그 완성으로부터 연역된다.


인간 존재는 신의 완전성을 재현한다. 집단과 사회와 공동체의 조직화 이전에 종교와 학계의 시스템 이전에 각자가 제 자리에서 스스로 완성되어야 한다.


어떻게 스스로를 완성할 것인가? 그 완성은 미학적 완성이다. 미학은 만나기, 맞물리기, 함께 서기, 하나되기, 소통하기의 완성으로 이루어진다.


미학의 내면화는 자유다. 호연지기는 자유의 미학이다. 호연지기는 세상을 통째로 품어안는 기상이다. 가장 넓은 시야에 도달하기다.


종교의 미학은 선(善)이고 학계의 미학은 진(眞)이고 자연의 미학은 미(美)고 개인의 미학은 자유이고 존재의 미학은 성(聖)이다.


사랑은 개인의 완성인 자유에서 세계의 완성인 이상주의로 나아가는 징검다리다. 깨달음은 자유를 얻음이며 자유는 자신에게 사랑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나는 일찍이 세상이 크게 맞물려 있음을 알았고 그것이 구원이 동아줄임을 알았다. 그 줄의 끝에서 신의 완전성을 보았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관계망의 세계관을 깨달음


공(空)이나 무(無) 혹은 비움이나 내려놓음에 집착하는 사람이 있다. 비운다고 말하며 비움에 집착하고 내려놓는다고 말하며 내려놓음에 집착한다.


관계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관계로 보면 모든 것이 상대적이다. 비우는 것이 도리어 채우는 것이고 놓는 것이 도리어 붙잡는 것이다.


석가는 인연(因緣)이라 했다. 인연이 곧 관계다. 비우고자 하는 즉 비움의 인연에 붙잡히고 내려놓고자 애쓰는 즉 내려놓음의 인연에 붙잡힌다.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세상은 알갱이들의 집합이 아니라 관계망의 네트워크로 되어 있다. 존재는 원자(原子)가 아닌 구조로 되어 있다


관계로 보면 세상에 고유한 것은 없으며 만유는 관계를 맺는 양 당사자에 의해 상대적으로 규정된다. 그러므로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다.


물질의 세계는 점과 선과 각과 입체와 공간으로 단계적인 집적상을 이룬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상과 같아서 우리는 이를 거꾸로 보고 있다.

관계로 보면 점(點)은 ●이 아니라 맞닿아 있는 두 당구공 사이다. 그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아무 것도 없다. 세상은 아무 것도 없는 것들의 집합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천만에! 두 당구공 사이에 만남이 있다. 그러므로 세상은 만남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색(色)의 세계는 물질의 세계이고 공(空)의 세계는 관계의 세계다. 두 세계는 거울에 맺힌 상처럼 서로의 모습을 거꾸로 비춘다. 


존재는 ●들의 집합이 아니라 ‘사이’들의 집합이다. 나와 너 사이다. 나와 너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만남이 있다. 만남이 곧 인연이다.


원자 알갱이들이 모여 물질 존재를 이룬다고 보는 것은 색의 세계요 만남의 인연들이 모여 네트워크를 이룬다고 보는 것이 공의 세계다.


색의 세계는 거울에 맺힌 상과 같은 허상의 세계요 그림자의 세계다. 진상으로 보면 세상은 만남이 있고 관계가 있고 인연이 있을 뿐이다.


만남이 모여 맞물림을 이루고 맞물림이 모여 함께서기를 이루고 함께서기가 모여 하나되기를 이루고 하나되기가 모여 소통을 이룬다.


◎ 색(色) - 세상은 ●들의 집합이다.

◎ 공(空) - 세상은 ●와 ●의 사이에 있는 만남들의 집합이다.


●와 ● 사이에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세상은 아무 것도 없는 것들의 집합이다. 아니다. ●와 ● 사이에 만남이 있다. 세상은 만남의 집합이다.


입버릇처럼 비워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직 비우지 못한 사람이고 입버릇처럼 놓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직 놓지 못하는 사람이다.


비움도 만남이고 내려놓음도 만남이다. 비움도 관계고 내려놓음도 관계다. 비움도 인연이고 내려놓음도 인연이다. 그렇게 인연은 쌓여만 간다.


무(無)는 무가 아니고 공(空)은 공이 아니다. 무(無)는 사이고 사이에 만남이 있고 만남은 인연을 이루고 인연은 관계맺기다. 이미 관계를 맺었다.


비운다고 말하며 비움의 인연을 쌓고 놓는다고 말하며 놓음의 인연을 쌓는다. 비움과 놓음과 공(空)과 무(無)에 집착하는 한 그 인연 끊지 못한다.


손에 쥔 것을 내려놓을 때 다른 세계를 만날 수 있다. 만난 사람이 비운 사람이고 관계를 맺고 소통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비운 사람이다.



맥락을 깨달음


언어와 그 언어의 쓰임새를 알아야 한다. 철학자는 언어를 만들고 그 언어의 쓰임새를 구축하는 사람이다. 이 기록은 내가 구축한 나의 언어들이다.


석가는 인생을 고(苦)라고 했다. 누군가가 반론하여 ‘아니다. 나는 인생을 낙(樂)으로 본다’ 하고 대든다면 어떨까? 틀렸다.


고집멸도의 사성제 전체가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를 갖추고 있다. 사성제 안에는 원인과 결과로 이어지는 인과율의 시스템 구조가 숨어 있다.


비판하려면 석가의 고(苦)를 비판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숨은 인과논리의 이야기구조를 비판해야 한다. 이렇듯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보는 것이 맥락이다.


나는 ‘인간은 비참한 존재이다 고로 구원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은 비참하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틀렸다. 비참과 구원을 짝 지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인간이 비참한 존재인가 아닌가를 논하려 든다면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비참은 고립이고 구원은 만남이다. 석가가 고제, 집제, 멸제, 도제를 짝지어 보이듯이 비참과 구원, 단절과 소통을 짝지어 보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선과 악이 짝을 짓듯이 미와 추가 짝을 짓듯이 자유와 억압이 짝을 짓듯이 구원과 비참이 짝을 짓는다. 어떻게 짝을 짓는가가 중요하다.


나는 개념들을 짝 지어 보인다. 하나의 단어가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어야 하는지의 측면에서 그 쓰임새를 구축하여 보이는 것이다. 그것이 맥락이다. 

내가 ‘꽃이 아름답다’고 말하는데 누군가가 '꽃도 썩으면 냄새가 고약하다'고 우기며 참견한다면 그 사람과 논쟁해야 할까?


내가 미인이 예쁘다고 말하는데 누군가가 미인의 뱃속을 내시경으로 들여다 보면 전혀 예쁘지 않다고 반박한다면 그 사람과 논쟁해야 할까?


세상이 알갱이가 아니라 관계망으로 되어 있음을 깨달을 때 이와 같은 무지는 극복된다. 언어 역시 마찬가지다. 의미는 단어가 아니라 맥락에 있다.


꽃이 아름다운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를 논쟁하는 사람은 관계를 깨닫지 못한 사람이다. 인연을 깨닫지 못하고 색즉시공을 깨닫지 못한 사람이다.


인간이 선한가 혹은 악한가를 논쟁하는 사람은 아직 관계망의 세계관을 깨치지 못한 사람이다. 관계로 보면 모든 것이 상대적이다.


꽃이 아름다우면 그 아름다움을 매개로 우리는 의사소통을 한다. 인간이 선하면 그 선을 매개로 사회는 의사소통을 한다.


물론 장미에도 가시가 있다. 미인도 화장실에서는 추한 모습이 있을 수 있다. 인간도 악한 점이 있지만 그것으로 우리가 소통하지는 않는다.


소통을 기준으로 보는 것이 맥락을 아는 것이다. 맥락을 알게 되면 세상에 논쟁할 일은 하나도 없다. 모든 논쟁은 언어에 대한 깨달음이 없기 때문이다.


진보니 보수니 혹은 좌파니 우파니 혹은 돈오돈수니 돈오점수니 하는 세상의 모든 논쟁이 언어와 맥락에 대한 깨달음의 부재 때문에 일어난다.


소통의 관점으로 보면 난마처럼 얽힌 세상사의 모든 부조리와 모순과 대립과 갈등과 오해가 일거에 해소된다. 


선과 악, 음과 양, 여와 남, 밤과 낮, 하늘과 땅이 대립하지 않는다. 소통의 관점으로 보면 그 모든 것이 거대한 흐름 가운데 있다.


달리는 자동차의 앞과 뒤는 대립하지 않는다. 앞과 뒤가 대립하는 것은 그 자동차가 쓰임새를 잃고 그만 멈추어 섰기 때문이다.


인간은 선한 존재인가 악한 존재인가? 인생은 비참한가 아름다운가 만약 그렇게 질문하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그 자동차를 멈추어 세운 것이다.


석가는 인생을 고(苦)라고 말했지만 이는 동기부여에 불과하다. 사성제는 고집멸도(苦集滅道)가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를 가진다.


당신이 ‘인생은 낙(樂)이야’ 하고 반론하려는 찰나 이어지는 집과 멸과 도가 스스로 그 고(苦)를 해체해 버린다. 위대한 반전이 그 가운데 있다.


나는 인생은 비참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당신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반격하려는 찰나 바로 이어지는 구원에 의해 그 비참은 해소되어 버린다.


석가의 인연은 곧 인과법칙이다. 인과는 색과 공 그리고 공과 색 사이의 인과관계다. 그 원인과 결과 사이에 숨은 것은 무엇인가?


원인과 결과 사이에 도(道)가 있다. 고집멸도의 도(道)다. 도(道)는 길이다. 길은 정거장과 정거장을 잇는다. 잇는 것이 관계다. 도가 관계다.

인생은 비참과 구원 사이에 있다. 비참은 고립이고 구원은 만남이다. 인간이 비참한 존재라는 말은 당신은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는 뜻이다.


스스로 더 완성되어지기를 소망해야 하고 스스로 더 세련되어지고 고상해지기를 소망해야 한다. 그래야만 만나고자 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나의 글쓰기는 당신이 만약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 한다면 만나고자 하는 당신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나의 조언은 이상주의를 가져야 한다는 것, 더 높은 가치를 바라보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미학적 완성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정상에 도달한 사람을 만나려면 정상까지 올라가야 한다. 이창호를 만나 바둑을 두려면 이창호 만큼은 두어야 한다.


이창호와 한 판을 두고 싶은데 두지 못한다면 그것이 비참이다. 이창호만큼 실력이 늘어서 이창호와 한 판을 둔다면 그것이 구원이다.


그럴 때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인생에서 최고의 사건은 최고의 사람을 만나는 것이며 그 이외에 인생에 신통한 일은 없다.



언어의 쓰임새를 깨달음


‘자유는 사랑할 자유다.’ 이것은 나의 말이다. 자유와 사랑이라는 두 단어를 연결지어 보이고 있다. 자유라는 단어의 쓰임새를 구축하여 보이는 것이다.


춘향의 사랑은 춘향의 자유에 연동되어 있다. 춘향은 기생이고 기생은 천민이다. 그러므로 춘향에게는 자유가 없다. 자유가 없으므로 사랑할 수 없다.


춘향이 자유를 쟁취한 즉 사랑을 쟁취한 것이다. 자유의 크기는 사랑의 크기에 비례한다. 사랑이 없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뗄레야 뗄 수 없다. 선과 악이 하나의 세트를 이루듯 비참과 구원이 동전의 양면이 되듯 자유와 사랑은 한묶음이다.


자유와 사랑과 함께 선다. 자유가 서면 사랑이 서고 자유가 쓰러지면 사랑도 쓰러진다. 깨달음은 대자유에 서는 것이고 그것은 큰 사랑을 세우는 것이다.


사랑없는 자유가 무의미라면 자유 없는 사랑은 불가능이다. 자유가 약했던 왕조시대에 사랑도 약했다. 그때는 정략결혼이 다반사였다.


인류의 자유가 신장되어 온 만큼 사랑도 심화되어 왔다. 인류문명의 진보는 자유의 폭을 신장하는 것이며 그 결실은 사랑의 질을 심화하는 것이다.


이렇듯 나는 자유와 사랑이라는 얼핏 보기에 관련이 없어보이는 두 단어를 짝지어 보임으로써 자유와 사랑이라는 단어의 쓰임새를 확장해 보인다.


이렇듯 나는 미학을 이야기하고 소통을 이야기한다. 영성을 이야기하고 관(觀)을 이야기하고 심(心)을 이야기하고 날을 이야기한다.


언어를 깨달음은 그렇게 언어의 쓰임새를 구축하고 확장해 보이기다. 그럴 때 세상의 모든 논쟁이 해소되고 모든 분란이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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