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문법
깨달음은 자연의 패턴복제를 인간의 인식의 결과 일치시키는 것이며,
애초에 인간 내부에 깨달음을 복제할 수 있는 도구를 가지고 있어야 하오. 그것은 언어이오.
인간의 사고는 언어에 의해 제한되니 언어에 맞춰 자연의 사실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맞추어 언어의 결을 바꾸어야 하오.
보통사람의 보통언어는 전제를 생략하고 진술에서 시작하니 주어 이전의 것을 보지 못하오.
문장의 주어와 동사의 대칭이전에 전제와 진술의 대칭이 존재하오.
상부구조의 대칭(전제와 진술)이 하부구조의 대칭(주어와 동사)과 연동되니 호응이오.
깨달음은 자연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결과 언어의 결을 일치시키니 어색함이 없소.
보통사람의 보통어는 언어 내에서 대칭을 갖추지 못하고 상대방과 대칭을 필요로 하니
어색하오.
언어 내에서 대칭을 갖추니 곧 메커니즘이요. A면B 이오.
닫힌계 내의 a의 변화는 b의 변화를 일으키니 느껴지는 것은 꽉찬 풍선의 충만함이오.
한쪽을 누루면 다른쪽이 부풀어오르오.
A와 B의 소실점은 동사가 아닌 명사로 나타나니 느껴지는 것은 단단한 존재의 근원이오.
전제와 진술의 대칭은 주어와 동사의 대칭으로 복제되니 완전한 것은 사건의 복제이오.
대칭은 2이나 에너지를 태우면 1이니, 머리에서 꼬리로 에너지의 방향성이 있소.
사건은 층위가 있으나 문장 안에서는 층위가 나타나지 않으니 언어의 실패이오.
빛과 어둠은 대칭이나 빛은 머리고 어둠은 꼬리오.
빛은 스스로 존재하나 어둠은 빛의 부존으로만 존재하니 반존재오.
직원없는 사장은 있으나 사장없는 직원은 없으니 곧 존재와 반존재오.
언어는 사장과 직원을 같은 층위에서 나타내니 에너지를 포착할 수 없소.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방향성을 보는 것이 깨달음이오.
전제를 생략하고 진술을 하니 곧 가짜 호응이오. (국가를 위하여, 가족을 위하여)
전제를 밝히니 곧 공동체, 상부구조가 드러나오.
문장에 스스로 에너지원을 담으면 담론이오. 에너지원을 담지 않고
말을 하면 어색하니, 상대에게 에너지가 있는 약자의 반격하는 포지션이오.
에너지는 상부구조에 있으니 천하의 에너지에서 나의 에너지로 복제하는
담론이면 완전하오.
이다/있다/같다/옳다/맞다 는 사건의 층위와 언어의 층위를 일치시키려는 노력이오.
맞다/틀리다에 골몰하는 한 사건을 일으키는 주최측이 아니라 손님 포지션이오.
'담대한 희망' 에는 미래로의 방향성과 내부의 열정이 있으니 에너지가 있소.
에너지를 찾고, 에너지의 방향성을 찾고, 에너지의 진행에 따른 층위를 찾고
언어를 틀어 일치시키면 곧 깨달음의 문법이오
동렬님 리플 이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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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 - (담론이라는 말은 내가 갖다붙인 말이니 검색할 필요없음. 이하 다른 용어도 마찬가지.)
"이게 이렇게 하면 저게 저렇게 된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해봤더니 과연 저렇게 되더라."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르는 떡이 있다. 내가 그 떡을 먹어봤더니 졸라리 맛있더라."
"바람이 세게 불면 촛불이 꺼진다. 어젯밤에 바람이 세게 불었는데 과연 촛불이 꺼지더라."
담론은 구조를 반복하게 되며 에너지를 태우고 가며 그 안에 방향성이 있습니다.
언어는 사건을 전달하며 전달하려면 포대기가 있어야 하고 그 포대기에 알맹이를 싸서 전합니다.
완전한 언어는 반드시 그것을 싸서 전달하는 포장지가 있어야 합니다.
명제는 조건문+반복문으로 세팅되는 담론에서 앞대가리를 떼내고 뒷부분만 진술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해봤더니 과연 저렇게 되더라."
"내가 그 떡을 먹어봤더니 졸라리 맛있더라."
"어젯밤에 바람이 세게 불었는데 과연 촛불이 꺼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