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을 깨달았는가?
나의 이야기는 인생으로부터 시작된다. 두어 살 꼬마다. 어느 순간 눈을 떠 보니 엄마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문득 두려움이 엄습해 온다. 나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두려워서 울었다. 그런데 내가 무엇을 두려워 했지? 문득 내가 덩그렇게 내던져진 존재임을 알았다. 그때부터 줄곧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의문이 하나. ‘엄마가 보이지 않는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지?’ 그렇다. 내 앞에는 인생이 한 뭉터기 던져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길을 가야한다. 내가 울었던 것은 인생이 두려워서였다. 엄마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내 존재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전략을 세워야 했다. 대비해야 했다. 왜 사는가 하는 의문. 나는 누구인가 하는 의문.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하는가 하는 의문. 돌발상황에 대비한 마음의 준비를 위한 방어논리는?. 인생은 지금 이 순간들의 집합이다. 이 순간이 있고 그 다음이 있고 또 그 다음이 있다. 그렇게 끝없이 이어져 있다. 지금 무언가를 만난다. 상황에 맞닥드린다. 그 만남들의 모임. 접촉과 대면으로 된 점들의 집합. 점들이 이어져 선을 이루고 선은 이어져 각으로 꺾인다. 만나고 만나고 또 만나면서 점차 상황에 맞물려들고 그렇게 누군가와 짝을 짓고 그 짝과 함께 서고 그러다가 하나되고 그렇게 소통한다. 처음은 신경질이지만 점차 정이 들고 점차 서로의 존재를 공유하게 되고 그렇게 소통의 깊이를 더해가는 것이다. 석가는 인생이 고(苦)라고 했지만 나는 인생이 허무임을 알았다. 고는 집착에서 나오고 집착은 멸(滅)해야 하며 그 방법은 도(道)다. 나는 인생이 허무임을 알았고 허무는 고립에서 나오며 그 고립을 끊어내는 것은 의미라는 것을 알았다. 그 의미의 끝에서 신의 완전성을 만난다. 인생은 허무다. 허무의 원인은 단절과 고립이고 허무의 결과는 비참이다. 그 비참의 극복은 소통이다. 관계맺기다. 인생은 허무, 허무는 고립, 고립은 단절, 단절을 끊는 것은 의미, 의미는 만남, 만남의 소통, 소통을 가능케 하는 것은 완성이다. 나는 세상이 크게 맞물려 있음을 보았고 그것이 구원의 동아줄임을 알았다. 그 줄 끝에서 신의 완전성을 보았다. 존재는 그 완성으로부터 연역된다. 인간 존재는 신의 완전성을 재현한다. 집단과 사회와 공동체의 조직화 이전에 종교와 학계의 시스템 이전에 각자가 제 자리에서 스스로 완성되어야 한다. 어떻게 스스로를 완성할 것인가? 그 완성은 미학적 완성이다. 미학은 만나기, 맞물리기, 함께 서기, 하나되기, 소통하기의 완성으로 이루어진다. 미학의 내면화는 자유다. 호연지기는 자유의 미학이다. 호연지기는 세상을 통째로 품어안는 기상이다. 가장 넓은 시야에 도달하기다. 종교의 미학은 선(善)이고 학계의 미학은 진(眞)이고 자연의 미학은 미(美)고 개인의 미학은 자유이고 존재의 미학은 성(聖)이다. 사랑은 개인의 완성인 자유에서 세계의 완성인 이상주의로 나아가는 징검다리다. 깨달음은 자유를 얻음이며 자유는 자신에게 사랑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나는 일찍이 세상이 크게 맞물려 있음을 알았고 그것이 구원이 동아줄임을 알았다. 그 줄의 끝에서 신의 완전성을 보았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