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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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6061 vote 0 2008.12.30 (23:36:35)

 그리스인처럼 사유하라

사유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연역과 귀납이다. 연역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나아가고, 귀납은 부분에서 전체로 나아간다. 전체는 진리(眞理)고 부분은 나(我)다. 진리로 부터 출발해야 바르다.

문제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연역적 사고를 하지만 타인과의 대화나 논리의 전개에 있어서는 귀납으로 바꾸어 설명한다는 것이다. 연역은 경험에 의한 직관이다. 연역으로 판단해 놓고 귀납으로 설명하는 식이다.

자신이 어떤 원인에 의해 그러한 판단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의 경험과 판단을 믿지 않고 타인에게 논리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만 인정한다. 그러므로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게 된다.

귀납은 논리구조가 겉으로 드러나 있다. 자기 자신으로 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자신과 직접 이해관계가 닿아있으므로 설명할 수 있다. 자신이 스스로 납득할 뿐 아니라 타인도 충분히 이해시킬 수 있다.

연역은 논리구조가 감추어져 있다. 연역은 진리로부터 출발한다. 그런데 인간이 그 진리를 모른다. 진리와 내가 다이렉트로 연결되는 매커니즘을 모르므로 설명할 수 없다. 이 경우 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는다.

귀납은 ‘나’로 부터 시작한다. 나와의 상관관계를 따라간다. 그 관계는 보통 이해관계다. 나에게 이익이 되거나 혹은 손해가 되는지를 판단하고 그 이익과 손해의 정도에 따라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

선종불교에서 선사(禪師)들이 ‘나를 버려라’ 하고 주문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모든 일의 가치를 나와 상관된 정도에 따라 판단한다. ‘나≫나의 가족≫나의 이웃≫나의 국가≫나의 세계’ 순으로 사유를 발전시킨다.

잘못이다. 사실이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은 나의 실생활과 상관이 없다. 이라크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나와 전혀 상관이 없다. 나와의 상관있는 정도로 판단한다면 인간은 잘못 판단하게 된다.

진리는 관념이고 추상이다. 진리는 나와 상관없어 보인다. 진리와 나의 상관관계를 논리적 정합성에 따라 설명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진리가 불변하므로 우리가 그 진리에 의지하여 약속하고 결정하고 실천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길을 가다가 어떤 폭력배가 노약자를 폭행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였다면 어떨까? 그 일은 나와 상관있는 일인가 아니면 나와는 상관이 없는 남의 일인가? 이 문제를 논리로 판단할 수 있을까?

‘공동체’라는 개념이 있는 사람은 그 사건이 나와 상관이 있다고 여긴다. 공동체라는 개념이 없는 사람은 남의 일로 여긴다. 그런데 그 공동체라는 개념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다.

흔히 쓰는 ‘개념이 있다’는 표현이 그것이다. 개념이 있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무지 개념이라곤 없기 때문에 나와의 관련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배워야 한다. 계몽되어야 한다.

계몽에 의하여 ‘나≫가족≫이웃≫국가≫인류’로 사유가 발전되어 가는 과정이 있다. 계몽되지 못한 사람들은 나와 나의 가족 정도를 판단의 근거로 사용할 뿐 그 이상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한다.

내가 폭행을 당하면 맞대응 할 것이다. 내 가족이 당하는 현장을 목격한다면 역시 달려들 것이다. 그러나 내 가족이 아니면 지나치고 만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양심의 목소리가 ‘그래서는 안돼!’ 하고 속삭이지만 못들은 체 한다.

나라를 일본에 빼앗겨도, 조중동이 행패를 부려도 왜 내가 나서야 하는지를 깨닫지 못한다. 다만 근대적인 중등교육에 의해 국가의식과 공동체의식이 주입된다. 개념이 주입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주입된 인식은 진짜가 아니다.

당신이 폭력의 현장을 외면한다면 언젠가는 당신도 그런 꼴을 당하고 후회하게 될 것이라든가, 혹은 당신이 장애인을 돕지 않는다면 당신이나 당신의 가족이 다쳤을 때 후회할 것이라는 식의 계도는 먹히지 않는다.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나와 상관없이, 나를 떠나서, 나를 버리고, 에고를 극복하고, 집착을 끊고, 아상(我相)을 비우고, 오로지 아름다움과 아름답지 않음의 미학적 기준으로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

한 마리 살쾡이가 어린 병아리를 공격하는 모습을 본다면 연민을 느낄 것이다. 연민을 느끼지 않는 사람도 있다. 단지 병아리가 가엾기 때문에, 곧 병아리의 죽음이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 때문에 개입한다면 멀었다.

● 병아리의 죽음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 그러므로 병아리의 죽음은 나와 상관이 있다. ≫ 그러므로 나는 살쾡이의 병아리 공격사건에 개입한다.

이런 식이면 틀렸다. 귀납논리의 오류다. 그건 순수했던 어린 시절 이야기고 조금 나이를 먹으면 감정이 무뎌져서 마음이 아프지 않게 된다. 한 마리 병아리의 죽음은 못본 척 하면 그만이다.

귀납논리의 오류를 극복해야 한다. 판단기준에서 나를 제외해야 한다. 그 사건이 내게 어떤 영향이 있고, 내게 어떤 필요가 있고, 내게 어떤 쓸모가 있는가를 기준으로 판단해서 안 된다.

연역적 사유는 진리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진리를 모른다는게 문제다. 진리는 자연의 완전성 속에 숨어 있다. 완전성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진리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자연의 완전성은 어떻게 포착 되는가? 자연스러움과 떳떳함으로 포착된다.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며, 나로 하여금 전율하게 하는 것이며, 깨어나게 하는 것이며, 울림과 떨림이 전파되는 것이다. 공명하고 소통하는 것이 완전하다.

자연의 반복되는 패턴에서 완전성을 포착할 수 있다. 오늘 아침에 뜬 태양이 약속을 지켜서 내일 아침에도 뜬다면 완전하다. 반면 약속을 지키지 않고 내일은 다른 종류의 반쪽 태양이 출현한다면 불완전하다.

완전을 기준으로 본다면 어떨까? 내 안에 있는 연민과 자비심을 사용하지 않는 나는 불완전하다. 그것은 어색한 것이며 떳떳하지 않다. 부끄러운 것이다. 내 안의 연민과 자비심을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시속 220킬로의 속도를 낼 수 있는 멋진 자동차가 그 속도를 내어보지도 못하고 폐차장으로 직행한다면 어떨까? 그것은 불완전한 것이다. 내 안의 모든 잠재한 가능성을 완벽하게 끌어내고 보는 것이 완전하다.

호랑이는 맹수답게 포효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꽃은 꽃답게 예쁜 것이 자연스럽고, 나는 내 안의 동정과 연민을 드러내는 것이 자연스럽다. 내 안의 숨은 양심과 도덕성을 끌어내어 진정한 나에 도달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살쾡이가 병아리를 공격하는 광경을 보았다면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자연스러울까? 그 사건이 내게 어떻게 이익 혹은 손해가 되는지를 판단하거나 혹은 살쾡이가 악(惡)이라고 단정하면 어리석은 귀납의 논리다.

그것은 오히려 불순한 동기다. 그 사건은 나와 관계가 없다. 살쾡이는 살쾡이일 뿐 그 살쾡이이 행동은 선(善)도 아니고 악(惡)도 아니다. 내가 그 병아리를 돕는 이유는 그것이 내 존재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결코 병아리가 선이고 살쾡이가 악이라는 논리적 판단 때문이 아니다. 병아리를 키워서 먹으려는 이기적 목적 때문도 아니다. 어떤 이해관계 때문이 아니다. 순수한 나의 존재의 모습 그 자체로 대응해야 한다.

큰 나무가 그늘을 드리워 길손이 쉬어감을 허용하듯이 나는 내 품에 날아든 생명을 보호한다. 그것이 온전한 나다. 나무가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감추고 나그네에게 그늘을 베푸는 것은 전혀 아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내 영역 안으로 들어온 병아리를 살쾡이로 부터 보호하는 것은 어떤 목적과 의도가 있는 행동이 아니다. 다만 순수한 나는 내 영역 안에서는 원래 그렇게 한다. 그것이 더 나의 완전에 가깝다.

그늘을 드리우지 못하는 나무, 길손에게 다리쉼을 베풀지 못하는 나무는 불완전하다. 내 품에 뛰어든 생명을 보호하지 못하는 나는 불완전하다. 나는 언제라도 완전을 지향할 뿐이며 이러한 판단은 직관이고 연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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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의 매력은 그리스인 특유의 연역적 사고에 있다. 그들의 논리는 ‘완전’으로 부터 시작한다. 완전에 가까운 정도에 따라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규칙이 있다. 이는 우리의 일상적 사고와 다르다.

르네상스로 부활한 그리스 정신의 본령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연의 완전성을 향한 집요한 탐구다. 우리는 단지 7등신의 인체비례와 황금비례 따위를 들어서 알고 있을 뿐이지만 그리스인들은 참으로 집요하게 탐구하고 있다.

그리스 신화의 전개는 연역적 구조를 따른다. 연역이므로 경험적이고 직관적이고 비논리적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아름다움이 있다. 논리적 정합성 여부를 떠나 인간을 전율하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 광채가 있다.

꽃은 아름답다. 왜 아름답지? 그리스인은 아프로디테 여신이 콧김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완전한 아프로디테가 꽃에 축복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프로디테의 완전성이 그 꽃 안으로 침투해 있는 거다.

내가 꽃을 만지면 꽃 속에 침투해 있는 완전성이 내게 옮아온다고 여긴다. 아프로디테 신상의 발등에 입을 맞추면 그 아름다운 신의 어떤 기운이 내게로 옮겨져서 나 역시 아름다워질 것으로 믿는다.

여기에 연역적 사유가 있다. 추상적 사유가 있다. 자연의 완전성을 포착하는 지혜가 있다. 그리스인의 사고를 배워야 한다. 그들은 연역적으로 사유했다. 진리의 완전성을 기준으로 사유했던 것이다.

사실이지 인간은 본래 연역적으로 사유한다. 단지 자신의 사유가 일구어낸 성과를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을 뿐이다. 연역은 직관인데 직관이 어떤 매커니즘으로 작동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의 직관을 자기 자신이 납득할 수 없고 타인에게 설명할 수도 없다. 이때 인간은 자연의 완전성과 감응하여 얻어낸 직관적 지혜를 논리적인 추론으로 얻은 지식인 양 가장하고 자기를 기만한다.

체험과 직관이라고 솔직하게 말하지 않고 꾸며댄 논리로 설명하려 든다. 말과 행동이 달라진다. 거짓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초등학생의 일기가 특히 그렇다. 느낀 바를 쓰지 않고 어떤 규칙에 맞추어 거짓일기를 쓴다.

일기는 사건을 기록하는 것이다. 그것이 독립하여 사건이 되는 이유는 공감 때문이다. 그 공감을 포착하지 못하므로 선과 악의 논리로 사건을 위조한다. 뭔가 잘못을 저질렀으며 반성한다는 식으로 이야기의 완결성을 꾸며낸다.

사건은 완결되어야 한다. 완결성이 없으면 그 사건을 왜 썼는지 자신이 납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기검사를 하는 선생님의 시선을 의식하고 선생님을 납득시키기 위한 목적의 귀납논리가 들어간 거짓일기를 쓴다.

공감에 의한 울림과 떨림이 사건을 완결시킨다는 사실을 포착하지 못하는 한 거짓일기는 계속된다. 그렇다. 솔직한 마음이 곧 진실은 아니다. 마음은 위조된다. 진실을 진실 그대로 유지하는 데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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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은 ‘나’에서 출발하여 나와의 관련성을 쫓아 ‘나≫가족≫공동체≫국가≫세계’로 귀납적 사유를 발전시킨다. 여기에 공간적 양(量)의 확대가 있을 뿐 질(質)의 비약이 없다. 교육에 의해 계몽되는 이런 사고는 실로 유치한 것이다.

‘나보다 가족을 위해, 가족보다 국가를 위해, 국가보다 세계를 위해’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금방 넘어가서 그것을 대의명분으로 삼고 흥분하여 달려든다. 실로 공허한 것이다. 모든 계몽되는 것은 허구다.

나의 건강을 위하여 이기심을 가지고 유기농 채소를 먹어야 할까 아니면 세계를 위하여 환경보호가 되게 유기농 채소를 먹어야 할까? 나를 위하여인가 아니면 세계를 위하여인가? 공허한 것이다.

전체주의가 잘 동원하는 이런 식의 논리는 속임수에 불과하다. 오늘날 좌파들의 논리도 이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위하여’는 가짜다. 귀납이므로 가짜다. 인간의 본성에서 멀어졌다. ‘의하여’가 진짜다.

‘나’란 곧 하나의 존재임을 깨달아야 한다. 나의 실존 위에 의미가 있고, 의미 위에 가치가 있고, 가치 위에 이야기(존엄)가 있고, 이야기 위에 진리의 완전성이 있다. 양의 전개가 아니라 질의 비약이다.

‘나≫가족≫공동체≫국가≫세계’로 사유가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미≫가치≫존엄≫진리’로 발전하는 것이다. 진리는 곧 자연의 완전성이다. 그리고 인간의 사유는 자연의 진리 그 자체와 직통한다. 직관한다.

유기농 채소와 나의 존재가 직통해야 한다. 그 사이에 가족≫공동체≫국가 따위의 중간단계는 배제해야 한다. 나를 위해서도, 가족을 위해서도, 국가를 위해서도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논리에 의해 가능한가?

꽃은 아름답다. 이는 판단이 아니다. 이성이 아니다. 지식이 아니다. 어린아이가 더 잘 안다. 만약 그것이 이성이고 판단이라면 어른이 더 잘 알 것이다. 그러나 자연에서는 어린이의 본능이 더 잘 반응한다.

한 송이 꽃이 피어있다면 어린이의 눈길은 자연히 그리로 향한다. 어린이의 손길은 자연히 그리로 내밀어진다. 거기에는 판단도 없고 이성도 없고 지식도 없다. 어린이는 결코 ‘저 꽃이 나와 무슨 상관이지?’ 하고 묻지 않는다.

‘저 꽃을 꺾어다 친구에게 주면 좋아하겠군’ 하고 작위가 들어간다면 가짜다. 보통은 그렇게 자기와 억지 연결시킨다. 자신의 미적 본성이 자연의 완전성과 절로 감응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목적의식과 연결시킨다. 자기기만이다.

한 송이 꽃은 완전하다. 연역은 그 완전함에서 출발한다. 그것이 그리스인이 추구한 신성(神聖)의 개념이다. ‘진리≫존엄≫가치≫의미≫존재’의 순으로 연역함이 맞다. 완전한 한 송이 꽃에 온전한 진리가 숨어 있다.

그 진리 안에 존엄이, 그 존엄 안에 가치가, 그 가치 안에 의미가, 그 의미 안에 맞물려든 존재가 있으며 나는 그 존재의 일부다. 물이 아래로 흐르듯 그것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다. 진리에서 존재로 내려온다.

나의 건강을 위한 유기농 채소도 아니고, 세계의 환경보호를 위한 유기농 채소도 아니어야 한다. 세계의 완전성 그 자체로부터의 유기농 채소여야 한다. 세계는 본래 완전하다. 그 완전함과 나의 완전함이 그렇게 통한다.

깨달아야 한다. 세계가 불완전할 때 나도 불완전하다. 나의 이익이나 혹은 손해로 하여 나와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곧 온전한 나인 것이다. 세계를 해친다면 나를 해친 것이다. 세계는 본래 나의 일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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