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는 없다. 어제 팟캐스트에서 했던 이야기다. 수로부인 허황옥 이야기가 가짜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역사학에는 그런 식으로 당연히 가짜로 여겼는데 고고학적 유물로 보니 진짜더라는 패턴이 존재한다. 과거에는 중국의 하나라 상나라는 가짜라고 생각했는데 땅 파보니 나오더라. 갑골문은 근래에 발견된 거다. 갑골문 발견으로 빼도박도 못하게 진짜가 된 것이다. 손자병법도 그렇다. 손자인 손빈이 조상을 높이기 위해 소급하여 손자를 꾸며냈다는둥 여러가지 설이 분분했는데 마왕퇴에서 손자병법과 다른 손빈병법이 나와 빼도박도 못하게 확정되었다. 마왕퇴에서 도덕경도 나왔으니 노자가 가공의 인물이라는 설도 무색해졌다. 바이킹이 캐나다를 다녀갔다는 빈란드사가도 가짜로 여겼는데 캐나다 해안에서 바이킹 움집이 발견되었다. 트로이의 목마도 가짜로 여겼는데 하인리히 슐리만이 발견했다. 땅 파면 증거가 나온다. http://www.hankookilbo.com/m/v/807c08232...f4243ca636 과연 허황옥은 가짜일까? 우선 알아야 할 것은 가야가 가짜라는 거다. 가야라는 국가는 있어본 적이 없다. 김해의 금관국을 가야로 치는데 정확히는 가락 혹은 가량이다. 국명은 금관국 혹은 임나국 또는 구야국이다. 보통은 이름에 ‘나’ 자가 붙는다. 신라, 임나, 탐라와도 같다. 가야, 가락, 가라, 가량은 나라를 가리키는게 아니라 다른 의미다. 김해의 구야국, 함안의 안라국, 거창의 반파국 등이 있었을 뿐 금관가야, 아라가야, 대가야라는 것은 존재가 없다. 가야=국가는 아니다. 안나국에 ‘나’가 붙었음에 보듯이 이미 나라가 붙었는데 또 가야를 붙이면? ‘아라가야국’이라고 치자. 이를 번역하면 아나라나라나라가 된다. 이게 모야? 이런 미친 넘을 봤나? 역전앞도 유분수지 나라 이름이 아나라나라나라냐고? 말이나 돼? 가야는 국명이 아니라 지방명이며 그런 지방명이 생긴 것이 이유가 있다. 그래서 허황옥에 주목하는 것이다. “신은 본래 임나가량(任那加良) 사람으로 이름은 우두(牛頭)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이 “그대의 머리뼈를 보니 강수선생(強首先生)이라고 부를 만하다.”고 하였다.[나무위키]“ ‘임나가량’에서 임나는 국명이고 가량은 지방명이다. 정확하게 하면 국호는 ‘임’이다. 조선국이라고 하면 국명은 조선이지 조선국이 아니다. 고려 태조 왕건때 지방 호족들을 특별대우하며 일괄적으로 가야라는 이름을 붙인 거다. 가야가 없으니 가야연맹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서로 싸웠으며 각각 백제와 신라, 왜를 끌어들여 내분을 일으켰다. 이들이 백제와 신라에 먹힌 것은 제철업을 하며 상권을 두고 경쟁국을 제압하기 위해 다투어 백제와 신라를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철을 지배하는 집단이었고 금관국에 붙은 관官은 그런 의미다. 유물을 파보면 알 수 있다. 함안이든 고령이든 거대고분이 나온다. 그런데 성곽은 없다시피 하다. 주변에 먹고살만한 땅도 없다. 농사지을 땅도 없는 궁벽한 산골에 왜 거대무덤이 출현할까? 백제지역인 무주와 남원에까지 가야의 제철유적이 있다. 가야가 백제를 침략했을까? 아니다. 가야인이 거기까지 진출해서 활동한 것이다. 철의 지배권을 두고 금관가야, 아라가야, 대가야가 다툰 것이며 백제와 왜와 신라를 끌어들여 후견인으로 삼다가 후견국에 먹혔다. 가야지역에 산이 많고 강으로 연결된 점이 특징이다. 산이 있어야 철광석과 숯을 얻는다. http://blog.daum.net/ymc365/7620525 강이 있어야 무역을 한다. 가야는 제철활동을 하기 좋은 지역이다. 확실한 것은 인도에 가야지방이 있고 구글 어스로 확인할 수 있으며 아윳다라는 지명도 있는데 가야 근처에 있으며 가야의 상징과 그 지역의 상징물이 동일하다는 점이다. 가야의 제철기술이 어디서 왔는가? 당시 인도의 제철기술이 앞서 있었기에 바이킹도 인도의 철을 수입했다. 제철은 1200도 이상의 고온을 필요로 하는데 가야토기가 신라토기나 왜토기, 백제토기, 고구려토기보다 단단하다. 가마의 온도를 높이면 토기가 터지므로 얇게 만드는데 이는 가야토기만 가진 특징이다. 일본 하니와 하고 비교해 보면 확실히 다른걸 알 수 있다. 고대 인도인은 계절풍을 타고 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와 남아공까지 돌아다녔다. 마다가스카르 원주민은 인도인이다. 낙랑과 왜가 무엇때문에 거리가 까마득히 먼 가야까지 와서 철을 수입해갔는지 설명해야 한다. 경주 들판에는 굉장히 많은 토기로 만든 솥단지가 발견된다. 신라는 쇠솥을 쓰지 않았다. 그때까지 철이 일반적으로 보급되지 않았던 것이다. 임나일본부가 가짜인 것은 가야의 우수한 기술이 곧장 일본에 전해지지 않은 사실로 알 수 있다. 가야유물이 일본에 다수 발견된다. 그런데 핵심기술인 제철기술은 절대 넘겨주지 않았던 것이다. 임나일본부가 실제로 있었다면 당연히 일본에 제철기술이 넘어갔을 것이고 기술이 일본에 넘어갔다면 일본에게 가야는 필요없게 된다. 일본서기에 가야관련 기술이 나온다는 사실이 임나일본부가 가짜라는 증거다. 제철기술은 당연히 외부에서 넘어왔다고 보는게 합리적이다. 내부에서 자연발생했으면 가야가 그 기술로 한반도를 죄다 정복했을 것이다. 기술이 내부에서 저절로 생기는 일은 절대로 없다. 풀무를 만드는 것이 쉬운 작업은 아니다. 제철기술이 중국에서 넘어왔다고도 볼 수 없다. 낙랑은 중국에 속했기 때문이다. 북방 유목민에게서 왔다면 고구려가 먼저 그 기술을 확보했을 것이다. 기술이 쉽게 전파되지 않는게 임진왜란이 없었다면 도자기 기술이 일본에 전해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몽골의 정복이 없었다면 화약의 제조기술이 고려에 전해지지 않는다. 중국이 화약을 만들었다는건 그냥 해보는 소리고 아랍의 기술이 중국에 전해져 중국에서 한 단계 더 도약한 것이다. 몽골의 아랍정복에 의해 최무선이 화약을 만들어낸 것이다. 원래 화학은 아랍의 연금술사들이 일으킨 학문이다. 조선의 백자기술도 몽골에 의해 전해진 것이다. 주목할 점은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가 모두 전한과 후한의 교체기에 성립한 점이다. 신라사는 백년 정도 연대를 올려놨다고 봐야 한다. 보통 건국자가 자기 선대 조상부터 왕으로 세운다. 세종대왕도 해동육룡이 나르샤 하며 태조 이성계 이전의 할배들까지 왕으로 올려놨다. 왕망의 신이 몰락한 후 신라가 건국했다고 보는게 타당하다.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는 동시에 건국한 것이다. 이 시기에 중국에서 한반도로 대거 이주했다는 기록은 많다. 왕망이 외가쪽으로 흉노계라는 설도 있고 왕망의 편에 붙었던 흉노가 신라로 도망쳐왔다는 설도 있다. 핵심은 말이다. 그 시기에 철제무기 제작기술과 함께 말 타고 전쟁하는 기술이 한반도에 전해졌을 거다. 신라가 초기에 경주 주변을 다스렸다는 생각도 잘못이다. 말 타고 달리기 시작하면 금방 북쪽으로 말갈과 닿고 서로 낙랑과 마한에 이른다. 유목민은 광범위한 동맹을 맺는다. 혼인관계에 따라 종주국이 바뀌기도 한다. 말을 타고 전쟁을 하는즉 말이 며칠 사이에 이동하는 거리까지 국가가 건설된다. 말의 이동거리를 대략 200킬로 정도로 볼 수 있다. 그 이상의 먼 거리를 가려면 몽골인처럼 말을 여러마리 가져가야 한다. 요즘의 인터넷 붐과도 같다. 제철기술, 기마기술, 토기제작기술, 기와집 짓는 기술, 누에 치는 기술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와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국가의 탄생을 설명하려면 그 정도 되는 물적토대가 제시되어야 한다. 그 기술은 외부에서 와야 한다. 사람이 이동을 시작하면 단번에 전파된다. 기술이 조금씩 전해지지 않는게 사람이 이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원래 외부인을 만나면 반드시 죽인다. 사람이 이동을 가로막는 장벽이다. 그러므로 전쟁과 같은 대규모 격변이 일어나 한꺼번에 수만 명이 이동해야 국가의 탄생이 설명된다. 그 시대에 변화는 왕망의 활동이다. 허황옥 일파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중국 사천에서 우한으로, 그리고 한반도로 이주했다는 설이 있다. 정확하게는 허황옥 본인이 아니라 그 후손일 가능성이 있다. 즉 허씨들이 한반도로 온 것이며 그들이 허씨의 시조인 허황옥을 가야의 시조로 올려세운 것이라고 보면 그럴듯하다. 신라의 석탈해 이야기도 제철기술과 관계가 있다. 석탈해는 남의 땅에 숯을 파묻었다가 자기땅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제철활동을 의미한다. 사기쳐서 남의 땅을 빼앗았다는 것은 둘러댄 말이고 석탈해집단이 제철기술을 증명해서 왕으로부터 토지를 불하받았다고 봐야 한다. 석탈해 역시 바다를 건너온 것으로 되어 있다. 석탈해는 기원전 19년에 태어나 서기 80년에 99세를 살고 죽었다고 되어 있다. 이를 곧이 곧대로 믿을 필요는 없고 죽은 때는 맞다고 봐야 한다. 석탈해의 활동시기가 정확히 왕망의 몰락직후다. 신라는 이 시기에 강해진 것이다. “석탈해는 왜국 동북쪽 1천 리 바깥에 위치하는 용성국(龍成國) 혹은 다파나국(多婆那國)의 왕자로, 왕비가 임신 7년(?)만에 큰 알을 낳았고, 아버지인 함달파왕이 불길한 것이라고 생각해 배에 실어 내버렸다. 이후 배를 타고 신라 동해안의 아진포에 떠내려온 걸 노파가 건져내 알에서 깨어난 탈해를 키웠다. 탈해는 물고기를 잡으며서 어머니를 부양했지만 양어머니는 탈해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짐작해 공부를 시켰다고 한다. 장성한 뒤에는 금관가야에 가서 왕위를 내놓으라고 깽판(…)을 치다가 김수로왕에게 쳐발리고 신라로 가서, 이번에는 잘 먹고 잘 살고 있던 호공의 집을 속임수로 강탈(...)하고[1], 그 소문을 들은 남해 차차웅이 그가 지략가임을 알고 사위로 삼았다.” 이 때 갑자기 완하국(琓夏國) 함달왕(含達王)의 부인(夫人)이 아기를 배어 달이 차서 알을 낳으니, 그 알이 화해서 사람이 되어 이름을 탈해(脫解)라 했는데, 이 탈해가 바다를 좇아서 가락국에 왔다. 키가 3척이요 머리 둘레가 1척이나 되었다. 그는 기꺼이 대궐로 나가서 왕에게 말하기를, "나는 (금관가야)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소." 하니 왕이 대답했다. "하늘이 나를 명해서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은 장차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케 하려 함이니, 감히 하늘의 명(命)을 어겨 왕위를 남에게 줄 수도 없고, 또 우리 국민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 탈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술법(術法)으로 겨뤄 보려는가?"나루토? 하니 왕이 좋다고 하였다. 잠깐 동안에 탈해가 변해서 매가 되니 왕은 변해서 독수리가 되고, 또 탈해가 변해서 참새가 되니 왕은 새매로 화하는데 그 변하는머털도사? 것이 조금도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탈해가 본 모양으로 돌아오자 왕도 역시 전 모양이 되었다. 이에 탈해가 엎드려 항복한다. "내가 술법을 겨루는 마당에 있어서 매가 독수리에게, 참새가 새매에게 잡히기를 면한 것은 대개 성인(聖人)께서 죽이기를 미워하는 어진 마음을 가진 때문입니다. 내가 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툼은 실로 어려울 것입니다." 탈해는 문득 왕께 하직하고 나가서 이웃 교외의 나루터에 이르러 중국에서 온 배가 대는 수로(水路)로 해서 갔다. 왕은 그가 머물러 있으면서 반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급히 수군(水軍) 500척을 보내서 쫓게 하니 탈해가 계림(鷄林)의 땅 안으로 달아나므로 수군은 모두 돌아왔다. 그러나 여기에 실린 기사(記事)는 신라의 것과는 많이 다르다.[삼국유사] 석탈해는 가야에 먼저 왔다가 내분을 일으켜 신라로 이주했다. 제철기술이 있으면 그 기술을 필요로 하는 수요자를 찾아 이동하기 마련이다. 좋은 기술이 있는데도 외국으로 진출하지 않는게 더 이상하다. 중국에서 온 배가 대는 수로(水路)로 해서 갔다는 대목을 주목할 일이다. 바다 건너 중국과 교류를 했다는 말이다. 모르는 사람이 있는데 작은 배가 오히려 바다를 잘 건넌다. 조선통신사 일행이 부산에서 일본으로 갈 때 좋은 바람을 기다려 한달씩 동래에 머물러 있곤 했다. 그러나 비선이라 불리는 작은 배는 당일치기로 일본까지 쉽게 건너가곤 했다. 수백명이 타는 사신 일행이 화물을 잔뜩 싣고 중국을 가려면 매우 어려우므로 연안항해를 해야했지만 10여명이 타는 작은 배는 중국까지 단숨에 간다. 돛배가 시속 20킬로 정도로 가면 하루이틀에 중국까지 간다. 신안유물선은 초대형선이라 중국가기 어렵지만 작은 배는 잘 간다. 당시 중국에서 한반도나 일본을 오가는 것은 식은죽먹기다. 일본에서 편지를 부치면 비선이 대마도에서 하루 정박하고 다음날 부산에 닿는다. 통신사의 가족들이 부산에 머무르며 편지로 도쿄와 연락하곤 했다. 바이킹이나 왜구들은 작은 배를 탄 것이다. 인도까지도 쉽게 간다. 못 가는 이유는 중간에 해적을 만나거나 혹은 식량이 모자라거나 등의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이다. 작은 보트로 지구를 일주하는 사람도 있다. 그냥 가는건 쉽게 간다. 폴라네시아 섬사람들은 작은 카누를 타고 태평양을 잘만 돌아다녔다. 하와이에서 뉴질랜드까지 단숨에 옮겨갔다. 정리하자. 가야는 국명이 아니다. 이 이름이 왜 생겼을까? 당시의 제철기술은 지금과 달라서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철을 생산했던 것이다. 낙동강과 바다를 통해 철을 운반했다. 가야인들은 백제영토에도 깊숙히 들어가 일을 했다. 그 기술은 특별한 것이며 외부에서 전해왔다. 석탈해가 그 기술 하나로 신라를 먹었음에서 보듯이 매우 강력한 기술이었으며 그러므로 논밭이 하나도 없는 산골에 대형고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이 한반도에 관리를 파견해 애걸했어도 제철기술을 넘겨주지 않았을 정도다. 일본은 가야를 살려보려고 매우 노력했다. 왜 그랬을까? 고려청자가 그냥 생기고 조선백자가 그냥 생기는거 아니다. 그런 변화의 배경으로 반드시 거대한 전란이 있다. 남의 나라에 함부로 갔다가는 맞아죽는다. 그 나라를 정복하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 허황옥 집단이 제철기술을 가지고 외부에서 왔다면 모두 설명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