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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1만 인파의 외침이 조중동의 귀에도 들렸을까?
“효순이와 미선이를 살려내라”

월드컵 그날의 함성이 아직도 귀에 생생한데 다시 광화문에 함성이 메아리친다.
“효순이를 살려내라! 미선이를 살려내라.”

초, 중학생부터 50대 아저씨까지 손에 손에 촛불을 들고 조용하면서도 힘있게 외쳤다. 공룡같이 버티고 선 광화문 동아일보 사옥과 조선일보 사옥은 그래도 말이 없었다. 그들의 귀에는 정녕 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일까?

'앙마'라는 이름의 어느 네티즌이 게시판에 올린 작은 하나의 반딧불이 그 사이에 새끼를 쳤다. 소망의 반딧불이 온라인을 타고 번식하여 1만개이다. 촛불잔치다.

리본달기, 삼베달기의 놀라운 파급속도에 놀란데 이어 광화문에 모인 인파를 보고 깜짝 놀랐다. 경찰추산이면 1만 정도이겠지만 대학로에서부터 이어진 이날 행사의 전체 참가자는 3만을 넘지 않을까 싶다.

교보문고 출입구 옆의 모퉁이 벽에는 수백개의 촛불이 멋진 제단을 이루고 있다. 소녀들이 기도하는 심정으로 하나씩 둘씩 촛불을 세워놓는다. 장관을 연출한다. 참 아름답다

부시의 일방외교, 차인표가 출연을 거부한 사건으로 널리 알려진 한국을 비하한 내용의 영화 '007 어나더데이'의 개봉, 안톤 오노의 금메달 강탈,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무엇일까? 오늘 광화문에 모인 1만개의 반딧불은 다른 것이다. 단순히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려는 것도 아니고, 미군 운전병의 무죄판결에 대한 불만도 다는 아니다.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오랫동안 쌓여 있던 것이 한꺼번에 터져나오는 것이다. 그 사이에 한국은 부쩍 커버렸던 것이다. 비로소 대놓고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눈치 안보고 외쳐도 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거대한 발상의 전환이다.

재판권이양, 소파개정, 미군철수 주장들은 본질이 아니다. 그것만으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건 다른 거다. 월드컵 때 딴지일보의 어느 기사 한 토막이 생각난다.

"우리는 강팀이며 충분히 승리할 만큼 강하며 이겨도 된다. 하지만 그 간단한걸 지금까지 패배의식에 젖어서 애써 부정하고 싶었던 것이다. 맘껏 기뻐하며 패배의식을 날려 버리자."

그것은 콤플렉스다. 우리 자신을 짓눌러온 이 콤플렉스를 벗어던지지 못하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월드컵을 계기로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몰랐던 "강한 자에게 알아서 기는" 우리의 부끄러운 습관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던 것이다.

사퇴파동을 일으킨 KBS 황정민 아나운서는 반미시위를 '부끄럽다'고 말했지만 정작 부끄러워 해야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알아서 기게 만드는 무의식 속의 콤플렉스다.

생각하면 지금까지 이 나라에서 뭔가 아는 척이라도 하려면 "한국은 안돼! 그 엽전 근성이 어디가나"하고 자조 한마디부터 하고 나서야 대화가 시작되곤 했던 것이다.

멀지도 않은 10년 전 쯤이다. 예컨데 어떤 사람이 '선동렬이 메이저리그에서 뛴다면 어떻게 될까?' 하고 질문을 했다 치자 "뭐시라? 한국선수가 메이저리그에서 등판한다고? 이런 멍청한 녀석이 있나! 감히 비교할걸 비교해야지." 이런 식으로 쫑코를 주고서야 유식한 사람 행세가 되고,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은 입이 헤벌어져 감탄사를 던지곤 했던 것이다.

박찬호가 메이저리그를 주름잡고 박세리가 LPGA를 휩쓸면서 이런 풍조는 많이 사라졌다. 동남아에서 한류의 유행도 우리의 인식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렇다면 한국은 이제 되는 나라다.

월드컵을 통하여 우리는 콤플렉스를 벗어던졌다. 적어도 이 나라의 젊은이들은 그러하다. 인터넷이다. 정보의 공유시대이다. 부당한 권위는 정보의 차단으로 인한 신비감에 기생하는 법이다. 정보의 무제한적인 개방이 신비감을 사라지게 했고 콤플렉스를 떨쳐버리게 하는데 기여했다.

봐서 안될 것을 봐버린 것이다. 더는 알아서 길 필요도 없고 강한 자에게 굽히는 처세술을 공부할 필요도 없다. 우리 자신을 위한 한마당 굿판이다. 의식의 정화작업이다. 우리는 달라졌다. 적어도 신세대는 달라졌다. 그들이 스스로의 파워를 과시하기 위해 삼베달기 운동에다 촛불시위다.

그렇다면 깜짝 놀라야 한다.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빠르게 변한다. 무엇이 단 하룻만에 이 많은 사람들을 불러모았고 그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놓았을까? 그 변화들이 일시적인 선동의 탓이 아니라 네트워크라는 물적 토대에 기초한 근본적인 변화라는데서 더 충격받아야 한다.

조중동이 끝내 이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사라지게 될 것이다. 김종필처럼 조용하게 퇴출될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또 한번 역사의 현장을 지키며, 그 역사가 위대한 한 걸음을 내딛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 준엄한 역사의 명령을 듣고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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