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이란
read 2904 vote 0 2002.09.09 (15:47:19)

철학하기의 출발 -- 구조의 발견

여기에 어떤 것이 있습니다.
그 어떤 것의 존재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것을 손으로 집으려 할 때
비로소 문제가 되는 사실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구조입니다.

철학은 구조로부터 출발합니다.

여러분은 구조를 발견했습니까?
아니면 아직 구조를 발견하지 못했습니까?
이미 구조를 발견했다면 여러분은 철학을 시작할수 있고
미처 구조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여러분은 철학할수 없습니다.

먼저 구조를 발견하십시오.
구조는 말로 설명되기보다 몸으로 체험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학습의 영역이 아니라 깨달음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한 장의 종이가 있습니다.
그것을 손으로 집기는 매우 쉽습니다.
그것이 특별히 무거운 것이 아니고 뾰족한 가시도 아닙니다.
그냥 집으면 됩니다.

그런데 막상 집으려 하니까 얇아서 안집어집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손가락에 침을 발라야 합니다.

이렇게 겉보기에 아무 탈이 없었는데
막상 손대려 하니까 새롭게 대두된 문제를 /구조/라고 합니다.

옷이 하나 있습니다.
색깔도 예쁘고 박음질도 튼튼하고 디자인도 앙증스럽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옷을 입으려고 하니까
잘 안들어갑니다.

그러한 점은 실제 입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실제 체험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영역이 있습니다.
이 부분이 학습의 영역이 아닌 깨달음의 영역입니다.

바로 철학의 출발점입니다.
세상에는 구조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철학은 구조의 발견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것은 그냥 두고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가
막상 실제로 움직여서 행하려 하니까 새로이 대두된 문제들입니다.

구조가 가장 쉽게 발견되는 것이 건축입니다.
집을 지으려면 주춧돌과 기둥과 벽돌이 있어야 합니다.
그걸 적당히 줏어쌓으면 집이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건축자재들 ..주춧돌과 기둥과 벽돌과 기왓장들을
쌓기만 하면 집이 되는가?
천만의 말씀 ... 집이 안됩니다.

뭐가 하나 빠져 있습니다.
그 빠진 것은 실제 집을 지어보기 전에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자 뭐가 잘못되었을까요?
왜 겉보기에 아무 탈이 없는데
막상 손대려 하니까 뭐가 잘 안되는 걸까요?

여러분은 일상에서 이런 구조체험을 무수히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활에서 하루에도 수백가지의 구조를 발견할수 있습니다.
여기에 무언가 있다.
그것이 맘에 안든다.
바꿔보자.

근데 막상 바꾸려 하니까 안되는 거예요.
결코 예측하지 못했던 새로운 문제가 마구 대두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사소한 일일 것 같지만
더 크게 생각할수도 있습니다.

혁명을 하자.
혁명해야 해.
하면 된다.
근데 막상 하려하면 의외의 문제들이 마구 대두되어 혁명 안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구조주의자여야 합니다.
먼저 구조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혁명하기 전에 왜 혁명이 안되는지 이해할수 있습니다.
세상 그 모든 것에
실제로 경험해 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존재합니다.
그리하여 도서관 구석에 쌓인 먼지 묻은 먹물지식이 아니라
산 경험이 필요합니다.

가게를 열어 장사를 한시간만 해보면
이거 뭐 안될 수 밖에 없는 뭔가가 있다는게 느껴집니다.
설사 그걸 말로 설명하지 못한다손 치더라도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것 쯤은
체험으로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성과 이성의 차이입니다.
지성이 알고 있는 것을 아는 것이라면
이성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철학은 지성이 아니라 이성의 영역입니다.
구조..눈에 뜨이지 않는 것..실제로 손대봐야 알수 있는 것
그러한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어떤 판단이든
오류일 가능성을 전제해 버리는 것.

절대적인 확신은
절대적인 오류일수 있음을 인정해 버리는 것
그것이 이성입니다.

지성적이되 이성적이지 못한 경우를 얼마든지 발견할수 있습니다.
어떤 문제든 막상 해보려하면
예기치 못했던 문제들이 새롭게 대두됩니다.
그러므로 /아무개/ 일을 하는데 100의 비용이 들 것 같다면
200의 비용을 준비해야 합니다.

요모조모 따져보고 100만 준비했다가 실패하는 것이 지성이라면
차라리 목표를 50으로 낮출수도 있는 여유를 가지는 것이 이성입니다.

자 그렇다면 그 구조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여기 한 장의 종이가 있습니다.
그 종이를 손으로 집는데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막상 집으려 하니까 안집어질까요?
그건 손가락 탓이지 종이 탓 아닙니다.

우리는 종이만 보므로
손가락의 문제를 깨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좋은 옷이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입으려 하니까 입을수 없습니다.
그것은 옷의 문제가 아니라 옷을 입는 사람의 문제입니다.

구조란 그 종이와 손가락의 사이,
옷과 몸의 사이입니다.
그 사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배워서 아지 못하고 체험하여 아는 것입니다.

혁명이 실패하는 것은
마르크스의 방대한 언어 그 어디에도 이 사이라는 개념
구조라는 개념이 배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에서는 이 사이를 시장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시장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삼돌이 엄마와 개똥이 엄마가 담너머로 만나서 호박과
배추를 교환하려 하는 그 마음과 마음 사이에 시장이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성남에 모란장이나 괴산에 7일장만이 장이 아닙니다.
장터와 장은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장은 수요와 공급의 조건일치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물리적 존재형태가 아니라 상황조건의 형태입니다.

나사못 열 개를 박으려면 드라이버로 하나 돌리는데 10초 씩 걸립니다.
그렇다면 10개에 100초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나사못의 위치를 확인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빠져 있습니다.

나사못을 돌리는데 걸리는 시간은 절대시간입니다.
단축되지 않는 시간입니다.
숙련공이든 비숙련공이든 같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나 나사못의 위치를 확인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숙련공은 거의 시간이 안걸리고
비숙련공은 터무니 없이 시간이 걸립니다.

이게 자본주의냐 공산주의냐 하는 본질의 문제입니다.
농사는 농민이 짓는데 돈은 중상들이 법니다.
나사못을 돌리는데(농업) 걸리는 시간보다
나사못 위치를 찾는데(중개) 걸리는 시간이 길기 때문입니다.

중상들을 없애버리면 그 이익이 다 농민에게로 가느냐?
천만의 말씀입니다.
나사못 위치를 찾는데 걸리는 시간은 충분히 단축될수 있습니다.
국가나 협동조합이 중상들을 대신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발전은 끝없이 새로운 종류의 나사못들을 만들어냅니다.

필요한 것은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이란 이 세상 자체가 하나의 구조더라는 것입니다.
구조는 정보의 형태로 존재합니다.
이 세상 자체가
물질 알갱이가 아니라 하나의 정보로 되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루는 기본적 형태.. 근원으로서의 질료는
물질이 아니라 정보이더라는 것입니다.
물질을 자꾸 깨부수면 구조만 남고 다 사라져 버립니다.
원자를 깨면 소립자가 나오고 소립자를 깨면 더 작은 입자가 나오고 하다가
최종적으로는 구조 곧 비례관계만 남습니다.

이 세상은 알갱이로 된 것이 아니라 복잡한 정도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텅텅 빈 허공에 한없이 큰 것과 한없이 작은 것을 설정합니다.
어느 것이 더 클까요?
크다 작다의 본질적인 근거는 없습니다.
크기는 없고 복잡한 정도만 있습니다.

이 우주는 최초의 한 점에서 폭발하여 세상에 가득차 충만해진 것이 아니라
거꾸로 ..아무 것도 없는 ..허공도 없는.. 없음도 없는
없음들의 한가운데

최초 하나가 설정되고 그 하나는 크기도 형태도 없습니다.
안도 밖도 없습니다.
크기가 없는거지요.

폭발의 개념은 이미 크기의 존재를 전제합니다.
작은 것이 커졌다는 식이지요.
크고 작음이 없으므로 커질수 없습니다.
있는 것은 복잡한 정도 뿐입니다.

크다는 것은 더 복잡하다는 것입니다.
공간상수 1을 설정하고 거기에서 더 조밀해진 정도를
그 최초의 형태와 비교해서 비례로 나타내고
존재가 크기(질, 입자, 힘, 운동, 량)를 가지는 것은
그 비례된 크기일 뿐입 것입니다.

운동과 량과 힘의 크기들은 비교된 크기입니다.
비교되기 위해서 비교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구조입니다.

집이든 돌이든 막대기든 생물이든 어떤 것이 존재하려면
크기를 가져야 합니다.
질의 크기, 입자의 크기, 힘의 크기, 운동의 크기, 량의 크기,
그 크기들이 없으면 그것은 없는 것입니다.

크기를 가진다는 것은 곧 구조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한채의 집을 짓는다는 것은
그냥 짓는 것이 아니라 중력의 크기에 대응한다는 것입니다.
중력과 맞서는 방향으로 버티어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력을 발견하지 못하면 집을 지을수가 없습니다.
그 집은 구조의 취약성으로 무너집니다.
그러나 깨달음이 없을 때
목수들은 중력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주초위에 기둥을 올리고 들보를 올리기만 하면 집이 되는 줄 압니다.
중력과 맞서는 형태가 되어야 하고 중력에 맞서 이겨야 비로소 집이 됩니다.

그러나 실제 집을 지어보지 않은 그 어떤 목수도
눈에 보이지 않는 중력의 크기를 가늠하지는 못합니다.
그 모든 건축재료를 다 갖추어놓아도
중력을 계산해내지 못하면 그 건축재료들을 중력을 버텨내는
한도 안에서 가장 효율적인 배열순서로 배열해 내지 못합니다.

존재는 곧 구조입니다.
구조는 곧 비례입니다.
구조란 기하학적 표현이고 비례란 대수학적 표현일 뿐 같은 것입니다.
본질은 그 어떤 존재가
그 어떤 존재 내의 고유한 속성에 의하여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응되는 다른 어떠한 것과의 상관관계에 의하여 규정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여기 하나의 돌멩이가 있는데
그걸로 못을 처박으면 그 돌멩이는 곧 망치가 되고
그 돌을 먹으면 밥이 되고
그 돌로 때리면 흉기가 되고
그 돌을 두면 돌이 되고
이렇게 상대적으로 규정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돌과 그 돌을 규정하는 것 사이에는
상대적인 위상관계가 성립하지마는
그 두 개별자 사이의 위상관계 자체는 임의로 변경될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더라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지식은 그 어떤 대상의 존재방식에 대한 사정이고
지혜는 그 지식을 획득하고자 하는 인간의 인식방식입니다.
사랑은 그 대상과 인간 사이에 위상관계입니다.

인간과 대상이 어떠한 방식으로 만나느냐입니다.
그것이 곧 구조입니다.
즉 대상을 보아서도 인식이 아니고 인간을 보아서도 인식이 아니고
수요와 공급, 작용과 수용, 인간과 물질,
항상 이 둘 사이에 상관관계 즉 구조를 보아야만 인식이더라는
깨달음입니다.

긍극의 차원에서 존재의 근본은 물질이 아니라 구조입니다.
구조는 기하학적 개념이고 대수학적으로는 비례입니다.
비례는 하나의 식입니다.

어떤 하나가 아니라
하나가 이쪽으로 가면 다른 하나는 저쪽으로 가더라의
경험에서 하나와 둘 사이에 저울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구조는 법칙, 혹은 시스템, 혹은 패러다임, 혹은 체계, 혹은 짜임새
혹은 원리, 혹은 이론, 혹은 논리의 형태로 인간과 접촉합니다.
그러므로 구조를 아는 사람들은 무슨 대상을 관찰하거나
사업에 착수할 때 먼저 구조 곧 원칙, 법칙, 원리 패러다임,
공정, 설계도부터 찾습니다.

망치와 못, 톱과 판자만 갖추어지면
책꽂이 정도야 만들 수 있겠지 하면 착각입니다.
결정적으로 책의 크기, 책상의 크기 이런 것을 몰라버리면
만들어도 책상하고 안맞아서 올려놓을수가 없습니다.

이 시대 인간들의 관심사가 되어 있는 것은
빅뱅이론, 블랙홀이론, 불확정성의 원리, 상대성이론 이런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론들에 다 결핍되어 있는 것.
그것은 구조입니다.
구조를 알면 상대성이니 절대성이니 이런 말들이 필요없습니다.

비중, 혹은 비율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구조를 대수적으로 풀어서 수치화 해둔 것입니다.
이 비율을 알면 손으로 재든 줄자로 재든
센티미터의 눈금으로 재든, 인치의 눈금으로 재든 상관없습니다.

상대성이란 이 비율을 모르니까
이거 줄자로 잴까 막대자로 잴까 고민하는 것입니다.
비율이 존재한다는 것은 환원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과학은 곧 해체와 환원입니다.
비율을 잊어먹으면 해체해놓고 환원하지 못합니다.
분해해놓고 조립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모든 과학가의 업적은 최종적으로 비율을 산출하고 그로서 끝납니다.
원자를 연구하든 소립자를 연구하든 고분자를 연구하든 저기를 연구하든
최종적으로는 비율을 나타내는 숫자를 몇 개 제시하고 연구 끝을 선언합니다.

그 비율이 원자량을 의미하기도 하고
수질의 오염도를 나타내기도 하고
환자의 혈압을 나타내기도 하고
막판에는 숫자입니다.

물리학이 최종적으로 도달하여야 할 곳은
공간상수 1 시간 상수 1의 크기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공간상수 1을 질의 크기, 입자의 크기, 힘의 크기, 운동의 크기, 량의 크기로
전환했을 때 각각 얼마의 수치를 기록할 것인가로 연구 끝
더 이상의 물리학은 없습니다.

그 수치계산의 공식을 찾아내는 것이
물리학입니다.
모든 학문분야가 그렇습니다.

먼저 찾아할 할 것은 구조고
구조는 공식으로 변화되고
공식에 대상을 대응시키면 비례수치로 전환된다.

그 구조의 존재를 찾아내는 데는 이성이 필요하므로 철학입니다.
그 찾아낸 구조를 공식화하여 비례수치로 전환하는데는
지성이 필요하므로 과학입니다.

사랑에도, 인생에도, 고독에도, 눈물에도, 믿음에도, 꿈에도
그러한 구조들이 존재합니다.
구조는 둘 이상이 만나서 상대성을 이루고
결합하여 절대성을 확보하여 공식으로 전환하고
대상을 만나서 해체되면서 비례수치의 기록을 남깁니다.
그 구조의 집이 질이 되고 그 집속에 든 식구 둘이 입자가 되고
상대성이 힘이 되고 해체가 운동이 되고 수치가 양이 됩니다.

마 그게 뭔지 잘 모르겠지만
마 그런 것이 있는 거 같이 느껴진다 하면 여러분은 일상에서
구조를 체험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철학할 자격이 있습니다.
구조란 무서운 것입니다.
아무리 복잡하고 정교한 기계장치가 있더라도
구조의 차원에서 보면 매우 단순명쾌 합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제발.
그 어떤 기계장치라도 모든 기계장치는
힘에서 운동으로 해체하면서 일(양)을 생산해내는 연속된 과정의
배열순서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힘이 먼저 주어지고 그 힘을 여하히 전달하여
운동으로 해체하여 일을 시킬까 하는 문제에서
연결순서와 방향지시 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로렉스 시계가 값이 200만원이고 터무니 없이 복잡하더라도
그 내부의 최소구성요소의 수는 25뿐입니다.
반드시 지시되어야 할 순서와 방향의 최소숫자는 25에 지나지 않으므로
25만으로 충분히 간단한 시계 하나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중복되고 보조적인 역할입니다.










누구나 다 알 듯이 이 세상은 수학적 질서로 되어있다.
여기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 수학이 근본적인 영역에서 간단한 한계에 부닥친다는 것이다.

그 한계는 집합논리의 한계이다.
대수학의 가장 본질적인 영역은 집합론이고
이 집합론은 아직도 수학분야의 미개척지로 남아있다.

간단한 것으로 카오스 이론을 듯수 있다.
여기에 약간의 상식만 가져도 알겠지만 프랙탈곡선에서 기이한
불가산무한집합을 만난다.

무한 곱하기 무한의 영역이다.
집합이란 한정한다는 것이다.
무한을 유한으로 한정시키는 것이 집합인데 이 불가산무한집합은
한정할수 없는 무한집합이다.
대수학은 여기서 /에라 모르겠다/하고 나자빠진다.

[이 세상은 간단한 수학적 질서로 되어있다]

이러한 명제는 고대의 논리학자 수학자 뿐만 아니라
근 현대의 모든 철학자들이 동의하는 기본명제이다.
양의 동서를 떠나 불교나 유교, 도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면 천부경에 나오는 3이 어쩌고 1이 어쩌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본질은 수학적 질서라는 점에 동의하고
그 비밀을 찾아보려고 나름대로 추적해 본 성과이다.

문제는 그러한 노력이 집합론에서 벽에 부닥쳐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알아야 할 점은 벽이 있으면 그 벽을 깨부술 방법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시도의 하나로 우리는 변증법을 만나게 된다.
헤겔의 변증법도 변증법의 하나이지만 그러한 변증법적 접근은 헤겔 이전에도
무수히 있었다.

연기론, 주역, 천부경에서도 우리는 그러한 변증법적 시도를 만나게 된다.
변증법의 정체는 무엇인가?
대답이 딸린 헤겔은 /하나님/어쩌고 하고 웅얼거렸지만 그 본질은 구조다.
구조란 무엇인가?
대수학적 접근이 아닌 기하학적 접근이다.
여기까지 정리해보자.

1. 이 세상의 본질은 수학적 질서로 되어있다.
2. 수학적 접근으로 세상의 본질을 파악할수 있다.
3. 수학적 접근은 곧 대수학적 접근이며 대수학은 집합론에서 벽에 부닥친다.
4. 대수학은 변하지 않고 고착되어 있는 것을 분석하는데 유용한 도구이나
변화하는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5. 변화하는 것을 설명하는 방법으로 변증법적 접근이 시도되어 왔다.
6. 변증법은 기하학적 접근이다.
7. 집합론과 변증법은 둘 다 일정한 성과를 획득함과 동시에
일정한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

자 여기까지는 아무리 몰상식한 사람이라도 쉽게 동의할수 있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답은 나와있다.
뻔할 뻔자 짐작하셨을 테지만 그것은
집합론과 변증법을 하나로 통일하는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이다.

누구나 다 알 듯이 근원에서는 하나이다.
하나는 1이다.
이 1이 어쩌다가 이렇게 태배기로 많아져버렸는가?
많다. 무한히 많다. 과학은 이 무한을 유한으로 한계지어온 과정이다.
집합이다. 집합이란 무한을 유한으로 한정해버리는 방법이다.
그런데 그 한정하기에 거듭 실패한다.

주역을 보자. 최초에 무극이 태극(2)을 낳고 4괘를 낳고 하다가
8, 16, 32, 64, 128.....멈출수 없다. 이것은 딜렘마다.
점치는 막대는 8개가 되기도 하고 16개가 되기도 하고 64개가 되기도 하는데
왜 그것이 하필이면 4이고 8이며 16이고 32인지 말할수 없다.

멈춘다는 것은 집합을 의미한다.
우주는 하나이니 1이고 밤낮은 해와 달이니 둘(2)이고 계절은 넷(4)이고
하다가 /에라이 마 대충 그런줄 알아라~! 엥이~!/

근데 도교에서는 달라진다.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도가 1을 낳고 1이 2를 낳고
2가 3을 낳고 3이 만물을 낳는다.
우리는 천부경에서도 이와 비슷한 내용을 만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역이 산술적 배증을 거듭하여
무한영역으로 빠져버리는데 비하여 도교나 천부경에서는
3에서 딱 멈추어버린다는 점이다.

물론 왜 그게 3에서 멈추는지 설명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3에서 뭔가
딱 멈추어버리는 현상을 얼마든지 목격할수 있다.

우선 지금 각 당 후보자들의 합종연횡도 3에서 딱 멈추어버리고 있다.
이건 우연이 아니다. 3에서 멈추는데는 이유가 있다.
거기서 시스템이 작동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기하에서 최소각은 3각이다. 2각은 없다.
4각은 두 개의 삼각이다. 5각은 거기에 하나의 3각을 추가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각이 아무리 많아도 모든 각은 3각이다.

도교에서 3을 완성수로 보는 것은
일상에서 무의식적으로 이러한 체험을 무수히 하고 거기서 영감을 받았으며
그 영감이 설득력을 갖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연기법은 인,연,기의 3시스템으로 성립된다.
헤겔의 변증법 또한 테제, 안티테제, 진테제의 3시스템으로 성립한다.
그렇다면 도교의 3은 기하의 3임을 알수가 있다.

그렇다. 3은 대수의 3이 아니라 기하의 3이며 그것은 구조를 나타내고 있다.
구조란 무엇인가?
그림으로 그리면 구조는 『 ┷ 』다.

우리는 일상에서 무수한 구조들을 만나다. 건물의 뼈대나 에펠탑의 골조나
생물시간에 배우는 계통수나 나뭇가지나 전기회로도나 도스에서 ncd그림의 트리나
다 이 구조『 ┷ 』로 되어있다.

여기까지는 쉽다. 요는 이 구조가 어떻게
아날로그변환을 거쳐 대수의 집합으로 변신해버리는냐다.
그러나 이 구조가 집합을 포용하는 모습은 자연계에서 얼마든지 관찰할 수가 있다.

전기를 공부하면 기본적으로 부닥치는 의문이 [전기는 앞으로도 뒤로도 막가는데
자동차는 우측통행의 방법으로 해결하지만 전기회로는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는가?]이다. 우리는 진공관과 반도체의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한다.
또한 구조『 ┷ 』다.

이 구조『 ┷ 』가 있으므로 해서 그 복잡한 전기회로가 무한의 미궁에
빠지지 않고 한정하기의 방법으로 특정한 코스로, 특정한 량의,
특정한 형태의 전류를 보내므로서 우리는 텔레비젼도 보고 라디오도 듣는 것이다.

생물의 계통수도 그렇다.
이렇게 다양한 생물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종속과목강문계가 있기 때문이다.
린네가 이 종의 분류법을 발견하기 전까지만 해도
다양한 종은 그저 하나님이 다양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거 외에
어떠한 설명도 불가능했다.

중요한 것은 린네의 계통수『 ┷ 』로 하여 최초 바이러스의 1로부터
수백만종의 다양함이 유도되었으며 또한 무한의 미국에 빠지지 않고
특정한 시간대와 특정한 량을 경계지을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수의 충분함, 넉넉함(0,무한)과
기하의 단순함(1, 유한)이 이 구조『 ┷ 』로 하여 충분히
하나로 통일될수 있음을 자연의 체험으로 알아내게 된다.

그런데 실제로 어떻게 그래되냐?
여기서 벽에 부닥친다.
헤겔의 경우를 보자.
처음의 1은 원래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치고 넘어가자.
다음 안티테제 2가 성립한다. 여기서 왜 어디서
2가 튕겨져 나오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마 그냥 경험상 보이까이 그렇게 되고 말더라는 경험의 진술에 불과하다.
무에서 유가 생기지 않는다.
2는 어디선가 나와야 한다.

그 출처를 의심받음으로서 헤겔의 변증법은 한계를 가진다.
그러나 여기가지에서 정리해보면 대략 분명히 말할수 있는 것은 이렇게 있다.

대수는 집합의 형태로 존재한다.
그 집합은 건물에서 벽돌의 집합 기둥의 집합 주춧돌의 집합이다.
그 집합은 동물의 집합, 생물의 집합, 포유류의 집합, 고양이과의 집합으로 존재한다.
이 집합들은 충분히 많은 숫자들로 구성되며
이 많음들은 기하의 구조『 ┷ 』를 통하여 최초의 1로 환원된다.
건물이라면 주춧돌 1에 기둥 2 서가래 3 기왓장 4의 식으로 산술적 배증을 가지며
생물이라면 바이러스 1에 동식물 2, 척추동물문 3, 포유류강 4의 식으로
산술적 배증을 가진다. 이러한 원리는 다른 모든 변화하는 것에도 적용된다.
중요한 점은 이것이 변화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첨에는 없었는데 구조와 배증의 방법으로 점 점 늘어났으며 그러면서도
무한의 미궁에 빠지지 않고 특정한 수를 한계지어왔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결단코 맞는 말이다.
누구도 이 단계까지를 부정할 수는 없다.
이건 일상의 경험에서 충분히 관찰되고 실험되는 일이다.
요는 실제로 그것을 결과에서 관찰하지 말고 원인에서 증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미 있는 것을 보니까 그렇게 된 것은 맞는데 아직 없는 것을 가지고
이걸 만들어내어 증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에 제시되는 것이 자기복제 이론이다.
자기복제이론으로 하여 구조와 집합은 다시 하나로 통일되며
최초의 1이 변화의 단계를 거치면서 무한의 미궁에 빠지지 않고
특정한 수, 특정한 한정을 가지고 버텨내는데 성공하게 된다.

그렇다면 자기복제란 무엇인가?
또한 하회를 볼 밖에...!

구조와 집합은 자기복제로 하여 별개의 둘이 아닌 하나가 되며
인류의 모든 의문에 대한 최종적인 답변을 제출하게 된다.

이렇게 풀이해조도 이해가 안되는 분은 시계를 생각해보시라.
무한과 한정의 문제다. 고장난 시계태엽을 빠사 본 일이 있는가?
태엽은 후다닥 풀어져버린다.
그건 무한이다. 이 무한을 유한으로 만들어야 시간을 잴수있다.
가속도롤 일정속도로 바꾸는 장치가 필요하다.
그것이 [진자의 등시성]이다. 근데 그 진자도 살펴보면
『 ┷ 』로 되어 있다.
세 개의 꼭지점을 가지며 그 중 둘은 하나의 균형점 위에 올려져 있다.
즉 이 셋은 평등한 3이 아니라 특별히 우월한 1과
평등한 2의 결합으로 되어있는 것이다.
그것은 저울의 균형점 1과 양날개 2의 구성이다.
물시계나 모래시계도 자세히 보면 그러한 원리가 적용됨을 발견할수 있다.
물의 낙하속도가 점점 빨리지지 않고 일정하게 유지시켜주는 것이
수압의 형태로 있다.
모든 구조가 『 ┷ 』인 것은 아니다.
『 ┷ 』는 구조의 한 형태일 뿐이다.
『 ┷ 』는 3차각 평면구조다.

===================================
구조를 이해하려면 콜더의 모빌을 보면 된다.
유치원 같은데 가면 천장에 많이 매달아놓은거 그것이 모빌이다.
모빌들은 구조『┻』의 연결로 되어 있다.
이게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밑에 또다른 『┻』들과
『┻』들이 이어붙어 있다.
이 중 맨 끝의 하나에 힘을 가하여 수평을 깨뜨려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 전체의 균형이 연쇄적으로 깨어진다.
그리하여 모빌 전체가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역으로 끝부분의 하나가 균형을 잃었을 때 윗 부분의 모빌이 움직여 그 부분의
균형을 바로잡아 준다.
모빌을 관찰해 보면 알수있는 것은
하나하나의 모빌 『┻』들이 독립적으로 균형관계를 가짐과 동시에
그 전체가 하나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병사는 분대의 소총수로 편성됨과 동시에 소대원으로 중대원으로
동시 편성된다. 그 분대전체의 힘을 균형을 깨뜨리지 않는 범위 안에서
병사는 완전히 자율권을 누린다.
그러나 균형을 깨뜨리는 어떤 한도를 넘어서기 시작했다면
동시에 소대의, 중대의, 대대의, 연대의 간섭을 받기 시작한다.

다시 말하면 일개 소총수의 행동이 어떤 균형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아무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다가 어느 균형점을 넘어서는 순간
소대, 중대, 대대, 연대의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의 모빌『┻』들은 집합이다.
그것은 분대, 소대, 중대, 대대, 연대라는 집합이다.
그 집합의 원소 하나하나는 어떤 행동을 하던 가장 낮은 단위 집합 안에서만
가능하다가 특정한 임계수치에 도달하는 순간
말하자면 /나비 한 마리의 날개짓이 천하를 바꾸어놓는/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구조론이란 바로 이것이다.
말하자면 평소에 아무 의미없는 내 한표가
하필이면 김대중과 이회창이 똑같은 동수일 때 역사를 바꿔놓기도 한다는 것이다.

구조론의 관점에서 시장분석을 하자.
하나의 『┻』가 시장이다. 수요와 공급이 가격을 결정한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임계수치를 넘어서는 순간부터 시장기능이 완전히 마비된다.
즉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경제학은 거시경제학이 있고 미시경제학이 있다.
거시경제학은 이 『┻』들 중 맨 위에 있는 줄거리 모빌이라 할수 있다.
미시경제학은 이 『┻』들 중 맨 끝에 매달린 새끼 모빌이라 할수 있다.

여기서 거시든 미시든 일정한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
그리고 그 법칙은 옳다.
그러나 문제는 거시도 미시도 아닌 중간이다.
중간 모빌들은 언제나 균형의 정점에 위치하므로 독자적으로는 작동하지 않는다.
중간모빌들은 힘을 위나 아래로 전달할 뿐
스스로 기능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전투에 임해서
큰 전략은 연대 단위로 이끌어지고
작은 전술은 소대단위로 이끌어지므로
그 중간인 중대나 대대는 역할이 모호한 것과 같다.

실제 전쟁나면 중대나 대대는 별 의미없다.
거시전쟁은 연대 차원에서 결정되고 미시전투는 소대단위로 이루어진다.
중대는 뭐냐? 중대란 겨우 같은 막사에 잠자는 것을 의미한다.
대대는 뭐냐? 대대란 겨우 같은 연병장을 쓰는 것을 의미한다.
중대나 대대는 없어도 된다.

즉 실제로 기능하는 것은 가장 위에 것과 가장 밑에 것인 것이다
그러나 보자. 문제는 이동이다. 부대가 다른 어디로 옮겨가려 하면 이거
갑자기 중대찾고 대대찾아야 한다.
소대단위로는 이사를 못간다.
그렇다. 전쟁에서 핵심은 이동이다. 이동에 능한 군대가 이긴다.
중대나 대대가 있는 것은 이동에 능하기 위한 것이다.
이동을 안한다면 편제는 소대와 사단만 있어도 된다.

논산훈련소에는 원래 대대가 없었다.
중대 위에 바로 연대다.
왜냐하면 이동을 안하고 있으니까 대대가 필요없는 거다.
훈련병이 뭐 작전 나갈일 있나?

바로 이거다. 이동
구조를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이걸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동을 안할 때는 전혀 필요가 없으므로 눈에 띄지도 않든 것이
돌연 나타나서 시장을 완전히 흔들어놓고 나라를 절단내 뿐다.

그림으로 그리자면
┻ <-- 거시경제학, 연대, 사단, 군단
┻ ┻ <-- 경영학, 대대, 중대
┻ ┻ ┻ <-- 미시경제학, 소대, 분대
이렇게 된다.
여기서 구조를 이해한다는 것은 이 중간에 해당하는
경영학을 이해한다는 것이며 전쟁으로 말하자면 대대, 중대전술을 이해한다는 것이며
움직이는 것, 변화하는 것, 이동하는 것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동안하고 주둔할 때는 중대전술 대대전술 필요없다.
중대전술은 잠잘 때 점호전술이 전부요 대대전술은 일욜날 축구전술이 전부다.
연대, 군단, 사단전술은 전쟁기술이요
소대 분대전술도 전쟁기술이다.
근데 중대, 대대전술은 줄행랑전술, 36계전술 이거 뿐이 없다.

근데 무적 로마군단이 강한 것은 바로 이 중대전술이 강해서 이긴거다.
실제 전투기술은 게르만 족이나 그리스군대, 카르타고 군대가 약하지 않은데
로마군단의 중대중심 편제가 유별났기 때문에 결국은 승리한거다.

무적 로마군단은 백명단위로 편제가 되는데 이게 중대다.
모든 행동을 중대단위로 한다.
중대장은 선거로 뽑는다.
이게 중요한거다. 선거로 중대장을 뽑는다는 것.

전쟁의 기본은 적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이동하는 것이라는 것을 간파한 것은
무적의 몽고병과 로마군단 뿐이다.
몽고병들도 유달리 중대가 강했다. 몽고병들도 백명단위로 편제가 되는데
백인장(중대장) 천인장(대대장) 만인장(연대장)으로 불린다.
만인장은 로마군단의 군단장과 같다.

전쟁의 기본이 전투가 아니라 행군이라는 것을 간파한 것은
로마군단과 몽고군단 뿐이다. 특히 로마군단은 숙영지건설에 강하다.
행군이 중대전술이라면 숙영지건설은 대대전술이다.
걸어가기와 잠자기가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된다는 것을
시이저와 징기스칸 외에 누가 간파했다는 말인가?

물론 구조를 배운 자는 이걸 자동으로 간파한다.
전쟁의 도사가 된다. 바둑으로 치면 행마다. 행마는 구조다.
포석은 연대, 사단전술이요 전투는 소대, 분대전술이고 행마가 중대전술이다.
바로 여기서 시이저와 징기스칸이 이긴 것이다.

내가 전술의 귀재인 제갈량을 우습게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제갈량은 전투에 강할 뿐 이동에 약하다. 이래서는 이기기는 매번 이기는데
끝내고보니 사석작전에 속은 고뱌야시다.

알아야 한다. 정치는 거시경제도 미시경제도 아닌 경영학이다.
조순같은 경제학자는 이 중간, 이동에 약하다.
그러므로 거시이론이나 미시이론은 실물경제에는 소용이 없고
오로지 이동이 필요없는 금융업에나 소용된다.
즉 경제학을 배운 사람은 장사하면 망하고 고리대금업 하면 부자된다는 말이다.
경제는 경제가 아니고 경영이 오히려 경제인 것이다.
경제학에는 구조개념이 없다.
그러므로 움직이는 경제는 못한다.
경제학의 대가는 돈빌려주고 이자받는 거를 해야 부자된다.
조순이 장사하면 석달만에 망한다.

그렇다. 구조의 관점에서 본 경제는 경제가 아니라 경영이요
구조의 관점에서 본 전쟁은 전투나 전략이 아니라
오로지 행군과 숙영지건설이다.
이것만 잘하면 이긴다.

자 나는 말한다. 구조를 이해해야 돌연 도사가 된다고.
그러면 여러분은 그 고스트 짭짭 사운드가 뭔 소용이냐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 구조를 몰랐기 때문에 카르타고도 갈라아도 게르만도 그리스도
이집트도 파르티아도 로마를 꺽지못했다.
로마군단은 교범과 편제의 군대다. 이거 사실 전투에는 소용없다.
전투 벌어지면 적만 죽이면 된다.
그러나 교범(FM)과 편제가 확실한 로마군단은 아무리 깨뜨려도 군단이
무너지지 않는다. 즉 부대가 와해되지 않는 것이다. 병들이 흩어지지 않는다.

나는 집합론과 구조론의 차이를 말했다.
집합론은 대수적 관점이고 구조론은 기하적 관점이다.
집합론은 거시, 미시경제론이요 구조론은 경영론이다.
집합은 하나의 소대다.
그 소대에서 병은 역할이 분담되어 있다.
그러나 구조는 분열행진이다. 역할자체가 끊임없이 변한다.

싸움을 잘하는 군대보다 행군을 잘하는 군대가 이긴다는 것을
그대는 이해하기 어려우리라. 몽고병이 전투마다 이긴 것이 아니다.
전투에 져도 아무도 포로로 잡히지 않고
피해가 거의 없다는 것이 몽고병의 특징이다.

전쟁에서 병사가 죽는 것은 싸우다 죽는 것이 아니라
이미 승패가 결정된 후 달아나다 죽는 것이다. 몽고병이나 로마군단은
편제가 강하기 때문에 싸우다 죽는 수는 있어도 포로가 되거나
등에 칼맞아 죽는 경우는 없다.

어떤 사람은 편제, 행군, 숙영지건설이 왜 중요한지 감으로 안다.
그러나 극소수 비범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실제 전쟁을 안해보면 그게 왜 중요한지 알수 없다.
구조를 깨치면 안배우고도 자동으로 안다.

요는 가장 큰 거와 가장 작은 거는 비슷하다는 거다.
전쟁에서 군단장이 여단이나 연대를 보내는 것은
소대장이 소총수나 유탄발사기사수를 보내는 것과 같다.
군단장의 싸움은 막사 안에서 지도펴놓고 하고
소대장의 싸움은 야전에서 무전기들고 하는 차이밖에 없다.

근대 대대와 중대는 다르다.
대대장은 하는 것이 자기부대의 숙영지위치를 보고하는 것이다.
대대장은 낮에는 쿨쿨자다가 밤에 이동 끝나면 군단에 무전 때려서
숙영지 위치만 보고하면 된다.

중대장이 하는 것은 이동중에 현재위치 이동속도 보고하는 것이다.
중대장은 이동 안할때는 쿨쿨 자다가 행군할 때 현재위치만 잘 보고해주면 된다.

진짜로 전쟁하는 것은 소대장이다.
소대장은 군단장과 역할이 같다.
병을 죽이거나 살리는 결정권은 군단장과 소대장이 갖고 있다.
대대장 중대장은 뭐냐? 중대장은 이동 중에 위치 보고하고
대대장은 이동 후에 위치보고한다.
여기서 알아야 하는 것은 소대장과 군단장의 역할은 비슷한데 대대장과 중대장은
역할이 다르다는 것이다.
바로 그걸 간파해야 구조를 아는 것이다.

구조를 안다는 것은 군단장..전략
대대장..숙영지
중대장..행군
소대장..전투
병..살신성인
들의 역할차이를 안다는 것이다. 이들의 역할차이를 모르면 당나라군대 되뿐다.









거저먹기 구조(이거 모르면 자살해야 함)

쉽게 이야기 할테니 구조를 이해해뿔자.

모빌이 작동하는 것은 하나하나가 균형을 가질 때에 한해서다.
균형은 곧 최적화다.

대대가 와 대대인지 아는가?
대대원은 대략 300여명인데
한국 지형에서 어디든 부대가 주둔하려면 300명이 적당하다.
300명 넘어버리면 잉간이 넘 많아서 골치아픈 일이 생기고
300명에 미달하면 이거 적군에게 포위되는 수가 있다.

어떤 거점을 사수하려할 때 300명이 되면
적이 천명이 오든 만명이 오든 막아낼 수 있다.
물론 지형 따라 다르지만 평균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300명 넘어가면 잉간이 많아서 명령이 잘 전달되지 않고 아군끼리 밟히고
우왕좌왕 되삐고 300명이 안되면 돌파당한다.
병이 300명 있으면 산봉우리 하나, 강어귀 하나, 도로하나,
진지하나를 사수할수 있다. 그러므로 대대전술은 대개 방어전술이다.

공격할 때는 300명 가지고 안된다.
공격할 때는 연대나 여단이 움직여야 한다.
그러므로 대대편제는 방어전술에서 거점을 사수한다는 기본개념 하에
가장 효율적인 인력배치를 꾀하여 이루어진다.

이제 중대전술을 검토하자.
중대는 대략 80명 선인데 왜 80명인가 하면 부대가 이동할 때
80명 정도라야 대열을 흐트러지지 않고 가장 효율적으로 이동할수 있기 때문이다.
이동 중에 적이 나타나면 재빨리 산개해야 하는데
150명 쯤이 몰려다니다가는 우왕좌왕해서 전멸이다.

너무 숫자가 적어도 안된다.
이동 중에 공격을 당해 긴급히 전투체제로 대응하려면 적어도 80명이 되어야
화력을 집중하여 격퇴할 수 있다.
적어도 응원군이 오는데 걸리는 시간인 서너시간을 버티려면 80명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80이라는 숫자는 한국의 도로폭 지형지물을 감안해서
가장 효율적인 부대의 이동인원이라 할수 있다.

소대전술을 검토하자.
소대인원 40여명은 실전에서 소대장이 병들을 지휘하는데 최적인원이다.
이건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을 지도하는데 최적인원이 40명 인것과 같다.
더 많으면 통제가 안되고 더 적으면 전투가 안된다.

40이라는 숫자는 그저나온게 아니고
실전에서 총알이 빗발치는 야전에서 돌격명령이 떨어지면
먼저 참호에서 기나온넘 열명 총맞아 죽고
살아남은 넘 20명 적 진지 까부수고
뒤에 남은 넘 열명 죽은 자리 채우고 하는데 가장 효율적인 숫자다.

분대전술을 검토하자.
야전에서 매복이나 정찰을 나갈 때, 밥묵을 때, 텐트칠 때, 참호작업 할 때
가장 효율적인 숫자가 10명이다.

이상에서 각 구조단위의 숫자는 정해져 있고
그 정해진 숫자는 괜히 정한 것이 아니라 적절한 역할이 주어지며
그 역할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고로 구조란 곧 역할의 차이이다.

어떤 역할들이 있는가? 질, 입자, 힘, 운동, 량이다.

질......군단...3만명...3만병이 있으면 전쟁을 할수 있다.
입자...대대...300명...300명이 있으면 진지를 지킬수 있다.
힘.....중대...80명.....80명이 있으면 행군할수 있다.
운동...소대...40명....40명이 있으면 전투를 벌일 수 있다.
향......분대...10명....10명이 있으면 불침번을 교대할 수 있다.

물론 부대도 부대 나름이지만 우리부대는 이랬다.
중요한 것은 위 5단계 구조로 시스템이 완벽하게 가동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를 추가하면 불필요하고 옥상옥이 된다.
여기에 하나가 모자라면 전쟁에 진다.

물론 사단도 있고 여단도 있지만
사단은 군이 북진하여 전선을 이동할 때를 대비한 개념이고
여단은 공병대 기갑부대 등 성격이 다른 부대를 위하여 소용되는 편제다.

이들은 상하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밑에 집합은 위에 집합에 종속한다.
위에 집합의 기능이 정지하면 밑에 집합의 기능도 연쇄도산하는 것이다.
대대가 거점(숙영지)을 카바하는데
대대가 무너지면 행군해도 갈데가 없다.
중대가 무너지면 전장으로 갈수가 없으니 전투도 할수 없다.

구조를 이해한다는 것은 이 상하관계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군할 때는 먼저 설영대를 보내 숙영지를 찾아놓고 행군하는 것이지
그냥 마구잡이로 가는 것이 아니다.

위의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아래의 문제도 해결된다.
바로 이 점을 아는 것이 구조를 안다는 것이다.
어리석은 장수는 전쟁과 전투만 생각하고 그 중간을 보지 않으니까
패배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구조의 원리가 전쟁에서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정치에도 경제에도 문화에도 물리에도 수학에도 논리학에도 해당된다는 것이다.
구조는 간단한 공식이며 이를 암기해버리면
그 어떤 것이든 가장 핵심적인 사항을 바로 알아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구조의 근거가 물리학에서 유도되기 때문이다.

질은 결합하고 입자는 독립하고 힘은 교섭하고 운동은 변화하고 량은 침투한다.
군단은 전쟁하고 대대는 방어하고 중대는 행군하고 소대는 전투하고 분대는
살신성인한다.

양자는 닮은 꼴인 것이다.
미학으로 풀이하면
군단의 전쟁은 근접도(지리조건)로 승패가 결정되고
대대의 방어는 숙영지(진지)의 완성도로 성공이 결정되고
중대의 행군은 균형도(빨라도 늦어도 안됨)로 결정되고
소대의 전투는 속도(빠를수록 좋음)로 결정되고
분대의 불침번 교대는 정확도(정확할수록 좋음)로 결정된다.

행군이 빠를수록 좋다는 것은 어리석은 장수의 실패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것은 로마군단의 정해진 이동속도다.
로마군단은 전쟁 중에도 교범대로 행군속도를 철저하게 지킨다.
당나라군대는 넘 빨리가려다가 지지도가 10프로로 처지고
다시 속도내어 30프로까지 추격했다가 호흡조절 몬해서 또 처지고
하는데 비해 국민군대는 고정속도 30에서 살살 속도를 올려가는데
무리함이 없다.

국민군대의 여론조사 직전 35프로 지지는 황금의 지지숫자다.
그 넘었다면 이인제 이회창 통합되어서 클난다.

이걸 알아야 면장
을 하는 것이다 암만







































모든 수는 1이다.
2는 없다. .................이 말을 이해하겠는가?
34525가 있다. 이걸 (34525)이렇게ㅡ괄호안에 집어넣어버리고
뚜껑 닫아버리면 (괄호) 하나 곧 1만 남는다.

즉 1이 아닌 것들..2나 3이나 4나 이건 1에 대해 1의 2배, 1의 3배,
1의 4배라는 것이고
그 기준이 되는 배는 곧 1이며 모든 수는 곧 배이므로 1인 것이다.

여기서 1은 자연수다.
그렇다면 1이 아닌 것은 뭔가?
그것은 +1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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