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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0040 vote 0 2016.05.09 (23:09:26)


    법륜의 헛소리를 조금 인용하자. 법륜이 특별히 이상한게 아니고 생각없는 사람들이 보통 이렇게 말한다.


    a.jpg


    ‘인생에는 답이 없다.’고 무려 전제를 깐다. 과연 인생에 답이 없을까? 질문이 있는데 왜 답이 없겠는가? 질문과 답은 대칭을 이룬다. 답은 있을 수 밖에 없다.


    대부분 잘못 질문한다. 답을 못찾는게 아니라 질문을 못 찾는다. ‘왜 사느냐’는 ‘삶의 동기’를 찾는 것이다. 즉 삶을 하나의 사건으로 보고 그 사건의 원인을 찾는 거다. 삶은 그 자체로 ‘일대사건’이라는 깨달음이 있어야 진도를 나갈 수 있다.


    삶은 의사결정의 연결이다. 인간의 무엇을 결정하는가다. 인간의 행위동기는 궁극적으로 ‘완전성’에서 나온다. 즉 인간이 사는 이유는 삶이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다.


    배가 부르면 완전하다. 삶이 부르다면 삶을 먹지 않을 것이다. 즉 삶의 결핍을 채우려고 하루를 사는 것이다. 왜 삶이 고플까? 삶이 불완전한 즉 삶이 모자라다는 것이다. 왜 삶이 모자라는 것일까?


    삶의 중심이 개인이 아닌 사회에 있기 때문이다. 곧 인간의 사회성이다. 인간의 뇌는 사회를 바라도로록 세팅되어 있다.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으니 어쩔 수 없다. 받아들여야 한다. 단 그 사회가 반드시 인간사회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신, 우주, 자연, 역사, 진리가 사회다.


    아기는 엄마를 쳐다보게 되어 있다. 엄마가 곁에 있으면 완전하다. 엄마가 없으면 불완전하다. 아기는 엄마 곁으로 달려가도록 되어 있다. 원래 그런 거다. 인간은 언제라도 사회의 의사결정 중심으로 쳐들어가게 되어 있다. 사회와의 관계가 긴밀하면 좋다.


    내 없이는 사회가 안 돌아가야 한다. 나를 중심으로 세상이 작동해야 한다. 모두가 나를 우러러봐야 한다. 모두가 내게 먼저 말을 걸어와야 한다. 그럴 때 인간은 즐겁다. 물론 고수들은 진리와의 인사로 대체한다. 모르는 사람들이 저마다 아는척 하고 말을 걸어와도 피곤하니까.


    왜 사느냐의 물음은 근본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임을 깨닫고, 그러므로 인간이 완전성을 지향하는 존재임을 깨닫고, 그 완전성이 무엇인지를 아는데 의미가 있다.


    물질적 부와 같은 고착된 데는 완전성이 없다. 불완전성의 정리를 떠올려도 좋다. 우주는 근본 불완전하며 지속적으로 외부에서 에너지가 공급되어야 그 부단한 호흡에 의해 비로소 완전성을 얻는 동적 존재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와의 부단한 상호작용에 의해서만 인간은 완전성을 얻는다. 시험에 합격하거나 챔피언을 먹거나 멋진 사람과 결혼하거나 하는 고착된 목표로는 완전성을 얻을 수 없다.


    무엇보다 진리의 팀에 들어야 한다. 세상의 변화와 함께 해야 한다.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면 안 되고 합류해야 한다. 세상이 변하는 존재임을 깨닫고 부단히 자신을 변화시켜갈 때 그 끊이지 않는 자연과의 연주에 의해 완전하다.


    그러므로 아기는 엄마가 불러주기만 해도 완전하고, 고양이는 봄날에 햇볕을 쬐기만 해도 완전하고, 농부는 오곡이 무르익기만 해도 완전하고, 노동자는 일거리만 있어도 완전할 수 있다. 완전이 멀리 있지 않다. 그러나 부단히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같은 것을 반복하고 있을 수는 없다. 아이는 소년으로 자라면서 불완전하고, 어른은 자식을 키우면서 불완전하다. 인간은 죽음의 순간까지 완전성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왜 사는가’ 다음에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질문이 따라온다. 왜 사는가는 개인과 사회의 관계설정이다. 세상이 내편인가 아니면 적인가다. 아기는 엄마가 내편이고 나머지는 모두 적이다.


    혹은 위태로운 것이다. 타자성의 문제다. 세상과 내가 남남이면 치명적이다. 완전은 그 불완전한 관계를 바로잡는다. 세상이 타자가 아니어야 한다. 그것은 내가 커져야 가능하다.


    아기의 나는 작다. 자아가 작다. 곧 자신의 의사결정영역이 작은 것이다. 아기는 요람이 나에 속하지만, 소년은 책가방과 친구와 장난감과 학교와 많은 것이 나의 소유로 혹은 나의 의사결정영역으로ㅛ 된다. 그 범위는 점차 커진다. 부족민은 그 의사결정영역이 작다. 그러므로 이웃마을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죽인다.


    ‘어떻게 살것인가’의 답은 그 의사결정영역을 키우기다. 최대한 키워 ‘신과의 일대일’까지 가줘야 한다. 진리의 편, 역사의 편, 진보의 편, 자연의 편, 문명의 편에 들어야 한다.


    모두 나의 레이더망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이웃이 죽어도 남의 일로 치고, 가난한 사람이 핍박받아도 남의 일로 친다면 나는 작아진다. 개만큼 작으면 개 되고, 벌레만큼 작으면 벌레 된다. 개는 자기 개굴만 감시하면 된다. 의사결정영역이 작으니까 개다.


    여기서 집단의 문제로 확대된다. 내가 커지면 내 안에 내 아닌 것들이 잔뜩 들어온다. 미국에 있는 박병호가 홈런을 쳐도 내가 기분이 좋은 것은 내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자식에게 백만원을 줘도 아깝지 않다. 자식이 내 안으로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내 안에 내 아닌 것들이 들어와서 나와 공존하는 문제가 생긴다.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이 인仁이다. 그것으로 삶의 동기를 얻는다. 타자와 공존하는 것이 예禮다. 곧 삶의 미학이 된다.


    ◎ 철학의 인 – 동기부여
    ◎ 역학의 의 – 문제해결
    ◎ 미학의 예 – 삶의완성


    철학은 출발점에서 삶의 동기를 부여하고, 미학은 귀결점에서 삶을 완성시킨다. 인간은 인仁으로 출발하여 예禮로 완성된다. 개인으로 시작하여 집단으로 완성한다. 탄생 때는 홀로였으나 죽을 때는 내 안에 많이 침투해 있다.


    타인이 내 안으로 들어오듯이, 나 역시 타인의 내부로 침투해 있다. 나와 타자는 서로 포개져 있고 겹쳐져 있다. 너와 나의 구분이 없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과 마찰하지 않으니 그 예禮가 아름답다. 만약 마찰한다면 무례한 거다.


    공자의 가르침은 인仁으로 시작하여 예禮로 끝난다. 그 사이에 지智와 의義와 신信이 있다. 나의 인이 타자의 불인에 막히니 지智가 소용된다. 지는 집단 안에서 권權을 획득케 한다. 권한을 얻어서 불인을 막는다. 나의 지는 타인의 무지에 막힌다.


    무지는 의義로 막는다. 타인의 불의는 신信으로 막는다. 타인의 불신은 예禮로 막는다. 예 다음은 없다. 끝까지 무례한 넘은 쫓아낸다. 그걸로 완성된다. 더불어 함께 예로 나아가는 것이 진보다.


    예는 여러사람이 공존에 성공하는 기술이다. 불교의 스님들은 예를 따지지 않는다. 산사에 스님이 많지 않으니 무례한 자가 없기 때문이다. 스님들에게도 각별한 인仁이 있지만, 그걸로 천하의 대사를 논할 수는 없다.


    두 사람이 모이면 반드시 마찰이 있으니 인에 더하여 지와 의와 신과 예가 필요하다. 그 과정에 점차 커진다. 개인에서 가족으로 커진다. 가족에서 부족으로 커진다. 부족에서 국가로 커진다. 국가에서 인류로 더욱 커진다.


    노인이 혼자 고양이와 개를 키운다면 애완동물을 보살피는 인으로 충분하겠으나, 가족이 다섯 명만 되어도 지가 필요하다. 회사를 운영하려면 말단까지 챙겨주는 의가 필요하고, 국가를 경영하려면 대중의 지지를 끌어내는 신이 필요하다. 명박짓을 일삼아서 불신이 팽배하면 나라가 무너진다. 더 나아가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예가 필요하다.


    등산복 입고 외국 나가서 욕이나 먹는 바보들은 인류의 문제를 바라보는 예가 훈련되어 있지 않는 거다. 그게 무례임을 모른다. 유니폼 입고 몰려다니면 조폭과 다를 바 없는 거다. 무례한 한국인이라 하겠다.


    인은 위아래가 있다. 엄마의 인이 아기의 인보다 크다. 스승의 인이 제자의 인보다 크다. 예수의 인은 대빵 크다. 그러나 예는 차별이 없다. 모두가 예를 지켜야 한다.


    지는 지도자의 지가 부하의 지보다 크다. 의는 윗사람의 덕목이다. 신은 형이 아우보다 높다. 한 살이라도 더 먹은 사람이 믿을 수 있다. 반면 예는 균일하다. 예가 지나치면 허례가 되고 과공비례가 되기 때문이다.


    예는 적당해야 한다. 그러나 신은 적당한게 없다. 적당한 신뢰보다는 확실한 신뢰가 좋다. 의도 마찬가지다. 의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러나 예는 지나쳐도 모자라도 안 되니 거기서 끝난다.


    왜 사는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삶의 동기는 무엇인가? 불완전한 개인이 집단의 의사결정 중심으로 쳐들어가서 완전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인으로 가능하다. 어떻게 살 것인가? 바로 진리의 팀에 들어야 한다. 자연의 팀, 역사의 팀, 진보의 팀, 문명의 팀에 들어야 한다.


    ◎ 왜 사는가? - 답은 인이다. 집단의 의사결정 중심을 바라본다.
    ◎ 어떻게 살 것인가? - 답은 미다. 진리의 팀에 들어 더불어 함께 한다.


    완전성의 문제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그러므로 사건은 시작된다. 문제가 주어진다. 문제가 분명하면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철학으로 시작하고 역학으로 이어가고 미학으로 완성한다.


    철학은 내가 누구인지 묻고, 역학은 집단의 중심으로 쳐들어가고, 미는 더불어 함께 아름답게 완성한다. 철학은 인과 지, 역학은 지와 의와 신, 미학은 신과 예다.


    물론 걸쳐져 있다. 칸이 딱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과 지와 의와 신과 예가 모두 철학에 속한다. 굳이 구분하자면 보다 그쪽에 가깝다는 말이다. 인과 지는 홀로 고독한 결단을 내리고, 신과 예는 여럿이 함께 손잡고 간다. 의는 중간에서 방향을 정한다. 대의로 일어서 천하로 나아가 세상을 바꿀 것인가다.


    인은 개인이 ‘신과의 일대일’로 천명을 받고, 예는 만인이 참여하여 민주적으로 의사결정한다. 인에 머물면 퇴계가 되고, 예로 나아가면 율곡이 된다. 율곡이 위다. 뒤로 빼기 전문인 퇴계는 조금 가다가 말았다. 세상의 중심으로 쳐들어가지 않았다.


    예수는 인으로 죽었다. 석가는 지로 살았다. 맹자는 의로 펼쳤다. 묵자는 신으로 만인을 이었고, 순자는 예로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갔다. 더 많은 사람이 의사결정에 가담한다. 이 중에 하나도 버릴 것이 없으니 공자의 참뜻이야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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