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민포럼] 답은 하나다 | ||||||||||||
이광서 ㈜아이부키 대표·논설위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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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정답이 있을까. 답이 있다고 보는 주장과 답이 없다고 보는 주장이 있다. 20세기 초 두 번의 큰 전쟁 때문에 지식인들은 회의하기 시작했다. 세상을 관통하는 정답을 추구하던 뉴턴 이후의 열정에 냉소를 보냈다. 거대담론을 부정하고 정답찾기를 의도적으로 회피했다. 모든 삶을 떠받드는 해답에 대한 이야기는 진부한 것이 됐다. 무정부·혼돈·아노미를 주장하기도 하다가 요즘은 무수히 많은 정답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대체로 대접받는다. 답이 무수히 있다는 것은 무수한 답이 서로 다르거나 혹은 답들 사이에 공동된 분모가 있거나 둘 중 하나이다. 답들이 서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답이 없다는 말과 마찬가지며, 답이 서로 이어진다면 그 답들은 공통 분모를 가지게 되고 반복되는 것을 소거해 하나의 결론에 다다라야 한다. 즉 무수히 많은 해답이 있다는 말은 답이 전혀 없거나 오직 하나라는 두 가지 관점에 대한 유보일 뿐이다. 그러나 정답이 없다면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공통의 토대인 역사를 구축할 수도 없을 것이며, 학문이라는 시스템이 존재할 수도 없다. 결론적으로 인류가 존재하는 한 모든 것의 정답은 하나여야 한다. '하나'라는 관점이 중요하다. 그것을 '신(神)'이나 '도(道)'라고 부르던, 진리라고 부르던 상관없다. 모든 창의적 성취는 하나뿐인 답에 대한 통찰과 신념에서부터 나온다. 단 하나라도 불일치가 발생하면 그것은 무수한 불일치를 낳고 결국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된다. 답이 하나여야 세상은 비로소 통하고 연결된다. 부정과 불일치, 차별과 어리석음에 맞서 정의와 일치, 평등과 지혜를 추구할 근거가 된다. 마치 물이 흘러가는 것과 같다. 물이 흘러가다 바위도 만나고 절벽도 만나지만 종착지는 하나인 것이다. 과정을 잘라서 보면 단절도 있고 차별도 있게 마련이나 결국 대양에서 만난다. 단 하나의 정답이 있다는 관점은 세계를 하나의 플랫폼으로 보는 것이다. 너와 내가 서로 호환 가능한 토대 위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관점이 기반이 돼야 우리는 세계에 액션을 취할 수 있다. 창의적인 성취의 가장 기본이 되는 관점이다. 세계에 답이 존재하며, 그리고 그 답이 하나라는 관점은 '빈 곳'을 발견하도록 부추긴다. 창의하는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빈 곳을 발견하려고 한다. 영화를 볼 때, 스포츠나 작품을 볼 때에도 혹은 제품을 고를 때에도 우리는 정답이 있다는 관점과 없다는 관점의 영향을 받는다. 대개는 정답이 없다는 관점을 따라 '자신'의 취향과 개인적인 주장을 내세운다. 이것은 관람객의 태도다. 그러나 빈 곳을 보는 사람이 있다. 그는 영화 감독의 시선, 스포츠 감독의 포지션, 창작자의 관점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무엇을 보든 창의적 전술의 가능성 새로운 창작의 비전을 발견할 것이다. 만약 세계 최고의 자동차를 디자인하는 디자이너라면 어떨까. 그는 개인적인 취향을 좇을까, 아니면 자동차라면 마땅히 이르러야 하는 정답을 좇을까. 당연히 그는 정답을 좇는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결과물은 세계 최고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답을 구해야 빈 곳을 바라 볼 수 있으며, 그래야 마땅히 아직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것을 창의해낼 수 있다. 피카소가 젊어서 아직 자신의 창작 세계를 구축하지 못했을 때 당시 파리의 유명한 대가들의 작업실을 드나들었다. 작가들은 새파란 그를 경계하기도 했다고 한다. 작업실을 다녀간 피카소는 곧 그의 스타일을 완벽하게, 오히려 그보다 더 훌륭하게 구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카소는 여전히 자신의 스타일을 발견하지 못했고 그만큼 고뇌했다. 수많은 성공한 작가들의 스타일을 섭렵하면서 그는 마침내 자신의 '빈 곳'을 발견해냈다. 역사적인 입체파의 시작인 것이다. 하나의 정답에 대한 통찰과 신뢰를 가져야 한다. 그러한 관점으로 세상을 보면 반드시 빈 곳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대가들의 성공에 담긴 비결이란 결국 이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