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의 1점원리 존재가 동적상태일 때 1점에 의해 대표된다. 1점은 두 방향으로 동시에 움직일 수 없으므로 양자론적, 불확정성적인 여러 물리현상이 나타난다. 어느 쪽으로 움직이든 모든 움직임은 선이다. 두 방향으로 움직이면 각이다. 각은 선보다 층위가 높고 선은 점보다 층위가 높다. 존재가 동적상태일 때 1점이므로 차원이 다른 선이나 각의 성질을 나타낼 수 없다. 점은 선의 잘라진 접점이다. 선이 잘리면 단절된다. 점은 단절되므로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없다. 1점은 외부에서 작용하는 에너지와 작용반작용의 대칭성을 성립시키는 일직선의 한 방향으로만 움직여갈 수 있는 것이다. 우주의 모든 존재는 동적상태로만 존재한다. 제 자리에 가만이 있는 것도 미시세계에서는 1초에 9조번 이상 진동한다. 구조론은 사건으로 본다. 하나의 사건은 5회의 의사결정 단위를 가진다. 5회의 의사결정이 외부에서의 에너지 작용을 처리하여 인과율을 충족시키는 형태로 존재를 구현한다. 물질이 분자나 원자 따위의 존재단위를 가지듯이 사건은 질, 입자, 힘, 운동, 량이 있다. 이때 각 단위의 의사결정은 양자론적, 불확정성적인 일대일 대칭을 거치면서 1점에 의한 대표성을 성립시킨다. 5회에 걸쳐 성립하는 1점의 위치를 추적하는 방법으로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적의 1점을 타격하여 파괴할 수 있고, 아군의 1점을 연결하여 승리할 수 있다. 시장의 1점을 파악하여 거래를 성공시킬 수 있고, 조직의 1점을 타격하여 괴멸시킬 수 있다. 제어가 가능하다. 1점이 끊어지면 전기제품의 전원이 꺼지듯이 동적상태가 깨지므로 정확하게 위치를 찾을 수 있다. 입체가 깨지면 각, 각이 깨지면 선, 선이 깨지면 점이며, 점보다 작은 위상은 없기 때문이다. 100마리의 양이 떼를 이루고 있다면 그것은 1이 아니라 100이다. 1점의 대표성이 없으므로 그것은 하나의 존재가 아니다. 사건은 일어날 수 없다. 행인이 양떼를 부르면 1로 대응하지 않는다. 그러나 양치기 소년이 양떼를 불러모으면 100마리 양들은 1그룹으로 행세한다. 사건의 1을 성립시키므로 양떼라는 하나의 존재가 있는 거다. 지나가는 행인에게는 양들이 1로 반응하지 않았다. 양치기소년에게는 1로 반응한다. 이렇듯 자연에는 많은 애매한 상황이 있다. 아기는 1의 존재다. 그러나 때때로 아기는 1로 반응하지 않는다. 지하철을 탈 때 엄마는 아기의 표를 끊지 않는다. 아기는 엄마에게 종속되며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고 하나의 사건의 주체가 되지 않는다. 대신 엄마가 1로 아기까지 대표한다. 이런 현상은 지하철 탑승과 같은 동의 상태일 때 잘 관측된다. 자연의 모든 존재는 동적상태이며, 동적상태는 1점에 의해 대표되며 그럴 때 두 방향에서 동시에 작용할 수 없다. 비행기는 날아갈 때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미끄러지는 스케이트도 그렇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이런 점을 간과한다. 우리가 동적상태에 놓여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사건이 유발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주 안의 모든 존재는 동적상태로 존재하지만 사건에서는 아니다. 총은 발사되는 순간만 동적상태다. 발사하지 않는 동안은 총이 아니며 그냥 쇠붙이다. 그냥 쇠붙이라도 언젠가 총이 될 수 있으므로 일단 총으로 쳐준다. 돈은 거래되는 동안만 동적상태가 된다. 지갑에 든 돈은 사용되지 않는 동안은 그냥 종이다. 그러나 언젠가 돈으로 기능할 수 있으므로 돈으로 쳐준다. 우주 안의 모든 존재는 동이지만 인간이 의미부여 한 사물은 정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오류가 일어난다. 우리는 앞으로 가면서 동시에 옆으로 갈 수 있다고 착각한다. 게는 앞으로 가거나 옆으로 갈 뿐 비스듬히 못간다. 동적상태일 때 사물은 양자, 불확정 현상을 보인다. 우리는 양자, 불확정 현상이 미시세계의 특수현상이라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거시세계에서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다만 우리가 존재를 사건의 관점, 의사결정관점에서 보지 않는 것이다. 대한민국 인구가 5천만이라도 국가간의 정상외교에서는 1점에 의해 대표된다. 두 나라와 동시에 조약을 맺을 수 없다. 만약 대통령이 푸틴을 만나고 있다면 오바마를 만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양자의 불연속원리에 따라 모든 동물은 반드시 두 다리로 선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 다리로 선다. 한 다리로 서는 동물은 없으며, 두 다리로 서 있는 동물 또한 없다. 다리는 움직이려고 있다. 움직이려면 반드시 대칭을 이루므로 다리는 둘이어야 한다. 다리가 넷이라도 둘씩 세트를 이루므로 실제로는 둘이다. 움직일 때는 두 다리 중 하나는 땅을 뒤로 밀고 한 다리는 앞으로 전개한다. 특정순간에 작동하는 다리는 하나다. 뱀은 다리가 없지만 S자를 이루어 가상의 두 다리를 만든다. 움직일 때는 그 대칭을 펼쳐서 깨뜨리므로 실제로는 뱀이 한다리만 움직여 전진하는 것이다. 일상적으로 우리가 이러한 점을 놓치는 이유는 100마리 양떼처럼 애매한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동이지만 에너지의 입력과 출력이 같을 때 외부의 관측자에게는 정으로 보인다. 100마리 양떼는 앞으로 가면서 동시에 옆으로 갈 수 있다. 그러나 사건의 관점, 의사결정의 관점에서 과학적인 엄밀성을 가하면 다르다. 어떤 경우에도 두 명령을 동시에 집행하지는 못한다. 양떼가 어떻게 가든 실제로는 집으로 가는 한 가지 명령만 수행하는 것이다. 컴퓨터가 여러 가지 명령을 동시에 수행하더라도 잘게 쪼게보면 한 가지 명령을 수행하며 여럿은 하나들의 집합이다.
뱀은 다리가 몇일까? 둘이다. 그러면서 하나다. 걷기 전에 S자로 꼬아 둘의 대칭을 만들고 걸을 때 이 대칭을 깨뜨려 비대칭의 1을 만들며 이 과정을 반복한다. 그러므로 동물의 다리는 양자론의 불연속성을 반영하여 짝수로만 존재한다. 다리가 6개인 벌레도 앞다리 둘은 손으로 쓰고 실제로는 네 다리며 걸을 때는 다시 둘로 압축하고 최후에 하나를 만들때 앞으로 나아간다. |
아인슈타인도 개개인이 존재가 아니라, 개인과 개인들간에 벌어지는 사건만이 유일한 존재라고 말했는데,
김동렬 선생님의 1점 설명을 들으니 더욱 입체적으로 이해가 가기 시작합니다. (_ _)
상대방의 성격, 기질의 구조와 기능, 특징만 살폈던 제 이제까지의 제 자신을 돌이켜보게 됩니다.
좋은 글 써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김동렬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