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모임에서 나온 말을 정리했습니다. #### 구조론은 에너지에서 일의성을 얻고 다시 공간의 대칭과 시간의 대칭(시간의 대칭은 공간의 비대칭이다.)을 거쳐 물질로 전개하는 존재의 설정과정을 해명한다. 줄여서 ‘대칭≫비대칭’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존재가 상호작용에 의해 파악되며, 상호작용하려면 완전해야 하며 완전성은 에너지 순환 1사이클을 반영하며, 그것은 1회의 의사결정을 나타나며, 이에 도달하지 못할 때 존재가 불완전하며, 불완전하면 상호작용하지 않으며, 상호작용하지 못하면 존재가 아닌 것이다. 존재하려면 상호작용할 수 있는 완전성을 가져야 한다. 이를 줄여서 과학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최소단위의 입자’라는 표현을 쓴다. 그러나 이는 완전성을 나타내기 위해 대충 얼버무린 말이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비과학적 표현이다. 프로이드의 견해는 상당히 구조론적이다. 우선 그는 리비도나 이드라는 가당찮은 거짓말을 지어냈다. 최초에 에너지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에너지원인 이드가 있어야 한다. 구조론으로 에너지원은 질이다. 질은 입자로 전개한다. 그러므로 입자에 해당하는 보다 구체적인 개념으로 리비도가 있어야 한다. ◎ 이드≫리비도≫욕망≫행동≫심리현상 ◎ 질≫입자≫힘≫운동≫량 이러한 전개는 상당히 구조론적이다. 즉 프로이드는 구조론의 질, 입자에 해당하는 포지션을 아무렇게나 지어내서 이드니 리비도니 하고 자의로 명명한 것이다. 문제는 여전히 입자개념에 천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드나 리비도는 인간 내부에 고유한 것이다. 내부에서 원인을 찾으면 입자다. 그러나 구조론의 질은 방아쇠가 바깥에 있다. 구조론은 인간의 심리적 행동의 원인을 무의식에 의한 집단의지에서 찾는다. 집단에 스트레스가 걸리면 인간은 마녀사냥을 시작한다. 먼저 장을 설정해야 한다. 그 장은 집단이며, 집단 안에서의 의사결정의 장이다. 혼자라면 의사결정이 필요없다. 인간의 행동에 동기를 부여하는 에너지원은 집단 내부에서의 의사결정 스트레스이며 이것이 의사결정을 용이하게 하는 행동, 영웅심, 명예심, 허영심, 공포심, 복수심, 원한, 분노, 집단 히스테리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것이 1차적인 동기부여다. 이러한 동기는 직접적이고 순간적이다. 2차적인 동기부여는 우월감이나 열등감과 같이 타인과 비교되는 것이다. 이는 상대적인 가치이며 보다 장기적인 계획에 영향을 미친다. 3차적인 동기부여는 미학적 스타일, 매너, 교양, 에티켓, 깨달음이며 이는 보다 높은 의사결정그룹에 들고자 하는 것이며 개인적인 동기가 된다. 공자의 군자개념이나, 석가의 해탈개념, 예수의 사랑개념, 소크라테스의 철학개념은 공통적으로 부족사회의 1차적 명예심, 복수심, 공포심을 2차적 가족동기, 3차적 개인동기로 가져가서 의사결정의 주체를 명확히 하는데 있다. 인간이 능동적인 의사결정의 주체임을 그들은 선언한 것이다. 그렇다. 공자나 소크라테스, 예수, 석가는 말로 설득하거나 논리로 제압한 것이 아니라 인격적 우위로 제압한 것이다. 논쟁하면 바리새인이 이긴다. 그러나 논쟁은 1차적인 동기부여를 이용한다. 정치적인 논쟁은 명예심, 허영심, 공포심, 복수심, 분노와 같은 부족적 동기부여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정치판에서 이를 잘 관찰할 수 있다. 정치판에서는 저급한 게임을 하는 자가 이긴다. 변희재가 이긴다. 이때 공자나 소크라테스, 예수, 석가는 논쟁으로 격파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레벨의 판단기준을 들이대는 방법으로 그들의 논리게임을 무효화시킨다. 부족의 동기를 해체해 버리는 것이다. 그들은 까다로운 지식을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더 높은 레벨의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인격적으로 제압한 자다. 1차적인 동기는 반드시 부족이라는 대상이 있다. 무인도에 혼자 사는 사람에게는 명예심이나 허영심이 없다. 이들은 항상 전제조건을 건다. ‘네가 이렇게 하면 나는 이렇게 한다’는 응수논리다. 저 여인이 간음을 했으니까 나는 돌을 던진다는 식이다. 여야의 정쟁과 비슷하다. 그러나 2차적 가족동기, 3차적 개인동기로 가면 레벨이 올라갈수록 그러한 전제조건이 없다. 공자의 군자개념이나, 석가의 해탈개념, 예수의 사랑개념은 ‘상대가 어떻게 하면 나는 이렇게 한다’는 전제조건을 폐기한다. 무조건적인 의사결정이다. 상대는 군자가 아니므로 논외다. 응수하지 않는다. 이러한 모든 것은 의사결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의사결정의 장 안에서 동기부여의 의미를 가지며, 모든 의사결정은 상대가 있는 게임이며, 그 상대는 부족이며 그 상대가 변화하므로 의사결정의 일관성을 잃게 되고, 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그 스트레스가 인간에 동기를 부여하고, 인간은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통해 일관된 의사결정을 하려고 하며, 그것은 그 부족적 동기를 가족화, 개인화 하는 것이다. 즉 전제조건이 걸린 ‘네가 이렇게 하면 나는’을 폐기하고 고유한 나 자신의 의사결정을 밀어붙이는 것이다. 인간이 진정한 의사결정의 주체가 된다. 보통 이에 필요한 것은 이상주의다. 이상주의가 없으면 반드시 전제조건이 걸린다. 북한이 어쩌면 일본이 어쩌면 조선족이 어쩌면 하고 조건이 붙는 이유는 자기 안에 에너지원인 이상주의가 없기 때문이다. 4대성인은 이상주의를 제출하는 방법으로 개인적 동기를 생산했다. 예컨대 개인적인 패션스타일이 되면 상대가 어떻게 나오든 상관없이 일관된 의사결정이 가능하다. 화가는 화가의 옷을 입으면 되고 음악가는 음악가의 옷을 입으면 되고 의사는 가운을 입으면 된다. 이때 과연 자신이 그러한 권한이 있느냐다. 초등학교라면 나는 붉은 옷을 입고 싶다 해도 선생님이 지금은 체육시간이야. 체육복으로 갈아입어. 하고 명령하면 옷을 갈아입을 수 밖에 없다. 의사가 되어야 가운을 입을수 있다. 개인이 의사결정권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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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떠오른것이 노무현 대통령님의 마누라를 버리라는 것이냐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상대의 노무현의 장인은 빨갱이라는 공세에 논리로 대응했다면 시각장애인이었다거나 얼마나 관여했는가 등등의 이야기가 되었겠지요. 하지만 그야말로 하나 위에서 내려다보는 마누라를 버리라는 것이냐는 일갈로 조용히 만들어버렸습니다.
상부구조로 하부구조를 치는 것이군요...~
프로이드 중심, 프로이드로 해봤는데 잘 안되니까 프로이드 변형, 프로이드 반대로 나가다가 인지중심,욕구중심, 인간중심, 해결중심으로 나아가고 있다.
구조론은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을 교통정리했듯이 모든 학문을 교통정리할 것이며, 존재론이 아닌 인식론, 절대주의가 아닌 상대주의, 개인의 감정과 스트레스같은 내적 메커니즘에 머무르고 있는 인간이해의 한계를 존재론, 상호작용, 완전성, 의사결정. 일의 1사이클, 궁극적인 이상주의 지향을 통해서 풀어낼 것이다.
김동렬의 마음의 구조 서평 -아란도님
http://m.blog.daum.net/arrando/13757840
◎ 이드≫리비도≫욕망≫행동≫심리현상
동렬님은 프로이트를 이렇게 정리하셨는데, 이는 오해입니다. 그 뒤의 얘기는 따라서 줄줄이 꼬이게 되지요.
프로이트의 도식을 간단히 말씀드리면,
"욕망=리비도 ≫ 이드 ≫ 심리현상 ≫ 행동" 정도로 요약 가능합니다.
프로이트는 거 가짜입니다.
제가 많이 공부하고 비판해 봐서 아는 내용 참고 삼아 끄적여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