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여성 평균 얼굴, 사진 보면 예쁜 여자 참 많아야 하는데. "사진을 접한 누리꾼들은 "평균이라고 하기엔 다들 너무 예쁜데?", "세계 여성 평균 얼굴 보니 나는 평균 이하인가보다", "믿을 수 없어", "한국 여자들 완전 예쁘다"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경기일보] <- 필자가 보기엔 이 기사를 쓴 기자도 뭔가 착각하고 있다. 제목이 수상하다.
남녀의 얼굴을 합성한 사진을 나라별로 비교한 사진이 인터넷에 유행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 달린 많은 리플들이 ‘나는 평균보다 못하단 말인가?’ 하고 탄식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농담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진담이었다. 필자는 수학을 못해서 복잡한 것을 싫어한다. 근데 이건 복잡한게 아니다. 어떻게 이걸 모를 수가 있다는 말인가? 물론 한 두 사람은 3초쯤 착각할 수도 있다. 근데 거기에 많은 리플이 달리고 추천수가 붙었다면 다른 이야기가 된다. 진짜로 모르는 사람도 있더라는 말이다. 이상하게 느껴지면 주의해서 한 번 더 읽어봐야 한다. 미모의 평균이 아니라 사이즈의 평균임을 알 수 있다. 이런 류의 기사가 포털에 올라온게 한 두 번이 아닌데 그때마다 소동이 반복된다. 얼마나 답답했던지 이걸 장문의 글로 해설해놓은 블로그도 본 기억이 있다. 구조론을 쓰면서 느낀 것은 뭔가 근본적으로 뒤틀려 있다는 거다. 구조론은 어려운게 아니고 쉬운 것이다. 원근법 만큼이나 쉽다. 복잡하게 무언가를 조작하는게 아니고, 그냥 보이는대로 보자는 거다. 왜곡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면 된다. 의도적으로 비틀어서 왜곡하는게 어렵지 있는 그대로 보는게 어려운가? 뭔가 거창하게 일을 벌이는게 어렵지 손대지 말고 가만 있는게 어려운가?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그림일기를 그릴 때 해를 그리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근데 고흐도 해를 그렸고 모네도 해를 그렸다. 유명화가들도 다들 해를 그렸는데 왜 해를 그리면 안 된다고 하지? 그거 이해 안 되는가? 해를 그렸다는 것은 해가 그곳에 있기 때문에 해를 그린게 아니라, 그곳이 하늘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말하자면 날로먹을 요량으로 해를 그리기 때문이다. 요령을 피운 것이다. 의도적으로 왜곡한 거다. 하늘이라는 표시를 해버린 것이다. 이건 이미지의 방법이 아니라 텍스트의 방법이다. 이미지는 서로 얽혀 있다. 텍스트는 그 얽힘을 뜯어버린다. 반칙이다. 반칙하지 말라는 거다. 뜯어진 이미지는 죽은 이미지다. 하늘을 그리려면 하늘색 크레용을 열심히 칠해야 한다. 근데 해를 그려버리면 1초만에 그곳이 하늘임을 알릴 수 있다. 참으로 편리하다. 그런데 꼼수다. 그것이 손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다섯손가락을 펼친 모양을 그린다. 이것도 반칙이다. 남자아이들은 얼굴측면을 잘 그리고 여자 아이들은 무조건 정면을 그린다. 이것도 반칙이다. 고대 이집트의 부조가 그렇듯이, 얼굴은 옆으로 그리고 가슴은 정면으로 그리는 것도 누군가 잔머리 굴려서 개발한 편법이다.
이말년의 주춤서기 초식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자세다. 이런 식의 상투적인 표현들은 초딩들 사이에 전수되어 내려오는 꼼수다. 무의식적으로 사용되는 클리셰 같은 거다. 극복해야 한다. 물론 이말년은 그림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일부러 이렇게 그리는 거다. 일기를 쓰라고 하면 글자를 옆으로 납작하게 쓰는데 이건 칸을 빨리 메우기 위한 반칙이다. 그 반칙이 꼴보기 싫은 것이다. 이해 안 되는가? 이발소 그림이냐 파인아트냐 하는 것은 결국 텍스트냐 이미지냐다. 개인의 욕망을 충족하느냐 집단의 의사결정을 돕느냐다. 근본적인 방향이 다르다. 이거 접수해야 한다. 이건 그림의 문제가 아니라 그림 이전에 근본적인 자세의 문제다. 자세가 틀린 사람은 누가 꾸짖어줘야 한다. 나는 구조론을 발견한게 아니고, 사람들이 구조론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사람들이 말은 다들 할줄 안다. 구조론은 문법이다. 말을 할줄 안다면 문법을 안 배워도 아는 것 아닌가? 한국인 중에 문법을 배우고 말을 배운 사람은 없다. 구조론은 문법 속에 있다. 그러므로 말할 줄 안다면 이미 구조론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자신이 어떤 문법을 사용하고 있는지 모르더라는 사실을 나는 발견한 것이다. 언어 안에 목적어와 동사, 주어와 술어, 전제와 진술, 명제와 예시의 대칭≫비대칭으로 담론을 조직해 가는 구조가 있다. 말을 배웠다면 말을 멋있게 할 줄도 알게 된다. ‘이 사과 한 입 먹어봐!’고 말하는 것 보다 ‘만약 네가 이 사과를 먹어보지 않으면 나중 후회하게 될 것이다.’ 하고 말하는게 더 멋있게 말하는 것이다. ‘아! 저 양반 말 좀 할 줄 아네.’ 하는 감탄사를 듣게 된다. 무엇이 다른가? 객관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사과 한 입 먹어봐.’ 하면 ‘왜? 두 입 먹으면 안 되고?’ 하고 반격하는 어김쟁이 꼭 있다. 사과를 먹어보라고 말하면 사건에 자신을 개입시킨 거다. 개입시키면 주고받기 게임에 걸려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수 있다. 일이 골치아프게 돌아간다. ‘사과 먹어봐!’ 하면 '니가 뭔데 내게 명령해?' 하고 시비 붙는다. '왜? 안 먹으면 날 죽일라고?' 하고 말대꾸하는 넘도 있다. ‘사과가 맛있다.’고 하면 ‘누가 물어봤냐고?’ 하는 핀잔 들어온다. 어른들은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충고인데 말야’. 하고 전제를 붙인다. 근데 거짓이다. 낯간지럽다. 자기가 충고하고 싶어서 하는 충고다. 그렇다면 어떻게 말해야 하나? 초딩은 부정어법을 쓴다. ‘엄마 사과 하나만 먹으면 안 돼?’ 하고 마치 자신이 억압을 당하고 있는 것처럼 행세한다. 이게 심하면 버릇이 되어 모든 말에 부정어법을 쓴다. 자신을 약자 포지션에 두고 강자 포지션에 있는 상대를 공격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각색한다. 이 또한 쪽팔리는 행색이다. 하여간 잔머리 굴려서 기특한 수법들을 생각해냈다. 객관적으로 말하면 된다. 말을 주고받는 당사자에서 자신을 배제하기다. 지나가다 한 마디 툭 던지고 가듯이 말하면 된다. 말은 두 사람 사이에서 오고가며 대칭구조를 이룬다. 자신이 파트너로 들어가는 절차가 골 때리는 것이다. 어른들의 ‘다 너를 사랑해서 충고법’이나 어린이의 ‘엄마 한 번만 안돼? 읍소법’이나 우스꽝스럽긴 마찬가지다. 경상도 사람은 ‘너 밥먹었어?’ 하고 물으면 반사적으로 ‘언제?’하고 받아치는데, 이건 뭐 알리바이를 대서 현장부재증명을 하겠다는 식이다. 정확한 경주식 사투리 발음은 '니 밥뭇나?' ‘으은제!’다. 그냥 ‘안 먹었다.’고 대답하면 되는데 꼭 말을 싸가지없게 한다. 주고받는 말의 핑퐁게임 사이로 치고들어가는게 어색해서다. 김어준이 접두사로 ‘졸라’와 ‘씨바’를 붙여야만 말을 할 수 있듯이, 치고받기로 가야 말이 되어준다. 고무줄놀이 하는 여자애들이 돌리는 고무줄 속으로 뛰어들기만큼 만만치 않다. 외부인이 보면 골이 난 줄로 오해하는데 이게 지역감정의 단초가 된다. 객관적으로 말하기는 ‘A면 B다법’을 쓰는 것이다. ‘맛이 좋다.’ 혹은 ‘먹어봐라.’가 아니라 ‘안 먹으면 후회한다.’로 문장 안에 대칭을 넣어준다. 말을 주고받는 두 당사자 포지션을 한 문장 안에 넣기다. 이때 상대방이 대꾸할 말을 가로채서 전제부로 삼아버리는 방법이 있는데 이는 고수의 테크닉이다. '귀하게 자란 도련님은 이런 음식 못 먹는다고 하던데,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이런 식이다. 상대방이 ‘안 먹어!’로 받아칠 것을 염두에 두고, ‘네가 안 먹으면 철수 주려고 가져온건데 말야. 괜찮겠지?’ 이런 식이다. 말 좀 한다는 사람, 글 좀 쓴다는 사람은 누구나 이 방법을 안다. ‘새누리당은 각성하라.’고 말하면 사건에 개입하는 것이다. ‘새누리당이 지금 각성하는게 나중에 후회하는 것보다 합리적이다.’고 말하면 점잖은 평론가 말투가 된다. 할 말 다하고 자신은 발을 뺀다. 남 이야기 하듯이 하는 것이다. ‘불을 꺼라.’고 다그치기보다 ‘집을 홀랑 태워먹고 보험금 청구할 생각이라면 천잰데.’ 하고 비꼬는건 개그맨식 말투다. 자신을 사건의 당사자가 아닌 해설자 포지션에 두는 것이다. 상대방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너 어디 아프냐?’고 비꼬는 것도 같다. 과학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제 3자 포지션에 두고 말하면 된다. 그러면 상황이 주고받는 핑퐁게임이 보인다. 둘을 동시에 보면 소실점이 보인다. 그게 어려운가? 그렇게 하지 않기가 더 어려운 것 아닌가? 어른들의 ‘다 너 잘되라고’법이나 초딩의 ‘엄마 좀 안돼?’법이나 경상도의 ‘으은제?’법이나 다 옹색하고 구차하기가 이를 데 없다. 좋은 말 하다가 쌈난다. ‘와? 내가 그칼줄 알았나?’ ‘내가 뭐라 커뜨노?’ ‘내가 그랬다 아이가?’ 하는 식으로 의문문으로 말하는게 그렇다. 사투리 쓰는 사람들이 이런 식의 말을 상투적으로 붙이는데 이건 노예어다. 자신을 약자로 규정하고 대들듯이 말한다. 그래야만 말이 되어주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게 어린애들 말대꾸 습관이다. 고쳐줘야 한다. 그림도 그렇다. 그냥 있는 그대로 그리면 된다. 구태여 해를 그리거나, 구태여 손가락 다섯 개를 낱낱이 표시하거나, 구태여 어깨와 머리 사이에 목을 길게 그려넣거나 하는건 더 힘들다. 그게 불편하다. 보기에도 어색하다. 왜 쉬운 지름길 놔두고 어려운 길 돌아서 갈까? 왜 간단한 거 놔두고 복잡한 거 쓸까? 구조론은 불편함을 버리고, 의도를 버리고, 편법을 버리고, 꼼수를 버리고, 포지션을 버리고, 요령을 버리고, 어색함을 피하여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의 자연의 결을 따르는 것이다. 만물은 얽혀 있다. 그 얽힘을 받아들이면 된다. 초딩의 머리 속에는 머리와, 목과, 어깨가 따로 따로 존재한다. 머리 그리고, 목 그리고, 어깨 그리고, 하나하나 떼었다가 다시 조립하는 것이다. 단숨에 선을 죽 그으면 되는데, 왜 떼었다 붙였다 이중노동을 할까? 왜 복잡하게 두 번 일을 할까? 힘들잖아. 단숨에 그으면 선이 굵은 그림이 된다. 얽힘을 그대로 드러내면 캐릭터 나와준다. 왜 착한넘, 나쁜넘 따로 나눌까? 선과 악은 얽혀 있다. 얽힌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면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얽혀서 바로 햄릿된다. 명작된다. 세익스피어 나와준다. 이 얼마나 쉬운가? 원래 선과 악은 붙어서 하나로 얽혀 있는데, 그걸 따로따로 분리하여 선은 흥부 주고, 악은 놀부 주는게 더 골 때리는 작업이다. 왜 힘들게 그런 노가다를 하지? 있는 그대로 가면 자연스럽다. 자연스러운게 리얼리즘이다. 자연이 과학이다. 이건 누구한테 배워서 아는게 아니고 원래 알고 태어나는 거다. 자연스러움과 부자연스러움이다. 아이들은 상투적으로 ‘있잖아?’를 앞에 붙인다. 한번으로 부족해서 ‘있잖아? 있잖아?’ 두 번씩 읊어준다. 그런데 있기는 뭐가 있다는 거지? 이건 정말이지 어색하고 복잡하고 머리 아프다. 왜 이런 힘든 짓을 하지? 부자연스럽다. 단지 어색함과 부자연스러움을 피하기만 하면 그게 객관이고 과학이다. 나그네처럼 말하면 된다. 난 좋은걸 추구하지 않는다. 나쁜걸 피할 뿐이다. 나그네가 모르는 사람에게 ‘있잖아요?’ 하는걸 봤는가? ‘여보세요.’가 처음 말을 붙이기에 자연스럽다. 물론 촌놈들 중에는 모르는 사람에게도 ‘있잖아요?’를 쓰는 사람도 있긴 있더라. 모르는 사람에게 말할 때는 핑퐁식 사투리 어투를 버리고, 톡 쏘아붙이는 말대꾸 습관을 버리고, 싸가지없는 상놈말투 버리고 전제와 진술의 구조로 말할 수 밖에 없다. ‘여보세요. 길 좀 묻겠습니다." 하면 여기까지가 전제부다. "신설동 가는 길 좀 알려주시겠습니까?" 하면 진술부다. 이런 구조로 말하면 곧 구조론이고 메커니즘이고 과학이다. 전제와 진술은 세트로 얽혀 있다. 대칭 둘이 얽혀서 하나가 된다. 둘에서 하나로 올라서는게 구조론이다. 이것을 일반화 하여 모든 분야에 적용하면 된다. 앞에서 말한 '세계 여성 평균 얼굴'도 그렇다. 어디에도 '미모의 평균'이라는 말이 없다. 근데 왜 하지도 않은 말을 지어내냐고? 그것도 한 두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일제히 허위사실을 날조해낸다. 그런 날조는 왜 또 기민하게 잘 하느냐고? 좀 허술하고 느릿느릿하게 행동하면 안 되냐고. 미모의 평균으로 착각했는데 이상하다고? 이상하니까 미모의 평균이 아니구나 하고 바로잡으면 된다. 왜 바로잡지 않고 밀어붙이냐고? 그 밀어붙이는 뚝심은 또 어디서 나왔냐고? 정말이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필자의 진단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뭔가 근본적으로 뒤틀려 있다는 거다. 말대꾸하는 어린애와 같다. 어린이는 약자니까 반항자의 포지션을 취한다. 그거 버려야 한다. 세상과 맞서는 자세가 뒤틀려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된다. 그거 인정하기가 어려운가? ‘먹어’ 하면 불완전하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짜장면 그릇을 내밀면서 ‘먹어’ 하면 알아먹는다. 목적어가 생략되었지만 보디랭귀지로 보충되었다. 이렇듯 언어는 목적어와 동사, 주어와 술어, 전제와 진술, 명제와 예시의 구조를 갖추어야 하지만 일부 생략해도 된다. 말을 받아주는 파트너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파트너가 없다면? 박근혜의 ‘베이비 토크’는 파트너가 있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왜 멋대로 간주하는데? 누구 허락 맡고? 왜곡이고 조작이다. 사적으로 가능하나 공적 영역에서는 무리수다. 어린이의 말이 말대꾸로 가는 것은 파트너가 받아주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오냐오냐 하고 받아주면 응석받이 된다. 어려서는 철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인생 자체를 이런 식으로 삐딱하게 산다면 깝깝한 일이다. 어른이 되면 객관적으로 말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상대방이 말대꾸로 받아칠 말을 예상하여 그 말을 자기 말의 전제부로 삼으면 된다. 사실 말 좀 해주는 사람은 다들 그렇게 한다. 정치인이나 개그맨이나 작가라면 이 방면의 도사다. 이 구조를 일반화 하면 된다. 초딩 선생님이 해를 못 그리게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림이 뭐냐 이거다. 그림은 관찰이다. 자연을 관찰하게 할 의도로 그리라고 하는 것이다. 왜 일기를 쓰라고 하지? 생각하라는 거다. 생각하게 할 의도로 일기쓰기를 시킨다. 그러나 애들은 반대로 생각한다. 일기는 보고라고 착각한다. 선생님이 애들을 감시할 의도로 오늘 어떤 일이 있었는지 보고하라는 거다. 방학동안 혹시나 사고치지 않을까 감시할 의도로 방학동안 일어난 일을 보고하게 하는게 일기라고 믿는다. 그래서 첫 줄은 ‘나는 오늘’ 들어간다. ‘나는 오늘’ 들어가면 시야는 좁아지고 만다. 처음부터 보고할 마음을 품고 있다. 이미 틀려버린 것. 극복해야 한다.
◎ 일기는 보고다. 근본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뒤틀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도 보고로 그린다. 나무는 나무색을 칠하는데 사실 나무색을 가진 나무는 강원도 하고도 홍송 밖에 없다. 그것도 밑둥은 검은색이다. 나무색을 가진 나무가 없는데 왜 나무색을 칠할까? 그게 나무라는 표시를 하는 거다. 이건 관찰이 아니다. 여기서 배반 들어간다.
◎ 교육목적.. 관찰(그리기)하고 사색(일기쓰기)하라. 완전히 바꾸어졌다. 목적은 사라지고 거짓만 남은 거. 이러한 바꿔치기 습관이 어른이 되어서도 남아있는 사람이 꽤 많다. ‘알고보니 나무는 나무색이 아니더라.’ <- 이러한 고정관념 깨기가 미술교육의 진짜 의도다. 초딩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엄마한테 다 말한다. 그런데 학원이다 뭐다 뺑뺑이를 시키면 보고를 않게 된다. 그때부터 상대의 반응을 끌어내기 위한 게임이 시작된다. 그게 말대꾸다. 노예들은 말대꾸를 해야 살아남는다. 춘향전에 묘사된 방자와 몽룡의 문답에 이러한 사정이 잘 묘사되어 있다. 노예는 본능적으로 반란자의 포지션에 서야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말대꾸를 계속해서 상대방의 진짜 의도를 심문한다. 노예가 주인 믿다가 뒤통수 맞은게 어디 한 두 번이겠습는가? 어린이 말투가 방자 말투다. 시종일관 어깃장에 말대꾸. 엄마에게 하는 말을 엄마가 안들어주니까 박그네의 베이비 토크. 이발소그림과 파인아트는 보고용그림과 탐구용그림이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절대로 만나지 않는 적대관계다. 이미 배반 들어간 거다. 어느 편에 서느냐가 중요하다. 그림 못그려도 관찰했으면 높은 점수를 줘야 한다. 나무에 나무색 칠하면 빵점 줘야 한다. 집을 그리라면 집에 있는 강아지, 소, 염소, 닭 다 그리는데 우리 집에 닭, 소, 염소, 강아지 있어요 하고 보고를 하는 것이다. 관찰하랬지 누가 보고하랬냐고. 관찰하면 못 그려도 백점. 보고하면 잘 그려도 빵점. 사실 자연의 얽힌 상태를 그대로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 어려움에 도전하는 것이 진짜다. 관찰은 혼자 하는 거고 보고는 상대방을 의식하는 거다. 상대방을 의식하면 이미 진정성 없는 가짜다. ‘사와.’ ‘뭐?’ ‘빵.’ ‘왜?’ ‘내가 배고프니까?’ ‘니가 사먹으면 되잖아?’ ‘난 일진이고 넌 빵셔틀이니까 니가 사와야지.’ 이건 주고받기식 베이비 토크다. ‘내가 배가 고프니까 너는 빵을 사와라.’ 이건 전제와 진술이다. 둘이 연결되면 명제가 된다. 여기에 왜냐하면을 붙여서 ‘나는 배가 고프니까 너는 빵을 사와라. 왜냐하면 너는 빵셔틀이고 나는 일진이니까.’를 전부 연결하면 담론이다. 복제가 가능한 완전한 문장의 형식이 된다. 언어는 계속 피아간에 대칭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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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선생님이 해를 못 그리게 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림이 뭐냐? 이거죠. 관찰입니다. 자연을 관찰하게 할 의도로 그리라고 하는 거에요.
일기를 왜 쓰라고 하죠? 생각하라는 거죠. 생각하게 할 의도로 일기쓰기를 시킵니다.
그러나 애들은 반대로 생각합니다.
일기는 보고라고 착각합니다. 선생님이 애들을 감시할 의도로
오늘 어떤 일이 있었는지 보고하라는 거죠. 방학동안 사고치지 않을까 감시할 의도로
방학동안 일어난 일을 보고해. 이게 일기라고 믿는 거죠.
그래서 첫 줄은 나는 오늘 들어갑니다. 처음부터 보고할 마음을 품고 있는 거에요.
이미 틀려버린 겁니다. 극복해야 합니다.
일기는 보고다.
일기는 생각이다.
자 여기서 근본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뒤틀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림도 보고로 그립니다.
나무는 나무색을 칠하는데 실제로 나무색 가진 나무는 강원도 홍송 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밑둥은 검은색입니다. 나무색을 가진 나무가 없는데 왜 나무색을 칠할까요?
나무라는 표시를 하는 거죠. 여기에 나무가 있다는 표식을 세웁니다.
이건 관찰이 아니지요. 여기서 배반 들어간 겁니다.
교육목적.. 관찰(그리기)하고 사색(일기쓰기)하라.
초딩생각.. 보고하고 보고하라.
완전히 바꾸어 버립니다. 목적은 사라지고 거짓만 남은 거지요.
근데 이러한 바꿔치기 관습이 어른이 되어서도 남아있는 사람이 꽤 많아요.
나무는 나무색이 아니더라. <- 고정관념 깨기.
이게 그림교육의 진짜 의도입니다.
초딩들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엄마한테 다 말합니다.
그런데 학원이다 뭐다 뺑뺑이를 시키면 보고를 않게 됩니다.
그대부터 상대의 반응을 끌어내기 위한 게임이 됩니다. 그게 말대꾸입니다.
노예들은 말대꾸를 해야 살아남습니다. 춘향전에 묘사된 방자와 몽룡의 문답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노예는 본능적으로 반란을 해야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말대꾸를 계속해서 상대방의 진짜 의도를 심문합니다.
노예가 주인 믿다가 뒤통수 맞은게 한 두 번이겠습니까?
시간 있으신 분은 춘향전 한 번 찬찬히 읽어보세요. 방자와 몽룡의 문답이 백미입니다.
근데 어린이 말투가 방자 말투입니다. 시종일관 어깃장에 말대꾸.
엄마에게 하는 말을 엄마가 안들어주니까 박그네죠. 베이비 토크.
이발소그림과 파인아트는
보고용그림과 탐구용그림이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절대로 만나지 않는 적대관계라는 거죠.
이미 배반 들어간 겁니다. 배반의 편에 서면 발언권 없는 거죠.
어느 편에 서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림 못그려도 관찰했으면 높은 점수를 줘야 합니다.
나무를 나무색 칠하면 빵점 줘야 합니다.
집을 그리라면 집에 있는 강아지, 소, 염소, 닭 다 그리는데
우리 집에 닭, 소, 염소, 강아지 있어요 하고 보고를 하는 겁니다.
관찰하랬지 누가 보고하랬냐고요.
근데 아직도 여기서 못 벗어난 사람이 절대 다수. 임성한 월드.
관찰하면 못 그려도 백점. 보고하면 잘 그려도 빵점.
사실 자연은 얽혀있고 얽힌 상태를 그대로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어려움을 드러내는 것이 진짜입니다. 쉽게 왜곡하며 텍스트고 가짜입니다.
관찰은 혼자 하는 거고 보고는 상대방을 의식하는 겁니다.
상대방을 의식하면 이미 가짜입니다.
대화법, 글로는 이해는 되는데, 실천이 안될때가 많음.
도대체 우리가 이런 말을 어디서 들어 보겟냐고?
다들 잘 아는건데 나만 그런감?
이거 완죤 내 말이네..
일기를(나는 오늘...) 저렇게 썼고 그림을(나무는 나무색으로...) 저렇게 그렸었지..
근데 그케 하지 말라고 해서 안 할라고 해도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던걸..
이후로 뭐~ 누가 시비하는 사람 없으니 그렇게 지나가고 잊어 버리고 살았는데
지금 동렬선생처럼 저 한 마디만 들었다면 바로 해결되었을것을...
여기오면 내가 미처 하지 못한 공부를 동렬선생이 대신 해서 다 알려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그것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역사까지 모든 분야를 통 털어 그냥 공부가 아닌 각(覺)자의 시각과
판단으로 그려내니 우리는 여기서만 맛볼수 있는 이 좋은거 그냥 줏어 먹기만 하면 돼요.
잘 안 맥히면 다시 물어보면 답변은 또 얼마나 친절하게 해 주시는지...
그런다고 돈을 받어? 뭘 받어?
이렇게 거져줘도 못 먹으면 등신...
먹을게 없다 생각되면 다른 사람들 방해않게 걍 조용히 딴데 간다고 누가 잡나??
(이쯤 되면 광신도 소리 나올듯... 전혀 개의치 않음!) 지금까지 자기소개였음돠~
뜨금 뜨금하네....초등생 둔 부모입니다....
징징대는 사람이 그렇게 싫었어요.
바로 예의바른 어법 교육자료이기도 하군요.
이런 기초와 토대를 초등학교 시절부터 들려줄 수 있다면 디자인 대한민국이 오는 것은 시간문제...
모두를 가르는 베이비톡 불통이 횡행하니 더욱 한심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