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心은 심장의 모양을 상형한다. 중심을 뜻한다. 센터, 코어다. 볼펜심과도 같다. 사물의 알맹이다. 무엇인가? 심은 의사결정이 일어나는 부분이다. 그런데 유심론唯心論의 심은 spirit이다. spirit은 정신이다. spirit의 어원은 spray다. ‘뿌린다’인데 숨을 쉰다는 뜻이다. 호흡한다, 살아있다는 뜻이다. 한자어 심心과 유심론의 spirit은 말의 의미가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호흡이나 영혼은 피상적인 관찰이고 철학적으로는 존재의 궁극적 본질을 ‘의사결정’으로 본 것이다. 의사결정은 인간의 뇌에서 일어난다. 유심론은 우주를 거대한 하나의 뇌로 보는 것이다. 핵심은 의사결정이다. 존재를 의사결정으로 보는 것이다. 유물론도 마찬가지다. 물질의 속성에 의해 의사결정이 일어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물질의 어디서 의사결정이 일어나는가? ◎ 하드웨어 – 실재론(유물론) 여기서 실재론과 관념론 나와준다. 그런데 철학으로 들어가면 실재론과 관념론이 맞다. 실재론이 하드웨어라면 관념론은 소프트웨어다. 실재론과 관념론이 더 과학적이고 연역적인 설명이다. 유물론과 유심론은 경험적이고, 귀납적 설명이다. 유물론의 물질이나 유심론의 마음은 눈에 보이고 현실에서 경험된다. 그러나 이런 경험적인 것은 비유의 대상일 뿐 과학의 도구는 아니다. 구조론은 실재론도 아니고 관념론도 아니며 상호작용론이다. 중요한 것은 의사결정이 진정 어디서 일어나는가다. 우리는 형식보다 내용이 중요하고, 껍데기보다 알맹이가 중요하다고 배운다. 심은 알맹이다. 그런데 알맹이는 안에 있을까? 의사결정은 안에서 일어날까? 컴퓨터라면 하드웨어가 중요하다. 소프트웨어가 아무리 좋아봤자 구닥다리 286 컴퓨터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물론 컴퓨터 기종이 같다면 소프트웨어가 중요하다. 형식이 아니라 내용을 보는 것은 형식이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형식이 같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간다. 숨은 전제가 있다. 벌써 속임수다. 같은 사람끼리 비교할 때는 당연히 내용을 본다. 사람과 개를 비교한다면? 당연히 형식을 봐야 한다. 아이큐가 100인 개와 아이큐가 70인 사람이 있다면 누구를 존중할까? 우리는 익숙한 사건이 반복될 때, 같은 사람들끼리 비교할 때, 형식이 같을때 내용을 본다. 반면 새로운 사건이 일어날 때, 다른 종과 비교할 때, 형식이 다를 때는 당연히 껍데기를 본다. ◎ 심조론.. 형식이 같고 같은 사건이 반복될 때. 한옥과 한옥을 비교할 때는 내용을 보지만 양옥과 한옥을 비교하면 외양을 본다. 디자인을 보더라도 그렇다. 디자인의 내용을 보면 하수다. 특정 디자인이 배경과 어울리는지 봐야 한다. ‘나는 어떤 디자인이 좋다’는 식은 바보같다. 어떤 디자인을 좋아한다는 말은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난다는 말이다. 고기를 좋아한다는 사람과 회를 좋아한다는 사람은 만나는 사람이 다르다.
심은 컵 속에 있다. 아니다. 심은 컵 손잡이에 있다. 손잡이가 없는 컵은? 심은 컵과 병 사이에 있다. 심이 당연히 내부에 있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소프트웨어가 심이라는 생각은 틀렸다.
심은 바깥에 있지만 같은 일이 반복되면 안으로 들어간다. 무엇인가? 실재론과 관념론의 구분은 착오다. 어떤 것이 처음 등장하면 실재론이고 반복되면 관념론이다. 그런데 관념은 범위가 좁다. 관념론은 숨은 전제를 깔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반복된다는, 기본형이 미리 정해져 있다는 가정을 깔고 있다. 그러므로 유심론, 관념론은 존재의 전체를 조망하는 넓은 시야가 아니다. ◎ 실재론은 밖의 하드웨어이고 관념론은 안의 소프트웨어다. 실재론이 더 윗길이다. 이때 유심론, 관념론자는 의미를 확장하는 속임수를 쓴다. ‘내말이 그말이라니까’ 수법이다. 실은 심의 의미, 이데아의 의미에 그것도 포함된다고 우기면 되는 것이다. 심은 의사결정이 일어나는 부분이다. 처음에는 바깥양반이 심을 이루고 대문간에서 일처리를 하지만 같은 일이 반복되면 안방마님이 심을 이루고 안방에서 일을 처리한다. 심이 바뀐다. 처음 보는 옃장수가 나타나면 대문간에서 째려보지만, 방물장수가 단골이 되면 안방으로 불러들인다. 생물도 원시단계는 먹이를 위장으로 들이지 않았다. 강장동물처럼 위장이 몸 밖에 있다. 정리하자. 유물론이나 유심론은 격이 떨어지는 주장이다. 실재론과 관념론이 더 맞다. 의사결정이 어디서 일어나는지가 핵심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뒤섞여 있다. 언어를 왜곡하기 때문이다. 관념론자들이 ‘내말이 그말이여’ 수법을 쓰기 때문이다. 입자를 주장하다가 입자 위에 질이 별도로 있음을 입증하면 사실은 입자가 아닌 질을 말하려고 했다고 우기는 방법을 쓴다. 귀납법을 쓰다가 연역법으로 바꿔버린다. 어쨌든 최상위단계가 있을 것이고 그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귀납법으로는 최상위단계에 도달할 수 없다. 그것은 불능이다. 구조론은 상호작용론이며 상호작용론은 의사결정이 A나 B가 아니라, 밖이나 안이 아니라 둘의 사이에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 사이는 정해져 있지 않다. 어떤 둘이 만나는 순간에 결정된다. 내가 컵의 어디를 쥘지는 쥐는 순간에 결정된다. 물론 반복하여 컵을 쓰다보면 컵의 손잡이가 필요하게 되고 대개 손잡이를 쥔다. 그런데 과연 내가 컵의 손잡이를 쥘까? 그건 내맘이다. 실재론이든 관념론이든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결정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오류다. 어떤 둘이 접촉하는 순간에 결정된다. 그리고 사건이 반복되면서 점차 밖≫안으로 포지션을 옮겨간다. 회사라도 창업단계는 외부에서 대가리들이 결정하지만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안에서 실무진이 결정하고 웃대가리들은 골프나 치러 다닌다. 구조론은 이런 반복을 수학적으로 소거한다. 실무진이 결정해도 윗선의 위임을 받았기 때문에 책임은 위에다 묻는다. 국정원장이 사고를 쳤어도 박근혜에게 책임을 묻는다. 그러므로 안에서 결정된다 해도 실제로는 밖이 결정한다. ◎ 실재론, 관념론은 의사결정의 위치를 찾는다. 바깥을 강조하는 실재론이 관념론보다 더 시야가 넓다. 그러므로 조금 더 연역에 가깝다. 그러나 둘 다 미리 정답이 결정되어 있다는 입자론을 취하고 있다. 양자역학의 세계관과 맞지 않다. 철학적 논의들은 어수선하게 진행된다. 철학자들이 연역과 귀납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양다리를 걸치는 수법을 쓰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절대적으로 공통되는 것은 안과 밖이다. 의사결정은 안에서 일어난다고 믿기 때문이다. 착각이다. 이 하나의 대착각 때문에 많은 논쟁이 끝나지 않는 것이다. 의사결정이 밖에서 일어난다고 하면 운명론에 휩싸인다. 자유가 없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자들이 인간의 주체적인 자유의지를 주장하는데 이 경우 관념론으로 흐른다. 의사결정이 안에서 일어난다고 해야 인간의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측면이 부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념론은 이상주의로 간다. 유물론은 숙명론으로 가는 수가 있다. 예컨대 마르크스가 혁명은 역사발전 단계의 법칙으로 영국에서 먼저 일어나도록 다 정해져 있다고 말한게 그렇다. 다 정해져 있다? 상부구조에 각본이 있고 시나리오가 있으며 인간은 운명을 따라야 한다? 굉장히 위험한 생각이다. 관념론은 자유의지를 주장하지만 주술로 흐르게 된다. 기도하면 된다는 식이다. ◎ 실재론(유물론)은 입자론, 결정론의 숙명론에 빠질 위험이 있고 관념론(유심론)은 인간의 주체적인 자유의지를 강조하나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미루는 오류를 저지른다. 관념론은 안을 찾는데 안으로 가다보면 결국 개인에게 책임이 간다.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지적하는게 아니라 개인이 도덕적으로 수양하면 된다는 식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로 가게 된다. 구조론을 유물론으로 오해해서 모든게 위에서 결정된다면 내가 할 수 있는건 뭐냐고 항의하는 사람도 있고, 관념론으로 오해해서 일체유심조타령하는 사람도 있다. 그럴 리가 없잖은가? 구조론은 질≫입자≫힘≫운동≫량의 5단계로 점차 밖에서 안으로 들어온다는 이론이다. 처음 일어나는 사건은 밖에서 결정되고 반복되는 사건은 안에서 결정된다. 익숙해지면 안에서 한다. 우리가 근대화를 하더라도 처음은 서구의 힘을 빌려야 한다. 밖에서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술을 배운 후에는 다시 우리의 주체적인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 밖에서 지식인이 결정할 것이 아니라 안에서 대중이 결정해야 한다. 진보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무조건 독일, 네덜란드, 핀란드를 배우자고 우기는데 이는 유물론적 허튼 태도다. 반대로 걸핏하면 신토불이 타령을 하는 사람들은 공허한 관념론의 환상을 쫓는다. 정답은 밖에서 안으로 들여오는 것이다. 원칙은 정해져 있고 결정은 내가 하는 것이다. 상호작용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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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양다리를 걸치고 연역과 귀납 사이를 옮겨다닙니다. 유물론자들은 물적 현실을 강조하지만, 본론 들어가면 이상주의적인 혁명을 주장합니다. 관념론자들은 인간의 주체적인 자유의지를 주장하지만 그 자유의지로 현실에서 투쟁은 아니하고 갑자기 기도를 합니다. 유물론자들은 운명을 바꾸자고 주장하지만, 운명을 바꾸도록 운명은 정해져 있다며 앞뒤 안 맞는 운명론을 폅니다. 관념론자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하지만 세상은 가만 놔두고 수양하여 자기 자신만 바꾸라 합니다. 속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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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믿음을 두고 이런 식으로 말했다가 사람들이 헛갈려 해서 말하기를 그만 둔 적이 있습니다.
사회학/교육학을 전공한 박사님이셨는데
그 일 이후로, 깨달음이 있어서
배우려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가르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말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소통하려 들지 않는 사람에게는 소통하지 않는게 상책이다.
보지 않으려는 사람에게는 영화를 보라고 권하지 않는게 상책이다. 라는 나름의 결론을 내렸습니다.
당시 내용은 사회의 어떤 약자가 있을 때, 그 사람을 돕는 것이 외부에 속한 것이냐 내부에 속한 것이냐?
즉 환경을 바꾸어 주는 것이 맞냐 아니면 그 사람의 능력을 배양해서 거기서 빠져 나오게 하는 것이냐?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도 같은 것인데, 구원이 내부의 문제냐 외부의 문제냐? 하는 내용과도 연결되어 있기도 하지요. 구원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라고 보면 절대자에게만 칭얼대는 것이 맞고 (그래서 인간은 버러지 같은 존재고), 내부에서 오는 것으로 보면 신이 필요 없다는 극단으로 가기도 하지요. 이런 내용으로 대화를 한 결과는 그 사람이 이해를 못하고 만남이 거기서 끝났다는 것.....
한쪽 극단을 선택함으로써 소통의 끈을 잘라버렸다는 거지요. 이런 자세는 어느 곳에서나 발견됩니다.
이들이 자세를 바꾸면 그 때는 배우고, 듣고, 소통하고, 보도록 해주어야 한다는게 맞다고 생각하지만, 쉬운 문제는 아니겠지요.
안과 밖을 동시에 보는 것이 맞고,
무엇이든 결정되어 있는 것 같지만 결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어쨌거나 관념론과 실재론에 대한 탁월한 정리입니다.
정답은 밖에서 안으로 들여오는 것이다. 원칙은 정해져 있고 결정은 내가 하는 것이다. 상호작용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이런게 천기누설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