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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2412 vote 0 2013.05.29 (23:00:29)

 


    엉뚱한 소리를 하는 분이 여럿 있어서 하는 말인데(예전부터 수도 없이 있었던 패턴의 짜증나는 무한반복. 한달 안에 세 사람에게 똑같은 이야기를 들음.), 노자의 도덕경 첫 머리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는 아주 잘못된 말이다.

 

    그런데 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자신의 헛소리를 정당화하는 방패막이로 쓴다. 왜 명명하지 않나? 왜 길바닥에 떨어져 있는 금덩어리를 줍지 않나?


    누차에 걸쳐 말했듯이.. 뉴턴은 노자의 도가도비상도에 명명하여 대박을 냈다. 도를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명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자는 뉴턴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제 발로 차버린 거다.


    우선 인간의 언어가 잘못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이 장면에서 쾌재를 부르면 곤란하다. 언어가 잘못되어 있다는 사실을 악용하면 안 된다. 언어가 잘못되어 있으니 적당히 거짓말하고 궤변해도 된다고? 천만에.


    언어가 잘못되어 있으므로 언어의 잘못을 바로잡는 언어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만들어진 언어가 숫자다. 수학은 노자가 제기한 ‘언어의 상대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언어다. 수학으로 말하면 거짓이 없다.


    수학은 어떤 둘이 아니라 둘 사이의 관계만 말하기 때문이다. 사건은 둘 사이에서 일어나고 그 둘에는 상대성이, 관계에는 절대성이 적용된다. 상대성 사이의 절대성을 다루므로 수학은 언어적인 모순이 없다.


    구조론은 새로운 수학이다. 기존수학이 커버하지 못한 부분을 다룬다. 구조론에는 도가도비상도의 문제가 없다. 모든 궤변을 타파한다. 어떤 속임수도 불가능하다. 모든 속임수의 패턴은 정확히 같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생각하므로 존재한다’는 표현은 후건이 전건을 친, 후건긍정의 오류다. 존재하므로 생각한다. 이것이 정답이다. 그 시대에 데카르트의 단순한 속임수가 가능했던 이유는 철학자들의 과잉친절 때문이다.


    데카르트가 말하려고 했던건 따로 있다. 그것은 일의성이다. 데카르트에게는 일의성이라는 단어가 없었으므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없었고 뒷사람들은 그 말이 오류지만 고참의 깊은 뜻을 헤아려 맞는 걸로 쳐준다.


    필자 역시 데카르트의 깊은 뜻을 헤아려서 여러차례 인용한 거다. 그러나 ‘생각하므로 존재한다’는 그냥 오류다. 존재하지 않는 기능은 주변에 얼마든지 있다. 빛과 그림자의 예가 그렇다. 빛은 있고 그림자는 없다.


    이런 오류가 생기는 이유는 상대성 때문이다. 존재는 사건이며 사건은 작용과 수용의 양측이 있고 이 때문에 하나가 둘로 보이는 착시가 일어나고 이에 따른 언어적인 혼선을 바로잡을 목적으로 구조론이 있는 것이다.


    뉴턴의 만유인력은 잡아당긴다는 뜻인데 당기는게 있으면 미는 것도 있어야 한다. 지구가 사과를 당겼다고 말할 수 있지만, 공간이 사과를 지구쪽으로 밀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쯤되면 헷갈리기 시작한다.


    어떻든 답은 하나다. 이 문제를 해소하는 방법은 스위치를 기준으로 판정하는 것이다. 에너지의 작용측만 존재하고 수용측은 소거한다. 그건 없다. 인간은 주다/받다 둘을 쓰지만 과학에서는 주다만 있고 받다는 없다.


    받다는 말은 손을 펴고 주는 물건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떠받친다는 말이다. 즉 물건에 힘을 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만약 힘을 가하면 뺏는 셈이 된다. 무엇인가? 의사결정을 상대방이 한다는 말이다.


    에너지를 투입한 쪽이 결정한 쪽이다. 주고받는 동작에서 에너지는 주는 쪽에만 있다. 물건을 주는데 안 받으면 주려는 사람만 힘들다. 힘을 들이는 쪽에 권權이 있다. 궁수가 과녁에 맞힌 거지 과녁이 화살을 받아낸건 아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주다/받다 둘을 쓰는건 편의다. 그거 낱낱이 따지면 골치아프니까 걍 넘어가는 거다. 그러나 수학자는 따져야 한다. 수학의 세계에는 주다만 있고 받다는 없다. 전문가는 따질 것을 따져야 한다.


    ◎ 하나의 사건은 작용/수용 두 포지션을 낳는다.
    ◎ 언어의 편의로 둘 다 있는것처럼 잘못 말한다.
    ◎ 결정하는 쪽만 있고 반대쪽은 존재가 없다.
    ◎ 에너지를 주는 마이너스 방향만 존재한다.


    ‘비가 오면 땅이 굳는다. 땅이 굳었으므로 비가 왔다.’ 이건 거의 맞다. 땅이 굳었다면 보나마나 비가 온 것이다. 그런데 절대로 그런가? 그건 아니다. 그렇지 않을수도 있다. 일상적으로 할 수 있는 말이나 논리적으로는 아니다.


    법정에서 이런 식의 정황증거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심증은 가나 물증은 아니다. 비가 오지 않아도 물을 뿌리면 땅이 굳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의 생각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게임의 아바타다.


    컴퓨터 게임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생각도 하고 판단도 한다. 그러나 틀렸다. 내가 부산지하철 남포동 역사를 지었지만 어디 가서 내가 부산 지하철을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일당받고 돌 몇 개 날라준 거다.


    ‘물을 뿌린 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비가 온 거다.’ 대개 궤변은 이런 식으로 시작한다. 언어의 의미를 슬쩍 바꾸는 거다. 불가지론은 극복되어야 한다. 알 수 없는게 아니고 실은 알아도 표현할 언어가 없는 거다.


    왜? 구조론이 없으니까. 모든 단어에는 포지션이 있다. 포지션을 바꾸면 속임수다. 이중기준의 오류이기 때문이다. 일상의 대화에서는 신의성실의 원칙에 따라 설사 틀리게 말을 해도 맞게 알아듣는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


    그러나 논쟁은 다르다. 찰떡같이 말해야 한다. 언어가 바르지 않으면 소통이 실패한다. 그러므로 오류는 걸러진다. 언어는 문장 안에서 포지션을 가지므로 절대로 속일 수 없다. 신의성실의 원칙을 악용하면 안 된다.


    찰떡같이 말하지 못하겠거든 구조론을 익혀라.


     2아누_.JPG

 

    시인은 말한다. 석공이 돌 속에서 인물을 끌어냈다고. 그러나 돌 속에는 인물이 없다.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일 뿐 그럴 리가 없잖아. 당신이 이름을 불러주기 전 까지는 그저 돌일 뿐이다. 석굴암에 본존불이 없다. 당신이 명명하기 전까지는. 누군가와 상호작용하기 전까지는. 사건이 유발되기 전까지는. 당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 당신을 알아보기 전까지는. 우주 안의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의 큰 덩어리만 존재하고 나머지는 없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 까지는. 존재는 사건이다.

 

Ol2d.jpg    

  

    그리기 전에는 없다. 아무 것도 없다. 없는 것은 없다고 해야 한다. 어린이가 아무렇게나 선을 그었는데 우연히 사람모습이 나타났다고 해서 사람이 그려진 것은 아니다. 누가 알아보지 전 까지는.  O <- 이건 O이 아니다. 0 <- 이건 0이다. 그 분명한 차이를 알아챌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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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바둑판과 같다. 우주 안의 모든 것은 연결되어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바둑판만 있고 나머지는 없다. 포석도 없고 행마도 없고 끝내기도 없다. 왜? 아무도 바둑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둑판에 바둑알이 올려져 있다고 해서 포석이 있고 행마가 있는 것은 아니다. 쓰레기장에 버려진 바둑판 위에 우연히 바람에 날아온 바둑돌이 하나 올라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존재가 아니다. 쓰레기다. 쓰레기는 그 쓰레기더미 전체로 존재할 뿐이며 거기에 바둑이라는 개별자는 없다. 존재는 그대가 바둑을 두는 순간에 문득 일어난다.

 

     당신이 태어나기 전에도 당신은 있었다. 당신을 이루는 70퍼센트의 물과 나머지 30퍼센트를 이루는 단백질과 회분을 구성하는 원소들은 있었다. 그러나 이는 존재를 사물로 보는 관점이고 당신은 바둑을 두는 그 순간에 일어났다. 당신은 사건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태어나기 전에는 당신이 없었다. 파도가 친다. 파도가 친다고 해서 파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바다가 있기 때문이다. 바다를 거론하는 순간 파도는 바다 속으로 사라진다. 전체를 거론하는 순간 부분은 전체 속으로 사라진다. 




    ###

 

   

345678.jpg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꽃이 아닙니다. 이름을 불러주어야 비로소 꽃입니다.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저 푸른 초원의 일부였습니다. 남산 위의 돌은 돌이 아니고 그냥 남산의 일부입니다. 누군가가 그 돌을 손으로 쥐거나, 발로 차거나, 어떻게든 대응해야 비로소 돌인 것입니다. 비로소 존재의 지위를 얻는 것입니다. 존재는 작용반작용의 구조 안에서 사건으로 존재하며 사건이 유발하지 않으면 그것은 없는 것입니다. 남산에 돌이 있다? 천만에! 남산은 있고 돌은 없습니다. 누가 그 돌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까지는. 당신도 있고 당신의 팔다리도 있고 당신의 그림자도 있고 그래서 당신이 세명인건 아닙니다. 당신은 한 명이고 당신의 팔다리나 그림자는 없습니다. 이름붙여주기 전까지는. 당신의 팔에다 이름을 부여하면 당신은 일인이역의 복화술사인 것입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9]무득

2013.05.30 (09:49:57)

이름을 부르기 전에는 그냥 전체 속의 한 부분이었으나

 

이름을 부르면 비로소 비로 객체로 독립하는 것이네요.

 

이름을 부르는 사건이 사라지면 다시 전체로 돌아가고....

 

이렇게 무한 반복되는 것인가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3.05.30 (10:31:03)

존재라는 단어의 뜻을

고무줄로 쓰기 때문에 일어나는 오류인데

 

존재라는 것은 그 존재자를 상대하는 관측자의 존재를 전제로 합니다.

숨은 전제가 있다는 거지요.

 

여기서 완전성의 문제가 제기되며

완전한 존재를 존재로 놓고 불완전한 존재는 완전한 존재에 포함시켜 소거합니다.

 

홍길동이 왕년에

신출귀몰 홍길동과 홍판서의 서자 홍길동과 나 홍길동으로 합쳐서

 

세명의 홍길동이 존재한다다며

택도 없는 분신술을 쓰다가 걸려서 작살난 예가 있잖습니까?

 

이름을 부른다는건 표현이고

하나의 독립적 사건이 하나의 존재입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지금의 나를 구성했던

산소, 수소, 기타 떨거지 원소는 나가 아닙니다.

 

무한반복이라는 표현은 별로네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3.05.30 (10:37:03)

이누이트의 언어에는

수를 나타내는 단어가 하나 둘 많다 셋 뿐입니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

많다 더하기 많다는 매우많다

 

이게 이누이트 수학의 전부지요.

 

어느 이누이트 현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에 양을 계량한다든가 분량을 따진다거나 하는건 없어. 다 아는 척 하는 거지."

 

백인이 와서 말해줍니다.

"숫자를 쓰면 정확하게 계량이 됩니다만."

 

이누이트 현자가 반박하죠.

"그런거 없이도 우리는 수 천년간 잘 먹고 잘 살았어."

 

백인이 반박합니다.

"근데 모피거래를 할 때는 왜 매번 백인이 속임수를 썼다며 항의하는 거죠?"

 

이누이트는 쌓기법을 쓰는데 한쪽에는 돈을 쌓고 맞은편에는 모피를 쌓습니다.

돈 한장을 쌓을때마다 모피 한 장을 쌓지요.

 

그런데 다 쌓아놓고는 의심을 합니다.

왜 쌓은 더미를 꽉 졸라맸냐고 따지는 거죠.

1천장의 모피를 다시 쌓자고 할 수도 없고.

 

서로 못 믿는 거래.

백인은 간단히 해결합니다.

 

"내가 속임수를 쓴게 맞습니다. 달러 많다많다매우많다장을 더 주겠습니다."

이누이트들은 원래 거래를 할때마다 한번 씩 뒹구는게 정상입니다.

 

이누이트는 만족하고 돌아가지만

왠지 속았다는 느낌.

 

"세상에 정확한 계량이라는건 없어. 다들 그렇게 적당히 사는 거지. "

[레벨:30]스마일

2013.05.30 (15:16:20)

강월도 영월의 한반도 지형

 

한반도 모양 섬.jpg

 

위의 한반도 모양의 지형은

지구에서 한반도가 자리 잡았을 때 함께 형성되었는지도 모른다.

고려시대에

조선시대에

국토를 개발하는 시대에도

저 모양의 지형은 그대로 있었지만

한반도라는 지형을

지리부도로 알려지기 전까지는

저 한반도 지형을 눈앞에서 보고

한반도 인지 몰랐을 것이다.

 

이제는 인공위성으로 한반도를 내려다보고

성급한 엄마들은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한반도지도를 방벽에 붙여놓기 때문에

어린아이들은 설명하지 않아도

한반도 지형인줄 알겠다.

 

첨부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3.05.30 (15:42:42)

[레벨:11]큰바위

2013.05.30 (17:25:43)

첫단추가 잘못되면 당연히 마지막을 볼 것도 없습니다. 

존재가 우선이지, 사유가 우선일 수는 없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은 전제가 잘못된 거죠. 


세상이 반응한다고 그게 대세고 진짜가 아니라, 

반응하기 전에 일어난 사건이 먼저겠지요. 


사건(존재)도 없는데 뭔 반응......


헛깨비를 보고 진짜라고 바득바득 우기는 것이 현 세태입니다. 

글에서 언급하신 일베들의 수작들이나,

원본이 아닌 복사본을 냅다 퍼트리며 물량 공세에 만족하는 작태들이나,

매 한가지라는 생각을 합니다. 


숫자는 실재지만, 

그걸 쳐주려면 가짜가 아닌 진짜, 

짝퉁이 아니라 진짜의 숫자가 많을 때만 쳐주는 겁니다. 


바둑은 판이 없으면 두지 못하는데, 

바둑을 두는 기사나,

바둑알이나,

바둑 판이나,

행마나, 

이를 구경하는 훈수꾼이 함께 한자리에 모여 감응할 때 가장 멋진 바둑이 두어지는 거 같습니다. 


깨달음은 한 순간에 확~ 땡겨지는 건데, 

그 우주적인 순간을 늘 놓치곤 하네요. 


이 세상은 늘 경이롭고,

늘 새롭고,

늘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는데, 

소위 시쳇말로 복이 널려 있는데, 

그릇이 작으니 

넘쳐나는 복도 제대로 담지 못하는 군요. 


통재라~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3.05.30 (18:48:10)

금융시장의 파생상품과 같은데

두 종류의 반응이 있습니다. 

 

파생상품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사기치는 파와

파생상품이 때려죽일 마녀라고 거품무는 파입니다.

 

파생상품은 실재하는 존재에 빌붙은 반존재들입니다.

이런 반존재의 불완전한 존재를 인정해야 합니다.

 

반존재들은 대가리를 치면 문득 사라집니다.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메커니즘에 가두어 존재화 하면 됩니다.

사회를 조직하기에 따라서 그것을 존재로 연출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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