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movie.naver.com/movie/bi/mi/reviewread.nhn?nid=2841667&code=87309
'라이프 오브 파이'에 대한 잘 쓴 영화평이라고 생각되는데
'의심하는게 믿는 것이다' 하는 결론을 내리고 있군요.
앞뒤가 안 맞는 문장 같은데, 믿는 것은 무엇이고 의심하는 것은 무엇이오?
교란 - 성 토마스가 예수를 의심하고 있소. 사실은 여우가 둔갑한 가짜 예수인데 토마스가 속은듯 ㅋㅋ.
완벽하게 절망할 때라야 진정한 희망이 있소.
먹물 좀 든 바보들은 제가 이런 이야기 하면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은 절망 끝의 희망이 아니라, 절망 끝의 동병상련을 바랍니다.
제가 김기덕 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절망 끝의 희망을 보기 때문인데 그 사람들은
절망 끝의 절망을 보기 때문에 김기덕 영화를 좋아합니다. (진짜 좋아하는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들은 피에타가 희망의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묻노니 희망은 어디에 있소?(예전에 했던 질문 재탕)
묻노니 믿음은 어디에 있소?
완벽한 의심 끝에 진정한 믿음이 있소.
'이게 아니면 저거다'가 적용되기 때문이오.
호랑이 똥을 몸에 바르고 있으면 호랑이가 물지 않소.
작가는 동물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다고 봐야.
힌트 - 작가는 파이의 소숫점 아래 계속되는 숫자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모호함에 희망을 두는듯 한데, 즉 정확하지 않으면서도
그 정확하지 않은 태도를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고집스러움에 점수를 주는 것.
그러나 파이의 정확한 값은 정확하게 도출됩니다. 똑 떨어진다는 거죠.
그것은 파이입니다.
어떤 사람의 오기
그렇소.
믿음은 의심보다 높은 레벨에 있소.
부모가 자식을 믿는다면
믿음은 핏줄을 믿는거고
의심은 행동을 의심하는 거고.
믿음과 의심은 결코 같은 레벨에 있지 않소.
조사원들은 소년의 말을 안 믿는다기 보다는 믿을 수 있게 얘길하라는 거지요.
보고서에 모험담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니 자신들이 다른이에게 얘기했을 때 믿어주는 얘기
즉 예수가 옆구리와 손을 보여주었듯이 말입니다.
조사원들도 예수의 제자들처럼 손을 넣어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자신이 예상하지 못한 얘길 들을때는 의심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듣고 싶은 또는 이미 경험했거나 충분히 보아온 걸 얘길하면
그 의심은 사라집니다.
의심이 사라지면 과학을 중시하던 사람도 맹목합니다.
결국 같은 편이냐 아니냐?
같은 편이 하는 말이라면 똥으로 메주를 쒔다고 해도 믿지 않을까라는
'결국 같은 편이냐 아니냐' 이게 중요하지요.
답은 언제나 상부구조에 있소.
좋은 말씀이오.
멈칫하다 좌로 가고 우로 가고 뒤로 가고 돌아가고 인류는 결국 진보한다는 것이 절망속의 희망이요,
불확실한 상황속에서도 인류각 결국 진보한다는 진리에 나를 태운 것이 의심속의 믿음이다.
희망은 진보의 방향을 이신전심으로 거대한 팀을 이루어 다함께 보고 묵묵히 나아감이요,
그러한 희망을 이룰 수 있다는 공유된 마음이 믿음이다.
그렇소.
개인의 희망을 완벽히 버릴 때
팀의 희망이 얻어지오.
의심은 개인적인 것이고 믿음은 공적인 영역이오.
무한한 의심의 시험을 이겨내야 만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무한한 절망의 시험을 이겨내야 만이 진정한 희망입니다.
어쩌면 무한한 의심은 믿음의 다른 말이고
무한한 절망은 희망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파이라는 숫자는 소수점 이하 무한히 계속되지만
완전하고 유일한 숫자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마찬가지로
소년 파이가 지독한 절망 끝에 살아남아 멕시코에 구출되었다는 것
그 사실 자체가 희망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증거입니다.
소년 파이가 극한 상황에서도 환상과 실제를 구분하고
자신이 경험한 것을 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 바로
믿음의 근거입니다.
하부구조에서 상부구조로 올라서지 않으면 안 되오.
사적인 희망을 완벽히 표백했을때라야 진정한 희망은 얻어지오.
개인의 성공에 대한 목표를 완벽히 버렸을 때 인류의 아이큐를 올리겠다는 희망은 얻어지오.
눈꼽만큼의 희망이라도 남아있으면 진정한 희망은 얻어지지 않소.
이게 아니면 저것이오.
하부구조에 답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마지막 미련을 버리고
상부구조로 올라설 수 있소.
살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는 순간 인간은 파괴되고 마는 것이오.
자신이 천년 전에 이미 죽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도장 받고 와야 인간이 회복되오.
토마스의 의심은 바보같은 그림이오.
그 자리에서 예수의 목을 쳐버려야 진짜 믿음은 시작되오.
인간이 개나 돼지나 개미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는
절대적인 확신을 갖지 않으면 결코 인간다와질 수 없소.
믿음은 어떤 사실, 사건, 팩트에 대한 것이 아니오. 인간의 존엄에 대한 것이오.
희망은 인간의 발전, 진보, 번영에 대한 것이 아니오. 신의 고독에 대한 것이오.
의심해서 믿게되는 것이 아니라 믿으니 의심하는 것이오
진리를 믿고 신을 믿고
자연의 완전성을 믿으니
누군가의 헛소리를 들으면
아닌걸 보면
구린내를 맡으면
의심하는 것이오
완벽한 절망 끝에
참된 희망을 보게 된다는 것은 나의 입장이고
그런 것에 동의하지 않고
절망에 절망이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먹물들은
내가 물어보지 않은 '자기소개'를 한다고 나는 봅니다.
누가 자기 소개 하랬냐고요?
대화는 사가 아닌 공의 영역이오.
그 사람은 내가 말하는 참된 희망을
자기 개인의 사사로운 희망으로 알아들은 것이오.
개인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소?
인간은 아무리 발악해봤자 100년을 넘겨 살지 못하오.
임윤택이 33살에 요절한들 절망이겠소?
이 좋같은 세상에 살아봤자 치욕을 더할 뿐
살아있는게 어찌 희망이 될 수 있겠소?
희망은 사적인 존재에서 공적인 존재로 바뀌는 것이오.
윤봉길 의사는 왜 폭탄을 던졌을까요?
살아서 왜구를 물리치고 공적을 인정받아
자주정부의 장관을 해먹을라고?
훈장을 타서 가문을 빛낼라고?
그런 희망 때문에?
그건 아니오.
폭탄을 던지면 반드시 죽으니까.
조선이 언젠가 독립될 것을 믿어서?
그것도 아니오.
조선이 영원히 독립하지 못한다 해도 지사는 폭탄을 던져야 하오.
개인의 성공에 대한 희망은 버린지 오래
조선의 독립에 대한 희망도 버린지 오래
완벽한 절망의 끝에
아 인간은 이 상황에서 폭탄을 던지는 존재로구나
하고 인간을 재발견하게 되오.
그 순간 빙그레 웃는 것이 희망이오.
파이를 벗어나 어느순간 반올림 해버리면 믿음.
파이는 절대 반올림이 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반올림 되는 상황이 있음.
의심 속에서...어느 순간 반올림 되어 버리는 순간이 있음.
즉 정확하지 않으면서도
그 정확하지 않은 태도를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고집스러움에 점수를 주는 것
"닛빠나는 hard working 이다"
점수?
"아빠","엄마"가 우리랑 똑같은 발음 인도
거기에 만족하지 말고 조금 더 진도를 나가봅시다.
관객의 위치에 머물러 있지 말고 스스로 연주자가 되려면 한 걸음 더 나가야 합니다.
자기를 힐링할 생각만 말고 남을 힐링해 주려면 그것으로는 부족하오.
위빠사나에서는 인간만이 자기가 한 행위를 돌아볼수 있는
기억이나 자각(사띠)을 가진 존재라고 합니다.
대상(호랑이)와 조금은 떨어져 있어야 관찰할 수 있다.
몸이(대상) 원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채워주어야 마음이 편해지죠.
안 그러면 난리가 납니다. 호랑이가 아이러니 하게도 물고기를 먹기위해
보트를 버리고 주인공을 향해 다가옵니다. 이때 주인공은 위협을 느끼고
위치가 역전되죠. 주인공은 보트로 호랑이는 바다위로..
다시 주인공은 호랑이를 보트로 올려주고 자신은 보트밖 간이구조물에 가고
결국은 호랑이을 길들입니다. 먹이도 낚시로 잡아주고 극한의 상황이 되니
말입니다. 우리는 결국 죽게 될것임에 동의합니다.(이때 무아를 체험하니)
무아와 무아가 만나니 상호소통이 안될리가 없지요.
상호소통이 되고 공동체에서 같이 살려면 필수조건이 "무아" 여야 용이합니다.
매일 자신을 살피는 수행하는 마음가짐이라야 된다.
그래야 270일간의 표류에도 마침내는 멕시코에 도달할 수가 있고
무인도에서 살아보는 체험도 가능하다.
재미있는 표현이지만
솔직히 바보같은 소리입니다.
무인도에 가서 뭐하고 멕시코에 가서 뭐합니까?
나를 버리고 어쩌고 하는 것은 까놓고 말하자면 수준이하의 낮은 단계입니다.
물론 그 수준에도 못 미치는 사람에게는 효과가 있겠지만.
그걸로는 친구를 얻을 수 없습니다.
아마 자신과 비슷한 취향의 사람들은 모이겠지만.
비슷한 사람끼리 모여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을거.
나를 버리는 것은 여전히 나의 사적인 영역에 잡혀 있는 거.
사를 버리고 공의 세계로 올라서십시오.
알고도 속아주는 것이 믿음.
모르면서 믿는 것은 의심?
이 작품의 작가는
종교와 과학, 믿음과 의심,
호랑이와 살인극 사이에서 파이처럼 답이 없는 것.
영원히 끝나지 않고 평행선을 그리는 것,
관객에게 결론을 내리게 하는 것을
답으로 제시했지만
구조론은 분명한 답이 있소.
선과 악은 평등하지 않소.
절대선은 있어도 절대악은 없소.
악은 선에 기생하는 미약한 존재, 상대적인 존재이오.
악은 언제나 전제가 있고 조건이 붙어 있소.
믿음은 강자의 포지션이고 의심은 약자의 포지션이오.
초등학생이 등교에 늦었소.
왜 늦었느냐고 묻는데 학생이 오다가 악어에게 물렸다고 말하면
그 말을 거짓말로 단정하겠소?(비슷한 내용의 동화가 있소)
그 말을 의심하면 학생은 입을 닫아버리오.
어머니는 자식을 믿을 수 밖에 없소.
자식을 의심하는 것은 자기가 부모임을 부정하는 짓이기 때문이오.
중요한건 의심이 약자의 포지션이고 믿음이 강자의 포지션임을 알아채는 것이오.
공격수는 한 군데만 뚫으면 되지만
수비수는 한 곳만 뚫려도 패배하게 되오.
공격수의 포지션을 차지하시오.
믿음은 공격수의 포지션이오.
상대방의 말 중에서 하나의 진실만 끌어내면 되오.
의심은 수비수의 포지션이오.
상대방의 말 중에서 하나의 거짓도 없어야 하오.
공격수의 포지션을 차지하시오.
그래야 게임의 지배자가 될 수 있소.
의심되는 사람과는 아예 만나지 않는게 맞고
이미 만났다면 믿는게 맞소.
의심하는 순간 상대방은 침묵할게 뻔하오.
아니면 그대를 속이려 들 것이요.
직원을 뽑는데
자기소개서를 내라고 하면
그럴듯하게 꾸며서 쓰게 되는데
의심할수록 상대의 거짓말만 늘어나게 되어 있소.
보스는 직원을 믿거나 아니면 해고하거나 뿐이오.
성과 속
주와 종
미와 추
선과 악
참과 거짓은 결코 평등하지 않소.
성, 주, 미, 선, 진은 한 레벨 위에 있고
속, 종, 추, 악, 위는 한 레벨 아래에 있으며
성, 주, 미, 선, 진은 독립적, 절대적 존재이고
속, 종, 추, 악, 위는 의존적 상대적 존재이오.
성, 주, 미, 선, 진의 포지션을 차지하시오.
의심의 포지션이 아니라 믿음의 포지션을 차지하시오.
그것이 정답이오.
아래는 펌
미국 경제전문지 비즈니스 인사이더(BI)는 15일 ‘전혀 다듬어지지 않은 한 자기소개서가 월가 금융인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는 제목으로 한 학생의 자기소개서가 첨부된 이메일을 소개했다.
이 학생은 다른 지원자들과 달리 자신이 원하는 것부터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했다. 그는 첫 번째 문단에서 간단한 소개와 인사를 마친 뒤 이렇게 얘기했다. “내가 당신 회사에서 인턴을 하기에 너무 평범한 것 알고 있다. 하지만 난 당신이 의외의 선택을 하리라 믿는다”며 “난 당신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커피를 타오라 시키든, 구두를 닦으라고 하든, 빨래를 시키든 상관없다. 솔직히 말해 프로들과 같은 공간에서 한번 지내보고 싶다”고 밝혔다.
그는 세 번째 문단에서 자신의 이력을 소개할 때도 군더더기가 없었다. 그는 “자격을 부풀리며 ‘내가 이 회사에 얼마나 적합한 인재인지’를 설명하는 헛소리로 시간 낭비하지 않겠다”며 대담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나는 엄청난 기술이 있지도 천재적인 능력이 있지도 않다. 하지만 나는 학부 성적이 만점에 가깝다. 이런 성실함으로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할 수 있다. 메릴린치 자산관리에서 인턴을 한 경험이 있다”고 밝혔다.
이 이메일을 받아본 금융 전문가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모건 스탠리 인사 담당자는 “일류 자기소개서”라고 평가했다. 또 다른 금융회사 관계자도 “지금까지 내가 받아본 자기소개서 중 최고다. 특히 두 번째, 세 번째 문단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한 인사 담당자는 “맙소사. 이 이메일이 벌써 20군데나 돌았다고? 당장 회의해서 (지원자에게) 전화를 걸지 결정해야겠네”라고 말했다고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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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이냐 믿음이냐는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이오.
자신을 약자 포지션에 두느냐 강자 포지션에 두느냐.
자신을 상대의 엄마로 보느냐 엄마를 부인하느냐.
자신을 보스로 보느냐 입사지원자로 보느냐.
'의심'은 컨텐츠고 안을 바라보는 것이고,
'믿음'은 형식이고 밖을 따라 가는것, 이 아닐까요.
'의심'과 '믿음' 이라는 단어의 뜻에 주목하지말고, (안쪽을 보지말고)
'의심'과 '믿음'의 포지션을 봐야될듯.
첫번째 그림에서 예수 얼굴 쳐다보는 아저씨들의 상대적인 시선, 안으로 향한 시선.
반면에, 약먹은듯한 예수의 시선,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는 시선, 절대적인 시선.